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을 굽혀 이마에 얹고는 '후우' 하고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뱉는다. 몸은 온통 땀 범벅이다. 교복재킷조차 벗지않고 잠들어 버린탓에 흥건히 젖어버린 옷의 찝찝함은 이루 말할수 없었다. 오감으로 느껴졌던 너무도 생생한 꿈의 기억때문인지 정신적으로도 매우 찝찝해 견딜수 없던 나는 침대위에서 벌떡일어나 거실로 몸을 옮겼다. 물론, 땀이 찬 재킷을 벗어 던지는것도 있지 않았다. 냉장고에서 2리터짜리 페트병 생수를 꺼내 뚜껑을 열기무섭게 입으로 가져가 단숨에 들이킨다.
'꿀꺽 꿀꺽 꿀꺽 꿀꺽 꿀꺽'
목넘기는 소리가 우렁차기 그지 없다. 이 기세라면 10리터도 원샷 할수 있을것만 같았던 내 생각과 달리 난 꽉 차있던 물의 3분의 1을 들이켰을때, 페트병을 내려놓았다.
"후, 이제야 살겠네."
열렸던 냉장고문이 힘차게 '탕' 하며 닫힌다. 걸음을 옮겨 방으로 들어간 난 그제서야 어느덧 해가 저물어 있었다는 걸 체감했다. 정말이지 둔감한 녀석임이 분명했다 나란놈은. 손목에 차여있는 전자시계로 시선을 내리깐다.
[07:20]
어림잡아도 6시간은 잠들어 있던 모양이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나른한 오후라서 였을까? 허겁지겁 교복재킷과 셔츠 그리고 바지를 벗어던진다. 그리곤 옷장문을 열어 간편한 녹색바탕의 '어디둬쓰' 삼선 츄리닝 세트를 꺼내 몸에 걸치는 손이 분주하다. 역시 집에선 트레이닝복만한게 없지. 가볍게 피식 웃는 나였다. 옷장 문을 닫으려는 찰나 재킷주머니에 있는 지갑이 떠올라 재빨리 움켜쥔다. 침대위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휴대폰을 마저 챙기며 빠른걸음으로 집을 나선다. 누나가 집에 도착할 시간이 거의 다되가고 있었다. 어묵탕을 끓여놓는다 철썩같이 약속했기에 서둘러 마트로 가 장을 봐올 셈이었다. 검은색 '니 밸런스' 신발을 구겨 신는다. 왠일인지 발이 잘 맞질 않는다. 괜시리 별것도 아닌 일로 짜증이 솟구치는 순간이었다. 아마도 기분나쁜 꿈 때문이리라. 억지로 발을 끼워넣고는 문을 열었다. 서늘한 공기가 집안의 미적지근한 공기와 손벽이라도 치는것 같다. 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래, 꿈은 꿈일 뿐이야.'
[나이트메어:Doublegore] 4부 - 인연의 고리
어둠이 찾아온 골목길은 제법 을씨년스러웠다. 저녁 8시도 안되었지만 유독 이동네는 그랬다. 뭐 새삼스러울 건 없었지만 왠일인지 지금은 꿈의 기억때문인지 분위기에 압도되어있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꼬마 아이들이 엄마 손을 붙잡고 뛰어놀던 아기자기한 놀이터가 그 어떤 공포 영화에 등장하는 흉가보다 음침해, 낮설게만 느껴졌다. 서둘러 좁은 골목길을 빠져 나와 큰 대로변에 들어섰다.
[부아앙]
쌩쌩 달리는 차들의 엔진소리가 고막을 진동시킨다. 무미건조한 그 소리를 흘려들으며 앙상한 가로수들을 하나 하나 뒤로한채 걸음을 옮기고 있을때였다.
[민기야!]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에 맥없이 고개를 돌아보았다.
[민기 맞네!]
누나였다. 누나는 택시에서 단숨에 몸을 빼곤 내게 걸어오는 중이었다.
'아 어묵탕 끓여놨어야 되는데...'
잠시동안 어묵탕의 미련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을 무렵 이내 내 지척까지 도착한 누나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어묵탕은 다음 기회로 밀어야 될것 같았다.
"집에 안있고 어디가?"
"마트에서 장좀 보려고...아, 어묵탕은 미안...깜빡 잠들어 버렸네."
"메시지 못봤어?! 아까 '따가워톡' 답장 보냈는데."
