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눈발이 날리더니, 역시나 거리가 꽁꽁 얼어붙었다. 그렇지 않아도 개인 실적도 저조하고 회사 형편도 좋지 못해,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같은 때라 작년의 이맘때처럼 '길이 미끄러워서 지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라는 식의 핑계도 통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자명종을 오전 5시에 맞추고 잠자리에 들었다. 싸구려 문풍지도 없어 덜컹거리는 작은 창문 틈 사이로 바람이 쉴 새 없이 쉭쉭 들어왔다. 꽤 두꺼운 이불을 둘렀다고 해도 일인용 전기장판 따위로는 영하 10도 밑을 맴도는 매서운 추위를 막을 수는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온몸이 후끈거리는 것이 감기기운까지 도지는 모양이었다.
집 한 칸 마련 할 때까지는 필요 없는 곳에 괜한 헛돈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은 했지만, 작은 난로라도 곁에 있어야 눈이 감길 것 같았다.
' 젠장. 날씨 더럽게 급살 맞네. 이러다 약값이 더 나가는 거 아닌지 몰라. '
문득, 돌아가신 어머님께서 유언처럼 되뇌던 말씀이 떠올랐다.
[ " 능력이 없어 공부 뒷바라지는 고사하고 푼돈한전 남기지 못한 채 이렇게 누워만 있으니 무척이나 미안하구나. 너는 꼭 이다음에 네 아버지처럼 주정뱅이에 투전판이나 전전하는 인간 되지 말고 참한 색시 만나서 부지런히 돈을 모아 자식들에게 불행을 대물림하지 않도록 해라. 그것이 이 늙은 어미의 마지막 소원이여. " ]
그때 난 방안 한쪽에 걸려있는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보고 어머니께 소리를 질렀다.
[ " 난 절대로 아버지... 아니, 저 악마 같은 사람은 되지는 않을 거예요. " ]
밤이면 잔뜩 취기에 어린 몸으로 어머니를 주먹과 발길로 마구 때리며 돈을 내 놓으라고 말씀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치가 떨렸다.
보통의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지금의 내 모습이 어떠했을까?
다른 아이들이 피아노 학원이나 동물원, 박물관에 있을 시기에, 대낮부터 코가 빨개 술집 여주인 젖가슴이나 주물럭거리고 있던 아버지를 모시러 가야했다. 다른 아이들은 생일이면 온갖 잔치를 하며 오붓하게 하루를 즐긴다는데, 여동생과 나는 미역국은 고사하고 하루 종일 배를 졸이며 건설 현장 노동판에 품일을 나가신 어머니를 기다려야 했다.
그는 이미 우리에게 있어 아버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난 그를 그렇게 무시하거나 미워하진 않았다. 그래도 그를 아버지라 인정했다. 적어도 아버지가 없는 친구들에 비해 내가 훨씬 더 행복한 사람이라 생각했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 소희의 15번째 생일날이었다. 우리 가족 4명 중에 가장 어리고 예쁜 사람의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날이었던 것이다.
어차피 생일잔치는 기대도 하지 않았던 터라 우린 아버지를 기다리지도 않고, 조촐하게 축하파티를 한 후에 다들 먼저 잠자리에 들었는데, 바로 그날, 술에 잔뜩 취한 아버지가 잠자고 있던 여동생을 성폭행한 것이었다.
여동생은 그 가냘픈 몸으로 욕정에 불타오르는 짐승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엄마와 오빠가 들을까 두려워 체념하고 이를 악물고 그렇게 당하고만 있었지만, 짐승의 격한 음성은 나머지 가족을 깨우기 충분했고, 그 모습은 고스란히 모두에게 비춰지고 말았다.
여동생은 큰 충격에 빠졌고, 얼마 후 그녀는 자살을 선택했다. 어린 나이에 얼마나 치욕스런 경험이었을까? 자살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다시 볼 수 없는 곳으로 영영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 날 이후, 그는 내게 생명을 준 아버지이기는 했지만, 내 소중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악마이기도 했다.
***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과거 생각에 잠기니 가라앉았던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때문인지 온몸은 불덩이처럼 더욱 뜨거워 졌다. 하지만 난로는 고사하고 전기장판의 온도를 한 단계 더 내려야겠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었다.
- 난 절대로 당신 같이 살지는 않으리라. 악착같이 돈을 모아서 참하고 좋은 신붓감을 만나 나도 ‘행복’이라는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그 생소한 것도 실컷 느껴볼 것이다. 또한 예쁜 자식들도 낳아 악마 같은 당신과는 다르게 내 자식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자상한 부모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
" 삐리리리~~ 삐리리리리~~~ "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게 울려대는 자명종 소리에 눈을 떴다. 새벽이었다. 간밤에는 몸이 불덩이 같더니만, 이상하게도 언제 그랬냐는 듯 가벼웠다. 서둘러 일어나 세수를 했다. 컨디션이 좋았다. 모처럼 가뿐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창밖을 내다보았다. 내 몸의 컨디션과는 달리 창밖은 어두컴컴하기만 했다. 살 속을 파고드는 차가운 공기와 함께 눈발이 사방으로 꺾이며 마구 들이쳤다.
" 서둘러야겠군! "
역시나 거리는 빙판 투성이었다. 마구 쏟아지는 눈발 때문인지, 가로등이 켜져 있긴 해도 한치 앞도 제대로 분간할 순 없었다. 당연히 인적도 뜸했다. 그나마 가끔 마주치는 사람들은 모두 초췌한 모습들을 하고 있었으며 저마다 얼굴을 깊게 파묻고 있었다. 생각보다 출근길이 더욱 늦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옷깃을 여미며 걸음을 빨리 했다.
다행히도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버스 한 대가 기다렸다는 듯이 스르르 멈추었다. 바람이 얼마나 매서운지 빨리 출근을 할 수 있다는 안도감보다 몸을 조금이라도 녹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앞서 단걸음에 버스에 올라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버스 안이 바깥보다도 더욱 싸늘한 것이 아닌가?
' 젠장. 이놈의 버스는 히터도 안 틀어주나? '
기사를 쳐다보고 한마디 던지려다 룸미러에 비친 그의 날카로우면서도 초점이 없는 눈초리에 살그머니 구석자리를 찾아 앉았다. 버스 안에는 승객들이 두 세 명 정도 타고 있었는데, 그들은 차 속이 유난히 춥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인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인지 모두들 그냥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 에라. 모르겠다 '
창밖을 내다보았다. 가로수가 천천히 지나갔다. 차의 속도가 상당히 느린 모양이었다. 노면이 미끄럽다는 것을 어느 정도 감안하더라도 이건 너무하다 싶을 정도였다.
' 이러면 곤란한데? '
버스가 마침 다음번 정류장에서 스륵 멈추었다. 회사 근처로 가는 노선 하나가 있는 곳이었다. 어차피 갈아타야 하는데 느림보에 얼음장인 거지같은 버스에 타고 있느니 갈아탈 수 있는 곳에서 빨리 내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몇 정거장만 더 가면 회사 앞까지 운행되는 버스 노선이 여럿 있는 정류장에 도착하는지라 속으로 안절부절 투덜거리고만 있었다.
' 어차피 일찍 나왔는데... 그냥 잠시 눈이나 붙일까? 오늘 같은 날씨라면 나만 늦진 않을 거야. 여기서 내리면 갈아탈 노선도 하나뿐이고... 만약 그게 연착이라도 되면 더 늦을 수도 있어. '
그렇게 혼자 협상을 하고는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으려는 찰나였다. 또각또각 신경을 건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이힐소리... 젊은 여자가 차에 올라탄 모양이었다. 나도 총각인지라 신경이 쓰여 실눈을 뜨고 그쪽을 쳐다보았다. 속된 말로 ‘베이글녀’랄까, 변두리에서는 보기 드물게 몸매가 유난히 예쁜 앳된 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얼굴은 선글라스에 가려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흔히 볼 수 있는 외모는 아니었다.
' 선글라스만 없으면 좋겠네, 그건 새벽부터 뭐 하러... '
그런 생각을 하는 도중, 그 여자가 내가 앉아 있는 자리 쪽까지 다가온 것이었다. 괜히 보고 있던 것을 들킬까봐 눈을 질끈 감았다. 흥분된 내 심장소리와 같은 박자의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어느 순간 뚝 멈추었다. 눈을 감았지만, 선글라스 속의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다.
' 설마... 내 옆에 앉진 않겠지? '
그런데 그 여자는 뜻밖에도 내 옆자리에 앉는 것이 아닌가? 버스에 빈자리가 넉넉하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빈자리 또는 동성의 옆자리나 내리기 편한 자리 앉기 마련이다.
이 여자가 타기 전까지만 해도 기사까지 포함해 다섯 명 정도가 승객의 전부였다. 그런데 빈자리도 아니고 동성도 아니고 내리기 편한 자리도 아닌 바로 내 옆에 앉다니! 기분이 묘했다. 눈동자를 돌려 그녀를 살짝 훑어보았다. 한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짧고 얇은 봄 옷 차림이었다.
' 선글라스도 그렇고, 진짜 제 정신인 여잔가? '
자꾸 신경이 쓰였지만, 상관없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다시 눈을 감으려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여자가 앉은 쪽에서 더욱 싸늘한 기운이 몰려오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괜한 기분 탓이겠지 란 생각으로 코트 깃을 올리고 몸을 웅크리려는데, 한쪽 손에 부드러우면서도 얼음장 같은 묘한 촉감이 느껴졌다. 깜짝 놀라 눈을 떴더니 여자가 내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 아직 체온이 가시지 않았군요. "
" 네? "
" 지금 가시면 질긴 운명의 끈은 끊어지겠지요. "
" 뭐요? 무슨 말씀인지... "
선글라스 안으로 비치는 여자의 눈동자는 강렬했다. 그리고 어디선가 본 듯한 눈빛이었다. 그러나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여자는 더 이상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자가 일어나자 버스 기사는 정류장이 아닌데도 기다렸다는 듯 차를 멈추고 자동문을 열었다. 그녀에게서 알 수 없는 느낌이 밀려들었다. 나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
여자는 계단 중간에서 멈칫했다. 그녀는 시선은 앞으로 향한 채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 후회하지 않을 건가요? "
그녀가 쳐다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짧은 순간 그녀의 옆모습이 출구 유리창에 살짝 비쳐졌다. 그녀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드리어져 있었다. 나는 그녀를 따라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출구로 향했다. 그리고 버스에서 내리기 위해 한 발자국을 인도가 있는 턱으로 내딛었다.
