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南山)에 고(故) 이승만(李承晩) 전 대통령 동상(銅像)이 다시 세워졌다. 남산 중턱에 있던 초대형 이승만 동상이 4·19민중혁명(四一九民衆革命) 후 철거된 지 꼭 51년만이었다. 이번에 세워진 동상은 한국자유총연맹(韓國自由總聯盟) 회원들의 성금을 모아 제작한 것으로 2011년 8월 25일 서울 중구 장충단로의 자유총연맹광장에 건립되었다. 이 동상은 이화장(梨花莊), 배재고 교정, 국회 본관 중앙 홀, 청남대 광장 등에 이어 전국에서 다섯 번째 이승만 동상이 되는 셈이다.
자유총연맹이 이번에 이승만 동상을 건립하게 된 데는 나름의 ‘인연’이 하나 있다. 이승만은 자유총연맹의 부리랄 수 있는 아시아민족반공연맹(APACL) 창설자로 자유총연맹으로서는 ‘시조(始祖)’랄 수도 있다.
6·25남북전쟁(六二五南北戰爭) 후 이승만은 아시아에 반공통일전선을 구축할 목적으로 1953년 11월 대만에서 장제스[蔣介石] 주석과 정상회담을 갖고 이런 취지에 합의를 보았다. 이를 토대로 이듬해 6월 15일 경남 진해에서 민간 반공기구인 아시아민족반공연맹을 결성하게 되었다. 아시아민족반공연맹 한국 지부는 1964년 1월 한국반공연맹으로 개편되었고, 1989년에는 다시 현재의 한국자유총연맹으로 재출범하게 되었다.
이런 ‘인연’에서 본다면 자유총연맹 측이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동상을 건립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금만 시각을 달리해서 보면 얘기는 다르다. 즉 사회적 논란이 된 인물의 특정 면만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켜 동상을 세우는 것은 또 다른 논란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대표적 친일기업인 박흥식(朴興植)이 설립한 모 학교 교정에 그의 동상이 한동안 서 있었다. 학교 측으로서는 박흥식이 설립자라는 이유로 교정에 동상을 세웠을 터이다. 그런데 그는 학교 설립자이기 이전에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식민지 지배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친일파로 사회적 지탄을 받아온 인물이다. 개인집 마당이라면 몰라도 학교와 같은 공적 공간에 문제적 인물의 동상을 세우는 것은 결국 저항을 낳게 마련이며 박흥식 동상 역시 그런 연유로 근년에 헐린 바 있다.
자유총연맹 측이 이 시점에서 이승만 동상을 세운 점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2011년 KBS의 ‘이승만 찬양방송’인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둘러싸고 이승만에 대한 논쟁이 한창 가열됐었다. 그를 둘러싼 역사적 평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아직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이 ‘반공(反共)’의 상징인물이라고 해서 자유총연맹광장에 그의 동상을 세운다면 이는 이승만의 ‘반공 지도자’란 면모만 부각시킨 결과다.
자유총연맹 측이 이승만 동상을 당당하게 건립하려면 무엇보다도 이승만의 ‘백색독재’ 정치와 독립운동자금 횡령 문제를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이승만 독재정권이 쏜 총탄과 휘두른 도끼·몽둥이를 맞고 죽어간 수유리 국립묘지의 4·19혁명 영령들에게 자유총연맹은 대체 뭐라고 해명할 것인가? 그렇지 못할 경우 이승만의 동상은 언젠가 또 다시 헐리게 될 것이다.
2011년 6월초 부산 서구 부민동 ‘임시수도기념거리’의 임시수도기념관 앞에 세워진 이승만 동상에 붉은 페인트가 뿌려졌다. 이 동상은 부산 서구청이 4·19민중혁명 추모사업단체 관계자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2011년 4월초에 세운 것이다. 누군가 뿌린 붉은색 페인트는 황금색 동상의 머리에서부터 흘러내려 얼굴 전체를 붉게 물들인 후 왼쪽 가슴을 타고 흘러내렸는데, 마치 머리를 다쳐 피를 흘리고 선 모습처럼 보기에도 흉측했다.
여론을 무시하고 무리를 해서 동상을 세우다보니 결국 이런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이승만을 추앙하기 위해 만든 동상이 결국 그를 또 다시 욕보이는 결과를 빚고 만 것이다. 그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자유총연맹은 이승만 동상 건립을 강행한 것이다. 4·19민중혁명 직후 남산에 있던 이승만 동상이 철거된 과정을 생각해보면 끔찍하기조차 하다.
남산의 이승만 동상은 이승만의 80회 생일(1955년 3월 26일)을 맞아 구성된 ‘이승만 대통령 제18회 탄신경축 중앙위원회’ 주관으로 세운 것이다. 동상이 세워진 자리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신궁 본전이 있던 남산 중턱으로, 서울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요지였다. 동상의 크기(높이)는 본체 7미터, 기단부를 합치면 25미터에 달하는 초대형으로 당시로선 세계 최대 규모였다. 동상 준공식은 제3대 대통령 취임식 당일인 1956년 8월 15일 거행됐는데, 이틀 뒤 8월 17일자『경향신문』에서 소개한 준공식 당일의 풍경이다.
˝지난 15일 오후 4시부터 시내 남산공원에서는 김 대법원장, 이 민의원 의장을 비롯한 3부 요로와 8·15광복절 및 제3, 4대 정부통령 취임을 경축하기 위해 내한 중인 각국의 외교사절, 그밖에 내외 귀빈 및 일반시민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이 대통령 동상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이 대통령 제80회 탄신경축 중앙위원회 주관으로 건립된 동(同) 동상은 작년 10월 3일 기공 이래 10여개월에 걸쳐 7만여명의 인원과 총공사비 2억 6백만환이 소요된 것이며, 높이 81척에 건립부지 3천여평을 차지하고 있다.˝
한편 탑골공원에도 이승만 동상이 하나 서 있었는데 이 동상은 하야 발표 당일(4월 26일) 성난 시민들이 철거했다. 반면 남산 동상은 그해 8월 말에야 철거됐는데 이는 순전히 큰 덩치 때문이었다. 당시 쌀 2만 6백가마에 해당하는 거액의 공사비를 들여 연인원 7만여명이 10여개월에 걸쳐 만든 것인 만큼 철거에도 적잖은 비용과 시간이 필요했다.
그해 7월 23일 국무회의에서 남산 이승만 동상의 철거가 결정됐다. 그 다음날『동아일보』는「권세와 아부로 남산에 세운 이 박사 동상도 하야하기로」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살아있는 사람의 동상을 굳이 세워 본인에게도 욕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며 “민중의 뜻에 의하여 그의 우상이 내려오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서울시 당국은 8월 13일 내무부로부터 동상 철거 지시를 받고서 8월 19일부터 철거작업에 돌입했다. 이 날짜 경향신문은 “23일까지 철거작업을 모두 마칠 예정이며, 이승만의 80회 탄신을 축하한다는 뜻으로 졸도들이 국민들의 고혈을 빨아 세운 이 동상의 무게는 10톤”이라고 보도했다.
철거반은 기증기 등 중장비를 동원해 동상 해체작업에 들어가 그달 30일 철거를 마무리했다. 남산 동상은 철거하는 데만 근 열흘이 걸렸으며, 철거비용도 170만환에 달했다. 천년만년 갈 것 같던 이승만 동상은 건립된 지 4년만에 철거되는 수모를 겪게 되었고, 동상이 섰던 자리에는 분수대가 들어섰다.
그 후 철거된 이승만 동상들은 어찌 되었을까? 결론을 앞세우면 천덕꾸러기로 떠돌다가 현재도 서울시내 한 민가에 방치돼 있다. 이승만 집권 시절에는 그를 국부(國父)라 일컬으며 그 밑에서 고관대작을 지낸 자가 한둘이 아니었지만 그가 권좌에서 물러나자 하나같이 오불관언이었다. 그의 동상을 챙긴 사람은 대한방직 간부를 지낸 ‘민간인’ 홍윤후 씨였다.
홍 씨는 1963년 6월 어느 날 지인으로부터 이승만 동상이 영영 사라질 상황이라는 얘기를 전해 듣고 당시 서울 종암동에 있던 서울시 창고로 달려갔다. 그곳에 도착해보니 4·19민중혁명 직후에 철거된 이승만 동상이 전기톱으로 분해돼 용광로로 들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에 홍 씨는 동상 해체작업을 벌이고 있던 사람들을 설득하여 개인 돈 50만원을 주고 이를 인수하여 명륜동 자택 정원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 상태가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돼 오고 있다.
한편 이승만 동상 얘기는 4·19민중혁명 이후 이승만의 우상들이 모두 철거되면서 한동안 화젯거리가 아니었다. 그러다가 다시 이 얘기가 나온 것은 1970년대 후반부터인데, 모두 이승만과 인연이 있는 곳들이었다.
