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흘리는 산행

Yuri2013.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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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흘리는 산행

 

 

 

 용재는 어렸을 때부터 산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시간만 나면 집 근처 동산에 올라 널찍한 바위 위에서 함성을 지르며 메아리 듣는 것을 즐겨했다. 대학 때는 ‘산악회’에 가입해 종종 암벽등반도 하며 전국에 유명하다는 산은 안 올라가 본 곳이 없을 정도로 ‘산’을 광적으로 좋아했다.

 

대학 졸업 후, 직장에 다니면서도 유명한 ‘산 동호회’에 가입해 주말만 되면 항상 산에 올랐고, 휴가 일수를 맞춰 외국에 있는 유명한 산에도 원정을 갔다.

나이 서른을 넘길 때까지 변변한 애인 한 명 사귀지 못한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에게 있어 산이 애인이었고, 가족이었다.

 

비가 오는 날, 바랑이 부는 날, 심지어는 폭설주의보에 영하 20도가 넘나드는 날씨에도 등산 가방을 싸매고 산에 올랐다. 덕분에 매스컴에도 종종 얼굴을 비칠 수 있었다. 별로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용재로 인해 한 지역의 제도나 규칙이 바뀐 적도 있었다.

 

[ .........구조대에 의해 한 사람이 구조되었습니다. 구조된 사람은 김모씨, 그는 극심한 폭설 속에서 산행을 하던 중에 절벽에서 떨어져...... 세 군데의 골절과 극심한 출혈로 인해 탈진한 상태에서도 무려 5일 동안 정신력으로 버티며....... 따라서 해당 지역 산림청에서는 날씨 변화에 따라서 지역 전체를 통제하는 새로운 조례를 제정했으며... ]

 

그 정도로 산이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을 용재였기에, 같은 산 동호회 사람들조차 고산자(古山子) 선생의 귀신이 들린 ‘신(神)’ 같은 존재라며, 나이가 훨씬 많은 회원들을 제치고 동호회의 ‘고문’으로 추대될 정도였다.

 

그런 그에게 산행 중의 한 방법인 '암벽등반'을 꺼리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생겼으니... 그건 6개월 전, 서울 근교에 위치한 어느 야산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단조로운 등산만 몇 주에 걸쳐 하던 용재는 새로운 시도도 할 겸, 공식적인 암벽코스가 아닌 곳을 기어오르기로 결심했다. 암벽등반 역시 그에게는 익숙한 일이었기에 처음 발을 딛고 올라갈 때는 자신감에 한껏 부풀어있었다. 그러나 그 암벽을 거의 기어 올라갔을 때 느닷없이 발에 쥐가 난 것이었다. 등산은 혼자 해야 제 맛이라는, 나름대로의 철칙이 너무도 한심스러운 순간이기도 했다.

 

올라갈 수도 내려갈 수도 없는 상황에 놓인 용재는 자일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절벽 위에 있는 등산로로 지나가는 사람의 도움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몸에 기운이 다 빠져갈 무렵... 절벽 위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용재는 젖 먹던 힘까지 쏟아내며 그를 불렀다.

 

“누구 있어요? 살려줘요!”

 

몸의 힘은 자꾸만 빠져 땀이 차오르는데 10분이나 지난 후에야 절벽 아래로 얼굴을 내민 건 무척이나 어려보이는 여고생 두 명뿐이었다.

 

“좀 도와줘.”

“어... 어떻게요?”

“내가 자일을 던질 테니...”

 

용재는 여고생 둘이 자신이 던진 자일을 절벽 위에 있는 튼튼한 나무에 묶어주기만 하면 아직은 멀쩡한 두 팔과 한쪽다리로 어떻게든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일 던지기를 몇 번이나 거듭해서야 절벽 위에 있는 여고생들 손에 닿을 수 있었다.

 

“다 묶었어요.”

“고마워.”

 

그러나 모든 게 잘될 거라는 확신이 오히려 용재의 몸을 굳게 만들었는지도 몰랐다. 다리 하나로 절벽을 디디고 두 팔로 자일을 잡아당기며 기운차게 올라가던 용재가 그 절벽 위에 거의 다다를 때쯤엔 완전히 탈진해 버렸다. 한 발자국도 도저히 옮길 수 없을 만큼 온 몸의 힘이 쑥 빠져 버린 것이다. 용재가 올라오는 것을 지켜보던 두 명의 여고생 중 한 명이 재빨리 손을 내밀었다. 혹시나 추락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엄습한 용재는 자신도 모르게 그 여고생의 손을 힘껏 잡아 당겼다.

 

“엇? 아... 아악...!”

 

용재에게 손을 내밀었던 여고생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더니 절벽에서 미끄러지면서 굴러 떨어지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용재는 그녀를 잡은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지만 여고생의 가녀린 몸이라도 그리 오래 버틸 수가 없었다. 절벽 위에 혼자 남게 된 다른 여고생은 갑자기 일어난 사고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소리를 꺅꺅 질러댔다.

 

“씨팔! 조용하란 말이야!”

 

용재의 입에서는 원하지도 않은 욕설이 튀어나왔다. 여고생을 붙잡은 오른 팔뚝에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 핏줄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아... 아저씨 살려줘요. 제발...”

 

용재를 구하려다가 오히려 사고를 당한 여고생의 애처로운 울부짖음이 시작됐다. 하지만 용재는 위를 잡을 팔과 아래를 잡은 팔 모두 금방 찢어질 것만 같았다.

 

‘더... 이상 버티는 건 무... 리야... 이러다가는 나까지 죽을 지도 몰라...’

