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결혼한 지 2년차인 만화작가 정곤은 아내인 미라의 투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작업실 겸 서재에 벌써 몇 주째 틀어박혀 나오질 않았다. 그 방안에서 컴퓨터 앞에 달려있는 ‘펜 태블릿 보드’를 만지작거리다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에만 몰두했다.
정곤은 꽤 이름 있는 만화가의 문하생으로 7년을 보냈고, 본인이 직접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지도 5년이 넘어가는 이른바 ‘만화밥 12년’의 베테랑이었다. 하지만 아직 무명작가에 불과했다.
“세상 좋아졌네. 수백 종의 톤 중에 아무거나 골라서 클릭하고 붙이기만 하면, 자동으로 원근배열까지 되다니...”
정곤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내 때는 ‘선 그리기’를 익혀야 ‘말풍선 작업’을... 그 과정이 지나야 ‘톤 붙이는 작업’을... 그 단계를 거쳐야만 겨우 ‘배경이나 색 칠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 순서였잖아. 그 모두를 완벽하게 익힌 어시스트에게 비로소 선생님이 데생한 걸 주고는 ‘펜 터치’ 시켰는데...”
정곤은 태블릿 전자펜으로 한 여성의 얼굴을 그려놓고는 옆에 있는 ‘보기’에서 피부색상을 골라 이리저리 맞춰보았다. 색상이 마음에 들자 이번에는 눈 크기를 변형시켜 가장 자연스럽고 예쁜 얼굴로 바꿨다. 다른 캐릭터보다도 몇 배는 심혈을 기울이는 듯 계속되는 정적 속에 이마에 땀방울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이렇게 그림 그리기가 쉬우니, 개나 소나 ‘만화가’라고 허세 떨고 다니는 거잖아. 세상이 이렇게 발전을 할 줄 진작 알았다면... 난 진짜 허송세월을 했구나.”
얼마 전까지 정곤은 ‘선생님’께 배운 ‘종이만화’가 최고인 줄 알았다. 인터넷의 발달에 변화가 필요하단 것은 내심 알고 있었지만, 그런 고지식한 고집을 꺾지 못하고 있다가 결국 까마득한 후배들에게 밀려 이렇게 다시 고생을 하게 된 것이다. 세상의 변화를 제때 따르지 못한 탓이리라.
정곤은 컴퓨터 책상 옆에 붙여놓은 스토리보드를 보고는 다짐했다.
“이번엔 내 생애 가장 중요한 작품이야. 그래서 최선을 다하는 거고... 연출하고 그림만 잘 나오면 돼. 웹툰? 까짓 게 대수냐?”
그래도 ‘자부심’이 있는 정곤이었다.
만화가로서는 비록 무명에 불과했지만, 산전수전 경력이 있으니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웹툰계에 자신이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 판세는 바뀔 것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집중하고 작업을 하고 있는데, 방문이 벌컥 열렸다.
“당신, 벌써 며칠 째 말 한 마디 없이 작업실에 콕 틀어 박혀 있는 줄이나 아세요?”
아내 미라였다. 화가 났는지 그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손에는 과일접시가 들려있었다. 미안한 마음에 뭔가 다정한 말이라도 한마디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오히려 안 좋은 말이 튀어나왔다.
“남편 일하는데 되지 못하게 잔소릴 해댈 거야? 여자가 떠들어서 되는 집안 있냐고?”
“어쩜 이러니, 내가 지겨워, 지겨워! 저딴 인간을 믿고 시집을 오다니!”
아내는 과일접시를 내려놓지도 않고 투덜거리며 문을 닫고 거실로 나가버렸다.
똑같은 일상, 매일같이 벌어지는 크고 작은 다툼... 왜 이렇게 틀어지게 될 걸까?
정곤은 사실 오래전에 헤어진 여자친구 ‘영주’를 못 잊고 있던 터였다.