그런데...
' 이게 뭐야? '
바닥이 매우 물컹했다. 인도도 아스팔트도 아닌, 그렇다고 빙판도 아닌... 그렇다고 모래바닥 같지도 않은 괴상한 느낌이었다. 중심을 잡으며 앞쪽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모습이 온데 간데 보이지 않았다. 몸은 허둥거렸지만, 시선은 알 수 없는 그녀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순간 버스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더니만 출발소리가 났다. 본능처럼 그쪽을 쳐다보았다. 버스 창가에서 누군가가 손을 흔들었다. 자세히 보니 그녀였다. 분명 먼저 버스에서 내렸던 선글라스의 그녀... 어느새 그녀는 다시 버스를 타고 있던 것이었다. 몸을 돌려 버스출입구 쪽으로 뛰어가려 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고, 나는 강물에 빠진 고양이처럼 쉴 새 없이 허우적거리기만 했다.
그녀를 태운 버스는 그렇게 눈앞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그 버스를 향해 어떤 소리라도 버럭 지르고 싶었지만 내 입 또한 움직이지 않았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빼앗긴 이성을 되찾았을 때는 무릎까지 아스팔트에 잠겨있는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내 몸이 계속해서 아스팔트 바닥으로 서서히 가라앉고 있던 것이다. 벗어나려 했을 때는 이미 몸의 반 이상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마치 녹아들고 있다고나 할까? 저항도 하지 못한 채로 머리를 지나 하늘로 뻗은 손끝까지 땅속으로 빨려들어간다고 느꼈을 때...
' 아악! '
머리가 찢어지듯 아파 왔다.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고,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멀리서 아주 멀리서 파문처럼 들리는 심장소리와 함께 어떤 남녀의 목소리가 두둥 울림처럼 퍼져왔다.
수면 속에서 들리는 느낌이랄까? 그 웅얼거리는 목소리들은 점점 가까워졌다.
사...일...수...는.....
[ " 는..... 없는 건가요? ]
[ " 이미 삼십 분 전에 모든 신체 기능이 멈추었습니다. 안타깝지만, 너무 늦게 오셨습니다. 보호자 되시면.... " ]
[ " 살릴 수 없다고요? 미련한 친구 같으니라고... 그런 몸으로.... " ]
그 목소리들이 점점 가까워지더니 그 물컹거리던 요상한 아스팔트는 온데간데없어지고, 따가운 조명이 눈동자를 마구 때리고 있었다. 눈을 깜박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흐릿했던 시야가 점차 밝아졌다. 간호사 복장을 한 여자와 직장동료인 임 대리의 얼굴이 보였다. 뭔가 말을 하려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임대리와 눈이 마주쳤다. 임대리가 놀란 표정을 짓자 간호사가 고개를 돌려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져 밖으로 뛰쳐나갔다. 임 대리는 나에게 달려오더니 내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감싸 잡았다.
" 내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겠어? 놀랍네! 깨어나다니, 정말 다행이야. "
" 버스는? 버스 못 봤어? 그 여자가 탄 버스.. "
" 버스는 무슨 버스야. 이 친구야. 너 죽었다가 살아났어! 자네가 아무런 연락 없이 회사에 출근을 하지 않아 혹시나 해서 자네 집으로 찾아갔더니... 어휴, 세상에 그렇게 코딱지만 한 전기장판을 부여잡고... 얼음처럼 차갑게 된 상태로... "
그제야 사태파악이 된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보았다. ‘남의 살’ 같은 것이 감각이 완벽하지 않았다.
" 분명 금방까지 버스를 타고 있었는데... 여긴... 병원인가? "
" 사경을 헤매면서도 꿈을 꾸었던 모양이군. "
잠시 후, 하얀 색의 가운을 입은 남자 여러 명이 뛰어 들어왔다. 그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람이 길쭉한 기구로 내 몸의 여기저기를 짚어보더니 들뜬 목소리로 ‘이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며 흥분했다. 수십 분 동안 멈추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 것은 자기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는 일이라고 덧붙이면서...
***
며칠 후, 갑작스런 입원이 가중한 업무로 인한 누적된 과로와도 연관이 깊다는 의사 소견서가 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각종 이익문제로 사측과 대립이 되어 있던 노조가 얼씨구나 하면서 ‘죽었다가 기적처럼 살아난...’ 이 건을 SNS 등에 공론화 시키면서 이슈가 되었다.
이로 인해, 산재보험수당은 물론이고 회사 측에서는 별도로 입원비 전부와 한 달간의 휴가, 그리고 위로금을 지급했다.
늘 일에 쫓겨 살았었는데, 모처럼 두 다리를 쭉 뻗고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식적인 휴식’을 가질 수 있었다. 그야말로 수 년 만에 처음으로 느껴보는 평안함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이번 일로 인해 다른 커다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그동안 여자와 사귈 기회라고는 전혀 없었던 나에게 꿈같은 연인이 나타난 것이다. 입원기간 내내 나를 극진히 간호하던 입원동 간호사와 연분을 맺고 어느새 깊은 사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병마가 행운을 가져다 준 묘약’이 된 셈이다.
이유야 어쨌든 그동안 쌓였던 피로는 물론이고, 참한 신붓감까지 얻었으니 입가에 미소가 가실 날이 없었다.
아무도 없는 독방에서 혼자 미친 사람처럼 키득거리며 떠들었다.
“ 나는 행운아다! ”
***
드디어 그녀와 결혼반지를 고르는 날이다. 보통여자들 같으면 백화점 귀금속상에 가자고 할 테지만, 알뜰한 나의 피앙세는 나를 종로 보석도매상가로 데리고 왔다.
“ 여기서 백화점에 납품한다는데, 운이 좋으면 똑같은 물건을 반값에 살 수 있어요. ”
“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결혼반지인데... ”
“ 자기, 그런 소리하지 마요. 저기요. 사장님 이 제품도 좀 보여주실래요. ”
그때 밖에서 ‘빠앙~’ 하는 경적소리가 들렸다. 창밖을 내다봤다. 수많은 인파로 북적대는 거리너머 버스 한 대가 불법 주차한 트럭에 엉켜 옴짝달싹 위태롭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머릿속에 ‘꿈속에 보았던 그녀’의 얼굴이 스치듯 나타났다 사라졌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보았던 그녀... 시간이 흘러가도 버스 속에서 보았던 여자의 얼굴이 너무도 생생하게 각인되어 좀처럼 사라지지가 않았다.
그녀의 정체는 뭘까? 그것은 분명 저승길이었고, 그녀는 중간에 나를 살리려고 했던 것일까? 정말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날 되살려 놓은 걸까? 그리고 헤어지기 직전에 왜 후회하지 않을 것이냐고 물어봤을까? 그냥 의미 없는 꿈에 불과한 걸까? 꿈은 금방 잊게 된다는데, 그 꿈은 몇 번이나 본 영화처럼 잊혀지지 않는 이유는 무얼까?
" 자기, 반지 고르다 말고 무슨 생각해요? "
" 아, 아니야. "
" 또 머리가 아파오네요. "
" 미안해. "
" 실은 제가 가끔 두통에 시달리는데, 저랑 같이 있을 때는 옛날 생각은 금지요. “
" 당연하지! "
투정을 부리는 약혼녀를 쳐다보고 생각했다.
' 맞아. 그동안 과거에만 집착해 누구나 누리는 일상의 행복을 뒤로하고 너무도 악착같이 살아왔어. 대체 그럴 필요가 뭐가 있어? 이제는 그따위에 연연해하지는 않을 거야. 여기 이렇게 아리따운 나만의 연인이 있지 않은가? 이게 어머니의 유언이잖아. 하물며 나는 죽었다가 살아났어. 심장이 멈췄다가 다시 뛰었다고... 그건 필시 하늘의 뜻일 거야. 난 다시 태어난 거고, 이제 제 2의 인생을 맞이한 것이라고... 사경을 헤맨 것도, 꿈속의 여자도 다 이런 어리석음에 대한 따끔한 일침일 게야. '
그렇게 스스로를 진정시키면서, 다시 시작된 삶을 행복이라는 그릇에 레고를 쌓듯 옮겨 담아갔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그녀와 결혼식을 올렸다. ‘진짜 행복’을 만끽하고 싶어 사랑하는 그녀와의 2세를 서둘러 보고 싶었다.
아이가 태어나기만 한다면 어머니의 유언처럼, 그 아이를 세상에서 최고로 행복하게 키울 것이라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일이 잘 풀리려니까, 직장에서 뒤늦게 능력을 인정받아 뜻하지 않게 본사 기획실 서리로 발령 받는 행운까지 겹쳤다. 게다가 옮겨간 기획실의 기획실장이 시골 고등학교 선배란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별일만 없다면 진급까지 따 놓은 당상인 셈이었다. 정말이지 세상이 전부 내 것 같은 기분이었다.
180도로 바뀐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모든 일이 그렇게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노력을 했지만 2년 동안 신부의 뱃속에 애가 당최 들어서지 않는 것이었다. 부인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했다.
" 미안해요. 병원에서는 당신이나 저나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들 하는데... 당신이 아이를 무척이나 기다리니... 난임부부 시술이라도 받을까 봐요. "
" 고작 2년인데 뭐, 나야 뭐 당신만 있으면 좋으니까 너무 조급하게 신경 쓰지 말라고... “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상하게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았고, 일도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어쩌면 과거사에 집착하지 않겠다던 다짐이 부질없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게 몇날며칠을 뜬눈으로 지새우는 것이 반복되자, 나중엔 미칠 지경이 되었다.
아버지로 인해, 그래서 내 자식만은 멋지게 키우겠다는 생각, 그것 때문에 아기를 무척이나 기다리게 된 것이었고, 그것은 '혹시나 아기를 가질 수 없으면 어떻게 하나'라는 지나친 걱정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걱정이 의심을 낳는다고, 그러던 어느 날 새벽까지 뜬눈으로 지새우다 잠든 부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깊게 잠들었는지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 혹시 저 사람, 피임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애를 낳으면 몸매가 망가질 것이고, 다니던 병원도 그만 두어야 한다고 늘 걱정하던 눈치였는데... '
문득 부인이 자고 있는 옆의 문갑 쪽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문갑 위에는 부인이 요즘 복용하고 있는 두통약인지 감기약인지가 있었다. 그 약봉지를 보고 있으려니까 왠지 모르게 이상한 생각이 들었고,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부인이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문갑 앞으로 가서 그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부인의 잡동사니가 들어있는 곳이라 평소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던 곳이었다.
