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지도층과 1930·40년대 초반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의 항일무장투쟁 ⑥

참의부2013.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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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유격전근거지에서의 민주개혁과 조국광복회

 

⑴ 유격전근거지에서의 민주개혁

 

1933년부터 1935년에 걸쳐 동만의 항일유격전근거지에서 이루어진 개혁은 비록 소규모지역에서 소박한 형태로 이루어지기는 하였으나 그것이 조선인 최초의 반제반봉건민주개혁의 경험이라는 데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더구나 이 개혁은 소비에트정권 수립의 좌경모험주의를 극복하고 추진되었다는 데서 역사적 경험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여기서는 동만에서의 유격전근거지의 현황과 민주개혁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① 유격전근거지 분포

 

먼저 동만의 유격전근거지가 설립될 수 있었던 몇 가지 조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지역은 유격전근거지 창설에 필요한 일정한 경제적 토대와 군중적 기초가 있는 지대였다. 즉 이 일대는 주로 높고 낮은 산악지대였으나 두만강 훈춘하를 비롯한 크고 작은 하천유역들에는 비교적 넓은 평야가 펼쳐 있었고 땅도 비옥한 편이어서 콩·조·수수 등이 괜찮게 생산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지역은 인구의 절대 다수를 일제의 폭압과 착취에 시달리다 못해 이주해간 조선 농민들이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또한 중국인 지주들의 고액 소작료와 조세 공과 등에 시달림으로써 급진적인 혁명성을 띠고 있던 곳이었다. 더구나 이곳 주민들은 장기간에 걸친 혁명투쟁과정에서 잘 단련되어 있었다.

 

둘째, 이 지역은 유격전근거지 창설에 유리한 자연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험한 계곡과 무성한 수림으로 뒤덮여 있는 산간지대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적은 무장력을 가지고도 근거지를 보위하기에 유리하였다.

 

셋째, 각 지방에는 이미 적위대, 소년선봉대 등 반군사적 조직이 결성되어 있어 유격전근거지 창설에 필요한 무장력이 어느 정도 갖춰 있었다.

 

넷째, 유격전근거지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국경과 인접해 있어 조선혁명 수행에 실로 유리한 요충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상의 몇 가지 유리한 조건 속에서 1933년 여름부터 기존의 ‘소비에트정부 건설노선’을 포기하고 광범한 반일민족통일전선에 기초한 ‘인민혁명정부 노선’을 채택함으로써 유격전근거지는 크게 확장되었다. 유격전근거지의 범위는 대개 둘레가 60, 70리에서 100여리 정도였으며 수용 인구는 적을 경우 500, 600명에서 많을 경우 수천 명에 이르렀다.

 

② 민주개혁의 내용

 

광범한 민족통일전선에 기초한 이른바 ‘반제반봉건민주혁명’을 실시한 동만유격전근거지에서의 개혁 내용은 1934년 6월 10일자로 왕청현위가 발행한「임시 동북인민혁명정부 정강 초안」에 잘 요약되어 있다. 따라서 이 정강 초안의 요약문을 소개하기로 한다.

 

〃「임시 동북인민혁명정부 정강 초안」의 요약 내용

 

1. 동북인민혁명정부는 일본 제국주의를 포함한 모든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만주국에 반대하는 정부가 됨으로써 그 근본적 임무는 곧 일본 및 일체의 제국주의 세력을 동북지방에서 몰아내고, 괴뢰 만주국을 타도하고 그 실지를 회복하고 망국노예를 벗어나 전중국영토의 완정(完整)과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투쟁한다(제1조).

 

2. 인민혁명정부 통치구역내에 있는 모든 노동자, 농민, 유격대 병사, 지휘관 및 모든 근로대중, 학생, 상인, 기타 반일·반만·반제 민중 및 그들의 가족은 남녀, 종족, 종교, 신앙의 차별 없이 다같이 혁명정부의 공민으로서 평등권을 가지며, 16세 이상은 모두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진다. 다만 매국적 민족반역자 일본제국주의 및 괴뢰 만주국의 주구배 및 모든 반혁명분자들에게는 선거권 및 피선거권의 권리가 없으며 또 정치상 자유가 없다(제4조).