"응?"
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노란색 '따가워톡' 아이콘을 살짝 눌렀다. 이내 누나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하는 나.
-AM 11:07 : 우와 누나 걱정해주는건 역시 우리 동생밖에 없네 ㅋㅋ 그럼 오늘도 화이팅^^-
-PM 15:11 : 누나 오늘 최대한 일찍갈테니까 어묵탕 끓이지 말아봐. 같이 마트가겡!!-
누나에게 두개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학교에선 수현의 일로, 집에와선 정신없이 잠만 자느라 미처 확인하지 못한것이었다. 평소라면 수시로 휴대폰을 들여다 보는 나였지만 일어나서 바로 확인하지 못한건 아마...이것도 그 기분나쁜 꿈 탓이겠지? 괜시리 모든 일의 책임을 꿈으로 떠넘기는지도 몰랐다.
"답장 없길래, 자고 있는줄 알았는데."
"미안, 휴대폰을 못봤네..."
"휴대폰을 붙잡고 사는애가...무슨일 있었어?"
"일은 무슨, 그럼 빨랑 마트가 가자!"
미묘하게 달라진 누나의 표정을 읽을수 있던 난 재빨리 누나 손을 낚아채 앞장서서 걷는다. 역시 오랜시간 함께 살아온 가족 답다. 사소한 것 하나에서 그 사람의 작은 변화등을 이렇게 예리하게 캐치하는것을 보면. 그렇게 누난 뭔가 석연치 않다는듯한 눈을 하곤 내게 이끌려 마지못해 천천히 발을 떼었다.
마트안은 거리와는 달리 사람들로 북적였다. 날씨가 추운탓에 아무래도 실내를 선호하는 모양이었다. 동네 꼬마들의 사탕사달라고 칭얼거리는 푸념섞인 말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역시 시끄러운 꼬마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카트에 두부 콩나물등의 반찬거리와 우유를 집어넣고 있을무렵 저만치 양손에 '밤이슬' 두병을 손에쥐고 씨익 웃는 누나가 보였다.
'아휴 술쟁이'
물론 입밖에 꺼내진 않았다. 직장에 다녀보진 못했지만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스트레스가 많이 쌓인다는걸 대충이나마 짐작하던 나였기에 누나를 이해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묵탕이 주 목적이었는데 정작 수북히 쌓인 카트안에 어묵은 존재하지 않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에 난 피식 웃었다.
"더 필요한건 없어?"
어느새 '드라이기' 1.6리터 패트병까지 들고와 카트에 넣으며 누나가 물었다.
"누나...아침도 안먹으면서 저녁은 제발 밥좀 먹자."
"어머, 애는! 밥은 집에 있잖아."
무언의 압박이란 이런것일까? 입은 웃고있지만 눈엔 '누나가 술좀 샀기로서니 설마 지금 기분이 언쩒기라도 하다는거야?' 라고 쓰여있었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순간이었다.
"아니...딱히..."
"그럼 가자!"
"...에휴"
카트를 뺏다시피 낚아채곤 앞장서는 누나. 오늘 저녁도 제대로 된 밥을 먹기는 글른것 같아 마음이 씁씁해졌다. 맥이 빠진채 누나를 따라 카운터로 향하고 있던 난 순간 걸음을 멈출수 밖에 없었다.
"정혜?"
저만치 과자와 라면등이 쌓여있는 코너한편에 짧은 미니스커트 차림의 그녀가 누군가를 향해 활짝 웃고 있었다. 가슴의 떨림이 시작되어 어느덧 불쾌한 긴장감으로 바뀌었을때 난 코너 끝에서 불쑥 튀어나오며 그녀의 손을 잡는 낮선 남자를 확인할수 있었다. 대충 30대 초반쯤 되었을까? 검은색 트렌치코트에 아이보리색 셔츠를 받쳐입은 사내. 키는 나보다 한뼘정도 더 큰것 같았고, 얼핏봐도 군더더기 없이 잘 다져진 몸매라인은 옷 맵시를 한껏 돋보여 주고 있었다. 거기다 진한 눈썹에 서글서글한 눈을 가진 갸름한 얼굴은 부드러운 인상을 자아내, 제법 호남형의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내의 외모에도 불구하고 난 왠지모르게 그가 기분나빴다.
'누구지? 오빠? 아니면 남자친구?'
