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라도의 세계사 이야기 -일본 멸망할 뻔 하다.-

콜로라도2013.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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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 5월 11일 어느 화창한 봄날 일본을 공식방문하고 있던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 황태자는 마차에 올라탄 후 옆에 있던 친구인 그리스 왕자 게오르그 공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날 황태자가 있던 시가현 오쓰시의 날씨는 화창했다고 한다.

 

하지만 얼마 뒤.....

 

"코노야로 ~ 텐노헤이카 반자이~"

 

자신의 마차통행을 위해 교통정리를 하고 있던 순사가 갑자기 차고 있던 칼을 빼어 황태자에게 돌진했다. 그리고 칼로 황태자의 얼굴을 그어버렸다.

      오쓰사건 직전의 니콜라이 황태자 얼마후 그는 갑자기 처들어온 일본인에 의해 얼굴에 스크래치가 난다.

 

한달 전 러시아의 황제인 알랙산드르 3세는 황태자가 동방으로 여행을 가도록 했다. 황태자를 외국으로 보내는 것은 오래전 표트르 황제가 서유럽에 간 이후 역대 황태자들의 전통으로 자리잡았다. 황태자에게 세상을 보게 하는 것은 물론 자신이 황태자임을 외국에 알리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

  이전에는 유럽으로 갔지만 알랙산드로비치 니콜라이 황태자(후일 니콜라이 2세)는 특별히 더 중요하다고 여겨진 아시아로 파견된 것이다.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이자 비운의 공주인 아나스타샤의 아버지인 니콜라이 2세 하지만 그는 황제가 되기전에 일본에서 얼굴에 칼을 맞게된다. 만약 그가 그때 죽었다면.... 비운의 황제는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 )

 

러시아의 황태자가 일본에 온다는 소식은 즉각 알려저 당국은 당시 원로인 아리스가와 친왕을 대표로 하는 사절단을 준비하고 있었다. 4월 27일 일본에 도착한 황태자에 대해 일본은 황태자도 민망해 할만큼 극진한 대접을 하였다.

 그런데 황태자는 메이지 일왕과의 만남을 미룬체 일본 곳곳에 명소를 찿아 식도락을 즐기며 여행만 했다.

 

"감히 탠노폐하가  기다리고 있는데도 인사를 드리러 오지 않다니"

 

당시 순경이었던 쓰다는 세이난 전쟁에 참전해 훈7등 훈장을 받았을 정도로 메이지 일왕에 대한 존경심이 두터운 황국주의자였다. 그의 눈에 비친 러시아 황태자는 메이지 일왕에게 조공을 바치러 온 주제에 건방지게 기다리게 하는 불경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열렬한 메이지 일왕 신봉자이자 일본 제일주의자였던 그는 러시아 황태자의 방문을 일본을 두려워해 보낸 인질과 같은 사절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리어 황태자가 일왕을 만나러 가지 않자 건방지다고 여겨 불만을 품었다.)

 

얼굴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니콜라이 황태자는 러시아측의 주장에 따라 기차를 타고 교토로 향했다. 또한 고베에 정박중인 러시아 군의와 시의들은 모두 교토로 가야했다. 이 소식은 러시아에도 알려져 알랙산드르 3세는 분노해 군대를 준비하라고 신하들을 다그쳤다.

 

황태자의 부상은 오른쪽 관자놀이에 길이 9센치 깊이 7mm의 작은 자상으로 판명났다. 이것은 목숨이 위험한 부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러시아의 보복이 두려웠다. 그래서 일본인 특유의 강자에 대한 약한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먼저 일왕 메이지가 직접 새벽열차를 타고 교토로 달려와 니콜라이를 문병갔다.  일본정부 또한 고베에서 교토로 가는 모든 기차들을 스톱시키고 오로지 러시아 의사들이 가는 열차만 통과시켰다. 이와 더불어 모든 학교에 휴교령을 내리고 일본학생들로 하여금 위문편지를 쓰게하고 위문품을 모아 니콜라이에게 보냈다(이 때 온 위문편지만 1만통이나 되어 그 처리에 더 고심하게 했다고...) 또한 왕명을 내려 전국의 모든 신사와 절에 니콜라이의 회복을 기원하는 기도회를 열게하였다. 일본전국이 니콜라이를 위한 기도를 드릴 정도였다. 아울러 메이지는 직접 알렉산드르 3세에게 사과편지를 보내 잘못을 빌며 애원했다고 한다.

  어느정도 화가 풀린 알랙산드르 3세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게 하고 니콜라이를 돌아오게 했다 이때도 메이지 일왕은 배에 올라타 황태자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다. 이로써 사태는 마무리 되었다.

 

황태자가 돌아간 이후 일본정부는 관련인물들을 엄히 문책하였다. 감히 텐노에게 굴욕적인 모습을 보이게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먼저 내무대신과 외무대신이 경호부실의 책임을 지고 집단사퇴하였다. 그리고 시가현 지사(도지사) 시가현 경찰부장을 비롯해 오쓰 경찰서장과 당시 간부들은 모두 다 파면되었다. 이렇게 당시 오쓰의 경찰들이 모두 다 잘리자 그 분노는 쓰다에게 향했다. 쓰다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감옥에 간지 몇개월 후에 참혹한 시체로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