 

자신을 도와주려다가 위험에 처한 여고생에게는 미안했지만,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손을 놓아 버릴까? 어차피... 둘 다 죽을 지도 모른다면... 그 방법밖에는...’

 

용재의 머릿속은 순간 여러 가지 사악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는 손에 간신히 매달린 여고생이 눈치 채지 못하게 그쪽 손가락의 힘을 조금씩 빼기 시작했다.

 

“아저씨... 미끄러져요... 아, 아... 소희야! 날 어떻게 좀 해줘!!”

 

용재의 손에 매달린 여고생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절벽 위에 있는 친구에게 허망한 도움을 청했다. 소희라는 친구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바닥에 엎드려 아래로 손을 뻗었다.

 

“자... 잡아... 어서...”

 

물론 소희가 용재를 보고 손을 뻗은 건 아니었을 것이다. 용재는 자일에 몸이 묶여 있는 상태였고, 여고생은 용재의 손에만 의지하고 있었으니... 그러나 그 순간 용재는 ‘살아야만 한다.’는 동물적인 본능에 소희가 내민 손을 오히려 자신이 덥석 쥐고 말았다. 동시에 아래 여고생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빠지며 그 여고생이 그만 밑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엇?”

“아악!!!”

 

절벽을 떼굴떼굴 구르며 밑으로 떨어지던 여고생은 용재로부터 10미터쯤 밑에 불쑥 튀어나온 널찍한 바위 위로 나뒹굴 듯 떨어졌다. 절벽 끝까지 떨어지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여고생이 그 바위 위로 떨어지며 ‘우두둑’하고 뼈가 조각나는 소리가 고요한 산 속에 기분 나쁘게 울려 퍼질 때 용재는 이미 놀라 울부짖는 소희의 팔을 붙잡고 절벽 위로 간신히 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목숨을 건진 용재로서야 다행이었지만 바위 위에 떨어진 여고생은 허리가 꺾여 반신불수가 되고 말았다. 겉으로 보기에 용재에게 모든 책임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평생 휠체어 신세가 된 그 여고생에게 씻지 못할 죄를 진 것만은 틀림없었다. 약간의 고의가 있었던 용재의 그때 행동은 스스로도 양심에 걸리는 일이기도 했다.

 

더욱이 휠체어 신세를 지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던 다친 여고생이 어느 날 자신의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섬뜩해지기도 했다.

 

그 아이의 장례식에서 만난 소희의 저주 섞인 원망도 한동안 용재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를 불구로 만들고 끝내 죽음까지 몰고 간 용재가 그 일이 있고 난 후에도 틈만 나면 산에 오르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그를 ‘위선자’라며 무척이나 못마땅해 한 것이다.

그래도 용재의 태도에 별다른 변화가 없자, 소희는 용재가 활동하는 동호회를 알아내 용재를 감시하기에 이르렀고, 용재가 산에 오를 때마다 ‘산행’을 그만할 것을 몇 번이나 부탁했다.

 

“아저씨, 꼭 부탁이에요.”

“나도 네 친구의 죽음이 슬프고 안타까워. 하지만, 산에 가지 않는다고 넋이 위로라도 된다든?”

“아저씨를 도우려던 내 친구가 억울하잖아요. 앞으로 단 1년만이라도... 부탁드려요.”

“그런데 좀 이상하다. 내가 산에 다니는 걸 번번이 어떻게 알아차리는 거니? 혹시 내 뒤를 캐고 다니는 거니?”

 

부탁과 애원을 해도 용재가 듣지 않자 화가 난 소희는 어느 날, 용재에게 협박을 했다. 지금까지 친구가 자살을 하게 된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용재와 소희뿐이었던 것이다.

 

“실은 아저씨가 활동하는 동호회를 알아내 가입했어요. 그래서 아저씨가 산행을 할 때마다 알 수 있었던 거고요.”

“그랬군? 기가 막히네.”

“게시판에 폭로할 거예요. 내 친구가 반신불수가 되게 된 계기를...”

“왜 그렇게까지?”

“아저씨가 고집을 꺾지 않잖아요.”

 

아무리 친구의 죽음이 ‘산’과 연관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소희가 왜 그렇게 ‘산’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는 용재였다. 그리고 산을 무척 좋아하기도 했지만, 근 십년이상동안 활동한 동호회에서의 위치도 있어 ‘산행’을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용재는 며칠 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한 가지 철부지 같은 방안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소희를 깊은 산에 데리고 가서, 잠시 겁을 주자는 것이었다. 그녀가 깊은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게 만들고, 자신은 그녀의 주변에 숨어 있다가 거의 막판에 나타나 그녀의 기를 꺾어놓겠다는 심산이었던 것이다.

용재는 그것이 아주 철없는 방법인 것을 생각지도 못한 채, 소희에게 연락을 했다.

 

“흠, 좋아. 내가 산행을 포기할게. 대신 마지막으로 같이 산에 한 번 오르자.”

“마지막이라뇨?”

“네 친구도 산을 좋아했잖아. 그 애가 다쳤던 곳에 가서 인사라도 하려고 그래.”

“그렇다면 좋아요. 대신 약속은 꼭 지켜줘요.”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지킬 수 있다.”