남자친구라 하기엔 나이차가 너무 많이난다. 정확한 나이는 몰랐어도 사내에게서 풍기는 성숙미 하나만큼은 확실히 느낄수 있었으니까. 그럼 오빠인가? 그렇다면 지금껏 그녀를 주도면밀하게 관찰 했던 내가 모를턱이 없다. (나 스토커 아니다. 말이 주도면밀이지 그냥 우연을 가장해 자주 봤을뿐. 아 그게 이미 스토커인가...)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던 나와 그 사내의 눈이 마주치는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내는 정혜의 귓가에 입을 대고 뭐라고 속삭인다. 이윽고 이쪽을 돌아보는 그녀. 그녀는 살짝 놀랐는지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이고는 내게 다가왔다. 물론 그 사내도 같이.
"강민기 빨리 안오고 뭐해!"
언제 다가왔는지 뒤에서 내 등을 '툭' 치며 묻는 누나의 의아한 목소리에 난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본다.
"뭐해. 멍하게 서서."
"아, 그게..."
누나를 보고 말끝을 흐리며 무슨 죄라도 지은것처럼 괜시리 당황하는 나. 그때였다. 내 귓가로 솜사탕같이 달달한 그녀의 음성이 파고든것은.
"민기 였구나."
사내와 연인처럼 다정하게 손을 꼬옥 붙잡고 다가와 내뱉은 정혜의 첫마디였다. 난 그런 정혜와 옆에 사내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을뿐 당황한 탓인지 머뭇거리고 있었다.
"아, 이쪽은 남...아니, 친척오빠."
그제서야 내 눈을 의식한듯 사내의 손에서 황급히 손을 떼며 입을 여는 그녀. 거짓말이 서툰것을 보니 그녀 역시 당황한듯 보였다. 그러나 사내는 달랐다.
"안녕하세요. 정혜 오빠 '박선우'라고 합니다. 정혜 친구인가 봐요?"
정혜와 달리 너무도 침착한 이 사내는 친근하게 웃어보이며 자기 소개까지 한다. 왠지 모르게 사내의 눈을 가까이서 마주하니 알수없는 위화감이 들었다. 덕분에 순간적으로 말까지 더듬는 나였다.
"아...안녕하세요...강, 강...민기라고 해요..."
"정혜 친구라니 반갑네요. 후후"
"우리반에 전학온 얘야."
"아, 같은반이야?!"
바보같은 내 소개가 끝나기 무섭게 그녀가 같은반이라며 내 소개를 거들었다. 그러자 사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금새 촉촉하게 젖어 들어간다. 그 눈은 마치 텔레비젼에서 봐오던 슬픈 드라마속 주인공의 그것과 흡사해 보였다. 그리곤 돌연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하는 사내. 짜여진 각본같은 그 자연스러움에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올렸다.
'차갑다'
사내의 손을 잡았을때 가장먼저 드는 생각이었다. 밖에 날씨가 차니 그럴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이건 그런 의미의 차가움이 아니었다. 뭘까? 말로 형용할수 없는 이 이질감은.
"우리 정혜가 신세 많이 진다고..."
"아, 예?"
"말 안해도 다 알아요...얘가 워낙 내성적이라서..."
"딱히..."
'전학은 내가왔는데 신세를 졌어도 내가졌지, 대체 뭐라는 거냐 이놈의 정체모를 놈은.'
사내는 내 말은 귓등으로 듣는건지 전혀 개의치 않고 주구장창 입을 놀렸다.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였다. 옆에서 그만하라고 사내의 옷깃을 잡아끄는 정혜가 보인다. 하지만 사내는 아무래도 멈출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옆에 분은...? 여자친구인가요? 여자친구분이 미인이시군요. 후후"
그제서야 누나와 같이왔다는걸 깨달은 난 급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보다 누나가 조금 더 빨랐다.
'우리 누...?'
"어머, 저 민기 누나예요."
"누나셨습니까?! 아, 이거 초면에 실례했군요. 너무 동안이셔서 같은 고등학생인줄 알았지 뭡니까...죄송합니다."
"아니예요, 그런말 종종 들어요 호호호."
목소리에서 난 어렵지 않게 알수 있었다. 누나가 지금 이 남자앞에서 상당히 들떠 있다는 것을. 이런 들떠있는 목소리는 3년전 이전 남자친구와 전화통화 하는걸 우연히 들었던 이후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런 누나의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밝은 애교섞인 목소리에도 내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그 이유가 저 기분나쁜 사내 때문이었으니까.
