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웃대(인생사프리님)제가읽었던 이야기들중 재미나게 본 이야기입니다.스크롤 압박이 있어요..^^ 룸메이트 1화 ; http://pann.nate.com/b318390630룸메이트 11화 ; http://pann.nate.com/b318393961룸메이트 21화 ; http://pann.nate.com/b318396686 어느새 전선기의 존재는 별로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지금 알고 싶은 건 김경은이 여기에 와 있는 이유였다. 별로 배고픈 상태도 아니었는데 침이 꼴딱 넘어갔다. 이야기는 이미 시작했는지 모두 미소를 띈 채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뒤에 서있는 덩치들은 여전히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전선기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지 온몸을 써가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형님은 살짝 건방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들은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님이 전선기에게 악수를 권했고, 전선기는 서둘러 두 손으로 형님의 손을 잡았다. 전선기의 표정이 만족스럽지 못한 걸로 보아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한 것 같았다. 전선기가 가게에서 나오자 나는 재빨리 적당한 곳에 숨어서 마스크를 착용했다. 그들이 밖에 나오자 대화 내용이 들렸다. 먼저 전선기가 안절부절 못하며 말했다.“그럼 다음엔 언제 뵐 수 있겠습니까?”“뭐가 그렇게 급하세요? 천천히 합시다.”“저는 장사꾼입니다. 하루만 재고가 펑크나도 곤란해요.”“알겠습니다. 그럼 당장은 저도 곤란하니 4일 후에 다시 뵙죠.”형님의 말에 전선기는 급하게 김경은에게 무언가 손짓을 했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핸드폰을 잠시 보고는 말했다.“토요일입니다.”그 말을 듣고 전선기의 표정이 조금 펴지더니 말했다.“좋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마지막으로 그들은 악수를 다시 나누고 헤어졌다. 형님은 자연스럽게 칠복이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며 원룸방향으로 향했다. 하지만 나에게 형님의 방향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주머니에 자리를 잡고 있는 권총을 매만지며 전선기를 추적했다. 어느새 전선기의 차는 카페 앞에 나와 있었다. 그녀는 앞좌석에 탔고 전선기는 덩치들을 사이에 끼어 차량에 탑승을 했다. 나는 택시에 오르며 기사에게 말했다.“제가 말하는 방향으로만 가주세요.”택시기사는 조금 이상한 눈빛으로 날 쳐다봤지만, 마스크를 쓰고 있기 때문에 내 얼굴을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택시기사는 고민하지 않고 내가 말하는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나는 미행하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살짝 쳐진 채로 추격을 했다. 방향을 보니 가게 방향으로 가는 모양이었다. 나는 아예 택시기사에게 가게 앞으로 가라고 말을 하려던 참이었다.“어?”전선기의 차량이 갑자기 방향을 바꿔서 공원 쪽으로 향했다. 가게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공원이었다. 나는 들킨 건가 싶어 조심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이후의 주행이 너무 부드러워 걱정을 접었다. 전선기의 차는 공원 안까지 들어갔고, 나는 공원입구에서 내렸다. 어차피 공원에서는 고속으로 주행을 할 수 없으므로 조금만 신경 쓰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차량은 멀리 가지 않고 멈췄다. 나는 차가 멈춘 장소를 보고 맥이 풀려 버렸다.“화장실?”갑자기 방향을 바꾼 이유는 누군가 급하게 화장실을 가고 싶어서 그런 것 같았다. 차에서 먼저 덩치들과 김경은이 내렸고 전선기는 덩치들에게 무슨 말을 하더니 화장실로 들어갔다. 전선기에게 무슨 말을 전해들은 덩치들이 차로 들어갔다. 조금 접근해서 뭘 하나 봤더니 캔으로 된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반면에 그녀는 화장실 앞에서 전선기가 나오길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조금 지루한지 바닥을 보며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고, 덩치들은 자기들끼리 껄껄 웃고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긴장이 온몸을 감쌌다.“지금인가?”물론 오늘이 날은 아니었지만 형님은 분명이 허점이 생기면 즉시 행동으로 옮기라고 했다. 화장실엔 전선기가 무방비 상태로 들어가 있었다. 지금 화장실이 급한 척 따라 들어가면 전선기를 죽일 수 있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속주머니의 권총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화장실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전선기의 차는 가게로 돌아가는지 부드럽게 이동을 했다. 나는 결국 화장실로 들어가지 못했다. 화장실 앞에 서있는 김경은에게 죽은 전선기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마지막 기회를 놓쳐버린 것 일지도 몰랐다.“바보 같은 놈.”나는 이미 떠나버린 화장실 앞에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여기저기서 매미가 내 신세를 놀리듯 울어 제끼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꺼내든 권총을 체념하며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후회가 되던 안 되든 이미 지나버린 일이다. 나는 기운이 빠진 채로 휘적휘적 지하철로 이동했다. 형님은 그 사이에 옷을 갈아입었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그 옆에 박스도 깔지 않은 채 털썩 주저앉았다.“내 옷 더러워진다.”“제거니까 걱정 마세요.”내가 입고 있는 옷은 죽은 민창수의 고급 양복이었다. 형님은 피식 웃으며 나를 보았다.“어떻게 됐냐?”“못 죽였어요.”“그래?”아마 못 죽였다는 것 보다는 안 죽였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형님은 나에게 그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슬그머니 형님의 얼굴을 쳐다보니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 나는 내심 안도하며 말했다.“토요일이 보기로 하셨어요?”“그래. 아마도 내가 마지막으로 도와줄 수 있는 날 일거다.”“어려울 것 같으면 바로 접고 다음을 노리면 되죠.”형님은 내 말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지나가는 행인이 던져준 50원짜리 동전에 감사하다는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나는 형님과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적한 곳이 필요할 때면 항상 가는 공원의 벤치에 갔다. 그리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송신음이 꽤 오래 들리다가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접니다.”그녀의 목소리였다. 나는 왜 그녀가 그 자리에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녀는 지금 바쁜 시간으로 보였다. 주변에서 왁자지껄한 손님들의 목소리가 들렸다.--네. 알아요. 전화 받을 때 전화번호가 뜨거든요. 무슨 일 이세요?그녀는 바쁜 상황이었지만 일부로 여유가 있는 목소리로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에서 재촉하는 손님들의 말이 들리는 걸로 보아서 여유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끝나고 잠깐 이야기 할게 있습니다.”--알겠어요.“끝나는 시간에 항상 보던 곳에서 뵙겠습니다.”나는 전화를 끊고도 한참동안 벤치에 앉아 곰곰이 생각을 했다. 그 많은 사원들 중에서 전선기의 수행원으로 따라올 정도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전선기와 연결이 되어 있을 것 같았다. 가게가 오픈한지 오래된 일도 아니고 아마 거의가 동기와 같은 개념일 것이다. 나는 함부로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지만, 혹시나 하는 상황에 마음을 단단히 먹기로 했다. 최악의 경우에는 그녀의 입을 막아야 하는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저녁밥을 먹어야 한다는 것 조차 잊어버렸다. 그녀를 데리러 갈 때 배고프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 아파트의 정자로 자리를 옮겼다.“조금 빨리왔나?”시간을 보니 생각보다 빨리 온 것 같았다.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기엔 애매한 시간이다. 하지만 곧 멀리에서 그녀가 오는 게 보였다. 그녀는 미소를 띠며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일찍 오셨네요? 오늘 회식 있어서 일찍 끝났어요.”“회식이요? 거기 가봐야 되는 거 아니에요?”“괜찮아요. 오늘 힘든 일도 했고.”그녀는 가볍게 기지개를 폈다.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말했다.“그럼 식사는 안 하셨겠어요. 회식 있는 날에는 저녁을 보통 안 주잖아요.”“맞아요. 사실 좀 배고파요.”“그럼 식사나 하러 가실래요?”“좋아요!”그녀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을 했다. 우리는 택시를 잡고 가게에서 다소 떨어진 가게로 가기로 했다. 물론 내가 일부로 아는 곳으로 갔다.. 그녀는 택시를 타자마자 나에게 말했다.“아는 가게가 많으시네요.”“예. 찾아다니면서 먹는 걸 좋아해서요.”“애인이랑 가본 거 아니에요?”그녀의 말에 나는 잠시 감상에 빠졌다. 내가 애인이란 걸 곁에 둔지가 언제였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고등학교 때는 죽자고 놀기만 해서 많이 사귀긴 했지만 지금 되돌아보니 애들 장난이었을 뿐이다. 집안 사정 때문에 대학교를 포기하고 경찰 시험을 보겠다고 마음을 먹고 헤어진 게 마지막이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생각만 하고 있자, 그녀의 인상이 찌푸려졌다.“뭐야, 진짜에요?”“아니에요. 애인이 언제 있었는지 생각 좀 했어요.”내 말에 그녀는 웃고 말았다. 택시 기사의 어깨를 보니 들썩거리는 게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뭐가 웃긴지 모른 채 택시에서 내렸다. 내가 아는 식당은 횟집이었다. 언젠가 형식이랑 왔던 곳이다. 분위기가 꽤나 좋아서 들렸는데, 엄청난 바가지만 뒤집어쓰고 나갔던 곳이다. 그 당시에 싸웠던 식당 사장에게 듣던 말로는 물고기의 품질이 좋다고 하는데, 밥을 의무적으로 먹는 우리로써는 상상하기가 힘든 가격이었다. 이곳도 다시 오게 될 줄은 몰랐다. 들어가자마자 가게의 사장이 인사를 하다가 나를 보고 흠칫 놀래며 말했다.“오랜만이네요?”나는 탐탁지 않아 보이는 사장의 말투에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러네요. 잘 지내셨어요?”“그때 잘 먹고 잘 살라고 했잖아요. 잘 먹고 잘살고 있습니다.”가시가 돋친 사장의 말에 나는 웃음으로 넘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내 옆에서 의아해 하고 있자 나는 얼른 그녀를 자리에 앉히며 사장이 들으라는 투로 말했다.“여기 물고기는 다른 횟집과는 달라요. 맛은 제가 보장합니다.”“그래요? 제가 회를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그거야 뭐...”나는 대답을 하면서도 사장의 눈치를 보기 급급했다. 하지만 사장은 이미 마음이 풀린 듯 내 쪽을 보며 허허 웃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안도 하였다. 곧 참돔회가 나왔고, 가게 사장이 직접 접시를 들고 나타났다.“맛있게 드세요.”그녀는 접시를 보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좀 많은데요? 우린 이렇게 많이 안 시켰는데요.”“서비스입니다. 이 분이랑 잘 아는 사이거든요.”정말 양이 많긴 많았다. 둘이서 이걸 어떻게 다 먹나 싶을 정도였다. 그녀는 젓가락을 들고 회를 집으려다가 나를 보더니 다시 젓가락을 식탁에 내려놨다. 뭔가 할 말이 있는지 내려놓는 젓가락에서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할 말 있죠?”“예?”“그것도 꽤 심각한 일. 먹다가 들으면 채할 것 같으니까 지금 말해요. 그러고 먹을게요.”“심각한 일은 아니에요.”물론 나에겐 무척이나 심각한 일이었다. 먼저 저렇게 말을 꺼내니 당황스럽긴 했지만 어떻게 말을 꺼낼까 생각하던 나에겐 좋았다.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오늘 무슨 일 했어요?”“할 말이 그거에요?”“네. 자세히 알고 싶네요.”그녀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잠시 생각을 하곤 말했다.“아침에 출근해서 매장 일 보다가 사장님이 거래처에 일을 보시는데 따라갔어요. 그러고 다시 매장에 돌아와서 일을 하고 여기로 왔죠.”“거래처에 경은씨도 갔어요?”“네. 제 순번이었거든요.”“순번?”“요즘 사장님이 거래처에 일이 많으세요. 근데 만나면 남자들끼리 있기 마련이라서 여성 직원을 돌아가면서 수행시켜요.”“그렇군요.”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야 안도감이 들었다. 전선기를 쏘지 못한 게 오늘 하루 종일 신경 쓰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야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요?”“카페 안에 가게 사장이랑 있는 걸 봤어요.”“그러셨구나.”그녀는 잠깐 나를 쳐다보고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우리는 회를 먹기 시작했다. 왠지 이상하게 회를 먹는 그녀에게서 이상한 기류가 느껴지긴 했지만, 크게 신경 쓰이진 않았다. 그 많던 회를 다 먹은 뒤 지갑을 꺼내는 그녀를 만류하고 계산을 했다. 차가운 회로 배를 채우다보니 조금 더부룩하긴 했지만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계산을 마치고 그녀를 돌아보니 활짝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잘 먹었어요. 