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 민족주의사학(韓國近代民族主義史學)의 시조(始祖)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 7.연구·저술과 독립운동 준비의 북경 시절 ⑷
참의부2013.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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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발표에 참여
1918년 8월 항일독립운동사(抗日獨立運動史)에서 큰 획을 긋는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이 창립되었다. 신한청년당은 창립취지서에서, “독립을 완성하고, 문화적·도덕적으로 민족을 개혁하여 신대한민족을 만들며 학술과 산업을 일으켜 실력을 양성하여 대한민족의 신문화가 전 인류에게 행복을 주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신한청년당은 민족주의·민주주의·공화주의·사회개혁주의·국제평화주의를 창당 이념으로 제시하여 이듬해 탄생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정신적·이념적 모태가 되었다.
신한청년당은 이 해 12월 미국 대통령 윌슨의 특사로 중국에 파견된 클레인(Clain)이 “파리 강화회의가 약소민족의 해방을 위한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하자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하여 한국 독립의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또 선우혁(鮮于赫)과 김철(金哲)을 국내로, 여운형(呂運亨)을 러시아로, 장덕수(張德秀)를 일본으로 각각 파견하여 윌슨의 강화회의 14개 원칙 중에서 민족자결주의 주장을 확인하고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응하는 한편 장덕수·선우혁·서병호 등과 우사의 부인 김순해를 포함한 당원들을 국내에 파견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였다.
신한청년당은 국제정세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면서 일본에 당원을 파견하여 한국 유학생들에게 독립운동을 일으키도록 종용하고, 국내에도 사람을 보내어 국민 봉기를 추진토록 하였다. 그 결과 1919년 재일본 한국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과 국내의 3·1민족항쟁이 발발하는 촉진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신한청년당의 활동과는 별개로 1919년 2월 만주 동삼성에서는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가 중심이 되어『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를 발표하였다.
『무오독립선언서』의 발표에는 단재를 비롯하여 남북 만주와 노령, 상해, 미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반일지사 39명이 참여한 것으로 규모가 상당히 컸다.
서명자는 김교헌(金敎獻)·김동삼(金東三)·조용은(趙鏞殷)·신규식(申圭植)·정재관(鄭在寬)·여준(呂準)·이범윤(李範允)·박은식(朴殷植)·박찬익(朴贊翊)·이시영(李始榮)·이상룡(李相龍)·윤세복(尹世復)·문창범(文昌範)·이동녕(李東寧)·신채호(申采浩)·허혁(許爀)·이세영(李世永)·유동열(柳東說)·이광(李光)·안정근(安定根)·김좌진(金佐鎭)·김학만(金學滿)·이대위(李大爲)·손일민(孫一民)·최병학(崔炳學)·박용만(朴容萬)·임방(林邦)·김규식(金奎植)·이승만(李承晩)·조욱(曺煜)·김약연(金躍淵)·이종탁(李鍾倬)·이동휘(李東輝)·한흥(韓興)·이탁(李沰)·황상규(黃尙奎)·이봉우(李奉雨)·박성태(朴性泰)·안창호(安昌浩) 등 해외에서 항일투쟁을 벌인 독립운동가들이 망라되었다. 3·1운동보다 약 1개월 전에 해외에서 대규모적인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무오독립선언서』는 조소앙(趙素昻)이 기초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독립운동 방법론의 무장투쟁론 내용이 단재의 일관되는 주장과 일치하여 선언서 작성에 그가 깊이 관여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이 선언서는 다음의 세 가지를 들어 일제를 단죄한다.
˝첫째, 일본의 합방동기는 소위 범일본주의(汎日本主義)를 아주(亞州)에 행함이니 이는 동양의 적(敵)이요,
둘째, 일본의 합방수단은 사기(詐欺), 강박불법, 무도(無道)의 무력(武力), 폭행의 극치로 이는 국제법규의 악마이며,
셋째, 일본의 합방결과는 군경의 야만스런 권세와 경제의 압박으로서 종족을 마멸하며 종교를 강박하고 교육을 제한하여 세계문화를 저해하였으니 이는 인류의 적이다.
이로써 하늘의 뜻과 인간의 도리와 정의와 법리(法理)에 비추어 만국이 입증하여 합방의 무효를 선언하며 저들의 죄악을 징치하며 아(我)의 권리를 회복하노라.˝
이 선언문은 특히 마지막 부문에서 다음과 같이 항일무장투쟁을 촉구하였다.
˝독립군은 일제히 일어나라. 독립군은 천지를 강(鋼)한다. 일사(一死)는 사람의 면할 수 없는 바이므로 개나 돼지와도 같은 일생을 누가 순도(荀圖)할 것이냐? 살신성인(殺身成仁)하면 2천만 동포는 동체(同體)를 부활할 것이다.
일신을 어찌 아낄 것이냐? 집이 넘어지고 나라가 엎어지면 3천리 옥토는 자가(自家)의 소유이다. 일가의 희생 어찌 아깝다 하겠느냐? 자, 나의 동심동덕(同心同德) 2천만 형제자매여, 국민의 본령을 자각한 독립인 것을 기억할 것이오, 동양의 평화를 보장하고 인류의 평등을 실시하기 위하여 자립인 것을 명심하게끔 황천(皇天)의 명명(明命)을 지봉(祗奉)하고 일체의 사강(邪綱)으로부터 해탈하는 건국인 것을 확신하여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성할 것이다.˝
앞서 지적한 대로 이 선언서는 해외 망명 지도급 인사 대부분이 참여하여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을 전취하자는 문건으로써 단재의 노선과 일치한다.『무오독립선언서』는 국내의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주어서 2·8독립선언과 3·1운동의 촉진제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국 근대 민족주의사학(韓國近代民族主義史學)의 시조(始祖)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 7.연구·저술과 독립운동 준비의 북경 시절 ⑷
●『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발표에 참여
1918년 8월 항일독립운동사(抗日獨立運動史)에서 큰 획을 긋는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이 창립되었다. 신한청년당은 창립취지서에서, “독립을 완성하고, 문화적·도덕적으로 민족을 개혁하여 신대한민족을 만들며 학술과 산업을 일으켜 실력을 양성하여 대한민족의 신문화가 전 인류에게 행복을 주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신한청년당은 민족주의·민주주의·공화주의·사회개혁주의·국제평화주의를 창당 이념으로 제시하여 이듬해 탄생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정신적·이념적 모태가 되었다.