 

3. 인민혁명정부는 아래 사항을 실천한다.

 

1) 일본 및 모든 제국주의에 대하여

 

一. 만주국 정부 및 남경 정부가 체결한 조약 취소(제2조).

一. 외채를 인정하지 않는다(제2조).

一. 일본 및 제국주의의 육·해군 주둔 반대(제2조).

一. 동북에서 일본 및 모든 제국주의의 은행, 철도, 광산, 기업자의 재산 몰수(제2조).

一. 중국 소비에트와의 대일 공동전선 협정의 체결(제12조).

一. 일본에 반대하는 모든 피압박민족과 공동연대 구축(제12조).

一. 반일반만무장투쟁 수행(제3조).

一. 매국노의 재산을 몰수하여 대일전비로 충당하고 나머지는 노동민중에게 분배

 

2) 일반민중에 대하여

 

一. 가렴잡세의 폐지, 통일누진세의 징수 실시

一. 언론·출판·집회·결사·독서 및 파업의 자유를 보장.

 

3) 노동자에 대하여

 

8시간 노동제, 최저임금제를 실시하고 실업자 재민을 구제.

 

4) 농민에 대하여

 

소작농민에게 2·8소작제를 실시.

 

5) 부인의 해방.

 

6) 소수민족의 자결권을 확립.〃

 

이처럼 민족통일전선적 색채가 농후한 이상의 정강 내용들은 여건이 닿는 한 유격전근거지에서 구체적으로 실시되었다.

 

각 유격전근거지에서는 반일회·호제회·아동단·소년선봉대·부인대 등의 반일군중단체들이 조직되었으며, 농민반일자위대·청년의용군 등의 대중적인 무장조직으로 건립되었다. 토지개혁이 실시되었으며, 고리대와 가렴잡세가 폐지되었다. 소년·아동들에 대한 무상교육을 위해 소학교와 아동구락부가 운영되었으며, 성인을 위한 소맹반(掃盲班)과 야학도 실시되었다. 비록 불충분하나마 각 유격전근거지마다 수명의 의사와 간호원이 있어 초보적인 의료사업이 진행되었다. 동만특위의 경우『투쟁』·『두갈래의 전선』등의 기관지와『전투일보』·『반일보』·『소년선봉』등의 유격대와 군중단체의 신문도 발간하는 등 활발한 선전·출판사업을 벌였다.

 

이상의 다양한 개혁조치 중 비록 이전의 ‘소비에트 정부 수립과정(이 말은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엄격한 의미의 ‘소비에트화’라는 개념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당시 소비에트 정부 수립과정 역시 상당 부분 반제반봉건혁명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당시 소비에트노선과 인민혁명정부노선의 핵심적인 차이는 지주계급의 처리문제였다)’에서 추진된 것이기는 하나 1946년 3월의 북한 토지개혁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 소비에트 정부의 토지개혁 세칙을 살펴보기로 하자.

 

〃토지의 몰수·분배방법

 

1. 토지계급 및 주구(중국·일본·조선을 가리지 않는다)의 소유재산만을 몰수하며 부농·중농의 토지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2. 토지분배는 노동력을 기준으로 하여(예를 들면 남자 15세~50세 이하, 여자 15세~40세 이하 되는 사람을 하나의 노동력으로 한다)평균적으로 분배한다. 그러나 항상 빈농의 이익을 중심으로 한다.

3. 여자들에게도 반드시 토지를 분배하며 또 철저한 봉건잔재의 소멸을 도모한다.

