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시민항쟁과 송암동 양민학살

참의부201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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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삼웅 성균관대학교 겸임교수

 

공수부대의 만행에 온 몸으로 맞서 싸운 광주시민들은 죽음을 넘어 그 치열한 함성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항쟁 일주일째 되던 날, 광주 송암동에서는 이 땅의 역사가 결코 묻어둘 수 없는 양민학살사건이 자행되었다. 부모형제가 보는 앞에서 9명의 시민들을 살해한 것이다. 그 진상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광주대학살로 인한 상처의 고통이 광주만의 것이 아니요, 더구나 가해자와 직잡적 피해자간의 화해 정도로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즉, 근본적 문제해결의 주체가 단순히 피해자로서 광주만은 아니며 지난 과거의 불행한 사태로 묻어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엄청난 민족사의 참극이었던 것이다.

 

1980년 5월 21일 도청을 퇴각하기 전, 그들은 공식발포를 국민들에게 자행했다. 시민들은 자위권으로 무장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힘의 대결은 이제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공수부대는 힘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것은 오직 민중의 단결된 힘으로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공수부대는 최후까지 발악하다가 광주에서 퇴각했지만 그들의 퇴각은 최후가 아니라 새로운 학살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5월 21일 광주 상황을 외부에 전하고 시위를 전남 일원으로 확산하기 위해 시외로 나간 청년들은 도청 앞에서 벌어진 공수부대의 총격 소식을 듣고 즉시 무장하여 광주에 돌아왔다. 이상하게도 이날은 외부로 나가는 도로에 계엄군의 검문이 없었던 것이다. 계엄군이 왜 공교롭게도 공수부대가 광주시민에게 총격을 가한 그 시간에 외곽도로의 검문을 철수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검문철수도 이날 오후에 한정된 것이었다. 외부로 무기를 구하고 시위를 확산시키기 위해 나갔다가 밤에 다시 광주에 들어오던 수많은 청년들이 계엄군의 무차별 총격에 희생되기 시작했다.

 

21일 하루 동안 가장 많은 청년들이 빠져나간 남부선은 밤늦게까지 계엄군의 매복 현황을 모르는 청년들이 계속 들어서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진 송암동은 한 발자국도 문 밖으로 내놓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광주-나주간 도로의 양편 야산에서 총성이 끊이지 않았고 헬기가 밤새 오르내리고 있었다. 광주로 돌아오는 시위대의 차량은 대부분 대형버스였으며, 어두운 도로에 차량 소리가 나면 어김없이 인근 야산에서 집중적인 사격이 가해지고 있었다.

 

밤늦게까지 이 상황을 집 안에서 보았던 송암동 주민들은 당시의 현장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21일 저녁 버스 2대가 송암동 앞 도로상에 나타나자 인근 야산에서 불을 뿜어내는 집중사격이 가해졋다. 먼저 온 차량은 완전히 전복되고 말았다. 그 안에 몇 명의 청년들이 탔는지 알 수 없었지만 비명소리가 주택가까지 들렸다. 이어서 전복된 차량보다 조금 더 앞선 위치에서 또 한 대의 버스가 계엄군의 집중사격을 맞고 전복됐다. 밤새 이런 상황은 계속 벌어졌고 우리는 총성만 나면 으레 돌아오는 차량이 총탄에 맞는 것으로 생각했다.