회로 이렇게 배부른 적은 처음인 것 같아요.”“잘 됐군요. 저도 잘 왔다고 생각합니다.”김경은에 대한 오해도 풀었고, 정말 오랜만에 회도 진탕 먹었으니 이 이상 좋은 일은 앞으로 없을 것 같았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나는 길가로 가서 택시를 잡으려 했다. 그런데 뒤에서 김경은이 나를 잡았다.“잠시 만요.”“네?”“걸어가면 안 될까요? 소화도 시킬 겸 걷고 싶은데.”“힐이 높으시잖아요. 괜찮으시겠어요?”내가 그녀의 힐을 가리키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미소 띤 얼굴로 핸드백을 뒤적거렸다. 조금 무거워 보이던 핸드백에선 분홍색의 깨끗한 작은 운동화가 나왔다. 발이 작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신발을 직접보자 상당히 작은 것 같았다. 그녀는 신발을 갈아 신고 하이힐을 핸드백에 넣었다. 그리고 운동화를 신은 채 제자리에서 가볍게 뛰며 말했다.“이거 신으면 돼요.”“옷이랑 좀 안 어울리는데요.”그녀가 지금 입은 옷은 조금 어두운 색의 정장이었는데 확 튀는 신발을 신으니 좀 어색해보이긴 했다. 하지만 그녀는 발이 편안해져서 좋은지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저녁이라 보는 사람도 없는데.”“그렇긴 하군요.”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긴 했지만 아직 문제는 남아있었다. 택시를 타고 와서 금방 오긴 했지만 그녀의 집까지는 걸어가려면 꽤 걸릴 것이다. 지금도 조금 늦은 시간인데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일단 걸으며 그녀에게 말했다.“조금 오래 걸리지 않을까요?”“괜찮아요.”별로 걷진 않았지만 짧은 대답에서 그녀의 상태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평소에 많이 걷지 않는 것 같았다. 벌써 호흡이 커지고 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얼마나 걸을 수 있는지 볼 요량으로 가만히 있기로 했다. 난 말을 하면 더 힘들어질까봐 일부러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요즘 하시는 일 있으시죠?”“있긴 있죠.”“중요한 일 같아서요. 무슨 일이에요?”“잘 되면 이야기 해 줄게요. 아직은 모르는 일이라.”전선기에 대한 일이라고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기에도 마음이 좋지 않아서 얼버무리려고 했는데 그녀가 아쉬운 듯 물었다.“그럼 잘 되고 있는지만 말해줘요.”나는 잠깐 생각해보고 그 정도는 괜찮겠다 싶어 대답했다.“잘 되고 있는 편이죠. 곧 끝날 것 같은데요.”“잘됐네요.”그녀는 힘든 와중에도 활짝 웃으며 축하해 주었다. 나는 축하받을 일도 아니었지만 고개를 가볍게 숙여서 감사를 표했다. 그 이후로의 대화는 없었다. 그녀는 걷는데 쏟는 호흡도 벅차 보였고 결국 나는 근처에서 택시를 잡았다. 택시를 타자마자 그녀의 한숨과 함께 실망한 듯 한 목소리가 들렸다.“평소에 운동 좀 할 걸 그랬어요. 이것도 힘들어하다니.”“다른 사람들 보다는 잘 걷던데요.”“빈말 같은데요?”“아니요. 정말이에요.”“다른 사람이라니. 누구요?”물론 같은 강력계에 있던 여형사와 비교를 하면 안 되는 일이다. 나는 잠시 누나가 생각이 났었다. 같이 길을 걷던 일은 거의 없었지만 종종 같이 걸을 때면 두 블록도 걷기 전에 힘들다고 투정부리던 누나가 생각이 났다. 지금 생각하니 웃음이 나긴 했지만 곧 우울해지고 말았다. 나는 표정을 숨기고 얼른 둘러댔다.“그냥 주변의 여자들.”“주변의 여자들?”나는 아차하고 말았다. 뭔가 질척거리는 늪 속에 한 발을 담근 기분이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침착하게 대답했다.“그냥 일하다가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이에요.”“그래요?”딱히 좋은 핑계는 아니었다. 그건 스스로도 인정할만한 일이었다. 그녀도 여전히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분명 나는 잘못한 일이 없지만 나도 모르게 죄인처럼 침이 넘어갔다. 형사시절에 침을 삼킨다고 범인으로 몰아갔던 사람들에게 사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구세주 같은 택시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다 왔습니다. 여기에서 내려드릴까요?”“예! 그렇게 해주세요.”나는 너무 고마운 나머지 택시기사에게 만 원짜리를 다 주고 싶었지만 요금이 정확히 만원이 나오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아쉽게 돈을 건넸지만 택시기사는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감사합니다.”“아뇨, 제가 감사합니다. 안전운행하세요.”내리자마자 나는 화제를 돌렸다.“그런데 왜 여기에서 내린 거예요?”그녀는 집 앞을 목적지로 말하지 않고 약간 떨어진 곳에서 내리자고 했었다. 그녀는 운동화가 신겨진 다리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기껏 신발까지 샀는데 그냥 들어가기엔 아까워서요.”이해가 안가는 건 아니었지만 이미 시간이 꽤 늦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옆에서 해맑게 웃으며 걷는 걸 보자, 반박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도 알았다. 나는 최대한 천천히 걸으며 힘들지 않도록 해주었다. 호흡이 안정되자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오늘 했던 일은 잘 풀렸어요?”내 말에 그녀는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아뇨, 전혀 안됐어요. 만났던 사람들이 능구렁이 같았다고 할까?”“왜요?”“일방적으로 계약 파기를 했었거든요. 막, 배상금도 주면 된다는 둥 아쉬울 게 없는 것처럼 말하더라고요.”확실히 형님은 아쉬울 게 없었다. 전선기가 어떻게 나올 줄 알고 상황을 그렇게 만들어버린 것 같았다. 사실 카페 안의 대화가 그렇게 궁금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좀 들으니 자세히 알고 싶어 졌다.“그래서 결론이 어떻게 났어요?”“사장님이 계속 설득을 하는데, 계속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한다고 했어요. 우리가 먼저 약속을 잡았는데 다른 약속이 있다나 뭐라나.”“그럼 다시 만나겠네요?”“그러기로 했어요. 4일 뒤에. 근데 저는 안 갈 거예요. 이야기 듣는데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거든요.”“그렇게 답답했어요?”“막 동문서답하고 약간이라도 불리하다 싶으면 가봐야 한다고 하고... 아마 조금만 더 이야기 했으면 제가 소리 지를 뻔 했어요.”이야기를 들으니 형님은 다음에 만날 약속을 잡기 위해 불리한 이야기는 하나도 안들은 것 같았다. 그녀는 열을 올리며 계속 이야기를 하다가 깜짝 놀라며 입을 막았다. 나는 그런 모습이 의아해서 물었다.“왜 그러세요?”“사장님이 남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었어요.”“에이, 제가 남이에요? 실망이네요.”내 말에 그녀는 크게 당황하였다. 그녀는 양 손을 크게 저어가며 부정의 뜻을 표시했고 나는 장난이라는 뜻으로 피식 웃었다.결국 우리는 5분이면 될 거리를 20분 가까이 걷고 말았다. 집 앞에서 그녀는 자랑하듯 말했다.“오늘은 정말 운동을 제대로 한 것 같아요.”“꾸준하게 하셔야겠어요.”내가 장난 투로 말했지만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장난으로 한 말에 분위기가 심각해져 버리자 나는 오히려 당황했다. 잠시 심각해있던 그녀는 나를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같이 해 주실 거예요?”“그러겠습니다.”“운동 말구요.”“예?”“저와 같이 하실래요?”아까부터 그녀에게서 느껴졌던 이상한 기류가 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었지만 누구라도 알 수 있는 느낌이었다. 빛이 거의 있지 않았는데도 그녀의 얼굴이 빨개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땅에 꽂은 채로 초조하게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물론 그녀에게 접근한 이유가 전선기에 대한 정보를 빼오기 위한 일이었지만 그녀에게 호감이 없는 건 아니었다. 가끔씩은 깜짝 놀랄 정도로 잘 맞았다. 신세가 이렇지 않았다면 내가 먼저 말을 꺼냈을 일이다. 하지만 나는 살인범으로 수배중이고, 이번 일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몰랐다. 아마 지금 이 시간에도 경찰들의 수사망은 좁혀 들어오고 있을 것이다. 나는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잠깐만요.”그녀는 나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땅을 향하던 시선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충혈된 눈에는 눈물방울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었다. 가슴이 찌그러지는 기분이 들었다.“나는 선후 씨 상황 같은 거 신경 쓰지 않고 말한 거예요. 그러니 선후 씨도 다른 거 생각하지 말고, 나만 보고 대답해주세요.”“......”나는 앞뒤 상황을 볼 것도 없이 거절을 하려고 했지만 이 말을 듣고 주춤하고 말았다. 정말 문자 그대로 앞뒤를 보지 않는다면 거절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역시 아닌 건 아닌 거다. 나는 조곤조곤 설득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제 상황이 뭔지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알아요. 수배 중 인거.”그녀의 말을 듣고 몸이 반사적으로 뒤로 한발자국 물러나졌다. 그녀는 그에 맞추어 한발자국 앞으로 다가와서 내 손을 잡았다.“알게 된지 얼마 안됐어요. 처음엔 무서웠는데, 이미 다른 감정이 더 크게 자라있었어요.”“언제 안겁니까?”“일이 잘 풀린다고 했던 날.”확실히 며칠 되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내 손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풀고 말했다.“현실적으로 말이 안 됩니다.”“왜요? 지금까지처럼만 만나면 되잖아요?”“제가 수배범이란 걸 알게 된 이상 그럴 수 없어요.”몰라서 만난다면 나 이후에 일이 잘못되더라도 나 혼자 덮어쓰면 되지만 알게 된 이상 공범으로 몰릴 가능성이 있다. 정말 냉정하게 말한다면 사귀는 척 하면서 빼먹을 정보를 다 빼먹고 모르는 척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렇게 냉혈한이 되지 못했다. 그녀는 다시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그럼 몰라요. 모르던 일로 할게요.”그녀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다시 손을 놓고 말했다. 뭔가 먹먹한 이 상황이 견디기 힘들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먹먹함은 커져서 입 밖으로 토해질 것 같았다.“죄송합니다. 다시 연락할 일 없을 겁니다.”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 나왔다. 뒤에선 별다른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뭔가 툭 떨어지는 소리와 입을 다문 울음소리가 들려왔을 뿐이었다.원룸까지 오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집 안에 들어와 있었고, 달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어둠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자리에 눕고 나서야 깊은 한숨이 올라왔다.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누워있는 것 같았다. 술을 먹은 것도 아닌데 주변은 팽팽 돌고 있었다. 빠른 회전 때문에 바람이 느껴질 정도로 주변이 돌고 있었다. 문득 지금 난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 졌다.결국 밤새 잠들지 못했다. 주변의 회전이 멈추지 않아서 구토가 나올 지경이었다. 가장 첫 번째 햇살이 커튼을 뚫었을 때야 그 회전은 멈추었고 난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얇은 햇살을 멍하게 보고 있는데 누군가 커튼을 확 열었다. 빛들이 내 눈을 파먹을 듯 다가왔다.“어? 일어났네요.”서주희가 빛 사이에서 어설프게 그림자를 드리우며 나에게 말했다. 아직 눈이 부셔서 서주희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목소리만으로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어. 방금.”“그런데 눈이 왜 그렇게 퀭해요?”“눈?”“충혈 되서 한숨도 못 잔 사람 같은데.”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혓바닥이 삐거덕 거리며 제대로 움직여주질 않았다. 나는 벽에 기대며 자리에서 일어난 뒤에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 불을 켜니 과연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한 사람이 서있었다. 주황색 조명 탓인지 충혈 된 눈은 더욱 붉어보였다. 나는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고 물을 틀었다. 꽤나 뻣뻣해진 머리칼들이 다시 눈을 덮었지만 나는 신경쓰지 않고 세수를 했다. 모래바닥 같던 얼굴에 물을 뿌리자 좀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아니, 정신은 이미 맑은 상태였었다.“밥 줘요?”서주희의 목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서주희가 화장실 문을 잡은 채로 나를 보고 있었다. 곧 눈에 물이 들어가는 바람에 그 형상이 일그러졌지만, 나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대답했다.“내가 먹을게.”머리까지 감은 나는 수건으로 머리와 얼굴을 닦았다. 험하게 물기를 벗겨내자 헝클어진 머리들이 얼굴을 뒤덮었다. 나는 자꾸만 눈을 찌르려고 속눈썹을 거칠게 파고드는 머리카락들에게 혐오감이 들었다. 나는 한손에 걸려있던 수건을 걸이에 아무렇게나 걸고 부엌으로 갔다. 어제 먹었던 그릇을 설거지하고 있던 서주희가 놀라며 나에게 물었다.“무슨 일이세요?”“가위 있어?”“여기요.”방금 닦았는지 가위에는 물방울이 조금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가위를 받아들고 한쪽에 쌓여있는 신문지를 몇 장 꺼내어 화장실로 들어갔다. 