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언제나 링에 다시 오를 수 있을까?”

homam2013.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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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언제나 링에 다시 오를 수 있을까?”

가슴이 미어집니다.

제 아들은 얼마 전 경북 구미에서 열린 아마추어복싱대회에 출전해 중등부에서 은메달을 땄습니다. 열심히 싸웠으나 판정패한 결승전 3라운드 경기 도중 왼쪽 눈에 큰 부상을 입었고, 그날 밤 서울로 올라와 응급수술을 받았습니다. 안와골절상입니다.

이날 경기에서 주심의 심각한 편파판정이 있었습니다. 주심의 편파적인 경기 진행은 도를 넘어 제 어린 아들의 생명까지 위협했습니다. 그 주심은 그야말로 ‘링 위의 난폭자’였습니다. 감독관도 배심원도 이를 지켜보던 그 어떤 관계자도 이를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아이를 지켜주지 못한 아빠로서 자책감을 빨리 벗고 싶었습니다. 경기하다가 다칠 수도 있지 하며 잊으려 했습니다.

그날 경기가 계속 떠올랐습니다. 아무리 이해를 하고 잊으려 해도 떠나지 않는 그 영상은 청탁과 협잡과 술수가 판치는 ‘추악한 링’이었습니다.

그냥 복싱이 좋아 글러브를 낀 제 아이는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링 위에서 정말 나쁜 어른들 때문에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경기 내용은 이렇습니다.

1라운드가 시작되자마자 주심은 작정하고 제 아이에게 잇따라 주의를 줬습니다. 결국 2라운드 초반 세 번째 주의를 받아 ‘경고’로 벌점을 받았습니다.

결승까지 오른 상당한 기량을 갖춘 선수들의 대결에서 벌점을 받고 이기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아니 거의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복싱 관계자들에 따르면 초반에 이런 식으로 주의를 계속 받으면 자기 스타일대로 차분히 경기를 풀어나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심이 다른 선수를 밀어주기 위해 할 수 있는 손쉬운 장난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아이는 2라운드까지 좋은 경기를 했습니다.

3라운드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3라운드 초반 접전을 펼치다 떨어진 후 아이가 갑자기 왼손 글러브를 눈에 대고 오른손을 늘어뜨린 채 싸울 의사가 없이 멈춰 섰습니다. 2~3초후 상대 선수가 공격을 해오자 경기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 후 코피가 흐르자 경기가 중단되고 링닥터가 아이의 상태를 보았으나 코피만 닦은 채 경기가 진행됐습니다.

다시 코피가 흘렀으나 주심은 경기를 중단시키지 않았고, 아들놈은 코피를 질질 흘리며 30초 가량 마지막 경기를 해야 했습니다.

아이가 수술을 받고 회복되던 2~3일간 저는 복싱 얘기를 아이에게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날 경기는 저도 아이도 되새기기 싫은 일이었습니다.

병원 옥상정원에서 그날 사고 이후 아이가 저에게 던진 첫 마디가 “아빠, 언제나 다시 링에 오를 수 있을까”입니다.

어떻게 부상을 당했는지 궁금해 조심스럽게 3라운드 경기 상황을 물어보았습니다.

왼쪽 눈 부위를 가격당하고 갑자기 상대 선수가 겹쳐 보였답니다. 서로 간격이 떨어지자 어린아이의 본능으로 아픈 부위에 손을 대고 멈춰 선 것입니다. 아이가 싸울 의사를 보이지 않자 상대 선수도 팔을 내렸습니다. 주심은 경기를 계속 진행시켰습니다.

이후 아이는 여러 차례 왼손을 눈에 가져다 대는 이상 행동을 했지만 주심은 이를 무시했습니다. 코피가 흐르고서야 경기가 멈췄습니다.

아이는 링닥터에게 갔을 때 왼손 글러브를 눈에 가져다 대며 나름대로 의사표현을 했습니다. 이때 ‘경기를 그만 둘까’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하지만 마우스피스를 끼고 가쁜 숨을 내쉬는 어린 선수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링닥터는 코피만 닦아 주었을뿐 ‘어디 아프냐’ ‘경기 계속할 수 있냐’ 등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왼쪽 눈이 거의 보이지 않은 채 코피를 질질 흘리며 30여 초간 남은 경기를 했습니다. 접전을 펼치던 아이가 부상 부위에 충격을 받았는지 코 아래 얼굴이 피범벅이 된 채 고통스런 몸짓으로 다시 멈춰 섰습니다. 주심은 이마저도 무시했습니다. 아이는 무방비상태에서 여러 차례 안면을 맞았습니다. 그 와중에 부상 부위를 또 한 번 가격당했습니다. 그때 저는 관중석에서 ‘왜, 경기를 멈추지 않지’하는 의문을 품으며 지켜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어린 학생들 경기가 아니라 프로 경기였어도 중단시켰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아이는 주심의 편파적인 경기 진행과 부상에도 불구하고 투혼을 발휘해 좋은 경기를 했습니다. 주심으로서는 이대로 가다간 자신이 의도한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상대 선수에게 점수를 딸 마지막 기회를 준 것입니다. 이게 아니고선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제 아이의 생명을 담보로 한 장난질입니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습니다.