 

아침에 일어나 그 지점에 조심스럽게 나가 보았다. 도로 양쪽에 있는 논에 20대 청년들로 보이는 시체 9구가 있었다. 전복된 차량은 버스 2대였으며 그 시체는 이 버스에 타고 광주에 들어오던 청년들인 것 같았다. 잠시 후 계엄군 차량이 도로에 나타나자 우리는 모두 몸을 피했는데, 담요를 덮은 그 차가 지나간 후에 나와 보니 논에 있던 시체 9구가 모두 없어졌다. 계엄군의 차량 한 대가 이 9구의 시체를 모두 싣고 그 위에 군용담요를 덮어 은폐한 뒤 산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아마 그 9구의 시체는 헬기로 어디론가 실려간 것 같다. 송암동 뒷산에서는 계속 헬기가 이착륙하고 있었고 9구의 시체를 실은 차량도 그 방향으로 향했다. 이밖에도 많은 수의 청년들이 밤중에 들어오다가 이 도로 위에서 계엄군의 총격에 희생되었다. 대부분의 시체는 밤새 이착륙을 계속하던 헬기가 실어간 것 같다.

 

밤새 도로 위에 총탄을 퍼붓던 계엄군은 낮에는 주택가에 내려와 시민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물도 떠갔다. 그 모습으로 도저히 시민을 죽일 군인으로는 보기 힘들 정도로 우리에게 우호적이었다. 자신들을 제31사단 소속 군인이라고 밝힌 그들은 광주에서 자행된 공수부대의 만행을 성토하는가 하면 자신들은 공수부대와 다르다고 애써 설명하기도 했다.

 

도청을 마지막으로 철수한 공수부대는 전남대와 조선대를 경유하여 야음에 교도소와 지원동 주남마을까지 철수했다. 22일부터 공수부대는 외곽지역의 봉쇄임무로서 외부와 광주를 철저히 차단시키는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공수부대의 학살무대가 시내에서 외곽지역으로 옮겨간 것이다. 교도소와 지원동 주남마을에서 참혹한 학살만행을 일삼던 공수부대는 24일 오전에 외곽봉쇄임무를 20사단에 인계하고 모두 광주비행장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27일 새벽에 있을 무력진압작전을 위한 철수였다.

 

24일 오전 10시경 제7공수여단 및 제11공수특전여단은 제20사단에게 임무를 인계하고 지원동 주남마을을 출발했다. 공수부대는 학동과 진월동을 거쳐 시민들의 눈에 띄지 않는 야산의 좁은 길로 철수했다. 시내를 경유하지 않고 광주비행장까지 가려면 나주로 나갔다가 나주-송정리간 국도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일부 병력이 한 시간여에 걸쳐 헬기를 철수하고 나머지는 APC 장갑차를 앞세우고 트럭에 분승하여 출발했다. 야산지역의 좁은 길이어서 이들의 철수는 매우 느린 속도였다. 학살공수답게 이들의 철수는 조용히 가는 것이 아니었다.

 

병력의 선두가 진월동에 이르면서부터 공수부대는 인근지역에 장난질 같은 총격을 가하지 시작했다. 천진난만하게 저수지에서 멱감고 놀고 있던 어린이들을 향해 집중사격을 가하자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둑 너머로 피신했는데 맨 뒤에서 도망치던 12세 소녀가 머리에 총탄을 맞고 즉사했다. 그들은 또 진월동 동산에서 놀고 있던 초등학생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총성이 들리자 놀고 있던 초등학생들이 모두 피했지만 한 초등학생은 신발이 벗겨지는 바람에 다시 고무신을 주우려고 되돌아서다가 왼쪽 눈과 아래턱, 어깨와 옆구리, 복부에 각각 다섯 방의 총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이들의 총격은 단순히 인명살상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인근의 가축들까지 닥치는 대로 죽이고 있었다. 김행남 씨 소유의 칠면조 70여마리가 모두 총탄에 맞아 죽었으며 집 앞에 있던 젖소 두 마리가 그들의 총탄에 죽었다. 두 마리는 다 새끼를 밴 것이어서 모두 네 마리인 셈이다. 젖소를 잃은 한선웅 씨는 그 후 이로 인한 충격을 못 견디고 정신착란증세가 심해져서 끝내 사망했다. 한선웅 씨는 밤낮으로 심혈을 다 쏟아 키운 젖소 두 마리를 한꺼번에 잃고 난 후 술을 마시고 젖소가 죽은 곳에 누워 시름시름 앓는가 하면 정신분열증세가 계속 악화되어 결국 자식만큼이나 소중했던 젖소만을 그리다가 죽어간 것이다. 이러한 공수부대의 만행은 송암동 양민학살의 전초에 불과한 것이었다.