 

그리고 며칠 후, 용재는 약속한 산길 입구에서 소희를 만났다. 소희는 귀여운 외모의 여고생인데도 불구하고 눈화장과 분홍색 립스틱까지 바르고 나타났다. 용재는 그런 그녀를 나무랄까 하다가 괜히 다른 사람들의 눈에 뜨일 거 같다는 생각에 서둘러 그녀를 낯선 기슭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은 용재가 발견한 비밀스런 루트였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거의 희박한 아무도 모르는 길. 용재는 아무런 의심이 없는 소희에게 그쪽길이 지름길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소희는 오직 ‘친구의 영혼을 달래는 방법’이라 생각하며 용재를 따라 그 험한 길로 따라 들어갔다.

산길에 익숙하기만 한 용재는 깊고 깊은 숲 속으로 소희를 이끌었고 어느새 첩첩산중에 접어들었다.

 

“아저씨.. 암 것도 없는데, 진짜 길이 나와요?”

“날 못 믿니? 내가 바로 고산자 선생님이라니까...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등산로 쪽에서 네 친구가 떨어진 곳으로 가려면, 위험하기도 하고...”

 

평평한 바위가 나오자 용재는 그곳에 짐을 내려놨다. 그리고는 배낭에서 음료수와 건빵 같은 간식을 꺼냈다.

 

“잠시 쉬었다 가자.”

“시간이..”

“충분해.”

 

소희는 아무런 의심 없이 바위에 앉아 용재가 나눠준 간식을 먹었다. 소희가 간식을 먹는 동안에 용재는 근처에 숨겨진 약수터가 있는데 그걸 떠오겠다며 일어났다. 소희가 당황하지 않게 일부러 짐까지 풀어놓은 채 물통을 들고 내려갔다.

그 자리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숨은 용재는 대략 20여분이 지나자 생각했다.

 

‘지금쯤이면 겁을 잔뜩 먹었겠지?’

 

다시 소희가 앉았던 곳으로 간 용재는 두리번거렸다. 짐만 있을 뿐, 소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바위가 맞는데?’

 

주변을 둘러봐도 ‘소희야’라고 외쳐도 들려오는 건 벌레소리와 정적밖에는 없었다. 그 바위 주변으로 몇 시간을 이 잡듯 헤맸지만, 결국 소희를 발견하지 못한 용재는 땀이 범벅된 채 바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에잇, 내가 미친놈이지! 어쩐다지!!”

 

어둑어둑해질 무렵, 용재는 그녀를 찾는 걸 포기하고, 짐을 들고 바위에서 일어났다. 그때, 어디선가 바스락 소리가 나더니 소희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흙이 잔뜩 묻어 지저분했고, 눈물인지 땀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눈화장이 지저분하게 흘러내려 있었다. 그리고 눈동자는 어딘가 모르게 풀려있었다. 용재는 반가운 마음에 그녀에게 달려갔다.

 

“어디 갔었니?”

 

하지만 소희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짐을 들고 있는 용재를 허공처럼 지나치더니 산을 내려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분명 길을 모를 거라 생각했지만, 소희는 그곳에 몇 번이나 왔던 사람처럼 정확한 루트로 앞질러 산을 내려갔고 용재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내려갔다.

그렇게 두 시간쯤 지나 산의 입구에 도착하자, 앞서 내려간 소희가 보이지 않았다. 용재는 몇몇 등산객들 사이로 부지런히 뛰어가 그녀를 찾아봤지만, 결국 발견하지 못했다.

 

‘여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이니 괜찮을 거야.’

 

용재는 사람들이 내려가는 쪽으로 서둘러 내려가기 시작했다.

 

 

***

 

그렇게 삼일이란 시간이 흘렀는데도 소희에게 연락도 오지 않았다. 용재는 자기가 생각한 ‘겁을 주는 방법’이 확실하게 통한 거라 생각하고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또 다른 산행을 기획하고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이번 주말에 용주산에 함께 가지 않을래요?”

 

한 달 전, 동호회에서 만난 효준씨의 전화였다. 하지만 그리 반갑지는 않았다.

 

“용주산... 이요? 저번 주에 가신다고 안 했나요?”

“사정이 있어서... 그나저나... 목소리가 왜 시큰둥하세요? 가기 싫으세요?”

 

평소 목소리 같지 않은 효준씨의 잔뜩 쉬어있는 음성에 바람소리 같은 잡음까지 섞여 잘 들리지가 않았다.

 

“예? 아... 아니요. 둘만 가는 건가요?”

“한 명 더 갔으면 하는데요... 진혁이라고... 제 친구... 아시죠?”

“아, 예? 알겠어요. 조... 좋아요. 가죠...”

 

용재는 그들이 달갑지 않았다. 그 둘은 ‘산이 거기 있어서 산에 오른다.’는 평범한 목적을 가진 용재와는 달리 산에 올라 날짐승 사냥을 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더구나 홀로 등산을 즐기는 용재로서는 셋이서 함께 산을 오른다는 건 왠지 부담스럽고 껄끄러웠다.

 

처음에는 엉겁결에 승낙을 했지만 약속한 날짜가 다가오자 용재는 그들과 가기 싫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꽉 차 온통 그 날 있을 산행에 온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괜히 같이 간다고 했군. 제길....’

 

일정을 하루 앞둔 용재는 계획을 취소하고 싶었지만, 그 친구들로부터 들을 나무람 때문에 이런저런 선택도 못하는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용재는 한참을 궁리 끝에 효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신의 입장도 고려하고 그들의 입장도 최대로 고려한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내가 제의 하나를 할게요. 그냥 밋밋하게 세 명이 손잡고 산에 오르는 것이 좀 그래서... 다른 재미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았어요.”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요?”