영주는 문창과를 다니는 스토리 작가였고, 정곤은 문하생이었다. 두 사람은 ‘만화동호회’에서 공통된 관심사 때문에 만나 깊게 사귀는 사이가 된 것이었다. 두 사람은 얼마 후 자연스럽게 미래를 약속했으나 군대를 제대하고 돌아오니, 영주는 자신을 배신하고 정곤의 친한 친구인 석영과 약혼을 하고 난 직후였던 것이었다.
그렇잖아도 가정사 등 힘든 일이 많던 정곤이었는데, 졸지에 친구도 잃고, 연인까지도 잃어버린 꼴이 된 것이었다.
그 아픔 때문에 정곤도 결혼도 서둘렀고, 지금의 아내인 미라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런 과거를 까맣게 모르는 아내가 본인한테 아주 잘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정곤이었지만, 마음속 깊이 각인된 영주의 눈빛은 잊을 수가 없었다. 미치도록 기억하기 싫은데, 자꾸만 떠올려지는 상처와 아픔...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바로 옆에 있던 유선전화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따르릉, 따르릉, 따르르릉...
‘나한테 올 전화는 없으니, 분명 저 여편네의 전화겠지.’
정곤은 우악스럽게 전화기의 코드를 빼서 집어던졌다. 잠시 후, 밖에서 쿵쾅거리며 뜀박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부인이 거실에서 전화를 받은 모양이었다.
(“매일 그렇지 뭐. 너는 어때? 아까 나도 그 홈쇼핑 광고 봤는데, 호호 맞아, 맞아. 거기가 훨씬 싸. 그러면서도 최저가래, 정말 웃기지 않니?”)
일이 되지 않으려니, 밖의 통화소리가 더욱 시끄럽게 들렸고 신경 쓰였다.
‘이렇게 산만해서야, 일을 할 수가 있나!’
정곤은 벌떡 일어나 신경질적으로 서재의 문을 탕 걸어 잠그고 대나무발까지 내렸다. 부인의 수다 소리가 한결 작게 들리는 것 같았다.
‘나가서 작업실을 새로 얻어야 하나? 얼마나 중요한 작품인데!’
집중이 되지 않던 탓일까? 갑자기 갈증이 났다. 옆에 놓인 주전자를 한번 들어보았다. 물이 거의 들어있지 않은 듯 힘없이 덜렁거렸다. 아내를 부를까 하다가 한 모금밖에 되지 않는 물을 마셔버리고는 다시 태블릿 전자펜을 들었다.
‘빨리 완성해야 해. 완벽하게, 아주 완벽하게 말이야!’
정곤이 그렇게 사력을 다하고 있는 웹툰작품은 ‘미녀 살인마’라는 미스터리 물이다. ‘수경’이라는 이름의 섹시하고 아름다운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자신을 이용했거나 괴롭혔던 남자들을 찾아내 처참히 살해하고는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묘하고도 강렬한 인상이 남는 작품.
정곤은 웹툰 내,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인 ‘수경’이란 여주인공 캐릭터를 옛사랑인 ‘영주’의 모습을 대치해 떠올리면서 그렸다. 이뤄지지 못한 사랑을 그렇게라도 이어가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더욱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성곤은 침을 꿀꺽 삼키며 태블릿 펜으로 남자를 유혹하는 그녀의 날씬한 허리와 풍만한 가슴, 그리고 동그란 얼굴 윤곽을 부드러운 터치로 그렸다. 그리고 그 위엔 곧바로 빠져들 것만 같은 눈동자와 붉은 색 입술을 칠했다. 그렇게 한 획을 움직일 때마다 여자의 그림은 점점 살아 움직일 것 같은 생기(生氣)가 일었다. 그녀의 벗겨진 몸에 하얀 살색을 입히자 세상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여인으로 탄생되었다. 펜을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그녀의 몸에 윤곽을 만들고 마감작업을 시작하니 마치 실제의 그녀와 정사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가슴이 뜨거워졌고 흥분되었다.
그녀의 매끈한 어깨선을 그리려던 찰나...
