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지도층과 1930·40년대 초반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의 항일무장투쟁 ⑦

참의부2013.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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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적 경험이 해방 후 인민정권 수립 과정에 미친 영향

 

지금까지 필자는 김일성을 위시한 북한 지도층의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적 경험을 가급적 객관적인 자료에 의거해서 살펴보았다. 한 인간이나 집단에게 과거의 경험은 누구를 막론하고 현실을 헤쳐나가고 미래를 설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즉 한 인간이나 집단에게 있어 과거가 현실을 규정한다는 사실은 상식적인 얘기이다. 이런 의미에서 북한 지도층의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적 경험이 해방 후 북한의 인민정권 수립에 미친 영향을 살펴본다는 것도 지극히 상식에 속하는 진부한 얘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북한 지도층의 역사적 경험은 조금 다른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8·15해방 직후 혁명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그들의 역사적 경험은 혁명의 길을 그들이 스스로 주도하고 성공시키는 데 귀중한 경험들이었다. 보천보전투(普天堡戰鬪) 이래 국내 민중에게 신비화되어 있던 김일성의 명망성, 유격전근거지 시절부터 시작하여 조국광복회(祖國光復會)에서 절정에 오른 민족통일전선운동의 경험, 유격전근거지에서의 민주개혁의 추진과 인민혁명정부 수립·운영의 경험, 반민생단투쟁과 항일무장투쟁 전과정을 통해서 얻은 좌우익 기회주의의 폐해에 대한 인식과 민족주의적 인식, 조국광복회를 통한 국내에서의 대중조직화 작업의 경험 등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이 체득한 수많은 경험들은 해방 직후 북한 사회에서 진행된 인민정권 수립 과정에 실로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면 이제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의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해방 직후 북한 사회에서 진행된 인민정권의 수립 과정에 미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이 한반도 북부 지역의 해방정국을 주도할 수 있게 해준 항일무장투쟁 과정에서 얻은 김일성의 명망성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김일성은 조·중 국경지역이며 조선인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동만 일대를 배경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공산주의자들 중에서는 최고 지도자였다. 더욱이 그가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6사단장 시절 조국광복회 조직을 주관하면서 치른 보천보전투·간삼봉전투 등 수차례에 걸친 국내 진공작전은 국내 조선인들 사이에서 그의 이름을 신비화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오늘날 많은 김일성 비판자들이 그의 명망성을 부정하고 있으나 몇 가지 사료들은 김일성이 국내외적으로 큰 성가를 올리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중 국내 민중에게 알려진 그의 명망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은 1943년 “남조선의 소학교 6년생과 중학교 2년생을 모아놓고 현재 일본에서(조선인 포함) 누가 제일 위대하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설문을 무기명으로 조사해보았다는 한 일본인의 진술을 들 수 있다. 그의 설문조사 결과 놀랍게도 학생들 중 67퍼센트가 김일성을 써냈다고 한다.

 

또한 김일성이 지금까지 ‘소·만국경으로 이동해가는 1941년 이전에 소련은 그에 대해서 전혀 몰랐을 것’이라는 일부 주장을 뒤엎는 결정적인 증거도 나타났다. 최근에 밝혀진 이 증거들은『태평양』이라는 잡지의 1937년 제2호에 실린 라파포트(V. Rappaport)의 글「북조선 구역의 빨치산 운동」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사는 동북인민혁명군 제1로군 제1사단장이었던 이홍광과 김일성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 김일성 부대에 관한 내용을 잠깐 소개하기로 하자. “이 부대의 전사는 아주 용감하다. 모든 위험한 작전은 바로 이 부대가 수행하고 있다. 이 부대는 항상 행동을 신중히, 신속히 정확히 한다. ……이미 1년 이상이나 일본군의 김니첸(김일성) 부대 사냥이 성과 없이 계속되고 있다” 이와 같이 보천보전투가 있기 전부터 소련은 김일성의 부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 기사가 1945년 일제가 패망하기 이전에 미국 국무부 일본 담당관인 맥큔의 요구에 따라서 번역되었다는 것이다. 이홍광은 1935년 5월에 전사했으니 이 기사의 번역은 전적으로 김일성과 그의 부대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처럼 김일성은 해방 전에 국내 민중에게는 물론 미·소의 동북아시아 관계자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김일성의 명망성은 평양 시민들에게는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로 받아들여졌던 ‘평양시 민중대회(1945년 10월 14일)’에 그를 보기 위해 운집한 8만의 인파가 웅변해준다. 그런데 이 대회에서 처음 대중에게 모습을 보인 김일성에 대해서 많은 부정적인 증언들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증언을 하나 인용해보자.