한참을 뒤졌는데도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자 사랑하는 사람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죄책감에 괜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즈음이었다. 속옷들 틈 사이에서 작은 상자가 만져지는 것이었다.
' 뭐지... '
그것은 다름 아닌 피임약이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손이 떨려왔다. 설마 하는 마음에 스마트폰으로 그 약을 자세히 검색을 해 본 결과, 효과를 높이기 위해 주기적으로 맞추어서 복용하는 아주 고가의 제품이었다.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신뢰감이 금이 가듯 사라지더니 배신감이 치밀어 올랐다. 온몸이 부르르 떨려왔으나 그녀가 눈치 채지 못하게 그것을 제자리에 넣어두고 거실로 나와 약사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는 자다 깼는지 잠긴 목소리로 짜증을 냈다.
[ " 미친놈아! 한밤중에 전화를 해서 느닷없이 그 약하고 비슷하게 생긴 캡슐의 영양제가 있냐고 물어보면 어떻게 알아? 아무리 약사라지만 내가 그걸 다 외우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네 마누라가 피임약을 영양제인줄 알고 먹기라도 한 거야? " ]
" 아니.. 그냥 안부도 물을 겸해서 전화했는데, 그냥 갑자기 그게 궁금하네? 아까 잡지에서 본 건데.. 그래서 물어보는 거야. 내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잠도 못 자잖아. "
[ " 싱거운 자식. 넌 안부를 새벽 3시에 물어보냐? 그렇게 궁금하면 인터넷이나 뒤져보던지 아침에 전화하던지 해야지. 하긴, 인터넷이라고 해도 캡슐모양까지는 안 나오겠지만... 어쨌거나 평소에는 연락도 없더니만... 알았으니 기다려봐. " ]
***
집으로 돌아온 나는 부인 몰래 문갑 속의 피임약을 영양제와 바꿔치기 해 놓았다. 그냥 대화를 통해 해결하는 것이 좋을 거라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만약 부인이 계속해서 피임을 하고 싶다면 꼭 피임약이 아니더라도 몰래 다른 피임법을 택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어쩔 수 없었다.
그 날 이후로 밤이면 잠에 든 척하며 부인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했다. 예상대로 그녀는 문갑 속의 약을 몰래 복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복용한 날 다음이면 어김없이 콧소리를 해가며 내 품에 안겼다. 임신에 대한 걱정이 없어진 탓인지 상당히 안심하는 눈빛이었다.
' 나를 속이다니... 나쁜 계집! '
그러던 어느 날, 출근을 하면서 부인의 마음을 떠보았다.
" 내가 벌어오는 월급이 적지? "
" 무슨 소리예요? "
" 넉넉하지 않으니까 당신이 병원을 그만 두지 못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살림하느라 직장 다니느라... "
" 아이.. 당신도, 괜한 걱정 말아요. 전 괜찮으니까요. 아이 생길 때까지 만이라도 조금이라도 더 저축해서.... "
" 아이라고? 그래, 그럼 당신 좋도록 해. "
싸늘하게 부인을 휙 쳐다보고 현관문을 신경질적으로 쾅 소리 나게 닫았다. 뒤따라 나오며 왜 갑자기 그러냐는 부인의 울먹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못들은 척하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 가증스러운 것 '
약을 바꿔치기 한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부인은 얼마 후, 임신을 했다. 애써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몹시 못 마땅한 눈치였다. 그녀의 배가 불러올수록 그녀에 대한 사랑도 그렇게 식어만 갔다. 부인도 그것을 느꼈는지 일상적인 대화를 빼고는 말수도 확 줄어들었다.
사랑을 찾으려고 그토록 기다렸던 사랑의 잉태는 사랑을 시들게 하는 사랑이 아닌 사랑의 열매가 된 것이다.
***
같이 살고는 있지만 타인과 다를 바 없는 하루하루가 흘렀다. 부인의 배는 자꾸만 불러왔고, 그럴수록 그녀는 힘들어했다.
' 그래, 저 여자는 내 여자이고 뱃속의 아기는 내 아이야. 내가 굽히고 가야지. '
예전과 같은 그녀와의 사랑을 기대하며 고민하며, 다시 노력해 보기로 했다.
하지만, 이미 메말라버린 땅에 몇 바가지의 물을 더 뿌린다고 해서 그 땅을 다시 기름지게 하기란 정말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일상적인 대화도 먼저 꺼내기 어려워졌고, 기어코는 마시지 않았던 술까지 입에 대기 시작했다. 그제야 예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홀로 술을 즐기는 사람들의 마음’이 무엇인지 대충은 알 수 있었다.
술 마시는 횟수가 늘어가면서, 가지를 떠난 낙엽처럼 사랑도 멀어져 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
망각과 이탈, 그리고 이상에 안착.
적어도 술의 힘을 빌리고 있을 때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고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기다렸던 가족 간의 사랑? 그것은 내 복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역시 타고난 운명은 그것들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 나란 존재는 영원히 행복할 수 없단 말인가? '
마침내 산달이 지나 아이가 태어났다.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렸던 내 씨앗의 싹이었지만, 아이에 대한 사랑은 껍데기뿐이었다. 남의 아이를 보고 있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아이의 얼굴이 그 누군가를 닮아갔다.
그것은 바로 그토록 원망했던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피를 말리고 뼈를 깎아 증오했던 악마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그냥 지나치려고 해도 그 아이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으려면 마치 아버지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아 돌아버릴 것 같았다.
' 당신이 끝까지 나를 끝까지 괴롭히는 구나 '
그냥 외모만 할아버지를 닮은 것뿐일 텐데도, 성장하면 할수록 그 말투나 버릇까지도 할아버지를 닮아 가는 것 같아 불길했다.
' 겨우 행복이란 것을 잡았는데, 대체! 왜왜왜!!!! '
때문에 더욱 술에 의존하게 되었고, 블랙아웃에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도 떠올려지지 않을 정도로 몸이 망가졌다. 아침에는 일어나지도 못해 번번이 지각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자 마침내 다니던 회사에서 ‘불성실하다’는 이유로 사표를 제출하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것으로 불행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벌써 몇 개월 째 별거를 하고 있던 부인이 거의 매일 밖으로 나돌더니만 두 번째 임신을 한 것이다.
얼마 전부터 회사 동료였던 임 대리, 아니 임 과장을 몰래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혼을 하면 임 과장이 청혼을 할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뱃속의 아이도 그것을 준비하는 바로 그 자식의 아이일 거라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 누구 애야? "
" 누구라니요? 당, 당신이... 그때 당신이 술 취해서... "
" 뭐라고? 에잇! "
기어코는 부인에게 손찌검까지 하고 말았다.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 나쁜 년 '
그렇다고 호락호락 이혼을 해줄 내가 아니었다. 나는 폐인이 되어 가는데, 자기들끼리 행복하겠다고? 어림도 없었다.
역시나 둘째가 태어나자 부인은 ‘정식으로 이혼’을 해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난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 여자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목숨을 내 놓을 정도로 일에만 매진했던 황소고집 오기가 있던 나였다.
' 내가 미쳤냐? 니들 행복해지는 꼴을 보게!! '
이후 임과장의 전화를 안 받기 위해 전화기를 박살냈으며, 만나주지 않기 위해 새벽에 나가 한밤중에 돌아왔다. 이따금씩 임과장이 집에 뭔 우편물이나 택배를 보내오곤 했으나 보자마자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 왜? 부인과 이혼을 해달라고 부탁하려고? 싫어, 싫다고! '
그날 이후, 이혼을 하지 않기 위해 이혼사유가 될 만한 ‘폭력’이라든지 ‘음주’ 같은 것을 최대한 자제했고, 노동판에 가서 돈도 벌어다줬다. 집에 발을 들여놓기 싫어서 먹고 자는 지방의 공사판을 전전했다.
그렇게 한해 두해가 지나자 부인은 이혼 포기를 한 모양이었다. 더 이상 이혼을 해달라는 부탁도 하지 않았다. 더불어 임과장의 우편물도 보이지 않았다.
' 결국 그렇게 포기할 거면서... '
부인이 그렇게 수그러지자, 지방 공사판을 전전할 필요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집에서 빈둥거리다가 일이 있으면 나갔다가 그날 받은 일당으로 술을 사마시기가 일상이 되어 버렸다.
아들놈은 지 할아버지 닮아서 싫었고, 딸은 내 핏줄이 아니고, 부인은 바람이나 피는 화냥년인데, 돈을 벌어다 줄 책임감이 생길 이유가 없었다.
아버지 노릇도 못한 채로 단절 아닌 단절의 십수 년이 흘러 아이들이 중학교에 다닐 때 즈음이었다. 난 부인이 벌어오는 돈으로 간간히 살아가는 폐인 처지가 되었고, 그나마도 부인 돈을 훔쳐서 술을 사먹는 행위를 반복했다. 애들한테는 전혀 관심도 없으니, 그 애들이 몇 학년 쯤 되었을 거란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술이 최고였다. 술에 취한 날에는 부인이든 애들이든 간에 말을 듣지 않으면 폭력을 휘둘렀다.
그날도 술을 마시기 위해 집안에서 돈을 찾다가 부인의 핸드백을 뒤졌다. 그러다가 우연히 이혼 소송 서류를 발견한 것이었다.
' 옳거니! 이제는 이혼사유가 된다 이거지? '
그것을 찢어버리고 핸드백 속의 잔돈푼을 탁탁 털어 술을 마시고는 반쯤 취해서 집에 들어왔다. 마침 딸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딸과 딱 둘이서 마주친 것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딸은 술 취한 나를 보자마자 겁먹은 표정으로 자기 방으로 후다닥 달아났다. 순간 가슴이 뜨끔했다.
' 피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호적상 내 딸인데... 아빠와 딸이 관계가 왜 이래? 같이 있는 동안만이라도 진짜 아빠와 딸같이 지내야지. '
나는 급히 따라가 딸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 아빠, 잘못했어요. "
" 네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러니? "
야단칠 생각도 없는 날 보고도 계속해서 벌벌 떠는 딸이 한편으로는 측은해 다독이며 안아주려 했다. 그런데 딸은 버둥거리며 내 품을 벗어나려는 것이었다. 갑자기 임 과장의 얼굴이 머릿속에 들어 왔다. 그러자 묘한 확신이 들었다.