밖에서 힙합 노래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소외된 모두 왼발 앞으로, 그 다음은 오른발의 차례... ♪♬’)
자기 혼자만 ‘소외’가 되었다고 항의를 하려는 듯 아내가 크게 틀어놓은 모양이었다. 정곤은 문 쪽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좀 조용히 못해! 도와주진 못할망정, 집중 안 되게...”
아내가 자신에게 관심을 끌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고 있단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런 아내에게 잘해주고는 싶었지만... 남편 하나 보고 사는 사람에게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싶었지만... 항상 이런 식으로 밖에는 대답을 못하는 본인이 천애 못난이 같았다. 정곤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는 다시 손가락을 태블릿에 올렸다. 그러자 순식간에 아내 생각은 사라지고 예전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 그렇게 믿었던 친구였는데...
우린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던 그런 커플이었는데... ]
가슴의 떨림이 손가락 끝까지 미세하게 흔들리게 하였으나, 주인공 수경의 캐릭터는 흔들림없이 점차 아름답게 완성이 되어갔다. 그럴수록 정곤의 마음속 아픔도 깊어졌다.
처음부터 영주를 떠올리고 수경이란 캐릭터를 구상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알 수 없는 마력에 이끌려 자기도 모르게 '집착'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집착이 그녀를 닮은 캐릭터를 구상하게 만들었고, 그 캐릭터가 완성이 되어가면 갈수록 그 집착도 태양처럼 강렬해졌던 것이다.
그럴수록 아내와 자기 스스로에게 큰 죄를 짓는 기분이었지만, 이미 시작되어 버린 그림의 마력은 정곤의 마음을 가만 놔두지 않었다.
정곤은 하릴없이 모니터를 향해 읊조렸다.
- 멀리 있는 너...
-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아. 절대로! 그게 내 진심이야.
- 지금의 난, 내 아내를 사랑하니까!
- 하지만 이상하게 널 이대로 떠나보낼 수는 없다.
- 그래서 그냥 내 그림 속에만 함께 하는 거야.
- 비록 이름이 다른 ‘수경’이라는 사이버 인물로 표현했지만....
- 그게 ‘영주’ 너고, 난 널 여기서만큼은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있다.
- 그건 할 수 있겠지? 죄가 아니지?
그렇게 몇날 며칠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수경의 캐릭터 기본그림 몇 장이 완성되자 정곤은 눈꺼풀이 스르르 감기는 것을 억제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풀썩 쓰러져서 잠이 들고 말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가 정곤의 어깨를 툭툭 치는 것이었다. 아마도 아내인 미라가 깨우는 것이리라. 정곤은 머리를 만지며 잠결에 대답했다.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어? 분명 문을 잠그...”
그리고는 자신의 어깨 뒤를 바라보다가 벌떡 일어났다. 어깨를 친 사람은 낯선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디서 본 거는 같은데,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이랄까?
“저 누군지 아시겠어요?”
“누구세요? 모, 모르겠는데요? 근데, 여길 어떻게?”
“저 수경이에요.”
“수경이요?”
“당신의 만화 속, 여인이지요.”
- 下편에 계속 -
(제가 쓴 저작물이므로 도용, 불펌 및 상업적으로 이용하면 안 됩니다.)
제 글들이 좀 길다는 지적이 있는 거 같아 앞으로는 두 편 정도로 나눠서 올리기로 했습니다. 더불어 예전에 썼던 글들을 요즘 현실에 맞게 새롭게 각색해서 올리는 중인데요, 사무실에서 일을 하면서 동시에 하려니까 시간이 좀 걸리네요.
사이버 세계로 떠난 웹툰작가 上
사이버 세계로 떠난 웹툰작가 上
(11번 째 단편)
이제 결혼한 지 2년차인 만화작가 정곤은 아내인 미라의 투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작업실 겸 서재에 벌써 몇 주째 틀어박혀 나오질 않았다. 그 방안에서 컴퓨터 앞에 달려있는 ‘펜 태블릿 보드’를 만지작거리다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에만 몰두했다.