“내기를 하는 거죠. 지도상에 나와 있는 한군데를 딱 정해놓고, 각자 다른 방향에서 출발하는...”

“각자 다른 방향으로?”

“예, 그리고 처음으로 도착하는 사람이 마지막에 도착하는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거죠.”

“흠... 재밌겠군요.”

 

누구보다도 산 걸음이 빠르다고 자부했던 효준씨이기에 그는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 모양이었다. 결국 그는 웃으며 흔쾌히 약속을 했고, 용재는 진혁씨에게도 연락을 해달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용재는 자신의 뜻대로 산행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흡족해 하며 다음 날 짊어지고 갈 등산 가방을 챙겼다.

과정이야 어쨌든 역시나 새로운 산을 접하기 직전에 밀려드는 묘한 흥분이 감싸왔다. 몸은 무척이나 피곤했지만 단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척이기만 했다.

 

***

 

너무 일찍 도착했는지 차가운 기운이 옷깃 속으로 파고들었다. 용재는 약속 장소인 역전에서 그 친구들을 기다렸다. 별로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너무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역전 앞은 너무나도 썰렁했다.

누렇게 변한 오래된 백열등 밑으로 날파리들이 춤을 추듯 이글거리며 단 한 명뿐인 손님을 반기고 있었다. 용재는 문득 커피 한잔이 생각나 따뜻한 물 한잔을 얻기 위해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역무실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역무실 안에는 아무도 없는지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공짜 손님이 백 명쯤 내려도 통 모를 역이군.’

 

두리번거리다가 역무실 안에 한창 허연 김이 피어오르고 있는 커피포트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누군가가 포트의 전원을 올려놓은 모양이었다. 용재는 힘차게 역무원을 불러보았다. 하지만 대답은커녕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 소리만 픽픽 들려올 뿐이었다. 용재는 혹시나 하며 역무실 출입구의 문을 살짝 당겨보았다. 녹슨 철문이 ‘삐그덕’거리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살며시 열렸다. 잠시 망설였지만 커피 한잔 물쯤은 그냥 가져가도 될 것 같아 안으로 들어갔다.

몇 달은 비누 청소를 하지 않았는지 역무실 내에서 매캐한 냄새가 풍겼다.

 

“아무도 안 계시나요?”

 

용재는 커피포트의 손잡이를 잡았다. 물이 가득 들었는지 묵직했다. 그것을 들고 있던 종이컵에 물을 따르려는 순간 커피포트 옆에 놓인 종이 한 장이 발견했다. 그냥 낙서 따위겠지... 라고 여기며 아무 생각 없이 커피포트를 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하얗던 종이가 빨간색으로 변하더니 꾸물, 꾸물거리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 주춤하는 순간 종이가 길쭉하게 늘어나며 살아있는 뱀처럼 순식간에 코앞으로 다가왔다.

 

“엇! 이... 이게 뭐지?”

 

용재는 너무 놀라 종이컵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종이컵에 담겨있던 물방울이 퍼지며 바지에 쏟아졌다. 뜨거운 물살에 살이 찢어지는 느낌이었다. 용재는 계속해서 뒷걸음질을 쳤다. 종이에서 이상한 형상이 피어올라 영화처럼 눈앞에 펼쳐지더니 그림자처럼 계속해서 용재를 따라왔다. 용재는 더 이상 뒷걸음질을 칠 공간에 없어지자 도망칠 곳을 찾기 위해 뒤쪽을 쳐다보았다. 용재는 그때서야 펼쳐진 그 형상을 똑바로 쳐다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처참하게 뜯긴 두 명의 남자 모습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그곳을 향해 손을 뻗어보았다. 만져지지는 않았지만, 그 형상은 너무도 현실같이 더욱 또렷해지더니 점차 낯익은 형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설마....’

 

용재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형상 속에 인물은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던 그 친구들의 모습이었다. 땀방울이 머리끝에서 입술까지 흘러내렸다. 갑자기 피곤할 정도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출입문이 보였다. 벽을 붙잡고 안간힘을 다해 그쪽으로 다가갔다.

 

‘빠져나가야 하는데... 이런 젠장!’

 

괴기스런 모습의 형상이 갑자기 소용돌이치듯 용재에게 달려들었다. 용재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피하려다 무엇인가에 미끄러져 ‘쾅’하는 소리를 내며 문에 부딪혀 넘어졌다. 바닥에 끈적이는 액체가 질퍽거리고 있었다. 천천히 눈을 돌려 질퍽거리는 것을 쳐다보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검붉은 색의 무엇.... 노린내.... 끈적이는 덩어리.... 고약스런 냄새...... 그것은!!

 

‘악!!!’

 

커피포트에서 쏟아져 내린 액체, 그것은 시뻘건 '피'였다. 살아있는 듯 그 위로 거품이 일었다. 용재는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뒷걸음질을 쳤다. 등산화의 굽이 그 액체의 범벅이 되어 마찰력을 상실했는지, 그 자리에서 버둥거리며 헛걸음질만 거듭했다. 겨우 몸을 일으켜 문을 박차고 나가려는 순간, 검붉은 액체가 다리 위로 타고 올라 몸 전체를 감싸 안았다. 숨이 막혔다.

 

“사... 살려줘......”

 

 

 

***

 

삐리리~~

용재는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물건들이 배열되어 있었다.

 

‘피... 피는? 괴물은? 커.. 커피포트는? 여..여기가 대체? 헉헉...’