' 그럼 그렇지. 이 아이는 첨부터 내 딸이 아니었지. 호적은 얼어 죽을! '
임 과장과 다정하게 앉아서 웃음꽃을 피우는 부인과 아이들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불현듯 나만 불행해지고, 그들은 행복해질 거라는 더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모든 것이 더럽혀져야 된다고 생각했다.
' 그 가증스런 년과 그 개 같은 자식에게서 태어난 이 아이... 그래, 그냥 놔 둘 수는 없어. '
나는 술기운에 터져 나온 분노와 욕정으로 이성을 잃은 채 딸의 옷을 강제로 벗기기 시작했다.
***
그런 일이 있은 며칠 후, 딸은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을 했다. 자살을 한 이유에 대한 유서도 없었고, 단서도 없었다. 모두들 부족한 교우관계와 성적 등 여러 가지 고민이 많은 내성적인 아이었다는 이유로 자살을 했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오직 나와 아내, 그리고 아들이 전부...
딸을 잃은 슬픔만큼이나 큰 죄책감이 몰려왔다.
가족들의 시선이 더욱 부담스러워 졌다. 특히, 아들 녀석의 눈빛은 더욱 그랬다. 마치 먼 옛날의 나의 모습과도 같았다. 하지만 괴로워하기 이미 때는 너무도 늦었다.
나중에 측근을 통해 안 사실이지만 부인이 그때 피임을 했던 것은 원인 모르게 주기별로 온다는 ‘군발성두통’으로 강도 높은 두통약을 복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남편이 걱정할까봐서 심한두통을 앓고 있는 사실 자체를 숨겼던 것이었다. 그리고 부인이 임 과장을 만나 것은 남편이 방황하는 이유와 그 고민이 무엇인지 듣기 위해서라는 사실도 알았다.
그리고....
딸이 자살하기 며칠 전, 부인이 나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나와 딸의 피를 채취했고, 친자확인검사를 한 검사증을 갖고 있었지만, 블랙아웃이 되었던 난 그걸 까맣게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가족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자기 딸을 겁탈하고, 죽인 아빠... 그토록 싫어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답습한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을까? 무엇이 날 이렇게 꼬이게 만들었을까?
하지만, 무슨 짓을 해도 절대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에 몇날며칠을 미친 듯 울고 웃고를 반복하다 집을 나왔다. 그리고 노숙자들 틈에 끼어 몇날 며칠을 멍한 상태에서 지냈다.
하루하루가 괴로움과 아픔과 고통의 나날...
무엇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그냥 죽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이었다. 매서울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누더기 코트를 껴입고 노숙자에게 배식되는 음식을 먹으러 서울역으로 향하던 중에 갑자기 심한 구역질이 올라와 근처 화장실로 뛰어올라갔다.
" 우억~ "
선지피였다. 바로 근처에 병원이 있었지만, 몸을 치료할 돈도 마음도 용기도 없었다. 문득 남아있는 가족들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나 때문에 자살한 가물가물하기만 한 딸의 얼굴을 사진으로라도 보고 싶었다. 동상이 걸려 감각이 없어진 손으로 주머니 속을 뒤졌다.
' 가족들... 한번만이라도... 제발.. '
몇 시간 전 싸움질로 번 푼돈이 만져졌다. 쓴웃음이 나왔다. 지친 몸을 이끌고 상점에 들려 부인에게 줄 싸구려 화장품세트와 아들에게 줄 학용품을 샀다. 상점 한쪽에 붙어있는 TV에서는 내일의 날씨라는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었다.
[ " 20년 만에 내린 폭설과 15년만의 한파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 ]
술기운 때문에 잘 모르고 있었는데, 예년에 비해 날씨가 더 추워진 모양이었다. 거리도 한산했다. 지하철로 내려가려다 알 수 없는 이끌림에 횡단보도를 건너가 버스 정류장에 섰다. 그러자 언제 도착했는지 버스 한 대가 스르르 멈추었다. 힘없이 그 버스에 올라 한쪽 자리에 앉았다. 피곤이 몰려와 앉자마자 눈을 감았다. 그때... 어디선가 낯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또각또각... 또각또각...
눈을 떠 그쪽을 쳐다보다가 눈이 동그래졌다.
" 절 알아보시는 모양이군요. "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예전... 꿈속에서 보았던 바로 그 여자였다. 선글라스와 옷차림새도 그때 그대로였다. 여자는 내 옆자리에 앉아 그때처럼 내 손을 잡았다.
" 이번에는 온기가 다 사라져버렸군요. "
" 내, 내가 죽은 것? "
여자는 대답 대신 피식 웃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 당신이 그토록 원망하던 사람에게 복수했으니 시원하시죠? "
" 무, 무슨? 복수라니요? "
"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 했었죠? "
" 다, 당신은 왜.. 나, 나를? "
여자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 바로 저예요. "
깜짝 놀라 몸이 뒤로 젖혀졌다. 그녀는 얼마 전에 자살한 딸과 흡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녀는 내 딸이었다. 좀 더 나이를 먹고 성장한 모습이었지만, 그 얼굴은 분명 딸의 얼굴이 분명했다.
“ 설마, 진짜? ”
“ 난 그쪽이 생각하는 그녀가 맞아요. ”
“ 내 딸? ”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이미 죽은 자라는 것을 잘 알려주는 듯 눈에서 떨어진 눈물은 금세 보석 같은 얼음조각이 되어 바닥에 팅팅 소리를 내며 떨어져 굴러다녔고, 그것들은 어디선가 스며드는 빛에 반짝거리다가 소멸되어 버렸다.
“ 딸로 보지 않고, 겁탈까지 하려 했으면서 눈물까지 흘리네요? ”
“ 그건, 나도 모르게 그만... 난 정말, 오해를 했어. ”
“ 오해라는 말이 참으로 편리하게 쓰이는군요. ”
“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난 짐승이었어. 사람이 아니었어. 나, 나를 용서해다오. ”
그녀는 너무나도 사무적인 표정과 말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 이미 다 지난 일이기도 하거니와, 지금의 나에게는 용서를 할 필요는 없어요. 동사(凍死)를 할 운명이었던 그쪽을 살려준 건 저였으니까요. ”
“ 그때 내가 죽었다면, 너도 그런 비극을 맞이할 아이로 태어나지는 않았을 텐데... ”
그녀가 밖을 응시했다. 나도 따라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버스는 어느새 어둠의 터널에 진입하고 있었다. 수백, 아니 수만이 넘어 보이는 반짝이는 형광물질들이 ‘현미경 속 박테리아의 번식’처럼 스멀거리며 터널 속을 이리저리 누비고 있었다.
“ 이 버스를 타고 있는 자들은 저 자들보다는 행복할 거예요. ”
“ 저 자들? ”
“ 저 반짝이는 것들은 구천을 헤매는 영(靈)들이죠. 자기가 왜 죽었는지도 영문도 모르는 자들.. 저 대부분이 태어나기도 전에 낙태된 자들이죠. 그러니 모를 수밖에요. 그 이유를 알기 전까지는 터널을 통과하지 못해요. 억울하니까요. ”
내가 살아있는 존재라면 저것들이 엄청 놀라왔을 것이며, 지금 이 순간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이지만, 이미 죽은 몸이라 그런지 모든 것이 그냥 일상에 한 부분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참으로 괴이할 정도로 차분한 나였다.
“ 터널을 벗어나면, 지나친 세상에 대한 기억은 영영 잊게 되요. 그래서 저자들이 이승과 저승의 중간에서 벗어나지 못하죠. 그쪽이나 저는 우리가 ‘왜 어떻게 불행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이유라도 알잖아요. 저 자들은 그런 영문조차 모르거든요. ”
앞 창문으로 멀리 빛다발이 쏟아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 다 왔군요. ”
“ 저 길로 가면 내가 편해질까? ”
“ 어떤 죄책감이 있다고 해도 그걸 잊어버리게 된다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되어요. 이 터널을 벗어남과 동시에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사실은 잊게 될 거예요. 영원토록... ”
눈이 부실 정도로 터널의 끝은 매우 밝았다. 어쩌면, 더욱 좋은 세상이 찾아올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대신 살아남은 누군가는 다시 불행해질 테지만요. ”
“ 살아남은 누군가가? ”
“ 기억은 사라져도 원죄가 사라지진 않죠. 그것이 지워지는 날까지 영원히 계속되는 고리와 같아요. ”
“ 너는... 어떻게 되는 거지? ”
“ 저도 그쪽처럼 제 자신이 누구였다는 것을 오늘로써 잊게 될 거예요. 당신처럼 이 터널을 지나가고 있으니까요. ”
***
그의 시신은 길거리에서 발견되었다. 온몸이 엉망진창이었지만, 놀랍게도 얼굴엔 행복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실성을 해서 죽은 거라 생각했다.
그가 꽉 쥐고 있는 손가락에는 싸구려 화장품 세트와 학용품이 든 검은색비닐봉투가 있었지만, 몇 시간 전에 그걸 판 상인이 나타나더니, ‘알코올 중독으로 다 죽어가는 이 사람이 술을 퍼마시기 위해서 자기 가게에 들어와 도둑질을 해 갔다’면서 그 물건을 도로 집어가고 말았다.
그는 그렇게 부질없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남편의 시신이 타고 있는 화장터 연기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한 여인에게 그녀의 아들이 말했다.
" 난 절대로 아버지... 아니, 저 악마 같은 사람은 되지는 않을 거예요. "
소년의 얼굴에는 비장함이 서렸다. 그런 소년을 조용히 쳐다보는 또 다른 여인의 눈동자가 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다.
뫼비우스의 운명
뫼비우스의 운명
밤새 눈발이 날리더니, 역시나 거리가 꽁꽁 얼어붙었다. 그렇지 않아도 개인 실적도 저조하고 회사 형편도 좋지 못해,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같은 때라 작년의 이맘때처럼 '길이 미끄러워서 지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라는 식의 핑계도 통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자명종을 오전 5시에 맞추고 잠자리에 들었다. 싸구려 문풍지도 없어 덜컹거리는 작은 창문 틈 사이로 바람이 쉴 새 없이 쉭쉭 들어왔다. 꽤 두꺼운 이불을 둘렀다고 해도 일인용 전기장판 따위로는 영하 10도 밑을 맴도는 매서운 추위를 막을 수는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온몸이 후끈거리는 것이 감기기운까지 도지는 모양이었다.