세면대에 신문지를 2장정도 깔자, 세면대에 부분부분 고여 있던 물들이 빠르게 신문지에 스며들었다. 처리가 귀찮아지긴 하겠지만, 머리칼이 하수구를 막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신문지 덕분에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앞머리를 움켜쥐어 가위질을 하기 시작했다. 머리 손질정도는 군대에서 많이 잘라봤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나는 거울속의 나를 노려보며 어느 정도 과감하다 싶을 정도로 머리를 잘라냈다. 머리카락들이 간지러운 소리를 내며 잘려나가 신문지에 떨어졌다. 앞머리를 자르고 귀를 덮고 있던 옆머리를 자르고 뒷머리를 잘라냈다. 아무래도 잘 보이지 않아 뒷머리는 자신이 없었지만 머리의 무게가 한결 가벼워진 것을 느끼며 가위를 내려놓았다. 젖은 신문지엔 구불구불한 머리카락들이 엉켜 있었다. 그냥 보기만 해도 꽤 상당한 양이다. 나는 신문지로 머리카락을 싸고 대충 머리를 헹군 뒤에 화장실에서 나왔다.“뭐, 뭐에요?”설거지를 마치며 희원이에게 가고 있던 서주희가 내 모습을 보고 말했다. 서주희의 시선은 곧 내가 들고 있던 신문지로 옮겨졌다. 신문지로 싸긴 했지만, 여기저기 튀어나오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몇 가닥 머리칼이 있었다.“머리 잘랐어요?”“응, 거추장스러워서.”“그전보다 낫긴 하네요.”서주희는 잘 잘랐는지 확인하려는 듯 내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말했다.“뒷머리는 좀 엉성하지만.”그녀의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거지가 머리에 신경 써서 뭐한다고?”“거지도 등급이 있는 거 아니겠어요?”“등급?”“잘생긴 거지는 꽃 거지라고 하고 거지같이 생긴 거지는 상거지라고 하죠.”“나는 상거지가 좋아.”“내가 뒤 좀 마무리 해줘요? 저, 이래 뵈도 미대...”“밥이나 줘.”“왔다 갔다 하시긴.”서주희는 내 새끼손가락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머리칼 얼룩의 가위를 뺏어들고 다시 부엌으로 향했다. 나는 뒷머리가 뒷목에 닿지 않는 미묘한 기분을 느끼며 멍하니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마치 눈만 떠있고 몸들은 숙면을 취하는 그런 기분이었다. 머리에서 움직이라고 명령을 내리면 대규모 쿠데타가 일어날 것 같았다. 서주희가 곧 밥상을 차려서 나타났고 나는 비명을 지르는 손발들의 입을 막은 채로 밥상 앞에 앉았다. 나는 곧바로 숟가락을 들었지만 서주희는 희원이에게 다가가 어깨를 살짝 흔들며 깨웠다.“희원아, 밥 먹어야지.”나는 조용히 숟가락을 다시 내려놓았다. 희원이는 몇 차례 꿈틀거리더니 뾰루퉁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서주희에 의해서 일으켜 세워진 게 옳을 것이다.“얼른!”서주희가 재촉하자 희원이는 눈을 감은채로 손을 더듬더듬 휘저으며 밥상 앞에 앉았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눈을 감고 있던 희원이는 서주희가 가볍게 볼을 쥐어주자 눈을 떴다. 가늘게 눈을 뜨며 주변을 둘러보던 희원이는 나와 눈을 마주치자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어? 머리!”희원이의 외침에 나는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좀 잘랐어.”“처음 봤어요.”“봤어요?”어색한 희원이의 말투에 나는 의아해하며 서주희를 바라보았다. 서주희는 꽤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존댓말을 가르쳤어요. 언제까지 반말할 순 없잖아요.”“그래도 아직 애잖아.”“안 좋은 버릇은 어릴 때 고쳐야 된데요.”희원이는 우리 대화를 듣는지 안 듣는지 내 머리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한참을 살피던 희원이는 밥 먹기 직전에 혼잣말로 한 마디를 뱉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뒷머리가 이상해.” 밥 먹고 난 뒤에 나는 군말하지 않고 얌전히 앉아 서주희의 가위질을 기다렸다. 서주희는 꽤 심각하게 말했다.“이야... 이거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할지 모르겠는데요?”“안 이상하게 자르기만 하면 돼.”“그러니까 제가 말한 게 그거라고요.”“알았으니까 부탁해.”서주희는 자르면서도 계속 약 올리며 머리를 손질해 줬지만, 가위를 쥐고 있는 사람은 서주희였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까 들었던 가위질 소리가 자잘하게 들리더니 조금 시간이 걸린 후에야 멈추었다.“겨우 마무리 했네요. 다 됐어요.”서주희가 머리카락을 털어내며 말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 한쪽에서 책을 읽고 있는 희원이에게 다가가 말했다.“어때?”“괜찮아 졌어요.”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나는 양치질을 대충 하고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양복이 아닌 구걸하던 때에 입고 다니던 옷이었다. 서주희가 모자를 쓰는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나가게요?”“어, 당분간 형님한테 가 있으려고.”“그럼 안 들어오겠네요.”“그럴 수도 있고.”나는 대답을 하고 소지품을 챙긴 뒤에 훌쩍 밖으로 나왔다. 약간 습기가 있는 공기가 온몸에 스며들었다. 이 시간에 밖에 나오면 항상 피부로 숨을 쉬는 느낌이 들었다. 좋게 표현하면 상쾌하였고 솔직하게 표현하면 개구리가 된 기분이었다. 문득 아무렇게나 주머니에 넣었던 핸드폰이 생각나 꺼내어 확인을 해 보았다. 전화와 문자가 몇 통 와있었지만 확인을 하지 않은 채로 삭제를 했다. 잠시 잊고 있던 무거운 바위가 다시 속을 지그시 누르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정신만 멀쩡한 채로 다리를 질질 끌며 아침 모임 장소에 나왔다. 좀 이른 시간인데 누군가 와 있었다.“칠복이 아저씨?”“선후구나. 아니?”반갑게 나를 돌아보던 칠복이 아저씨의 표정이 금세 바뀌었다.“머리는 어떻게 된거야?”“갑갑해서 잘랐어요.”“모르는 사람 같군.”“그런가요?”“근데 머리칼이 얼굴을 안 가려주면 사람들한테 금방 들키지 않을까?”“괜찮아요. 수배서에 찍힌 사진도 머리가 긴 상태거든요.”“그건 그러네.”칠복이 아저씨는 진지하게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그런 모습에 웃으며 칠복이 아저씨에게 물었다.“그런데 왜 이렇게 빨리 오셨어요?”“이제 3일 밖에 안 남았잖아.”“3일?”“그놈 처리하는 거 말이야.”“......”“왠지 잠이 잘 오지 않더라고. 늦게 자도 일찍 눈이 떠지더라.”나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분명 나의 일인데 정작 나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속을 눌러대고 있는 바위를 던져버릴 순 없었지만 다시 한 번 정신을 차리기로 했다. 곧 다른 사람들도 모임에 도착하기 시작했고 다들 나를 보고 한 번씩 깜짝 놀랐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가벼운 웃음으로 넘겼다. 형님도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일단은 회의가 먼저라 회의부터 진행했다.“전파 내용은 일단 다른 안건부터 받고 시작하지. 별다른 내용 있나?”“유치장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다 돌아왔습니다요.”“음, 정말 고생 많았다. 정말.”형님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형님의 그런 모습에 사람들은 조금 의아해 했다. 나도 살짝 고개가 갸우뚱 거렸다.“다른 이야기 없으면 중대 발표를 하겠다.”갑자기 중대발표란 타이틀이 들러붙자 딴 짓을 하던 사람들도 하던 일을 멈추고 형님에게 집중했다. 낙엽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갑자기 조용한 공기가 흘렀고 형님은 헛기침으로 몇 차례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에 입을 열었다.“내 후임을 정하겠다.”“예?”즉각적으로 반응한 건 칠복이 형님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형님의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해져서 대꾸조차 못하고 있었다. 나도 잠시 공황이 와서 입만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곧 분위기는 수습되고 나름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 흥분하며 나섰다.“후임을 정하다뇨? 무슨 일 있으십니까?”“저희를 버리시는 겁니까?”“형님 말고는 따를 마음이 없습니다!”주변은 점점 시끄러워졌다. 나도 한마디 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주변의 분위기가 갑자기 산만해져서 굳이 내가 목소리를 낼 필요는 없어보였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형님을 살폈다. 형님은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채 조용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흥분하던 사람들도 그걸 깨달았는지 곧 다시 조용해졌다.“할 말 다 했으면 이제 내가 말해야 겠군. 먼저 후임을 정하는 것뿐이지 내가 물러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혹시 내가 자리를 비우게 된다거나 그러면 그 자리를 메우는 거야. 그리고 너희들도 아마 그 사람의 지도력에 의심을 하진 않을 것이다.”“그럼 누가 후임 입니까?”“일단은 성칠복. 그 다음은 조재덕 씨다.”조재덕 씨 라면 여기에서 가장 고령자였다. 조금의 수군거림이 있긴 했지만 모두가 불만은 없어보였다. 칠복이 아저씨는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있었고, 조재덕 씨는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잠시 우물쭈물하던 조재덕 씨가 일어나서 입을 열었다.“왜 후임이 2명이오? 한명이면 되지.”“칠복이랑 나는 행동을 자주 같이 하니까 우리 둘이 없으면 자네가 해야지.”“알겠네.”조재덕 씨는 수긍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 이후로 별다른 이야기는 오고가질 않았다. 그대로 회의를 마친 나는 내 구역으로 가지 않고 형님 뒤를 따라갔다. 가는 동안 대화는 오고 가지 않았고, 자리를 잡고 나서야 형님이 입을 열었다.“왜 따라 오냐? 거지 두 명이 같이 있으면 사람들은 돈을 안 줘.”나는 형님 옆에 털썩 주저앉아 거두절미하고 물었다.“이번 일 때문에 그러신 거죠?”“이번 일?”“전선기를 잡는 일 말입니다.”“잘 알고 있네. 왜 물어?”“형님은 유인까지만 하시면 됩니다. 그 이상 위험한 일은 안하셨으면 합니다.”나는 나름대로 비장하게 이야기를 했지만 형님은 피식 웃으며 내 뒤통수를 후렸다.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순간적으로 눈알이 제대로 박혀있나 손으로 확인을 했을 정도였다.“니가 많이 크긴 컸구나. 내 걱정이나 하고.”나는 뭐라고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정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아파서 형님이 하는 말을 계속 듣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형님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내 걱정은 말고 니 걱정이나 해라. 난 이번 일에 뛰어들면서 니 걱정은 해도 내 걱정은 한적 없다.”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말했다.“하지만 이건 개인적인 복수입니다. 형님까지 괜히 위험하게 만들 순 없습니다.”“니가 내 밑에 있는 이상 절대 개인적인 복수가 아니다.”나는 형님의 말을 듣고 목소리가 탁 막히고 말았다. 더 이상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뒤통수에서 느껴지던 아픔은 아련함이 되어 눈물샘을 콕콕 찌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벌떡 일어났다.“가보겠습니다.”“그래.”먹먹한 속을 애써 삼키며 나는 내 구역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텅 빈 깡통을 내 앞에 두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지금은 전선기에 대해서만 생각하기로 했다. 형님이 저렇게 까지 각오를 하고 계신데 다른 감정 때문에 일을 그르칠 순 없었다. 속으로 전선기를 어떻게 죽일지 수백, 수천 번 그려냈다."야."갑자기 누군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들어보려 했는데 무슨 일인지 뻣뻣해서 도무지 고개가 들리지 않았다."새끼, 뭐해? 밥은 먹었냐?"겨우겨우 고개를 들어보자 칠복이 아저씨가 동전으로 반쯤 차있는 깡통을 들고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삐걱거리는 몸을 적당히 풀면서 말했다."밥이요?""그래 임마. 너 깡통은 어디 갔어?""깡통."주변을 둘러보니 깡통은 보이지 않았다.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깡통은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던져줬는지 백원짜리 몇 개가 차가운 바닥을 뒹굴고 있을 뿐이었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 지금 벌써 5시야.""5시! 벌써요?""벌써 라니, 시간 안가서 죽는 줄 알았는데."아무래도 전선기의 생각에 몰두하다가 시간가는 줄도 몰랐던 것 같다. 어쩐지 몸이 이상하리만큼 굳어 있었다. 나는 스트레칭도 할 겸 짧은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동을 줘가며 허리를 돌리고 있는데 문득 궁금한게 생겨서 물었다."근데 무슨 일로 오셨어요? 저녁 모임 되려면 한참 남았는데.""가기 전에 잠깐 이야기좀 하려고 그런다.""무슨 이야기요?""형님이 뭐라고 하시든?"나는 칠복이 아저씨에게 아까 형님과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칠복이 아저씨는 평소답지 않게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무겁게 끄덕거렸다. 나는 칠복이 아저씨의 반응에 뭐라도 말하려 했지만 칠복이 아저씨가 먼저 말했다."걱정 말고."칠복이 아저씨와 저녁 모임에 가고 밥도 같이 먹었지만, 칠복이 아저씨는 더 말을 하지 않았다. 주변 노숙인들이 말을 걸어와도 평소답지 않게 단답으로 일관했다. 나는 오늘은 아니다 싶어 더 이상 말하지 않기로 했다. 모임이 끝나고 형님과 돌아오는 길에도 형님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편히 쉬라는 인사를 하고 자판기 옆 내 자리로 와서 자리를 깔았다. 