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 민족주의사학(韓國近代民族主義史學)의 시조(始祖)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 1.지금 왜 단재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⑵
참의부2013.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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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조사 하나 고치는 것도 거부한 결기
북경 일우의 하숙방에서『천고(天鼓)』를 발행하면서 언론투쟁(言論鬪爭)과 역사 연구에 몰두하던 단재는 다소 ‘소극적’이던 이런 활동을 접고 의열단(義烈團) 의백(義伯)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의 초청으로 다시 상해로 가서「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을 집필하였다. 일제강점기 수많은 독립선언문 중에서 내용과 문장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조선혁명선언」에서 단재는 “강도일본(强盜日本)이 우리의 국토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여 온갖 만행을 거침없이 자행하는 강도정치(强盜政治)가 조선민족 생존의 적(敵)임을 선언함과 동시에 혁명으로 우리의 생존의 적인 강도일본을 살벌(殺伐)하는 것이 조선민족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였다.
한마디로 말해 폭력에 의한 민중의 직접혁명이 이 ‘선언’의 핵심이었다. 언론인 출신으로 혁명 전선에 나선 인물은 적지 않았지만 단재처럼 치열하게 제국주의자들과 싸운 인물도 흔치 않았다.
단재는 만년에 아나키즘 운동가로도 활약하였다. 1926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입하고, 1928년 4월에는 직접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 북경회의(北京會議)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의 결의에 따라 대만에서 외국 위체(爲替)를 위조하는 등 독립운동 자금 염출에 직접 나섰다가 체포되어 대련 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旅順)감옥으로 이감, 복역중 출옥을 1년 8개월 앞두고 1936년 2월 18일 안타깝게 옥사하였다.
필자는 몇 차례 여순을 방문하여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이 여순감옥의 몇 호실에서 8년의 옥고를 치렀는지, 그 흔적을 찾고자 노력했으나 모두 허사였다. 다만 머리를 빡빡 깎고 죄수 번호를 단 입소 때의 사진 필름을 입수하게 된 것과 화장터를 찾게 된 것은 그나마 소득이었다.
단재는 여순감옥에서도 틈틈이 많은 글을 쓴 것으로 알려졌으며 현재 유고(遺稿)는 평양 인민문화원에 보존돼 있는 것으로 전해 들었다.
단재는 서릿발 같은 자세로 글을 쓰고, 그렇게 행동하면서 일본 제국주의 세력과는 터럭끝만치도 타협하지 않았던 불굴의 애국지사이다.
북경 망명 시절에 유일한 호구 수단인『북경신문』의 기고문에 어조사인 ‘의(矣)’자를 편집자가 임의대로 뺐다고 하여 사장이 직접 찾아와서 사과를 해도 끝내 기고를 거부한 지사적 언론인의 결기와 행동 그 자체가 바로 단재의 정신이다.
일본 연호를 부끄럼 없이 쓰는 식민지 조국의 신문에는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다면서 연재를 거부했던 언론인 단재 신채호의 자세에서 우리는 언론인과 지식인의 참모습을 찾게 된다.
● 시대를 초월한 국민의 사표
몇 해 전 남한에서는 남미의 혁명가 게바라(Che Guevara)의 30주기를 맞이하여 그의 평전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서점과 대학가에는 대형 인물 포스터가 붙고, 그의 얼굴을 새긴 셔츠가 범람하고 언론에서는 특집을 꾸미는 등 야단법석을 떤 적이 있었다.
게바라는 유능한 혁명사로서 충분한 대접을 받을 만한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투사다. 하지만 머나먼 외국의 혁명투사에는 그럴진대 우리 민족해방을 위해 포악무도한 일제에 처절하게 저항하며 차디찬 여순감옥에서 홀로 쓸쓸히 고단한 삶을 마친 단재 신채호 선생의 30주기인 1966년과 50주기인 1986년, 그리고 60주기인 1996년을 우리는 어떻게 보냈는가?
단재는 게바라에 비하기 어려울 만큼 투쟁 경력과 사상과 고난의 역정을 갖고 있다. 오히려 그보다 더욱 이념적이고 열정적이고 극적인 삶과 죽음이었다.