4·19혁명 이후 제일 먼저 이승만 동상을 세운 곳은 인하대학이었다. ‘인하’라는 교명은 ‘인천’과 ‘하와이’의 머리글자에서 따온 것인데, 하와이에 사탕수수 농장의 한인(韓人) 노동자로 90퍼센트는 인천 출신이었다. 이들은 자녀교육을 위해 하와이에 한인 기숙학교를 설립했는데, 그때 이승만이 교장을 맡았다. 8·15해방 후 이들이 낸 성금으로 1954년 인하대학의 전신인 인하공과대학이 개교하게 된 것이다. 인하대학은 1979년 2월 24일 이승만 동상을 세웠는데, 1983년 10월 일부 학생들에 의해 동상이 철거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간 학교 측은 동상을 보관해오다가 2011년 9월 동상을 다시 세우기로 결정한 바 있다.
그 다음으로 이승만 동상이 세워진 곳은 배재고등학교다. 이승만은 배재고의 전신인 배재학당을 졸업했는데, 이런 인연으로 배재고는 1984년 2월 28일 교정에 이승만 동상을 세웠다. 이어서 해방 40주년인 1985년 8월 15일을 맞아 하와이에 이승만 동상이 세워졌으며, 2년 뒤 1987년 2월에는 대전에 있는 배재대학, 그 이듬해인 1988년에는 이화장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인하대학-배재고-하와이-배재대학-이화장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인하대학-배재고-하와이-배재대학-이화장 순으로 그와의 연고를 기반으로 해서 그의 동상이 하나둘씩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배재대학에서 제동이 걸렸다. 동상을 세우던 1987년 그해 6월 민중항쟁을 계기로 학생들이 교내에 있던 그의 동상을 철거하고 말았다. 이에 학교 측이 동상을 다시 세우자 학생들이 계란과 페인트를 끼얹는 등 철거시위를 벌여 1997년에 또 다시 철거됐다. 그로부터 11년 뒤인 2008년 학교 측은 교수와 학생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세번째로 이승만 동상을 다시 학교에 세웠다. 동상 건립에 반대해온 교수 및 재학생, 졸업동문들은 이날 이승만 동상 앞에서 ‘독재자 이승만 동상 건립 웬 말이냐?’ 등의 내용이 담긴 피켓을 들고 침묵시위를 벌였다.
이승만과의 인연을 앞세워 교육기관에서 앞 다퉈 그의 동상을 세우고 있고 심지어는 과거에 철거된 동상마저 재등장하고 있다. 세계 최대 규모로 남산에 세워졌던 그의 동상이 4·19민중혁명 후에 철거된 것은 이미 까마득한 옛일이 되고 말았다. 일설에 의하면 이승만 추종자들은 광화문네거리에 그의 동상을 세우려고 하고 있다고 한다. 이승만 추종자들은 독재자 이승만을 이순신(李舜臣)·세종(世宗) 반열에 올리고 싶은가 보다. 그리고 그들은 그 다음 순서로는 또 다른 독재자인 박정희(朴正熙)의 동상을 세우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개인이든 특정 집단이든 물리력을 동원해 특정인의 동상을 세우려고 하면 세울 수는 있다. 예를 들어 이완용(李完用)·송병준(宋秉畯)의 후손들이 광화문네거리에 땅을 사서 그곳에 이완용·송병준 동상을 세운다면 세울 수는 있다. 문제는 누가 그 동상 앞에 머리 숙여 존경심을 표할 것이며, 또 그렇게 세워진 동상이 과연 그 자리에 무탈하게 서 있을 수 있을까? 모르긴 해도 그리 오래지 않아 누군가에 의해 그 동상은 처참하게 훼손되거나 아니면 목에 밧줄이 걸릴지도 모른다. 산 사람도 아닌 동상의 목에 밧줄이 걸린다면 이는 사실상 부관참시(剖棺斬屍)다. 즉 그 인물을 두 번 죽이는 셈이다.
● 이승만 ‘80회 탄신’ 종합선물세트
이승만 동상 얘기를 쓸 무렵 오랜만에 자료 파일을 뒤적여 수년전 고서점에서 구입한 전단지 가운데 하나를 찾아냈다. 손바닥 크기의 이 전단지는 사실은 ‘초대장’이다. 행사 일시는 1955년 6월 15일, 장소는 남한산성 서장대, 초청자는 당시 경기도지사로 있던 이익흥(李益興)이다. 주최 측은 이날 교통 편의를 위해 당일 12시 30분 정각에 경기도청 정문 앞에 버스를 준비해뒀다. 그리고 참석자는 당일 이 초대장을 지참하고 참석하란다. 대체 무슨 행사기에 남한산성에서 행사를 열었으며, 또 초청자가 경기도지사였을까?
《대한뉴스》제59호(1955년 7월 4일 제작)에 따르면, 이날 행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송수탑 건립과 제막식’이었다.《대한뉴스》는 6월 15일 오후 ‘유서 깊은 남한산성 일각’에서 이승만 대통령 송수탑 제막식이 성대히 열렸다고 보도했다. 이날 행사장에는 함태영 부통령 및 정부 각료, 내빈들이 참석했으며 변영태 외무부 장관과 내외 요인들이 축사를, 송수탑 건립위원장인 이익흥 경기도지사가 송수탑 건립 경과 보고를 했다. 이어 인천여고 학생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만수무강을 비는 합창을 했다고 보도했다.
「위키백과」와「네이버」에 따르면, 이승만 대통령은 1875년생으로 나온다. 따라서 1955년이면 이승만이 80세가 되는 해다. 바로 이 해 이승만의 80세 생일을 맞아 요즘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경축행사가 벌어졌다. 그야말로 이승만 대통령 ‘80세 탄신 경축’ 종합세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老) 국가원수의 건강을 비는 게 허물이랄 수는 없겠지만 문제는 그 정도가 송축(頌祝) 차원을 넘어 아부의 극치를 보였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80회 생일을 맞은 이승만 대통령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송수탑(頌壽塔)은 조각가 윤효중(尹孝重)이 만든 것이다. 참고로 윤효중은 194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일본의 전통 풍습인 천인침(千人針)을 소재로 한 조소 작품을 출품해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전쟁 승리를 기원하고 대화숙(大和塾)에서 강의를 맡는 등 친일행위 전력이 있었다. 날개를 펼친 봉황새를 탑 꼭대기에 조각해 얹은 이 탑은 ‘80세 탄신’ 경축행사의 일환이었다. 송수탑을 세운 경기도지사 이익흥은 일제강점기에 경찰간부를 지낸 인물로 흔히 아첨꾼의 상징으로 불린다. 어느 핸가 이승만 대통령이 낚시를 하러 갔다가 생리현상으로 방귀를 뀌자 이익흥이 이를 냉큼 받아서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아부를 떨었다는 얘기도 있다. 이승만이 몇 번 들른 것 말고는 별다른 연고도 없는 남한산성에 송수탑을 세운 것 하나만 봐도 알 만하다 하겠다.
이승만 우상화는 대통령 취임 이후부터 시작됐으나 6·25동란이 끝난 이듬해인 1954년부터 극으로 치달았다. 학교 교실에 이승만 초상화가 내걸린 것은 국가원수이니 그 시절엔 그랬다고 쳐도 이승만 생일에 집집마다 태극기를 단 것은 예우 차원을 넘은 ‘우상화’라고 할 수 있다. 이어 우표와 화폐에 이승만의 얼굴이 등장하더니 마침내 서울시내 요소에 이승만 동상도 세워지기 시작했다. 탑골공원을 비롯해 남산 중턱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또 전국 각지에서는 소위 ‘이승만 찬가’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한편 이승만 우상화는 ‘80세 탄신’인 1955년에 극치를 보였다. 우선 이승만이 80세 생일을 맞은 3월 26일 당일 벌어졌던 각종 경축행사를 정리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대통령 취임식도 아니고 대통령의 80회 생일잔치를 이처럼 요란하게 치른 경우는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그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당일 상황을 기록한《대한뉴스》(제54호)에 따르면, 당일 아침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경무대(현재의 청와대)에서 ‘80회 탄신’을 축하하러온 내외의 방문객들을 맞느라 정신이 없었다. 외교사절로는 ‘80회 탄신’을 맞아 특별히 내한한 밴플리트 장군을 비롯해 필리핀 공사 테일러우드, 콜터 장군, 왕둥위안 한국주재 중화민국 대사 등이 잇따라 경무대를 예방했다. 이어 국내 3부 요인을 비롯해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경무대를 찾아 그의 ‘80회 탄신’을 축하했다. 현직 대통령의 ‘80회 생신’이니 축하인사를 드리는 것은 우리의 미풍양속이다.
방문객 접견을 마친 이승만 대통령 부부는 승용차 편으로 서울운동장으로 향했다. 이날 오전 이곳에서는 대대적인 경축행사가 준비돼 있었다. 시민과 학생 수천명이 스탠드를 가득 메운 가운데 운동장에서는 숙명여고, 배재고 남녀 학생들이 고전무용과 매스게임을 벌이며 잔치 분위기를 띄웠다. 학생들은 운동장에서 이 대통령의 ‘80회 탄신’에 맞춰 ‘80’이란 숫자를 연출했으며, 이들 주위로는 ‘만수무강(萬壽無疆)’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북한에서는 김일성·김정일 부자를 우상화하기 위해 더러 이와 같은 형태의 카드섹션 행사를 벌이기도 한다).