4. 분여하고 남은 토지는 ‘소비에트’가 관리한다. 당분간 일반의 토지매매를 허용한다.〃

 

이러한 토지개혁에 따라 연길현 삼도만 유격전구역의 둔전영 동구의 경우 각 농민마다 3600명의 토지를 분배받았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해방 이후 북한의 지도집단을 형성해온 김일성과 최현·안길 등이 이러한 민주개혁의 추진과정에 주요 간부로서 시종일관 참여했다는 점이다. 이 당시(1932년~1935년) 동만에서 항일유격대 조직과 유격전근거지 건설에 참여했던 북한 지도자들 중 필자가 확인할 수 있는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아동단원 제외. 괄호 안은 최초 참여지역과 해방 후 주요 경력)

 

최현(연길현, 사단장, 민족보위상, 당정치국위원, 1982년 사망), 박영순(화룡현, 당중앙위원, 체신상, 혁명박물관장, 1987년 사망), 박성철(연길현, 사단장, 정무원 총리, 현 국가부주석), 오백룡(왕청현, 노농적위대 사령관, 당정치국원, 1984년 사망), 최광(왕청현, 공군사령관, 정무원 부총리, 현 군총참모장), 김경석(연길현, 당중앙위원, 평양시당위원장 1960년 사망), 김창봉(훈춘현, 군총참모장, 민족보위상), 석산(훈춘현, 민족보위성 부상, 내무상, 부수상), 이국진(훈춘현, 최고검찰소장, 최고재판소장), 김자린(연길현, 노동당 검사위원, 사회안전성 부상), 김좌혁(훈춘현, 민족보위성 국장, 현 당검열위 부위원장), 황순희(연길현, 당중앙위원, 현 조선혁명박물관장), 오진우(당중앙위원, 군총정치국장, 현 인민무력부장), 임춘추(연길현, 강원도당 위원장, 당정치국원, 국가부주석, 1988년 사망), 김여중(훈춘현, 대사, 당중앙위원), 안길(훈춘현, 평양정치군사학원 초대원장, 1947년 사망), 김일(국가부주석, 1984년 사망), 전창철(왕청현, 직업총동맹위원장, 1982년 사망), 유경수(제1집단군사령관 1958년 사망), 김동규(중앙인민위원, 국가부주석), 허봉학(당중앙위원, 군총정치국장), 임철(제2군단장, 당중앙위원), 김철만(당중앙위원, 현 군대장), 최인덕(당중앙위원, 현 군대장).

 

이렇듯 해방 후 북한의 지도자가 된 항일유격대원들 중 상당수가 유격전근거지에서의 민주개혁과정에 참여했었다는 사실은 이들의 유격전근거지 건설과정에서의 경험이 이후 조국광복회 결성과 해방 후 인민정권 수립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⑵ 조국광복회의 강령과 조직활동

 

조국광복회는 무장조직과 현단계 조선의 정세에 알맞은 강령을 동시에 가진 진정한 의미에서의 우리나라 최초의 반일민족통일전선체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조국광복회가 민족해방운동사, 더 나아가 한국 근·현대사에서 갖는 역사적 의의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지금까지 남한의 역사 기술에서는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이유로 조국광복회가 의도적으로 무시되어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12년간 국사를 배웠으면서도 ‘조국광복회’란 이름을 아예 들어본 학생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이렇듯 중요한 조국광복회가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 제대로 자리매김되기를 바라면서 조국광복회 10대 강령과 제반 활동사항을 살펴보고자 한다.

 

① 조국광복회 10대 강령의 내용

 

1936년 5월 5일 무송현 동강회의에서 조국광복회가 결성되면서 조국광복회 10대 강령이 채택되었다. 당시 식민지 조선의 현단계에 대한 정확한 분석에 기초해서 작성된 이 강령은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을 지행하는 반일민족통일전선체가 나아갈 방향을 분명히 제시했다는 데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조국광복회 10대 강령은 강령 내용에서부터 ‘왜곡’·‘날조’의 시비가 끊이질 않고 있을 정도로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따라서 필자는 여기서 나름대로 이 문제에 대한 정리를 시도해보고자 한다.

 

현재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일제 관헌자료에 실려 있는 조국광복회 10대 강령은 서로 다른 두 가지가 있다. 먼저 필자가 진본(眞本)에 가깝다고 판단하고 있는 조국광복회 10대 강령의 내용을 전문 그대로 인용해보겠다.