구한말 그가 쓴 구국언론의 논지는 당대에 가장 출중한 논설이었고, 망명지에서 벌인 반일언론투쟁(反日言論鬪爭)과 무장투쟁(武裝鬪爭)을 통해 일제와 싸우자는 ‘혈전론(血戰論)’은 가장 투철한 민족해방운동의 방략이었다.
그가 집필한 의열단 선언문인「조선혁명선언」은 식민지 시대에 나온 문건 가운데 으뜸으로 치고 있다.
그가 택한 대종교(大倧敎)는 식민지 시대에 가장 강력히 일제와 투쟁한 민족종교했고, 그가 망명생활 혹은 옥중에서 집필한『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등 일련의 사서(史書)는 민족사관을 일구는 최고의 텍스트가 되고 있다.
그가 마지막으로 택한 아나키스트의 길을 지금 유럽 지성계가 21세기 인류의 이념체계 또는 가치관으로 인식하고 연구될 만큼, 그는 1세기를 앞질러 아나키즘을 연구하고 실천한 예언자적인 사상가였다.
그런데 우리는 단재 선생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접해왔는가? 혁명가 단재의 생애와 사상은 소수 연구자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친일파 등 반민족행위자들의 각종 기념관·전집·장학제·기념상 등이 넘쳐나는 데 비해 정작 단재 선생의 것은 찾기 어려운 형편이다.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선영의 묘소는 비만 오면 물에 잠기다가 며느리손으로 파헤쳐 가묘상태이고 비석은 오자 투성이인 데도 여전히 방치되고 있다.
북경에서 피로 쓴 잡지『천고』는 1, 2권 외에 나머지는 아직 행방을 찾지 못해 국내에서 햇빛을 보지 못한 채다.
더욱 놀랍고 개탄스러운 일은 여순감옥 옥사 후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단재 선생이 아직도 호적이 없는 무국적 상태라는 사실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언제까지 이런 일이 이어질 것인지, 안타깝고 부끄럽고 죄스럽기 그지없다.
한국 근대 민족주의사학(韓國近代民族主義史學)의 시조(始祖)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 1.지금 왜 단재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⑵
● 어조사 하나 고치는 것도 거부한 결기
북경 일우의 하숙방에서『천고(天鼓)』를 발행하면서 언론투쟁(言論鬪爭)과 역사 연구에 몰두하던 단재는 다소 ‘소극적’이던 이런 활동을 접고 의열단(義烈團) 의백(義伯)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의 초청으로 다시 상해로 가서「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을 집필하였다. 일제강점기 수많은 독립선언문 중에서 내용과 문장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조선혁명선언」에서 단재는 “강도일본(强盜日本)이 우리의 국토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여 온갖 만행을 거침없이 자행하는 강도정치(强盜政治)가 조선민족 생존의 적(敵)임을 선언함과 동시에 혁명으로 우리의 생존의 적인 강도일본을 살벌(殺伐)하는 것이 조선민족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였다.
한마디로 말해 폭력에 의한 민중의 직접혁명이 이 ‘선언’의 핵심이었다. 언론인 출신으로 혁명 전선에 나선 인물은 적지 않았지만 단재처럼 치열하게 제국주의자들과 싸운 인물도 흔치 않았다.
단재는 만년에 아나키즘 운동가로도 활약하였다. 1926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입하고, 1928년 4월에는 직접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 북경회의(北京會議)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의 결의에 따라 대만에서 외국 위체(爲替)를 위조하는 등 독립운동 자금 염출에 직접 나섰다가 체포되어 대련 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旅順)감옥으로 이감, 복역중 출옥을 1년 8개월 앞두고 1936년 2월 18일 안타깝게 옥사하였다.
필자는 몇 차례 여순을 방문하여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이 여순감옥의 몇 호실에서 8년의 옥고를 치렀는지, 그 흔적을 찾고자 노력했으나 모두 허사였다. 다만 머리를 빡빡 깎고 죄수 번호를 단 입소 때의 사진 필름을 입수하게 된 것과 화장터를 찾게 된 것은 그나마 소득이었다.