집 한 칸 마련 할 때까지는 필요 없는 곳에 괜한 헛돈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은 했지만, 작은 난로라도 곁에 있어야 눈이 감길 것 같았다.
' 젠장. 날씨 더럽게 급살 맞네. 이러다 약값이 더 나가는 거 아닌지 몰라. '
문득, 돌아가신 어머님께서 유언처럼 되뇌던 말씀이 떠올랐다.
[ " 능력이 없어 공부 뒷바라지는 고사하고 푼돈한전 남기지 못한 채 이렇게 누워만 있으니 무척이나 미안하구나. 너는 꼭 이다음에 네 아버지처럼 주정뱅이에 투전판이나 전전하는 인간 되지 말고 참한 색시 만나서 부지런히 돈을 모아 자식들에게 불행을 대물림하지 않도록 해라. 그것이 이 늙은 어미의 마지막 소원이여. " ]
그때 난 방안 한쪽에 걸려있는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보고 어머니께 소리를 질렀다.
[ " 난 절대로 아버지... 아니, 저 악마 같은 사람은 되지는 않을 거예요. " ]
밤이면 잔뜩 취기에 어린 몸으로 어머니를 주먹과 발길로 마구 때리며 돈을 내 놓으라고 말씀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치가 떨렸다.
보통의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지금의 내 모습이 어떠했을까?
다른 아이들이 피아노 학원이나 동물원, 박물관에 있을 시기에, 대낮부터 코가 빨개 술집 여주인 젖가슴이나 주물럭거리고 있던 아버지를 모시러 가야했다. 다른 아이들은 생일이면 온갖 잔치를 하며 오붓하게 하루를 즐긴다는데, 여동생과 나는 미역국은 고사하고 하루 종일 배를 졸이며 건설 현장 노동판에 품일을 나가신 어머니를 기다려야 했다.
그는 이미 우리에게 있어 아버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난 그를 그렇게 무시하거나 미워하진 않았다. 그래도 그를 아버지라 인정했다. 적어도 아버지가 없는 친구들에 비해 내가 훨씬 더 행복한 사람이라 생각했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 소희의 15번째 생일날이었다. 우리 가족 4명 중에 가장 어리고 예쁜 사람의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날이었던 것이다.
어차피 생일잔치는 기대도 하지 않았던 터라 우린 아버지를 기다리지도 않고, 조촐하게 축하파티를 한 후에 다들 먼저 잠자리에 들었는데, 바로 그날, 술에 잔뜩 취한 아버지가 잠자고 있던 여동생을 성폭행한 것이었다.
여동생은 그 가냘픈 몸으로 욕정에 불타오르는 짐승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엄마와 오빠가 들을까 두려워 체념하고 이를 악물고 그렇게 당하고만 있었지만, 짐승의 격한 음성은 나머지 가족을 깨우기 충분했고, 그 모습은 고스란히 모두에게 비춰지고 말았다.
여동생은 큰 충격에 빠졌고, 얼마 후 그녀는 자살을 선택했다. 어린 나이에 얼마나 치욕스런 경험이었을까? 자살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다시 볼 수 없는 곳으로 영영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 날 이후, 그는 내게 생명을 준 아버지이기는 했지만, 내 소중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악마이기도 했다.
***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과거 생각에 잠기니 가라앉았던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때문인지 온몸은 불덩이처럼 더욱 뜨거워 졌다. 하지만 난로는 고사하고 전기장판의 온도를 한 단계 더 내려야겠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었다.
- 난 절대로 당신 같이 살지는 않으리라. 악착같이 돈을 모아서 참하고 좋은 신붓감을 만나 나도 ‘행복’이라는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그 생소한 것도 실컷 느껴볼 것이다. 또한 예쁜 자식들도 낳아 악마 같은 당신과는 다르게 내 자식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자상한 부모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
" 삐리리리~~ 삐리리리리~~~ "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게 울려대는 자명종 소리에 눈을 떴다. 새벽이었다. 간밤에는 몸이 불덩이 같더니만, 이상하게도 언제 그랬냐는 듯 가벼웠다. 서둘러 일어나 세수를 했다. 컨디션이 좋았다. 모처럼 가뿐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창밖을 내다보았다. 내 몸의 컨디션과는 달리 창밖은 어두컴컴하기만 했다. 살 속을 파고드는 차가운 공기와 함께 눈발이 사방으로 꺾이며 마구 들이쳤다.
" 서둘러야겠군! "
역시나 거리는 빙판 투성이었다. 마구 쏟아지는 눈발 때문인지, 가로등이 켜져 있긴 해도 한치 앞도 제대로 분간할 순 없었다. 당연히 인적도 뜸했다. 그나마 가끔 마주치는 사람들은 모두 초췌한 모습들을 하고 있었으며 저마다 얼굴을 깊게 파묻고 있었다. 생각보다 출근길이 더욱 늦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옷깃을 여미며 걸음을 빨리 했다.
다행히도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버스 한 대가 기다렸다는 듯이 스르르 멈추었다. 바람이 얼마나 매서운지 빨리 출근을 할 수 있다는 안도감보다 몸을 조금이라도 녹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앞서 단걸음에 버스에 올라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버스 안이 바깥보다도 더욱 싸늘한 것이 아닌가?
' 젠장. 이놈의 버스는 히터도 안 틀어주나? '
기사를 쳐다보고 한마디 던지려다 룸미러에 비친 그의 날카로우면서도 초점이 없는 눈초리에 살그머니 구석자리를 찾아 앉았다. 버스 안에는 승객들이 두 세 명 정도 타고 있었는데, 그들은 차 속이 유난히 춥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인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인지 모두들 그냥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 에라. 모르겠다 '
창밖을 내다보았다. 가로수가 천천히 지나갔다. 차의 속도가 상당히 느린 모양이었다. 노면이 미끄럽다는 것을 어느 정도 감안하더라도 이건 너무하다 싶을 정도였다.
' 이러면 곤란한데? '
버스가 마침 다음번 정류장에서 스륵 멈추었다. 회사 근처로 가는 노선 하나가 있는 곳이었다. 어차피 갈아타야 하는데 느림보에 얼음장인 거지같은 버스에 타고 있느니 갈아탈 수 있는 곳에서 빨리 내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몇 정거장만 더 가면 회사 앞까지 운행되는 버스 노선이 여럿 있는 정류장에 도착하는지라 속으로 안절부절 투덜거리고만 있었다.
' 어차피 일찍 나왔는데... 그냥 잠시 눈이나 붙일까? 오늘 같은 날씨라면 나만 늦진 않을 거야. 여기서 내리면 갈아탈 노선도 하나뿐이고... 만약 그게 연착이라도 되면 더 늦을 수도 있어. '
그렇게 혼자 협상을 하고는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으려는 찰나였다. 또각또각 신경을 건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이힐소리... 젊은 여자가 차에 올라탄 모양이었다. 나도 총각인지라 신경이 쓰여 실눈을 뜨고 그쪽을 쳐다보았다. 속된 말로 ‘베이글녀’랄까, 변두리에서는 보기 드물게 몸매가 유난히 예쁜 앳된 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얼굴은 선글라스에 가려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흔히 볼 수 있는 외모는 아니었다.
' 선글라스만 없으면 좋겠네, 그건 새벽부터 뭐 하러... '
그런 생각을 하는 도중, 그 여자가 내가 앉아 있는 자리 쪽까지 다가온 것이었다. 괜히 보고 있던 것을 들킬까봐 눈을 질끈 감았다. 흥분된 내 심장소리와 같은 박자의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어느 순간 뚝 멈추었다. 눈을 감았지만, 선글라스 속의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다.
' 설마... 내 옆에 앉진 않겠지? '
그런데 그 여자는 뜻밖에도 내 옆자리에 앉는 것이 아닌가? 버스에 빈자리가 넉넉하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빈자리 또는 동성의 옆자리나 내리기 편한 자리 앉기 마련이다.
이 여자가 타기 전까지만 해도 기사까지 포함해 다섯 명 정도가 승객의 전부였다. 그런데 빈자리도 아니고 동성도 아니고 내리기 편한 자리도 아닌 바로 내 옆에 앉다니! 기분이 묘했다. 눈동자를 돌려 그녀를 살짝 훑어보았다. 한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짧고 얇은 봄 옷 차림이었다.
' 선글라스도 그렇고, 진짜 제 정신인 여잔가? '
자꾸 신경이 쓰였지만, 상관없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다시 눈을 감으려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여자가 앉은 쪽에서 더욱 싸늘한 기운이 몰려오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괜한 기분 탓이겠지 란 생각으로 코트 깃을 올리고 몸을 웅크리려는데, 한쪽 손에 부드러우면서도 얼음장 같은 묘한 촉감이 느껴졌다. 깜짝 놀라 눈을 떴더니 여자가 내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 아직 체온이 가시지 않았군요. "
" 네? "
" 지금 가시면 질긴 운명의 끈은 끊어지겠지요. "
" 뭐요? 무슨 말씀인지... "
선글라스 안으로 비치는 여자의 눈동자는 강렬했다. 그리고 어디선가 본 듯한 눈빛이었다. 그러나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여자는 더 이상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자가 일어나자 버스 기사는 정류장이 아닌데도 기다렸다는 듯 차를 멈추고 자동문을 열었다. 그녀에게서 알 수 없는 느낌이 밀려들었다. 나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
여자는 계단 중간에서 멈칫했다. 그녀는 시선은 앞으로 향한 채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 후회하지 않을 건가요? "
그녀가 쳐다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짧은 순간 그녀의 옆모습이 출구 유리창에 살짝 비쳐졌다. 그녀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드리어져 있었다. 나는 그녀를 따라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출구로 향했다. 그리고 버스에서 내리기 위해 한 발자국을 인도가 있는 턱으로 내딛었다.
그런데...
