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Yuri2013.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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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가족의 품을 떠나 미국의 LA에 도착해 한인 라디오 방송국에 들어가게 된 것은 더 늦기 전에 내 인생에 보상이 필요하다는 단 한 가지 판단 때문이었다.

적어도 몇 달 전까지는 내게도 ‘남편’이라는 사람. 그리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어여쁜 딸’이 곁에 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최고 명문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나는, 나의 꿈도 펼치지 못한 채, ‘가족’이란 굴레에 얽히게 된 것이 무척이나 힘들었다. 특히나 이쪽계통에서는 결혼한 여자들은 사망신고를 한 거나 다름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연하에다가 고졸학력이 전부인 남편을 만나게 되었던 것은 끔찍할 정도로 바보 같은 과거였다.

실수, 그래.. 그건, 실수였다.

자연스럽게 ‘이렇게 지내다가는 그냥 늙어버리겠구나.’라는 위기감도 커져, 기회가 만들어졌을 때 새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안개 속을 헤매던 비행기가 다시 항로를 찾은 기분이랄까? 늦게라도 깨닫고 내 일을 찾은 것이 무척이나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힘들겠지만, 가족은 성공 후에 다시 만나면 되지 않은가?

 

그들과 헤어진 후, LA라는 먼 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이름도 미국식으로 바꿨다. 남편은 물론이고, 친정 부모님과도 연락을 끊었다.

미혼의 여성 라디오 프로 진행자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런데 요즘....

 

내 자신이 과거의 잔해에 이끌려 조금씩 흔들리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라디오 방송의 시청자 사연 시간에 예전의 그 사람과 처지가 비슷한 어떤 남자의 두서없는 몇 통의 사연편지가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의 편지가 도착했다.

 

 

[ ‘먀셀킴’씨 안녕하세요? 오늘도 이렇게 사연을 보내게 되었네요. 오늘은 아이가 엄마를 무척이나 찾았어요. 하지만,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엄마는 여전히 돌아오지 못했지요. 아이에게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죽음이란 것. 그걸 아이에게 어떻게 알려줘야 할까요? 아이 때문에라도 슬픈 표정을 지을 수가 없네요. 오늘은 바다에 관계된 음악이 듣고 싶습니다. 심장의 굴곡을 타고 내리는 그런 시원한 음악이었으면 더욱 좋겠군요. 그거 아세요? 처음에는 인터넷 라디오에서 우연히 듣게 되었지만, 먀셀킴님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져서...

저 세상으로 간 부인이 살아 돌아온 거 같은 느낌이네요. ]

 

 

그의 사연을 읽다보니 엄마라는, 그리고 한 남자의 부인이라는 책임감이 더욱 더 가슴을 자극시켰다. 그럴 때마다 남편과 아이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돌아갈 수 없는 두 가지의 이유가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김주연... 아니지 먀셀킴!. 네가 그 사람을 잊지 못하는 것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너의 능력을 생각해봐. 너는 고등학교 내내 최고의 성적으로 최고의 대학에 진학하고 최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했어. 그런 네가 뭐가 아쉬워 그런 사람에게 너의 일생을 맡기는지 말이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너의 모습을 찾는 것이란... 너는 잘 될 수 있어. 설령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를 실망시킨 이후야.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너의 모습이 위선이었다는 것을 되돌릴 수는 없어. 그의 좋지 못한 시선을 받아드려야 한다고...!!! 알아들어?’

 

마침 스피커에서 고릴라의 'Once Again'이라는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잔인하게 냉정하게

내 곁에서 떠나시면

난 어떻게 하나요?

난 어떻게 사나요?

이 세상은 힘들지 몰라요.

나 없이 살아간다면...

 

 

눈물이 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 나는 헤드폰을 벗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

 

그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대학 3학년 때었다. 당시 남편은 근처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사람이었다. 남자의 나이가 어리면, 동생 같아 보이고 편안해서 쉽사리 친해지는 게 보편적인 여성들의 심리이다. 나 또한 그러했다. 더욱이 그의 서글서글한 성격이 편안했다. 때문에 카페의 단골이 되고, 자연스럽게 누나 동생 하는 호칭으로 서로를 부르며 친숙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기자재실에서 밤늦게까지 리포트 작업을 하다가 집에 돌아가던 도중이었다.