정곤은 꽤 이름 있는 만화가의 문하생으로 7년을 보냈고, 본인이 직접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지도 5년이 넘어가는 이른바 ‘만화밥 12년’의 베테랑이었다. 하지만 아직 무명작가에 불과했다.
“세상 좋아졌네. 수백 종의 톤 중에 아무거나 골라서 클릭하고 붙이기만 하면, 자동으로 원근배열까지 되다니...”
정곤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내 때는 ‘선 그리기’를 익혀야 ‘말풍선 작업’을... 그 과정이 지나야 ‘톤 붙이는 작업’을... 그 단계를 거쳐야만 겨우 ‘배경이나 색 칠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 순서였잖아. 그 모두를 완벽하게 익힌 어시스트에게 비로소 선생님이 데생한 걸 주고는 ‘펜 터치’ 시켰는데...”
정곤은 태블릿 전자펜으로 한 여성의 얼굴을 그려놓고는 옆에 있는 ‘보기’에서 피부색상을 골라 이리저리 맞춰보았다. 색상이 마음에 들자 이번에는 눈 크기를 변형시켜 가장 자연스럽고 예쁜 얼굴로 바꿨다. 다른 캐릭터보다도 몇 배는 심혈을 기울이는 듯 계속되는 정적 속에 이마에 땀방울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이렇게 그림 그리기가 쉬우니, 개나 소나 ‘만화가’라고 허세 떨고 다니는 거잖아. 세상이 이렇게 발전을 할 줄 진작 알았다면... 난 진짜 허송세월을 했구나.”
얼마 전까지 정곤은 ‘선생님’께 배운 ‘종이만화’가 최고인 줄 알았다. 인터넷의 발달에 변화가 필요하단 것은 내심 알고 있었지만, 그런 고지식한 고집을 꺾지 못하고 있다가 결국 까마득한 후배들에게 밀려 이렇게 다시 고생을 하게 된 것이다. 세상의 변화를 제때 따르지 못한 탓이리라.
정곤은 컴퓨터 책상 옆에 붙여놓은 스토리보드를 보고는 다짐했다.
“이번엔 내 생애 가장 중요한 작품이야. 그래서 최선을 다하는 거고... 연출하고 그림만 잘 나오면 돼. 웹툰? 까짓 게 대수냐?”
그래도 ‘자부심’이 있는 정곤이었다.
만화가로서는 비록 무명에 불과했지만, 산전수전 경력이 있으니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웹툰계에 자신이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 판세는 바뀔 것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집중하고 작업을 하고 있는데, 방문이 벌컥 열렸다.
“당신, 벌써 며칠 째 말 한 마디 없이 작업실에 콕 틀어 박혀 있는 줄이나 아세요?”
아내 미라였다. 화가 났는지 그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손에는 과일접시가 들려있었다. 미안한 마음에 뭔가 다정한 말이라도 한마디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오히려 안 좋은 말이 튀어나왔다.
“남편 일하는데 되지 못하게 잔소릴 해댈 거야? 여자가 떠들어서 되는 집안 있냐고?”
“어쩜 이러니, 내가 지겨워, 지겨워! 저딴 인간을 믿고 시집을 오다니!”
아내는 과일접시를 내려놓지도 않고 투덜거리며 문을 닫고 거실로 나가버렸다.
똑같은 일상, 매일같이 벌어지는 크고 작은 다툼... 왜 이렇게 틀어지게 될 걸까?
정곤은 사실 오래전에 헤어진 여자친구 ‘영주’를 못 잊고 있던 터였다.
영주는 문창과를 다니는 스토리 작가였고, 정곤은 문하생이었다. 두 사람은 ‘만화동호회’에서 공통된 관심사 때문에 만나 깊게 사귀는 사이가 된 것이었다. 두 사람은 얼마 후 자연스럽게 미래를 약속했으나 군대를 제대하고 돌아오니, 영주는 자신을 배신하고 정곤의 친한 친구인 석영과 약혼을 하고 난 직후였던 것이었다.