 

삐리리리리~~~~

꿈을 꾼 모양이었다. 매일 보는 체크무늬의 이불과 책상, 그리고 컴퓨터가 보였다. 그 옆으로 등산가방과 등산화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용재는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으며 어느 정도 안심이 되자 손을 뻗어 스마트폰의 버튼을 눌렀다.

 

“아직 집에 있었어요? 역에서 만나기로 해놓고서 지금까지 자고 있으면 어떻게 해요? 먼저 내기하자고 한 사람은 누군데... 훗, 지금부터 정확히 한 시간 내로 안 오면 우리가 먼저 출발할거예요.”

“예, 예... 지금 당장 갈 테니..”

“좋아요. 그 대신 용재씨, 코스는 제일 어려운 곳으로 해요. 약속시간을 어겼으니까 그 벌칙으로...”

“어쩔 수 없죠. 알았어요. 제가 제일 어렵다는 숲길 코스로 출발할게요.”

 

용재는 말을 해놓고 ‘아차’싶었다. 그쪽 코스는 반드시 암벽을 타야했기 때문이었다. 추악한 기억을 떠올랐다.

 

“그래요. 어쨌든 빨리 나오세요.”

 

용재는 전화를 끊자마자 잠옷을 벗어 던지고 등산용 바지를 입기 위해 장롱 문을 열었다. 그러나 등산바지가 보이지 않았다. 문득 방바닥을 둘러보다 그 바지를 발견했다. 분명 빨아서 장롱 안에 잘 개켜놓은 바지였는데,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는 것이다. 용재는 이상하다는 생각에 바지를 들쳐보았다. 바지 엉덩이 부분에 검붉은 얼룩 자국이 보였다. 새로 산 비싼 바지라 아끼고 아껴서 입었던 것인데 얼룩 따위가 있는 것이 이상했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기에 한쪽 구석에 던져놓고 서둘러 다른 바지를 찾기 위해 장롱 속을 뒤지다가 허벅지에 장롱 문이 슥 하고 스쳤다. 용재는 허벅지를 움켜잡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평소와는 다르게 그 부분에서 심한 통증이 느껴진 것이었다. 본능적으로 그 쪽을 쳐다보니 붉은 반점 같은 것이 보였다. 용재는 그것을 살짝 매만져 보았다.

 

‘화상자국...?’

 

잠들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허벅지에 아메바처럼 꾸물거려 보이는 이상한 화상자국이 생길 턱이 없었다. 용재는 구석에 던져놓은 바지와 화상자국을 번갈아 보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바지에 묻어있던 얼룩은 커피포트에서 흘러내린 미끄럽게 질퍽거리던 그것? 그것?? 그건 꿈이잖아... 설마...’

 

눈앞이 아찔했다. 금방 꾸었던 그것이 꿈이 아니었단 말인가? 용재는 너무나도 혼란스러워 머리를 감싸 안으며 스마트폰을 쳐다보다가 손가락으로 볼을 꼬집어보았다. 확실히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금방까지 울렸었는데, 그리고 분명히 전화를 받았는데...’

 

바지를 집어 들고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몸을 벌벌 떨고 있는데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숨을 들이쉰 용재는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이번에는 진혁씨의 이름이 떴다.

 

“아직까지 집에 계시네요? 어쨌든 약속시간까지 안 오면 먼저 출발 할 테니, 참! 골인 지점은 정상 위에 있는 ‘계곡 산장’이에요. 기다리는 동안 우리 둘이서 그렇게 정했어요. 우린 그냥 오르는 것이 아니라 사냥도 해야 하니...”
“어? 산 정상에 산장이 있었어요? 그렇다면 제가 가는 코스에... 암벽을 타는 방법 말고 다른 길도 있나요?”

“글쎄요? 어쨌든 빨리 오기나 하세요.”

 

바람 소리 같은 괴이한 잡음 때문에 잘 들리지 않는 진혁씨의 음성엔 분명 어떤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 용재는 스마트폰을 조심스럽게 껐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디까지 현실이고 어디까지 꿈일까? 뭐가 뭔지 정신이 없었다. 신경을 쓰는 곳이 많아서 헛것이 보이는 것일까? 그리고 그 산 정상에 산장이 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없었는데....

 

용재는 약속한 장소가 가까워질수록 자신의 심장소리가 더욱 더 쿵쾅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차 문이 열리고 그 역이 보였다. 햇빛은 건물을 새하얗게 만들 정도로 내리 쬐었다. 그 옆으로 등산복차림의 사람들 몇 명의 모습이 보였다. 들은 그 시간도 못 참고 바로 출발해 버렸는지 눈에 익은 얼굴은 볼 수가 없었다. 시계를 보니 나중에 약속했던 시간보다 30분 정도 더 늦게 도착한 셈이었다.

 

잰걸음으로 역무실 앞까지 들어가 보았다. 전형적인 역무실이라는 고정관념을 포함하지 않더라도 꿈에 보았던 그곳하고는 많이 달라 보였다. 용재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뱉으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꿈에서 보았던 역하고는 많이 틀렸다. 역의 구석구석을 좀 더 살펴본 후 역을 빠져 나와 바로 앞에 있는 표시판을 보았다. 여행지도에 나와 있는 것처럼 그 산의 코스는 ‘서포리 숲길 코스’와 ‘서포리 갈대밭’, 그리고 ‘인장 바위 앞’이라는 세 갈래의 길이 있었다.아마도 두 친구는 비교적 쉬운 코스인 갈대밭과 인장바위 앞으로 흩어져서 출발했을 것이다.

