일제는 김일성이 지휘하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을 주축으로 하는 항일유격대가 다시 동만에서 활동을 시작한 지 불과 수개월 만인 1939년 10월부터 이른바 ‘동남부치안숙정공작(東南部治安肅正工作)’을 개시하여 1941년 3월에 끝내게 된다. 관동군 제2수비대(길림 소재) 사령관 노조에[野副昌德] 소장(少將)을 총대장으로 하여 구성된 이 토벌대는 간도·통화·길림의 세 성에 대하여 대토벌을 감행해왔다. 이들은 이전에 있었던 토벌대와는 전혀 수준을 달리하는 강력한 토벌작전을 구사했다.
대강 그 토벌작전의 내용을 보면 “토벌작전은 겨울철 강설기를 이용하고 비리 비(匪)부대를 정하며, 눈 위의 적의 발자국(위장 발자국은 간파)을 더듬어가고, 험준한 산속에서 밥 짓는 연기를 발견하면 그것을 뒤져내서 박멸하며 적의 그림자를 발견하면 일거에 섬멸하도록 하며, 나머지 잔당은 급히 추격 또 추격하여 적에게 일각의 여유도 주지 않음으로써 지쳐버리게 하며(소위 진드기 전법) 굶주림과 추위 때문에 투항 또는 귀순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는 것이다. 토벌대는 정치적 회유와 사상적인 와해 수단도 동시에 활용하였다. 예를 들어 동북항일연군의 주요 지도자 누구누구가 체포되었다든지 동북항일연군의 주력부대가 이미 와해되었다든지 하는 헛소문을 날조하는 한편 “일본은 군사력이 비할 데 없이 강대하다”고 선전하여 항일유격대의 간부와 전사들이 비관하고 실망하도록 기도하엿다. 또한 토벌대는 항일유격대의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간청서’를 쓰도록 강요하여 유격대원들의 전투력을 약화시키고 향수에 젖게 하였다. 심지어 토벌대는 여자의 나체 사진이나 속옷을 나무에 걸어놓거나 술과 안주를 나무 밑에 놓아두는 수법으로 항일유격대를 유인하기도 하였다.
주요 지도자들에게는 막대한 현상금이 나붙었다. 양정우·김일성·최현·조아범·진한장에게는 1만원, 박득범·방진성은 5천원, 위증민·전광에게는 3천원의 현상금이 각각 내걸렸다.
약 7만 5천명의 대병력을 동원하여 수행된 이 작전은 가히 동남만 일대에 항전하고 있던 제1로군을 궤멸상태로 몰아넣었다. 일제의 토벌대는 항일유격대와 일반 군중과의 연계를 완전히 단절함으로써 유격대를 극도의 곤란 속에 빠뜨렸다. 한 끼의 식사를 하려면 목숨을 내놓는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영하 40여도를 오르내리는 엄동설한에서 동상자와 동사자가 속출하였으며 어떤 유격대원은 걷고 또 걷다 꽁꽁 얼어붙어 다시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밤에 나무에 기대어 잠자던 유격대원들이 추위에 그대로 목숨을 잃는 일이 흔했다. 이러한 극도의 위기 속에서 제1로군의 병력은 급속히 감소되었다. 1939년 말에서 1940년 봄 사이에 제1방면군은 이미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제1로군장 양정우가 1940년 2월 몽강현 삼도위자에서 전사하였으며, 제1방면군장 조아범은 1940년 4월 변절자들에게 암살당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김일성이 지휘하는 제2방면군 주력부대는 1940년 3월 25일 화룡현과 안도현의 접경지대인 안도현 대마록구 홍기하에서 김일성 부대만을 집요하게 추격하던 만주의 전투경찰대장 마에다[前田] 경시정(警視正) 부대를 전멸시켜 토벌대를 긴장시켰다. 일제 관헌자료에서도 마에다 부대의 전멸을 인정하면서 전사자 58명, 부상자 27명, 행방불명자 9명이라는 토벌대의 인명피해상황을 적고 있다. 아마 이 홍기하 전투에서의 승리야말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이 간고한 시기에 올린 귀중한 승리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토벌대 사령부가 연길에 차려진 1940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추·동계 토벌작전에서는 당연히 그 초점이 당시 최대의 공비단(共匪團)으로 유명한 김일성 부대에로 쏠렸다. 1940년 10월 12일 일제의 토벌대가 정한 항일유격대에 대한 다음의 은어표에서 우리는 당시 토벌데의 제1목표가 김일성 부대에 대한 소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토벌기간 중에 또 다시 생존해 있던 수많은 동북항일연군 지도자들이 전사하였다. 제3방면군 사령관 진한장이 1940년 12월 그의 고향인 영안현 경박호 부근에서 전사했다. 제1로군 경위여단 정치위원 한인화는 1941년 3월 경박호 부근에서 전사했으며, 제3방면군 제15사단장 이용운은 1940년 10월 왕청현 천교령 산속에서 희생되었다. 제1로군 정치위원 위증민은 1941년 3월 8일 화전현 쟈피거우에서 병사했다. 또한 이 대토벌 기간 중 일부 동북항일연군 지도자들이 고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일제에 투항하였다. 제1로군 경위여단장 방진성이 체포되어 변절한 후 여단장을 맡은 전 제3방면군 참모장 박득범이 1940년 가을에 체포되어 역시 변절하였다. 일찍이 조국광복회 발기인이었으며, 제1로군 총무처장을 맡고 있으면서 지방공작에 나섰던 전광도 1941년 1월 30일 무송현에서 체포되어 변절하였다. 한마디로 일제가 현상금을 내걸었던 제1로군 지도자 9명 중 전사하거나 투항하지 않고 생존한 인물은 김일성과 최현 두 명뿐일 정도로 제1로군은 이 토벌로 현저하게 타격을 받았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김일성과 제2방면군은 토벌대의 추·동계 작전이 시작되는 1940년 9월부터 훨씬 더 간고한 시기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때쯤에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의 다른 부대들과의 연락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우리는 돈화현 소할바령에서 1940년 8월 11일과 12일 이틀간 김일성의 주재로 열린 이른바 ‘소할바령회의’의 토의내용을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 북한 문헌들은 이 회의에서 ‘조국광복의 대사변을 준비있게 맞이할 데 대하여’라는 역사적인 연설을 했다고 한다. 