그렇잖아도 가정사 등 힘든 일이 많던 정곤이었는데, 졸지에 친구도 잃고, 연인까지도 잃어버린 꼴이 된 것이었다.
그 아픔 때문에 정곤도 결혼도 서둘렀고, 지금의 아내인 미라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런 과거를 까맣게 모르는 아내가 본인한테 아주 잘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정곤이었지만, 마음속 깊이 각인된 영주의 눈빛은 잊을 수가 없었다. 미치도록 기억하기 싫은데, 자꾸만 떠올려지는 상처와 아픔...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바로 옆에 있던 유선전화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따르릉, 따르릉, 따르르릉...
‘나한테 올 전화는 없으니, 분명 저 여편네의 전화겠지.’
정곤은 우악스럽게 전화기의 코드를 빼서 집어던졌다. 잠시 후, 밖에서 쿵쾅거리며 뜀박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부인이 거실에서 전화를 받은 모양이었다.
(“매일 그렇지 뭐. 너는 어때? 아까 나도 그 홈쇼핑 광고 봤는데, 호호 맞아, 맞아. 거기가 훨씬 싸. 그러면서도 최저가래, 정말 웃기지 않니?”)
일이 되지 않으려니, 밖의 통화소리가 더욱 시끄럽게 들렸고 신경 쓰였다.
‘이렇게 산만해서야, 일을 할 수가 있나!’
정곤은 벌떡 일어나 신경질적으로 서재의 문을 탕 걸어 잠그고 대나무발까지 내렸다. 부인의 수다 소리가 한결 작게 들리는 것 같았다.
‘나가서 작업실을 새로 얻어야 하나? 얼마나 중요한 작품인데!’
집중이 되지 않던 탓일까? 갑자기 갈증이 났다. 옆에 놓인 주전자를 한번 들어보았다. 물이 거의 들어있지 않은 듯 힘없이 덜렁거렸다. 아내를 부를까 하다가 한 모금밖에 되지 않는 물을 마셔버리고는 다시 태블릿 전자펜을 들었다.
‘빨리 완성해야 해. 완벽하게, 아주 완벽하게 말이야!’
정곤이 그렇게 사력을 다하고 있는 웹툰작품은 ‘미녀 살인마’라는 미스터리 물이다. ‘수경’이라는 이름의 섹시하고 아름다운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자신을 이용했거나 괴롭혔던 남자들을 찾아내 처참히 살해하고는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묘하고도 강렬한 인상이 남는 작품.
정곤은 웹툰 내,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인 ‘수경’이란 여주인공 캐릭터를 옛사랑인 ‘영주’의 모습을 대치해 떠올리면서 그렸다. 이뤄지지 못한 사랑을 그렇게라도 이어가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더욱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성곤은 침을 꿀꺽 삼키며 태블릿 펜으로 남자를 유혹하는 그녀의 날씬한 허리와 풍만한 가슴, 그리고 동그란 얼굴 윤곽을 부드러운 터치로 그렸다. 그리고 그 위엔 곧바로 빠져들 것만 같은 눈동자와 붉은 색 입술을 칠했다. 그렇게 한 획을 움직일 때마다 여자의 그림은 점점 살아 움직일 것 같은 생기(生氣)가 일었다. 그녀의 벗겨진 몸에 하얀 살색을 입히자 세상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여인으로 탄생되었다. 펜을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그녀의 몸에 윤곽을 만들고 마감작업을 시작하니 마치 실제의 그녀와 정사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가슴이 뜨거워졌고 흥분되었다.
그녀의 매끈한 어깨선을 그리려던 찰나...
밖에서 힙합 노래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소외된 모두 왼발 앞으로, 그 다음은 오른발의 차례... ♪♬’)
자기 혼자만 ‘소외’가 되었다고 항의를 하려는 듯 아내가 크게 틀어놓은 모양이었다. 정곤은 문 쪽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좀 조용히 못해! 도와주진 못할망정, 집중 안 되게...”