 

“어? 주연이 누나 지금 들어가세요?”

“어머...? 퇴근하는 길인가 보구나.”

“네, 이제 막 끝났어요. 그러고 보니 이 시간에 이런 곳에서 만난 것도 처음이네? 누나, 이것도 인연인데 시간 있으면 술이나 한 잔 사 주실래요?”

“어머, 미성년자가 술을 마셔?”

“저, 얼마 전에 졸업했는데...”

“그래? 그래도 생일이 지나지 않았으니 아직은... 좋아! 졸업 선물이다.”

“진짜요? 그냥 한번 해본 소리인데... 운 좋게도 예쁜 누나한테 공술도 얻어먹게 되네요.”

“자식, 운 좋은 줄 알아!”

 

바로 그 날 밤, 술잔을 마주하면서 우연히 그의 처지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는 고등학교 때, 성적이 꽤나 우수한 편이었으나 불우한 환경 속에서 일찌감치 대학을 포기하고 일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가족이라는 테두리가 없었던 탓인지 그는 눈빛은 외로움에 한없이 지쳐있었다. 그 눈망울에서는 어느새 작은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나는 그의 옆자리로 옮겨 앉아 그에게 어깨에 손을 올리고 다독거려주었다. 그때 그가 술 취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주연이 누나도 저 동정하시는 거지요?”

“동정이라니?”

“불쌍해서 이러시는 거지요? 지나가는 거지에게 동냥하는 식으로...”

“아냐, 절대 그렇지 않아.”

“지금까지 다 그래왔어요. 누나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누나도 다른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동정심에 위로해 주려고 이러는 것 아닌가요?”

“아니래도 그러네.”

“미안해요. 이런 바보 같은 모습을 보여서... 오늘이 바로 그 날이라 그런가 봐요.”

“그 날이라고?”

“그게...”

“궁금하게 해 놓고 말 안 하기니?”

“저 그게... 실은... 제... 생일이거든요. 아 쪽팔려.”

“생일?”

“갈 곳이 없었어요. 축하해줄 가족도 없고요. 친구들은 만나기 두려웠고... 그래서... 아 창피하다.”

 

그의 볼을 타고 두 줄기의 물방울이 주룩 흘러내렸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진정으로 그의 마음을 달래주고 싶었고, 일 년에 단 한번뿐인 그날을 축하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이 동정심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 그에게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 어떤 말도 그에게 위로가 되어줄 것 같지는 않았다. 엄지손가락으로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머리가 멍해졌다. 몸이 많이 떨려왔지만 술기운은 농도 짙은 마약처럼 행동을 대담하게 만들어 어느새 나의 손은 그의 머리를 부여잡고 그의 입술 쪽으로 향했다.

 

그 이후, 며칠간은 그를 만나기가 창피하고 껄끄러웠다. 같이 술을 먹었던 것을 후회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편했다.

 

‘그래, 그 날은 잠시 이성을 잃었던 것뿐이야.’

 

일부러 그 아이가 일하고 있는 카페가 있는 쪽을 피해 다녔다.  잠시 동안의 감정의 흔들림으로 마음이 조급해져 가는 스스로가 너무도 싫었다.

 

하지만 운명은 비켜가지 않는다고 했던가?

어느 날 그가 강의실까지 찾아왔다. 나는 일부러 냉정하게 그를 힐끔 쳐다보고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바로 그때, 그의 목소리가 나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역시 동정이었군요. 누나도 다른 사람하고 같아요.”

 

그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눈망울을 적셨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나의 존재,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 나의 존재가 위선적으로 보이는 것이 싫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그것은 누나와 동생으로의 만남이 아니었다. 정상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를 만날 때마다 그런 생각은 하나씩 사라져갔다. 비로소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이었다.