이 보고에서 김일성은 앞으로의 정세를 “파쇼국가들에 의한 제2차 세계대전의 확대는 파쇼국가들의 멸망을 앞당길 것이므로 조선인민의 민족해방운동의 앞길에는 유리한 정세가 조성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조국해방의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할 수 있는 준비를 튼튼히 갖추어나가기 위한 새로운 투쟁방침”으로 ① 혁명역량을 보존·축적하며, 항일유격대를 유능한 정치·군사 간부로 육성할 것, ② 이를 위해 대부대작전을 소부대작전으로 전환시킬 것을 제기했다고 한다. 이 보고서 내용은 예의 낙관적인 전망과 희망에 찬 결의로 가득 차 있지만 당시의 이러한 결정은 만주의 엄혹한 상황에서 항일유격대가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이제 ‘소부대활동’ 시기가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이 소할바령회의는 1939년 10월과 1940년 3월에 있었던 두 차례의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군정간부회의에서 이미 결정된 몇 가지 원칙들을 김일성이 적의 대토벌공세를 맞이하여 제2방면군에 적용하기 위해 소집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일제의 대토벌공세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이 막대한 손실을 보고 있던 1939년 10월 화전현 두도류하에서는 당면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양정우의 주재로 남만성위와 제1로군의 주요영도간부회의가 열렸다. 회의에서는 적의 공세로부터 실력을 보전하고, 큰 손실을 피하기 위해 제1로군을 장차 소부대로 편성하여 분산 활동할 것이 결정되었다. 이어서 1940년 3월 13일부터 15일까지 위증민의 주재로 화전현 두도류하에서 참석 가능했던 소수의 지도자들(전광·박득범·한인화‥김재범·황해봉·서철 등)이 모여서 그해 1월 하바로브스크에서 열렸던 중공당 북만성위와 길동성위의 지도자들의 연석회의(제1차 하바로브스크회의)의 결정사항(동북항일유격전쟁의 총화와 실력보존을 위한 항일연군의 편제 개편)이 전달되고 당의 공작과 제1로군의 앞으로의 전략이 논의되었다. 따라서 이 회의에서는 적당한 때에 각 부대의 소련 영내로의 이동과 지방공작에 대한 강조와 함께 기존의 소부대작전 원칙이 재확인되엇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항일연군 제1로군의 당면투쟁형태를 ‘대부대작전에서 소부대작전으로 전환할 것’이 결정된 뒤 이 결정에 입각해서 제2방면군의 새로운 투쟁방향을 구체적으로 결정하기 위해 소집된 것이 소할바령회의였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북한의 문헌들은 정확히 밝히고 있지 않지만 소할바령회의에서는 적당한 시기에 항일유격대가 소만국경의 안전지대로 일단 피신하는 문제도 거론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문제는 독소전쟁에 대비해서 소만국경에서의 긴장이 고조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소련이 적극적으로 제기했을 것이다. 사실 소련은 1940년데 들어오면서 독일·이탈리아·일본 3국동맹 관계가 밀접해지고 관동군의 병력 증강 움직임이 더욱 활발해지는 것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오늘날 북한의 문헌에서도 “코민테른은 소만국경 일대에서 긴장상태를 완화하며, 일제에게 대소침략전쟁 도발의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하여 항일유격대(북한의 용어로는 조선인민혁명군)가 당분간 대부대활동을 중지할 것을 제기해왔다”는 기록을 함으로써 당시 소련과 항일유격대와의 관계를 간접적으로 시사해주고 있다.
소할바령회의가 끝난 후 김일성이 이끄는 제2방면군은 적군의 대토벌을 피해 백두산 밀영으로 이동하여 한동안 휴식, 정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기 때문에 1940년 7월 26일 재훈춘 일본영사는 당시 김일성의 주력부대 340명이 안도·화룡·연길 등 각 현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하고 있음에도 이해 9월부터 12월까지 추계토벌작전을 벌이던 노조에 토벌대는 그들이 주요목표로 삼았던 김일성 부대를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다.
1940년 하반기를 주로 백두산 밀영에서 보낸 제2방면군 주력부대는 그해 말 백두산 밀영을 떠나 동녕현 일대로 이동해갔다. 그리고 동녕현 일대에서 제5군과 연계를 가지며 활동하다 1941년 봄 동북항일연군 총병력을 10개 지대로 나누기로 한 제1차 하바로브스크회의의 결정에 따라 1백여명의 병력으로 동북항일연군 제1지대를 구성한 후 소만국경의 소련영내로 이동하였다. 제3방면군 중 생존자가 가장 많았던 최현이 이끄는 제13여단은 이에 앞서 1940년 가을에 소련영내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소만국경으로의 이동은 소부대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일부 부대는 이동하지 못하고 일제의 대토벌을 피해 계속해서 깊은 산림지대의 밀영 속에 은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김일성 부대는 소만국경의 소련영내로 이동해간 뒤 곧 대오를 재정비해서 정찰·기습활동을 벌이기 위해 다시 만주로 들어갔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사실은 일제가 체포한 김일성 부대의 대원으로부터 받아낸 “김일성이 부하 28명을 이끌고 1941년 4월 초순 훈춘현 신둔자 부근을 통해서 만주로 들어왔다”는 자백 내용에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임춘추의 회상기에도 “1941년 5월 김일성의 영솔하에 아군부대 2백여명은 10여개의 소부대로 나뉘어 왕청현 쟈피거우를 임시근거지로 삼고 왕청현·연길현·동녕현·화룡현·안도현·화전현과 국내에서 활동하였다”는 말이 나온다.
