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 민족주의사학(韓國近代民族主義史學)의 시조(始祖)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 4.「황성신문」의 논객으로 등장 ⑵
참의부2013.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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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 계몽 언론인·사상가로 등장
단재는 성균관 박사직을 사직한 후 잠시 향리에 나와 묵정에서 신백우·신규식 등과 함께 산동학당(山東學堂)을 개설하고 인근 젊은이들을 모아 신교육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때 마침『황성신문(皇城新聞)』의 사장 장지연(張志淵)이 청원군 낭성으로 자부(子婦)를 만나러 왔던 길에 단재를 찾은 것이『황성신문』에 들어거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우연적이고도 개인적인 사정보다는 1900년대 초 서울에서 신채호의 활동이 더욱 그 초빙의 유력한 근거가 되었으리라”는 최홍규 전 경기대학교 교수의 주장에 좀더 신빙성이 실린다.
『황성신문』을 이끌고 있던 장지연이 서울에서 단재의 명성을 익히 듣고 있다가 졸업 후에 그를 찾게 되고, 마침 자부를 만나러 가는 길에 단재를 방문하여 논설위원으로 그를 초빙하게 되었을 것이다.
장지연은 경북 상주 출신으로 1894년 진사가 되고 1897년 아관파천(俄館播遷) 때 임금의 환궁을 요청하는「만인소(萬人疏)」를 기초한 유학자였다. 통정(通政) 등을 지냈으나 1898년 사퇴하고 남궁억(南宮檍)·유근(柳瑾) 등과 더불어 일간 신문『황성신문』을 창간하여 민중계몽에 힘쓰는 한편 독립협회의 사업에도 참여해 이상재·이승만 등과 더불어 만민공동회를 이끌고 있었다. 1902년 3월부터『황성신문』사장직을 맡아서 독립정신 고취에 분투하고 있으면서 단재를 ‘발굴’한 것이다.
구한말의 대표적인 민족지『황성신문』은 장지연과 남궁억·나수연(羅壽淵) 등이 1898년 2월 주 2회간이던『대한황성신문』의 판권을 인수하여『황성신문』으로 제호를 바꾸고 일간 신문으로 창간하였다. 국한문 혼용의 이 신문은 애국적 논필로 정부의 실정과 일제의 침략을 세차게 비판하였다.
당시 쌍벽을 이루었던『제국신문(帝國新聞)』은 한글 전용을 실시하고,『황성신문』은 국한문을 혼용하여『제국신문』을 ‘암컷 신문’,『황성신문』을 ‘수컷 신문’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는 자신의 저서『한국언론사』를 통해 “독자층도 자연히 구분되어 부녀자와 중류 이하의 서민들은『제국신문』을 많이 읽고,『황성신문』은 지식층과 상류층이 주로 읽었다”고 평가하였다.
『황성신문』은 경영난으로 사옥조차 제대로 갖지 못하였다. 창간 당시에는 황토현(현 광화문 사거리의 비각 자리)의 정부 건물인 우순청(右巡廳)을 임시사옥으로 사용하였다. 장지연이 사장에 취임한 지 열흘이 지난 9월 10일 탁지부(度支部)는 사옥으로 쓰고 있던 건물을 내놓으라고 통보하여 임시사무소를 송교(松橋) 동대로(東大路) 남일가(南一家)로 옮겼다가 다시 철도원 옆의 혜정교 남쪽으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다시 종로 보신각 서편의 사옥을 사들여 정착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단재가『황성신문』에 들어간 시기와 재직 일자를 정확히 아는 자료를 찾기 어렵다. 성균관 시절부터 단재와 교우가 깊었던 변영만의 동생 변영로는『황성신문』시절 단재의 에피소드에 대해 그가 목격하고 전문한 바를 회상했는데, 다음은 그 일절이다.