"민기군은 좋겠다. 이렇게 이쁜 누나도 있고. 이거 부러워 지는데? 후후"
"아, 부끄럽게 왜그러세요. 호호호"
순간 '개근 콘서트'의 '불편할뻔한 진실' 에서 나오는 한마디가 뇌리를 스친다. [이것들, 왜이러는 걸까요!?]. 한동안 그렇게 누나와 사내가 대화를 나눌동안 난 그저 멍하니 정혜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현의 말도 있었고 생생한 꿈의 기억탓에 섣불리 말을 섞기가 불편해진 탓이었다. 그나마 다행인건지 정혜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대신에 우리누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그녀. 우리누나를 알고 있는건가? 문득 의아함이 들었지만 별로 개의치 않기로 했다. 알면 어떻고 또 모르면 또 어떤가. 지금의 내겐 수현도 그녀도 전부 썩 내키지 않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제야 좀 갈 마음이 생겼는지 사내가 누나한테 명함 한장을 건내며 씨익 웃는다.
"아무튼 다음에 또 뵐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럼 저희는 이만 실례하도록 하겠습니다. 민기군도 또 보자!"
"네, 선우씨. 그럼 들어가세요!"
정말이지 넉살좋게 어느새 말까지 놓는 사내였다. 내 표정이 살짝 일그러진걸 아는지 모르는지 누나는 사내의 이름까지 불러가며 베시시 웃는다.
'에휴.'
사내가 걸음을 옮기자 정혜 역시 내게 '학교에서 봐' 라는 한마디를 남기곤 자리를 벗어났다. 난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화답한 후 멀어저 가는 둘을 멍하니 바라본다. 돌연 이쪽을 돌아보는 박선우란 사내. 뭐가 그렇게 기쁜지 입꼬리는 여전히 내려올줄 모른다. 자연스럽게 사내와 눈이 마주친다. 오기일까? 난 왠지 시선을 피하기가 꺼려져 더욱 눈에 힘을 주었다.
나이트메어:Double Gore 4부
"꿈...이었구나..."
팔을 굽혀 이마에 얹고는 '후우' 하고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뱉는다. 몸은 온통 땀 범벅이다. 교복재킷조차 벗지않고 잠들어 버린탓에 흥건히 젖어버린 옷의 찝찝함은 이루 말할수 없었다.
오감으로 느껴졌던 너무도 생생한 꿈의 기억때문인지 정신적으로도 매우 찝찝해 견딜수 없던 나는 침대위에서 벌떡일어나 거실로 몸을 옮겼다. 물론, 땀이 찬 재킷을 벗어 던지는것도
있지 않았다. 냉장고에서 2리터짜리 페트병 생수를 꺼내 뚜껑을 열기무섭게 입으로 가져가 단숨에 들이킨다.
'꿀꺽 꿀꺽 꿀꺽 꿀꺽 꿀꺽'
목넘기는 소리가 우렁차기 그지 없다. 이 기세라면 10리터도 원샷 할수 있을것만 같았던 내 생각과 달리 난 꽉 차있던 물의 3분의 1을 들이켰을때, 페트병을 내려놓았다.
"후, 이제야 살겠네."
열렸던 냉장고문이 힘차게 '탕' 하며 닫힌다. 걸음을 옮겨 방으로 들어간 난 그제서야 어느덧 해가 저물어 있었다는 걸 체감했다. 정말이지 둔감한 녀석임이 분명했다 나란놈은.
손목에 차여있는 전자시계로 시선을 내리깐다.
[07:20]
어림잡아도 6시간은 잠들어 있던 모양이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나른한 오후라서 였을까? 허겁지겁 교복재킷과 셔츠 그리고 바지를 벗어던진다. 그리곤 옷장문을 열어 간편한 녹색바탕의 '어디둬쓰'
삼선 츄리닝 세트를 꺼내 몸에 걸치는 손이 분주하다. 역시 집에선 트레이닝복만한게 없지. 가볍게 피식 웃는 나였다. 옷장 문을 닫으려는 찰나 재킷주머니에 있는 지갑이 떠올라 재빨리 움켜쥔다.
