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 민족주의사학(韓國近代民族主義史學)의 시조(始祖)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 3.산골 벽지에서 태어나 성균관 박사로 ⑵
참의부2013.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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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아버지에게 교육 받아, 산동 천재로 알려져
단재는 당시의 풍조대로 여섯 살 때부터 할아버지에게서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한문교육을 중심으로 하는 유학교육이었다. 고드미 마을로 이사온 직후부터 할아버지는 마을에 작은 사숙을 열고 두 손자와 마을 아이들을 모아 한문교육을 시작하였다.
할아버지 신성우는 정언(正言)을 지낸 올곧은 낙향 선비였다. 정언은 사간원(司諫院)에 속한 간쟁(諫爭)과 봉박(封駁)의 임무를 맡은 정6품으로서 임금과 대신들에게 직언을 할 수 있는 정직하고 의로운 인재가 맡았던 벼슬이다.
신성우는 영락해진 가세를 다시 일으키고 손자들의 발양을 위하여 이들에게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아들이 일찍 요절하면서 두 손자에 대한 애정과 기대는 더욱 강력해지고 손자들을 향한 교육열은 강화되었다. 성격이 강직하고 엄격하여 손자들이 가르침을 따르지 못할 때는 심한 매질을 하였다. 할아버지의 이와 같은 교육 방침은 남달리 기억력과 이해력이 뛰어난 어린 단재를 채찍질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할아버지의 훈도를 받은 단재는 어렸을 때부터 총기(聰氣)가 넘치는 아이로 성장하였다. 아홉 살 때에『통감(通鑑)』을 해독하고, 열 살 때에는 가장 어렵다는「행시(行詩)」를 지을 만큼 영특하고 뛰어난 문재를 드러냈다. 열두세 살에는『사서삼경(四書三經)』을 독파하여 인근에 널리 문명(文名)을 떨치고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 무렵『조선명신록(朝鮮名臣錄)』·『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등도 읽고 각종 역사책을 섭렵하였다.
고령(高靈) 신씨(申氏)가 칩거한 이 지역은 일명 산동(山東) 지방으로 불렸는데, 당시 함께 공부를 한 단재와 신규식(申圭植)·신백우(申伯雨)를 두고 ‘산동 지방이 낳은 삼재(三才)’라고 불렀다.
"선생(신백우)은 10대 수학 시절부터 단재 및 예관(睨觀:신규식의 호)과 함께 향리인 산동 지방이 나은 삼재라 일컬었는데 이러한명성은 청주 지방만이 아니라 멀리 서울에까지도 알려지고 있었다.
산동 삼재는 단순히 같은 신씨 일가라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동지로서 의기가 투합되어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산동 삼재는 단순히 같은 신씨 집안의 수재였을 분아니라 약간의 나이 차이가 있었다 하더라도 서로 격의 없는 개화자주운동의 동지였다. 한편 청주 지방에서는 일기재(一奇才)로 단재를 치고 산동 삼재에 선생을 비롯 홍명희(洪命憙)와 예관을 지칭했으며 서울에서는 일기재로 역시 단재를 치고 천하 삼재로 선생과 홍명희, 정인보(鄭寅普)를 치기도 했었다."- 신범식,『경부 신백우 선생 평전(畊夫申伯雨先生評傳)』경부 신백우 선생 기념사업회, 35~36쪽.
할아버지의 사숙에서 유학을 공부한 단재는 열일곱 살 무렵에 신백우의 집에 기거하면서 신병휴 밑에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신병휴는 신백우의 아버지다. 단재가 얼마동안 신백우와 함께 그의 집에서 공부를 했는지는 밝혀진 바 없다.
단재는 학업을 계속하면서 신규식의 고향인 가덕면에 세운 문동학당(文東學堂)에 신백우와 함께 강사로 나가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이어서 묵정에 있는 신충식(申忠植)의 집에 세운 산동학교에서 역시 신백우 등과 함께 교사를 지냈다.