' 이게 뭐야? '
바닥이 매우 물컹했다. 인도도 아스팔트도 아닌, 그렇다고 빙판도 아닌... 그렇다고 모래바닥 같지도 않은 괴상한 느낌이었다. 중심을 잡으며 앞쪽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모습이 온데 간데 보이지 않았다. 몸은 허둥거렸지만, 시선은 알 수 없는 그녀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순간 버스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더니만 출발소리가 났다. 본능처럼 그쪽을 쳐다보았다. 버스 창가에서 누군가가 손을 흔들었다. 자세히 보니 그녀였다. 분명 먼저 버스에서 내렸던 선글라스의 그녀... 어느새 그녀는 다시 버스를 타고 있던 것이었다. 몸을 돌려 버스출입구 쪽으로 뛰어가려 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고, 나는 강물에 빠진 고양이처럼 쉴 새 없이 허우적거리기만 했다.
그녀를 태운 버스는 그렇게 눈앞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그 버스를 향해 어떤 소리라도 버럭 지르고 싶었지만 내 입 또한 움직이지 않았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빼앗긴 이성을 되찾았을 때는 무릎까지 아스팔트에 잠겨있는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내 몸이 계속해서 아스팔트 바닥으로 서서히 가라앉고 있던 것이다. 벗어나려 했을 때는 이미 몸의 반 이상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마치 녹아들고 있다고나 할까? 저항도 하지 못한 채로 머리를 지나 하늘로 뻗은 손끝까지 땅속으로 빨려들어간다고 느꼈을 때...
' 아악! '
머리가 찢어지듯 아파 왔다.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고,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멀리서 아주 멀리서 파문처럼 들리는 심장소리와 함께 어떤 남녀의 목소리가 두둥 울림처럼 퍼져왔다.
수면 속에서 들리는 느낌이랄까? 그 웅얼거리는 목소리들은 점점 가까워졌다.
사...일...수...는.....
[ " 는..... 없는 건가요? ]
[ " 이미 삼십 분 전에 모든 신체 기능이 멈추었습니다. 안타깝지만, 너무 늦게 오셨습니다. 보호자 되시면.... " ]
[ " 살릴 수 없다고요? 미련한 친구 같으니라고... 그런 몸으로.... " ]
그 목소리들이 점점 가까워지더니 그 물컹거리던 요상한 아스팔트는 온데간데없어지고, 따가운 조명이 눈동자를 마구 때리고 있었다. 눈을 깜박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흐릿했던 시야가 점차 밝아졌다. 간호사 복장을 한 여자와 직장동료인 임 대리의 얼굴이 보였다. 뭔가 말을 하려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임대리와 눈이 마주쳤다. 임대리가 놀란 표정을 짓자 간호사가 고개를 돌려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져 밖으로 뛰쳐나갔다. 임 대리는 나에게 달려오더니 내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감싸 잡았다.
" 내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겠어? 놀랍네! 깨어나다니, 정말 다행이야. "
" 버스는? 버스 못 봤어? 그 여자가 탄 버스.. "
" 버스는 무슨 버스야. 이 친구야. 너 죽었다가 살아났어! 자네가 아무런 연락 없이 회사에 출근을 하지 않아 혹시나 해서 자네 집으로 찾아갔더니... 어휴, 세상에 그렇게 코딱지만 한 전기장판을 부여잡고... 얼음처럼 차갑게 된 상태로... "
그제야 사태파악이 된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보았다. ‘남의 살’ 같은 것이 감각이 완벽하지 않았다.
" 분명 금방까지 버스를 타고 있었는데... 여긴... 병원인가? "
" 사경을 헤매면서도 꿈을 꾸었던 모양이군. "
잠시 후, 하얀 색의 가운을 입은 남자 여러 명이 뛰어 들어왔다. 그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람이 길쭉한 기구로 내 몸의 여기저기를 짚어보더니 들뜬 목소리로 ‘이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며 흥분했다. 수십 분 동안 멈추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 것은 자기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는 일이라고 덧붙이면서...
***
며칠 후, 갑작스런 입원이 가중한 업무로 인한 누적된 과로와도 연관이 깊다는 의사 소견서가 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각종 이익문제로 사측과 대립이 되어 있던 노조가 얼씨구나 하면서 ‘죽었다가 기적처럼 살아난...’ 이 건을 SNS 등에 공론화 시키면서 이슈가 되었다.
이로 인해, 산재보험수당은 물론이고 회사 측에서는 별도로 입원비 전부와 한 달간의 휴가, 그리고 위로금을 지급했다.
늘 일에 쫓겨 살았었는데, 모처럼 두 다리를 쭉 뻗고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식적인 휴식’을 가질 수 있었다. 그야말로 수 년 만에 처음으로 느껴보는 평안함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이번 일로 인해 다른 커다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그동안 여자와 사귈 기회라고는 전혀 없었던 나에게 꿈같은 연인이 나타난 것이다. 입원기간 내내 나를 극진히 간호하던 입원동 간호사와 연분을 맺고 어느새 깊은 사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병마가 행운을 가져다 준 묘약’이 된 셈이다.
이유야 어쨌든 그동안 쌓였던 피로는 물론이고, 참한 신붓감까지 얻었으니 입가에 미소가 가실 날이 없었다.
아무도 없는 독방에서 혼자 미친 사람처럼 키득거리며 떠들었다.
“ 나는 행운아다! ”
***
드디어 그녀와 결혼반지를 고르는 날이다. 보통여자들 같으면 백화점 귀금속상에 가자고 할 테지만, 알뜰한 나의 피앙세는 나를 종로 보석도매상가로 데리고 왔다.
“ 여기서 백화점에 납품한다는데, 운이 좋으면 똑같은 물건을 반값에 살 수 있어요. ”
“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결혼반지인데... ”
“ 자기, 그런 소리하지 마요. 저기요. 사장님 이 제품도 좀 보여주실래요. ”
그때 밖에서 ‘빠앙~’ 하는 경적소리가 들렸다. 창밖을 내다봤다. 수많은 인파로 북적대는 거리너머 버스 한 대가 불법 주차한 트럭에 엉켜 옴짝달싹 위태롭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머릿속에 ‘꿈속에 보았던 그녀’의 얼굴이 스치듯 나타났다 사라졌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보았던 그녀... 시간이 흘러가도 버스 속에서 보았던 여자의 얼굴이 너무도 생생하게 각인되어 좀처럼 사라지지가 않았다.
그녀의 정체는 뭘까? 그것은 분명 저승길이었고, 그녀는 중간에 나를 살리려고 했던 것일까? 정말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날 되살려 놓은 걸까? 그리고 헤어지기 직전에 왜 후회하지 않을 것이냐고 물어봤을까? 그냥 의미 없는 꿈에 불과한 걸까? 꿈은 금방 잊게 된다는데, 그 꿈은 몇 번이나 본 영화처럼 잊혀지지 않는 이유는 무얼까?
" 자기, 반지 고르다 말고 무슨 생각해요? "
" 아, 아니야. "
" 또 머리가 아파오네요. "
" 미안해. "
" 실은 제가 가끔 두통에 시달리는데, 저랑 같이 있을 때는 옛날 생각은 금지요. “
" 당연하지! "
투정을 부리는 약혼녀를 쳐다보고 생각했다.
' 맞아. 그동안 과거에만 집착해 누구나 누리는 일상의 행복을 뒤로하고 너무도 악착같이 살아왔어. 대체 그럴 필요가 뭐가 있어? 이제는 그따위에 연연해하지는 않을 거야. 여기 이렇게 아리따운 나만의 연인이 있지 않은가? 이게 어머니의 유언이잖아. 하물며 나는 죽었다가 살아났어. 심장이 멈췄다가 다시 뛰었다고... 그건 필시 하늘의 뜻일 거야. 난 다시 태어난 거고, 이제 제 2의 인생을 맞이한 것이라고... 사경을 헤맨 것도, 꿈속의 여자도 다 이런 어리석음에 대한 따끔한 일침일 게야. '
그렇게 스스로를 진정시키면서, 다시 시작된 삶을 행복이라는 그릇에 레고를 쌓듯 옮겨 담아갔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그녀와 결혼식을 올렸다. ‘진짜 행복’을 만끽하고 싶어 사랑하는 그녀와의 2세를 서둘러 보고 싶었다.
아이가 태어나기만 한다면 어머니의 유언처럼, 그 아이를 세상에서 최고로 행복하게 키울 것이라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일이 잘 풀리려니까, 직장에서 뒤늦게 능력을 인정받아 뜻하지 않게 본사 기획실 서리로 발령 받는 행운까지 겹쳤다. 게다가 옮겨간 기획실의 기획실장이 시골 고등학교 선배란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별일만 없다면 진급까지 따 놓은 당상인 셈이었다. 정말이지 세상이 전부 내 것 같은 기분이었다.
180도로 바뀐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모든 일이 그렇게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노력을 했지만 2년 동안 신부의 뱃속에 애가 당최 들어서지 않는 것이었다. 부인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했다.
" 미안해요. 병원에서는 당신이나 저나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들 하는데... 당신이 아이를 무척이나 기다리니... 난임부부 시술이라도 받을까 봐요. "
" 고작 2년인데 뭐, 나야 뭐 당신만 있으면 좋으니까 너무 조급하게 신경 쓰지 말라고... “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상하게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았고, 일도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어쩌면 과거사에 집착하지 않겠다던 다짐이 부질없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게 몇날며칠을 뜬눈으로 지새우는 것이 반복되자, 나중엔 미칠 지경이 되었다.
아버지로 인해, 그래서 내 자식만은 멋지게 키우겠다는 생각, 그것 때문에 아기를 무척이나 기다리게 된 것이었고, 그것은 '혹시나 아기를 가질 수 없으면 어떻게 하나'라는 지나친 걱정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걱정이 의심을 낳는다고, 그러던 어느 날 새벽까지 뜬눈으로 지새우다 잠든 부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깊게 잠들었는지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 혹시 저 사람, 피임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애를 낳으면 몸매가 망가질 것이고, 다니던 병원도 그만 두어야 한다고 늘 걱정하던 눈치였는데... '
문득 부인이 자고 있는 옆의 문갑 쪽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문갑 위에는 부인이 요즘 복용하고 있는 두통약인지 감기약인지가 있었다. 그 약봉지를 보고 있으려니까 왠지 모르게 이상한 생각이 들었고,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부인이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문갑 앞으로 가서 그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부인의 잡동사니가 들어있는 곳이라 평소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던 곳이었다.
한참을 뒤졌는데도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자 사랑하는 사람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죄책감에 괜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즈음이었다. 속옷들 틈 사이에서 작은 상자가 만져지는 것이었다.