침대위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휴대폰을 마저 챙기며 빠른걸음으로 집을 나선다. 누나가 집에 도착할 시간이 거의 다되가고 있었다. 어묵탕을 끓여놓는다 철썩같이 약속했기에 서둘러 마트로 가
장을 봐올 셈이었다. 검은색 '니 밸런스' 신발을 구겨 신는다. 왠일인지 발이 잘 맞질 않는다. 괜시리 별것도 아닌 일로 짜증이 솟구치는 순간이었다. 아마도 기분나쁜 꿈 때문이리라.
억지로 발을 끼워넣고는 문을 열었다. 서늘한 공기가 집안의 미적지근한 공기와 손벽이라도 치는것 같다. 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래, 꿈은 꿈일 뿐이야.'
[나이트메어:Doublegore] 4부 - 인연의 고리
어둠이 찾아온 골목길은 제법 을씨년스러웠다. 저녁 8시도 안되었지만 유독 이동네는 그랬다. 뭐 새삼스러울 건 없었지만 왠일인지 지금은 꿈의 기억때문인지 분위기에 압도되어있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꼬마 아이들이 엄마 손을 붙잡고 뛰어놀던 아기자기한 놀이터가 그 어떤 공포 영화에 등장하는 흉가보다 음침해, 낮설게만 느껴졌다. 서둘러 좁은 골목길을 빠져 나와 큰 대로변에
들어섰다.
[부아앙]
쌩쌩 달리는 차들의 엔진소리가 고막을 진동시킨다. 무미건조한 그 소리를 흘려들으며 앙상한 가로수들을 하나 하나 뒤로한채 걸음을 옮기고 있을때였다.
[민기야!]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에 맥없이 고개를 돌아보았다.
[민기 맞네!]
누나였다. 누나는 택시에서 단숨에 몸을 빼곤 내게 걸어오는 중이었다.
'아 어묵탕 끓여놨어야 되는데...'
잠시동안 어묵탕의 미련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을 무렵 이내 내 지척까지 도착한 누나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어묵탕은 다음 기회로 밀어야 될것 같았다.
"집에 안있고 어디가?"
"마트에서 장좀 보려고...아, 어묵탕은 미안...깜빡 잠들어 버렸네."
"메시지 못봤어?! 아까 '따가워톡' 답장 보냈는데."
"응?"
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노란색 '따가워톡' 아이콘을 살짝 눌렀다. 이내 누나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하는 나.
-AM 11:07 : 우와 누나 걱정해주는건 역시 우리 동생밖에 없네 ㅋㅋ 그럼 오늘도 화이팅^^-
-PM 15:11 : 누나 오늘 최대한 일찍갈테니까 어묵탕 끓이지 말아봐. 같이 마트가겡!!-
누나에게 두개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학교에선 수현의 일로, 집에와선 정신없이 잠만 자느라 미처 확인하지 못한것이었다. 평소라면 수시로 휴대폰을 들여다 보는 나였지만 일어나서
바로 확인하지 못한건 아마...이것도 그 기분나쁜 꿈 탓이겠지? 괜시리 모든 일의 책임을 꿈으로 떠넘기는지도 몰랐다.
"답장 없길래, 자고 있는줄 알았는데."
"미안, 휴대폰을 못봤네..."
"휴대폰을 붙잡고 사는애가...무슨일 있었어?"
"일은 무슨, 그럼 빨랑 마트가 가자!"
미묘하게 달라진 누나의 표정을 읽을수 있던 난 재빨리 누나 손을 낚아채 앞장서서 걷는다. 역시 오랜시간 함께 살아온 가족 답다. 사소한 것 하나에서 그 사람의 작은 변화등을 이렇게 예리하게
캐치하는것을 보면. 그렇게 누난 뭔가 석연치 않다는듯한 눈을 하곤 내게 이끌려 마지못해 천천히 발을 떼었다.
마트안은 거리와는 달리 사람들로 북적였다. 날씨가 추운탓에 아무래도 실내를 선호하는 모양이었다. 동네 꼬마들의 사탕사달라고 칭얼거리는 푸념섞인 말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역시 시끄러운 꼬마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카트에 두부 콩나물등의 반찬거리와 우유를 집어넣고 있을무렵 저만치 양손에 '밤이슬' 두병을 손에쥐고 씨익 웃는 누나가 보였다.