단재의 치열한 학문과 표일한 문재(文才)는 열대여섯살 때에 이미 한학의 기본 소양을 두루 갖춘 조숙한 청년 선비로 성장하였다. 그가 사숙에 들어가던 해(여섯살 때)에 지었다는 다음과 같은 습작은 그가 얼마만큼 타고난 시재(詩才)를갖추었는가를 짐작케 한다.
"朝出野而氏 論干地多起
이른 아침 쓰레와 쟁기를 지고 들로 나가네 논을 갈아 나가니 흙덩이가 많이도 일어나네"
그의 할아버지가 쓰레(쇠스랑)와 쟁기를 지고 들로 나가 논을 갈아엎는 것을 보고 이를 주제로 지은 시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쓰레를 ‘而’자로, 쟁기를 ‘氏’자로 써 그 농기구의 형상을 표현하였고, ‘論’자는 논이라는 단어의 음역이고 ‘干’자는 ‘갈다’의 음역이므로 이러한 한자를 빌어 표현한 것이다. 어린이다운 기발한 착상이며 생동감 있는 유머러스한 시상(詩想)임을 알 수 있다.
단재의 소년기의 자료는 아주 빈약한 편이다. 몇 가지 편린을 모아 종합하면, 외모는 병약하고 보잘 것 없지만, 내면으로는불 같이 강직한 성격과 눈빛이 형형한 수재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고리삭은’ 외형과는 달리 인품과 품고 있는 뜻은 후일 심훈이 지켜본 대로 어렸을 적에도 비슷하였을 것이다.
"내 눈이 유치하나마 지척에 그를 대하여 관찰을 거듭할수록, 기우(氣宇)에 또도는 정채(精彩)와 샛별같이 빛나는 안광이며, 추상같이 쌀쌀한 듯하면서도 춘풍으로써 접인(接人)하는 태도가, 평범한 인물이 아닌 것만은 넉넉히 짐작할 수 있었다."- 심훈,「단재와 우당」,『동아일보』 1936년 3월 12~13일,『개정판 단재 신채호 전집별집』411쪽
단재의 어린 시절이 그렇다고 완벽한 ‘모범생’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탈선’도 마다하지 않은 평범한 소년이었다.
"선생은 일생을 통하여 한 번도 의식이 편한 적이 없었지만, 어릴 때부터 거의 콩죽으로 끼니를 이었다. 선생은 훗날 콩죽만 보아도 신물이 난다고 말하곤 했다. 그나마 하루 이틀의 결식이 보통이고, 겨울 엄동설한에도 찬방에서 지내기가 일쑤였다. 선생은 훗날 이 때를 회상하면서 “인간이 도둑질을 못할 것으로 알지만 나도 도둑질을 해 보았소. 고드미 집에서 글 읽을 적에는 한겨울에 3~4일 굶는 것보다 방안에서 견디기가 더 어려워서 하룻밤에는 이웃집 새초가리에 가서 몇 조박 훔쳐다가 불을 땐 일이 가끔 생각하는군”이라고 하였다.
또 한 번은 며칠 동안 식량이 없어서 부득이 부근의 부자에게 가서 사유를 말하고 식량을 꾸어줄 것을 청하였는데, 그 주인이 “지금 손님이 있으니 몇 시간 후에 다시 오라” 하였다. 그 말을 믿고 다시 가 보니 그 주인이 방금 다른 동네로 출타중이라 하였다. 선생이 그 뒤를 쫓아갔으나 또 다른 동네로 간 뒤라 또 그의 뒤를 쫓아가서 그 동네 입구에서 그를 만났다.
