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시민항쟁 당시 지원동 주남마을 앞 도로에서 자행된 학살상황

참의부2013.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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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금남로를 가득 메운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난사하던 공수부대는 1980년 5월 21일 오후 5시경 갑작스럽게 변경된 명령에 의해 허겁지겁 도청을 빠져나갔다. 일부는 도청 후문으로 나가 조선대학 정문으로 철수했고, 도청 옆으로 나 있는 학동 방향의 도로를 따라 철수한 공수부대는 22일 새벽 주남마을에 주둔했다.

 

지원동 주남마을 일대의 주민들은 이른 새벽부터 군인들이 떼지어 주둔해 있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 종일 간헐적으로 들리는 총성은 시내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소문들과 함께 지역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이튿날 아침 일찍부터 주남마을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총탄이 무차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방안에서 얼굴도 내밀어볼 수 없었다. 다행히 마을 스피커에서 군인들이 총을 쏘고 있으므로 마을 주민들은 일체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내용의 방송이 몇 차례 계속되어 별다른 피해는 없었다. 이날 아침 공수부대가 난사한 총탄에 맞은 주민은 임주윤 씨 등 서너 명이었다. 한동안 총격을 계속하던 공수부대는 곧이어 가택수색을 시작했다. 지난밤 폭도와 불순분자들이 주남마을에 잠입했다는 것이었다. 집 안에 난입한 공수부대는 방문마다 열어젖히고 장독대까지 열어가며 샅샅이 뒤졌다. 집 안에 청년들이 있으면 세세히 물어 혹시 시내에서 잠입해 온 불순분자가 아니냐며 다그치기도 했다.

 

이 무렵 공수부대가 퇴각한 도청 안은 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되고 상황실이 운영되어 공수부대의 학살이 휩쓸고 간 이후의 질서와 치안유지, 부상자들의 치료와 희생자들의 장례대책 등으로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지하실에는 시내 곳곳에서 공수부대에게 처참하게 학살당한 시체들이 가득 차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시내 병원마다 사상자들을 수용할 수가 없어 사망자는 마당에 눕혀 놓았고, 부상자들은 복도나 현관 바닥에서 치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신들을 입관할 관이 동나 버리자 시민군은 외부에서라도 관을 들여와야 한다며 수습대책위에 차량지원을 요구하기도 했다. 자신들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관을 마련해 오겠다는 것이었다. 계엄군이 외부로 나가는 모든 도로를 철저히 차단하고 있어 시외로 나가는 것은 곧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시민군은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가 희생된 사람들의 시신을 그대로 땅바닥에 방치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시민군의 이와 같은 요구를 뿌리칠 수 없었던 수습대책위는 그들에게 소형 버스 한 대를 내주었다. 이에 무장한 시민 5명과 여고생 2명이 차량에 탑승하고 화순방면으로 향했다. 그 2명의 여고생은 도청 안에서 시신들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오는 시민들을 안내하고 시체를 깨끗이 닦아내는 일을 하다가 관을 마련하기 위해 화순으로 향하는 차량에 탑승한 것이었다.

 

한편 5월 20일경 광주시내는 중·고등학교는 물론 대부분의 공장들도 조업을 중단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가난한 농촌을 떠나 줄곧 일신방직에서 일해오던 여공 김춘례 양은 평소 기숙사에서 자신을 동생처럼 여겨주던 고영자 양에게 5월 23일이 할아버지 제사라며 함께 집으로 가자고 졸라댔다. 고영자 양은 어린 나이에 고생하면서 할아버지 제사를 찾는 그녀가 갸륵하기도 했고, 조업이 중단되어 따분하기도 해서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5월 23일 아침 일찍 기숙사를 나선 두 여공은 암담했다. 시외버스는 물론 시외전화마저 두절돼 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김춘례 양은 할아버지 제사이기도 했지만 시골에서 기다리고 있는 부모님이 걱정하실 것 같아 어떻게든 내려가고 싶었다. 두 사람은 혹시 도청 앞에 가 보면 화순까지 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곧장 도청으로 향했다. 이때 마침 관을 준비하러 화순에 가려던 소형 버스에 함께 타게 된 것이다.

 

이제 17인승 소형 버스에는 무장한 시민 5명과 여고생 2명 그리고 그 두 여공 등 모두 11명이 탑승하게 되었다. 김춘례 양은 특히 집에 갈 수 있다는 안도감으로 다른 탑승자들과는 다른 기분이었다. 11명이 탄 소형 버스는 곧장 화순으로 향했다.

 

소형 버스가 지원동에 들어설 무렵 주남마을 못 미친 야산지역에 계급장과 소속부대 마크를 떼어버린 장교 1명과 무전병이 매복해 있었다. 폭도들이 탄 차량 한 대가 화순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는 무전이 이들에게 전해졌다. 잠시 후 소형 버스 한 대가 이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무전을 받고 기다리고 있던 장교는 소형 버스가 지원동을 지날 쯤 사격지시를 내렸다.