'아휴 술쟁이'
물론 입밖에 꺼내진 않았다. 직장에 다녀보진 못했지만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스트레스가 많이 쌓인다는걸 대충이나마 짐작하던 나였기에 누나를 이해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묵탕이 주 목적이었는데
정작 수북히 쌓인 카트안에 어묵은 존재하지 않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에 난 피식 웃었다.
"더 필요한건 없어?"
어느새 '드라이기' 1.6리터 패트병까지 들고와 카트에 넣으며 누나가 물었다.
"누나...아침도 안먹으면서 저녁은 제발 밥좀 먹자."
"어머, 애는! 밥은 집에 있잖아."
무언의 압박이란 이런것일까? 입은 웃고있지만 눈엔 '누나가 술좀 샀기로서니 설마 지금 기분이 언쩒기라도 하다는거야?' 라고 쓰여있었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순간이었다.
"아니...딱히..."
"그럼 가자!"
"...에휴"
카트를 뺏다시피 낚아채곤 앞장서는 누나. 오늘 저녁도 제대로 된 밥을 먹기는 글른것 같아 마음이 씁씁해졌다. 맥이 빠진채 누나를 따라 카운터로 향하고 있던 난 순간 걸음을 멈출수 밖에 없었다.
"정혜?"
저만치 과자와 라면등이 쌓여있는 코너한편에 짧은 미니스커트 차림의 그녀가 누군가를 향해 활짝 웃고 있었다. 가슴의 떨림이 시작되어 어느덧 불쾌한 긴장감으로 바뀌었을때 난 코너 끝에서
불쑥 튀어나오며 그녀의 손을 잡는 낮선 남자를 확인할수 있었다. 대충 30대 초반쯤 되었을까? 검은색 트렌치코트에 아이보리색 셔츠를 받쳐입은 사내. 키는 나보다 한뼘정도 더 큰것 같았고,
얼핏봐도 군더더기 없이 잘 다져진 몸매라인은 옷 맵시를 한껏 돋보여 주고 있었다. 거기다 진한 눈썹에 서글서글한 눈을 가진 갸름한 얼굴은 부드러운 인상을 자아내, 제법 호남형의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내의 외모에도 불구하고 난 왠지모르게 그가 기분나빴다.
'누구지? 오빠? 아니면 남자친구?'
남자친구라 하기엔 나이차가 너무 많이난다. 정확한 나이는 몰랐어도 사내에게서 풍기는 성숙미 하나만큼은 확실히 느낄수 있었으니까. 그럼 오빠인가? 그렇다면 지금껏 그녀를 주도면밀하게 관찰
했던 내가 모를턱이 없다. (나 스토커 아니다. 말이 주도면밀이지 그냥 우연을 가장해 자주 봤을뿐. 아 그게 이미 스토커인가...)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던 나와 그 사내의 눈이
마주치는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내는 정혜의 귓가에 입을 대고 뭐라고 속삭인다. 이윽고 이쪽을 돌아보는 그녀.
그녀는 살짝 놀랐는지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이고는 내게 다가왔다. 물론 그 사내도 같이.
"강민기 빨리 안오고 뭐해!"
언제 다가왔는지 뒤에서 내 등을 '툭' 치며 묻는 누나의 의아한 목소리에 난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본다.
"뭐해. 멍하게 서서."
"아, 그게..."
누나를 보고 말끝을 흐리며 무슨 죄라도 지은것처럼 괜시리 당황하는 나. 그때였다. 내 귓가로 솜사탕같이 달달한 그녀의 음성이 파고든것은.
"민기 였구나."
사내와 연인처럼 다정하게 손을 꼬옥 붙잡고 다가와 내뱉은 정혜의 첫마디였다. 난 그런 정혜와 옆에 사내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을뿐 당황한 탓인지 머뭇거리고 있었다.
"아, 이쪽은 남...아니, 친척오빠."
그제서야 내 눈을 의식한듯 사내의 손에서 황급히 손을 떼며 입을 여는 그녀. 거짓말이 서툰것을 보니 그녀 역시 당황한듯 보였다. 그러나 사내는 달랐다.
"안녕하세요. 정혜 오빠 '박선우'라고 합니다. 정혜 친구인가 봐요?"
정혜와 달리 너무도 침착한 이 사내는 친근하게 웃어보이며 자기 소개까지 한다. 왠지 모르게 사내의 눈을 가까이서 마주하니 알수없는 위화감이 들었다. 덕분에 순간적으로 말까지 더듬는 나였다.
"아...안녕하세요...강, 강...민기라고 해요..."