 

˝김일성 장군이 등단하자 군중의 입은 그들 눈앞에 전개되는 의외의 사건에 한결같이 벌어지고 눈은 의심스러이 빛났다. 백발이 성성한 노장군 대신에 확실히 30대(당시 33세)로밖에 안 보이는 젊은 청년이 원고를 들고 마이크 앞에 다가선다.

 

신장은 169센티미터 가량, 중육의 몸에 감색 양목이 좀 작아맞고 얼굴은 볕에 걸어 검었고 머리는 중국인 요리점의 웨이터처럼 버쩍 치켜깎고 앞머리털은 한 치 정도, 흡사 히도 라이트급의 권투선수를 방불케 한다.

 

가짜다!

 

넓은 장내에 모인 군중 사이에는 순식간에 불신과 실망과 불만과 분노의 감정이 전류처럼 전파되었다.˝

 

여기서 필자는 위의 증언의 진실 여부를 따질 의도는 없다. 단지 당시 노장군 김일성이 존재할 수 없는 이유와 젊은 김일성의 출현이 놀라운 일이 아님을 설명하고자 한다. 앞의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겨울이면 영하 40도가 넘는 혹한과 배고픔을 극복하고, 일상적으로 계속되는 일제의 토벌전에 항거해야 하는 1930·40년대의 만주에서의 항일무장투쟁에서의 백발이 성성한 노장군 김일성이 존재할 땅은 한 치도 없었다. 그 시기의 만주는 오직 젊고 정신력이 투철한 20·30대의 전사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었다. 애초에 노장군 김일성은 있을 수 없는 곳이 바로 항일무장투쟁 시기의 만주지방이었던 것이다. 한편 우리가 당시 아시아 공산주의운동의 현황을 살펴본다면 30대 초반의 공산주의 지도자 출현은 보편적인 현상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중국의 경우 박고·장문천·왕명·주은래 등의 저명한 지도자들이 모두 20대에 최고 지도자의 위치에 올랐음을 상기해볼 때 ‘33세의 김일성 장군’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못 된다.

 

어쨌든 이상에서 살펴본 김일성의 명망성이야말로 당시 북한 전역에서 자율적으로 분출하고 있던 지방인민정권들이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지도자로 김일성을 선택하게 하는 제1의 요인이었다고 할 것이다.

 

덧붙여 항일무장투쟁 시기의 역사적 경험이 해방 후 통일전선운동에 미친 영향을 들 수 있다. 반일민족통일전선은 1932년과 1933년 사이에 있었던 유격전근거지에서의 소비에트 정부 수립의 좌경적 오류가 척결된 뒤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 계속 견지되어온 하나의 원칙이었다. 이러한 통일전선은 현단계 사회분석에 기초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항일무장투쟁 시절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은 조선의 현단계를 식민지반봉건사회로 바라보고 항상 반일민족통일전선의 구축을 최대 과제로 삼아왔다. 조국광복회의 10대 강령이 그 좋은 예라 할 것이다. 일제가 패망하고 조국이 해방되었다고 해서 이러한 사회성격의 기본이 금방 바뀌는 것은 아니다. 비록 일제의 물리적 억압력이 철수했다 해도 아직까지 일제 잔재가 도처에 남아 있고, 사회의 봉건적 잔재들도 온존하고 있기 때문에 해방이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혁명과업은 반제반봉건혁명인 것이다. 그러니까 민족통일전선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며 현단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란 극좌기회주의 노선인 것이다.

 

김일성의 통일전선에 대한 집착, 좌우경기회주의에 대한 비판 등을 동시에 보여주는 좋은 예로는 조선공산당 ‘서북5도당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1945년 10월 10일~13일)’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이 대회에 대해서는 김일성의 주도 여하를 놓고 논란이 있다. 따라서 이 회의를 김일성이 주도했음을 필자 나름대로 입증한 뒤에 논의에 들어가기로 하자.