 

소형 버스를 운전하던 김윤수 씨는 1번 버스 종점을 지나면서부터 길 양옆에 공수부대가 매복해 있음을 알아차렸다. 등골이 오싹해진 김윤수 씨는 차량을 더 빠르게 몰랐다. 그러나 김윤수 씨가 매복해 있는 계엄군을 발견하고 차량의 속도를 가한 후 1백여미터도 못 가 일시에 양편에서 총탄이 날아들었다. 여기저기서 총탄이 비오듯 집중되었다. 운전사 김윤수 씨가 그 자리에서 즉사함과 동시에 차량은 한바퀴 굴러 도로 옆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공수부대는 이미 넘어져버린 차량을 향해 여전히 집중적으로 사격을 가했다.

 

들에서 일하다가 이 광경을 처음부터 목격할 수 있었던 시민은 공수부대의 총격이 약 30초 동안 계속되었다고 증언했다. 차량은 완전히 벌집이 되어버렸고 차량 안에 있던 사람들은 8명이 현장에서 즉사했으며 3명은 부상당했다. 3명 중 남자 2명은 중상이었고 여자 1명은 파편에 맞은 경상이었다.

 

30여초 동안 집중적인 사격을 가하던 공수부대는 넘어진 차량에서 시체 8구와 3명의 부상자들을 꺼냈다. 그들은 시체 8구를 바로 맞은편에 나란히 눕히고 흙으로 덮어버렸다. 할아버지 제사를 모시러 가던 여공과 희생자들의 관을 마련하러 가던 사람들이 탑승한 소형 버스를 상대로 매복기습작전을 마친 공수부대는 시체들을 은폐한 후 부상자 3명을 끌고 주남마을 뒷산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리어카에 실려 이송되던 중상자 2명은 곧바로 병원으로 후송해야만 목숨이나마 건질 수 있을 정도의 심한 총상을 입은 상태라는 사실이 파악되자 곧바로 병사들에 의해 머리에 총격을 받아 사살되었다. 다행히 파편에 맞아 경상에 그친 여고생은 잠시 후 헬기에 태워져 후송되었다. 그 여고생은 바로 11명이 탑승한 소형 버스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홍금숙 양이었다.

 

5월 27일에 공수부대가 도청을 점령함으로써 열흘간의 광주시민항쟁이 처절한 죽음으로 끝나게 되자 비로소 이 시체들은 전남대병원으로 옮겨졌다. 더운 날씨 탓인지 아니면 너무 처참하게 총상을 입어서인지 벌써 시체들이 부패하고 있었다.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 겨우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하고 공장 생활을 하면서도 할아버지 제사부터 식구들의 생일을 어김없이 챙길 줄 알던 18세의 김춘례 양을 비롯해 방송통신고등학교 학생이었던 황호걸 군과 박대환 군, 그리고 도청 안에서 어느 누구도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시체들을 닦아내고 옷을 갈아입히며 민주화와 삶의 진실을 몇 번이고 되씹어야 했던 박현숙 양 등 10명의 이들 희생자는 모두 열 발 이상의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할아버지의 제사를 모시러 가던 여공과, 관을 마련해 먼저 산화한 희생자들의 시신을 거두려 했던 여고생과 젊은 청년들의 처절한 죽음은 1980년 5월, 광주가 왜 그토록 참혹한 능지처참을 당해야 했는지를 이 땅의 모든 민중에게 묻고 있다. 더구나 지역 주민들이 벌집이 된 차량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 안에는 무기라고는 MI소총 2정과 곡괭이 1개와 몽둥이 1개뿐이었다. 

 

이제 하복부와 엉덩이 등에 열 발의 총탄을 집중 난사당하고 양쪽 가슴에 두세발의 탄환을 맞아 모두 열다섯발 가량의 총탄을 가녀린 한 몸에 맞고 사망한 김춘례 양의 무덤 앞에서 정의를 이야기하고 민주주의를 내세워 온 학살자들에 대한 단죄는 시대와 민족사가 요구하는 민중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지원동 주남마을 앞 도로에서 자행된 공수부대의 학살만행에 죽어간 이들은 다음과 같다.

 

박현숙(신의여고 3학년 16세)·고영자(일산방직 여공 23세)·황호걸(방송통신고 3학년 20세)·박대환(송원전문대 1학년 19세)·김윤수(운전기사 27세)·김춘례(일산방직 여공 18세)·머리에 다연발 골절상과 복부 두 군데 좌측대퇴부 총상과 좌측가슴 관통상을 입은 신원미상의 희생자·그리고 6월 2일 주남마을 뒷산에서 발견된 신원 미상의 희생자 2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