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시민항쟁 당시 벌어진 계엄군의 민간인 학살 만행

참의부2013.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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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삼웅 독립기념관장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광주에 투입된 공수특전단의 초강경 유혈진압에 맞서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시민·전라남도민들이 전개한 ‘5·18광주시민항쟁’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가운데 1980년대 한국의 모든 정치적 사건들의 기폭제가 되었고, 6월 민중항쟁의 계기가 되었고, 한국 민주화통일운동에 하나의 준거가 되었다.

 

◎ 공포의 공수특전단

 

가로수의 신록이 여느 해처럼 싱그러운 1980년 5월 18일 아침, 일단의 전남대학생들은 교내로 들어가려다가 총기(銃器)를 든 군인들에 의해 제지당하자 투석(投石)으로 맞섰다. 신군부는 공수부대의 핵심인 제7공수여단의 제33대대와 제35대대를 광주에 파견하고, 그 중 제33대대의 주력이 전남대학교를 장악했다.

 

당시 어느 외국 언론이 표현한 대로 ‘20세기 마지막 비극’인 광주에서의 만행과 위대한 민중항쟁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이 확대되고 계엄포고 제10호로 휴교령이 내려졌다. 전남대학생들은 만일의 휴교조치에 대비하여 학교 앞에 모이기로 사전 합의한 대로 휴교령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나오다가 계엄군과 대결하게 된 것이다.

 

학교 앞에서 계엄군에 쫓겨난 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연좌시위를 벌였고, 경찰대가 최루탄과 곤봉으로 해산시키려 하자 다시 투석전으로 맞섰다. 신군부는 경찰력으로 진압이 실패하자 오후 3시경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착검한 M16소총에 방망이로 무장한 공수부대원들은 남녀 학생들을 붙잡아 마구 난타했다. 격분한 학생들이 보도블록을 깨서 집어던졌다.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는데도 공수부대원들은 붙잡혀온 학생들을 군화발로 짓밟거나, 반항하는 경우 M16소총에 꽂은 대검으로 등과 허벅지를 사정없이 찔러댔다. 피 흘리는 학생들은 굴비처럼 엮어져 군용트럭에 실려갔으며, 통금이 밤 9시로 단축되자 귀가하는 학생·청년들을 닥치는 대로 두들겨패고 연행하고, 만류하는 시민들까지 개머리판으로 마구 가격했다.

 

다음날인 19일 시민들은 술렁대기 시작했다. 금남로 일대에 많은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공수부대원들의 잔인성을 목격한 군중은 참지 못하고 마침내 총궐기에 나섰다.

 

◎ 시위군중 무장투쟁

 

계엄군은 시민·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폭행하고 저항하는 사람은 칼로 옆구리를 찌르거나 등을 X자로 그어대는 등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카톨릭센터·공용터미널 등 광주시내 곳곳에서 시민들을 살상했다. 공수부대원들의 무차별 만행에 시민들은 자신들을 방어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택시 운전사들이 차량을 몰아 도청 광장으로 돌진하다가 공수부대원들의 집중사격을 받아 무참히 살해되는 등 계엄군의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시민들은 인근 경찰서를 습격하여 경찰 예비군용 총기·탄약·폭발물을 빼앗아 무장하여 계엄군과 대치했다. 시민군에 쫓겨 계엄군이 외각으로 퇴각하면서 마구 난사한 총격으로 많은 시민이 살해되었다. 

 

학생들은 시내 치안을 담당하면서 도청을 임시본부로 삼아 시민궐기대회를 열었다. ‘전두환 퇴진’·‘김대중 석방’·‘구속자 석방’ 등의 구호를 외치며 질서있게 대회를 마쳤고 곧 수습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수습위원들은 더 이상의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계엄군의 시내진입을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무기수거에 나섰다.

 

수습노력에도 불구하고 계엄군은 5월 27일 새벽 2시 섬광탄을 쏘면서 다시 시가지를 장악하여 무수한 희생자를 냈다. 피를 부르며 시가지를 장악한 계엄군은 마치 적진을 점령한 것 같은 승리감에 차 있었다고 일본의《아사히신문》은 전했다.

 

많은 총기가 시민들의 손에 쥐어졌는데도 항쟁기간 동안 은행·백화점·금은방 등의 강도사건이 전혀 없었다. 학생들은 치안대를 조직하여 은행과 농협 쌀창고를 지켰다. 총상으로 인한 환자가 급증하여 피가 부족하게 되자 헌혈하는 시민들의 수가 무한히 늘어섰다. 부녀자들은 시위대는 물론 계엄군에게도 음식과 약품을 제공했다.