아마추어복싱계는 학교 복싱부 감독과 심판, 협회 관계자 등이 오랫동안 한 울타리 내에서 교류하며 학연 지연 선후배 등으로 끈끈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심판위원으로 활동하는 감독도 있습니다. 다른 종목에서도 그렇듯, 심판진에 대한 영향력에 따라 판정의 희비가 엇갈리기도 합니다.

더구나 제 아이 같이 프로선수 출신 관장이 운영하는 체육관 소속 선수는 완전 찬밥 신세입니다. 관장이 아마추어 쪽에 이렇다 할 인맥이 없으니까요.

제 아이가 권투를 시작한 지 1년여 밖에 되지 않습니다. 지난 봄 생활체육대회에 출전한 것이 처음 링에 오른 것이었고, 정식 아마추어대회는 이번이 첫 출전입니다.

아이는 준결승에서 일방적인 경기를 펼쳐 3회 TKO승을 거두고 결승에 올랐습니다. 돌이켜보면 이게 화근이었던 것 같습니다. 상대 선수 측에 긴장감을 잔뜩 주었겠지요.

마지막 라운드 들어 아이는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다 불의의 일격을 맞았습니다. 주심이 공정하게 경기를 진행했더라면 아이가 평소와 같이 차분하게 경기를 펼쳤을 테고 이러한 사고도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경기하다 다칠 수 있지’하며 이해하려 합니다.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복싱경기 규칙’ 주심(레프리) 조항에도 ‘선수 보호는 레프리가 가져야 할 최고의 관점’이라고 첫 줄에 나와 있습니다. 선수가 정타를 맞고 싸울 의사가 없이 서 있는 상황이면 당연히 스탠딩 다운을 선언하고 여덟까지 카운트를 한 후 부상 정도를 살펴야 합니다.

아마추어 복싱에서 다운은 점수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타격을 받은 선수에게 회복할 시간을 주는 선수보호 장치입니다. 편파 판정에 눈이 먼 주심에게 ‘선수보호’라는 의무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제 아이에게 쉴 틈을 주지 않은 겁니다. 아이가 글러브를 자꾸 눈에 갖다 대고 코피가 줄줄 흐르는데 경기를 중단시키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이러한 주심의 만행 속에 아이는 부상 부위에 또 정확한 펀치를 맞았습니다. 2차 타격으로 안와골절이 더욱 심해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현지 병원에서 빨리 수술하지 않으면 눈에 심각한 장애가 올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아는 병원에 연락을 해 놓고 제한속도와 차선을 무시하며 고속도로를 내달려 서울로 왔습니다.

이날 주심은 뻔뻔하고 능숙하게 이런 일을 저질렀습니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습니다.

경기 후반 주심은 상대선수에게도 두 차례 주의를 줬습니다. 공정하게 진행했다는 근거를 남기려는 수작입니다. 경기를 중단시키지 않은 데 대해서도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을 겁니다.

안와골절은 복싱인이라면 다들 아는 부상입니다. 눈 부위를 가격 당한 후 물체가 겹쳐 보이고 코피가 흐르는 것은 안와골절의 전형적인 증상입니다.

중학생이지만 성인 체격의 중량급 선수들입니다. 주심이 최소한의 양심만 있었더라도 제 아이가 2차 부상은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휴, 친구들에게 쪽팔려 죽겠네.”

병원에서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아이는 경기의 승패보다 부상의 통증보다 눈이 부은 채로 학교에 가면 친구들에게 창피 당할 걱정이 앞섰습니다.

“아빠, 엄마에게 비밀로 하면 안 돼?”

뼈가 부러졌다는 데도 그보다 엄마가 복싱을 못하게 할까 걱정하는 천진한 아이입니다.

완치되려면 1년이 지나야 한답니다. 한동안은 축구 농구 등 몸싸움 하는 운동도 삼가야 합니다. 현재로서 눈에는 별 이상이 없어 보이지만 후유증이 있을 지 모를 일입니다. 복싱이 아니더라도 매일같이 친구들과 어울려 운동장에서 뛰어 놀던 아이입니다. 성적이 떨어지면 복싱을 못 하게 할까 싶어 스스로 공부도 알아서 하던 아이입니다.

복싱도 축구도 할 수 없게 된 아이가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쉽니다. 학업에도 흥미를 잃은 것 같습니다.

복싱과의 인연도 기약할 수 없습니다. 혹 가족의 걱정과 반대를 무릅쓰고 복싱을 다시 한다고 하더라도 성장기 1년여의 공백을 감안하면 이러한 정상급 무대에 다시 서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어찌 보면 상대 선수도 피해자입니다. 어른들의 추악한 장난질이 없었더라도 좋은 경기를 했을 꿈나무가 본의 아니게 비겁하고 찜찜한 승리를 안았습니다. 대회에 참가한 수백 명의 다른 학생 선수들도 링 밖에서 승패를 놓고 벌이는 어른들의 거래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겁니다.

아마추어 복싱 관계자들께 호소합니다. 제발 너무 심하게 그렇게 노골적으로는 하지 맙시다. 꿈나무들이 뭘 배우겠습니까. 어린 선수의 건강과 생명까지 외면하는 일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이건 파렴치한 범죄입니다.

이번 경기 주심은 링 위에서 쫓아내야 합니다. 선수보호를 외면하고 날뛰는 주심을 제재할 대책도 만들어야 합니다. 그냥 넘어가면 또다시 반복될 일입니다. 다른 선수에게 더 큰 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제발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