 

˝재만한인 조국광복회 10대 강령

 

1. 한국 민족의 총동원으로 광범한 반일민족통일전선을 실현함으로써 강도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를 전복하고 진정한 한국의 독립적 인민정부를 수립할 것.

 

2. 한·중 민족의 친밀한 연합으로써 일본 및 주구 만주국을 전복하고 중한 인민이 자기가 선거한 혁명정부를 설립하여 중국 영토내에 거주하는 한인의 진정한 자치를 실현할 것

 

3. 일본 군대·헌병·경찰 및 그 주구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일본 군대의 우리의 애국지사의 표변(豹變)을원조하여 전인민의 무장으로 한국인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 싸울 수 잇는 군대를 조직할 것

 

4. 일본의 모든 기업·은행·철도·해상의 선박·농장·수리기관·매국적 친일분자의 전체 재산과 토지를 몰수하여 독립운동의 경비에 충당하며, 일부 빈곤한 동포를 구제할 것.

 

5. 일본 및 그 주구들의 인민에 대한 채권·각종 세금·전매제도를 취소하고, 대중생활을 개선하며, 민족적 공·농·상업을 장애 없이 발전시킬 것.

 

6.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전취하고 왜노의 봉건사상을 장려하는 백지공포의 실현에 반대하며 모든 정치범을 석방할 것.

 

7. 양민·상민 기타 불평등을 배제하고 남녀·민족·종교 등의 차별을 반대하여 일률적인 평등과 부녀의 사회상의 대우를 제고하고 여자의 인격을 존중할 것.

 

8. 노예동화교육에 반대하고 우리말과 우리글로써 학습하며 의무적인 면비교육을 실행할 것.

 

9. 8시간 노동제 실행, 노동조건의 개선, 임금의 인상, 노동법안의 확정, 국가기관으로부터 각종 노동자의 보험법을 실행하여 실업하고 있는 노동대중을 구제할 것.

 

10. 한국 민족에 대하여 평등하게 대우하는 민족 및 국가와 친밀하게 연락하며, 우리 민족해방운동에 대해 선의 및 중립을 표시하는 국가·민족과 동지적 친선을 유지할  것.˝

 

이상의 조국광복회 10대 강령의 내용은 국내의 김일성 비판자들도 대체로 인정하고 있으며, 오늘날 북한에서도 이와 대동소이한 10대 강령을 제시하고 있다. 위의 내용과 다른 것은 제2조에서 “중·한 인민이 자기가 선거한 혁명정부를 설립하여”가 빠져 있고, 제3조에 “일본 군대의 우리 애국지사의 표변을 원조하여”가 빠져 있는 대신 그 뒤의 표현이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진정하게 싸울 수 있는 혁명군대를 조직할 것”으로 되어 있으며, 제8조 맨 앞이 “노예노동과 노예교육의 철폐”로 되어 있고, 그 뒤에 “강제적 군사복무 및 청소년에 대한 군사교육을 반대하며”라는 문구가 추가되어 있는 정도이다. 나머지는 사소한 차이로 이 10대 강령이 우리말로 씌어진 것을 일제 관헌들이 일본어로 번역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오히려 일제 관헌자료가 부정확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다만 제2조 내용의 일부 차이는 이른바 ‘자주성’ 옹호의 차원에서 삭제했다고도 볼 수 있으나 북한 노동당이 그럴 의향이었다면 아예 제2조의 내용 정부를 개작했을 것이다. 제3조의 ‘혁명적’이라는 말은 독립을 위해 싸울 부대의 진보성을 생각해서 고쳤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로는 이 정도의 오치를 가지고 북한 노동당이 10대 강령을 왜곡·날조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본다. 일제 관헌자료와 북한 문헌들 사이의 일치되지 않는 내용들은 기본적으로 그것이 강령의 근본내용을 수정하는 것들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앞에서 필자가 인용한 10대 강령 자체를 부정하는, 다시 말해서 북한의 10대 강령을 모수 허위·날조라고 보는 주장이 강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명영 성균관대학교 교수는『사상휘보』제14호에 실린「재만한인 조국광복회 목전 10대 강령(초안)」을 인용하면서 지금까지 북한에서 제시해온 10대 강령을 허위·날조라고 비판해왔다. 여기서『사상휘보』제14호에 실린 10대 강령(초안)의 내용 전문을 인용해보겠다.