아내가 자신에게 관심을 끌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고 있단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런 아내에게 잘해주고는 싶었지만... 남편 하나 보고 사는 사람에게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싶었지만... 항상 이런 식으로 밖에는 대답을 못하는 본인이 천애 못난이 같았다. 정곤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는 다시 손가락을 태블릿에 올렸다. 그러자 순식간에 아내 생각은 사라지고 예전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 그렇게 믿었던 친구였는데...
우린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던 그런 커플이었는데... ]
가슴의 떨림이 손가락 끝까지 미세하게 흔들리게 하였으나, 주인공 수경의 캐릭터는 흔들림없이 점차 아름답게 완성이 되어갔다. 그럴수록 정곤의 마음속 아픔도 깊어졌다.
처음부터 영주를 떠올리고 수경이란 캐릭터를 구상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알 수 없는 마력에 이끌려 자기도 모르게 '집착'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집착이 그녀를 닮은 캐릭터를 구상하게 만들었고, 그 캐릭터가 완성이 되어가면 갈수록 그 집착도 태양처럼 강렬해졌던 것이다.
그럴수록 아내와 자기 스스로에게 큰 죄를 짓는 기분이었지만, 이미 시작되어 버린 그림의 마력은 정곤의 마음을 가만 놔두지 않었다.
정곤은 하릴없이 모니터를 향해 읊조렸다.
- 멀리 있는 너...
-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아. 절대로! 그게 내 진심이야.
- 지금의 난, 내 아내를 사랑하니까!
- 하지만 이상하게 널 이대로 떠나보낼 수는 없다.
- 그래서 그냥 내 그림 속에만 함께 하는 거야.
- 비록 이름이 다른 ‘수경’이라는 사이버 인물로 표현했지만....
- 그게 ‘영주’ 너고, 난 널 여기서만큼은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있다.
- 그건 할 수 있겠지? 죄가 아니지?
그렇게 몇날 며칠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수경의 캐릭터 기본그림 몇 장이 완성되자 정곤은 눈꺼풀이 스르르 감기는 것을 억제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풀썩 쓰러져서 잠이 들고 말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가 정곤의 어깨를 툭툭 치는 것이었다. 아마도 아내인 미라가 깨우는 것이리라. 정곤은 머리를 만지며 잠결에 대답했다.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어? 분명 문을 잠그...”
그리고는 자신의 어깨 뒤를 바라보다가 벌떡 일어났다. 어깨를 친 사람은 낯선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디서 본 거는 같은데,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이랄까?
“저 누군지 아시겠어요?”
“누구세요? 모, 모르겠는데요? 근데, 여길 어떻게?”
“저 수경이에요.”
“수경이요?”
“당신의 만화 속, 여인이지요.”
- 下편에 계속 -
(제가 쓴 저작물이므로 도용, 불펌 및 상업적으로 이용하면 안 됩니다.)
제 글들이 좀 길다는 지적이 있는 거 같아 앞으로는 두 편 정도로 나눠서 올리기로 했습니다. 더불어 예전에 썼던 글들을 요즘 현실에 맞게 새롭게 각색해서 올리는 중인데요, 사무실에서 일을 하면서 동시에 하려니까 시간이 좀 걸리네요.
1화: 말하는 거울
2화: 포스터를 그리면서
3화: 하얀 원피스
4화: 딸을 위한 선물 (19)
5화: 천재 작가 (19)
6화: 소름끼치는 목소리
7화: 뫼비우스의 운명
8화: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가고 있을 때...
9화: 최고의 상품
10화: 과거로 돌아간 남자 (운명의 새해)
11화: 사이버 세계로 떠난 웹툰작가 上
12화: 사이버 세계로 떠난 웹툰작가 下
13화: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14화: 내 잘못이 아니야
15화: 파우스트의 진실
16화: 그의 노래가 들리는 곳에는...
17화: 상류층의 놀이거리
18화: 피 흘리는 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