 

와다 하루키는 이 회의에서 김일성이 했다는 보고 내용에 ‘해외에서의 활동이 언급되어 있지 않으며, 김일성이 이 대회에서 아무런 직책도 맡지 않은 것’ 등을 증거 삼아 김일성의 대회 주도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나카가와 노부오[中川信夫]는 그의 글에서 “김일성 자신이 여러 기회를 통해서 언급하고 있는 사항들이나 여러 정황으로 보아 김일성 주도가 확실하다”고 단언하고 있다. 필자가 판단하기에는 판단 증거의 제시는 박약하나 나카가와 노부오의 주장이 기본적으로 옳다고 생각한다. 나카가와 노부오의 주장에 덧붙이자면 ①김일성으로 추측되는 김○○의 발언내용에 이 해외활동에 대해서 언급이 없는 것은 사실이나 국내 공산주의운동에 대한 언급은 모두 그것들이 ‘비조직적이었고 산발적이었고 자연발생적이었으며, 국제조건이 불리했기 때문에 실패’한 예로서 들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또한 이러한 지적 바로 뒤에 굳이 ‘조선의 운동은 해내외에서 자라나고 있다’라는 말을 한 것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②이 대회를 처음 보도한 서울의『해방일보』11월 5일자는 1·2면에서 이 대회가 채택한「정치노선과 조직확대에 관한 결정서」와「조직문제에 대한 결정서」·「좌경적 경향과 그 분파행동에 대한 비판」을 실으면서 이와 함께 1면 박스기사로 ‘조선의 청년 영웅 김일성 장군을 환영’이라는 제하의 김일성에 관한 기사를『해방일보』로서는 최초로 싣고 있다. 그리고 이 기사내용에는 “최근의 소식에 의하면 장군은 조선의 참된 민주국가 건설을 위하여……정치전선에 나섰다 하니”라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당중앙의 북조선분국 승인사실이 처음 보도된 11월 15일자에는『해방일보』최초로 “조선 민중의 영웅 김일성 장군 만세”, “……박헌영 동지 만세” 등의 구호를 박스광고로서 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북조선분국 책임비서 김용범(金鎔範)은 분국 설치에 대한 당중앙의 승인이 있었음을 통고하는 광고에서 그의 직위를 책임비서가 아닌 북조선분국 ‘책임자’라고 쓰고 있다. 이러한 정황은 이 대회를 김일성이 주도했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③이 대회에서 보고에 나선 오○○, 이○○이 ‘인민공화국’에 대해서 절대적 충성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은 간접적으로 ‘인공’을 우경기회주의로 몰아붙이면서 “우리는 연합전선을 펴서 인민정권을 짓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인공을 부정하고 있다. 이는 김일성의 이후 행적과도 일치하는 중요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④북조선노동당 제2차 전당대회(1948년 3월 27일~30일)에서 한 김일성의 연설 속에서 분국 설치를 반대했던 오기섭·정달헌 등에게 분국내 주요 직책을 맡긴 것(오기섭은 제2비서)에 대해 “그때 나는 자리는 누가 차지해도 좋으니 일만 잘하라고 해서 그들에게 자리를 그냥 맡겼던 것입니다”라는 진술 역시 그가 대회를 주도햇음을 유추할 수 있는 좋은 증거가 된다. 사실 나카가와 노부오의 주장대로 김일성이 책임비서로 선출되지 않았다는 것과 북한 당조직이 김일성 주도하에 놓여 있었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며, 당시 통일전선에 몰두하던 김일성으로서는 당의 직책을 맡지 않았다는 것이 조금도 이상스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결론적으로 김일성은 이 회의를 주도했으며 당조직 문제에 관한 보고를 행하였음이 틀림없다. 

 

바로 이 대회에서 가장 중요한 당조직문제 보고를 맡은 김일성은 다음과 같이 통일전선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좌우경기회주의를 비판하였다.

 

˝우리가 할 역할은 전 힘을 다하야 민족통일정권을 수립해야 한다. 이곳에는 자본자도 참여한다.

 

먼저 파생분자의 역사적 죄악감을 느끼니만치 지금에 있어서는 과거를 부끄러워하고 청산하려고 하고 있으니 파벌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다시 당운동에 들어오겠다는 자를 거절해서는 안 된다.

 

이영·최익환 일파는 이론이 극좌적이다. ……○○일파의 주장은 금번의 전쟁을 사회주의 전쟁이었다라고 규정하고 조선에 있어서도 계급전쟁이라고 한다. ……이영은 현실에 맞지 않는 주장을 하는 가짜 좌경파다.