 

˝재만한인 조국광복회 목전 10대 강령(초안)

 

1. 한국 민족은 단체와 개인을 구별치 않고 국내외를 논치 않고 단결하여 강도 일본인들과 투쟁하여 조국의 독립해방을 완성할 것.

 

2. 왜놈의 식민지 통치하에 있어서 선전하는 기만적 자치에 굳게 반대하여 중한민족의 긴밀한 연합으로써 공동의 적인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재만한인 진정한 가치를 실현할 것.

 

3. 왜놈과 중·한 주구의 재산 및 무장을 탈취하여 재만한인의 자치와 조국광복을 위해 끝까지 결전할 각종 무장대를 조직할 것.

 

4. 왜놈과 중한 주구의 모든 재산(토지도 포함)을 몰수하여 한인 실업자를 구제할 것.

 

5. 일제의 가렴잡세를 폐지하고, 왜놈의 경제독점정책에 반대하며 공농사업을 발전시켜 공농·병·총년·부녀 및 일체의 노농군중의 실제 생활을 개량할 것.

 

6. 언론·집회·결사 및 각종 반일투쟁의 자유를 실행할 것.

 

7. 왜놈의 식민지 노예교육에 반대하고 면비교육을 실행하여 민족문화 고양을 위한 특별 평민학교를 설치할 것.

 

8. 왜놈의 한인에 대한 병역의무제도를 폐지하고 반혁명적 반소련 중국 혁명진공 등의 전쟁참가에 반대할 것.

 

9. 일본의 총유법령, 체포, 구금, 도살 등의 백색 공포정책에 반대하여 모든 정치범을 석방할 것.

 

10. 한국 민족에 대해 평등대우를 하는 모든 민족과 긴밀히 연락하고 동시에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해 선의의 중립을 지키는 국가민족과 우의적 관계를 보지할 것.˝

 

이상의 10대 강령(초안)은 필자가 앞에서 인용한 10대 강령과 비교해 볼 때 표현이 거칠고 조잡하기는 하나 내용은 기본적으로 대동소이하다. 내용상 특징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면 필자가 인용한 10대 강령에는 노동문제, 부녀자 대우 문제, 사회보험 등 보다 진보적이고 구체적인 내용들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아마 10대 강령(초안)을 다듬은 최종안이 필자가 인용한 10대 강령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나 여기서 굳이 두 개의 강령 가운데 어느 것이 진본에 가까운가를 따졌을 때 필자가 앞에서 인용한 10대 강령이 이 교수가 주장하는 것보다 진본에 가깝다고 주장하는 이유를 개진해보겠다. 

 

첫째, 이 교수가 주장하는『사상휘보』14호에 실린 강령에는 분명히 ‘초안’이라고 씌어 있다. 이 강령뿐만 아니라 이 자료에 실린 다른 것도 ‘한인 조국광복회 규약(초안)’으로 되어 있다. 즉 이 자료에 나타나 있는 10대 강령의 정확한 명칭은 ‘재만한인 조국광복회 목전 10대 강령(초안)’인 것이다.

 

둘째,『사상휘보』14호에 나와 있는「재만한인 조국광복회 선언」이나「재만한인 조국광복회 목전 10대 강령(초안)」이 모두 그 발표일이 1936년 6월 10일로 되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조국광복회는 1936년 5월 5일에 창립되었다. 이러한 조국광복회의 5월 창립은『사상휘보』14호보다도 훨씬 최신 정보를 싣고 있는『사상휘보』20호에도 나와 있다. 날짜가 6월 10일로 되어 있는 것은 초안 작성자가 예상되는 날짜를 적어넣었을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이 문헌의 조국광복회 관계자료 맨 끝부분에 ‘재만한인 조국광복회 동만성 주비회 기초’라고 이 자료의 작성 주체를 밝히고 있다. 이것은 이 자료가 초안임을 말해주는 또 다른 증거라고 할 것이다.