 

몇 달간의 시간이 흘러 집에서도 그와 교제를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집에서는 역시나 완강하게 반대했다.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반항 심리일까? 충동적으로 그 이듬해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뛰쳐나와 둘만의 아담한 방 한 칸을 마련했고, 몰래 혼인신고까지 했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예쁜 딸도 낳았다. 이름은 혜정이라고 지었다.

 

친정하고는 거의 단절한 채, 그렇게 몇 년 동안은 이런 것이 행복이구나 생각하며 그들을 쳐다보는 즐거움에 살았다. 비록 좋은 직장을 얻지는 못했지만, 나와 아이를 위해 성실하게 일하는 남편, 온갖 애교를 부리며 재롱을 떠는 귀여운 아이... 그것이 세상의 전부 인줄만 알았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행복감을 순간적으로 사라지게 한 것은 어느 날 우체통에 꽂힌 한 통의 편지 때문이었다.

 

 

[ 초대합니다.

선배님들!!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XX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체육대회가 드디어 다가왔습니다. 특히, 이번 체육대회는 우리과 졸업생이신 05학번 이민경 선배님께서 MBS 방송국 9시 진행자로 발탁되신 것에 대한 축하회를 겸하는 자리이기에 더욱 뜻이.... ]

 

 

이민경.... 언제 들어도 짜증나는 이름이었다. 나는 그 편지를 몇 번이고 훑어봤다. 분명 내가 알고 있던 그 이민경이 맞았다.

난 원래 법대를 지망하려고 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경쟁자였던 민경이가 신방과를 지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신방과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나의 꿈도 그 아이를 따라갔던 것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 때까지 그처럼 경쟁심을 느꼈던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아이를 처음 볼 때부터 그 아이의 목소리, 행동, 심지어는 웃는 얼굴까지도 싫었다. 무조건 그 아이와 동일선에 서서 이기고만 싶었다. 그리고 지금껏 늘 이겨왔다.

그런데, 결국엔 그 애가 9시 뉴스의 진행자를 꿰찬 것이었다.

손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그건 지독한 패배감이었다. 너무도 평범한 주부가 된 나와 그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계속 이기고 있다가도 9회에 역전을 당하면 진 게임이다. 내가 경쟁에서 낙오된 것이다.

 

어떤 일이 벌어지면 우연처럼 상응하는 일도 동시에 벌어진다고 했던가? 며칠이 지나자 방송실습 때 실습생을 담당했던 박CD에게 연락이 왔다.

 

[“김주연씨? 정말 내가 찾던 김주연씨가 맞지? 겨우 찾았네.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연락이 안 되었던 거야? 드디어 인재다운 인재가 들어왔네 하고 데스크 사람들이 얼마나 잘해 주었었는데... 꿈이 아나운서라며? 그래서 당연히 방송국으로 입사를 할 줄 알았지. 그런데 갑자기 잠적했다는 소식만 들리고... 더 좋은 일거리라도 생긴 거야? 요즘 뭐하고 살아? 설마 시집을 간 것은 아닐 테고?”]

 

그렇게 꼬치꼬치 물어보는 박CP에게 아직 미혼이며, 여러 가지 준비를 하느라 방송 일은 시간이 되면 다시 시작하겠다고 둘러댔다.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잠깐! 일할 시간이 없는 거야? 솔직히 실습 때, 이민경보다 주연씨가 외모도 그렇고 발음도 그렇고, 외국어도 그렇고... 진짜 훨씬 나아 보였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이민경이만 너무 잘나가고 있잖아?”]

 

이민경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바로 전화를 끊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애써 분을 가라앉히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요즘 민경이가 공영방송 9시 진행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동기 중에 그런 아이가 있다는 것은 정말 자랑스러운 것이지요. 다섯 기수 만인데...”