간만에 느껴지는 대리석의 스산한 기운이 등짝을 적셔왔다. 오랜만에 내 자리에서 자서 그런지 잠은 금방 왔던 걸로 기억한다. 자리가 불편하긴 했지만 오른편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자판기의 온기도 숙면을 취하는데 도움을 줬던 것 같다. 예상 밖으로 편하게 자서 그런지 일찍 일어나게 되었다. 점점 열대야가 사라지고 며칠 전부터 어둑어둑 했던 하늘이 태양의 온기를 막아주고 있었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몸을 풀어주고 간단한 체조를 해서 몸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기둥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니 아직 형님을 깨우기에는 이르다. 나는 챙겨온 담배를 꺼내어 몇 개비가 남았는지 확인해 보았다. 오랫동안 주머니에 넣어놔서 그런지 쭈글쭈글 해진 담뱃갑에는 허리가 조금 꺾인 담배가 3개비 들어 있었다. 나는 그중에 하나를 꺼내어 조심스럽게 척추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에 입에 물었다.“라이터가...”주머니를 여기저기 뒤져보았지만 라이터는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나는 짜증을 느끼며 두어 번 더 모든 주머니를 뒤진 뒤에야 바지 뒷주머니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지하철을 빠져나와 조금 급하게 담배에 불을 댕겼다. 밖에 나와 보니 날씨가 조금 쌀쌀해 손이 저절로 주머니에 들어갔다.“날씨가 요즘 왜 이래?”가을이 다가오고 있긴 했지만 하늘은 파란 가을 하늘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벌써 수일동안 비는 내리지 않고 먹구름만 하늘에 둥둥 떠다니며 땅에 그림자를 흘리고 다녔다. 나는 조금 추워서 담배를 금방 펴버렸다. 다시 지하철로 내려오니 형님이 일어나서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나는 얼른 붙어서 정리를 도왔다. 형님은 조금 피로한지 눈밑에 어두침침한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걱정이 되어 말했다.“피곤해 보이는데 좀 더 쉬시죠.”“됐어. 어차피 잠도 안 올거야.”형님도 내가 했던 것처럼 가벼운 스트레칭과 체조로 몸을 풀었다. 우리는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먼저 모임 장소로 가 있기로 했다. 모임 장소에 도착한 형님은 잠시 망설이더니 나에게 말했다.“너 계속 여기 올거냐?”“그럼 와야죠. 당연한 일인데요.”“중요한 일 앞두고 있는데, 이렇게 시간 보내면 좀...”형님은 말꼬리를 흘렸다. 나는 형님이 말하는 바를 알 것 같았다. 나는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다. 이번 일에서 위험요소는 당연히 내가 가장 컸다. 나는 잠시 생각하고 말했다.“어떤 말 하고 싶으신지 알겠습니다.”“알면 됐다. 어떻게 할래?”형님이 되묻자 나는 다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와서 갑자기 뭘 하겠느냐고 물으면 누구나 깊은 생각에 빠질 것이다. 그러다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가보고 싶은 곳이 있긴 합니다.”“그럼 가봐.”“네.”형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장 지하철로 들어갔다. 그리고 편의점에 들어갔다.“어서오세요.”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의 지루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남자는 내 행색을 보고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나는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원래는 한은이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곳이었다. 나는 다소 씁쓸함을 느끼며 소주 2병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한기가 손가락을 감쌀 즈음에 나는 소주병을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그리곤 아르바이트생이 가격을 말하기도 전에 꾸깃꾸깃한 만원을 내밀었다. 아르바이트생도 나와 별로 말을 섞고 싶지 않은지 거스름돈만 내어주었다. 나는 소주병을 검은 봉투에 담고 편의점을 나섰다.“어떻게 가더라?”나는 잠시 지하철 노선도를 보면서 어떻게 가야할지 생각에 빠졌다. 이곳에서 시외버스 터미널은 그렇게 멀지 않았다. 하지만 서울을 벗어날 땐 차만 이용해봐서 터미널은 초행길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노선과 장소를 몇 차례 거듭 확인을 하고 지하철에 올랐다. 사람들은 내 행색을 한번 흘끗 볼 뿐, 의심의 눈은 없었다. 그래도 나는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한쪽 구석에 가서 조용히 내릴 역을 기다렸다. 별일 없이 터미널 역을 찾아간 나는 목적지의 표를 끊고 의자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 차 시간을 기다렸다. 버스는 10분 후에 도착할 것 같았다. 가만히 있기를 몇 분, 시간이 지루해져서 나는 옛날 버릇처럼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내들었다.“......”핸드폰을 가득 채운 여러 가지 숫자에 잠시 잊고 있었던 거대한 바위가 다시 가슴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핸드폰엔 메시지 몇 통과 부재중 전화 몇 통이 와있었다. 연락이 온 곳은 모두 김경은에게 온 것이었다.나는 전에 했던 것처럼 내용을 확인하지 않고 지우려 했지만 이번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나는 큰 죄를 지은 것처럼 조심스럽게 메시지를 확인하려 했다.“어?”무슨 우연인지 핸드폰이 그대로 꺼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핸드폰을 켜봤지만 전원은 켜지질 않았다. 아무래도 전화와 메시지가 계속 오는 바람에 수명이 다한 것 같았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핸드폰과 권총이 주머니 안에서 부딪히며 거친 비명소리를 질렀다.곧 버스는 도착했고 나는 표에 적인 내 좌석번호를 찾아서 자리에 앉았다. 뒤에서 3번째 창가 자리였다.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내다보며 앉아있는데 유난히 힐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나는 소리에 반응하여 그쪽 방향을 쳐다보니 높은 힐을 신은 한 여성이 나와 자신의 좌석표를 흘끗 보더니 머뭇거리고 있었다. 나는 혹시 내가 잘못 탔나 싶어서 표를 확인해 봤지만 나는 내 자리에 제대로 탔다. 의문이 들어 물어보려 했지만 금방 이유를 깨닫고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이 여자의 자리는 아마도 내 옆자리일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자리 옆에 걸인 행색의 한 남자가 앉아 있으니 앉기가 꺼려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곧 다른 자리로 갔고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감각이 코로 집중되어 버스 특유의 인조가죽 냄새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그 냄새는 마치 수면제처럼 내 머릿속을 침투해 휘저어놓았다.중간 중간에 잠에서 깨긴 했지만 그건 덜컹거리는 충격에 잠깐 눈이 떠진 것뿐이었다. 내 옆자리엔 어느새 이등병 한명이 각을 잡고 앉아 있었고 나는 오히려 편안해져서 푹 잘 수 있었다. 한참을 자고 있는데 누군가 툭툭 건드리는 소리가 들려 눈을 떠보았다.“저기, 도착했습니다.”날 건드리는 사람을 보니 내 옆에 앉아있던 이등병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난처함이 가득했다. 나는 하품을 늘어지게 한 후에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고맙네.”“이병 한...! 아닙니다!”나는 그의 반응에 피식 웃으며 버스에서 내렸다. 내가 내린 버스 터미널은 만들어진지 꽤 오래되어 보이는 터미널이었다. 터미널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얼굴에 주름이 그윽한 노인들이 대부분 이었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한쪽에 형형색색의 보따리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터미널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하고 시내버스를 탔다. 시내버스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나는 일부러 버스기사 바로 뒷좌석에 앉아 가는 길을 잘 살폈다. 형식이한테 이야기만 들었지 와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나는 버스기사에게 물었다.“저 이 근처에 강이 하나 있다고 들었는데요.”“강이요? 예, 있죠. 좁은 동네라 강이라고는 그 곳 뿐일 겁니다.”“그렇죠? 거기로 가려면 언제 내려야 합니까?”“제가 말씀드릴 테니 그때 내리시면 될 거요.”“감사합니다.”버스기사는 좁은 동네라고 했었지만 상당히 오래 가서 나는 버스에서 내렸다. 내가 내린 곳은 버스 정류장의 의미가 있나 의심이 갈 정도로 외딴 곳에 있었다. 하지만 내리고 나니 폭이 넓은 강이 한눈에 보였다. 나는 형식이가 말해준 이정표를 쫓아 걸음을 옮겼다. 한걸음 걸을 때마다 봉지 안에 든 소주병들이 사이좋은 소리를 냈다. 이정표의 목적지엔 이미 누군가가 와서 앉아 있었다. 나는 누군가 싶어 소리 나지 않게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를 알아보고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이 반장님.”“응? 선후 아니냐?”이 반장은 처음엔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침착하게 자리를 권했다. 나는 가벼운 묵념을 한 뒤에 그의 옆에 앉았다.“여긴 무슨 일이냐?”“꼭 한번은 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오늘은 일하는 날 아니세요?”“나도 한번 와봐야 할 것 같아서 휴가 썼다.”“요즘은 좀 덜 바쁘신가 보군요.”“그게 니가 할 소리냐? 지금 너 때문에 제일 바빠. 어디를 그렇게 쏘다니기에 신고가 매일 들어오냐?”“하핫, 그래요?”“웃지 마, 정들어.”이 반장을 여기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이 반장은 저번에 내가 가짜 전선기를 죽인 후에 나와 인연을 끊었었다. 하지만 이렇게 보게 되니 반가운 건 이 반장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나로선 조용히 할 일만 하고 가려 했는데 말동무가 생겨서 마음이 편해졌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이 반장이 입을 열었다.“하는 일은 잘 되냐?”“네 잘 됩니다. 잘 될 거구요.”“나만 바빠지겠구먼.”이 반장은 체념하듯 크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강 너머 절벽에 부딪혀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곤 했다. 이 반장은 곧 웃음을 거두고 한숨을 뱉듯 말했다.“성훈이 보러온 거 아니야? 네 누나하고.”“맞아요.”“그럼 이야기라도 좀 나눠.”이 강은 성훈이와 누나를 뿌린 곳이었다. 나는 가지고 온 소주의 뚜껑을 열어서 강물에 흘려보냈다. 뭔가 형용할 수 없는 몸속의 온기가 술과 함께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두병을 다 흘려보낸 나는 잠깐 묵념을 하고 한숨을 쉬며 다시 이 반장 옆에 앉았다. 언제 꺼내들었는지 이 반장은 입에 담배를 물고 있었고, 나도 담배를 하나 꺼냈다. 라이터를 주머니에서 찾으려 하는데 이 반장이 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 크게 담배연기를 뱉어낸 이 반장이 나에게 말했다.“그래. 결국 끝을 볼거냐?”“예. 끝을 봐야죠.”“안하면 안 되겠나?”그 말을 하는 이 반장의 눈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나는 곧장 대답하려 했지만 무슨 이유인지 망설여졌다. 잠시 망설인 나는 웃으며 대답을 했다.“해야겠네요.”내 말에 이 반장은 마지막 한모금을 빨아들이고 담배를 털어냈다. 나는 왜 잠시 망설였는지 갑자기 의문이 들어 연거푸 담배를 빨아들였다. 이 반장이 그런 나를 보고 말했다.“뭐가 그렇게 급해? 천천히 펴.”“예.”대답을 하긴 했지만 이미 담배는 필터에 닿아 있었다. 나는 담배를 털어내고 꽁초를 뒤로 던졌다. 바람은 점점 차가워졌고 이 반장과 나와의 말 수도 점점 줄어들었다. 나중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점점 핏빛으로 변하는 강물만 바라보았다. 날이 점점 저물자 이 반장이 일어나며 말했다.“이제 가야지. 태워줄까?”“감사합니다.”길가로 나오자 이 반장의 차가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채로 있었다. 나는 조수석에 올라탔고 이 반장은 말없이 운전을 했다. 딱히 조수석에서 졸은 건 아니었지만 우리는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색한 공기가 흐르거나 하진 않았다. 서로가 각자의 생각을 하느라 바쁜 것이었다. 내릴 때가 되어서야 나는 형님에게 말했다.“감사합니다. 여기에서 내릴게요.”“그래.”“몸조심하시고요.”차의 문을 열고 이제 내리려고 하는데 다급한 이 반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선후야.”나는 내리다 말고 이 반장을 돌아봤다. 이 반장은 앞을 바라본 채 말했다.“물론 잃어버린 사람들도 중요하지만, 니 옆에 사람들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나는 그 말을 듣고 뭐라고 대답하려 했지만 그대로 문을 닫아버리고 말았다. 문이 닫히자마자 차는 출발했고 나는 한참동안 그 차의 뒷모습을 보다가 지하철로 돌아왔다. 한쪽엔 형님이 자리를 깔고 누워있었다.“왔습니다.”“저녁은?”“지금 먹고 오겠습니다.”질척거리는 밥을 참치와 함께 씹을 때도, 피로에 흘러내리는 몸뚱이를 두터운 박스위에 뉘일 때도 이 반장이 했던 말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시간이 멈춰 버린 듯 멍하게 머릿속만 바쁘게 움직였지만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갔다. 6
룸메이트 - (35화)
출처 ; 웃대(인생사프리님)
제가읽었던 이야기들중 재미나게 본 이야기입니다.