표시판을 보니 친구들이 출발한 두 코스는 역 앞에서 각기 5분 거리와 20분 거리에 있었고 용재가 가야할 가장 좋지 못한 ‘숲길 코스’는 역에서 버스를 타고 40분가량 더 들어가야 하는 곳이었다. 내기에서 지기 싫다는 욕심에 택시를 타고 가고 싶었지만, 이런 한적한 곳에서 택시를 기다리다가는 오늘 안에 ‘숲길 코스’ 근처도 가지 못할 것 같았다.

안내판에 나와 있는 대로 그 앞을 지나가는 13-4번 버스를 타기 위해 길 건너편 버스 정류장을 찾았다. 코스 때문인지 아니면 시간 때문인지 버스 안에는 기사 외에는 단 한사람도 타고 있지 않았다. 비포장도로를 달릴 때 건조한 황토색의 흙이 먼지가 되어 차안으로 들이닥쳤다. 묵묵히 있던 버스 기사가 말을 꺼냈다.

 

“창문을 닫아야 할 겁니다. 워낙 먼지가 많아서요.”

 

버스 기사는 운전의 지루함을 달래려는 듯 좀 떨어져 앉아있던 용재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다.

 

“손님은 숲길 코스로 가시는 건가요?”

“네. 어떻게 아셨는지...”

“이 버스에 타는 외부인들이라면 불 보듯 뻔하죠. 게다가 손님은 완전 등산복 차림인데... 허허. 그건 그렇고 좋은 길은 다 놔두고 하필이면 그 길로 가려하는 이유는 뭐지요?”

“단지 등산이 좋아서 그럽니다.”

“그래요? 좋다는 데야 할 말이 없네요.”

 

다니는 차가 별로 없어서 그런지 버스는 안내문에 나와 있던 시간보다 두 배는 빨리 도착했다. 용재는 기사에게 인사를 하고 버스에서 내려 부지런히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여느 길하고는 다르게 나무와 풀이 수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아마도 오랫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던 것 같았다.

중간 중간에 옻나무와 가시덩굴이 삐죽, 삐죽 튀어나와 야삽과 지팡이 등의 도구를 가지고서도 앞으로 나아가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가끔씩은 컴컴할 정도로 짙은 숲 속에 파묻혀 길을 찾기 위해 헤매기도 했고, 바닥이 보이지 않아 구덩이 속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용재의 몸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났다. 그런 곳이다 보니 허벅지에 난 화상자국이 더욱 신경 쓰였다.

 

“젠장, 무슨 이따위 코스가 다 있어? 정말 거지같군. 그나저나 이 속도로 간다면 분명 그 친구들보다 늦게 도착할 텐데...”

 

그렇게 한참을 정신없이 걸어가다 보니 멀리 V자형의 계곡이 보였다. 발걸음을 빨리 해 그쪽으로 걸어갔다. 계곡 옆으로 끝도 보이지 않는 작은 길이 있었다. 그 옆으로 삐뚤삐뚤 써진 표시판이 있었다.

 

[정상까지 666미터, 1시간 40분소요]

 

산을 타는 것에 이력이 난 그였지만, 초행길인 데다가 등반용 도구를 잔뜩 넣어온 배낭의 무게 때문에 적어도 표지판에 써진 시간보다는 1시간은 족히 더 걸릴 것 같았다. 어떻게 할까 궁리를 하던 끝에 우연히 계곡 옆을 쳐다봤다. 작은 길이 보였다. 그 길은 용재가 서있는 곳에서 시작되어 크게 한 바퀴를 돌고 나서 오른편에 있는 계곡 쪽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gap만 없다면 금방이라도 그쪽으로 달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렴풋이 그쪽에 표지판 비슷한 것이 하나 있는 것이 보였다. 용재는 배낭에서 쌍안경을 꺼내 그 표지판을 쳐다보았다.

 

-계곡산장-

 

벼랑을 질러가면 구태여 1시간 40분까지 걸어갈 필요가 없는 지점이었다.

계곡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50미터쯤 앞에 반대쪽 능선으로 연결된 밧줄 하나를 발견한 용재는 단숨에 그곳까지 뛰어갔다. 길쭉하게 걸쳐진 손잡이 격인 밧줄은 두 갈래였으며, 밑으로 발을 지대는 또 하나의 두꺼운 밧줄이 있어 역삼각형 형태였다. 그 세 가닥의 밧줄은 서로가 가는 밧줄로 연결되어있었다. 그 동안 익힌 독도법으로 가늠해보자면 계곡간의 길이는 대략 40미터 정도, 계곡의 깊이는 적어도 30미터는 넘어 보였다.

 

‘이것만 건너면 바로 되는데...’

 

밧줄이 탱탱하게 매달려있는지 손에 힘을 주어 잡아 당겨보았다. 몇 사람의 체중은 지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좀 위험하기는 한데... 에라 모르겠다. 걸어가는 것보다는 이게 빠르겠지.’

 

용재는 두 갈래의 밧줄을 양손으로 잡고 밑으로 뻗은 한 갈래의 밧줄에 오른발을 걸치고 그곳에 올라탔다. 밧줄은 좌우로 심하게 출렁거렸다. 심호흡을 들이쉬던 용재가 중얼거렸다.

 

‘부지런히 걸으면 10분도 안 걸릴 거야. 이 정도쯤이야... 내가 누군데... 어차피 돌아가면 지는 거잖아. 모험이긴 하지만, 이것만 건너면 나에게도 승산이 있을 수도 있다고...’

 

용재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손과 발의 감각만으로 한 걸음 두 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걸어갈 때마다 밧줄은 심하게 출렁거렸다. 용재는 스스로에게 암시를 주었다.