1941년 이후 해방 때까지 김일성 부대의 대원들은 소조별로 임시근거지를 설치해놓고 소만국경을 넘나들며 만주와 조선에서 일본군의 작전이동 등 제반 군사부문에 대한 정찰활동을 수행하였다. 더불어 일부 정치공작소조들이 간도와 조선에 파견되어 대민지하공작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소부대활동은 비록 직접적인 전투를 수행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의 상황에서 볼 때 그 중요성은 매우 컸다. 따라서 항일유격대 소조들에 대한 일제의 토벌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항일유격대 소조들의 활동 역시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되었다. 특히 이들의 활동 중 ‘금성철벽’을 자랑한다는 일제의 조선국경 수비망을 뚫고 감행된 조선 국내공작은 그야말로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이루어진 고난에 찬 임무였다.
② 동북항일연군 교도여단과 항일유격대의 대일전(對日戰) 참전
일제의 대토벌과 일본·소련 간의 관계를 고려하여 1940년 가을부터 소·만국경으로 철수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3방면군은 제2로군 제5방면군의 일부 병력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 근처에 병영(‘남야영’ 혹은 B야영)을 설치하고 훈련과 만주지방으로의 소분대 파견에 주력하면서 지냈다. 그러다가 남야영은 제2로군 대부분과 제3로군 병력이 모여 만든 하바로브스크 근처의 북야영(‘B야영’)의 병력과 합쳐져서 1942년 7월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교도여단(敎導旅團)을 편성하였다.
이러한 동북항일연군 교도여단의 편성은 1941년 초 남만·북만·길동 성위의 책임자들이 모인 제2차 하바로브스크회의에서 소련으로 철수한 동북항일연군의 통일지휘를 실현하기 위하여 동북항일연군 총사령부를 구성하기로 한 결의에 의거한 것이었다. 즉, 이 결의에 입각해서 1942년 7월 남북야영의 항일연군이 합쳐서 동북항일연군 교도여단(일명 국제홍군 특별독립88여단)를 세운 것이다. 동북항일연군 교도여단은 약 1천여명으로 구성되었으며, 4개의 교도영과 1개의 통신용을 두었으며 두 개의 병영(북야영과 남야영)을 가졌다. 여단장에는 제2로군 사령관 출신의 주보중이 정치부장에는 제3로군 사령관 출신인 장수전(이조린)이 임명되었으며 참모장에는 제2로군 참모장 최용건이 임명되었다. 4개 영 중 제1로군 출신 지휘관들이 모인 제1영장에는 제1로군 제2방면군장 출신인 김일성이 임명되었고, 정치위원에는 안길이 임명되었다. 제2영장에는 중국인 왕효명이 임명되었으며, 정치위원에는 강건이 임명되었다. 제3영장에는 제9로군 제3사단장이었던 허형식(許亨植)이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하였고, 뒤에 중국인 왕명귀가 임명된다. 정치위원은 김책이었다. 제4영장에는 중국인 시세영이, 정치위원에는 계청이 각각 임명되었다.
이같이 동북항일연군 교도여단의 주요 간부들 중 반 정도가 김일성·최용건·강건 등의 조선인이었다. 이는 이 부대 구성원 중 상당수가 조선인 전사들이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바로 이곳 동북항일연군 교도여단에서 동만을 근거지로 활동했던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은 그 동안 북만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해오던 최용건·김책 등의 동지들과 해후하게 되엇다.
이상의 부대 편제를 갖춘 동북항일연군 교도여단에서는 소련군의 도움을 받아 군정학습을 실시하는 한편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1945년 8월 해방 직전까지 계속해서 만주와 조선 국경지대에 정찰·기습·공작을 위한 분대·소대 규모의 병력을 파견하였다. 이러한 소규모 부대의 파견과 활동은 극비사항이어서 교도여단의 주력부대와는 동떨어져서 전개되었다.이러한 활동은 두 개의 병영(남야영과 북야영)에서 주보중·장수전·김일성 등 3인에 의해서 직접 지도되었으며 때때로 교도여단내의 당조직에도 알리지 않은 채 이들 지도자의 단독책임 아래 이루어졌다. 대개 15~30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부대에게는 과거 연대장급 이상의 직책을 수행한 바 있는 강인한 간부들(북한 정부에서 국가부주석을 지낸 바 있는 김일도 여기에 포함된다)이 책임자로 함께 파견되었다.
여기서 앞으로의 논의 진전을 위해서 동북항일연군 교도여단에서의 김일성과 김책·최용건과의 관계를 알아보자. 당시 동북항일연군내에 조선인 지도자로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에서 조선인 최고 지도자였던 1912년생의 김일성 외에도 1900년생으로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참모장 출신의 최용건과 1903년생으로 중공당 북만성위 서기를 지낸 김책이 있었다. 물론 최현이나 안길 등도 그 실력을 무시할 수 없으나 그들은 기본적으로 김일성의 지휘체계내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면 이 세 명의 지도자 중에서 왜 김일성이 조선인 항일유격대를 대표하는 최고 지도자로 부각되었을까? 와다 하루키 도쿄대학교 명예교수는 이 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나름대로 추정하고 있다. 첫째, 북만에서 활동했던 최용건이나 김책보다 동만에서 활동하며 국내 진공도 했던 김일성이 국내에 훨씬 더 알려져 있었다. 둘째, 김일성은 자기 부하들을 희생시키지 않고 가장 많이 보전했으며 부하들이 믿고 따랐다. 당시 제1로군 쪽에는 안길·서철·최현·김일·유경수·박영순·최광·전창철·허봉학·김경석·최춘국·박성철·오백룡·백학림 등의 전우들이 살아 있었으며, 수적으로 다른 부대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압도적으로 많았다. 또 중국공산당과의 관계에서도 최용건이나 김책만큼 얽매이지 않았다. 이상 와다 교수의 분석은 꽤 핵심에 접근한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 덧붙이자면 우리는 1936년 2월 남호두회의 이후 김일성의 지휘하에 장백현에 진출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6사단이 조선해방을 위해 싸우는 부대였다는 사실을 상기하여야 한다. 즉 동북항일연군내에서 구체적인 간도의 조선민족 문제나 조선해방의 문제는 전적으로 제6사단(1938년 12월 이후는 제2방면군) 중심으로 움직였다는 사실이 항일유격대내에서 조선인 최고지도자를 선택하는 결정에 미친 영향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들 교도여단의 조선인 지도자들은 조선해방에 대비하여 1945년 7월 ‘조선공작단’을 설치하였으며 그 단장에 김일성을 추대하였다고 한다.