 

연합전선을 짓는다 해서 무산계급의 독자성을 망각하는 것은 우경적이다. 우리는 연합전선을 펴서 인민정권을 짓는 것이다. 조선민족을 팔아먹은 그네들까지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기회주의라고 본다.˝

 

이상의 인용문들은 해방정국에서 발생한 좌파의 쟁점들에 대한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의 정리된 입장으로 볼 수 있다. 인용문들은 이영·최익환 등의 극좌적 오류와 박헌영 등이 주도하고 있는 ‘조선인민공화국’의 우경기회주의 속성을 분파성의 폐해에 기초해서 비판(이영 등에서는 직접 비판, 박헌영 등에게는 우회적 비판)하면서 무산계급의 독자성과 광범한 포용성을 동시에 결합시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김일성의 정리된 입장이 해방이라는 ‘상황의 단절’을 뛰어넘어 역사적 경험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미 1933년에 소비에트 노선의 극좌적 오류를 경험한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로서는 이영·최익환 등의 사회주의 혁명론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극좌모험주의노선으로 비쳤을 것이다. 역으로 민생단사건에서 이른바 민족개량주의자라는 탈을 쓴 일제 주구들의 획책으로 수백명의 조선족 전사들이 희생되고 유격전근거지가 붕괴되는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던 그들로서는 이승만·김성수 등까지도 수용하려는 ‘조선인민공화국’이 우경 기회주의로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인민대중 속에서 조직·사상적으로 발전해왔다’는 항일유격대 출신인 그들로서는 중앙 중심으로 급히 만들어진 ‘조선인민공화국’을 바라볼 때 쉽게 동의할 수 없었을 것이다(물론 인공을 논할 때는 미국군 진주라는 당시 상황과 조건이 고려되어야 한다).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은 민족통일전선운동의 성패를 인민정권 수립의 성패 여부와 관련시켜서 볼 정도로 통일전선에 집착하였다. 김일성은 앞서 밝힌 10월 14일의 ‘평양시 민중대회’에서도 항일투쟁을 위한 전민족의 단결을 호소한 조국광복회 선언문을 연상시키는 “돈 있는 자는 돈으로, 지식 있는 자는 지식으로, 노력을 가진 자는 노력으로 참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민주를 사랑하는 전민족이 완전히 대동단결하여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자”는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은 조국광복회 시절 공산당조직이었던 갑산공작위원회를 국내 통일전선의 지도기관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한인민족해방동맹으로 명칭과 성격을 바꾸었듯이 공산주의청년동맹을 민주주의청년동맹(1946년 1월 17일)으로 바꾸는 등 본격적으로 통일전선에 기초하여 수많은 대중단체들을 통합하였다. 통일전선을 방해하는 분파주의는 철저히 배척되었다.

 

요컨대 조국광복회에서의 민족통일전선운동의 실천적 경험자였던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은 그들의 항일무장투쟁의 성가로 담보된 대중적 지지를 기반으로 강력하게 민족통일전선운동을 추진해나감으로써 해방 후 혼란했던 한반도정국을 정면으로 돌파하고 1946년 2월 민주개혁을 주도할 통일전선에 입각한 인민정권이라 할 수 있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결성하는 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항일투장투쟁의 역사적 경험은 민주개혁기간(1946년 2월~1947년 2월)에 실시된 각종 개혁에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영향을 끼쳤다. 북한에서는 제반 민주개혁의 총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11개조 당면과업」(1946년 2월 9일)과 이를 보다 구체화시킨「20개조 정강」(1946년 3월 23일)에 대해서 조국광복회 10대 강령을 해방 후 조성된 새로운 상황에 맞게 구체화시킨 ‘역사성’을 가진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의 강령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토지개혁의 경우 특히 유격전근거지에서의 초기 토지혁명정책의 경험이 직접적으로 원용되었다. 예를 들면 토지분배방법의 경우 유격전근거지에서와 같이 여자들에게도 토지를 분배하며 산출방법으로는 점수제를 채택하고 있다. 단지 유격전근거지에서는 토지매매를 허용하고 있는 데 반해 북한에서는 농민에게 분여된 토지는 일체의 매매·소작·저당을 금지(법령 제11조)시키고 있다. 이는 토지개혁의 완벽성을 지니기 위한 진일보한 조치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조국광복회 10대 강령에서 제시되었던 노동자의 권익 보장(강령 8조)와 남녀평등 보장(강령 7조)의 조항은 민주개혁 초기에 일찌감치 구체화되어「북조선노동자 및 사무원에 대한 노동법령」(1946년 6월 24일)과「북조선남녀평등에 대한 법령」(1946년 7월 30일),「사회보험법」(1946년 12월 19일) 등을 통해 구현되었다. 10대 강령 제4조(일제 및 그 주구의 재산과 토지몰수) 역시 토지개혁에 이어 1946년 8월 10일에 공포된「산업·교통·운수·체신·은행 등의 국유화에 대한 법령」을 통해 현실화되었다. 이미 1945년 11월에 입법적으로 확인된 ‘일본제국주의 통치시기에 시행되었던 모든 법령의 폐기’도「20개조 정강」에서 “일본 통치시에 사용하며 그의 영향을 가진 일체 법률과 재판기관 폐지”를 선언함으로써(제7조) 공식 확인되었다.