 

요컨대 필자의 견해로는 이 문헌에 실린 강령은「10대 강령」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마련되었던 초안이고, 앞에서 필자가 인용한 조선총독부 함남경찰부 관계자료에 실린 것은 이 초안을 다듬은 완성된 안으로 판단된다.

 

이제 끝으로 통일전선 개념에 무지한 김일성 비판자들이 “강령 내용에 마르크스사상·레닌주의적 관점이 보이지 않는다”고 공산주의자들의 조국광복회 주도성을 부인하는 증거로 동원되는 이 10대 강령 내용의 역사적 의미를 검토해보자. 먼저 이 10대 강령은 앞에서 살펴본「임시동북인민혁명정부 정강 초안」의 내용을 더욱 구체화시키면서 한편으로 조선민족의 광범한 반일민족통일전선을 호소하고 있다. 강령 제7조와 제9조는 유격전근거지에서의 개혁 내용을 심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강령 전반에 반일민족통일전선의 분위기가 깔린 가운데 제8조와 제10조는 민족의 자주성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강령 제1조의 경우에는 반일민족통일전선에 입각한 ‘인민정권’을 조선민족이 세워야 할 진정한 정권으로 규정함으로써 주권문제와 그 해결방도를 밝힌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는 또 하나의 조항은 제2조라고 본다. 이 조항은 양송의 논문에 구체화되어 있는 코민테른의「간도에 조선민족 자치구 창설」의 구호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제2조는 반민생단투쟁의 참화가 일기 시작한 때부터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끊임없이 제기한 간도에서의 조선민족 문제에 대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과 코민테른, 중국공산당 3자간의 합의를 명문화한 것으로 이후 ‘연변조선족자치구’로까지 그 효력을 유지해갔다고 볼 수 있다.

 

② 조국광복회의 조직과 활동내용

 

조국광복회의 조직확대작업은 장백현 일원과 조선 북부지방에서 가장 왕성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6사단이 주도한 이 지역에서의 조직확대작업은 1937년 10월부터 불어닥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1차 대규모 검거(당시 권영벽·박금철·김공수 등 피검)와 1938년 7월부터 시작된 2차 검거(박달·김성연·이용술 등 피검)에서 모두 739명의 관련자가 체포됨으로써 위기에 봉착하였다. ‘혜산탄압사건’으로 알려진 두 차례의 검거사태로 말미암아 조국광복회 기간조직은 1938년 말에 이르러 사실상 붕괴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비록 약 2년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의 활동이지만 그 역사적 의의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따라서 여기서는 조국광복회의 조직과 활동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사상휘보』제14호에 실린 조국광복회 규약(초안)을 참고로 하여 조직계통을 그려보면 성회(省會)→시회(市會)·현회(縣會)→구회(區會)→분회(分會) 순으로 구성된다.

 

먼저 분회는 조국광복회의 최하급 기본조직으로서 기업소, 공장농장, 병영, 학교, 상점, 집단부락 등에서 회원이 3명 이상인 곳에서 조직된다. 분회내의 회원이 많을 때에는 분회 이상의 반회를 둘 수 있다. 구회는 분회가 3개 이상인 곳에서 조직한다. 3개 이상의 구회가 있는 곳에서는 시회 혹은 현회를 둔다. 3개 이상의 현회가 있는 곳에는 성회를 조직한다. 조국광복회의 본회는 대표대회에서 선거된 위원으로 집행위원회를 조직하여 분회 전체의 공작을 지도한다. 30명 이상의 회원을 가진 분회 및 구 이상의 각급 위원회에는 조직부·선전부·총무부·무장부·경제부·재판부·청년부·부녀부 등의 8개 부서를 두도록 한다.