유럽전선에서 독일군이 패배한 지 석달 후인 1945년 8월 9일 소련은 소·만, 조·소 국경을 넘어서 대진격을 시작하였다. 1932년 항일유격대를 조직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시작한 지 15년만에 조선인 항일유격대원들은 드디어 조국해방을 목전에 둔 것이다. 예상과는 달리 소련군은 관동군을 파죽지세로 몰아붙이며 맹진격을 거듭하였다.
조선방면으로의 소련군의 공격은 8월 9일 오전 12시를 기해 소련군 항공편대의 옹기·나진에 대한 폭격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같은 날 장고봉 부근에 있던 소련군이 경흥을 수비하던 일본군을 격파하고 진공해왔다. 또한 개전 직후 훈춘현을 공격했던 소련군은 8월 13일부터 조·중국경을 넘어 경원방면으로 진격해 들어왔다. 이렇듯 파죽지세의 사기로 조선방면으로 진격해온 소련군은 8월 13일에 이르러서는 함경북도 도청 소재지인 청진을 점령하고 남하를 계속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북한의 문헌들은 이러한 소련군의 조선으로의 진공에 조선인민혁명군 병력이 연계하여 전투에 참가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습격 임무를 받은 조선인민혁명군 성원들은 8월 8일 밤 두만강 연안의 국경 마을인 토리와 훈춘현의 남별리, 동흥진을 비롯한 적군 요새구역의 여러 초소들에 대한 습격을 일제히 개시했다는 것이다. 임춘추의 회상기에는 “소련군 계획에 의하여 일본침략군을 분쇄하는 격렬한 전투에 참가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지금까지 이러한 북한 측의 주장은 거의 그들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치부되어왔다. 다만 항일유격대원들이 조선과 만주에서 수년간 정찰활동을 계속해왔기 때문에 일부 대원들이 대일전(對日戰)에 참전했을 가능성은 일부에서 인정되어왔다. 와다 교수의 경우 소련군 정찰부대에 복무했던 조선인 유격대원들(김창봉·석산·김병갑·오백룡·지병학·백학림)이 전투에 참가했다고 보고 있다.
만주와 조선의 지형과 적군의 군사배치에 대해 비교적 무지한 소련군으로서는 이 지역에서 지난 15년간 항일투쟁을 해온 항일유격대원들을 그들의 정찰요원으로 대일전에 참전시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에 속하는 일일 것이다. 훗날 6·25남북전쟁 때에 북한 인민군 제8사단장을 지냈고 1970년대에는 중앙인민위원회 국방부위원장을 역임했던 오백룡(吳白龍)은『항일 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에서 자신이 대일전에 참전하여 조국 땅을 밟는 순간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조국으로! 조국으로! 총을 틀어쥔 우리의 벅찬 가슴 속에는 환희와 열정이 끓어 번지었다. 8월 9일 오전 8시 우리는 항구도시인 웅기에 상륙하였다. 그처럼 그렷던 조국 땅 웅기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나는 그 포연·탄우 속에서도 무릎을 꿇고 한 줌의 흙을 움켜쥐고 두 볼에 비비고 또 비비었다. ……나는 소부대활동시기 이 고장에서 수차례 다녀보았기 때문에 이 지대를 손금 보듯 꿰뚫고 있었다.˝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도 우리는 상당수의 조선인 항일유격대원들이 대일전에 참전했음을 알 수 있다.
˝8월 8일 밤 오후 11시 50분 조선인 일단 80명이 소련군과 함께 쾌속정을 타고 두만강을 건너 토리에 내습했다.˝
1945년 8월 현재 연해주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소련당국은 1937년 가을에 연해주 거주 조선인들을 모두 중앙아시아 일대로 강제이주시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기록에 나오는 ‘조선인 일단 80명’이란 항일유격대원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아마 이 조선인 항일유격대원들은 ‘남야영’ 병력으로 대일전 첫날 일본군의 요새를 기습하기 위해서 소련군과 함께 편성된 혼성습격부대원들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대일전에 참전한 일부 항일유격대원들은 치열한 전투를 치르면서 만주와 조선 일대로 진격해 들어온 반면에 대부분의 항일유격대 지도자들은 해방사업의 프로그램을 가지고 전쟁이 끝난 직후 귀국하게 된다. 동북항일연군 교도여단장인 주보중이 9월 8일 비행기로 장춘에 도착하고 강건·임춘추·김창봉·김옥순·강위룡·임철 등의 조선인 항일유격대원들이 ‘연변분견대’를 구성하여 조선인이 절대 다수 살고 있던 연변지구의 해방사업을 위해 8월 18일 연길에 도착한 것을 감안해볼 때 김일성·최용건·김책·안길 등의 항일유격대 지도자들이 조선에 귀환한 것은 아마 9월 중순경이 아닌가 짐작된다. 당시 대일전에 참전했던 한 소련군 장성이 회상기에서 “원산의 경우……8월 말과 9월에 이 곳에서는 반군복의 지방단체들의 편성이 시작되어 빨치산 부대와 합류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는 것은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이 9월에 원산을 통해 귀환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북한 지도층과 1930·40년대 초반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의 항일무장투쟁 ⑤
⑶ 소·만 국경으로의 이동과 소부대 활동
① 일제의 대토벌과 소부대 활동으로의 전환
일제는 김일성이 지휘하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을 주축으로 하는 항일유격대가 다시 동만에서 활동을 시작한 지 불과 수개월 만인 1939년 10월부터 이른바 ‘동남부치안숙정공작(東南部治安肅正工作)’을 개시하여 1941년 3월에 끝내게 된다. 관동군 제2수비대(길림 소재) 사령관 노조에[野副昌德] 소장(少將)을 총대장으로 하여 구성된 이 토벌대는 간도·통화·길림의 세 성에 대하여 대토벌을 감행해왔다. 이들은 이전에 있었던 토벌대와는 전혀 수준을 달리하는 강력한 토벌작전을 구사했다.