 

결론적으로 민주개혁기간에 실시되었던 이상의 개혁조치들은 대체로 항일무장투쟁 시기 유격전근거지에서 실시되었던 민주개혁과 조국광복회 10대 강령을 심화·구현시키는 방향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북한의 인민정권 수립과정에 미친 북한 지도층의 역사적 경험으로는 그들의 대중조직화 경험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유격전근거지에서 이미 상당한 대중운동의 경험을 쌓았으며 조국광복회의 활동과정에서는 국내조직을 건설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대중과의 만남 속에서 이들은 대중에 대한 특별한 관점을 확립하였다. 이들은 항일무장투쟁과정에서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과 같이 유격대는 인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철칙을 배웠다고 한다. 이들의 이러한 경험은 해방 후 대중을 조직화하고 혁명의 길로 나서게 하는 데 있어 “인민대중을 위하여 충실히 복무하여 대중 속에 들어가 대중을 교양·개조하여 묶어세우며, 대중에게서 힘과 지혜를 얻으며 광범한 대중을 동원하여 혁명과업을 수행한다”는 이른바 혁명적 군중관점에 선 군중노선으로 확립되었다. 이러한 군중관점을 가지고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은 해방 직후 곧장 대중조직화 작업에 나섰다.『조선전사』에 의하면 김일성은 “각지에 자연발생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한 당조직들을 혁명적 당 건설 원칙에 기초하여 급속히 확대·강화하고, 공장·광산·기업소들과 농촌·어촌들에 당세포를 광범히 조직하여 당조직들이 광범한 근로대중 속에 뿌리박고 그 대열을 끊임없이 늘이도록 하기 위하여” 김책·안길·유경수·김경석·조정철·이봉수 등의 전우들을 전국 각지에 정치공작원으로 파견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1945년 9월 20일 지방에 파견되는 정치공작원들 앞에서 ‘새 조선 건설과 공산주의자들의 당면과업’에 대해서 연설했다고 한다. 김일성 자신도 귀국 직후 지방을 순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방 최초의 것으로 짐작하는 북한방문보고서를 펴낸 여류작가 스트롱은 “김일성이 귀국 직후 수주 동안 지방인민정권의 조직화에 참여하면서 가명을 쓰고 전국을 순회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한마디로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은 다른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중앙조직에 연연해 있을 때 이미 그들의 최대 기반이 될 대중조직 건설사업에 나서고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북한의 인민정권 수립 과정에 미친 북한 지도층의 역사적 경험으로는 무력기관의 설립과 발전에 끼친 영향을 들 수 있다. 해방과 동시에 귀국한 항일유격대원들은 김일성·최용건·김일·안길 등 고위 지도자들을 제외하고는 최현·최춘국·조정철 등 대부분이 무력기관 창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따라서 북한이 초기 주요 군사 지도자들의 대부분이 항일유격대 출신이었으며 그 영향을 받아 1948년 북한 인민군이 창군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군의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적 전통의 계승이 강조되어왔다.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 검토해볼 때 결론적으로 해방 직후 북한 지도층이 인민정권 수립 과정에서 보여준 지도성은 한마디로 1945년 8월 15일 ‘해방’이라는 역사적 구획점을 뛰어넘어 그들의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적 경험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6. 맺음말

 