' 뭐지... '
그것은 다름 아닌 피임약이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손이 떨려왔다. 설마 하는 마음에 스마트폰으로 그 약을 자세히 검색을 해 본 결과, 효과를 높이기 위해 주기적으로 맞추어서 복용하는 아주 고가의 제품이었다.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신뢰감이 금이 가듯 사라지더니 배신감이 치밀어 올랐다. 온몸이 부르르 떨려왔으나 그녀가 눈치 채지 못하게 그것을 제자리에 넣어두고 거실로 나와 약사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는 자다 깼는지 잠긴 목소리로 짜증을 냈다.
[ " 미친놈아! 한밤중에 전화를 해서 느닷없이 그 약하고 비슷하게 생긴 캡슐의 영양제가 있냐고 물어보면 어떻게 알아? 아무리 약사라지만 내가 그걸 다 외우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네 마누라가 피임약을 영양제인줄 알고 먹기라도 한 거야? " ]
" 아니.. 그냥 안부도 물을 겸해서 전화했는데, 그냥 갑자기 그게 궁금하네? 아까 잡지에서 본 건데.. 그래서 물어보는 거야. 내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잠도 못 자잖아. "
[ " 싱거운 자식. 넌 안부를 새벽 3시에 물어보냐? 그렇게 궁금하면 인터넷이나 뒤져보던지 아침에 전화하던지 해야지. 하긴, 인터넷이라고 해도 캡슐모양까지는 안 나오겠지만... 어쨌거나 평소에는 연락도 없더니만... 알았으니 기다려봐. " ]
***
집으로 돌아온 나는 부인 몰래 문갑 속의 피임약을 영양제와 바꿔치기 해 놓았다. 그냥 대화를 통해 해결하는 것이 좋을 거라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만약 부인이 계속해서 피임을 하고 싶다면 꼭 피임약이 아니더라도 몰래 다른 피임법을 택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어쩔 수 없었다.
그 날 이후로 밤이면 잠에 든 척하며 부인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했다. 예상대로 그녀는 문갑 속의 약을 몰래 복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복용한 날 다음이면 어김없이 콧소리를 해가며 내 품에 안겼다. 임신에 대한 걱정이 없어진 탓인지 상당히 안심하는 눈빛이었다.
' 나를 속이다니... 나쁜 계집! '
그러던 어느 날, 출근을 하면서 부인의 마음을 떠보았다.
" 내가 벌어오는 월급이 적지? "
" 무슨 소리예요? "
" 넉넉하지 않으니까 당신이 병원을 그만 두지 못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살림하느라 직장 다니느라... "
" 아이.. 당신도, 괜한 걱정 말아요. 전 괜찮으니까요. 아이 생길 때까지 만이라도 조금이라도 더 저축해서.... "
" 아이라고? 그래, 그럼 당신 좋도록 해. "
싸늘하게 부인을 휙 쳐다보고 현관문을 신경질적으로 쾅 소리 나게 닫았다. 뒤따라 나오며 왜 갑자기 그러냐는 부인의 울먹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못들은 척하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 가증스러운 것 '
약을 바꿔치기 한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부인은 얼마 후, 임신을 했다. 애써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몹시 못 마땅한 눈치였다. 그녀의 배가 불러올수록 그녀에 대한 사랑도 그렇게 식어만 갔다. 부인도 그것을 느꼈는지 일상적인 대화를 빼고는 말수도 확 줄어들었다.
사랑을 찾으려고 그토록 기다렸던 사랑의 잉태는 사랑을 시들게 하는 사랑이 아닌 사랑의 열매가 된 것이다.
***
같이 살고는 있지만 타인과 다를 바 없는 하루하루가 흘렀다. 부인의 배는 자꾸만 불러왔고, 그럴수록 그녀는 힘들어했다.
' 그래, 저 여자는 내 여자이고 뱃속의 아기는 내 아이야. 내가 굽히고 가야지. '
예전과 같은 그녀와의 사랑을 기대하며 고민하며, 다시 노력해 보기로 했다.
하지만, 이미 메말라버린 땅에 몇 바가지의 물을 더 뿌린다고 해서 그 땅을 다시 기름지게 하기란 정말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일상적인 대화도 먼저 꺼내기 어려워졌고, 기어코는 마시지 않았던 술까지 입에 대기 시작했다. 그제야 예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홀로 술을 즐기는 사람들의 마음’이 무엇인지 대충은 알 수 있었다.
술 마시는 횟수가 늘어가면서, 가지를 떠난 낙엽처럼 사랑도 멀어져 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
망각과 이탈, 그리고 이상에 안착.
적어도 술의 힘을 빌리고 있을 때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고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기다렸던 가족 간의 사랑? 그것은 내 복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역시 타고난 운명은 그것들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 나란 존재는 영원히 행복할 수 없단 말인가? '
마침내 산달이 지나 아이가 태어났다.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렸던 내 씨앗의 싹이었지만, 아이에 대한 사랑은 껍데기뿐이었다. 남의 아이를 보고 있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아이의 얼굴이 그 누군가를 닮아갔다.
그것은 바로 그토록 원망했던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피를 말리고 뼈를 깎아 증오했던 악마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그냥 지나치려고 해도 그 아이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으려면 마치 아버지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아 돌아버릴 것 같았다.
' 당신이 끝까지 나를 끝까지 괴롭히는 구나 '
그냥 외모만 할아버지를 닮은 것뿐일 텐데도, 성장하면 할수록 그 말투나 버릇까지도 할아버지를 닮아 가는 것 같아 불길했다.
' 겨우 행복이란 것을 잡았는데, 대체! 왜왜왜!!!! '
때문에 더욱 술에 의존하게 되었고, 블랙아웃에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도 떠올려지지 않을 정도로 몸이 망가졌다. 아침에는 일어나지도 못해 번번이 지각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자 마침내 다니던 회사에서 ‘불성실하다’는 이유로 사표를 제출하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것으로 불행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벌써 몇 개월 째 별거를 하고 있던 부인이 거의 매일 밖으로 나돌더니만 두 번째 임신을 한 것이다.
얼마 전부터 회사 동료였던 임 대리, 아니 임 과장을 몰래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혼을 하면 임 과장이 청혼을 할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뱃속의 아이도 그것을 준비하는 바로 그 자식의 아이일 거라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 누구 애야? "
" 누구라니요? 당, 당신이... 그때 당신이 술 취해서... "
" 뭐라고? 에잇! "
기어코는 부인에게 손찌검까지 하고 말았다.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 나쁜 년 '
그렇다고 호락호락 이혼을 해줄 내가 아니었다. 나는 폐인이 되어 가는데, 자기들끼리 행복하겠다고? 어림도 없었다.
역시나 둘째가 태어나자 부인은 ‘정식으로 이혼’을 해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난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 여자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목숨을 내 놓을 정도로 일에만 매진했던 황소고집 오기가 있던 나였다.
' 내가 미쳤냐? 니들 행복해지는 꼴을 보게!! '
이후 임과장의 전화를 안 받기 위해 전화기를 박살냈으며, 만나주지 않기 위해 새벽에 나가 한밤중에 돌아왔다. 이따금씩 임과장이 집에 뭔 우편물이나 택배를 보내오곤 했으나 보자마자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 왜? 부인과 이혼을 해달라고 부탁하려고? 싫어, 싫다고! '
그날 이후, 이혼을 하지 않기 위해 이혼사유가 될 만한 ‘폭력’이라든지 ‘음주’ 같은 것을 최대한 자제했고, 노동판에 가서 돈도 벌어다줬다. 집에 발을 들여놓기 싫어서 먹고 자는 지방의 공사판을 전전했다.
그렇게 한해 두해가 지나자 부인은 이혼 포기를 한 모양이었다. 더 이상 이혼을 해달라는 부탁도 하지 않았다. 더불어 임과장의 우편물도 보이지 않았다.
' 결국 그렇게 포기할 거면서... '
부인이 그렇게 수그러지자, 지방 공사판을 전전할 필요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집에서 빈둥거리다가 일이 있으면 나갔다가 그날 받은 일당으로 술을 사마시기가 일상이 되어 버렸다.
아들놈은 지 할아버지 닮아서 싫었고, 딸은 내 핏줄이 아니고, 부인은 바람이나 피는 화냥년인데, 돈을 벌어다 줄 책임감이 생길 이유가 없었다.
아버지 노릇도 못한 채로 단절 아닌 단절의 십수 년이 흘러 아이들이 중학교에 다닐 때 즈음이었다. 난 부인이 벌어오는 돈으로 간간히 살아가는 폐인 처지가 되었고, 그나마도 부인 돈을 훔쳐서 술을 사먹는 행위를 반복했다. 애들한테는 전혀 관심도 없으니, 그 애들이 몇 학년 쯤 되었을 거란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술이 최고였다. 술에 취한 날에는 부인이든 애들이든 간에 말을 듣지 않으면 폭력을 휘둘렀다.
그날도 술을 마시기 위해 집안에서 돈을 찾다가 부인의 핸드백을 뒤졌다. 그러다가 우연히 이혼 소송 서류를 발견한 것이었다.
' 옳거니! 이제는 이혼사유가 된다 이거지? '
그것을 찢어버리고 핸드백 속의 잔돈푼을 탁탁 털어 술을 마시고는 반쯤 취해서 집에 들어왔다. 마침 딸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딸과 딱 둘이서 마주친 것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딸은 술 취한 나를 보자마자 겁먹은 표정으로 자기 방으로 후다닥 달아났다. 순간 가슴이 뜨끔했다.
' 피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호적상 내 딸인데... 아빠와 딸이 관계가 왜 이래? 같이 있는 동안만이라도 진짜 아빠와 딸같이 지내야지. '
나는 급히 따라가 딸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 아빠, 잘못했어요. "
" 네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러니? "
야단칠 생각도 없는 날 보고도 계속해서 벌벌 떠는 딸이 한편으로는 측은해 다독이며 안아주려 했다. 그런데 딸은 버둥거리며 내 품을 벗어나려는 것이었다. 갑자기 임 과장의 얼굴이 머릿속에 들어 왔다. 그러자 묘한 확신이 들었다.
' 그럼 그렇지. 이 아이는 첨부터 내 딸이 아니었지. 호적은 얼어 죽을! '
임 과장과 다정하게 앉아서 웃음꽃을 피우는 부인과 아이들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불현듯 나만 불행해지고, 그들은 행복해질 거라는 더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모든 것이 더럽혀져야 된다고 생각했다.