 

그러면 조국광복회의 조직확장과 활동이 가장 활발하였던 통화성 장백현과 조선 북부지방에서의 구체적인 조직상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조국광복회는 1937년 한 해 동안 급속히 성장하였다. 장백현 지역에서의 조국광복회 조직작업은 6사단의 지도 아래 박달·박금철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739명의 조국광복회 관련자가 검거되어 최종적으로 168명(마동희·박녹금 등은 재판 전에 옥사)이 실형을 선고받은 함흥지방법원의 1941년 8월 28일 재판 결과를 싣고 있는「혜산사건판결서」의 내용은 당시 조국광복회에 대한 일제의 공포심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일제는 권영벽·이제순·지태환 등 6명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박금철·이주흥 등 4명에게는 무기징역을, 그리고 이송운·이호철·김왈룡 등 38명에게는 10년~15년의 중형을 각각 언도함으로써 그들이 조국광복회의 활동을 얼마나 두려워했는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었다.

 

조국광복회는 코민테른의 적극적 지지 아래 창설된 조직으로서 동북항일연군내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만주 각지에도 그 조직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조국광복회의 조직확대과정에서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은 조선북부지방 천도교 조직의 조국광복회 참여와 조선혁명군 일부 대원의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편입이라는 중요한 성과들을 이룩해냈다.

 

당시 국내의 유력한 종교세력이었던 천도교세력의 조국광복회 참여는 제6사단 대원이며 천도교 풍산군 청년당원이었던 이창선의 활약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창선은 당시 장백현 일원 및 갑산·삼수·풍산 3군의 종리원을 관할하는 천도교 도정(道正) 박인진을 설득하여 6사단 요원 김재범을 만나게 했다. 김재범을 만나 조국광복회 활동 취지를 들은 박인진은 개인적으로 조국광복회 참여를 즉석에서 승낙하는 한편, 1936년 12월 천도교 중앙의 지도자 최린을 서울에서 만나 천도교 중앙의 조국광복회 가입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최린의 태도는 부정적이었다. 그는 천도교 전체의 조국광복회 참여를 제의한 박인진에게 “김일성의 주의는 우리 천도교의 주의에 반대되는 까닭에 제휴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도정 박인진이 조국광복회 참여 의사를 표명하게 되자 제6사단의 천도교도들에 대한 공작은 더욱 활발해졌다. 당시 제6사단의 천도교도들에 대한 공작 중 가장 값진 성과는 천도교 청년당 풍산군 대표 이경운의 제6사단 입대였다. 1936년 12월 이창선의 활약으로 조국광복회에 참여하게 된 이경운은 갑산·삼수·풍산군 일대의 천도교 청년당원들을 포섭하여 조국광복회 조직을 확대하는 일과 이 지역의 생산유격대 조직의 임무를 맡았다. 이경운의 제6사단 입대가 1936년 12월경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1937년 10월의 1차 검거가 있기 전까지 제6사단의 천도교 포섭공작은 함남·평북 일원으로 확대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6사단은 비록 천도교 중앙조직을 포섭하는 데에는 실패했으나 천도교 신도들의 최대 분포지인 조선 북부지방과 장백현에 거주하는 천도교 신도들을 조국광복회에 가담시킴으로써 조국광복회가 반일민족통일전선체로서 더욱 큰 의미를 갖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천도교의 조국광복회 참여는 해방 직후 북한에서 결정된 유일한 종교정당인 천도교 청우당의 존재와도 연결시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여기서 하나 더 밝혀둘 것은 조선혁명군 일부의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으로의 편입 문제이다. 조선혁명군은 본래 국민부 소속 조선인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1928년에 창설되어 남만 일원에서 활동하던 무장 독립군 부대이다. 이 부대는 양세봉이 한때 총사령관을 맡으면서 상승세를 탔으나 1934년 8월 양세봉이 암살되자 부대 전력이 급격히 쇠퇴하였다. 부대 전력의 강화를 모색하던 조선혁명군은 1935년 가을에 중국인 반일의용군과 연계하여 중한항일동맹회로 재편하게 되었다. 항일동맹회내에서 원래의 조선혁명군은 3개 사단으로 꾸려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 연합부대도 1937년에 가면 지도자 왕봉각이 일제에 체포되면서 해산하게 된다. 바로 이 뒤부터 원래 조선혁명군 소속이었던 대원들의 진로가 문제의 초점이 된다. 