학생들은 물론 군인들도 이날 경축행사에 대거 동원됐다. 서울운동장에서 경축행사가 열릴 때 하늘에서는 공군 전투기 여러 대가 공중 분열식을 벌였다. KBS가 광복 6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영상실록에 따르면, 이날 오후에는 세종로에서 육군과 공군, 해병대 장병들이 대규모 시가행진을 벌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행진에는 마치 국군의 날 기념행사처럼 기갑부대도 등장했다. 이 영상실록을 소개하는 내레이터는 “대통령의 생일이 국경일과 같은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이날 경축행사는 비단 이것뿐이 아니다. 당일 저녁에는 이승만 탄신 경축음악회를 위해 특별초청을 받고 25년만에 귀국한 작곡가 안익태(安益泰)가 지휘하는 경축음악회가 성대하게 열렸다(안익태는 그해 4월 18일 정부로부터 최초로 문화훈장을 받았다). 이밖에도 전국에서 ‘80회 탄신’ 경축기념식수와 경축경노회가 벌어졌으며, 당일 열린 전국무술대회에는 이승만이 현장에 구경을 나오기도 했다. 또 탄신일 3월 26일~27일 이틀간에 걸쳐 서울시내 전차들은 ‘80회 탄신’ 경축 꽃을 달고 다녔는데 당시 이를 ‘꽃전차’라고 불렀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 ‘80회 탄신’ 기념우표가 발행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것이었다. 초대, 2대, 3대 취임기념을 비롯해 80회, 81회 탄신기념 우표 등 재임기간 동안에 그의 얼굴이 담긴 우표는 모두 6종이 발행됐다. 기념우표에 이어 심지어 생존인물인 그가 화폐에도 등장했다. 1953년 지폐에 한복차임으로 처음 등장한 이후 1957년부터는 한복 대신 양복차림으로 바뀌었다가 4·19혁명 뒤인 1962년부터는 지폐에서 그의 얼굴이 사라졌다.
이밖에 ‘80회 탄신’을 경축하여 공보실에서는 현상문예를 공모했고, 정부기관지 격이던 서울신문사에서는 축하 글을 묶어「헌수송(獻壽頌)」을 펴내기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서전『운명이다』에 보면, 1960년 전국 학교에서 ‘이승만 대통령 생신기념 백일장’이 열렸는데, 당시 중학교 1학년이던 노무현이 ‘백지동맹’을 선동하여 파란을 일으킨 얘기가 나온다. 80회 생일 때(1955년)뿐 아니라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이승만 우상화가 진행된 정황이 읽히는 대목이다. 또 그 무렵부터 전국에는 그의 ‘80회 탄신’을 경축하면서 낯간지러운 축시를 써댔다. 흔히 ‘민족시인’으로 불려온 노산(蘆山) 이은상(李殷相)은 그해 희망 4월호에〈송가(頌歌)〉라는 제목으로 이승만 대통령 탄신 80주년을 기념하는 축시를 실었다.
˝이 겨레 위하시어 한 평생 바치시니
오늘에 백수홍안 늙다젊다 하오리까
팔순은 짧으오이다 오래도록 삽소서˝
‘이기붕 찬가’에 이어 전해오는 ‘이승만 찬가’의 내용은 이렇다.
˝우리나라 대한 나라 독립을 위해
일생을 한결같이 몸 바쳐 오신
고마우신 이 대통령 우리 대통령
그 이름 길이길이 빛나오리다˝
서울 도심 한가운데를 동서로 가르는 큰길의 이름은 세종로(世宗路)를 비롯해 충무로(忠武路), 다산로(茶山路), 율곡로(栗谷路) 등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긴 인물들의 아호나 시호를 딴 도로명이 서울시내엔 적지 않다. 이승만의 호는 ‘우남(雩南)’이다. 그렇다면 그의 호를 딴 ‘우남로’ 같은 도로명이나 그 밖의 기념물은 없었을까?
‘80회 탄신’ 그해(1955년) 6월 15일 남한산성에서 송수탑 제막식을 가진 함태영 부통령 등 일행은 식후에 행사를 따로 하나 더 가졌다. 바로 ‘우남로’ 개통식 참석이 그것이다. 우남로란 경기도 광주에서 남한산성을 연결하는 도로로, 우남은 이승만의 호에서 따온 것이었다. ‘우남’을 따서 붙인 이름은 이밖에도 한둘이 아니다. 우남정(雩南亭), 우남공원, 우남도서관, 우남회관 등이 그것이다.
‘80회 탄신’ 이듬해인 1956년 8월 15일 이승만의 제3대 대통령 취임식에 맞춰 남산 조선신궁 자리에 초대형 동상이 세워졌다. 이를 계기로 남산공원을 ‘우남공원’으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으며, 1959년부터는 남산 정상에 있던 팔각정도 ‘우남정’으로 이름을 바꿨다(남산 분수대 자리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신궁이 차지하고 있었고, 이승만 정권 시절에는 그의 동상이 서 있었으며, 현재는 이 일대에 백범 김구 지사 동상과 안중근 의사 추모기념관이 들어서 있어 시대의 변화를 절감케 한다).
이밖에도 두 건의 ‘우남’ 기념물이 더 있는데, 우남도서관과 우남회관이 그것이다. ‘우남도서관’은 1958년에 서울이 아니라 대전에 건립됐는데, 현재 대전 중구청 뒤편 주차장과 맞닿아 있는 대전 시립 연정국악원 건물이 바로 그것이다. ‘우남도서관’ 역시 이승만 탄신 80주년 기념으로 세운 것으로 건립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내려와 건축 과정을 살펴봤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1978년에 개관한 서울 세종로 소재 세종문화회관은 그 자리에 있던 서울시민회관이 1972년 화재로 전소되자 새로 지은 것이다. 그런데 서울시민회관의 전신이 바로 ‘우남회관’이다. 해방 후 부민관 건물을 국회의사당 등으로 사용하면서 체신부 청사 자리에 새로운 문화예술 공간으로 지은 것으로, 1956년 6월 20일 기공식을 한 후 5년 뒤 1961년 10월 31일 준공식을 가졌다. 기공식은 이승만 정권 때였으나 준공식 테이프는 이승만이 아니라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끊었다.
● 조선일보의 낯 뜨거운 ‘이승만 띄우기’
몇 년 전부터『조선일보』는 ‘이승만 띄우기’에 혈안이 돼 있다. 살아서 권좌에 있을 때는 ‘찬양’에 앞장서더니 이제는 죽은 이승만 ‘살리기’에 여념이 없다. 적어도『조선일보』가 공기(公器)를 표방한다면 최고권력자는 감시의 대상이 돼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물론 그런 적이 전혀 없진 않았다.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해서는 재임시절이나 사후나 눈에 쌍심지를 켜고 매서운 화살을 비오듯 날려대왔었다. 그런데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는 찬양 보도로 일관하면서 이승만·박정희 홍보매체를 자임하고 나선 까닭은 무엇일까?『조선일보』의 눈물겨운 ‘이승만 띄우기’ 사례 몇을 살펴보겠다.
앞서서 이승만 ‘80회 탄신’ 때 각종 기발한 탄신 경축행사를 소개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이날『조선일보』는 이를 어찌 보도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도서관으로 달려가 그 날짜 마이크로필름을 검색해 보았다. 그랬더니 과연 예상했던 대로였다. 제호 옆에 이승만 대통령 부부가 나란히 선 대형 사진을 싣고는 그 아래에 ‘제80회 생일을 맞은 이 대통령’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리고 사진 옆에는 미국 뉴욕에서 많은 외교관들이 이 대통령의 장수를 기원하는 축하모임을 가졌다고 큼지막하게 보도했다.
그 사진을 보면서 필자는 문득 일제 말기『조선일보』의 지면 하나가 떠올랐다. 제호 위에 일장기를 자랑스럽게(?) 올려놓고는 그 옆에는 용(龍) 한 마리와 미치노미야 히로히토[迪宮裕仁] 일왕(日王) 부부의 사진을 실은 바로 그 장면 말이다. 기회만 있으면 ‘민족지’라고 떠들어대는 신문이 민족 전체가 일제의 압제에 신음하고 있을 때 바로 이런 작태를 보였다. 이 지면 하나로『조선일보』의 정체는 만천하에 드러났다고 하겠다. 시대만 바뀌었을 뿐이지 최고권력자에 대한 아부와 찬사로 일관하는『조선일보』의 편집방침은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한 게 없다.
그러면 ‘80회 탄신’일인 3월 26일 당일자만 그랬을까? 서울운동장에서 국경일에 버금갈 만한 이승만 ‘80회 탄신’ 경축행사가 있은 그 다음날 조선일보는 거의 광란에 가까운 지면을 꾸렸다. 사회면도 아닌, 1면에 서울운동장 행사장면을 찍은 항공사진을 싣고는 제호 옆에 ‘이 대통령의 제80회 탄신일을 경축’이라는 대형 제목을 달았다. 관련 사설은? 당연히 있었다. 이날 조선일보는「이 대통령의 80회 탄신을 축하함」이라는 사설에서 이승만을 한껏 추켜세웠다.