 

[“그래서 하는 말인데... 주연씨도 일 시작해야지. 공백 기간도 있고 하니 한국서 시작하면 먼저 방송 시작한 후배들 때문에 신경 좀 쓰일 거야. 외국서 일이 년 만 활동하다 돌아오면 그럭저럭 경험이나 체면도 설 테고, 그때는 내가 아침방송 진행자 자리 하나 정돈 알아봐 줄 수 있는데... 그렇지 않아도 내 후배 녀석이 LA에 있거든...”]

 

 

***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일어나보니 창밖으로 프로듀서의 손에 들린 A4지 몇 장이 흔들리고 있었다. 프로듀서가 마이크에 입을 댔다.

 

“먀셀 킴씨 오늘 수고 많았어요. 마침, 사연이 들어 왔네요. 먼저 읽어볼래요? 이건 내일 나갈 분량이니까...”

 

또 그 사람 사연일까? 문득 남편과 아이가 보고 싶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담당 프로듀서가 음료수 하나와 서류를 들고 스튜디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많이 피곤하신 모양이네요. 이 드링크 하나 드시고... 참! 그 편지가 또 도착했네요. 이 사람 사연이 지금 꽤나 반응 좋으니까 내일도 이것을 포함했으면 하는데... 사연을 이메일로 보내서 주소지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나는 PD가 전해주는 종이를 받아들었다.

 

 

[ 안녕하세요? 먀셀킴 씨.

목소리에 피곤함이 묻어 보입니다. 건강 주의하세요. 건강한 것이 최고인 것 같습니다.

실은... 오늘은 딸아이가 많이 아팠거든요.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네요. 지금도 다 나은 것이 아닌지 식은땀을 조금씩 흘리고 있답니다. 빨리 병원에 데리고 가지 못해서 더욱 심해졌던 것 같아요. 낮에는 아이가 엄마를 더욱 찾더군요. 아픈 아이를 겨우 재워놓고 밖으로 나와서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늘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까요? 미치도록 그녀가 그리운 밤입니다. ]

 

 

편지를 읽자마자 나는 그것을 PD에게 건네주며 짜증을 냈다.

 

“매일같이 이렇게 진부한 내용을 내보내요? 내일은 주말이라 이런 글 읽을 만한 분위기도 아닌데...”

“그래도 그 사람 사연이 제일 반응이 좋잖아요.”

“전 싫단 말예요.”

“네?”

“죄송해요. 그냥 그래서요.”

 

인상을 쓰고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뒤에서 프로듀서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모른척하고 그냥 집으로 향했다. 머릿속에서 자꾸 아이와 남편의 얼굴이 엇갈리며 아른거렸다.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프지는 않을까?

제때 밥은 챙겨 먹을까?

 

이런 저런 생각에 빠지다보니 더욱 걱정이 되었다. 그 사람의 비슷한 사연 때문인지 핸드폰을 꺼내 주저거리다 결국 발신번호가 뜨지 않게 전화를 걸고 말았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초 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이건 아니야. 아니라고...’

 

하지만 입은 반 울먹이는 목소리로 어머니를 부르고 있었다. 어머니는 매우 놀란 듯 한참동안 급한 심호흡 소리만 났다. 아무 말 없이 한참동안 집을 나갔다가 느닷없이 전화를 건 이유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진짜 우리 주연이야? 주연이 맞지?”]

“엄마 죄송해요.”

[“세상에나, 세상에나... 이게 꿈은 아니지?”]

 

잠시 동안 어머니의 오열이 계속되었다.

 

[“진짜 살아있었네. 그.. 그런 줄도 모르고...”]

“엄마, 미안해. 저, 잘 지내고 있어요. 말도 없이 나가서 죄송해요. 두 분 다 건강하시지요?”

[“이런 나쁜 년... 왜 이제야..”]

“엄마?”

 

어머니는 다시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어머니가 겨우 입을 열었다.

 

[“경찰이 이상한 소리를 해 가지고... 사람 속을 썩이고... 암 그렇지. 우리 딸이 죽을 리가 있나.”]

“경찰이요? 제가 죽어요? 무슨 소리세요?”

[“아니다, 아니다. 너 어디에 있니?”]

“우리 아가는 요?”

[“그.. 그래. 그러니까 그게...”]