대강 그 토벌작전의 내용을 보면 “토벌작전은 겨울철 강설기를 이용하고 비리 비(匪)부대를 정하며, 눈 위의 적의 발자국(위장 발자국은 간파)을 더듬어가고, 험준한 산속에서 밥 짓는 연기를 발견하면 그것을 뒤져내서 박멸하며 적의 그림자를 발견하면 일거에 섬멸하도록 하며, 나머지 잔당은 급히 추격 또 추격하여 적에게 일각의 여유도 주지 않음으로써 지쳐버리게 하며(소위 진드기 전법) 굶주림과 추위 때문에 투항 또는 귀순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는 것이다. 토벌대는 정치적 회유와 사상적인 와해 수단도 동시에 활용하였다. 예를 들어 동북항일연군의 주요 지도자 누구누구가 체포되었다든지 동북항일연군의 주력부대가 이미 와해되었다든지 하는 헛소문을 날조하는 한편 “일본은 군사력이 비할 데 없이 강대하다”고 선전하여 항일유격대의 간부와 전사들이 비관하고 실망하도록 기도하엿다. 또한 토벌대는 항일유격대의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간청서’를 쓰도록 강요하여 유격대원들의 전투력을 약화시키고 향수에 젖게 하였다. 심지어 토벌대는 여자의 나체 사진이나 속옷을 나무에 걸어놓거나 술과 안주를 나무 밑에 놓아두는 수법으로 항일유격대를 유인하기도 하였다.
주요 지도자들에게는 막대한 현상금이 나붙었다. 양정우·김일성·최현·조아범·진한장에게는 1만원, 박득범·방진성은 5천원, 위증민·전광에게는 3천원의 현상금이 각각 내걸렸다.
약 7만 5천명의 대병력을 동원하여 수행된 이 작전은 가히 동남만 일대에 항전하고 있던 제1로군을 궤멸상태로 몰아넣었다. 일제의 토벌대는 항일유격대와 일반 군중과의 연계를 완전히 단절함으로써 유격대를 극도의 곤란 속에 빠뜨렸다. 한 끼의 식사를 하려면 목숨을 내놓는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영하 40여도를 오르내리는 엄동설한에서 동상자와 동사자가 속출하였으며 어떤 유격대원은 걷고 또 걷다 꽁꽁 얼어붙어 다시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밤에 나무에 기대어 잠자던 유격대원들이 추위에 그대로 목숨을 잃는 일이 흔했다. 이러한 극도의 위기 속에서 제1로군의 병력은 급속히 감소되었다. 1939년 말에서 1940년 봄 사이에 제1방면군은 이미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제1로군장 양정우가 1940년 2월 몽강현 삼도위자에서 전사하였으며, 제1방면군장 조아범은 1940년 4월 변절자들에게 암살당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김일성이 지휘하는 제2방면군 주력부대는 1940년 3월 25일 화룡현과 안도현의 접경지대인 안도현 대마록구 홍기하에서 김일성 부대만을 집요하게 추격하던 만주의 전투경찰대장 마에다[前田] 경시정(警視正) 부대를 전멸시켜 토벌대를 긴장시켰다. 일제 관헌자료에서도 마에다 부대의 전멸을 인정하면서 전사자 58명, 부상자 27명, 행방불명자 9명이라는 토벌대의 인명피해상황을 적고 있다. 아마 이 홍기하 전투에서의 승리야말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이 간고한 시기에 올린 귀중한 승리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토벌대 사령부가 연길에 차려진 1940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추·동계 토벌작전에서는 당연히 그 초점이 당시 최대의 공비단(共匪團)으로 유명한 김일성 부대에로 쏠렸다. 1940년 10월 12일 일제의 토벌대가 정한 항일유격대에 대한 다음의 은어표에서 우리는 당시 토벌데의 제1목표가 김일성 부대에 대한 소탕이었음을 알 수 있다.