 

‘이곳은 평지다. 평지 위에 밧줄이라고! 이 정도 고비쯤이야 그동안 많이 마주쳤잖아.’

 

하지만 생각처럼 떨리는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고 용재는 중간에 몇 번이고 멈추어 밧줄의 흔들림이 줄어들 때까지 기다리면서 천천히 발을 내딛었다. 그 중간쯤에서 밑을 보자 묘한 느낌이 밀려들었다. 배낭에 걸려있던 카라비너 하나를 뜯어 밑으로 떨어뜨려 보았다. 그것은 햇빛에 반짝거리며 떨어지더니 수초 후 ‘툭’하는 소리로 계곡의 깊이가 생각보다 깊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심호흡을 하고 밧줄을 더욱 강하게 고쳐 잡은 다음 성큼성큼 끝까지 걸어 나가 계곡의 반대편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온몸으로 땀이 배어 나온 모양인지 옷이 흠뻑 젖어있었다. 용재는 안도의 깊은숨을 두어 번 내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런 용재의 바로 앞에 쓰러질 듯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낡은 표지판 하나가 있었다.

 

[산사람들에게 가장 편안한 휴식처인 계곡산장으로 오시려거든 반드시 이 암벽을 타셔야 합니다]

 

“길이 암벽이라고? 정말 특이한 곳이로군. 그나저나 그런 곳에 있으면서 편안한 휴식이라고?? 참나...”

 

용재는 표지판 옆을 보았다. 도봉산의 인수봉보다도 높아 보이는 깎아지른 암벽이 보였다. 이런 코스가 있다는 것을 지금까지 모르고 있던 자신이 의심스러웠다. 몇 달 전의 그런 사건만 없었더라면 용재에게는 충분히 구미가 당길 코스였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쓸 만한 암벽이 꽤 있구나... 여길 올라가 말아? 찝찝한데...’

 

각도와 바위틈을 보니 꽤 고난도의 ‘Y’자 암벽이었다. 산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하겠지만 이런 아름다운 암벽을 볼 때마다 묘한 흥분에 사로잡히고는 한다. 용재 역시 그랬다. 이곳을 지나쳤던 많은 산악인들도 이곳을 쳐다보고는 다들 그런 생각을 품었을 것이리라. 용재는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배낭을 고쳐 메고 암벽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암벽을 훑어보았다. 그 어디에도 등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뭐야? 이런 암벽이라면 내가 처음일리는 없는데, 위에 산장도 있잖아. 어쨌든 이 암벽만 오르면 그 친구들보다 내가 먼저 도착할 것도 같고... 암벽 자체도 꽤나 매력 있고... 어쩐다.”

 

용재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암벽을 탄다고 생각하니 아까보다 더한 흥분이 몰려왔다. 잠시 후 결심한 듯, 한 손으로 자일을 풀어 몸에 걸친 다음 암벽화로 고쳐 신었다. 그리고 퀵드로우를 이용해 풀은 자일을 자신의 몸에 두른 후, 한 걸음 두 걸음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암벽은 생각보다 미끄러웠다. 손에 쵸크를 털어 싹싹 비벼 보았으나 이상하게도 그 사이로 땀이 흘러나와 끈적거리며 미끄러운 것이 쵸크를 전혀 바르지 않은 것보다 못했다. 간밤에 꾸었던 꿈에서 신발 밑창을 미끄럽게 했던 바로 그 액체의 느낌과 같았다. 하지만 이미 오르던 곳이라 암벽화에 체중을 싣고 천천히 위로 향했다. 평소에 귤껍질 까듯 쉽게 도약할 수 있는 부분에서도 상당히 힘이 들었다.

그렇게 중간쯤 도착했을까? 용재는 너무도 힘에 겨워 적당한 곳에 말뚝을 박고 자일과 카라비너를 연결해 대롱대롱 매달려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근육의 피로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밑에서 어떤 인기척이 느껴진 것이었다. 용재는 순간적으로 그쪽을 쳐다보았다. 효준씨였다. 그는 맨손으로 암벽을 오르며 용재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효준씨는 한때, 암벽에 있어서는 전문가 중에 전문가였다는 용재가 생각해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속도로 암벽을 오르고 있었다. 효준씨는 빙긋 웃으며 소리쳤다.

 

“벌써 지쳤나보죠? 하하하하”

 

언제 나타났는지 용재 옆으로 20미터 지점에 진혁씨가 매달려있었다. 그도 큰소리로 웃어댔다. 진혁씨 몸에도 자일은 물론이고 기본적인 안전장비조차 없었다. 진혁씨는 한 손으로 튀어나온 작은 돌출바위를 잡고는 자신의 온 몸을 그네처럼 덜렁거렸다. 정말 놀라운 광경이었다.

 

“내 걱정은 말라고, 가장 늦게 오르는 사람이 손해인 거 알지?”

 

진혁씨는 나머지 한 손으로 옆에 있는 봉우리를 잡더니 마치 다람쥐처럼 암벽을 타기 시작했다. 그에 질세라 효준씨도 진혁씨의 뒤를 따라 올라갔다. 용재는 그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알 수 없는 묘한 경쟁심이 불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셋 중에서 가장 등반을 잘한다고 자부하던 자신이지 않았던가? 용재는 있는 힘을 다해 자일을 잡아당겨 앞으로 나아갔다.