 

바로 그때, 뒤에서 헉헉거리며 담당프로듀서가 뛰어오고 있었다. 나는 다급하게 속삭였다.

 

“제가 다시 연락드릴게요.”

 

막상 전화를 하고 나니 답답한 기분은 약간이나마 떨칠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다시 며칠이 흘러갔다. 딸 혜정이와 남편의 얼굴이 계속해서 테이블 사이로 스치고 지나갔다.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 하다가 이번 방송을 마지막으로 가족에게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민경... 내 인생과 아무런 관련 없는 그런 사람 때문에, 정작 소중한 가족을 멀리했던 것이 아닌가? 심한 죄책감이 밀려 올라왔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하기 위해 전화기 위에 놓인 방송 원고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누가 잡아당긴 것처럼 그 안에서 몇 장의 프린트 물을 떨어졌다. 이상한 기분에 그것을 들어보았다. 옆에 있던 작가가 거들었다. 작가는 상당히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금방 도착한 메일이에요.

 

 

[ 딸에게 보내는 편지.

 

오늘 편지 제목은 '딸에게 보내는 편지'로 적었네요.

 

안녕하십니까? 먀셀 킴씨. 두 가지의 이유로 오늘 이것이 마지막 편지가 될 것 같습니다. 지금의 심정... 이 편지로 마감을 하려 합니다.

 

저는 스물한 살에 연상의 아내와 결혼을 했습니다. 남들보다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기 때문에 힘든 일도 많았고 서툰 결혼생활에 기쁨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물두 살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얻었습니다.

세상을 다 얻은 것보다도 더 기뻤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부인이 어디론가 떠나버렸습니다. 동분서주하며 아내를 찾아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그녀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가 연락이 끊긴 지 일주일 만에 실종신고를 했어요. 그리고 며칠 후, 경찰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경찰은 새카맣게 타버린 시체의 사진을 들고 있었습니다. 확인해보니 부인이 입고 있던 옷과 같은 옷을 입고 있었더군요. 경찰이 보여준 CCTV에도 제 부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화재가 난 곳으로 들어가더군요. 그리고 정확히 3분 후에 불길이 일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경찰이 시체가 많이 훼손되어서 감식결과가 아주 오래 걸린다고... 아직 그 시신이 아내라는 보장이 없으니 좀 기다리라고 했는데...

역시나 아내는 그후 한 달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었어요.

나중에 경찰에서 연락이 왔는데, 혈액형 정도만 파악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같은 비형.. 낙심했습니다.

 

하루하루를 딸 아이 몰래 눈물을 흘리며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인터넷을 통해 먀셀킴씨의 방송을 듣게 되었습니다. 제 아내와 목소리가 비슷하더군요. 그래서 무작정 메일을 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미칠 것 같았기 때문이지요. 아내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는데, 다 못했었거든요.

 

먀셀씨께 편지를 쓰며 그녀가 남기고 간 아이를 위해서라도 정말 열심히 살아보리라 결심했습니다. 정말 제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사랑스런 딸이에요. 퇴근해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가면 밤늦도록 자지도 않고 저를 기다렸다가 그 고사리 같던 손으로 안마를 해준다며 제 어깨를 토닥거리다가 제 볼에 뽀뽀하며 잠드는 아이였습니다. 가끔 엄마를 찾을 때마다 그 아이에게 무어라 할 말이 없었습니다. 가여운 아이였죠.

 

그런데 XX년 2월 29일.

 

2월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오후 3시쯤에 아이와 집 바로 앞에 있는 놀이터에 있었습니다. 집에서 전화벨소리가 울리더군요. 저는 그 전화를 받기 위해 아이를 놀이터에 남겨두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장모님께서는 뜻밖의 소식을 알려주시더군요.

 

아내가 살아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그리고 몇 번이나 울부짖으며 어떻게 아셨냐며 장모님께 여쭤봤어요. 아내가 전화를 했다는 겁니다. 죽은 줄만 알았던 아내가...