선생은 그를 만나자마자 순식간에 그의 감투와 상투를 쥐고 찢어버렸다 한다. 비위에 거슬리거나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는 조금도 참지 못하고 추호도 용서하지 않았다. 북경에 있을 때도 길에서 놀던 어린 아이 하나가 부지깽이로 자기를 가리키며 놀렸다 하여 거의 2~3리를 쫓아가서 혼을 내주는 선생이었다." - 김영호,「단재의 생애와 활동」『나라사랑』제3집, 64~65쪽(1971년)
한국 근대 민족주의사학(韓國近代民族主義史學)의 시조(始祖)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 3.산골 벽지에서 태어나 성균관 박사로 ⑵
● 할아버지에게 교육 받아, 산동 천재로 알려져
단재는 당시의 풍조대로 여섯 살 때부터 할아버지에게서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한문교육을 중심으로 하는 유학교육이었다. 고드미 마을로 이사온 직후부터 할아버지는 마을에 작은 사숙을 열고 두 손자와 마을 아이들을 모아 한문교육을 시작하였다.
할아버지 신성우는 정언(正言)을 지낸 올곧은 낙향 선비였다. 정언은 사간원(司諫院)에 속한 간쟁(諫爭)과 봉박(封駁)의 임무를 맡은 정6품으로서 임금과 대신들에게 직언을 할 수 있는 정직하고 의로운 인재가 맡았던 벼슬이다.
신성우는 영락해진 가세를 다시 일으키고 손자들의 발양을 위하여 이들에게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아들이 일찍 요절하면서 두 손자에 대한 애정과 기대는 더욱 강력해지고 손자들을 향한 교육열은 강화되었다. 성격이 강직하고 엄격하여 손자들이 가르침을 따르지 못할 때는 심한 매질을 하였다. 할아버지의 이와 같은 교육 방침은 남달리 기억력과 이해력이 뛰어난 어린 단재를 채찍질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할아버지의 훈도를 받은 단재는 어렸을 때부터 총기(聰氣)가 넘치는 아이로 성장하였다. 아홉 살 때에『통감(通鑑)』을 해독하고, 열 살 때에는 가장 어렵다는「행시(行詩)」를 지을 만큼 영특하고 뛰어난 문재를 드러냈다. 열두세 살에는『사서삼경(四書三經)』을 독파하여 인근에 널리 문명(文名)을 떨치고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 무렵『조선명신록(朝鮮名臣錄)』·『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등도 읽고 각종 역사책을 섭렵하였다.
고령(高靈) 신씨(申氏)가 칩거한 이 지역은 일명 산동(山東) 지방으로 불렸는데, 당시 함께 공부를 한 단재와 신규식(申圭植)·신백우(申伯雨)를 두고 ‘산동 지방이 낳은 삼재(三才)’라고 불렀다.
"선생(신백우)은 10대 수학 시절부터 단재 및 예관(睨觀:신규식의 호)과 함께 향리인 산동 지방이 나은 삼재라 일컬었는데 이러한명성은 청주 지방만이 아니라 멀리 서울에까지도 알려지고 있었다.
산동 삼재는 단순히 같은 신씨 일가라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동지로서 의기가 투합되어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산동 삼재는 단순히 같은 신씨 집안의 수재였을 분아니라 약간의 나이 차이가 있었다 하더라도 서로 격의 없는 개화자주운동의 동지였다. 한편 청주 지방에서는 일기재(一奇才)로 단재를 치고 산동 삼재에 선생을 비롯 홍명희(洪命憙)와 예관을 지칭했으며 서울에서는 일기재로 역시 단재를 치고 천하 삼재로 선생과 홍명희, 정인보(鄭寅普)를 치기도 했었다."- 신범식,『경부 신백우 선생 평전(畊夫申伯雨先生評傳)』경부 신백우 선생 기념사업회, 35~36쪽.
할아버지의 사숙에서 유학을 공부한 단재는 열일곱 살 무렵에 신백우의 집에 기거하면서 신병휴 밑에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신병휴는 신백우의 아버지다. 단재가 얼마동안 신백우와 함께 그의 집에서 공부를 했는지는 밝혀진 바 없다.
단재는 학업을 계속하면서 신규식의 고향인 가덕면에 세운 문동학당(文東學堂)에 신백우와 함께 강사로 나가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이어서 묵정에 있는 신충식(申忠植)의 집에 세운 산동학교에서 역시 신백우 등과 함께 교사를 지냈다.