˝오늘 이 대통령의 80회 탄신을 맞이하여 노(老)대통령에게 경하의 뜻을 표하는 동시에 우리 자신의 환희와 감격을 느끼게 된다. 80이면 고희에 10년이 더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이 대통령에게 적용되지 않기를 희망한다. 가능하다면 백천(白千)세가 거듭 되었으면 한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의 전도(前途)에는 해결해야 할 중대문제가 많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에게 더욱 신의 가호가 있어서 북진통일의 대업을 완수하고 국가 기초를 더욱 확고히 하는 데 더 한층 노력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한다.˝
굳이 설명을 보탤 필요가 있을까도 싶지만 사족을 그린다면, 이 대통령의 80회 탄신을 맞아 “우리 자신의 환희와 감격을 느끼게 된다”고 한 대목이 눈에 거슬린다. 이승만은 민주공화국 체제에서 선거로 뽑은 선출직 대통령이다. 그런데 그를 바라보는 조선일보의 시각은 군신(君臣) 혹은 주종(主從)관계와 같은 봉건적인 자세로 일각에서 그를 ‘국부(國父)’로 칭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하겠다. 당시 이미 80세인 이승만을 향해 ‘백천(白千)세가 거듭 되었으면 한다’고 한 것 역시 과거 왕조시대에 ‘천세(千歲)’ ‘만세(萬歲)’ 하던 것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다시 말해 이승만은 ‘국왕’이고 대한민국 국민은 ‘백성’이란 셈이다.
조선일보는 요즘도 어린이용 소년조선일보를 간행하고 있는데 이 신문은 일제강점기에도 있었고 이승만 정권 시절에도 발행되고 있었다. 그럼 이 소년조선일보는 이승만의 ‘80회 탄신’을 그냥 지나쳤을까? 그럴리가? 당연히 대문짝만하게 보도했다. 3월 27일자 1면 제호 아래 ‘리 대통령 각하 제80회 탄신 경축식장’ 행사 사진을 싣고는 그 아래 ‘여든 돌 맞이하신 우리 대통령’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리고 그 오른쪽에 ‘어린 시절의 우리 대통령’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나란히 실었다. 얼핏 보면 북한『로동신문』의 지면을 보는 착각이 들 정도다.
앞에서 이승만의 호가 ‘우남(雩南)’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아첨꾼들이 그의 호를 따서 우남로, 우남공원, 우남정, 우남회관, 우남도서관 등등을 명명했다는 얘기도 소개했다). 그런데 이승만의 호 ‘우남’을 갖고 장난질을 한 최대 사기극이 뭔 줄 아는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명칭을 ‘우남’으로 바꾸려고 했던 사건이다. 만약 그때 이 일이 성사됐었더라면 ‘서울시’는 잠시나마 ‘우남시’라는 명칭을 갖게 됐을 것이다.
8·15해방 후 미군정은 일제강점기 당시의 수도 명칭인 ‘경성(京城)’을 폐기하고 ‘서울’을 새 수도의 이름으로 정했다. 물론 미군정이 수도의 새 명칭으로 ‘서울’을 정한 것을 두고 논란이 있을 수는 있다. 앞서 한성(漢城), 한양(漢陽) 등의 명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서울시’를 이승만의 호를 따서 ‘우남시’로 하자는 것은 얘기가 다르다. ‘우남시’로의 명칭 변경 논의는 1955년 이승만의 제안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승만은 ‘서울’이 지명이 아니라 수도를 가리키는 말이며, 외국인들이 발음하기 어렵다며 ‘서울’ 대신 다른 명칭으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대통령이 한 마디 하자 다들 알아서 기기 시작했다. 공무원들은 실체도 불분명한 소위 ‘수도명칭조사위원회’라는 조직을 꾸리고 명분 축적을 위해 여론조사를 시작했다. 여론조사라고 해야 요즘 같은 전문 여론조사기관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우편접수뿐이었는데 그게 얼마나 믿을 만하겠는가? 묘하게도 위원회가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여론조사 결과 1위는 이승만의 호를 딴 ‘우남시’로 나왔다. 접수된 편지 3천여통 가운데 절반가량이 ‘서울시’ 대신 ‘우남시’를 선택했다는 얘긴데 이 편지들은 대체 누가 보낸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시’를 ‘우남시’로 바꾸지 못한 데는 정치권과 여론의 반대가 컸기 때문이다. 이일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야당 정치인 가운데 한 사람은 당시 민주당 소속 소장파 김영삼 국회의원이었다. 김 의원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서 “이 대통령의 행동은 아르헨티나 후안 페론의 자찬(自讚)과 같은 것으로 이 대통령은 점점 독재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밖에 언론의 반대 목소리도 컸다. 경향신문·동아일보 등은 여러 차례에 걸쳐 ‘우남시’로의 변경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면 이에 대한 조선일보의 입장은 어땠을까? 조선일보는 ‘수도명칭조사위원회’라는 실체도 불분명한 위원회의 조사 결과(‘우남시’ 1위)를 1956년 1월 7일자에 보도했다. 그리고는 거의 똑같은 내용을 19일자에 다시 반복해서 실었다.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사설이나 기사를 통해 적극적인 찬성을 밝힌 바는 없지만 그렇다고 동아일보나 경향신문처럼 반대 기사를 실은 적도 없다. 특히 “우남시(雩南市)가 1위”라는 제목의 기사를 두 차례나 게재하면서 부제를 달리한 걸 보면 이는 편집상의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실은 것으로 보인다. 이를 간접적인 ‘찬성’으로 보면 무리일까?
조선일보의 ‘이승만 띄우기’는 이로부터 40년 뒤인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다시 부활했다. 자사 지면을 통해서는 기획기사를 연재하고 사업 부서에서는 대대적인 특별전을 진행했다. 전시회 명칭은 ‘이승만과 나라세우기’인데, 얼핏 보면 대한민국은 이승만 혼자서 세웠다는 식으로 착각이 들게 한다(이는 경제개발을 박정희가 혼자서 다했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그해 2월 5일 서울 양재동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개막식에는 ‘우남시’ 명칭 개정을 반대했던 김영삼 대통령도 참석했다. 전시회 개막 이틀 전 조선일보는 사고(社告)를 통해 다음과 같이 전시회 기획의도를 밝힌 바 있다.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며 오늘의 대한민국을 건국한 대통령 이승만은 불굴의 항일투사로 공산주의와 맞서 싸운 선견의 정치인으로 세계열강들 가운데서 탁월한 국제감각으로 평생을 나라를 재건하고 수호하는 데 헌신한 애국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일제를 청산하지 못한 대통령, ‘4·19시위’를 유발한 독재자로 부정적인 시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승만은 말년의 과오만이 아니라 그의 전 생애(1875년~1965년)가 한국의 근대사였고 역사를 개척한 주역이다는 점에서 다시 평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승만과 나라세우기 전’은 바로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있는 그대로 보이는 자리로 재평가의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사고’에서 이승만에 대한 평가를 두고 “조선 말기,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광복, 건국, 6·25동란, 전후 복구, 4·19시위, 하야, 망명지 하와이에서의 별세, 유해환국, 국립묘지 안장 등 있었던 사실 그대로를 바탕으로 정리되어야 할 것”이라고 못 박았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다. 이승만의 생애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시기는 그가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4·19혁명으로 하야할 때까지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경우 이 시기에 발생한 이승만 정권의 각종 실정(失政)은 소흘히 다룬 채 일제강점기 해외에서의 외교활동이나 6·25동란 관련 부분에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조선일보가 특별전을 마친 후 펴낸《이승만과 나라세우기》라는 화보집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각종 ‘권위주의 통치’는 전후복구 항목 속에 포함돼 있고, 4·19혁명을 유발케 한 ‘독재’ 관련 부분은 2쪽에 불과하다. 반면 부인 프란체스카와의 만남, 그가 남긴 한시와 서예, 심지어 하와이 망명생활 등을 각각 4쪽이나 할애했으며, 유품도 8쪽에 걸쳐 다뤘다. 이래놓고도 과연 ‘사고’에서 밝힌 대로 “이승만을 있는 그대로 보였다”고 할 수 있을까? 이건 조선일보가 말하는 “재평가의 출발점”이 아니라 “미화의 출발점”이다. 그러니 그 귀착점은 안 봐도 뻔할 뻔자다. ‘이승만 동상 건립’이 바로 그것이다.
최보식 조선일보 선임기자는 2011년 4월 21일자〈간악한 흑심(黑心)이라 해도 좋다〉는 제하의 칼럼에서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 이승만 동상을 세우면 이명박 대통령에게 최고의 업적이 될 것”이라며 MB정부에 이승만 동상 건립을 촉구하고 나섰다. 어찌 보면 새로울 것 하나 없는 주장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조선일보는 이 같은 주장을 해왔으니까. 2000년대 들어서도 조선일보는 사내 필진은 물론 교수들의 기고를 통해 틈만 나면 이승만 동상 건립을 주장해왔다. 그들이 펼쳐온 주장의 요지는 ‘건국 대통령에 대한 대우가 너무 소흘하다’는 것인데, 그들의 눈에는 ‘독재자 이승만’의 면모는 전혀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남산에 다시 세워진 이승만 동상…… 그리고 조선일보의 ‘이승만 우상화’
● 남산에 다시 선 ‘독부(獨夫) 이승만(李承晩)’ 동상
남산(南山)에 고(故) 이승만(李承晩) 전 대통령 동상(銅像)이 다시 세워졌다. 남산 중턱에 있던 초대형 이승만 동상이 4·19민중혁명(四一九民衆革命) 후 철거된 지 꼭 51년만이었다. 이번에 세워진 동상은 한국자유총연맹(韓國自由總聯盟) 회원들의 성금을 모아 제작한 것으로 2011년 8월 25일 서울 중구 장충단로의 자유총연맹광장에 건립되었다. 이 동상은 이화장(梨花莊), 배재고 교정, 국회 본관 중앙 홀, 청남대 광장 등에 이어 전국에서 다섯 번째 이승만 동상이 되는 셈이다.