꿈만 같았습니다. 암흑과 같은 세상이 밝아졌어요.

그런데... 거의 동시에 '끽'하는 소리와 함께 아이의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전화를 받고 있는 저를 향해 달려오다가 아이가 그만 차에 치인 것이지요.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는 것을 들은 아이가 기쁜 마음에 뛰어오다가 사고를 당한 거예요.

 

하얀 침대시트 위에 가만히 누워 자는 아기를 보며 전 아이의 죽음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넓은 세상에 태어나서 겨우 6년 살고 간 아이가 너무 가엾습니다.

더 잘해주지 못해서 더 많은 것 해주지 못해서 더 맛있는 거 못 먹여서 너무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이제 그렇게 그리던 엄마가 살아있다는 것을 이제 막 알게 되었는데,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지요.

 

혼자 가는 길이 외롭진 않았는지... 무섭진 않았는지 ... 아빠가 지켜주지 못한 것이 너무나 한스럽습니다. 그렇게 아빠보다 먼저 하늘나라로 간 내 아기 혜정이에게 편지를 씁니다.

늘 아내에게 편지를 썼었는데, 이제는 딸에게 쓰네요.

 

 

혜정아. 사랑하는 내 딸!

어젯밤 꿈에 네가 보였단다.

아빠가 다섯 살 너의 생일 때

선물한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어.

네가 가장 좋아한 옷이었는데

못 가져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우리 아가가 가져갔더구나.

 

늘 아빠 가슴속에 있던 네가

오늘은 너무나 사무치게 보고 싶어서

아빠는 견딜 수가 없구나.

 

너를 잠시 다른 곳에 맡겨둔 거라고,

너를 잃은 게 아니라고

아빠 자신을 다스리며 참았던 고통이

오늘은 한꺼번에 밀려와

네가 없는 아빠 가슴을 칼로 도려내는 것만 같다.

 

아빠나이 스물두 살.

 

첫눈에 반한

너의 엄마와 결혼해서 처음 얻은 너였지.

너무나 조그맣고 부드러워

조금이라도 세게 안으면 터질 것 같아

아빠는 너를 제대로 안아보지도 못했단다.

 

조그만 포대기에 싸여

간간이 조그만 입을 벌리며 하품을 할 때엔

아빤 세상 모든 것을 얻은 것보다

더 기쁘고 행복했단다.

 

더운 여름날 행여나 나쁜 모기들이 너를 물까봐,

엄마와 나는 부채를 들고

밤새 네 곁을 지키며 모기들을 쫓고

그러다 한두 군데 물린 자국이 있으면

아깝고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었지.

 

어린 나이에 너를 얻어

사람들은 네가 내 딸인 줄 몰라 했지.

하지만 아빠는 어딜 가든

너의 사진을 들고 다니며 자랑을 했고,

아빠 친구들은 모두 너를 아주 신기하게 보며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단다.

 

아빤 네가 있어 너무 행복했단다.

먹지 않아도 너만 보고 있으면 배가 불렀고,

잠을 자지 않아도 피곤한 줄을 몰랐어.

한동안 낮과 밤이 바뀌어 엄마를 힘들게 했을 때

아빤 잠시 네게 짜증을 내기도 했어.

 

미안해, 아가야.

 

네가 처음 옹알이를 하며 아빠라고 불렀을 때

녹음하려고 녹음기를 갖다놓고

또 해보라고 아무리 애원을 하고 부탁을 해도

너는 엄마만 불러서 아빠를 애태웠지.

 

하루가 다르게 커 가는 너를 보면서

세상에 부러운 건 아무 것도 없었단다.

 

매일 늦잠 자는 아빠를 엄마대신

아침마다 깨워주며 아침인사 해주는

너만 있으면 만족했기에

엄마가 남동생을 바랬지만, 나는 원치 않았었어.

 

어느 날, 엄마가 집을 나가고 경찰의 연락을 받았을 때,

아빠는 너무나 힘이 들었단다.

네가 엄마를 찾을 때마다 목이 메어 너를 쳐다보지도 못했단다.