 

◎ 민주화·반미운동의 기폭제

 

공수부대의 만행과 정부당국의 시민항쟁을 매도하는 언행에 다시 격분한 시민들은 20일 시내버스와 택시 운전사들의 차량시위, 시청접수, 광주문화방송국 방화, 21일 계엄군의 발포에 대항한 자체무장 등 적극적인 자구책을 강구함으로써 시위는 삽시간에 시가전으로 변했다. 21일 오후 6시경 도청을 접수한 시민군은 치안과 방위를 담당할 조직을 편성하는 한편,〈투사회보〉를 발행해 선전활동을 하고 매일 시민궐기대회를 열어 시민의 뜻을 모아 행동에 옮겼다.

 

시민군 사이에 사후보복 금지, 사망자 보상 등의 ‘수습대책위’, 현정부 퇴진, 계엄령 해제, 학살원흉 처단, 구국과도정부수립 등 결사항전 세력의 의견 대립으로 항쟁지도부 간의 균열이 생긴 가운데, 전두환 신군부 강경세력의 조기진압 방침으로 계엄군은 27일 새벽 2시 극비리에 작전을 개시하여 1시간 40여분의 총격전 끝에 도청을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도청을 사수하던 결사대원 다수가 사살되었다.

 

신군부의 5·17비상계엄 확대조치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광주에 투입된 공수특전단의 초강경 유혈진압에 맞서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시민·전라남도민들이 전개한 광주시민항쟁은 아직도 사망자와 부상자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가운데 1980년대 한국의 모든 정치적 사건들의 기폭제가 되었고, 마침내는 6월 민중항쟁의 계기가 되었으며 한국 민주화통일운동에 하나의 준거가 되었다.

 

아울러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쥐고 있던 존 위컴 한국주둔 미국군 총사령관의 5월 22일 광주시민항쟁 진압작전에 투입할 예하 4개 대대 병력의 한국군 차출과 미국이 항공모함과 공중조기경보 통제기를 배치한 사실 등이 논란의 대상이 되어 1980년대 반미감정 확산 및 반미운동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1988년 ‘여소야대’ 국회에서 ‘광주학살사건 진상규명 청문회’가 열렸으나 아직도 정확한 사망자수와 발포 책임자 등은 밝혀지지 않고 있는 상태다. 그래서 “광주의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희생자수는 얼마인가?

 

광주에서 학살된 희생자수는 아직도 미확인 상태다. 계엄군사령부는 1980년 5월 31일 민간인 144명, 군인 22명, 경찰 4명 등 170명이 사망하고 민간인 127명, 군인 109명, 경찰 144명 등 380명이 부상당했다고 발표했다. 

 

1주일 후인 6월 6일에는 민간인 사망자수가 4명이 추가돼 모두 174명이라고 정정해서 발표했고, 7월 22일 다시 군인 1명과 민간인 14명 등 15명이 늘어나 사망자는 189명이라고 발표했다. 1985년 윤성민 국방부장관은 5명을 추가하여 194명이라고 발표했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사망자수이며, 여기에 행방불명자수 47명을 추가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광주세엇 항쟁 진행과정을 겪었거나 지켜본 사람들 가운데 이러한 당국의 발표를 그대로 믿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시체들이 군용트럭에 실려 벽제화장터로 옮겨져 화장되고, 많은 시체들이 암장되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부상자는 당초 발표된 947명 이회에 512명이 추가 신고돼 1천 59명으로 집계되었다.

 

김대중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은 1987년 12월 사망자 수가 1천여명에 이른다고 주장했는데 윌리엄 글라이스틴 전 한국주재 미국대사의 말을 근거로 한 사망자 숫자라고 그 ‘출처’를 밝혔다.

 

◎ 5·18학살자 처리 특별법 제안

 

광주학살사건이 자행되고 15년이 지난 1995년 김영삼 행정부 치하의 검찰은 12·12군사반란사건에 이러 5·18광주학살사건에 대해서도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기소권 없음’을 밝혔다. 이에 학생·교수·종교인들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처벌을 요구하는 서명과 시위가 잇따라 벌어졌다. 9월 정기국회에서 야당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과 ‘12·12 군사반란 및 5·18 내란사건 처리 특별법’ 등 관련 법안을 정기국회에 제안했다.

 

그러던 중 김영삼 대통령이 11월 14일 돌연 과거청산과 역사 바로세우기를 내세우며 지금까지의 입장을 바꿔 12·12 쿠데타와 5·18 광주학살사건 책임자 처벌을 위한 적극적인 방향으로 선회했다.