자유총연맹이 이번에 이승만 동상을 건립하게 된 데는 나름의 ‘인연’이 하나 있다. 이승만은 자유총연맹의 부리랄 수 있는 아시아민족반공연맹(APACL) 창설자로 자유총연맹으로서는 ‘시조(始祖)’랄 수도 있다.
6·25남북전쟁(六二五南北戰爭) 후 이승만은 아시아에 반공통일전선을 구축할 목적으로 1953년 11월 대만에서 장제스[蔣介石] 주석과 정상회담을 갖고 이런 취지에 합의를 보았다. 이를 토대로 이듬해 6월 15일 경남 진해에서 민간 반공기구인 아시아민족반공연맹을 결성하게 되었다. 아시아민족반공연맹 한국 지부는 1964년 1월 한국반공연맹으로 개편되었고, 1989년에는 다시 현재의 한국자유총연맹으로 재출범하게 되었다.
이런 ‘인연’에서 본다면 자유총연맹 측이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동상을 건립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금만 시각을 달리해서 보면 얘기는 다르다. 즉 사회적 논란이 된 인물의 특정 면만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켜 동상을 세우는 것은 또 다른 논란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대표적 친일기업인 박흥식(朴興植)이 설립한 모 학교 교정에 그의 동상이 한동안 서 있었다. 학교 측으로서는 박흥식이 설립자라는 이유로 교정에 동상을 세웠을 터이다. 그런데 그는 학교 설립자이기 이전에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식민지 지배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친일파로 사회적 지탄을 받아온 인물이다. 개인집 마당이라면 몰라도 학교와 같은 공적 공간에 문제적 인물의 동상을 세우는 것은 결국 저항을 낳게 마련이며 박흥식 동상 역시 그런 연유로 근년에 헐린 바 있다.
자유총연맹 측이 이 시점에서 이승만 동상을 세운 점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2011년 KBS의 ‘이승만 찬양방송’인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둘러싸고 이승만에 대한 논쟁이 한창 가열됐었다. 그를 둘러싼 역사적 평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아직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이 ‘반공(反共)’의 상징인물이라고 해서 자유총연맹광장에 그의 동상을 세운다면 이는 이승만의 ‘반공 지도자’란 면모만 부각시킨 결과다.
자유총연맹 측이 이승만 동상을 당당하게 건립하려면 무엇보다도 이승만의 ‘백색독재’ 정치와 독립운동자금 횡령 문제를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이승만 독재정권이 쏜 총탄과 휘두른 도끼·몽둥이를 맞고 죽어간 수유리 국립묘지의 4·19혁명 영령들에게 자유총연맹은 대체 뭐라고 해명할 것인가? 그렇지 못할 경우 이승만의 동상은 언젠가 또 다시 헐리게 될 것이다.
2011년 6월초 부산 서구 부민동 ‘임시수도기념거리’의 임시수도기념관 앞에 세워진 이승만 동상에 붉은 페인트가 뿌려졌다. 이 동상은 부산 서구청이 4·19민중혁명 추모사업단체 관계자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2011년 4월초에 세운 것이다. 누군가 뿌린 붉은색 페인트는 황금색 동상의 머리에서부터 흘러내려 얼굴 전체를 붉게 물들인 후 왼쪽 가슴을 타고 흘러내렸는데, 마치 머리를 다쳐 피를 흘리고 선 모습처럼 보기에도 흉측했다.
여론을 무시하고 무리를 해서 동상을 세우다보니 결국 이런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이승만을 추앙하기 위해 만든 동상이 결국 그를 또 다시 욕보이는 결과를 빚고 만 것이다. 그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자유총연맹은 이승만 동상 건립을 강행한 것이다. 4·19민중혁명 직후 남산에 있던 이승만 동상이 철거된 과정을 생각해보면 끔찍하기조차 하다.
남산의 이승만 동상은 이승만의 80회 생일(1955년 3월 26일)을 맞아 구성된 ‘이승만 대통령 제18회 탄신경축 중앙위원회’ 주관으로 세운 것이다. 동상이 세워진 자리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신궁 본전이 있던 남산 중턱으로, 서울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요지였다. 동상의 크기(높이)는 본체 7미터, 기단부를 합치면 25미터에 달하는 초대형으로 당시로선 세계 최대 규모였다. 동상 준공식은 제3대 대통령 취임식 당일인 1956년 8월 15일 거행됐는데, 이틀 뒤 8월 17일자『경향신문』에서 소개한 준공식 당일의 풍경이다.
˝지난 15일 오후 4시부터 시내 남산공원에서는 김 대법원장, 이 민의원 의장을 비롯한 3부 요로와 8·15광복절 및 제3, 4대 정부통령 취임을 경축하기 위해 내한 중인 각국의 외교사절, 그밖에 내외 귀빈 및 일반시민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이 대통령 동상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이 대통령 제80회 탄신경축 중앙위원회 주관으로 건립된 동(同) 동상은 작년 10월 3일 기공 이래 10여개월에 걸쳐 7만여명의 인원과 총공사비 2억 6백만환이 소요된 것이며, 높이 81척에 건립부지 3천여평을 차지하고 있다.˝
한편 탑골공원에도 이승만 동상이 하나 서 있었는데 이 동상은 하야 발표 당일(4월 26일) 성난 시민들이 철거했다. 반면 남산 동상은 그해 8월 말에야 철거됐는데 이는 순전히 큰 덩치 때문이었다. 당시 쌀 2만 6백가마에 해당하는 거액의 공사비를 들여 연인원 7만여명이 10여개월에 걸쳐 만든 것인 만큼 철거에도 적잖은 비용과 시간이 필요했다.
그해 7월 23일 국무회의에서 남산 이승만 동상의 철거가 결정됐다. 그 다음날『동아일보』는「권세와 아부로 남산에 세운 이 박사 동상도 하야하기로」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살아있는 사람의 동상을 굳이 세워 본인에게도 욕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며 “민중의 뜻에 의하여 그의 우상이 내려오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서울시 당국은 8월 13일 내무부로부터 동상 철거 지시를 받고서 8월 19일부터 철거작업에 돌입했다. 이 날짜 경향신문은 “23일까지 철거작업을 모두 마칠 예정이며, 이승만의 80회 탄신을 축하한다는 뜻으로 졸도들이 국민들의 고혈을 빨아 세운 이 동상의 무게는 10톤”이라고 보도했다.
철거반은 기증기 등 중장비를 동원해 동상 해체작업에 들어가 그달 30일 철거를 마무리했다. 남산 동상은 철거하는 데만 근 열흘이 걸렸으며, 철거비용도 170만환에 달했다. 천년만년 갈 것 같던 이승만 동상은 건립된 지 4년만에 철거되는 수모를 겪게 되었고, 동상이 섰던 자리에는 분수대가 들어섰다.
그 후 철거된 이승만 동상들은 어찌 되었을까? 결론을 앞세우면 천덕꾸러기로 떠돌다가 현재도 서울시내 한 민가에 방치돼 있다. 이승만 집권 시절에는 그를 국부(國父)라 일컬으며 그 밑에서 고관대작을 지낸 자가 한둘이 아니었지만 그가 권좌에서 물러나자 하나같이 오불관언이었다. 그의 동상을 챙긴 사람은 대한방직 간부를 지낸 ‘민간인’ 홍윤후 씨였다.
홍 씨는 1963년 6월 어느 날 지인으로부터 이승만 동상이 영영 사라질 상황이라는 얘기를 전해 듣고 당시 서울 종암동에 있던 서울시 창고로 달려갔다. 그곳에 도착해보니 4·19민중혁명 직후에 철거된 이승만 동상이 전기톱으로 분해돼 용광로로 들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에 홍 씨는 동상 해체작업을 벌이고 있던 사람들을 설득하여 개인 돈 50만원을 주고 이를 인수하여 명륜동 자택 정원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 상태가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돼 오고 있다.
한편 이승만 동상 얘기는 4·19민중혁명 이후 이승만의 우상들이 모두 철거되면서 한동안 화젯거리가 아니었다. 그러다가 다시 이 얘기가 나온 것은 1970년대 후반부터인데, 모두 이승만과 인연이 있는 곳들이었다.