마침, 효준씨와 진혁씨는 서로 같은 암 결에서 만나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용재는 그 틈을 이용해 그 두 사람을 추월해 계속해 위로 기어올랐다. 타오르는 승부욕 때문인지 용재는 정상까지 순식간에 오를 수 있었다. 용재는 뒤를 돌아 지혁과 효준을 쳐다보았다. 그들도 불과 1∼2 미터 사이로 거의 정상에 도착하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산 정상에 아슬아슬하게 지어진 어떤 건물 하나가 보였다. 앞으로 넘어질세라 암벽화를 벗어 던진 용재는 그쪽으로 달려가며 말했다.

 

“당신들이 나를 따라잡을 수는 없지. 하하하.”

 

그때였다.

 

삐리리리리~~

빠른 속도로 달리는 용재의 품속에서 요란하게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바쁜데 누구야!”

 

용재는 그 건물로 향해 뛰면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산악회 회원 친구인 성규였다. 성규는 다급한 목소리로 떠벌렸다.

 

[용재야! 너, 효준씨하고 진혁씨와 암벽등반 갔다며? 그 사람들... 저번 주에 용주산으로 갔다고 하더니 같이 실종됐단 말이야! 도대체 누구랑 간 거야? 응?]

 

그때 효준과 진혁이 겨우 정상에 도착해 용재가 있는 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용재는 미소를 지으며 건물을 향해 더욱 빠른 속도로 뛰며 핸드폰에 대고 말했다.

 

“무슨 소리야? 그 사람들... 지금 나와 함께 있는데... 나, 지금 바빠... 이따 전화할게.. 끊어!”

 

용재는 신열에 들 뜬 사람처럼 성규의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고 몽롱한 정신에 히죽거렸다. 그리고 자신의 뒤를 쫓아 달려오는 그들을 쳐다보며 건물의 출입문을 힘껏 열어 제치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용재는 고개만 뒤로 돌린 채 크게 소리쳤다.

 

“어때요? 제가 일등이죠!”

 

그러나 당연히 뒤에서 쫓아 와야 할 효준과 진혁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를 않았다. 더욱이...그 건물의 문 뒤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문 뒤가 바로 절벽이었던 것이다. 한껏 스피드에 힘이 실린 용재의 육체는 그 건물 뒤로 휑하니 나있는 절벽 밑으로 꼬꾸라졌다. 용재는 넘어지면서 가까스로 바위 틈새에 있는 나무뿌리를 움켜잡았다. 그러나 그것이 용재가 가지고 있는 마지막 힘이었다. 손에 힘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고, 설상가상으로 나무뿌리도 끊어지기 시작했다. 버틸 수 있는 방법은 아무 것도 없었다. 어차피 떨어지게 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누군가가 자신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것 같았다. 몸이 무척이나 무거웠다. 용재는 손으로 잡고 있던 나무뿌리를 놓아버렸다.

 

용재가 절벽 아래로 추락하면서 땅바닥과 충돌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본 것은 이미 그곳에 떨어져 죽어있는 용준씨와 진혁씨의 처참한 몸뚱이였다. 바람이 몹시도 불어오는 그곳에서 썩을 대로 썩은 두 시신은 죽은 지 일주일은 지나 보였으며 약속이나 한 듯, 두 시체 모두 핸드폰을 힘껏 움켜쥔 채 귀와 입 근처에 바싹대고 웅얼거리는 입 모양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욱 놀라운 장면은 그들 사이로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진 거대한 여자의 얼굴 모습이었다. 빠른 속도로 떨어지던 용재는 몸뚱이가 바닥에 닿기 직전, 금방 봤던 그 거대한 여자 얼굴이 ‘내가 알고 있던 바로 그 여자가 맞다’는 생각을 했다.

그와 동시에 퍽 소리와 함께 머리가 으깨지며 세상에 모든 것이 시커멓게 변했다.

 

 

- THE END -

 

  

 

 

 

1화: 말하는 거울

2화: 포스터를 그리면서

3화: 하얀 원피스

4화: 딸을 위한 선물 (19)

5화: 천재 작가 (19)

6화: 소름끼치는 목소리

7화: 뫼비우스의 운명

8화: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가고 있을 때...

9화: 최고의 상품

10화: 과거로 돌아간 남자 (운명의 새해)

11화: 사이버 세계로 떠난 웹툰작가 上

12화: 사이버 세계로 떠난 웹툰작가 下

13화: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14화: 내 잘못이 아니야

15화: 파우스트의 진실

16화: 그의 노래가 들리는 곳에는...

17화: 상류층의 놀이거리

18화: 피 흘리는 산행

19화: 누군가의 화분에 옮겨져 죽어가는 그것이 그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것

댓글 8

ㅇㅈㅇ오래 전

한편을 접하게되고 정주행했어요. 필력이대단하시네요.. 정말 이렇게 읽게되어서 감사하단말 드리고가요^^

야야야오래 전

휴가 끝나고 와서 유리님 글 보면서 다시 휴식 취하는 기분임 ㅋㅋㅋ 완전 조아여

요단강사색향기오래 전

막걸리 조아하는 유리님^^ 바쁜탓에 이제 스캔해용... 유리님 자작글도 싸랑해용^^

ㅎㅎ오래 전

무서워요 공포물도 잘 쓰시네요

야미오래 전

소희도 실족사 한게 아닐까요... 이번편 공포소설로 대박이네요!

TㅡT오래 전

으 무섭... 죽은여고생이 귀신임? 근데 소희정체는 뭐임

키미오래 전

으아아앙..... ㅠㅠ

운아오래 전

오오 빠르게. 선추천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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