"…또 하루는 의기가 자못 소침한, 방립(方笠)을 쓰고, 포편(布扁)든 단재가 집에 찾아왔다. 딴 때에는 다변한 단재이었건만 그날만은 유난히도 침울하였다. 그때 단재는 내 나이와 동갑인『황성신문』에 집필하여 3, 40원의 월급으로 그달그달 살아가던 중이었다. 한 달에 한 번 타는 월급봉투를 집어넣고 집으로 향하던 차 난데없는 비가 쏟아지어 어느 집 처마 밑에 들어서서 비를 지내고 있노라니 대문이 빠끔 열리며 유두분면(油頭粉面)한 계집이 내다보며 쌩끗쌩끗 “상제님, 비가 드리치는데 밖에 서서 기다리지 말고 집은 누추하나 잠시 들어오셔서 비 그칠 때까지 쉬어가시지요” 하며 끌어들였다.
못이기는 체 들어가서 좌정하고 나니 준비했던 양 어느 듯 주안상이 들어와서 갖은 요악을 피어가며 권하는 바람에 단재는 짜른 술에 몇 잔인지를 마시고 나서 그 뒤는 망각세계였다. 그 통에 주너미 속을 털린 것은 물어보는 것이 부질없는 노릇이 아닌가? 우활하기 짝이 없는 단재에게 있을 법한 일이었다."- 변영로,「국수주의의 항성인 단재 신채호 선생」『개벽』1925년 8월.
●『황성신문』시절의 삽화(揷話)
『매일신보(每日申報)』기자로 언론계에 들어가 해방 후까지 언론인 생활을 한 유광열은『기자 반세기』에서 단재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선생이 신문기자를 시작한 것은1905년 을사년 26세 때에 우리 나라 지사들이 많이 모인『황성신문』사에 입사한 때부터이다. 그때『황성신문』에는 장지연·남궁억·유근·박은식 등 쟁쟁한 네 분이 있었으니, 선생은 그런 노숙한 분들 사이에서 청년 문사로 독하게 밀려오는 일본의 세력과 싸우고 한편으로는 우리 국정의 부패를 통론하였다. 일본이 강요하는 오조약, 이른바 일본이 말하는 보호조약 때에 선생은 장지연 선생과 함께 반대의 급선봉에 섰으므로『황성신문』이 필화로 일시 문을 닫게 되자 선생도 퇴사하였다.『대한매일신보』주필인 양기탁 선생의 간청으로 입사하여 일본의 침략을 통론하고……"- 유광열,「독립과 자존의 기인풍 지사 신채호」,『기자 반세기』
단재와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귀국하여 신간회(新幹會) 총무를 지내고 조선어학회사건(朝鮮語學會事件) 등으로 복역한 바 있는 안재홍(安在鴻)은『조선상고사』의「서문」에서『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시절의 단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약관 적에 이미 사상혁명과 신도덕 수립에 입지한 바 있고……, 서울 평단에 나선 단재는 누를 수 없는 북받치는 정열을 항상 한 자루 붓에 맡기어 사회에 드러내고 써 민족의 심장을 쳐 움직였었다. 그기 필정(筆政)을 잡고 있던『황성신문』과『대한매일신보』는 아마 그 청년 시대의 마음의 집으로 살고 있던, 꺼리지 않는 꿈의 자취라고 하겠다. 그는 국정의 득실을 통론하였고 시류(時流)의 인물의 장단을 포폄하였고, 더군다나 당시 사상의 오탁과 도의의 저하를 분개하여 그 병곤의 밑동인즉, 국가사통이 바로잡히지 못함이 민족정기가 두드러지지 안하였음에 있는 것임을 똑바로 보았을 새, 문득 선유(先儒) 사필의 왜곡됨과 가치의 전도와 시비의 착오됨을 역론하니 이에서 신단재는 당시 엄연한 국민사상개혁의 급선봉이었다…."- 안재홍,『조선상고사』서문,《개정 단재 신채호 전집》上 26쪽 인용.