신한청년당은 이 해 12월 미국 대통령 윌슨의 특사로 중국에 파견된 클레인(Clain)이 “파리 강화회의가 약소민족의 해방을 위한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하자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하여 한국 독립의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또 선우혁(鮮于赫)과 김철(金哲)을 국내로, 여운형(呂運亨)을 러시아로, 장덕수(張德秀)를 일본으로 각각 파견하여 윌슨의 강화회의 14개 원칙 중에서 민족자결주의 주장을 확인하고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응하는 한편 장덕수·선우혁·서병호 등과 우사의 부인 김순해를 포함한 당원들을 국내에 파견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였다.
신한청년당은 국제정세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면서 일본에 당원을 파견하여 한국 유학생들에게 독립운동을 일으키도록 종용하고, 국내에도 사람을 보내어 국민 봉기를 추진토록 하였다. 그 결과 1919년 재일본 한국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과 국내의 3·1민족항쟁이 발발하는 촉진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신한청년당의 활동과는 별개로 1919년 2월 만주 동삼성에서는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가 중심이 되어『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를 발표하였다.
『무오독립선언서』의 발표에는 단재를 비롯하여 남북 만주와 노령, 상해, 미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반일지사 39명이 참여한 것으로 규모가 상당히 컸다.
서명자는 김교헌(金敎獻)·김동삼(金東三)·조용은(趙鏞殷)·신규식(申圭植)·정재관(鄭在寬)·여준(呂準)·이범윤(李範允)·박은식(朴殷植)·박찬익(朴贊翊)·이시영(李始榮)·이상룡(李相龍)·윤세복(尹世復)·문창범(文昌範)·이동녕(李東寧)·신채호(申采浩)·허혁(許爀)·이세영(李世永)·유동열(柳東說)·이광(李光)·안정근(安定根)·김좌진(金佐鎭)·김학만(金學滿)·이대위(李大爲)·손일민(孫一民)·최병학(崔炳學)·박용만(朴容萬)·임방(林邦)·김규식(金奎植)·이승만(李承晩)·조욱(曺煜)·김약연(金躍淵)·이종탁(李鍾倬)·이동휘(李東輝)·한흥(韓興)·이탁(李沰)·황상규(黃尙奎)·이봉우(李奉雨)·박성태(朴性泰)·안창호(安昌浩) 등 해외에서 항일투쟁을 벌인 독립운동가들이 망라되었다. 3·1운동보다 약 1개월 전에 해외에서 대규모적인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무오독립선언서』는 조소앙(趙素昻)이 기초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독립운동 방법론의 무장투쟁론 내용이 단재의 일관되는 주장과 일치하여 선언서 작성에 그가 깊이 관여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이 선언서는 다음의 세 가지를 들어 일제를 단죄한다.
˝첫째, 일본의 합방동기는 소위 범일본주의(汎日本主義)를 아주(亞州)에 행함이니 이는 동양의 적(敵)이요,
둘째, 일본의 합방수단은 사기(詐欺), 강박불법, 무도(無道)의 무력(武力), 폭행의 극치로 이는 국제법규의 악마이며,
셋째, 일본의 합방결과는 군경의 야만스런 권세와 경제의 압박으로서 종족을 마멸하며 종교를 강박하고 교육을 제한하여 세계문화를 저해하였으니 이는 인류의 적이다.
이로써 하늘의 뜻과 인간의 도리와 정의와 법리(法理)에 비추어 만국이 입증하여 합방의 무효를 선언하며 저들의 죄악을 징치하며 아(我)의 권리를 회복하노라.˝
이 선언문은 특히 마지막 부문에서 다음과 같이 항일무장투쟁을 촉구하였다.
˝독립군은 일제히 일어나라. 독립군은 천지를 강(鋼)한다. 일사(一死)는 사람의 면할 수 없는 바이므로 개나 돼지와도 같은 일생을 누가 순도(荀圖)할 것이냐? 살신성인(殺身成仁)하면 2천만 동포는 동체(同體)를 부활할 것이다.
일신을 어찌 아낄 것이냐? 집이 넘어지고 나라가 엎어지면 3천리 옥토는 자가(自家)의 소유이다. 일가의 희생 어찌 아깝다 하겠느냐? 자, 나의 동심동덕(同心同德) 2천만 형제자매여, 국민의 본령을 자각한 독립인 것을 기억할 것이오, 동양의 평화를 보장하고 인류의 평등을 실시하기 위하여 자립인 것을 명심하게끔 황천(皇天)의 명명(明命)을 지봉(祗奉)하고 일체의 사강(邪綱)으로부터 해탈하는 건국인 것을 확신하여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성할 것이다.˝
앞서 지적한 대로 이 선언서는 해외 망명 지도급 인사 대부분이 참여하여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을 전취하자는 문건으로써 단재의 노선과 일치한다.『무오독립선언서』는 국내의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주어서 2·8독립선언과 3·1운동의 촉진제 역할을 하게 되었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저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