 

APC 장갑차를 선두로 한 철수병력의 대열이 효덕초등학교 옆 좁은 길을 빠져나와 광주-나주간 국도에 들어섰다. 선두가 효천역을 5백여미터 앞둔 위치에 이르자 도로 양편의 매복지에서 총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90밀리 무반동총이 순식간에 탑승하고 있던 트럭 4대를 파괴하였다. 수류탄까지 투척되었다. 즉시 공수부대는 차량에서 내려 매복지를 향해 응사했고 특수부대답게 매복지의 화력을 쉽게 제압했다. 그러나 그들이 제압한 90밀리 무반동총을 쏘고 있던 사람들은 시민군이 아니라 광주육군보병학교 교도대였던 것이다. 트럭 4대와 장갑차 1대가 파괴되고 21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이 교전은 철수하던 공수부대와 외곽봉쇄업무를 수행하고 있던 보병학교 병력간에 주고받은 사격이었다. 이후 계엄사령부에서는 이 상황을 오인사격이라고 발표했지만 이 부분의 진상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서 오인사격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일 지니고 있다.

 

매복지로부터 공수부대 철수병력의 거리는 불과 4백미터~5백미터에 불과하며 특히 모든 통신시설과 망원경까지 갖추었을 이들간의 오인사격은 그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는 사실이다. 또 현장 주민들은 도로에 있던 공수부대가 먼저 매복지를 향해 M16소총 사격을 전개했다고 이구동성으로 증언하고 있다. 이 두 가지를 비교해 볼 때 공수부대는 매복한 병력의 위치까지 알았을진대 그곳에 있는 매복병력이 도로 한가운데 있는 공수부대를 시민군과 분간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없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된 군 당국 자료는 오인사격에 의한 피해상황만 기록하고 있을 뿐 그 이유와 상황분석 등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다. 문제는 이와 같은 의문이 제기되었는데도 이 상황에 대한 진상조사의 구체적 접근이 전혀 안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공수부대와 교도대간의 교전이 계속되는 동안 도로 옆에 있던 송암동 주택가에는 양편의 총탄이 동시에 쏟아졌다. 주민들은 모두 부엌이나 지하실로 몸을 미했다. 논에 피를 뽑느라 허리를 구부리고 있던 김철진 씨는 그 자리에서 둔부와 국부를 관통하는 총상을 입고 불구가 되엇다. 도로에서 쏘아댄 총탄은 송암동 일대의 주택가로 쏟아져 옥상에 있던 장독대를 모두 깨뜨렸으며 집 안 여기저기에 박혔다.

 

교도대 병력의 화력을 제압한 공수부대는 이미 계엄군끼리의 충돌이었음을 확인하고서도 폭도들의 공격으로 자기 동료들이 죽었다며 송암동 일대의 주택가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집 안에 난입한 공수부대원들은 총탄을 피해 숨어 있는 주민들에게 모두 손들고 밖으로 나오라고 소리질렀다. 초등학생과 노인들까지 두 손을 치켜들고 마당으로 나왔다. 그 순간 부엌 아궁이 옆에 몸을 숨기고 있던 아주머니를 끌어낸 공수부대원들은 총기로 위협하며 아이를 등에 업고 있던 아주머니에게 기합을 주었다. 아주머니는 공수부대원들이 시키는 대로 아이를 등에 업은 채 허리를 굽히고 백 바퀴를 돌면서도 아이가 울지 않도록 어르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아이가 울기라도 한다면 공수부대원들이 총살할 것 같았다. 아주머니가 온몸에 식은땀을 흘리며 백 바퀴를 돌고 있는 동안 공수부대원들은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총기로 위협하다가 안방으로 들어가 동전이 꽤 들어 있는 저금통과 담배 한 보루를 챙겨들고 밖으로 나갔다. 공수부대원이 나가자 아주머니는 그만 주저앉아 버렸다. 다행히 아이는 울지 않았다.