 

일제 관헌자료에 의하면 이 부대 대원들의 대부분이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에 입대했다고 한다.『조선족백년사화』제1집에는 “원조선혁명군 제2사단(사단장은 최윤구, 지도원은 박태호)은 40명의 대오를 거느리고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에 참가하였다”고 보다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북한 문헌의 경우 임춘추는 “조국광복회가 확장되면서 사령관 최윤구가 아군 편입을 주도했다”고 하고 있으며,『조선로동당략사』는 “민족주의자들의 ‘독립군도’도「조국광복회 10대 강령」을 지지하여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조선인민혁명군에 편입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항일 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에도 당시 조선혁명군으로 활동하다가 항일연군에 편입한 대원의 글이 한 편 실려 있다.

 

필자의 견해로는 1937년 조선혁명군에 속해 있던 항일동맹회가 해산되면서 많은 대원들이 항일연군 1로군에 입대했던 것 같다. 당시는 항일연군에서도 반일민족통일전선을 적극적으로 강조하던 때였으므로 이들의 가입은 순조롭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들이 실제 몇 명이나 항일연군 1로군에 가입하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조선혁명군 대원의 항일연군 가입에는 조국광복회의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이 큰 역할을 했으리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측일 것이다.

 

이제 끝으로 조국광복회 정치공작원들의 주요 임무를 살펴보기로 하자. 조국광복회 정치공작원들의 주요 임무는 곧 조국광복회의 활동내용이 되기 때문에 조국광복회의 실제 활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를 알 필요가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일제 관헌자료에 나타나는 조국광복회 정치공작원들의 주요 임무는「조국광복회 10대 강령」과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학습, 생산유격대 조직, 6사단의 군자금 및 조국광복회 활동사업을 위한 모금 등이었다. 하나 덧붙일 것은 조국광복회 정치공작원들에게는 ‘조선공산당 창건을 위한 조직, 사상적 준비’라는 특별한 과제도 부과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필자의 이러한 추측은「혜산사건판결서」는 김일성이 박달과 박금철에게 운동의 지도방침을 설명하면서 “코민테른이 조선공산당 결성에 대한 지도관리방법을 당시 조건을 고려하여 중국 공산당에 위임했다”고 말했으며 6사단 7여단 정치위원 김평(김재범)으로부터 당 창건에 대한 코민테른의 입장을 전해들은 이경봉·김철억 등의 조국광복회 핵심 멤버들의 김평 지도하에 “조선공산당 결성을 위한 사전준비로서 조선에 중공당 조선 파견지부를 결성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임춘추의 회상기에서 이와 비슷한 언급을 하고 있다. 임춘추에 의하면 1936년 5월 동강회의에서 조국광복회 창건문제와 함께 ‘마르크스-레닌주의 당 창건을 위한 방침에 관한 문제’가 논의되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조선공산당 창건의 필요성과 절박성을 언급하면서 “국내에서 조직하려는 당 단체는 당분간 형제당의 한 세포가 될 것이라고 지적하고 당 창건의 통일적 지도를 위하여 당 공작위원회를 조직하고 이 당 공작위원회로 항금 국내에 조직되는 전체 당 단체들을 지도케 하여야 하겠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필자의 견해로는 당시 조선공산당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코민테른 7차 대회의 정신에 따라 만주에서도 각 민족간의 통일전선이 강조되었는바, 이에 따라 당시의 당 창건의 주체적 조건을 갖지 못한 상황을 고려하여 중국공산당의 지도 아래 조선공산당을 결성하는 문제도 자연스럽게 거론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조선공산당의 창건이 당장 어려운 상황에서 우선 조국광복회를 통하여 당조직의 토대를 준비하고자 했으며, 이에 따라 6사단의 정치공작원들 역시 조국광복회 조직 사업과 함께 당 창건준비 사업도 동시에 진행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 이종석 전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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