˝1. 김일성-호랑이 2. 진한장-곰 3. 최현-사자 4. 한인화-소 5. 위증민-노루 6. 전광-고양이 7. 안상길-말˝
이 토벌기간 중에 또 다시 생존해 있던 수많은 동북항일연군 지도자들이 전사하였다. 제3방면군 사령관 진한장이 1940년 12월 그의 고향인 영안현 경박호 부근에서 전사했다. 제1로군 경위여단 정치위원 한인화는 1941년 3월 경박호 부근에서 전사했으며, 제3방면군 제15사단장 이용운은 1940년 10월 왕청현 천교령 산속에서 희생되었다. 제1로군 정치위원 위증민은 1941년 3월 8일 화전현 쟈피거우에서 병사했다. 또한 이 대토벌 기간 중 일부 동북항일연군 지도자들이 고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일제에 투항하였다. 제1로군 경위여단장 방진성이 체포되어 변절한 후 여단장을 맡은 전 제3방면군 참모장 박득범이 1940년 가을에 체포되어 역시 변절하였다. 일찍이 조국광복회 발기인이었으며, 제1로군 총무처장을 맡고 있으면서 지방공작에 나섰던 전광도 1941년 1월 30일 무송현에서 체포되어 변절하였다. 한마디로 일제가 현상금을 내걸었던 제1로군 지도자 9명 중 전사하거나 투항하지 않고 생존한 인물은 김일성과 최현 두 명뿐일 정도로 제1로군은 이 토벌로 현저하게 타격을 받았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김일성과 제2방면군은 토벌대의 추·동계 작전이 시작되는 1940년 9월부터 훨씬 더 간고한 시기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때쯤에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의 다른 부대들과의 연락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우리는 돈화현 소할바령에서 1940년 8월 11일과 12일 이틀간 김일성의 주재로 열린 이른바 ‘소할바령회의’의 토의내용을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 북한 문헌들은 이 회의에서 ‘조국광복의 대사변을 준비있게 맞이할 데 대하여’라는 역사적인 연설을 했다고 한다. 이 보고에서 김일성은 앞으로의 정세를 “파쇼국가들에 의한 제2차 세계대전의 확대는 파쇼국가들의 멸망을 앞당길 것이므로 조선인민의 민족해방운동의 앞길에는 유리한 정세가 조성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조국해방의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할 수 있는 준비를 튼튼히 갖추어나가기 위한 새로운 투쟁방침”으로 ① 혁명역량을 보존·축적하며, 항일유격대를 유능한 정치·군사 간부로 육성할 것, ② 이를 위해 대부대작전을 소부대작전으로 전환시킬 것을 제기했다고 한다. 이 보고서 내용은 예의 낙관적인 전망과 희망에 찬 결의로 가득 차 있지만 당시의 이러한 결정은 만주의 엄혹한 상황에서 항일유격대가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이제 ‘소부대활동’ 시기가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이 소할바령회의는 1939년 10월과 1940년 3월에 있었던 두 차례의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군정간부회의에서 이미 결정된 몇 가지 원칙들을 김일성이 적의 대토벌공세를 맞이하여 제2방면군에 적용하기 위해 소집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일제의 대토벌공세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이 막대한 손실을 보고 있던 1939년 10월 화전현 두도류하에서는 당면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양정우의 주재로 남만성위와 제1로군의 주요영도간부회의가 열렸다. 회의에서는 적의 공세로부터 실력을 보전하고, 큰 손실을 피하기 위해 제1로군을 장차 소부대로 편성하여 분산 활동할 것이 결정되었다. 이어서 1940년 3월 13일부터 15일까지 위증민의 주재로 화전현 두도류하에서 참석 가능했던 소수의 지도자들(전광·박득범·한인화‥김재범·황해봉·서철 등)이 모여서 그해 1월 하바로브스크에서 열렸던 중공당 북만성위와 길동성위의 지도자들의 연석회의(제1차 하바로브스크회의)의 결정사항(동북항일유격전쟁의 총화와 실력보존을 위한 항일연군의 편제 개편)이 전달되고 당의 공작과 제1로군의 앞으로의 전략이 논의되었다. 따라서 이 회의에서는 적당한 때에 각 부대의 소련 영내로의 이동과 지방공작에 대한 강조와 함께 기존의 소부대작전 원칙이 재확인되엇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항일연군 제1로군의 당면투쟁형태를 ‘대부대작전에서 소부대작전으로 전환할 것’이 결정된 뒤 이 결정에 입각해서 제2방면군의 새로운 투쟁방향을 구체적으로 결정하기 위해 소집된 것이 소할바령회의였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북한의 문헌들은 정확히 밝히고 있지 않지만 소할바령회의에서는 적당한 시기에 항일유격대가 소만국경의 안전지대로 일단 피신하는 문제도 거론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문제는 독소전쟁에 대비해서 소만국경에서의 긴장이 고조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소련이 적극적으로 제기했을 것이다. 사실 소련은 1940년데 들어오면서 독일·이탈리아·일본 3국동맹 관계가 밀접해지고 관동군의 병력 증강 움직임이 더욱 활발해지는 것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오늘날 북한의 문헌에서도 “코민테른은 소만국경 일대에서 긴장상태를 완화하며, 일제에게 대소침략전쟁 도발의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하여 항일유격대(북한의 용어로는 조선인민혁명군)가 당분간 대부대활동을 중지할 것을 제기해왔다”는 기록을 함으로써 당시 소련과 항일유격대와의 관계를 간접적으로 시사해주고 있다.
소할바령회의가 끝난 후 김일성이 이끄는 제2방면군은 적군의 대토벌을 피해 백두산 밀영으로 이동하여 한동안 휴식, 정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기 때문에 1940년 7월 26일 재훈춘 일본영사는 당시 김일성의 주력부대 340명이 안도·화룡·연길 등 각 현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하고 있음에도 이해 9월부터 12월까지 추계토벌작전을 벌이던 노조에 토벌대는 그들이 주요목표로 삼았던 김일성 부대를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다.
1940년 하반기를 주로 백두산 밀영에서 보낸 제2방면군 주력부대는 그해 말 백두산 밀영을 떠나 동녕현 일대로 이동해갔다. 그리고 동녕현 일대에서 제5군과 연계를 가지며 활동하다 1941년 봄 동북항일연군 총병력을 10개 지대로 나누기로 한 제1차 하바로브스크회의의 결정에 따라 1백여명의 병력으로 동북항일연군 제1지대를 구성한 후 소만국경의 소련영내로 이동하였다. 제3방면군 중 생존자가 가장 많았던 최현이 이끄는 제13여단은 이에 앞서 1940년 가을에 소련영내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소만국경으로의 이동은 소부대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일부 부대는 이동하지 못하고 일제의 대토벌을 피해 계속해서 깊은 산림지대의 밀영 속에 은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김일성 부대는 소만국경의 소련영내로 이동해간 뒤 곧 대오를 재정비해서 정찰·기습활동을 벌이기 위해 다시 만주로 들어갔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사실은 일제가 체포한 김일성 부대의 대원으로부터 받아낸 “김일성이 부하 28명을 이끌고 1941년 4월 초순 훈춘현 신둔자 부근을 통해서 만주로 들어왔다”는 자백 내용에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임춘추의 회상기에도 “1941년 5월 김일성의 영솔하에 아군부대 2백여명은 10여개의 소부대로 나뉘어 왕청현 쟈피거우를 임시근거지로 삼고 왕청현·연길현·동녕현·화룡현·안도현·화전현과 국내에서 활동하였다”는 말이 나온다.