4·19혁명 이후 제일 먼저 이승만 동상을 세운 곳은 인하대학이었다. ‘인하’라는 교명은 ‘인천’과 ‘하와이’의 머리글자에서 따온 것인데, 하와이에 사탕수수 농장의 한인(韓人) 노동자로 90퍼센트는 인천 출신이었다. 이들은 자녀교육을 위해 하와이에 한인 기숙학교를 설립했는데, 그때 이승만이 교장을 맡았다. 8·15해방 후 이들이 낸 성금으로 1954년 인하대학의 전신인 인하공과대학이 개교하게 된 것이다. 인하대학은 1979년 2월 24일 이승만 동상을 세웠는데, 1983년 10월 일부 학생들에 의해 동상이 철거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간 학교 측은 동상을 보관해오다가 2011년 9월 동상을 다시 세우기로 결정한 바 있다.
그 다음으로 이승만 동상이 세워진 곳은 배재고등학교다. 이승만은 배재고의 전신인 배재학당을 졸업했는데, 이런 인연으로 배재고는 1984년 2월 28일 교정에 이승만 동상을 세웠다. 이어서 해방 40주년인 1985년 8월 15일을 맞아 하와이에 이승만 동상이 세워졌으며, 2년 뒤 1987년 2월에는 대전에 있는 배재대학, 그 이듬해인 1988년에는 이화장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인하대학-배재고-하와이-배재대학-이화장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인하대학-배재고-하와이-배재대학-이화장 순으로 그와의 연고를 기반으로 해서 그의 동상이 하나둘씩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배재대학에서 제동이 걸렸다. 동상을 세우던 1987년 그해 6월 민중항쟁을 계기로 학생들이 교내에 있던 그의 동상을 철거하고 말았다. 이에 학교 측이 동상을 다시 세우자 학생들이 계란과 페인트를 끼얹는 등 철거시위를 벌여 1997년에 또 다시 철거됐다. 그로부터 11년 뒤인 2008년 학교 측은 교수와 학생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세번째로 이승만 동상을 다시 학교에 세웠다. 동상 건립에 반대해온 교수 및 재학생, 졸업동문들은 이날 이승만 동상 앞에서 ‘독재자 이승만 동상 건립 웬 말이냐?’ 등의 내용이 담긴 피켓을 들고 침묵시위를 벌였다.
이승만과의 인연을 앞세워 교육기관에서 앞 다퉈 그의 동상을 세우고 있고 심지어는 과거에 철거된 동상마저 재등장하고 있다. 세계 최대 규모로 남산에 세워졌던 그의 동상이 4·19민중혁명 후에 철거된 것은 이미 까마득한 옛일이 되고 말았다. 일설에 의하면 이승만 추종자들은 광화문네거리에 그의 동상을 세우려고 하고 있다고 한다. 이승만 추종자들은 독재자 이승만을 이순신(李舜臣)·세종(世宗) 반열에 올리고 싶은가 보다. 그리고 그들은 그 다음 순서로는 또 다른 독재자인 박정희(朴正熙)의 동상을 세우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개인이든 특정 집단이든 물리력을 동원해 특정인의 동상을 세우려고 하면 세울 수는 있다. 예를 들어 이완용(李完用)·송병준(宋秉畯)의 후손들이 광화문네거리에 땅을 사서 그곳에 이완용·송병준 동상을 세운다면 세울 수는 있다. 문제는 누가 그 동상 앞에 머리 숙여 존경심을 표할 것이며, 또 그렇게 세워진 동상이 과연 그 자리에 무탈하게 서 있을 수 있을까? 모르긴 해도 그리 오래지 않아 누군가에 의해 그 동상은 처참하게 훼손되거나 아니면 목에 밧줄이 걸릴지도 모른다. 산 사람도 아닌 동상의 목에 밧줄이 걸린다면 이는 사실상 부관참시(剖棺斬屍)다. 즉 그 인물을 두 번 죽이는 셈이다.
● 이승만 ‘80회 탄신’ 종합선물세트
이승만 동상 얘기를 쓸 무렵 오랜만에 자료 파일을 뒤적여 수년전 고서점에서 구입한 전단지 가운데 하나를 찾아냈다. 손바닥 크기의 이 전단지는 사실은 ‘초대장’이다. 행사 일시는 1955년 6월 15일, 장소는 남한산성 서장대, 초청자는 당시 경기도지사로 있던 이익흥(李益興)이다. 주최 측은 이날 교통 편의를 위해 당일 12시 30분 정각에 경기도청 정문 앞에 버스를 준비해뒀다. 그리고 참석자는 당일 이 초대장을 지참하고 참석하란다. 대체 무슨 행사기에 남한산성에서 행사를 열었으며, 또 초청자가 경기도지사였을까?
《대한뉴스》제59호(1955년 7월 4일 제작)에 따르면, 이날 행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송수탑 건립과 제막식’이었다.《대한뉴스》는 6월 15일 오후 ‘유서 깊은 남한산성 일각’에서 이승만 대통령 송수탑 제막식이 성대히 열렸다고 보도했다. 이날 행사장에는 함태영 부통령 및 정부 각료, 내빈들이 참석했으며 변영태 외무부 장관과 내외 요인들이 축사를, 송수탑 건립위원장인 이익흥 경기도지사가 송수탑 건립 경과 보고를 했다. 이어 인천여고 학생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만수무강을 비는 합창을 했다고 보도했다.
「위키백과」와「네이버」에 따르면, 이승만 대통령은 1875년생으로 나온다. 따라서 1955년이면 이승만이 80세가 되는 해다. 바로 이 해 이승만의 80세 생일을 맞아 요즘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경축행사가 벌어졌다. 그야말로 이승만 대통령 ‘80세 탄신 경축’ 종합세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老) 국가원수의 건강을 비는 게 허물이랄 수는 없겠지만 문제는 그 정도가 송축(頌祝) 차원을 넘어 아부의 극치를 보였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80회 생일을 맞은 이승만 대통령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송수탑(頌壽塔)은 조각가 윤효중(尹孝重)이 만든 것이다. 참고로 윤효중은 194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일본의 전통 풍습인 천인침(千人針)을 소재로 한 조소 작품을 출품해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전쟁 승리를 기원하고 대화숙(大和塾)에서 강의를 맡는 등 친일행위 전력이 있었다. 날개를 펼친 봉황새를 탑 꼭대기에 조각해 얹은 이 탑은 ‘80세 탄신’ 경축행사의 일환이었다. 송수탑을 세운 경기도지사 이익흥은 일제강점기에 경찰간부를 지낸 인물로 흔히 아첨꾼의 상징으로 불린다. 어느 핸가 이승만 대통령이 낚시를 하러 갔다가 생리현상으로 방귀를 뀌자 이익흥이 이를 냉큼 받아서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아부를 떨었다는 얘기도 있다. 이승만이 몇 번 들른 것 말고는 별다른 연고도 없는 남한산성에 송수탑을 세운 것 하나만 봐도 알 만하다 하겠다.
이승만 우상화는 대통령 취임 이후부터 시작됐으나 6·25동란이 끝난 이듬해인 1954년부터 극으로 치달았다. 학교 교실에 이승만 초상화가 내걸린 것은 국가원수이니 그 시절엔 그랬다고 쳐도 이승만 생일에 집집마다 태극기를 단 것은 예우 차원을 넘은 ‘우상화’라고 할 수 있다. 이어 우표와 화폐에 이승만의 얼굴이 등장하더니 마침내 서울시내 요소에 이승만 동상도 세워지기 시작했다. 탑골공원을 비롯해 남산 중턱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또 전국 각지에서는 소위 ‘이승만 찬가’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한편 이승만 우상화는 ‘80세 탄신’인 1955년에 극치를 보였다. 우선 이승만이 80세 생일을 맞은 3월 26일 당일 벌어졌던 각종 경축행사를 정리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대통령 취임식도 아니고 대통령의 80회 생일잔치를 이처럼 요란하게 치른 경우는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그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당일 상황을 기록한《대한뉴스》(제54호)에 따르면, 당일 아침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경무대(현재의 청와대)에서 ‘80회 탄신’을 축하하러온 내외의 방문객들을 맞느라 정신이 없었다. 외교사절로는 ‘80회 탄신’을 맞아 특별히 내한한 밴플리트 장군을 비롯해 필리핀 공사 테일러우드, 콜터 장군, 왕둥위안 한국주재 중화민국 대사 등이 잇따라 경무대를 예방했다. 이어 국내 3부 요인을 비롯해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경무대를 찾아 그의 ‘80회 탄신’을 축하했다. 현직 대통령의 ‘80회 생신’이니 축하인사를 드리는 것은 우리의 미풍양속이다.
방문객 접견을 마친 이승만 대통령 부부는 승용차 편으로 서울운동장으로 향했다. 이날 오전 이곳에서는 대대적인 경축행사가 준비돼 있었다. 시민과 학생 수천명이 스탠드를 가득 메운 가운데 운동장에서는 숙명여고, 배재고 남녀 학생들이 고전무용과 매스게임을 벌이며 잔치 분위기를 띄웠다. 학생들은 운동장에서 이 대통령의 ‘80회 탄신’에 맞춰 ‘80’이란 숫자를 연출했으며, 이들 주위로는 ‘만수무강(萬壽無疆)’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북한에서는 김일성·김정일 부자를 우상화하기 위해 더러 이와 같은 형태의 카드섹션 행사를 벌이기도 한다).