"정혜 친구라니 반갑네요. 후후"
"우리반에 전학온 얘야."
"아, 같은반이야?!"
바보같은 내 소개가 끝나기 무섭게 그녀가 같은반이라며 내 소개를 거들었다. 그러자 사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금새 촉촉하게 젖어 들어간다. 그 눈은 마치 텔레비젼에서 봐오던 슬픈 드라마속
주인공의 그것과 흡사해 보였다. 그리곤 돌연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하는 사내. 짜여진 각본같은 그 자연스러움에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올렸다.
'차갑다'
사내의 손을 잡았을때 가장먼저 드는 생각이었다. 밖에 날씨가 차니 그럴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이건 그런 의미의 차가움이 아니었다. 뭘까? 말로 형용할수 없는 이 이질감은.
"우리 정혜가 신세 많이 진다고..."
"아, 예?"
"말 안해도 다 알아요...얘가 워낙 내성적이라서..."
"딱히..."
'전학은 내가왔는데 신세를 졌어도 내가졌지, 대체 뭐라는 거냐 이놈의 정체모를 놈은.'
사내는 내 말은 귓등으로 듣는건지 전혀 개의치 않고 주구장창 입을 놀렸다.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였다. 옆에서 그만하라고 사내의 옷깃을 잡아끄는 정혜가 보인다. 하지만 사내는
아무래도 멈출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옆에 분은...? 여자친구인가요? 여자친구분이 미인이시군요. 후후"
그제서야 누나와 같이왔다는걸 깨달은 난 급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보다 누나가 조금 더 빨랐다.
'우리 누...?'
"어머, 저 민기 누나예요."
"누나셨습니까?! 아, 이거 초면에 실례했군요. 너무 동안이셔서 같은 고등학생인줄 알았지 뭡니까...죄송합니다."
"아니예요, 그런말 종종 들어요 호호호."
목소리에서 난 어렵지 않게 알수 있었다. 누나가 지금 이 남자앞에서 상당히 들떠 있다는 것을. 이런 들떠있는 목소리는 3년전 이전 남자친구와 전화통화 하는걸 우연히 들었던 이후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런 누나의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밝은 애교섞인 목소리에도 내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그 이유가 저 기분나쁜 사내 때문이었으니까.
"민기군은 좋겠다. 이렇게 이쁜 누나도 있고. 이거 부러워 지는데? 후후"
"아, 부끄럽게 왜그러세요. 호호호"
순간 '개근 콘서트'의 '불편할뻔한 진실' 에서 나오는 한마디가 뇌리를 스친다. [이것들, 왜이러는 걸까요!?].
한동안 그렇게 누나와 사내가 대화를 나눌동안 난 그저 멍하니 정혜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현의 말도 있었고 생생한 꿈의 기억탓에 섣불리 말을 섞기가 불편해진 탓이었다.
그나마 다행인건지 정혜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대신에 우리누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그녀. 우리누나를 알고 있는건가? 문득 의아함이 들었지만 별로 개의치 않기로 했다. 알면 어떻고 또 모르면 또
어떤가. 지금의 내겐 수현도 그녀도 전부 썩 내키지 않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제야 좀 갈 마음이 생겼는지 사내가 누나한테 명함 한장을 건내며 씨익 웃는다.
"아무튼 다음에 또 뵐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럼 저희는 이만 실례하도록 하겠습니다. 민기군도 또 보자!"
"네, 선우씨. 그럼 들어가세요!"
정말이지 넉살좋게 어느새 말까지 놓는 사내였다. 내 표정이 살짝 일그러진걸 아는지 모르는지 누나는 사내의 이름까지 불러가며 베시시 웃는다.
'에휴.'
사내가 걸음을 옮기자 정혜 역시 내게 '학교에서 봐' 라는 한마디를 남기곤 자리를 벗어났다. 난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화답한 후 멀어저 가는 둘을 멍하니 바라본다.
돌연 이쪽을 돌아보는 박선우란 사내. 뭐가 그렇게 기쁜지 입꼬리는 여전히 내려올줄 모른다. 자연스럽게 사내와 눈이 마주친다. 오기일까? 난 왠지 시선을 피하기가 꺼려져 더욱 눈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확실히 알아챌수 있었다.
놈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다는걸.
5부에계속-
------------------------------------------------------------------------------
출처 웃대 -못된야옹-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