1941년 이후 해방 때까지 김일성 부대의 대원들은 소조별로 임시근거지를 설치해놓고 소만국경을 넘나들며 만주와 조선에서 일본군의 작전이동 등 제반 군사부문에 대한 정찰활동을 수행하였다. 더불어 일부 정치공작소조들이 간도와 조선에 파견되어 대민지하공작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소부대활동은 비록 직접적인 전투를 수행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의 상황에서 볼 때 그 중요성은 매우 컸다. 따라서 항일유격대 소조들에 대한 일제의 토벌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항일유격대 소조들의 활동 역시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되었다. 특히 이들의 활동 중 ‘금성철벽’을 자랑한다는 일제의 조선국경 수비망을 뚫고 감행된 조선 국내공작은 그야말로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이루어진 고난에 찬 임무였다.
② 동북항일연군 교도여단과 항일유격대의 대일전(對日戰) 참전
일제의 대토벌과 일본·소련 간의 관계를 고려하여 1940년 가을부터 소·만국경으로 철수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3방면군은 제2로군 제5방면군의 일부 병력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 근처에 병영(‘남야영’ 혹은 B야영)을 설치하고 훈련과 만주지방으로의 소분대 파견에 주력하면서 지냈다. 그러다가 남야영은 제2로군 대부분과 제3로군 병력이 모여 만든 하바로브스크 근처의 북야영(‘B야영’)의 병력과 합쳐져서 1942년 7월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교도여단(敎導旅團)을 편성하였다.
이러한 동북항일연군 교도여단의 편성은 1941년 초 남만·북만·길동 성위의 책임자들이 모인 제2차 하바로브스크회의에서 소련으로 철수한 동북항일연군의 통일지휘를 실현하기 위하여 동북항일연군 총사령부를 구성하기로 한 결의에 의거한 것이었다. 즉, 이 결의에 입각해서 1942년 7월 남북야영의 항일연군이 합쳐서 동북항일연군 교도여단(일명 국제홍군 특별독립88여단)를 세운 것이다. 동북항일연군 교도여단은 약 1천여명으로 구성되었으며, 4개의 교도영과 1개의 통신용을 두었으며 두 개의 병영(북야영과 남야영)을 가졌다. 여단장에는 제2로군 사령관 출신의 주보중이 정치부장에는 제3로군 사령관 출신인 장수전(이조린)이 임명되었으며 참모장에는 제2로군 참모장 최용건이 임명되었다. 4개 영 중 제1로군 출신 지휘관들이 모인 제1영장에는 제1로군 제2방면군장 출신인 김일성이 임명되었고, 정치위원에는 안길이 임명되었다. 제2영장에는 중국인 왕효명이 임명되었으며, 정치위원에는 강건이 임명되었다. 제3영장에는 제9로군 제3사단장이었던 허형식(許亨植)이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하였고, 뒤에 중국인 왕명귀가 임명된다. 정치위원은 김책이었다. 제4영장에는 중국인 시세영이, 정치위원에는 계청이 각각 임명되었다.
이같이 동북항일연군 교도여단의 주요 간부들 중 반 정도가 김일성·최용건·강건 등의 조선인이었다. 이는 이 부대 구성원 중 상당수가 조선인 전사들이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바로 이곳 동북항일연군 교도여단에서 동만을 근거지로 활동했던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은 그 동안 북만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해오던 최용건·김책 등의 동지들과 해후하게 되엇다.
이상의 부대 편제를 갖춘 동북항일연군 교도여단에서는 소련군의 도움을 받아 군정학습을 실시하는 한편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1945년 8월 해방 직전까지 계속해서 만주와 조선 국경지대에 정찰·기습·공작을 위한 분대·소대 규모의 병력을 파견하였다. 이러한 소규모 부대의 파견과 활동은 극비사항이어서 교도여단의 주력부대와는 동떨어져서 전개되었다.이러한 활동은 두 개의 병영(남야영과 북야영)에서 주보중·장수전·김일성 등 3인에 의해서 직접 지도되었으며 때때로 교도여단내의 당조직에도 알리지 않은 채 이들 지도자의 단독책임 아래 이루어졌다. 대개 15~30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부대에게는 과거 연대장급 이상의 직책을 수행한 바 있는 강인한 간부들(북한 정부에서 국가부주석을 지낸 바 있는 김일도 여기에 포함된다)이 책임자로 함께 파견되었다.
여기서 앞으로의 논의 진전을 위해서 동북항일연군 교도여단에서의 김일성과 김책·최용건과의 관계를 알아보자. 당시 동북항일연군내에 조선인 지도자로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에서 조선인 최고 지도자였던 1912년생의 김일성 외에도 1900년생으로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참모장 출신의 최용건과 1903년생으로 중공당 북만성위 서기를 지낸 김책이 있었다. 물론 최현이나 안길 등도 그 실력을 무시할 수 없으나 그들은 기본적으로 김일성의 지휘체계내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면 이 세 명의 지도자 중에서 왜 김일성이 조선인 항일유격대를 대표하는 최고 지도자로 부각되었을까? 와다 하루키 도쿄대학교 명예교수는 이 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나름대로 추정하고 있다. 첫째, 북만에서 활동했던 최용건이나 김책보다 동만에서 활동하며 국내 진공도 했던 김일성이 국내에 훨씬 더 알려져 있었다. 둘째, 김일성은 자기 부하들을 희생시키지 않고 가장 많이 보전했으며 부하들이 믿고 따랐다. 당시 제1로군 쪽에는 안길·서철·최현·김일·유경수·박영순·최광·전창철·허봉학·김경석·최춘국·박성철·오백룡·백학림 등의 전우들이 살아 있었으며, 수적으로 다른 부대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압도적으로 많았다. 또 중국공산당과의 관계에서도 최용건이나 김책만큼 얽매이지 않았다. 이상 와다 교수의 분석은 꽤 핵심에 접근한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 덧붙이자면 우리는 1936년 2월 남호두회의 이후 김일성의 지휘하에 장백현에 진출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6사단이 조선해방을 위해 싸우는 부대였다는 사실을 상기하여야 한다. 즉 동북항일연군내에서 구체적인 간도의 조선민족 문제나 조선해방의 문제는 전적으로 제6사단(1938년 12월 이후는 제2방면군) 중심으로 움직였다는 사실이 항일유격대내에서 조선인 최고지도자를 선택하는 결정에 미친 영향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들 교도여단의 조선인 지도자들은 조선해방에 대비하여 1945년 7월 ‘조선공작단’을 설치하였으며 그 단장에 김일성을 추대하였다고 한다.