 

마당 한가운데에 주민들을 불러세운 공수부대원들은 청년들을 가려내기 시작했다. 그 집은 모두 3세대가 살고 있었다. 청년 3명을 불러낸 공수부대원들은 물어볼 것이 있다며 그들을 밖으로 끌고 나갔다. 가족들은 이 아이들은 학생이 아니라 그냥 집에 있던 사람들이라며 말렸다. 한 명은 서울에서 공장생활을 하다가 집에 다니러 와 있던 중이었고 다른 한 명은 바로 옆에 있던 연탄공장의 운전기사였으며 나머지 한 명은 공무원이었다. 세 사람의 신분을 설명해 가면서 데리고 가지 못하게 말렷으나 공수부대원들은 잠깐 물어보고 돌려보내겠다며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가족들이 따라나서자 문 밖에 있던 공수부대원들이 총구를 들이대며 집 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말라고 위협했다. 청년들을 끌고 나간 공수부대원들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철로가에다 그들을 세우더니 다짜고자 총구에 착검된 대검으로 청년 한 명의 복부를 찔렀다. 뒤이어 옆에 서 있던 공수부대원이 M16 소총을 겨누어 나머지 두 명의 청년을 사살했다. 대검에 찔려 쓰러진 청년에게는 이마에 총구를 들이대고 방아쇠를 당겨 확인사살을 실행했다. 잠깐 물어볼 것이 있다며 밖으로 끌고 나간 지 5분도 못된 시간에 한 집안에서 3명의 청년들이 한순간에 희생된 것이었다.

 

한편 야산과 도로에서 교전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청년 한 명과 아주머니 한 명이 총탄을 피하기 위해 도로가에 있는 하수구로 들어갔다. 교전을 끝낸 공수부대원들은 인근을 수색하다가 이 두 사람을 발견하자 즉시 나오라고 소리쳤다. 선뜻 일어서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공수부대원들은 두 번 말하지 않고 M16 소총을 연발사격하여 아주머니와 청년의 몸을 벌집으로 만들어버렸다. 공수부대원들은 마음 내키는 대로 M16 소총의 방아쇠를 당겼고 총성이 터질 때마다 어김없이 목표물들이 깨지거나 쓰러졌다.

 

광주학살에 투입된 공수부대에게는 초등학생들과 총탄을 피해 숨어든 여성들까지 작전수행을 위해 제거해야 할 그들의 적이었으며, 공수부대에게 부여된 자위권은 주택가의 가축은 물론 동산에서 놀고 있던 초등학생과 저수지에서 목욕하고 있던 중학생까지도 그 대상에 포함된 것이었다. 결국 공수부대가 부여받은 자위권은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최후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광주의 모든 것을 상태로 ‘화려한 휴가’를 즐기는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다.

 

도청에 이어 지원동 주남마을에서 차마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하고 27일의 광주학살을 또 다시 준비하기 위해 철수하던 공수부대는 송암동에서 광주상황과 철저하게 무관한 주민 8명을 학살했다.

 

광주시민들을 제물로 해서 정권을 탈취하고자 했던 주범들, 그 주범들의 철저한 하수인이었던 공수부대원들, 그 공수부대원들의 무자비한 총격에 5월 24일 송암동에서 학살된 주민들 가운데는 아직도 신원조차 밝혀지지 않고 있는 희생자들도 더러 있었다. 특히 21일 밤에 광주로 들어오다가 계엄군의 총격을 받고 버스가 전복되어 논에서 사망한 9명의 시신은 현재도 그 행방조차 묘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