단재의『황성신문』시절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자료가 드물다. 그리고 그가 1년여 동안『황성신문』에 재직하면서 쓴 글은 여전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 후에 옮긴『대한매일신보』에는 분명 필명으로 쓴 수십 편의 글이 확인된 것과 비교된다. 논설기자로『황성신문』에 들어간 것이기에, 더욱이 격동하는 시기여서 많은 글을 썼을 터인데도 확인되지 않은 것은 아쉬운 일이다.
단재는『황성신문』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봉건적 인습을 청산하고 자기혁신을 꾀한다는 뜻에서 단발을 결행하고, 향리에서는 한자무용론(漢字無用論)을 주장하여 한 때 부로(父老)들에게 배척을 당하기도 할 만큼 신교육·신사상에 열중하였다. 한자를 통해 정통 유학을 배우고 성균관에서 학문을 연마한 사람이 비록 향리에서일망정 한자무용론을 제기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가 얼마나 개화의식에서 앞서가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단재가『황성신문』에서 애국계몽운동을 벌이면서 반일논설을 쓰고 있는 사이에도 일제는 한국 병탄의 공작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1905년 11월 17일에 한국을 ‘보호’한다는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었다. ‘체결’되었다는 말은 어폐가 있다. ‘체결(締結)’은 계약이나 조약 따위를 공식적으로 맺는 것을 말한다. 을사늑약은 ‘공식적’으로 맺은 것이 아니라 비공식, 강박으로 날조된 것이기 때문에 ‘늑약(勒約)’이라고 하는 편이 옳았다. ‘늑약’이란 억지로 맺은 조약을 말한다. 당시 반일운동에 나선 애국지사들은 하나같이 ‘늑체(勒締)’ 또는 ‘을사늑약’이라 불렀다.
을사늑약으로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1905년 11월 초 한국에 온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지휘하는 일본군이 궁궐을 포위한 상황에서 황제에게 조약 체결을 강요하였다. 황제가 이를 거부하자 이토는 대신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직접 가부를 물었다.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이 반대하고, 이완용(李完用)·이근택(李根澤)·이지용(李址鎔)·박제순(朴齊純)·권중현(權重顯)이 찬성하였다. 이들을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 부른다. 을사오적뿐 아니라 ‘을사늑약’이 강제로 맺어지기까지에는 황제의 무능을 비롯하여 정부 대신 모두의 책임이 컸다.
대한제국은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당하고, 서울에는 한국통감부(韓國統監府)가 설치되어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5년 후 1910년 8월 22일 경술병탄늑약(庚戌倂呑勒約)으로 국권이 상실되었지만, 을사늑약으로 국가의 자주권을 이미 빼앗기게 되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강제되고 11월 20일자『황성신문』에 이 사실이 보도되었다. 장지연은「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제목의 논설을 통해 을사늑약의 사실을 알리면서 격렬한 논조로 매국노들과 일본의 침략주의자들을 규탄하였다. “이날에 목놓아 통곡한다”로 번역되는 이 명논설은 장지연이 쓰다가 격정에 못 이겨 붓을 놓고 있는 것을 단재가 후반을 집필한 것으로 전하지만, 입증할 만한 구체적인 사료는 찾지 못한다.
이 논설을 실은『황성신문』은 한국통감부의 사전 검열을 받지 않은 채 새벽에 전격적으로 배포되었다. 백성들은 이 신문을 통해서 청천벽력과도 같은 을사늑약의 소식을 듣고, 더러는 통곡을 하고 더러는 의병이 되어 일제와의 싸움터에 나섰다.
일제는『황성신문』을 압수하고 정간 처분을 내리면서 장지연 사장을 비롯하여 관계자들을 체포·투옥하였다. 장지연은 구속되었다가 64일만인 1906년 2월에 석방되고, 3월에 신문이 복간되었으나 일제의 강력한 탄압으로『황성신문』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역사에서 사라져야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장지연은 투철한 애국언론인이었다.