유럽전선에서 독일군이 패배한 지 석달 후인 1945년 8월 9일 소련은 소·만, 조·소 국경을 넘어서 대진격을 시작하였다. 1932년 항일유격대를 조직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시작한 지 15년만에 조선인 항일유격대원들은 드디어 조국해방을 목전에 둔 것이다. 예상과는 달리 소련군은 관동군을 파죽지세로 몰아붙이며 맹진격을 거듭하였다.
조선방면으로의 소련군의 공격은 8월 9일 오전 12시를 기해 소련군 항공편대의 옹기·나진에 대한 폭격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같은 날 장고봉 부근에 있던 소련군이 경흥을 수비하던 일본군을 격파하고 진공해왔다. 또한 개전 직후 훈춘현을 공격했던 소련군은 8월 13일부터 조·중국경을 넘어 경원방면으로 진격해 들어왔다. 이렇듯 파죽지세의 사기로 조선방면으로 진격해온 소련군은 8월 13일에 이르러서는 함경북도 도청 소재지인 청진을 점령하고 남하를 계속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북한의 문헌들은 이러한 소련군의 조선으로의 진공에 조선인민혁명군 병력이 연계하여 전투에 참가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습격 임무를 받은 조선인민혁명군 성원들은 8월 8일 밤 두만강 연안의 국경 마을인 토리와 훈춘현의 남별리, 동흥진을 비롯한 적군 요새구역의 여러 초소들에 대한 습격을 일제히 개시했다는 것이다. 임춘추의 회상기에는 “소련군 계획에 의하여 일본침략군을 분쇄하는 격렬한 전투에 참가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지금까지 이러한 북한 측의 주장은 거의 그들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치부되어왔다. 다만 항일유격대원들이 조선과 만주에서 수년간 정찰활동을 계속해왔기 때문에 일부 대원들이 대일전(對日戰)에 참전했을 가능성은 일부에서 인정되어왔다. 와다 교수의 경우 소련군 정찰부대에 복무했던 조선인 유격대원들(김창봉·석산·김병갑·오백룡·지병학·백학림)이 전투에 참가했다고 보고 있다.
만주와 조선의 지형과 적군의 군사배치에 대해 비교적 무지한 소련군으로서는 이 지역에서 지난 15년간 항일투쟁을 해온 항일유격대원들을 그들의 정찰요원으로 대일전에 참전시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에 속하는 일일 것이다. 훗날 6·25남북전쟁 때에 북한 인민군 제8사단장을 지냈고 1970년대에는 중앙인민위원회 국방부위원장을 역임했던 오백룡(吳白龍)은『항일 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에서 자신이 대일전에 참전하여 조국 땅을 밟는 순간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조국으로! 조국으로! 총을 틀어쥔 우리의 벅찬 가슴 속에는 환희와 열정이 끓어 번지었다. 8월 9일 오전 8시 우리는 항구도시인 웅기에 상륙하였다. 그처럼 그렷던 조국 땅 웅기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나는 그 포연·탄우 속에서도 무릎을 꿇고 한 줌의 흙을 움켜쥐고 두 볼에 비비고 또 비비었다. ……나는 소부대활동시기 이 고장에서 수차례 다녀보았기 때문에 이 지대를 손금 보듯 꿰뚫고 있었다.˝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도 우리는 상당수의 조선인 항일유격대원들이 대일전에 참전했음을 알 수 있다.
˝8월 8일 밤 오후 11시 50분 조선인 일단 80명이 소련군과 함께 쾌속정을 타고 두만강을 건너 토리에 내습했다.˝
1945년 8월 현재 연해주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소련당국은 1937년 가을에 연해주 거주 조선인들을 모두 중앙아시아 일대로 강제이주시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기록에 나오는 ‘조선인 일단 80명’이란 항일유격대원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아마 이 조선인 항일유격대원들은 ‘남야영’ 병력으로 대일전 첫날 일본군의 요새를 기습하기 위해서 소련군과 함께 편성된 혼성습격부대원들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대일전에 참전한 일부 항일유격대원들은 치열한 전투를 치르면서 만주와 조선 일대로 진격해 들어온 반면에 대부분의 항일유격대 지도자들은 해방사업의 프로그램을 가지고 전쟁이 끝난 직후 귀국하게 된다. 동북항일연군 교도여단장인 주보중이 9월 8일 비행기로 장춘에 도착하고 강건·임춘추·김창봉·김옥순·강위룡·임철 등의 조선인 항일유격대원들이 ‘연변분견대’를 구성하여 조선인이 절대 다수 살고 있던 연변지구의 해방사업을 위해 8월 18일 연길에 도착한 것을 감안해볼 때 김일성·최용건·김책·안길 등의 항일유격대 지도자들이 조선에 귀환한 것은 아마 9월 중순경이 아닌가 짐작된다. 당시 대일전에 참전했던 한 소련군 장성이 회상기에서 “원산의 경우……8월 말과 9월에 이 곳에서는 반군복의 지방단체들의 편성이 시작되어 빨치산 부대와 합류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는 것은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이 9월에 원산을 통해 귀환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 이종석 전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장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