스크롤 압박이 있어요..^^
룸메이트 1화 ; http://pann.nate.com/b318390630
룸메이트 11화 ; http://pann.nate.com/b318393961
룸메이트 21화 ; http://pann.nate.com/b318396686
어느새 전선기의 존재는 별로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지금 알고 싶은 건 김경은이 여기에 와 있는 이유였다.
별로 배고픈 상태도 아니었는데 침이 꼴딱 넘어갔다. 이야기는 이미 시작했는지 모두 미소를 띈 채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뒤에 서있는 덩치들은 여전히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전선기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지 온몸을 써가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형님은 살짝 건방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들은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님이 전선기에게 악수를 권했고, 전선기는 서둘러 두 손으로 형님의 손을 잡았다.
전선기의 표정이 만족스럽지 못한 걸로 보아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한 것 같았다. 전선기가 가게에서 나오자 나는 재빨리 적당한 곳에 숨어서 마스크를 착용했다.
그들이 밖에 나오자 대화 내용이 들렸다. 먼저 전선기가 안절부절 못하며 말했다.
“그럼 다음엔 언제 뵐 수 있겠습니까?”
“뭐가 그렇게 급하세요? 천천히 합시다.”
“저는 장사꾼입니다. 하루만 재고가 펑크나도 곤란해요.”
“알겠습니다. 그럼 당장은 저도 곤란하니 4일 후에 다시 뵙죠.”
형님의 말에 전선기는 급하게 김경은에게 무언가 손짓을 했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핸드폰을 잠시 보고는 말했다.
“토요일입니다.”
그 말을 듣고 전선기의 표정이 조금 펴지더니 말했다.
“좋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악수를 다시 나누고 헤어졌다. 형님은 자연스럽게 칠복이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며 원룸방향으로 향했다.
하지만 나에게 형님의 방향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주머니에 자리를 잡고 있는 권총을 매만지며 전선기를 추적했다.
어느새 전선기의 차는 카페 앞에 나와 있었다. 그녀는 앞좌석에 탔고 전선기는 덩치들을 사이에 끼어 차량에 탑승을 했다.
나는 택시에 오르며 기사에게 말했다.
“제가 말하는 방향으로만 가주세요.”
택시기사는 조금 이상한 눈빛으로 날 쳐다봤지만, 마스크를 쓰고 있기 때문에 내 얼굴을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택시기사는 고민하지 않고 내가 말하는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나는 미행하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살짝 쳐진 채로 추격을 했다.
방향을 보니 가게 방향으로 가는 모양이었다. 나는 아예 택시기사에게 가게 앞으로 가라고 말을 하려던 참이었다.
“어?”
전선기의 차량이 갑자기 방향을 바꿔서 공원 쪽으로 향했다. 가게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공원이었다.
나는 들킨 건가 싶어 조심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이후의 주행이 너무 부드러워 걱정을 접었다.
전선기의 차는 공원 안까지 들어갔고, 나는 공원입구에서 내렸다.
어차피 공원에서는 고속으로 주행을 할 수 없으므로 조금만 신경 쓰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차량은 멀리 가지 않고 멈췄다. 나는 차가 멈춘 장소를 보고 맥이 풀려 버렸다.
“화장실?”
갑자기 방향을 바꾼 이유는 누군가 급하게 화장실을 가고 싶어서 그런 것 같았다.
차에서 먼저 덩치들과 김경은이 내렸고 전선기는 덩치들에게 무슨 말을 하더니 화장실로 들어갔다.
전선기에게 무슨 말을 전해들은 덩치들이 차로 들어갔다. 조금 접근해서 뭘 하나 봤더니 캔으로 된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반면에 그녀는 화장실 앞에서 전선기가 나오길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조금 지루한지 바닥을 보며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고, 덩치들은 자기들끼리 껄껄 웃고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긴장이 온몸을 감쌌다.
“지금인가?”
물론 오늘이 날은 아니었지만 형님은 분명이 허점이 생기면 즉시 행동으로 옮기라고 했다.
화장실엔 전선기가 무방비 상태로 들어가 있었다. 지금 화장실이 급한 척 따라 들어가면 전선기를 죽일 수 있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속주머니의 권총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화장실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선기의 차는 가게로 돌아가는지 부드럽게 이동을 했다. 나는 결국 화장실로 들어가지 못했다.
화장실 앞에 서있는 김경은에게 죽은 전선기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마지막 기회를 놓쳐버린 것 일지도 몰랐다.
“바보 같은 놈.”
나는 이미 떠나버린 화장실 앞에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여기저기서 매미가 내 신세를 놀리듯 울어 제끼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꺼내든 권총을 체념하며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후회가 되던 안 되든 이미 지나버린 일이다.
나는 기운이 빠진 채로 휘적휘적 지하철로 이동했다. 형님은 그 사이에 옷을 갈아입었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그 옆에 박스도 깔지 않은 채 털썩 주저앉았다.
“내 옷 더러워진다.”
“제거니까 걱정 마세요.”
내가 입고 있는 옷은 죽은 민창수의 고급 양복이었다. 형님은 피식 웃으며 나를 보았다.
“어떻게 됐냐?”
“못 죽였어요.”
“그래?”
아마 못 죽였다는 것 보다는 안 죽였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형님은 나에게 그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슬그머니 형님의 얼굴을 쳐다보니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 나는 내심 안도하며 말했다.
“토요일이 보기로 하셨어요?”
“그래. 아마도 내가 마지막으로 도와줄 수 있는 날 일거다.”
“어려울 것 같으면 바로 접고 다음을 노리면 되죠.”
형님은 내 말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지나가는 행인이 던져준 50원짜리 동전에 감사하다는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나는 형님과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적한 곳이 필요할 때면 항상 가는 공원의 벤치에 갔다.
그리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송신음이 꽤 오래 들리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접니다.”
그녀의 목소리였다. 나는 왜 그녀가 그 자리에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녀는 지금 바쁜 시간으로 보였다.
주변에서 왁자지껄한 손님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알아요. 전화 받을 때 전화번호가 뜨거든요. 무슨 일 이세요?
그녀는 바쁜 상황이었지만 일부로 여유가 있는 목소리로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에서 재촉하는 손님들의 말이 들리는 걸로 보아서 여유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끝나고 잠깐 이야기 할게 있습니다.”
--알겠어요.
“끝나는 시간에 항상 보던 곳에서 뵙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고도 한참동안 벤치에 앉아 곰곰이 생각을 했다.
그 많은 사원들 중에서 전선기의 수행원으로 따라올 정도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전선기와 연결이 되어 있을 것 같았다.
가게가 오픈한지 오래된 일도 아니고 아마 거의가 동기와 같은 개념일 것이다.
나는 함부로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지만, 혹시나 하는 상황에 마음을 단단히 먹기로 했다. 최악의 경우에는 그녀의 입을 막아야 하는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저녁밥을 먹어야 한다는 것 조차 잊어버렸다. 그녀를 데리러 갈 때 배고프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 아파트의 정자로 자리를 옮겼다.
“조금 빨리왔나?”
시간을 보니 생각보다 빨리 온 것 같았다.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기엔 애매한 시간이다.
하지만 곧 멀리에서 그녀가 오는 게 보였다. 그녀는 미소를 띠며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일찍 오셨네요? 오늘 회식 있어서 일찍 끝났어요.”
“회식이요? 거기 가봐야 되는 거 아니에요?”
“괜찮아요. 오늘 힘든 일도 했고.”
그녀는 가볍게 기지개를 폈다.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말했다.
“그럼 식사는 안 하셨겠어요. 회식 있는 날에는 저녁을 보통 안 주잖아요.”
“맞아요. 사실 좀 배고파요.”
“그럼 식사나 하러 가실래요?”
“좋아요!”
그녀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을 했다. 우리는 택시를 잡고 가게에서 다소 떨어진 가게로 가기로 했다.
물론 내가 일부로 아는 곳으로 갔다.. 그녀는 택시를 타자마자 나에게 말했다.
“아는 가게가 많으시네요.”
“예. 찾아다니면서 먹는 걸 좋아해서요.”
“애인이랑 가본 거 아니에요?”
그녀의 말에 나는 잠시 감상에 빠졌다. 내가 애인이란 걸 곁에 둔지가 언제였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고등학교 때는 죽자고 놀기만 해서 많이 사귀긴 했지만 지금 되돌아보니 애들 장난이었을 뿐이다.
집안 사정 때문에 대학교를 포기하고 경찰 시험을 보겠다고 마음을 먹고 헤어진 게 마지막이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생각만 하고 있자, 그녀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뭐야, 진짜에요?”
“아니에요. 애인이 언제 있었는지 생각 좀 했어요.”
내 말에 그녀는 웃고 말았다. 택시 기사의 어깨를 보니 들썩거리는 게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뭐가 웃긴지 모른 채 택시에서 내렸다. 내가 아는 식당은 횟집이었다. 언젠가 형식이랑 왔던 곳이다.
분위기가 꽤나 좋아서 들렸는데, 엄청난 바가지만 뒤집어쓰고 나갔던 곳이다.
그 당시에 싸웠던 식당 사장에게 듣던 말로는 물고기의 품질이 좋다고 하는데, 밥을 의무적으로 먹는 우리로써는 상상하기가 힘든 가격이었다.
이곳도 다시 오게 될 줄은 몰랐다. 들어가자마자 가게의 사장이 인사를 하다가 나를 보고 흠칫 놀래며 말했다.
“오랜만이네요?”
나는 탐탁지 않아 보이는 사장의 말투에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네요. 잘 지내셨어요?”
“그때 잘 먹고 잘 살라고 했잖아요. 잘 먹고 잘살고 있습니다.”
가시가 돋친 사장의 말에 나는 웃음으로 넘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내 옆에서 의아해 하고 있자 나는 얼른 그녀를 자리에 앉히며 사장이 들으라는 투로 말했다.
“여기 물고기는 다른 횟집과는 달라요. 맛은 제가 보장합니다.”
“그래요? 제가 회를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그거야 뭐...”
나는 대답을 하면서도 사장의 눈치를 보기 급급했다. 하지만 사장은 이미 마음이 풀린 듯 내 쪽을 보며 허허 웃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안도 하였다. 곧 참돔회가 나왔고, 가게 사장이 직접 접시를 들고 나타났다.
“맛있게 드세요.”
그녀는 접시를 보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좀 많은데요? 우린 이렇게 많이 안 시켰는데요.”
“서비스입니다. 이 분이랑 잘 아는 사이거든요.”
정말 양이 많긴 많았다. 둘이서 이걸 어떻게 다 먹나 싶을 정도였다.
그녀는 젓가락을 들고 회를 집으려다가 나를 보더니 다시 젓가락을 식탁에 내려놨다.
뭔가 할 말이 있는지 내려놓는 젓가락에서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
“할 말 있죠?”
“예?”
“그것도 꽤 심각한 일. 먹다가 들으면 채할 것 같으니까 지금 말해요. 그러고 먹을게요.”
“심각한 일은 아니에요.”
물론 나에겐 무척이나 심각한 일이었다.
먼저 저렇게 말을 꺼내니 당황스럽긴 했지만 어떻게 말을 꺼낼까 생각하던 나에겐 좋았다.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오늘 무슨 일 했어요?”
“할 말이 그거에요?”
“네. 자세히 알고 싶네요.”
그녀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잠시 생각을 하곤 말했다.
“아침에 출근해서 매장 일 보다가 사장님이 거래처에 일을 보시는데 따라갔어요. 그러고 다시 매장에 돌아와서 일을 하고 여기로 왔죠.”
“거래처에 경은씨도 갔어요?”
“네. 제 순번이었거든요.”
“순번?”
“요즘 사장님이 거래처에 일이 많으세요. 근데 만나면 남자들끼리 있기 마련이라서 여성 직원을 돌아가면서 수행시켜요.”
“그렇군요.”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야 안도감이 들었다. 전선기를 쏘지 못한 게 오늘 하루 종일 신경 쓰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야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요?”
“카페 안에 가게 사장이랑 있는 걸 봤어요.”
“그러셨구나.”
그녀는 잠깐 나를 쳐다보고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우리는 회를 먹기 시작했다.
왠지 이상하게 회를 먹는 그녀에게서 이상한 기류가 느껴지긴 했지만, 크게 신경 쓰이진 않았다.
그 많던 회를 다 먹은 뒤 지갑을 꺼내는 그녀를 만류하고 계산을 했다.
차가운 회로 배를 채우다보니 조금 더부룩하긴 했지만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계산을 마치고 그녀를 돌아보니 활짝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잘 먹었어요. 회로 이렇게 배부른 적은 처음인 것 같아요.”
“잘 됐군요. 저도 잘 왔다고 생각합니다.”
김경은에 대한 오해도 풀었고, 정말 오랜만에 회도 진탕 먹었으니 이 이상 좋은 일은 앞으로 없을 것 같았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나는 길가로 가서 택시를 잡으려 했다. 그런데 뒤에서 김경은이 나를 잡았다.
“잠시 만요.”