필자가 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북한 지도층의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적 경험이 해방 직후 북한에서의 인민정권 수립 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필자 나름대로의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글을 마치는 이 시점에서 필자는 이러한 가설이 기본적으로 정당한 것이었음을 어느 정도 확신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제기에서도 밝혔듯이 필자의 가설은 북한 지도층의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사실 인식의 기초 위에서만 해명이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북한 지도층의 역사적 경험에 대해서는 지극히 상반된 주장들이 난무하고 있는 실정이라 필자에게는 이 역사적 경험에 대한 정확한 사실을 정리하는 것이 우선적인 과제가 되었다. 따라서 필자는 북한 지도층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실증적 고찰에 중점을 두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자료활용에서 국내의 기존 북한 연구자들의 북한 문헌들에 대한 강한 불신감을 고려하여 기본자료는 일제 관헌자료를 우선 활용하되 중국 문헌들을 함께 비교·검토해보는 방식을 취했다.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적 경헌의 주체가 되는 북한의 문헌들은 대체로 다른 문헌들과 일치하는 부분만을 인용하거나, 아니면 다른 문헌들이 밝혀주지 못하는 부분을 해명하기 위해서 그 내용이 전후 맥락과 부합되는 부분에 한해서 이용하였다. 한마디로 북한 문헌들은 1차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주로 보조자료로서 인용되었다. 필자는 객관성을 제고한다는 이름 아래 이러한 방식을 취햇으나 이는 한편으로 보면 자료 활용에 있어서 이 글이 갖는 기본적인 한계로 작용할는지도 모른다.

 

한편 필자는 이 글을 쓰면서 기본 북한연구계 일각에서 아직도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허무맹랑한 이른바 ‘가짜 김일성론’의 허구성을 파헤치고 일부 김일성 비판자들의 정당하지 못한 비판들을 비판하는 데도 비중을 두었다. 더불어 최근 북한 문헌들이 원전 상태로 남한 사회에서 출판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 문헌들의 이 시기에 대한 설명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도 주의를 기울였다. 예컨대 1934년 봄에 조직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단 독립사단을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조직한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제1장에도 밝혔듯이 이 당시 조직된 군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단 독립사단이었으며 김일성은 중견간부였다. 김일성이 이 부대를 조직하는 데 참여한 것은 사실이나 그가 총지휘했다는 식의 표현은 분명히 사실의 왜곡이다. 그러나 이 부대가 갖는 여러 성격을 고려할 때 오늘날 역사해석에 따라 결과적으로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북한 문헌들에서는 ‘주체사관’에 입각해서 이러한 배경설명 없이 그대로 조선인민혁명군으로 부르고 있다는 데 있다. 이는 ‘주체사관’과 ‘사실 인식’ 사이에 가로놓인 미묘한 긴장관계를 극명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국내 독자들의 경우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단 독립사단의 조선인민혁명군적 성격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지 결코 사실적 배경에 대한 아무런 인식 없이 이 부대를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불러서는 안된다고 본다. 만일 누군가 1934년 3월 김일성이 지도하는 조선인들에 의해서 중국공산당의 명령계통과는 전혀 무관한 조선인민혁명군이 창건되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무지와 맹신의 소산이며,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단을 조선해방을 위한 조선인의 군대(1936년의 제6사단에서 이러한 조건은 어느 정도 충족된다)로 만들기 위해서 수많은 희생을 치르며 간난의 세월을 투쟁해온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노력을 매몰시켜버리는 반역사적인 행위이기도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날 북한 문헌들이 안고 있는 이러한 문제점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고 본다.

 

다음으로 자료활용상의 한계와 더불어 이 글이 갖는 또 다른 한계를 스스로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아직까지도 간도지방이나 장백현 일대, 그리고 함경남북도 일원에는 당시 무장투쟁 상황을 증언해줄 사람들이 생존해 있을 것으로 보이나 여건상 현장답사와 현장증언채취 같은 객관성을 제고시킬 수 있는 방법들을 전혀 사용하지 못했다.

 

둘째, 북한 지도층이라는 ‘집합’의 항일무장투쟁을 고찰함으로써 사실상 김일성을 제외한 다른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개별적인 활동상황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못했다.

 

셋째, 항일무장투쟁 시기에 전개되었던 국내외의 다른 독립운동들과의 비교를 하지 못했다. 이어지는 연구들이 이러한 각론들을 채워주기를 기대한다.

 

끝으로 이 글을 마치면서 지금까지 고찰한 북한 지도층의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해명은 이데올로기적 취향에 의해서 그 진위 여부가 좌우되는 정치적 결단의 문제가 아니라 민족사의 한 부분을 옳게 파헤치고 나름대로 자기발전과정을 밟아온 북한 사회주의 정치의 기초를 규명해보기 위한 역사적 사실 인식의 문제임을 밝혀두고자 한다. 

 

☞ 이종석 전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장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