한국 근대 민족주의사학(韓國近代民族主義史學)의 시조(始祖)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 4.「황성신문」의 논객으로 등장 ⑵
● 청년 계몽 언론인·사상가로 등장
단재는 성균관 박사직을 사직한 후 잠시 향리에 나와 묵정에서 신백우·신규식 등과 함께 산동학당(山東學堂)을 개설하고 인근 젊은이들을 모아 신교육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때 마침『황성신문(皇城新聞)』의 사장 장지연(張志淵)이 청원군 낭성으로 자부(子婦)를 만나러 왔던 길에 단재를 찾은 것이『황성신문』에 들어거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우연적이고도 개인적인 사정보다는 1900년대 초 서울에서 신채호의 활동이 더욱 그 초빙의 유력한 근거가 되었으리라”는 최홍규 전 경기대학교 교수의 주장에 좀더 신빙성이 실린다.
『황성신문』을 이끌고 있던 장지연이 서울에서 단재의 명성을 익히 듣고 있다가 졸업 후에 그를 찾게 되고, 마침 자부를 만나러 가는 길에 단재를 방문하여 논설위원으로 그를 초빙하게 되었을 것이다.
장지연은 경북 상주 출신으로 1894년 진사가 되고 1897년 아관파천(俄館播遷) 때 임금의 환궁을 요청하는「만인소(萬人疏)」를 기초한 유학자였다. 통정(通政) 등을 지냈으나 1898년 사퇴하고 남궁억(南宮檍)·유근(柳瑾) 등과 더불어 일간 신문『황성신문』을 창간하여 민중계몽에 힘쓰는 한편 독립협회의 사업에도 참여해 이상재·이승만 등과 더불어 만민공동회를 이끌고 있었다. 1902년 3월부터『황성신문』사장직을 맡아서 독립정신 고취에 분투하고 있으면서 단재를 ‘발굴’한 것이다.
구한말의 대표적인 민족지『황성신문』은 장지연과 남궁억·나수연(羅壽淵) 등이 1898년 2월 주 2회간이던『대한황성신문』의 판권을 인수하여『황성신문』으로 제호를 바꾸고 일간 신문으로 창간하였다. 국한문 혼용의 이 신문은 애국적 논필로 정부의 실정과 일제의 침략을 세차게 비판하였다.
당시 쌍벽을 이루었던『제국신문(帝國新聞)』은 한글 전용을 실시하고,『황성신문』은 국한문을 혼용하여『제국신문』을 ‘암컷 신문’,『황성신문』을 ‘수컷 신문’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는 자신의 저서『한국언론사』를 통해 “독자층도 자연히 구분되어 부녀자와 중류 이하의 서민들은『제국신문』을 많이 읽고,『황성신문』은 지식층과 상류층이 주로 읽었다”고 평가하였다.
『황성신문』은 경영난으로 사옥조차 제대로 갖지 못하였다. 창간 당시에는 황토현(현 광화문 사거리의 비각 자리)의 정부 건물인 우순청(右巡廳)을 임시사옥으로 사용하였다. 장지연이 사장에 취임한 지 열흘이 지난 9월 10일 탁지부(度支部)는 사옥으로 쓰고 있던 건물을 내놓으라고 통보하여 임시사무소를 송교(松橋) 동대로(東大路) 남일가(南一家)로 옮겼다가 다시 철도원 옆의 혜정교 남쪽으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다시 종로 보신각 서편의 사옥을 사들여 정착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단재가『황성신문』에 들어간 시기와 재직 일자를 정확히 아는 자료를 찾기 어렵다. 성균관 시절부터 단재와 교우가 깊었던 변영만의 동생 변영로는『황성신문』시절 단재의 에피소드에 대해 그가 목격하고 전문한 바를 회상했는데, 다음은 그 일절이다.