 

이제서 야 경찰이 말했던 것이 사실이 아닌 것을 확인하게 되었는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네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구나.

 

2월의 마지막 날.

 

아빤 네가 자는 줄만 알았단다.

이마에 약간의 상처만 있었지

피 한 방울 나지 않은 네가

왜 병원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지.

아빠는 너의 죽음을 인정할 수가 없었어.

 

드디어 네가 엄마 품에 안길 수 있었는데... 그럴 수 있었는데...

 

제발 다시 한 번만 더 살펴달라며

의사선생님을 붙들고

얼마나 사정을 했는지...

 

자꾸만 식어 가는 너를 안고

이렇게 너를 보낼 수 없다며 얼마나 울부짖었는지...

여전히 예쁘고 작은 너를

너무나 빨리 데려가는 하늘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단다.

 

금방이라도 두 눈을 살포시 뜨면서

"아빠!"하고 달려들 것 같은데

너는 아무리 불러도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단다.

 

이 넓은 세상에 보여주고 싶은 것도 많고

해주고 싶은 얘기도 많은데

그 중에 천 분의 아니 만 분의 일도 못해준 게

아빤 너무너무 아쉽구나.

 

아프진 않았니?

 

고통 없이 갔으면 좋았을 텐데...

우리 아기 많이 무섭진 않았니?

너를 친 그 아저씨는 아빠가 용서했어.

네 또래의 아들사진이

그 차에 걸려있는 걸 봤단다.

 

많은 생각이 오고 갔지만

이미 너는 없는데 이젠 그 아무 것도 소용없었단다.

 

혜정아!

 

너를 지켜주지 못해 아빠 정말 미안해.

이담에 태어날 땐

긴 생명 지니고 태어나서 하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보고 싶은 거...

다해보고 나중에 오래오래 살다가 가.

 

아빠가 그렇게 되길 매일 빌게.

우리아기... 착한 아기...

 

아가!

 

엄마는 아직 네가 하늘나라로 떠난 것을 모를 거야.

엄마 꿈에 한번 나와 주렴.

엄마 힘내라고...

 

아가...

 

아빠는 우리 혜정이 잊지 않을 거야.

혜정이가 엄마 뱃속에 있는 걸 안 그 순간부터

아빠가 혜정이 따라 갈 그 날까지...

 

아빤 오늘까지만 슬퍼할게.

오늘까지만.

 

하늘에서 아빠 지켜봐.

아빠 잘 할게. 아빠 믿지?

아프지 말고, 편히 쉬어.

 

그리고 잠시나마 너를 떠났던 엄마를 용서해 주렴.

엄마도 아빠만큼이나 너를 사랑하는 분이셔.

 

사랑한다. 아가...

 

 

 

[엔딩 메시지]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늦다.

그걸 느끼기 전에 내가 먼저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결국은 행복이다.

 

 

- THE END -

 

 

 

 

- 모든 부분은 픽션이지만, 맨 마지막 ‘딸에게 보내는 편지’ 부분은 십년 전 실제 라디오에 소개되었던 사연을 토대로 각색했습니다. 너무 감동적인 내용이라 인용을 했습니다. 정은양의 명복을 빕니다. -

 

(제가 쓴 저작물이므로 도용, 불펌 및 상업적으로 이용하면 안 됩니다.) 

 

 

 

 

 

1화: 말하는 거울

2화: 포스터를 그리면서

3화: 하얀 원피스

4화: 딸을 위한 선물 (19)

5화: 천재 작가 (19)

6화: 소름끼치는 목소리

7화: 뫼비우스의 운명

8화: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가고 있을 때...

9화: 최고의 상품

10화: 과거로 돌아간 남자 (운명의 새해)

11화: 사이버 세계로 떠난 웹툰작가 上

12화: 사이버 세계로 떠난 웹툰작가 下

13화: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14화: 내 잘못이 아니야

15화: 파우스트의 진실

16화: 그의 노래가 들리는 곳에는...

17화: 상류층의 놀이거리

18화: 피 흘리는 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