“네?”
“걸어가면 안 될까요? 소화도 시킬 겸 걷고 싶은데.”
“힐이 높으시잖아요. 괜찮으시겠어요?”
내가 그녀의 힐을 가리키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미소 띤 얼굴로 핸드백을 뒤적거렸다. 조금 무거워 보이던 핸드백에선 분홍색의 깨끗한 작은 운동화가 나왔다.
발이 작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신발을 직접보자 상당히 작은 것 같았다. 그녀는 신발을 갈아 신고 하이힐을 핸드백에 넣었다.
그리고 운동화를 신은 채 제자리에서 가볍게 뛰며 말했다.
“이거 신으면 돼요.”
“옷이랑 좀 안 어울리는데요.”
그녀가 지금 입은 옷은 조금 어두운 색의 정장이었는데 확 튀는 신발을 신으니 좀 어색해보이긴 했다.
하지만 그녀는 발이 편안해져서 좋은지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저녁이라 보는 사람도 없는데.”
“그렇긴 하군요.”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긴 했지만 아직 문제는 남아있었다. 택시를 타고 와서 금방 오긴 했지만 그녀의 집까지는 걸어가려면 꽤 걸릴 것이다.
지금도 조금 늦은 시간인데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일단 걸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조금 오래 걸리지 않을까요?”
“괜찮아요.”
별로 걷진 않았지만 짧은 대답에서 그녀의 상태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평소에 많이 걷지 않는 것 같았다.
벌써 호흡이 커지고 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얼마나 걸을 수 있는지 볼 요량으로 가만히 있기로 했다.
난 말을 하면 더 힘들어질까봐 일부러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요즘 하시는 일 있으시죠?”
“있긴 있죠.”
“중요한 일 같아서요. 무슨 일이에요?”
“잘 되면 이야기 해 줄게요. 아직은 모르는 일이라.”
전선기에 대한 일이라고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기에도 마음이 좋지 않아서 얼버무리려고 했는데 그녀가 아쉬운 듯 물었다.
“그럼 잘 되고 있는지만 말해줘요.”
나는 잠깐 생각해보고 그 정도는 괜찮겠다 싶어 대답했다.
“잘 되고 있는 편이죠. 곧 끝날 것 같은데요.”
“잘됐네요.”
그녀는 힘든 와중에도 활짝 웃으며 축하해 주었다. 나는 축하받을 일도 아니었지만 고개를 가볍게 숙여서 감사를 표했다.
그 이후로의 대화는 없었다. 그녀는 걷는데 쏟는 호흡도 벅차 보였고 결국 나는 근처에서 택시를 잡았다.
택시를 타자마자 그녀의 한숨과 함께 실망한 듯 한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에 운동 좀 할 걸 그랬어요. 이것도 힘들어하다니.”
“다른 사람들 보다는 잘 걷던데요.”
“빈말 같은데요?”
“아니요. 정말이에요.”
“다른 사람이라니. 누구요?”
물론 같은 강력계에 있던 여형사와 비교를 하면 안 되는 일이다. 나는 잠시 누나가 생각이 났었다.
같이 길을 걷던 일은 거의 없었지만 종종 같이 걸을 때면 두 블록도 걷기 전에 힘들다고 투정부리던 누나가 생각이 났다.
지금 생각하니 웃음이 나긴 했지만 곧 우울해지고 말았다. 나는 표정을 숨기고 얼른 둘러댔다.
“그냥 주변의 여자들.”
“주변의 여자들?”
나는 아차하고 말았다. 뭔가 질척거리는 늪 속에 한 발을 담근 기분이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냥 일하다가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요?”
딱히 좋은 핑계는 아니었다. 그건 스스로도 인정할만한 일이었다. 그녀도 여전히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분명 나는 잘못한 일이 없지만 나도 모르게 죄인처럼 침이 넘어갔다.
형사시절에 침을 삼킨다고 범인으로 몰아갔던 사람들에게 사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구세주 같은 택시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 왔습니다. 여기에서 내려드릴까요?”
“예! 그렇게 해주세요.”
나는 너무 고마운 나머지 택시기사에게 만 원짜리를 다 주고 싶었지만 요금이 정확히 만원이 나오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아쉽게 돈을 건넸지만 택시기사는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아뇨, 제가 감사합니다. 안전운행하세요.”
내리자마자 나는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왜 여기에서 내린 거예요?”
그녀는 집 앞을 목적지로 말하지 않고 약간 떨어진 곳에서 내리자고 했었다. 그녀는 운동화가 신겨진 다리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기껏 신발까지 샀는데 그냥 들어가기엔 아까워서요.”
이해가 안가는 건 아니었지만 이미 시간이 꽤 늦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옆에서 해맑게 웃으며 걷는 걸 보자, 반박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도 알았다.
나는 최대한 천천히 걸으며 힘들지 않도록 해주었다. 호흡이 안정되자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오늘 했던 일은 잘 풀렸어요?”
내 말에 그녀는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아뇨, 전혀 안됐어요. 만났던 사람들이 능구렁이 같았다고 할까?”
“왜요?”
“일방적으로 계약 파기를 했었거든요. 막, 배상금도 주면 된다는 둥 아쉬울 게 없는 것처럼 말하더라고요.”
확실히 형님은 아쉬울 게 없었다. 전선기가 어떻게 나올 줄 알고 상황을 그렇게 만들어버린 것 같았다.
사실 카페 안의 대화가 그렇게 궁금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좀 들으니 자세히 알고 싶어 졌다.
“그래서 결론이 어떻게 났어요?”
“사장님이 계속 설득을 하는데, 계속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한다고 했어요. 우리가 먼저 약속을 잡았는데 다른 약속이 있다나 뭐라나.”
“그럼 다시 만나겠네요?”
“그러기로 했어요. 4일 뒤에. 근데 저는 안 갈 거예요. 이야기 듣는데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거든요.”
“그렇게 답답했어요?”
“막 동문서답하고 약간이라도 불리하다 싶으면 가봐야 한다고 하고... 아마 조금만 더 이야기 했으면 제가 소리 지를 뻔 했어요.”
이야기를 들으니 형님은 다음에 만날 약속을 잡기 위해 불리한 이야기는 하나도 안들은 것 같았다.
그녀는 열을 올리며 계속 이야기를 하다가 깜짝 놀라며 입을 막았다. 나는 그런 모습이 의아해서 물었다.
“왜 그러세요?”
“사장님이 남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었어요.”
“에이, 제가 남이에요? 실망이네요.”
내 말에 그녀는 크게 당황하였다. 그녀는 양 손을 크게 저어가며 부정의 뜻을 표시했고 나는 장난이라는 뜻으로 피식 웃었다.
결국 우리는 5분이면 될 거리를 20분 가까이 걷고 말았다. 집 앞에서 그녀는 자랑하듯 말했다.
“오늘은 정말 운동을 제대로 한 것 같아요.”
“꾸준하게 하셔야겠어요.”
내가 장난 투로 말했지만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장난으로 한 말에 분위기가 심각해져 버리자 나는 오히려 당황했다.
잠시 심각해있던 그녀는 나를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같이 해 주실 거예요?”
“그러겠습니다.”
“운동 말구요.”
“예?”
“저와 같이 하실래요?”
아까부터 그녀에게서 느껴졌던 이상한 기류가 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었지만 누구라도 알 수 있는 느낌이었다.
빛이 거의 있지 않았는데도 그녀의 얼굴이 빨개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땅에 꽂은 채로 초조하게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그녀에게 접근한 이유가 전선기에 대한 정보를 빼오기 위한 일이었지만 그녀에게 호감이 없는 건 아니었다.
가끔씩은 깜짝 놀랄 정도로 잘 맞았다. 신세가 이렇지 않았다면 내가 먼저 말을 꺼냈을 일이다.
하지만 나는 살인범으로 수배중이고, 이번 일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몰랐다.
아마 지금 이 시간에도 경찰들의 수사망은 좁혀 들어오고 있을 것이다. 나는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잠깐만요.”
그녀는 나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땅을 향하던 시선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충혈된 눈에는 눈물방울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었다. 가슴이 찌그러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선후 씨 상황 같은 거 신경 쓰지 않고 말한 거예요. 그러니 선후 씨도 다른 거 생각하지 말고, 나만 보고 대답해주세요.”
“......”
나는 앞뒤 상황을 볼 것도 없이 거절을 하려고 했지만 이 말을 듣고 주춤하고 말았다. 정말 문자 그대로 앞뒤를 보지 않는다면 거절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역시 아닌 건 아닌 거다. 나는 조곤조곤 설득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제 상황이 뭔지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알아요. 수배 중 인거.”
그녀의 말을 듣고 몸이 반사적으로 뒤로 한발자국 물러나졌다. 그녀는 그에 맞추어 한발자국 앞으로 다가와서 내 손을 잡았다.
“알게 된지 얼마 안됐어요. 처음엔 무서웠는데, 이미 다른 감정이 더 크게 자라있었어요.”
“언제 안겁니까?”
“일이 잘 풀린다고 했던 날.”
확실히 며칠 되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내 손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풀고 말했다.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됩니다.”
“왜요? 지금까지처럼만 만나면 되잖아요?”
“제가 수배범이란 걸 알게 된 이상 그럴 수 없어요.”
몰라서 만난다면 나 이후에 일이 잘못되더라도 나 혼자 덮어쓰면 되지만 알게 된 이상 공범으로 몰릴 가능성이 있다.
정말 냉정하게 말한다면 사귀는 척 하면서 빼먹을 정보를 다 빼먹고 모르는 척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렇게 냉혈한이 되지 못했다. 그녀는 다시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럼 몰라요. 모르던 일로 할게요.”
그녀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다시 손을 놓고 말했다. 뭔가 먹먹한 이 상황이 견디기 힘들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먹먹함은 커져서 입 밖으로 토해질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다시 연락할 일 없을 겁니다.”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 나왔다. 뒤에선 별다른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뭔가 툭 떨어지는 소리와 입을 다문 울음소리가 들려왔을 뿐이었다.
원룸까지 오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집 안에 들어와 있었고, 달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어둠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자리에 눕고 나서야 깊은 한숨이 올라왔다.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누워있는 것 같았다.
술을 먹은 것도 아닌데 주변은 팽팽 돌고 있었다. 빠른 회전 때문에 바람이 느껴질 정도로 주변이 돌고 있었다.
문득 지금 난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 졌다.
결국 밤새 잠들지 못했다. 주변의 회전이 멈추지 않아서 구토가 나올 지경이었다.
가장 첫 번째 햇살이 커튼을 뚫었을 때야 그 회전은 멈추었고 난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얇은 햇살을 멍하게 보고 있는데 누군가 커튼을 확 열었다. 빛들이 내 눈을 파먹을 듯 다가왔다.
“어? 일어났네요.”
서주희가 빛 사이에서 어설프게 그림자를 드리우며 나에게 말했다.
아직 눈이 부셔서 서주희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목소리만으로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어. 방금.”
“그런데 눈이 왜 그렇게 퀭해요?”
“눈?”
“충혈 되서 한숨도 못 잔 사람 같은데.”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혓바닥이 삐거덕 거리며 제대로 움직여주질 않았다. 나는 벽에 기대며 자리에서 일어난 뒤에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 불을 켜니 과연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한 사람이 서있었다. 주황색 조명 탓인지 충혈 된 눈은 더욱 붉어보였다.
나는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고 물을 틀었다. 꽤나 뻣뻣해진 머리칼들이 다시 눈을 덮었지만 나는 신경쓰지 않고 세수를 했다.
모래바닥 같던 얼굴에 물을 뿌리자 좀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아니, 정신은 이미 맑은 상태였었다.
“밥 줘요?”
서주희의 목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서주희가 화장실 문을 잡은 채로 나를 보고 있었다.
곧 눈에 물이 들어가는 바람에 그 형상이 일그러졌지만, 나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내가 먹을게.”
머리까지 감은 나는 수건으로 머리와 얼굴을 닦았다. 험하게 물기를 벗겨내자 헝클어진 머리들이 얼굴을 뒤덮었다.
나는 자꾸만 눈을 찌르려고 속눈썹을 거칠게 파고드는 머리카락들에게 혐오감이 들었다.
나는 한손에 걸려있던 수건을 걸이에 아무렇게나 걸고 부엌으로 갔다.
어제 먹었던 그릇을 설거지하고 있던 서주희가 놀라며 나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가위 있어?”
“여기요.”
방금 닦았는지 가위에는 물방울이 조금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가위를 받아들고 한쪽에 쌓여있는 신문지를 몇 장 꺼내어 화장실로 들어갔다.
세면대에 신문지를 2장정도 깔자, 세면대에 부분부분 고여 있던 물들이 빠르게 신문지에 스며들었다.
처리가 귀찮아지긴 하겠지만, 머리칼이 하수구를 막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신문지 덕분에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앞머리를 움켜쥐어 가위질을 하기 시작했다.
머리 손질정도는 군대에서 많이 잘라봤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나는 거울속의 나를 노려보며 어느 정도 과감하다 싶을 정도로 머리를 잘라냈다.