학생들은 물론 군인들도 이날 경축행사에 대거 동원됐다. 서울운동장에서 경축행사가 열릴 때 하늘에서는 공군 전투기 여러 대가 공중 분열식을 벌였다. KBS가 광복 6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영상실록에 따르면, 이날 오후에는 세종로에서 육군과 공군, 해병대 장병들이 대규모 시가행진을 벌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행진에는 마치 국군의 날 기념행사처럼 기갑부대도 등장했다. 이 영상실록을 소개하는 내레이터는 “대통령의 생일이 국경일과 같은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이날 경축행사는 비단 이것뿐이 아니다. 당일 저녁에는 이승만 탄신 경축음악회를 위해 특별초청을 받고 25년만에 귀국한 작곡가 안익태(安益泰)가 지휘하는 경축음악회가 성대하게 열렸다(안익태는 그해 4월 18일 정부로부터 최초로 문화훈장을 받았다). 이밖에도 전국에서 ‘80회 탄신’ 경축기념식수와 경축경노회가 벌어졌으며, 당일 열린 전국무술대회에는 이승만이 현장에 구경을 나오기도 했다. 또 탄신일 3월 26일~27일 이틀간에 걸쳐 서울시내 전차들은 ‘80회 탄신’ 경축 꽃을 달고 다녔는데 당시 이를 ‘꽃전차’라고 불렀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 ‘80회 탄신’ 기념우표가 발행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것이었다. 초대, 2대, 3대 취임기념을 비롯해 80회, 81회 탄신기념 우표 등 재임기간 동안에 그의 얼굴이 담긴 우표는 모두 6종이 발행됐다. 기념우표에 이어 심지어 생존인물인 그가 화폐에도 등장했다. 1953년 지폐에 한복차임으로 처음 등장한 이후 1957년부터는 한복 대신 양복차림으로 바뀌었다가 4·19혁명 뒤인 1962년부터는 지폐에서 그의 얼굴이 사라졌다.
이밖에 ‘80회 탄신’을 경축하여 공보실에서는 현상문예를 공모했고, 정부기관지 격이던 서울신문사에서는 축하 글을 묶어「헌수송(獻壽頌)」을 펴내기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서전『운명이다』에 보면, 1960년 전국 학교에서 ‘이승만 대통령 생신기념 백일장’이 열렸는데, 당시 중학교 1학년이던 노무현이 ‘백지동맹’을 선동하여 파란을 일으킨 얘기가 나온다. 80회 생일 때(1955년)뿐 아니라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이승만 우상화가 진행된 정황이 읽히는 대목이다. 또 그 무렵부터 전국에는 그의 ‘80회 탄신’을 경축하면서 낯간지러운 축시를 써댔다. 흔히 ‘민족시인’으로 불려온 노산(蘆山) 이은상(李殷相)은 그해 희망 4월호에〈송가(頌歌)〉라는 제목으로 이승만 대통령 탄신 80주년을 기념하는 축시를 실었다.
˝이 겨레 위하시어 한 평생 바치시니
오늘에 백수홍안 늙다젊다 하오리까
팔순은 짧으오이다 오래도록 삽소서˝
‘이기붕 찬가’에 이어 전해오는 ‘이승만 찬가’의 내용은 이렇다.
˝우리나라 대한 나라 독립을 위해
일생을 한결같이 몸 바쳐 오신
고마우신 이 대통령 우리 대통령
그 이름 길이길이 빛나오리다˝
서울 도심 한가운데를 동서로 가르는 큰길의 이름은 세종로(世宗路)를 비롯해 충무로(忠武路), 다산로(茶山路), 율곡로(栗谷路) 등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긴 인물들의 아호나 시호를 딴 도로명이 서울시내엔 적지 않다. 이승만의 호는 ‘우남(雩南)’이다. 그렇다면 그의 호를 딴 ‘우남로’ 같은 도로명이나 그 밖의 기념물은 없었을까?
‘80회 탄신’ 그해(1955년) 6월 15일 남한산성에서 송수탑 제막식을 가진 함태영 부통령 등 일행은 식후에 행사를 따로 하나 더 가졌다. 바로 ‘우남로’ 개통식 참석이 그것이다. 우남로란 경기도 광주에서 남한산성을 연결하는 도로로, 우남은 이승만의 호에서 따온 것이었다. ‘우남’을 따서 붙인 이름은 이밖에도 한둘이 아니다. 우남정(雩南亭), 우남공원, 우남도서관, 우남회관 등이 그것이다.
‘80회 탄신’ 이듬해인 1956년 8월 15일 이승만의 제3대 대통령 취임식에 맞춰 남산 조선신궁 자리에 초대형 동상이 세워졌다. 이를 계기로 남산공원을 ‘우남공원’으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으며, 1959년부터는 남산 정상에 있던 팔각정도 ‘우남정’으로 이름을 바꿨다(남산 분수대 자리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신궁이 차지하고 있었고, 이승만 정권 시절에는 그의 동상이 서 있었으며, 현재는 이 일대에 백범 김구 지사 동상과 안중근 의사 추모기념관이 들어서 있어 시대의 변화를 절감케 한다).
이밖에도 두 건의 ‘우남’ 기념물이 더 있는데, 우남도서관과 우남회관이 그것이다. ‘우남도서관’은 1958년에 서울이 아니라 대전에 건립됐는데, 현재 대전 중구청 뒤편 주차장과 맞닿아 있는 대전 시립 연정국악원 건물이 바로 그것이다. ‘우남도서관’ 역시 이승만 탄신 80주년 기념으로 세운 것으로 건립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내려와 건축 과정을 살펴봤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1978년에 개관한 서울 세종로 소재 세종문화회관은 그 자리에 있던 서울시민회관이 1972년 화재로 전소되자 새로 지은 것이다. 그런데 서울시민회관의 전신이 바로 ‘우남회관’이다. 해방 후 부민관 건물을 국회의사당 등으로 사용하면서 체신부 청사 자리에 새로운 문화예술 공간으로 지은 것으로, 1956년 6월 20일 기공식을 한 후 5년 뒤 1961년 10월 31일 준공식을 가졌다. 기공식은 이승만 정권 때였으나 준공식 테이프는 이승만이 아니라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끊었다.
● 조선일보의 낯 뜨거운 ‘이승만 띄우기’
몇 년 전부터『조선일보』는 ‘이승만 띄우기’에 혈안이 돼 있다. 살아서 권좌에 있을 때는 ‘찬양’에 앞장서더니 이제는 죽은 이승만 ‘살리기’에 여념이 없다. 적어도『조선일보』가 공기(公器)를 표방한다면 최고권력자는 감시의 대상이 돼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물론 그런 적이 전혀 없진 않았다.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해서는 재임시절이나 사후나 눈에 쌍심지를 켜고 매서운 화살을 비오듯 날려대왔었다. 그런데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는 찬양 보도로 일관하면서 이승만·박정희 홍보매체를 자임하고 나선 까닭은 무엇일까?『조선일보』의 눈물겨운 ‘이승만 띄우기’ 사례 몇을 살펴보겠다.
앞서서 이승만 ‘80회 탄신’ 때 각종 기발한 탄신 경축행사를 소개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이날『조선일보』는 이를 어찌 보도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도서관으로 달려가 그 날짜 마이크로필름을 검색해 보았다. 그랬더니 과연 예상했던 대로였다. 제호 옆에 이승만 대통령 부부가 나란히 선 대형 사진을 싣고는 그 아래에 ‘제80회 생일을 맞은 이 대통령’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리고 사진 옆에는 미국 뉴욕에서 많은 외교관들이 이 대통령의 장수를 기원하는 축하모임을 가졌다고 큼지막하게 보도했다.
그 사진을 보면서 필자는 문득 일제 말기『조선일보』의 지면 하나가 떠올랐다. 제호 위에 일장기를 자랑스럽게(?) 올려놓고는 그 옆에는 용(龍) 한 마리와 미치노미야 히로히토[迪宮裕仁] 일왕(日王) 부부의 사진을 실은 바로 그 장면 말이다. 기회만 있으면 ‘민족지’라고 떠들어대는 신문이 민족 전체가 일제의 압제에 신음하고 있을 때 바로 이런 작태를 보였다. 이 지면 하나로『조선일보』의 정체는 만천하에 드러났다고 하겠다. 시대만 바뀌었을 뿐이지 최고권력자에 대한 아부와 찬사로 일관하는『조선일보』의 편집방침은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한 게 없다.
그러면 ‘80회 탄신’일인 3월 26일 당일자만 그랬을까? 서울운동장에서 국경일에 버금갈 만한 이승만 ‘80회 탄신’ 경축행사가 있은 그 다음날 조선일보는 거의 광란에 가까운 지면을 꾸렸다. 사회면도 아닌, 1면에 서울운동장 행사장면을 찍은 항공사진을 싣고는 제호 옆에 ‘이 대통령의 제80회 탄신일을 경축’이라는 대형 제목을 달았다. 관련 사설은? 당연히 있었다. 이날 조선일보는「이 대통령의 80회 탄신을 축하함」이라는 사설에서 이승만을 한껏 추켜세웠다.