' 그 가증스런 년과 그 개 같은 자식에게서 태어난 이 아이... 그래, 그냥 놔 둘 수는 없어. '
나는 술기운에 터져 나온 분노와 욕정으로 이성을 잃은 채 딸의 옷을 강제로 벗기기 시작했다.
***
그런 일이 있은 며칠 후, 딸은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을 했다. 자살을 한 이유에 대한 유서도 없었고, 단서도 없었다. 모두들 부족한 교우관계와 성적 등 여러 가지 고민이 많은 내성적인 아이었다는 이유로 자살을 했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오직 나와 아내, 그리고 아들이 전부...
딸을 잃은 슬픔만큼이나 큰 죄책감이 몰려왔다.
가족들의 시선이 더욱 부담스러워 졌다. 특히, 아들 녀석의 눈빛은 더욱 그랬다. 마치 먼 옛날의 나의 모습과도 같았다. 하지만 괴로워하기 이미 때는 너무도 늦었다.
나중에 측근을 통해 안 사실이지만 부인이 그때 피임을 했던 것은 원인 모르게 주기별로 온다는 ‘군발성두통’으로 강도 높은 두통약을 복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남편이 걱정할까봐서 심한두통을 앓고 있는 사실 자체를 숨겼던 것이었다. 그리고 부인이 임 과장을 만나 것은 남편이 방황하는 이유와 그 고민이 무엇인지 듣기 위해서라는 사실도 알았다.
그리고....
딸이 자살하기 며칠 전, 부인이 나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나와 딸의 피를 채취했고, 친자확인검사를 한 검사증을 갖고 있었지만, 블랙아웃이 되었던 난 그걸 까맣게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가족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자기 딸을 겁탈하고, 죽인 아빠... 그토록 싫어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답습한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을까? 무엇이 날 이렇게 꼬이게 만들었을까?
하지만, 무슨 짓을 해도 절대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에 몇날며칠을 미친 듯 울고 웃고를 반복하다 집을 나왔다. 그리고 노숙자들 틈에 끼어 몇날 며칠을 멍한 상태에서 지냈다.
하루하루가 괴로움과 아픔과 고통의 나날...
무엇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그냥 죽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이었다. 매서울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누더기 코트를 껴입고 노숙자에게 배식되는 음식을 먹으러 서울역으로 향하던 중에 갑자기 심한 구역질이 올라와 근처 화장실로 뛰어올라갔다.
" 우억~ "
선지피였다. 바로 근처에 병원이 있었지만, 몸을 치료할 돈도 마음도 용기도 없었다. 문득 남아있는 가족들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나 때문에 자살한 가물가물하기만 한 딸의 얼굴을 사진으로라도 보고 싶었다. 동상이 걸려 감각이 없어진 손으로 주머니 속을 뒤졌다.
' 가족들... 한번만이라도... 제발.. '
몇 시간 전 싸움질로 번 푼돈이 만져졌다. 쓴웃음이 나왔다. 지친 몸을 이끌고 상점에 들려 부인에게 줄 싸구려 화장품세트와 아들에게 줄 학용품을 샀다. 상점 한쪽에 붙어있는 TV에서는 내일의 날씨라는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었다.
[ " 20년 만에 내린 폭설과 15년만의 한파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 ]
술기운 때문에 잘 모르고 있었는데, 예년에 비해 날씨가 더 추워진 모양이었다. 거리도 한산했다. 지하철로 내려가려다 알 수 없는 이끌림에 횡단보도를 건너가 버스 정류장에 섰다. 그러자 언제 도착했는지 버스 한 대가 스르르 멈추었다. 힘없이 그 버스에 올라 한쪽 자리에 앉았다. 피곤이 몰려와 앉자마자 눈을 감았다. 그때... 어디선가 낯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또각또각... 또각또각...
눈을 떠 그쪽을 쳐다보다가 눈이 동그래졌다.
" 절 알아보시는 모양이군요. "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예전... 꿈속에서 보았던 바로 그 여자였다. 선글라스와 옷차림새도 그때 그대로였다. 여자는 내 옆자리에 앉아 그때처럼 내 손을 잡았다.
" 이번에는 온기가 다 사라져버렸군요. "
" 내, 내가 죽은 것? "
여자는 대답 대신 피식 웃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 당신이 그토록 원망하던 사람에게 복수했으니 시원하시죠? "
" 무, 무슨? 복수라니요? "
"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 했었죠? "
" 다, 당신은 왜.. 나, 나를? "
여자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 바로 저예요. "
깜짝 놀라 몸이 뒤로 젖혀졌다. 그녀는 얼마 전에 자살한 딸과 흡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녀는 내 딸이었다. 좀 더 나이를 먹고 성장한 모습이었지만, 그 얼굴은 분명 딸의 얼굴이 분명했다.
“ 설마, 진짜? ”
“ 난 그쪽이 생각하는 그녀가 맞아요. ”
“ 내 딸? ”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이미 죽은 자라는 것을 잘 알려주는 듯 눈에서 떨어진 눈물은 금세 보석 같은 얼음조각이 되어 바닥에 팅팅 소리를 내며 떨어져 굴러다녔고, 그것들은 어디선가 스며드는 빛에 반짝거리다가 소멸되어 버렸다.
“ 딸로 보지 않고, 겁탈까지 하려 했으면서 눈물까지 흘리네요? ”
“ 그건, 나도 모르게 그만... 난 정말, 오해를 했어. ”
“ 오해라는 말이 참으로 편리하게 쓰이는군요. ”
“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난 짐승이었어. 사람이 아니었어. 나, 나를 용서해다오. ”
그녀는 너무나도 사무적인 표정과 말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 이미 다 지난 일이기도 하거니와, 지금의 나에게는 용서를 할 필요는 없어요. 동사(凍死)를 할 운명이었던 그쪽을 살려준 건 저였으니까요. ”
“ 그때 내가 죽었다면, 너도 그런 비극을 맞이할 아이로 태어나지는 않았을 텐데... ”
그녀가 밖을 응시했다. 나도 따라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버스는 어느새 어둠의 터널에 진입하고 있었다. 수백, 아니 수만이 넘어 보이는 반짝이는 형광물질들이 ‘현미경 속 박테리아의 번식’처럼 스멀거리며 터널 속을 이리저리 누비고 있었다.
“ 이 버스를 타고 있는 자들은 저 자들보다는 행복할 거예요. ”
“ 저 자들? ”
“ 저 반짝이는 것들은 구천을 헤매는 영(靈)들이죠. 자기가 왜 죽었는지도 영문도 모르는 자들.. 저 대부분이 태어나기도 전에 낙태된 자들이죠. 그러니 모를 수밖에요. 그 이유를 알기 전까지는 터널을 통과하지 못해요. 억울하니까요. ”
내가 살아있는 존재라면 저것들이 엄청 놀라왔을 것이며, 지금 이 순간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이지만, 이미 죽은 몸이라 그런지 모든 것이 그냥 일상에 한 부분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참으로 괴이할 정도로 차분한 나였다.
“ 터널을 벗어나면, 지나친 세상에 대한 기억은 영영 잊게 되요. 그래서 저자들이 이승과 저승의 중간에서 벗어나지 못하죠. 그쪽이나 저는 우리가 ‘왜 어떻게 불행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이유라도 알잖아요. 저 자들은 그런 영문조차 모르거든요. ”
앞 창문으로 멀리 빛다발이 쏟아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 다 왔군요. ”
“ 저 길로 가면 내가 편해질까? ”
“ 어떤 죄책감이 있다고 해도 그걸 잊어버리게 된다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되어요. 이 터널을 벗어남과 동시에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사실은 잊게 될 거예요. 영원토록... ”
눈이 부실 정도로 터널의 끝은 매우 밝았다. 어쩌면, 더욱 좋은 세상이 찾아올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대신 살아남은 누군가는 다시 불행해질 테지만요. ”
“ 살아남은 누군가가? ”
“ 기억은 사라져도 원죄가 사라지진 않죠. 그것이 지워지는 날까지 영원히 계속되는 고리와 같아요. ”
“ 너는... 어떻게 되는 거지? ”
“ 저도 그쪽처럼 제 자신이 누구였다는 것을 오늘로써 잊게 될 거예요. 당신처럼 이 터널을 지나가고 있으니까요. ”
***
그의 시신은 길거리에서 발견되었다. 온몸이 엉망진창이었지만, 놀랍게도 얼굴엔 행복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실성을 해서 죽은 거라 생각했다.
그가 꽉 쥐고 있는 손가락에는 싸구려 화장품 세트와 학용품이 든 검은색비닐봉투가 있었지만, 몇 시간 전에 그걸 판 상인이 나타나더니, ‘알코올 중독으로 다 죽어가는 이 사람이 술을 퍼마시기 위해서 자기 가게에 들어와 도둑질을 해 갔다’면서 그 물건을 도로 집어가고 말았다.
그는 그렇게 부질없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남편의 시신이 타고 있는 화장터 연기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한 여인에게 그녀의 아들이 말했다.
" 난 절대로 아버지... 아니, 저 악마 같은 사람은 되지는 않을 거예요. "
소년의 얼굴에는 비장함이 서렸다. 그런 소년을 조용히 쳐다보는 또 다른 여인의 눈동자가 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다.
- THE END -
-------------------------------------------------------------
< Ending message >
스스로 뫼비우스의 고리를 만들어 가고 있지 않습니까? 잘 생각해 보세요. 무엇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고 있는 지를...
(제가 쓴 저작물이므로 불펌 및 상업적으로 이용하면 안 됩니다.)
1화: 말하는 거울
2화: 포스터를 그리면서
3화: 하얀 원피스
4화: 딸을 위한 선물 (19)
5화: 천재 작가 (19)
6화: 소름끼치는 목소리
7화: 뫼비우스의 운명
8화: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가고 있을 때...
9화: 최고의 상품
10화: 과거로 돌아간 남자 (운명의 새해)
11화: 사이버 세계로 떠난 웹툰작가 上
12화: 사이버 세계로 떠난 웹툰작가 下
13화: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14화: 내 잘못이 아니야
15화: 파우스트의 진실
16화: 그의 노래가 들리는 곳에는...
17화: 0,01% 상류층의 은밀한 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