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의 남편인 로트링겐 공 프란츠는 왕실에서는 보기 드물게 애정이 더 우선된 혼인을 하였다. 그들은 어린시절 무도회장에서 서로에게 푹 빠졌다고 전한다. 당시 합스부르크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왕자를 사윗감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둘이 워낙 좋아해 로트링겐도 괜찮겠다 싶었는지 결혼을 허락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반발로 인해 결국 프란츠는 자신의 영지를 프랑스에 털리고 만다. 이후 신성로마 황제라는 껍데기 뿐인 바지사장으로 과학과 예술에 심취해야만 했다. 그러나 다른 미남군주들과는 다르게 행운도 따랐다. 그의 아내 마리아 테레지아는 왕실에서는 엄격한 군주였으나 집에 돌아오면 항상 프란츠에게 온화한 미소를 띄며 다정하게 대하였으며 행동 하나하나가 남편을 섬기듯 했다고 한다. 또한 9명의 자녀를 낳아주었으며 프란츠가 죽자 평생을 검은상복만 입으며 항상 그리워 했다고 한다.
(나폴레옹 2세의 젊은시절 모습)
2.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하나뿐인 아들인 나폴레옹 2세는 사실 불쌍한 아이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마리 루이즈는 말 그대로 정략결혼이었다.(심지어 나폴레옹은 나는 배와 결혼한다고 말하였고 그의 어머니는 나는 국가를 위해 오늘 죽는다고 할 정도였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는 아들을 완전히 방치했고 다른남자와 어울렸다(아마 겁X로 태어난 자식취급을 한 듯 하다)오직 외할아버지 만이 그를 동정하여 관심을 가져 주었다. 사실 나폴레옹 2세라고 불린 이유는 바로 단 이틀간 프랑스 황제로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머니와 함께 비엔나로 돌아온 나폴레옹 2세는 일거수 일투족이 감시의 대상이었다. 더군다나 오스트리아 귀족들은 그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고 마치 벼락졸부로 있다가 망한자의 아들로만 취급했다. 오스트리아 정보국의 감시는 더 심해졌다. 심지어 메테르니히는 그가 프랑스어로 말하거나 쓰기라도 하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가정교사들은 철저히 독일인으로 체워졌고 독일어와 독일문자만을 강요했다. 하지만 나폴레옹 2세는 긍정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감시가 심한 줄 알면서도 짜증을 내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독서에 열중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마음의 압박은 그를 짓눌렀고 결국 21세의 나이에 결핵으로 장가도 못가고 죽었다. 나폴레옹의 직계는 끊어졌다. 그는 오스트리아에 묻혔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프랑스와 독일의 통합을 원했던 히틀러의 계산에 의해 1940년 프랑스에 돌아와 아버지 곁에 묻혔다.
3.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인 고타공 알버트는 그녀의 사촌이었다. 당시 왕실에서는 사촌끼리의 근친도 인정하고 있었다. 그 결과 혈우병 유전자가 자녀에게 전파되어 독일제국으로 시집간 공주(거함거포 덕후인 독일황제 빌헬름 2세는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자였으며 여왕으로부터 친손주, 외손주 포함해 빌헬름이 가장 훌륭하다 라는 칭찬을 받음) 등 일부를 제외하고 혈우병이 유전되어 모두 일찍 죽었다. 때문에 유럽왕실에서는 영국왕실과의 혼인을 두고 복권을 긁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알버트공은 당시 방탕한 세월을 보내던 왕세자 에드워드를 타이르고 돌아오다가 42세로 갑자기 죽었다. 이 때문에 빅토리아 여왕은 에드워드를 죽을 때 까지 무척이나 미워했다.
4.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즉위기간이 길기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갔다. 그는 무척이나 권위적이었고 원칙주의자였다. 심지어 자신의 업무량을 못채우면 끝나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와는 반대로 그의 아내인 황후 씨시는 비교적 개방적이고 활기찬 여성이었다. 때문에 그녀에게는 젊은 미남애인도 있었다고 한다. 부부사이는 비교적 좋지 않았고 그의 하나뿐인 아들인 루돌프는 애인과 동반 자살했다. 이후 씨시는 이탈리아의 휴양지에 갔다가 이탈리아의 반체제 운동가에게 살해되었는데... 본래 다른이를 죽이려 했으나... 때마침 눈 앞에 그녀가 있어 죽였다고 하였다. 프란츠 요제프는 무심한 남자였지만 이날만큼은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황제는 1차 세계대전 때도 살아 있었지만 그가 죽은 후 불과 2년 뒤에 제국은 해체된다.