"…또 하루는 의기가 자못 소침한, 방립(方笠)을 쓰고, 포편(布扁)든 단재가 집에 찾아왔다. 딴 때에는 다변한 단재이었건만 그날만은 유난히도 침울하였다. 그때 단재는 내 나이와 동갑인『황성신문』에 집필하여 3, 40원의 월급으로 그달그달 살아가던 중이었다. 한 달에 한 번 타는 월급봉투를 집어넣고 집으로 향하던 차 난데없는 비가 쏟아지어 어느 집 처마 밑에 들어서서 비를 지내고 있노라니 대문이 빠끔 열리며 유두분면(油頭粉面)한 계집이 내다보며 쌩끗쌩끗 “상제님, 비가 드리치는데 밖에 서서 기다리지 말고 집은 누추하나 잠시 들어오셔서 비 그칠 때까지 쉬어가시지요” 하며 끌어들였다.
못이기는 체 들어가서 좌정하고 나니 준비했던 양 어느 듯 주안상이 들어와서 갖은 요악을 피어가며 권하는 바람에 단재는 짜른 술에 몇 잔인지를 마시고 나서 그 뒤는 망각세계였다. 그 통에 주너미 속을 털린 것은 물어보는 것이 부질없는 노릇이 아닌가? 우활하기 짝이 없는 단재에게 있을 법한 일이었다."- 변영로,「국수주의의 항성인 단재 신채호 선생」『개벽』1925년 8월.
●『황성신문』시절의 삽화(揷話)
『매일신보(每日申報)』기자로 언론계에 들어가 해방 후까지 언론인 생활을 한 유광열은『기자 반세기』에서 단재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선생이 신문기자를 시작한 것은1905년 을사년 26세 때에 우리 나라 지사들이 많이 모인『황성신문』사에 입사한 때부터이다. 그때『황성신문』에는 장지연·남궁억·유근·박은식 등 쟁쟁한 네 분이 있었으니, 선생은 그런 노숙한 분들 사이에서 청년 문사로 독하게 밀려오는 일본의 세력과 싸우고 한편으로는 우리 국정의 부패를 통론하였다. 일본이 강요하는 오조약, 이른바 일본이 말하는 보호조약 때에 선생은 장지연 선생과 함께 반대의 급선봉에 섰으므로『황성신문』이 필화로 일시 문을 닫게 되자 선생도 퇴사하였다.『대한매일신보』주필인 양기탁 선생의 간청으로 입사하여 일본의 침략을 통론하고……"- 유광열,「독립과 자존의 기인풍 지사 신채호」,『기자 반세기』
단재와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귀국하여 신간회(新幹會) 총무를 지내고 조선어학회사건(朝鮮語學會事件) 등으로 복역한 바 있는 안재홍(安在鴻)은『조선상고사』의「서문」에서『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시절의 단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약관 적에 이미 사상혁명과 신도덕 수립에 입지한 바 있고……, 서울 평단에 나선 단재는 누를 수 없는 북받치는 정열을 항상 한 자루 붓에 맡기어 사회에 드러내고 써 민족의 심장을 쳐 움직였었다. 그기 필정(筆政)을 잡고 있던『황성신문』과『대한매일신보』는 아마 그 청년 시대의 마음의 집으로 살고 있던, 꺼리지 않는 꿈의 자취라고 하겠다. 그는 국정의 득실을 통론하였고 시류(時流)의 인물의 장단을 포폄하였고, 더군다나 당시 사상의 오탁과 도의의 저하를 분개하여 그 병곤의 밑동인즉, 국가사통이 바로잡히지 못함이 민족정기가 두드러지지 안하였음에 있는 것임을 똑바로 보았을 새, 문득 선유(先儒) 사필의 왜곡됨과 가치의 전도와 시비의 착오됨을 역론하니 이에서 신단재는 당시 엄연한 국민사상개혁의 급선봉이었다…."- 안재홍,『조선상고사』서문,《개정 단재 신채호 전집》上 26쪽 인용.