머리카락들이 간지러운 소리를 내며 잘려나가 신문지에 떨어졌다. 앞머리를 자르고 귀를 덮고 있던 옆머리를 자르고 뒷머리를 잘라냈다.
아무래도 잘 보이지 않아 뒷머리는 자신이 없었지만 머리의 무게가 한결 가벼워진 것을 느끼며 가위를 내려놓았다.
젖은 신문지엔 구불구불한 머리카락들이 엉켜 있었다. 그냥 보기만 해도 꽤 상당한 양이다.
나는 신문지로 머리카락을 싸고 대충 머리를 헹군 뒤에 화장실에서 나왔다.
“뭐, 뭐에요?”
설거지를 마치며 희원이에게 가고 있던 서주희가 내 모습을 보고 말했다. 서주희의 시선은 곧 내가 들고 있던 신문지로 옮겨졌다.
신문지로 싸긴 했지만, 여기저기 튀어나오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몇 가닥 머리칼이 있었다.
“머리 잘랐어요?”
“응, 거추장스러워서.”
“그전보다 낫긴 하네요.”
서주희는 잘 잘랐는지 확인하려는 듯 내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말했다.
“뒷머리는 좀 엉성하지만.”
그녀의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거지가 머리에 신경 써서 뭐한다고?”
“거지도 등급이 있는 거 아니겠어요?”
“등급?”
“잘생긴 거지는 꽃 거지라고 하고 거지같이 생긴 거지는 상거지라고 하죠.”
“나는 상거지가 좋아.”
“내가 뒤 좀 마무리 해줘요? 저, 이래 뵈도 미대...”
“밥이나 줘.”
“왔다 갔다 하시긴.”
서주희는 내 새끼손가락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머리칼 얼룩의 가위를 뺏어들고 다시 부엌으로 향했다.
나는 뒷머리가 뒷목에 닿지 않는 미묘한 기분을 느끼며 멍하니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마치 눈만 떠있고 몸들은 숙면을 취하는 그런 기분이었다.
머리에서 움직이라고 명령을 내리면 대규모 쿠데타가 일어날 것 같았다.
서주희가 곧 밥상을 차려서 나타났고 나는 비명을 지르는 손발들의 입을 막은 채로 밥상 앞에 앉았다.
나는 곧바로 숟가락을 들었지만 서주희는 희원이에게 다가가 어깨를 살짝 흔들며 깨웠다.
“희원아, 밥 먹어야지.”
나는 조용히 숟가락을 다시 내려놓았다. 희원이는 몇 차례 꿈틀거리더니 뾰루퉁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서주희에 의해서 일으켜 세워진 게 옳을 것이다.
“얼른!”
서주희가 재촉하자 희원이는 눈을 감은채로 손을 더듬더듬 휘저으며 밥상 앞에 앉았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눈을 감고 있던 희원이는 서주희가 가볍게 볼을 쥐어주자 눈을 떴다.
가늘게 눈을 뜨며 주변을 둘러보던 희원이는 나와 눈을 마주치자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어? 머리!”
희원이의 외침에 나는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좀 잘랐어.”
“처음 봤어요.”
“봤어요?”
어색한 희원이의 말투에 나는 의아해하며 서주희를 바라보았다. 서주희는 꽤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존댓말을 가르쳤어요. 언제까지 반말할 순 없잖아요.”
“그래도 아직 애잖아.”
“안 좋은 버릇은 어릴 때 고쳐야 된데요.”
희원이는 우리 대화를 듣는지 안 듣는지 내 머리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한참을 살피던 희원이는 밥 먹기 직전에 혼잣말로 한 마디를 뱉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뒷머리가 이상해.”
밥 먹고 난 뒤에 나는 군말하지 않고 얌전히 앉아 서주희의 가위질을 기다렸다. 서주희는 꽤 심각하게 말했다.
“이야... 이거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할지 모르겠는데요?”
“안 이상하게 자르기만 하면 돼.”
“그러니까 제가 말한 게 그거라고요.”
“알았으니까 부탁해.”
서주희는 자르면서도 계속 약 올리며 머리를 손질해 줬지만, 가위를 쥐고 있는 사람은 서주희였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까 들었던 가위질 소리가 자잘하게 들리더니 조금 시간이 걸린 후에야 멈추었다.
“겨우 마무리 했네요. 다 됐어요.”
서주희가 머리카락을 털어내며 말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 한쪽에서 책을 읽고 있는 희원이에게 다가가 말했다.
“어때?”
“괜찮아 졌어요.”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나는 양치질을 대충 하고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양복이 아닌 구걸하던 때에 입고 다니던 옷이었다. 서주희가 모자를 쓰는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나가게요?”
“어, 당분간 형님한테 가 있으려고.”
“그럼 안 들어오겠네요.”
“그럴 수도 있고.”
나는 대답을 하고 소지품을 챙긴 뒤에 훌쩍 밖으로 나왔다. 약간 습기가 있는 공기가 온몸에 스며들었다.
이 시간에 밖에 나오면 항상 피부로 숨을 쉬는 느낌이 들었다. 좋게 표현하면 상쾌하였고 솔직하게 표현하면 개구리가 된 기분이었다.
문득 아무렇게나 주머니에 넣었던 핸드폰이 생각나 꺼내어 확인을 해 보았다. 전화와 문자가 몇 통 와있었지만 확인을 하지 않은 채로 삭제를 했다.
잠시 잊고 있던 무거운 바위가 다시 속을 지그시 누르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정신만 멀쩡한 채로 다리를 질질 끌며 아침 모임 장소에 나왔다.
좀 이른 시간인데 누군가 와 있었다.
“칠복이 아저씨?”
“선후구나. 아니?”
반갑게 나를 돌아보던 칠복이 아저씨의 표정이 금세 바뀌었다.
“머리는 어떻게 된거야?”
“갑갑해서 잘랐어요.”
“모르는 사람 같군.”
“그런가요?”
“근데 머리칼이 얼굴을 안 가려주면 사람들한테 금방 들키지 않을까?”
“괜찮아요. 수배서에 찍힌 사진도 머리가 긴 상태거든요.”
“그건 그러네.”
칠복이 아저씨는 진지하게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그런 모습에 웃으며 칠복이 아저씨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빨리 오셨어요?”
“이제 3일 밖에 안 남았잖아.”
“3일?”
“그놈 처리하는 거 말이야.”
“......”
“왠지 잠이 잘 오지 않더라고. 늦게 자도 일찍 눈이 떠지더라.”
나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분명 나의 일인데 정작 나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속을 눌러대고 있는 바위를 던져버릴 순 없었지만 다시 한 번 정신을 차리기로 했다.
곧 다른 사람들도 모임에 도착하기 시작했고 다들 나를 보고 한 번씩 깜짝 놀랐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가벼운 웃음으로 넘겼다. 형님도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일단은 회의가 먼저라 회의부터 진행했다.
“전파 내용은 일단 다른 안건부터 받고 시작하지. 별다른 내용 있나?”
“유치장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다 돌아왔습니다요.”
“음, 정말 고생 많았다. 정말.”
형님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형님의 그런 모습에 사람들은 조금 의아해 했다. 나도 살짝 고개가 갸우뚱 거렸다.
“다른 이야기 없으면 중대 발표를 하겠다.”
갑자기 중대발표란 타이틀이 들러붙자 딴 짓을 하던 사람들도 하던 일을 멈추고 형님에게 집중했다.
낙엽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갑자기 조용한 공기가 흘렀고 형님은 헛기침으로 몇 차례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에 입을 열었다.
“내 후임을 정하겠다.”
“예?”
즉각적으로 반응한 건 칠복이 형님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형님의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해져서 대꾸조차 못하고 있었다.
나도 잠시 공황이 와서 입만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곧 분위기는 수습되고 나름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 흥분하며 나섰다.
“후임을 정하다뇨? 무슨 일 있으십니까?”
“저희를 버리시는 겁니까?”
“형님 말고는 따를 마음이 없습니다!”
주변은 점점 시끄러워졌다. 나도 한마디 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주변의 분위기가 갑자기 산만해져서 굳이 내가 목소리를 낼 필요는 없어보였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형님을 살폈다. 형님은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채 조용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흥분하던 사람들도 그걸 깨달았는지 곧 다시 조용해졌다.
“할 말 다 했으면 이제 내가 말해야 겠군. 먼저 후임을 정하는 것뿐이지 내가 물러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혹시 내가 자리를 비우게 된다거나 그러면 그 자리를 메우는 거야. 그리고 너희들도 아마 그 사람의 지도력에 의심을 하진 않을 것이다.”
“그럼 누가 후임 입니까?”
“일단은 성칠복. 그 다음은 조재덕 씨다.”
조재덕 씨 라면 여기에서 가장 고령자였다. 조금의 수군거림이 있긴 했지만 모두가 불만은 없어보였다.
칠복이 아저씨는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있었고, 조재덕 씨는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잠시 우물쭈물하던 조재덕 씨가 일어나서 입을 열었다.
“왜 후임이 2명이오? 한명이면 되지.”
“칠복이랑 나는 행동을 자주 같이 하니까 우리 둘이 없으면 자네가 해야지.”
“알겠네.”
조재덕 씨는 수긍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 이후로 별다른 이야기는 오고가질 않았다. 그대로 회의를 마친 나는 내 구역으로 가지 않고 형님 뒤를 따라갔다.
가는 동안 대화는 오고 가지 않았고, 자리를 잡고 나서야 형님이 입을 열었다.
“왜 따라 오냐? 거지 두 명이 같이 있으면 사람들은 돈을 안 줘.”
나는 형님 옆에 털썩 주저앉아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이번 일 때문에 그러신 거죠?”
“이번 일?”
“전선기를 잡는 일 말입니다.”
“잘 알고 있네. 왜 물어?”
“형님은 유인까지만 하시면 됩니다. 그 이상 위험한 일은 안하셨으면 합니다.”
나는 나름대로 비장하게 이야기를 했지만 형님은 피식 웃으며 내 뒤통수를 후렸다.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순간적으로 눈알이 제대로 박혀있나 손으로 확인을 했을 정도였다.
“니가 많이 크긴 컸구나. 내 걱정이나 하고.”
나는 뭐라고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정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아파서 형님이 하는 말을 계속 듣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형님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내 걱정은 말고 니 걱정이나 해라. 난 이번 일에 뛰어들면서 니 걱정은 해도 내 걱정은 한적 없다.”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건 개인적인 복수입니다. 형님까지 괜히 위험하게 만들 순 없습니다.”
“니가 내 밑에 있는 이상 절대 개인적인 복수가 아니다.”
나는 형님의 말을 듣고 목소리가 탁 막히고 말았다. 더 이상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뒤통수에서 느껴지던 아픔은 아련함이 되어 눈물샘을 콕콕 찌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벌떡 일어났다.
“가보겠습니다.”
“그래.”
먹먹한 속을 애써 삼키며 나는 내 구역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텅 빈 깡통을 내 앞에 두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지금은 전선기에 대해서만 생각하기로 했다.
형님이 저렇게 까지 각오를 하고 계신데 다른 감정 때문에 일을 그르칠 순 없었다. 속으로 전선기를 어떻게 죽일지 수백, 수천 번 그려냈다.
"야."
갑자기 누군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들어보려 했는데 무슨 일인지 뻣뻣해서 도무지 고개가 들리지 않았다.
"새끼, 뭐해? 밥은 먹었냐?"
겨우겨우 고개를 들어보자 칠복이 아저씨가 동전으로 반쯤 차있는 깡통을 들고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삐걱거리는 몸을 적당히 풀면서 말했다.
"밥이요?"
"그래 임마. 너 깡통은 어디 갔어?"
"깡통."
주변을 둘러보니 깡통은 보이지 않았다.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깡통은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던져줬는지 백원짜리 몇 개가 차가운 바닥을 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 지금 벌써 5시야."
"5시! 벌써요?"
"벌써 라니, 시간 안가서 죽는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전선기의 생각에 몰두하다가 시간가는 줄도 몰랐던 것 같다. 어쩐지 몸이 이상하리만큼 굳어 있었다.
나는 스트레칭도 할 겸 짧은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동을 줘가며 허리를 돌리고 있는데 문득 궁금한게 생겨서 물었다.
"근데 무슨 일로 오셨어요? 저녁 모임 되려면 한참 남았는데."
"가기 전에 잠깐 이야기좀 하려고 그런다."
"무슨 이야기요?"
"형님이 뭐라고 하시든?"
나는 칠복이 아저씨에게 아까 형님과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칠복이 아저씨는 평소답지 않게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무겁게 끄덕거렸다.
나는 칠복이 아저씨의 반응에 뭐라도 말하려 했지만 칠복이 아저씨가 먼저 말했다.
"걱정 말고."
칠복이 아저씨와 저녁 모임에 가고 밥도 같이 먹었지만, 칠복이 아저씨는 더 말을 하지 않았다. 주변 노숙인들이 말을 걸어와도 평소답지 않게 단답으로 일관했다.