유럽왕실의 미남 지배자로 불린 이들의 비극 2편
1.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의 남편인 로트링겐 공 프란츠는 왕실에서는 보기 드물게 애정이 더 우선된 혼인을 하였다. 그들은 어린시절 무도회장에서 서로에게 푹 빠졌다고 전한다. 당시 합스부르크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왕자를 사윗감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둘이 워낙 좋아해 로트링겐도 괜찮겠다 싶었는지 결혼을 허락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반발로 인해 결국 프란츠는 자신의 영지를 프랑스에 털리고 만다. 이후 신성로마 황제라는 껍데기 뿐인 바지사장으로 과학과 예술에 심취해야만 했다. 그러나 다른 미남군주들과는 다르게 행운도 따랐다. 그의 아내 마리아 테레지아는 왕실에서는 엄격한 군주였으나 집에 돌아오면 항상 프란츠에게 온화한 미소를 띄며 다정하게 대하였으며 행동 하나하나가 남편을 섬기듯 했다고 한다. 또한 9명의 자녀를 낳아주었으며 프란츠가 죽자 평생을 검은상복만 입으며 항상 그리워 했다고 한다.
(나폴레옹 2세의 젊은시절 모습)
2.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하나뿐인 아들인 나폴레옹 2세는 사실 불쌍한 아이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마리 루이즈는 말 그대로 정략결혼이었다.(심지어 나폴레옹은 나는 배와 결혼한다고 말하였고 그의 어머니는 나는 국가를 위해 오늘 죽는다고 할 정도였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는 아들을 완전히 방치했고 다른남자와 어울렸다(아마 겁X로 태어난 자식취급을 한 듯 하다)오직 외할아버지 만이 그를 동정하여 관심을 가져 주었다. 사실 나폴레옹 2세라고 불린 이유는 바로 단 이틀간 프랑스 황제로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머니와 함께 비엔나로 돌아온 나폴레옹 2세는 일거수 일투족이 감시의 대상이었다. 더군다나 오스트리아 귀족들은 그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고 마치 벼락졸부로 있다가 망한자의 아들로만 취급했다. 오스트리아 정보국의 감시는 더 심해졌다. 심지어 메테르니히는 그가 프랑스어로 말하거나 쓰기라도 하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가정교사들은 철저히 독일인으로 체워졌고 독일어와 독일문자만을 강요했다. 하지만 나폴레옹 2세는 긍정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감시가 심한 줄 알면서도 짜증을 내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독서에 열중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마음의 압박은 그를 짓눌렀고 결국 21세의 나이에 결핵으로 장가도 못가고 죽었다. 나폴레옹의 직계는 끊어졌다. 그는 오스트리아에 묻혔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프랑스와 독일의 통합을 원했던 히틀러의 계산에 의해 1940년 프랑스에 돌아와 아버지 곁에 묻혔다.
3.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인 고타공 알버트는 그녀의 사촌이었다. 당시 왕실에서는 사촌끼리의 근친도 인정하고 있었다. 그 결과 혈우병 유전자가 자녀에게 전파되어 독일제국으로 시집간 공주(거함거포 덕후인 독일황제 빌헬름 2세는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자였으며 여왕으로부터 친손주, 외손주 포함해 빌헬름이 가장 훌륭하다 라는 칭찬을 받음) 등 일부를 제외하고 혈우병이 유전되어 모두 일찍 죽었다. 때문에 유럽왕실에서는 영국왕실과의 혼인을 두고 복권을 긁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알버트공은 당시 방탕한 세월을 보내던 왕세자 에드워드를 타이르고 돌아오다가 42세로 갑자기 죽었다. 이 때문에 빅토리아 여왕은 에드워드를 죽을 때 까지 무척이나 미워했다.
4.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즉위기간이 길기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갔다. 그는 무척이나 권위적이었고 원칙주의자였다. 심지어 자신의 업무량을 못채우면 끝나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와는 반대로 그의 아내인 황후 씨시는 비교적 개방적이고 활기찬 여성이었다. 때문에 그녀에게는 젊은 미남애인도 있었다고 한다. 부부사이는 비교적 좋지 않았고 그의 하나뿐인 아들인 루돌프는 애인과 동반 자살했다. 이후 씨시는 이탈리아의 휴양지에 갔다가 이탈리아의 반체제 운동가에게 살해되었는데... 본래 다른이를 죽이려 했으나... 때마침 눈 앞에 그녀가 있어 죽였다고 하였다. 프란츠 요제프는 무심한 남자였지만 이날만큼은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황제는 1차 세계대전 때도 살아 있었지만 그가 죽은 후 불과 2년 뒤에 제국은 해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