 

이에 따라 이미 구속 기소된 노태우 전 대통령에 이어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전격 구속되고, 국회에서는 특검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있었으나 12월 19일 회기 마지막 날에 신한국당·새정치국민회의·민주당이 협상을 통해 ‘12·12 군사반란과 5·18 내란관련자 처벌을 위한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안’을 의결 통과시켰다. 국회는 또 앞으로 내란·군사반란·집단학살 등의 범죄를 막기 위해 이들 범죄의 공소시효를 포괄적으로 정지시키는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을 의결했다.

 

정기국회에서 ‘5·18 특별법’이 제정됨으로써 광주학살사건의 수괴로 지목되는 전두환·노태우·정호용 등과 발포·학살 책임자, 하수인 등이 처벌받게 되었으며, 진상규명과 사망자·행방불명자·부상자가 밝혀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유족과 부상자, 관계자 그리고 야당이 주장해온 특별검사제가 채택되지 않음으로써 광주학살사건의 진상이 얼마만큼 정확히 밝혀지게 될지는 미지수라 하겠다.

 

‘5·18 특별법’은 12·12 쿠데타와 5·18 광주학살사건에 대해 1993년 2월 24일까지 공소시효를 정지하는 한편, 12·12 쿠데타와 5·18 광주학살사건에 저항하다 유죄확정을 받은 사람에게 특별재심을 허용했다. 또 단순가담자에 대해서도 처벌할 수 있도록 했다.

 

◎ 5·18 광주학살사건 관련 피의자 명단(1980년 당시 직책 및 계급)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중앙정보부장 서리 겸 국보위상임위원장 전두환 육군 중장

수도경비사령관 겸 국보위원 노태우 육군 소장

특전사령관 정호용 육군 소장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 이희성 육군 중장

제2군사령관 진종채 육군 중장

전투병과교육사령관 소준열 육군 소장

제20사단장 박준병 육군 소장

제7공수여단장 신우식 육군 준장

제11공수여단장 최웅 육군 준장

제3공수여단장 최세창 육군 준장

제20사단 제60연대장 정수화 육군 대령

제20사단 제61연대장 김동진 육군 대령

제20사단 제62연대장 이병년 육군 대령

제7공수여단 제33대대장 권승만 육군 중령

제7공수여단 제35대대장 김일옥 육군 중령

제11공수여단 제61대대장 안부웅 육군 중령

제11공수여단 제62대대장 이제원 육군 중령

제11공수여단 제63대대장 조창구 육군 중령

제3공수여단 제11대대장 임수원 육군 중령

제3공수여단 제12대대장 김완배 육군 중령

제3공수여단 제13대대장 김완배 육군 중령

제3공수여단 제15대대장 박종규 육군 중령

제3공수여단 제16대대장 김길수 육군 중령

제20사단 제60연대 제1대대장 이병우 육군 중령

제20사단 제60연대 제2대대장 윤재만 육군 중령

제20사단 제60연대 제3대대장 길영철 육군 중령

제37사단 감찰참모 차달숙 육군 대령

제20사단 제61연대 제1대대장 정영인 육군 중령

제20사단 제61연대 제2대대장 김형곤 육군 중령

제170훈련단 작전참모 박재철 육군 소령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전략정보과장 강영욱 육군 중령

제20사단 제62연대 제1대대장 오성윤 육군 중령

제20사단 제62연대 제2대대장 이종규 육군 중령

제20사단 제62연대 제3대대장 유효일 육군 중령

육군대학 부교수 김인환 육군 소령

국무총리 겸 국보위원 남덕우

경제기획원장 신병현

외무부장관 노신영

내무부장관 서정화

법무부장관 오탁근

국방부장관 주영복

문교부장관 이규호

문공부장관 이광표

합동참모본부 의장 겸 국보위원 유병현 육군 대장

해군참모총장 김종곤 해군 대장

공군참모총장 윤자중 공군 대장

한미연합사령부 부사령관 백석주 육군 대장

대통령국제정치담당 특보 김경원

제3군사령관 유학성 육군 중장

제1군사령관 윤성민 육군 중장

육군참모차장 황영시 육군 중장

육군사관학교장 차규헌 육군 중장

해군 제2참모장차장 김정호 해군 중장

보안사령부 대공처장 겸 합봉수사본부 합동수사단장 이학봉 육군 대령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허화평 육군 대령

보안사령부 인사처장 허삼수 육군 대령

제33사단장 전주식 육군 소장

제33사단 제101연대장 정진영 육군 대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