˝오늘 이 대통령의 80회 탄신을 맞이하여 노(老)대통령에게 경하의 뜻을 표하는 동시에 우리 자신의 환희와 감격을 느끼게 된다. 80이면 고희에 10년이 더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이 대통령에게 적용되지 않기를 희망한다. 가능하다면 백천(白千)세가 거듭 되었으면 한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의 전도(前途)에는 해결해야 할 중대문제가 많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에게 더욱 신의 가호가 있어서 북진통일의 대업을 완수하고 국가 기초를 더욱 확고히 하는 데 더 한층 노력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한다.˝
굳이 설명을 보탤 필요가 있을까도 싶지만 사족을 그린다면, 이 대통령의 80회 탄신을 맞아 “우리 자신의 환희와 감격을 느끼게 된다”고 한 대목이 눈에 거슬린다. 이승만은 민주공화국 체제에서 선거로 뽑은 선출직 대통령이다. 그런데 그를 바라보는 조선일보의 시각은 군신(君臣) 혹은 주종(主從)관계와 같은 봉건적인 자세로 일각에서 그를 ‘국부(國父)’로 칭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하겠다. 당시 이미 80세인 이승만을 향해 ‘백천(白千)세가 거듭 되었으면 한다’고 한 것 역시 과거 왕조시대에 ‘천세(千歲)’ ‘만세(萬歲)’ 하던 것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다시 말해 이승만은 ‘국왕’이고 대한민국 국민은 ‘백성’이란 셈이다.
조선일보는 요즘도 어린이용 소년조선일보를 간행하고 있는데 이 신문은 일제강점기에도 있었고 이승만 정권 시절에도 발행되고 있었다. 그럼 이 소년조선일보는 이승만의 ‘80회 탄신’을 그냥 지나쳤을까? 그럴리가? 당연히 대문짝만하게 보도했다. 3월 27일자 1면 제호 아래 ‘리 대통령 각하 제80회 탄신 경축식장’ 행사 사진을 싣고는 그 아래 ‘여든 돌 맞이하신 우리 대통령’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리고 그 오른쪽에 ‘어린 시절의 우리 대통령’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나란히 실었다. 얼핏 보면 북한『로동신문』의 지면을 보는 착각이 들 정도다.
앞에서 이승만의 호가 ‘우남(雩南)’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아첨꾼들이 그의 호를 따서 우남로, 우남공원, 우남정, 우남회관, 우남도서관 등등을 명명했다는 얘기도 소개했다). 그런데 이승만의 호 ‘우남’을 갖고 장난질을 한 최대 사기극이 뭔 줄 아는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명칭을 ‘우남’으로 바꾸려고 했던 사건이다. 만약 그때 이 일이 성사됐었더라면 ‘서울시’는 잠시나마 ‘우남시’라는 명칭을 갖게 됐을 것이다.
8·15해방 후 미군정은 일제강점기 당시의 수도 명칭인 ‘경성(京城)’을 폐기하고 ‘서울’을 새 수도의 이름으로 정했다. 물론 미군정이 수도의 새 명칭으로 ‘서울’을 정한 것을 두고 논란이 있을 수는 있다. 앞서 한성(漢城), 한양(漢陽) 등의 명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서울시’를 이승만의 호를 따서 ‘우남시’로 하자는 것은 얘기가 다르다. ‘우남시’로의 명칭 변경 논의는 1955년 이승만의 제안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승만은 ‘서울’이 지명이 아니라 수도를 가리키는 말이며, 외국인들이 발음하기 어렵다며 ‘서울’ 대신 다른 명칭으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대통령이 한 마디 하자 다들 알아서 기기 시작했다. 공무원들은 실체도 불분명한 소위 ‘수도명칭조사위원회’라는 조직을 꾸리고 명분 축적을 위해 여론조사를 시작했다. 여론조사라고 해야 요즘 같은 전문 여론조사기관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우편접수뿐이었는데 그게 얼마나 믿을 만하겠는가? 묘하게도 위원회가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여론조사 결과 1위는 이승만의 호를 딴 ‘우남시’로 나왔다. 접수된 편지 3천여통 가운데 절반가량이 ‘서울시’ 대신 ‘우남시’를 선택했다는 얘긴데 이 편지들은 대체 누가 보낸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시’를 ‘우남시’로 바꾸지 못한 데는 정치권과 여론의 반대가 컸기 때문이다. 이일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야당 정치인 가운데 한 사람은 당시 민주당 소속 소장파 김영삼 국회의원이었다. 김 의원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서 “이 대통령의 행동은 아르헨티나 후안 페론의 자찬(自讚)과 같은 것으로 이 대통령은 점점 독재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밖에 언론의 반대 목소리도 컸다. 경향신문·동아일보 등은 여러 차례에 걸쳐 ‘우남시’로의 변경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면 이에 대한 조선일보의 입장은 어땠을까? 조선일보는 ‘수도명칭조사위원회’라는 실체도 불분명한 위원회의 조사 결과(‘우남시’ 1위)를 1956년 1월 7일자에 보도했다. 그리고는 거의 똑같은 내용을 19일자에 다시 반복해서 실었다.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사설이나 기사를 통해 적극적인 찬성을 밝힌 바는 없지만 그렇다고 동아일보나 경향신문처럼 반대 기사를 실은 적도 없다. 특히 “우남시(雩南市)가 1위”라는 제목의 기사를 두 차례나 게재하면서 부제를 달리한 걸 보면 이는 편집상의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실은 것으로 보인다. 이를 간접적인 ‘찬성’으로 보면 무리일까?
조선일보의 ‘이승만 띄우기’는 이로부터 40년 뒤인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다시 부활했다. 자사 지면을 통해서는 기획기사를 연재하고 사업 부서에서는 대대적인 특별전을 진행했다. 전시회 명칭은 ‘이승만과 나라세우기’인데, 얼핏 보면 대한민국은 이승만 혼자서 세웠다는 식으로 착각이 들게 한다(이는 경제개발을 박정희가 혼자서 다했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그해 2월 5일 서울 양재동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개막식에는 ‘우남시’ 명칭 개정을 반대했던 김영삼 대통령도 참석했다. 전시회 개막 이틀 전 조선일보는 사고(社告)를 통해 다음과 같이 전시회 기획의도를 밝힌 바 있다.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며 오늘의 대한민국을 건국한 대통령 이승만은 불굴의 항일투사로 공산주의와 맞서 싸운 선견의 정치인으로 세계열강들 가운데서 탁월한 국제감각으로 평생을 나라를 재건하고 수호하는 데 헌신한 애국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일제를 청산하지 못한 대통령, ‘4·19시위’를 유발한 독재자로 부정적인 시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승만은 말년의 과오만이 아니라 그의 전 생애(1875년~1965년)가 한국의 근대사였고 역사를 개척한 주역이다는 점에서 다시 평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승만과 나라세우기 전’은 바로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있는 그대로 보이는 자리로 재평가의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사고’에서 이승만에 대한 평가를 두고 “조선 말기,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광복, 건국, 6·25동란, 전후 복구, 4·19시위, 하야, 망명지 하와이에서의 별세, 유해환국, 국립묘지 안장 등 있었던 사실 그대로를 바탕으로 정리되어야 할 것”이라고 못 박았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다. 이승만의 생애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시기는 그가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4·19혁명으로 하야할 때까지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경우 이 시기에 발생한 이승만 정권의 각종 실정(失政)은 소흘히 다룬 채 일제강점기 해외에서의 외교활동이나 6·25동란 관련 부분에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조선일보가 특별전을 마친 후 펴낸《이승만과 나라세우기》라는 화보집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각종 ‘권위주의 통치’는 전후복구 항목 속에 포함돼 있고, 4·19혁명을 유발케 한 ‘독재’ 관련 부분은 2쪽에 불과하다. 반면 부인 프란체스카와의 만남, 그가 남긴 한시와 서예, 심지어 하와이 망명생활 등을 각각 4쪽이나 할애했으며, 유품도 8쪽에 걸쳐 다뤘다. 이래놓고도 과연 ‘사고’에서 밝힌 대로 “이승만을 있는 그대로 보였다”고 할 수 있을까? 이건 조선일보가 말하는 “재평가의 출발점”이 아니라 “미화의 출발점”이다. 그러니 그 귀착점은 안 봐도 뻔할 뻔자다. ‘이승만 동상 건립’이 바로 그것이다.
최보식 조선일보 선임기자는 2011년 4월 21일자〈간악한 흑심(黑心)이라 해도 좋다〉는 제하의 칼럼에서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 이승만 동상을 세우면 이명박 대통령에게 최고의 업적이 될 것”이라며 MB정부에 이승만 동상 건립을 촉구하고 나섰다. 어찌 보면 새로울 것 하나 없는 주장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조선일보는 이 같은 주장을 해왔으니까. 2000년대 들어서도 조선일보는 사내 필진은 물론 교수들의 기고를 통해 틈만 나면 이승만 동상 건립을 주장해왔다. 그들이 펼쳐온 주장의 요지는 ‘건국 대통령에 대한 대우가 너무 소흘하다’는 것인데, 그들의 눈에는 ‘독재자 이승만’의 면모는 전혀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 정운현『오마이뉴스』논설기자 겸『진실의 길』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