단재는 여순감옥에서도 틈틈이 많은 글을 쓴 것으로 알려졌으며 현재 유고(遺稿)는 평양 인민문화원에 보존돼 있는 것으로 전해 들었다.
단재는 서릿발 같은 자세로 글을 쓰고, 그렇게 행동하면서 일본 제국주의 세력과는 터럭끝만치도 타협하지 않았던 불굴의 애국지사이다.
북경 망명 시절에 유일한 호구 수단인『북경신문』의 기고문에 어조사인 ‘의(矣)’자를 편집자가 임의대로 뺐다고 하여 사장이 직접 찾아와서 사과를 해도 끝내 기고를 거부한 지사적 언론인의 결기와 행동 그 자체가 바로 단재의 정신이다.
일본 연호를 부끄럼 없이 쓰는 식민지 조국의 신문에는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다면서 연재를 거부했던 언론인 단재 신채호의 자세에서 우리는 언론인과 지식인의 참모습을 찾게 된다.
● 시대를 초월한 국민의 사표
몇 해 전 남한에서는 남미의 혁명가 게바라(Che Guevara)의 30주기를 맞이하여 그의 평전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서점과 대학가에는 대형 인물 포스터가 붙고, 그의 얼굴을 새긴 셔츠가 범람하고 언론에서는 특집을 꾸미는 등 야단법석을 떤 적이 있었다.
게바라는 유능한 혁명사로서 충분한 대접을 받을 만한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투사다. 하지만 머나먼 외국의 혁명투사에는 그럴진대 우리 민족해방을 위해 포악무도한 일제에 처절하게 저항하며 차디찬 여순감옥에서 홀로 쓸쓸히 고단한 삶을 마친 단재 신채호 선생의 30주기인 1966년과 50주기인 1986년, 그리고 60주기인 1996년을 우리는 어떻게 보냈는가?
단재는 게바라에 비하기 어려울 만큼 투쟁 경력과 사상과 고난의 역정을 갖고 있다. 오히려 그보다 더욱 이념적이고 열정적이고 극적인 삶과 죽음이었다.
구한말 그가 쓴 구국언론의 논지는 당대에 가장 출중한 논설이었고, 망명지에서 벌인 반일언론투쟁(反日言論鬪爭)과 무장투쟁(武裝鬪爭)을 통해 일제와 싸우자는 ‘혈전론(血戰論)’은 가장 투철한 민족해방운동의 방략이었다.
그가 집필한 의열단 선언문인「조선혁명선언」은 식민지 시대에 나온 문건 가운데 으뜸으로 치고 있다.
그가 택한 대종교(大倧敎)는 식민지 시대에 가장 강력히 일제와 투쟁한 민족종교했고, 그가 망명생활 혹은 옥중에서 집필한『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등 일련의 사서(史書)는 민족사관을 일구는 최고의 텍스트가 되고 있다.
그가 마지막으로 택한 아나키스트의 길을 지금 유럽 지성계가 21세기 인류의 이념체계 또는 가치관으로 인식하고 연구될 만큼, 그는 1세기를 앞질러 아나키즘을 연구하고 실천한 예언자적인 사상가였다.
그런데 우리는 단재 선생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접해왔는가? 혁명가 단재의 생애와 사상은 소수 연구자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친일파 등 반민족행위자들의 각종 기념관·전집·장학제·기념상 등이 넘쳐나는 데 비해 정작 단재 선생의 것은 찾기 어려운 형편이다.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선영의 묘소는 비만 오면 물에 잠기다가 며느리손으로 파헤쳐 가묘상태이고 비석은 오자 투성이인 데도 여전히 방치되고 있다.
북경에서 피로 쓴 잡지『천고』는 1, 2권 외에 나머지는 아직 행방을 찾지 못해 국내에서 햇빛을 보지 못한 채다.
더욱 놀랍고 개탄스러운 일은 여순감옥 옥사 후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단재 선생이 아직도 호적이 없는 무국적 상태라는 사실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언제까지 이런 일이 이어질 것인지, 안타깝고 부끄럽고 죄스럽기 그지없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저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