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대한족주의(中華大漢族主義)에 타격을 가한 고구려(高句麗)의 영걸 연개소문(淵蓋蘇文)

참의부2013.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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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642년 무렵 당시 고구려(高句麗) 왕국의 국왕이었던 영류태왕(榮留太王)을 비롯한 귀족들과 연개소문(淵蓋蘇文)을 중심으로 한 무장(武將) 세력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연개소문이 아버지 연태조(淵太祚)의 직위를 계승하려 할 때부터 시작된 갈등이었다.

 

연개소문의 집안은 여러 대(代)에 걸쳐 고구려 최고 관직인 대대로(大對盧)를 세습해왔으니, 연개소문이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귀족들은 이를 막으려 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그의 성품이 잔인하고 포악했기 때문이었다고 전하지만 사실 귀족들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강인한 연개소문의 성품보다 당나라에 대한 정치적 입장의 차이였다.

 

수(隨) 제국이 멸망하고 새로이 들어선 당(唐) 제국이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구축하려는 팽창정책을 쓰면서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에 대해 영류태왕을 비롯한 귀족 세력은 어떻게든 당나라와의 전쟁을 피하고자 했다. 반면 연개소문의 집안은 대당(對唐) 강경파의 선봉이었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지략과 재주가 출중하다는 칭송을 받은 혈기왕성한 청년 연개소문은 당시 집권층에게 매우 위험한 인물이 아닐 수 없었다.

 

연개소문은 자신이 만약 잘못하면 그때 그만두어도 되지 않겠느냐는 설득 끝에 겨우 대대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대대로의 자리에 오른 이후에도 연개소문의 정치적 입장이 바뀌지 않자, 영류태왕을 비롯한 귀족들은 연개소문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를 눈치 챈 연개소문은 군사들의 열병식을 한다며 귀족들을 초대하고는 모두 살해해 버렸다. 100여명이 넘는 귀족들을 모두 처치한 뒤 궁중으로 들어가 영류태왕마저 죽여 없앤 연개소문은 영류태왕의 조카인 보장태왕(寶藏太王)을 옹립하고는 자신은 인사권과 군사권을 총괄하는 대막리지(大莫離支)에 올랐다.

 

연개소문이 권력을 장악한 직후 백제(百濟)의 공격을 받고 위기에 빠진 신라(新羅)의 왕족 김춘추(金春秋)는 고구려를 찾아와 군사 지원을 청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보장태왕을 통해 "고구려의 옛 땅인 한강 유역을 돌려주면 구원병을 보내겠다"고 대답했고, 김춘추가 거부 의사를 밝히자 별관에 가두었다. 김춘추는 가까스로 풀려났지만 이후 고구려와 신라는 완전히 적으로 돌아서게 된다.

 

한편, 당나라의 두번째 황제인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은 중원 대륙을 완전히 통일한 뒤 돌궐(突厥)을 복속시키고 서역의 고창국(高昌國)을 멸망시키며 중화대한족주의(中華大漢族主義)의 야심을 실현시켜가고 있었다. 동북아시아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고구려는 마지막 남은 과제였다. 그런 그에게 연개소문의 정변(政變)은 좋은 구실이 되었다.

 

서기 645년 마침내 이세민은 연개소문을 징벌하여 고구려의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명분 아래 1백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요하(遼河)를 건넌 당나라 군사들은 개모성(蓋牟城), 비사성(卑沙城), 요동성(遼東城)을 차례로 점령하고 여세를 몰아 서쪽 변경의 중요한 요새인 안시성(安市城)을 포위했다. 안시성주(安市城主) 양만춘(楊萬春)을 비롯한 고구려의 군사들과 백성들은 5개월에 걸친 당나라 군사들의 총공격을 필사적으로 막아내며 효과적인 수성전(守城戰)을 펼쳤다. 그러는 사이에 건안성(建安城)과 신성(新城)의 고구려 군사들이 당군의 후방을 교란시켜 보급로를 차단했다. 이세민은 울분을 삼키며 전군의 퇴각을 명령했다. 그러자 연개소문은 정예군을 이끌고 요택(遼澤)에서 후퇴하는 당나라 군사들을 요격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패전국(敗戰國)이 된 당나라는 647년과 이듬해에도 소규모의 병력을 파견하여 국지전(局地戰) 형태로 고구려를 침공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660년에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공격으로 인해 백제가 멸망하자 당나라는 소정방(蘇定方), 방효태(龐孝泰) 등의 군대를 보내어 고구려를 다시 침략했다. 이에 연개소문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사수대전(蛇水大戰)에서 당군 전원을 몰살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665년 연개소문이 사망할 때까지 당나라는 더 이상 고구려를 공격하지 못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후계자를 제대로 기르지 못했다. 그의 자리를 이어받은 맏아들 남생(男生)이 동생들과의 권력 다툼에서 패배해 당나라에 투항하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淵淨土)가 신라로 귀순하자,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고구려는 668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김부식(金富軾)은 삼국사기를 통해 연개소문을 무자비한 독재자이며, 고구려의 멸망을 초래한 장본인으로 기록했다. 반면 신채호(申采浩)는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위대한 혁명운동가로, 박은식(朴殷植)은 천개소문전(泉蓋蘇文傳)에서 독립자주의 정신과 대외경쟁의 담략을 지닌 우리 민족의 역사상 1인자로 평가했다. 유교사대명분론(儒敎事大名分論)이 지배하던 조선왕조시대까지는 임금을 죽이고 중국의 명령을 거역하여 나라를 망하게 한 인물로 평가되던 인물이 민족의 자주독립을 쟁취해야 했던 20세기 전반에 자주적인 혁명운동가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렇게 극과 극의 평가가 상존하는 것은 각 시대에 따라 역사를 보는 시각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료의 부족 탓이 크다. 언제 태어났고 언제 죽었는지조차 불분명할 정도로 연개소문에 대한 자료는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참고한 자료들은 대부분 연개소문을 적대시했던 중국 측 자료였다. 고구려인들이 본 연개소문의 모습이 아니라 적국인 당나라에서 본 모습이다 보니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가 호의적일 리 없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연개소문(淵蓋蘇文)이 뛰어난 군사 지도자였다는 것과 강력한 리더십으로 동북아시아를 지배한 강한 고구려를 이끌었다는 것이다. '천하에서 오직 한족(漢族)만이 진정한 문명의 민족이고 다른 종족은 모두 야만적인 오랑캐들이다.'라는 중국인들의 오만한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우리 민족사의 상징적인 존재로서 현재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추진하여 우리의 고대사를 왜곡하는 중국 정부의 이중적인 모습에 대응할 수 있는 모델이 바로 연개소문인 것이다. 그렇지만 국제 정세를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해 좀 더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점과, 후계자를 제대로 기르지 못해 고구려를 멸망의 길에 이르게 했다는 비난은 면하기 어려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