단재의『황성신문』시절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자료가 드물다. 그리고 그가 1년여 동안『황성신문』에 재직하면서 쓴 글은 여전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 후에 옮긴『대한매일신보』에는 분명 필명으로 쓴 수십 편의 글이 확인된 것과 비교된다. 논설기자로『황성신문』에 들어간 것이기에, 더욱이 격동하는 시기여서 많은 글을 썼을 터인데도 확인되지 않은 것은 아쉬운 일이다.
단재는『황성신문』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봉건적 인습을 청산하고 자기혁신을 꾀한다는 뜻에서 단발을 결행하고, 향리에서는 한자무용론(漢字無用論)을 주장하여 한 때 부로(父老)들에게 배척을 당하기도 할 만큼 신교육·신사상에 열중하였다. 한자를 통해 정통 유학을 배우고 성균관에서 학문을 연마한 사람이 비록 향리에서일망정 한자무용론을 제기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가 얼마나 개화의식에서 앞서가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단재가『황성신문』에서 애국계몽운동을 벌이면서 반일논설을 쓰고 있는 사이에도 일제는 한국 병탄의 공작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1905년 11월 17일에 한국을 ‘보호’한다는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었다. ‘체결’되었다는 말은 어폐가 있다. ‘체결(締結)’은 계약이나 조약 따위를 공식적으로 맺는 것을 말한다. 을사늑약은 ‘공식적’으로 맺은 것이 아니라 비공식, 강박으로 날조된 것이기 때문에 ‘늑약(勒約)’이라고 하는 편이 옳았다. ‘늑약’이란 억지로 맺은 조약을 말한다. 당시 반일운동에 나선 애국지사들은 하나같이 ‘늑체(勒締)’ 또는 ‘을사늑약’이라 불렀다.
을사늑약으로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1905년 11월 초 한국에 온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지휘하는 일본군이 궁궐을 포위한 상황에서 황제에게 조약 체결을 강요하였다. 황제가 이를 거부하자 이토는 대신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직접 가부를 물었다.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이 반대하고, 이완용(李完用)·이근택(李根澤)·이지용(李址鎔)·박제순(朴齊純)·권중현(權重顯)이 찬성하였다. 이들을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 부른다. 을사오적뿐 아니라 ‘을사늑약’이 강제로 맺어지기까지에는 황제의 무능을 비롯하여 정부 대신 모두의 책임이 컸다.
대한제국은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당하고, 서울에는 한국통감부(韓國統監府)가 설치되어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5년 후 1910년 8월 22일 경술병탄늑약(庚戌倂呑勒約)으로 국권이 상실되었지만, 을사늑약으로 국가의 자주권을 이미 빼앗기게 되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강제되고 11월 20일자『황성신문』에 이 사실이 보도되었다. 장지연은「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제목의 논설을 통해 을사늑약의 사실을 알리면서 격렬한 논조로 매국노들과 일본의 침략주의자들을 규탄하였다. “이날에 목놓아 통곡한다”로 번역되는 이 명논설은 장지연이 쓰다가 격정에 못 이겨 붓을 놓고 있는 것을 단재가 후반을 집필한 것으로 전하지만, 입증할 만한 구체적인 사료는 찾지 못한다.
이 논설을 실은『황성신문』은 한국통감부의 사전 검열을 받지 않은 채 새벽에 전격적으로 배포되었다. 백성들은 이 신문을 통해서 청천벽력과도 같은 을사늑약의 소식을 듣고, 더러는 통곡을 하고 더러는 의병이 되어 일제와의 싸움터에 나섰다.
일제는『황성신문』을 압수하고 정간 처분을 내리면서 장지연 사장을 비롯하여 관계자들을 체포·투옥하였다. 장지연은 구속되었다가 64일만인 1906년 2월에 석방되고, 3월에 신문이 복간되었으나 일제의 강력한 탄압으로『황성신문』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역사에서 사라져야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장지연은 투철한 애국언론인이었다.
단재는『황성신문』의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역할을 맞는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저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