나는 오늘은 아니다 싶어 더 이상 말하지 않기로 했다. 모임이 끝나고 형님과 돌아오는 길에도 형님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편히 쉬라는 인사를 하고 자판기 옆 내 자리로 와서 자리를 깔았다. 간만에 느껴지는 대리석의 스산한 기운이 등짝을 적셔왔다.
오랜만에 내 자리에서 자서 그런지 잠은 금방 왔던 걸로 기억한다.
자리가 불편하긴 했지만 오른편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자판기의 온기도 숙면을 취하는데 도움을 줬던 것 같다.
예상 밖으로 편하게 자서 그런지 일찍 일어나게 되었다. 점점 열대야가 사라지고 며칠 전부터 어둑어둑 했던 하늘이 태양의 온기를 막아주고 있었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몸을 풀어주고 간단한 체조를 해서 몸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기둥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니 아직 형님을 깨우기에는 이르다.
나는 챙겨온 담배를 꺼내어 몇 개비가 남았는지 확인해 보았다.
오랫동안 주머니에 넣어놔서 그런지 쭈글쭈글 해진 담뱃갑에는 허리가 조금 꺾인 담배가 3개비 들어 있었다.
나는 그중에 하나를 꺼내어 조심스럽게 척추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에 입에 물었다.
“라이터가...”
주머니를 여기저기 뒤져보았지만 라이터는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나는 짜증을 느끼며 두어 번 더 모든 주머니를 뒤진 뒤에야 바지 뒷주머니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지하철을 빠져나와 조금 급하게 담배에 불을 댕겼다.
밖에 나와 보니 날씨가 조금 쌀쌀해 손이 저절로 주머니에 들어갔다.
“날씨가 요즘 왜 이래?”
가을이 다가오고 있긴 했지만 하늘은 파란 가을 하늘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벌써 수일동안 비는 내리지 않고 먹구름만 하늘에 둥둥 떠다니며 땅에 그림자를 흘리고 다녔다.
나는 조금 추워서 담배를 금방 펴버렸다. 다시 지하철로 내려오니 형님이 일어나서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나는 얼른 붙어서 정리를 도왔다.
형님은 조금 피로한지 눈밑에 어두침침한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걱정이 되어 말했다.
“피곤해 보이는데 좀 더 쉬시죠.”
“됐어. 어차피 잠도 안 올거야.”
형님도 내가 했던 것처럼 가벼운 스트레칭과 체조로 몸을 풀었다. 우리는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먼저 모임 장소로 가 있기로 했다.
모임 장소에 도착한 형님은 잠시 망설이더니 나에게 말했다.
“너 계속 여기 올거냐?”
“그럼 와야죠. 당연한 일인데요.”
“중요한 일 앞두고 있는데, 이렇게 시간 보내면 좀...”
형님은 말꼬리를 흘렸다. 나는 형님이 말하는 바를 알 것 같았다. 나는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다.
이번 일에서 위험요소는 당연히 내가 가장 컸다. 나는 잠시 생각하고 말했다.
“어떤 말 하고 싶으신지 알겠습니다.”
“알면 됐다. 어떻게 할래?”
형님이 되묻자 나는 다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와서 갑자기 뭘 하겠느냐고 물으면 누구나 깊은 생각에 빠질 것이다.
그러다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가보고 싶은 곳이 있긴 합니다.”
“그럼 가봐.”
“네.”
형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장 지하철로 들어갔다. 그리고 편의점에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의 지루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남자는 내 행색을 보고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나는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원래는 한은이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곳이었다.
나는 다소 씁쓸함을 느끼며 소주 2병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한기가 손가락을 감쌀 즈음에 나는 소주병을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그리곤 아르바이트생이 가격을 말하기도 전에 꾸깃꾸깃한 만원을 내밀었다.
아르바이트생도 나와 별로 말을 섞고 싶지 않은지 거스름돈만 내어주었다. 나는 소주병을 검은 봉투에 담고 편의점을 나섰다.
“어떻게 가더라?”
나는 잠시 지하철 노선도를 보면서 어떻게 가야할지 생각에 빠졌다. 이곳에서 시외버스 터미널은 그렇게 멀지 않았다.
하지만 서울을 벗어날 땐 차만 이용해봐서 터미널은 초행길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노선과 장소를 몇 차례 거듭 확인을 하고 지하철에 올랐다.
사람들은 내 행색을 한번 흘끗 볼 뿐, 의심의 눈은 없었다. 그래도 나는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한쪽 구석에 가서 조용히 내릴 역을 기다렸다.
별일 없이 터미널 역을 찾아간 나는 목적지의 표를 끊고 의자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 차 시간을 기다렸다.
버스는 10분 후에 도착할 것 같았다. 가만히 있기를 몇 분, 시간이 지루해져서 나는 옛날 버릇처럼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내들었다.
“......”
핸드폰을 가득 채운 여러 가지 숫자에 잠시 잊고 있었던 거대한 바위가 다시 가슴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핸드폰엔 메시지 몇 통과 부재중 전화 몇 통이 와있었다. 연락이 온 곳은 모두 김경은에게 온 것이었다.
나는 전에 했던 것처럼 내용을 확인하지 않고 지우려 했지만 이번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나는 큰 죄를 지은 것처럼 조심스럽게 메시지를 확인하려 했다.
“어?”
무슨 우연인지 핸드폰이 그대로 꺼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핸드폰을 켜봤지만 전원은 켜지질 않았다.
아무래도 전화와 메시지가 계속 오는 바람에 수명이 다한 것 같았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핸드폰과 권총이 주머니 안에서 부딪히며 거친 비명소리를 질렀다.
곧 버스는 도착했고 나는 표에 적인 내 좌석번호를 찾아서 자리에 앉았다. 뒤에서 3번째 창가 자리였다.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내다보며 앉아있는데 유난히 힐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나는 소리에 반응하여 그쪽 방향을 쳐다보니 높은 힐을 신은 한 여성이 나와 자신의 좌석표를 흘끗 보더니 머뭇거리고 있었다.
나는 혹시 내가 잘못 탔나 싶어서 표를 확인해 봤지만 나는 내 자리에 제대로 탔다.
의문이 들어 물어보려 했지만 금방 이유를 깨닫고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 여자의 자리는 아마도 내 옆자리일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자리 옆에 걸인 행색의 한 남자가 앉아 있으니 앉기가 꺼려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곧 다른 자리로 갔고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감각이 코로 집중되어 버스 특유의 인조가죽 냄새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그 냄새는 마치 수면제처럼 내 머릿속을 침투해 휘저어놓았다.
중간 중간에 잠에서 깨긴 했지만 그건 덜컹거리는 충격에 잠깐 눈이 떠진 것뿐이었다.
내 옆자리엔 어느새 이등병 한명이 각을 잡고 앉아 있었고 나는 오히려 편안해져서 푹 잘 수 있었다.
한참을 자고 있는데 누군가 툭툭 건드리는 소리가 들려 눈을 떠보았다.
“저기, 도착했습니다.”
날 건드리는 사람을 보니 내 옆에 앉아있던 이등병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난처함이 가득했다. 나는 하품을 늘어지게 한 후에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고맙네.”
“이병 한...! 아닙니다!”
나는 그의 반응에 피식 웃으며 버스에서 내렸다. 내가 내린 버스 터미널은 만들어진지 꽤 오래되어 보이는 터미널이었다.
터미널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얼굴에 주름이 그윽한 노인들이 대부분 이었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한쪽에 형형색색의 보따리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터미널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하고 시내버스를 탔다.
시내버스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나는 일부러 버스기사 바로 뒷좌석에 앉아 가는 길을 잘 살폈다.
형식이한테 이야기만 들었지 와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나는 버스기사에게 물었다.
“저 이 근처에 강이 하나 있다고 들었는데요.”
“강이요? 예, 있죠. 좁은 동네라 강이라고는 그 곳 뿐일 겁니다.”
“그렇죠? 거기로 가려면 언제 내려야 합니까?”
“제가 말씀드릴 테니 그때 내리시면 될 거요.”
“감사합니다.”
버스기사는 좁은 동네라고 했었지만 상당히 오래 가서 나는 버스에서 내렸다. 내가 내린 곳은 버스 정류장의 의미가 있나 의심이 갈 정도로 외딴 곳에 있었다.
하지만 내리고 나니 폭이 넓은 강이 한눈에 보였다. 나는 형식이가 말해준 이정표를 쫓아 걸음을 옮겼다.
한걸음 걸을 때마다 봉지 안에 든 소주병들이 사이좋은 소리를 냈다. 이정표의 목적지엔 이미 누군가가 와서 앉아 있었다.
나는 누군가 싶어 소리 나지 않게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를 알아보고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이 반장님.”
“응? 선후 아니냐?”
이 반장은 처음엔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침착하게 자리를 권했다. 나는 가벼운 묵념을 한 뒤에 그의 옆에 앉았다.
“여긴 무슨 일이냐?”
“꼭 한번은 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오늘은 일하는 날 아니세요?”
“나도 한번 와봐야 할 것 같아서 휴가 썼다.”
“요즘은 좀 덜 바쁘신가 보군요.”
“그게 니가 할 소리냐? 지금 너 때문에 제일 바빠. 어디를 그렇게 쏘다니기에 신고가 매일 들어오냐?”
“하핫, 그래요?”
“웃지 마, 정들어.”
이 반장을 여기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이 반장은 저번에 내가 가짜 전선기를 죽인 후에 나와 인연을 끊었었다.
하지만 이렇게 보게 되니 반가운 건 이 반장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나로선 조용히 할 일만 하고 가려 했는데 말동무가 생겨서 마음이 편해졌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이 반장이 입을 열었다.
“하는 일은 잘 되냐?”
“네 잘 됩니다. 잘 될 거구요.”
“나만 바빠지겠구먼.”
이 반장은 체념하듯 크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강 너머 절벽에 부딪혀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곤 했다.
이 반장은 곧 웃음을 거두고 한숨을 뱉듯 말했다.
“성훈이 보러온 거 아니야? 네 누나하고.”
“맞아요.”
“그럼 이야기라도 좀 나눠.”
이 강은 성훈이와 누나를 뿌린 곳이었다. 나는 가지고 온 소주의 뚜껑을 열어서 강물에 흘려보냈다.
뭔가 형용할 수 없는 몸속의 온기가 술과 함께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두병을 다 흘려보낸 나는 잠깐 묵념을 하고 한숨을 쉬며 다시 이 반장 옆에 앉았다.
언제 꺼내들었는지 이 반장은 입에 담배를 물고 있었고, 나도 담배를 하나 꺼냈다.
라이터를 주머니에서 찾으려 하는데 이 반장이 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 크게 담배연기를 뱉어낸 이 반장이 나에게 말했다.
“그래. 결국 끝을 볼거냐?”
“예. 끝을 봐야죠.”
“안하면 안 되겠나?”
그 말을 하는 이 반장의 눈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나는 곧장 대답하려 했지만 무슨 이유인지 망설여졌다.
잠시 망설인 나는 웃으며 대답을 했다.
“해야겠네요.”
내 말에 이 반장은 마지막 한모금을 빨아들이고 담배를 털어냈다.
나는 왜 잠시 망설였는지 갑자기 의문이 들어 연거푸 담배를 빨아들였다. 이 반장이 그런 나를 보고 말했다.
“뭐가 그렇게 급해? 천천히 펴.”
“예.”
대답을 하긴 했지만 이미 담배는 필터에 닿아 있었다. 나는 담배를 털어내고 꽁초를 뒤로 던졌다.
바람은 점점 차가워졌고 이 반장과 나와의 말 수도 점점 줄어들었다. 나중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점점 핏빛으로 변하는 강물만 바라보았다.
날이 점점 저물자 이 반장이 일어나며 말했다.
“이제 가야지. 태워줄까?”
“감사합니다.”
길가로 나오자 이 반장의 차가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채로 있었다. 나는 조수석에 올라탔고 이 반장은 말없이 운전을 했다.
딱히 조수석에서 졸은 건 아니었지만 우리는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색한 공기가 흐르거나 하진 않았다.
서로가 각자의 생각을 하느라 바쁜 것이었다. 내릴 때가 되어서야 나는 형님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여기에서 내릴게요.”
“그래.”
“몸조심하시고요.”
차의 문을 열고 이제 내리려고 하는데 다급한 이 반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후야.”
나는 내리다 말고 이 반장을 돌아봤다. 이 반장은 앞을 바라본 채 말했다.
“물론 잃어버린 사람들도 중요하지만, 니 옆에 사람들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뭐라고 대답하려 했지만 그대로 문을 닫아버리고 말았다.
문이 닫히자마자 차는 출발했고 나는 한참동안 그 차의 뒷모습을 보다가 지하철로 돌아왔다. 한쪽엔 형님이 자리를 깔고 누워있었다.
“왔습니다.”
“저녁은?”
“지금 먹고 오겠습니다.”
질척거리는 밥을 참치와 함께 씹을 때도, 피로에 흘러내리는 몸뚱이를 두터운 박스위에 뉘일 때도 이 반장이 했던 말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시간이 멈춰 버린 듯 멍하게 머릿속만 바쁘게 움직였지만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