단재의 치열한 학문과 표일한 문재(文才)는 열대여섯살 때에 이미 한학의 기본 소양을 두루 갖춘 조숙한 청년 선비로 성장하였다. 그가 사숙에 들어가던 해(여섯살 때)에 지었다는 다음과 같은 습작은 그가 얼마만큼 타고난 시재(詩才)를갖추었는가를 짐작케 한다.
"朝出野而氏 論干地多起
이른 아침 쓰레와 쟁기를 지고 들로 나가네 논을 갈아 나가니 흙덩이가 많이도 일어나네"
그의 할아버지가 쓰레(쇠스랑)와 쟁기를 지고 들로 나가 논을 갈아엎는 것을 보고 이를 주제로 지은 시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쓰레를 ‘而’자로, 쟁기를 ‘氏’자로 써 그 농기구의 형상을 표현하였고, ‘論’자는 논이라는 단어의 음역이고 ‘干’자는 ‘갈다’의 음역이므로 이러한 한자를 빌어 표현한 것이다. 어린이다운 기발한 착상이며 생동감 있는 유머러스한 시상(詩想)임을 알 수 있다.
단재의 소년기의 자료는 아주 빈약한 편이다. 몇 가지 편린을 모아 종합하면, 외모는 병약하고 보잘 것 없지만, 내면으로는불 같이 강직한 성격과 눈빛이 형형한 수재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고리삭은’ 외형과는 달리 인품과 품고 있는 뜻은 후일 심훈이 지켜본 대로 어렸을 적에도 비슷하였을 것이다.
"내 눈이 유치하나마 지척에 그를 대하여 관찰을 거듭할수록, 기우(氣宇)에 또도는 정채(精彩)와 샛별같이 빛나는 안광이며, 추상같이 쌀쌀한 듯하면서도 춘풍으로써 접인(接人)하는 태도가, 평범한 인물이 아닌 것만은 넉넉히 짐작할 수 있었다."- 심훈,「단재와 우당」,『동아일보』 1936년 3월 12~13일,『개정판 단재 신채호 전집별집』411쪽
단재의 어린 시절이 그렇다고 완벽한 ‘모범생’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탈선’도 마다하지 않은 평범한 소년이었다.
"선생은 일생을 통하여 한 번도 의식이 편한 적이 없었지만, 어릴 때부터 거의 콩죽으로 끼니를 이었다. 선생은 훗날 콩죽만 보아도 신물이 난다고 말하곤 했다. 그나마 하루 이틀의 결식이 보통이고, 겨울 엄동설한에도 찬방에서 지내기가 일쑤였다. 선생은 훗날 이 때를 회상하면서 “인간이 도둑질을 못할 것으로 알지만 나도 도둑질을 해 보았소. 고드미 집에서 글 읽을 적에는 한겨울에 3~4일 굶는 것보다 방안에서 견디기가 더 어려워서 하룻밤에는 이웃집 새초가리에 가서 몇 조박 훔쳐다가 불을 땐 일이 가끔 생각하는군”이라고 하였다.
또 한 번은 며칠 동안 식량이 없어서 부득이 부근의 부자에게 가서 사유를 말하고 식량을 꾸어줄 것을 청하였는데, 그 주인이 “지금 손님이 있으니 몇 시간 후에 다시 오라” 하였다. 그 말을 믿고 다시 가 보니 그 주인이 방금 다른 동네로 출타중이라 하였다. 선생이 그 뒤를 쫓아갔으나 또 다른 동네로 간 뒤라 또 그의 뒤를 쫓아가서 그 동네 입구에서 그를 만났다.
선생은 그를 만나자마자 순식간에 그의 감투와 상투를 쥐고 찢어버렸다 한다. 비위에 거슬리거나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는 조금도 참지 못하고 추호도 용서하지 않았다. 북경에 있을 때도 길에서 놀던 어린 아이 하나가 부지깽이로 자기를 가리키며 놀렸다 하여 거의 2~3리를 쫓아가서 혼을 내주는 선생이었다." - 김영호,「단재의 생애와 활동」『나라사랑』제3집, 64~65쪽(1971년)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저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