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의 패자(覇者) 수(隨) 제국을 멸망하게 한 고구려의 위대한 승전(勝戰) 살수대첩(薩水大捷)
참의부2013.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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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 역사상 대외항쟁(對外抗爭)에서 가장 통쾌하고 멋진 승리가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십중팔구(十中八九)는 612년 제2차 여수전쟁(麗隨戰爭)을 종결시킨 살수대첩(薩水大捷)을 떠올릴 것이다. 살수대첩은 중국 대륙을 통일한 거대 제국 수(隋)의 군대가 고구려를 집어 삼키려고 덤벼들었다가 전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했던 전투이다. 이후 수는 고구려 정벌에서 입은 크나큰 손실을 만회하지 못하고 결국 멸망에 이르렀다.
고구려(高句麗)와 수(隨) 사이에는 589년에서 614년까지 모두 네 차례의 전쟁이 벌어졌다. 612년에 일어난 살수대첩은 이중에서 두번째 전쟁 중에 벌어졌던 전투이다. 이때 수(隨) 양제(煬帝)는 113만명이라는 전후무후한 대병력을 이끌고 직접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588년 수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기 위해 마지막 남은 왕조였던 진(陳)을 침공할 때 동원했던 병력이 50만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수의 고구려 침략이 얼마나 큰 규모였는지 알 수 있다.
수 양제가 고구려 정벌을 위해 준비했던 것은 대규모 병력만이 아니었다. 그는 고구려 정벌을 시작하기 5년 전인 607년부터 막대한 비용을 들여 신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다. 이때 개발된 무기들은 엘리베이터처럼 움직이며 그 위에서 성 안을 내려다볼 수 있게 고안된 소차(逍車)와 성벽에 접근해서 땅을 파는 전호피차(戰鎬彼車), 돌을 날리는 발석차(發石車), 이동식 사다리차인 운제(雲梯), 성문을 부수기 위한 당차(撞車), 수십명의 군사가 타고 싸울 수 있는 이동식 전투 플랫폼인 팔륜누차(八輪樓車) 등의 공성구(攻城具)들이었다.
수(隨) 양제(煬帝)가 이렇게 공성구들을 개발하는 데 주력했던 까닭은 당시 고구려의 요동성(遼東城)이 난공불락의 요새였기 때문이었다. 수차례의 전쟁을 겪으면서도 굳건히 서 있던 요동성은 수의 두번째 고구려 정벌을 맞아 큰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 정면공격을 감행한 수군의 요동성 함락 작전
수의 군대는 전쟁 초반부터 정면공격을 펼쳤다. 요동 땅으로 들어가는 데 가장 적합한 위치였던 회원진(懷遠鎭)을 선택해 공격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이곳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던 고구려군(高句麗軍)이 수군(隨軍)의 공격을 미리 예상하고 대비하였던 터라 공격이 쉽지만은 않았다.
전쟁사(戰爭史)에서 정면공격을 감행해 승리를 거둔 예는 그리 많지 않다. 전투에 있어서 대부분의 승리는 기습공격이나 측면공격을 통해 얻어내는 경우가 많았고, 설혹 정면공격을 통해 승리를 거둔 예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막대한 병력의 손실을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회원진 앞에 도달한 수군은 과감하게 도하작전(渡河作戰)을 펼쳤으나 강을 건너는 데 필요한 부교(浮橋)가 없었다. 이에 수군은 부교를 만드느라 사흘의 시간을 소모했는데, 서둘러서 만든 부교는 막상 강에 걸쳐보니 길이가 너무 짧았다. 도하를 시도하던 수군은 부교 근처에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우왕좌왕 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대사자(大使者) 온준(溫俊)과 대형(大兄) 해승유(解昇裕)·대모달(大模達) 재증협무(再曾協武) 등이 이끄는 고구려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무려 1만에 이르는 수군(隨軍) 병사들이 무방비 상태로 빗발치는 화살을 맞고 강으로 떨어지거나 죽음을 당했고, 무분랑장(茂賁郎將) 전사웅(錢士雄)과 호분랑장(虎賁郎將) 맹차(孟叉)도 다량의 화살에 격중되어 전사했으며, 우둔위대장군(右屯衛大將軍) 맥철장(麥鐵杖) 역시 고구려군 장수 해승유의 칼날에 베여 목이 달아나는 등의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1차 도하작전에서 큰 피해를 입은 수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후속부대를 기다렸다가 그로부터 20여일 후 엄청난 대군을 동원해 또 다시 정면공격을 감행했다. 고구려군은 최선을 다해 이들을 막기 위해 분전했으나, 병력의 압도적인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요하방어선을 내주고 요동성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수 양제는 여세를 몰아 연이어 요동성으로 돌진했다. 고구려군은 요동성주(遼東城主)인 대형(大兄) 고연탁(高連卓)의 통솔 아래 수군의 접근을 막기 위해 성 주변에 마름쇠를 뿌린 다음 수군의 공성구를 파괴하는 데 역점을 두고 전투에 임했다. 공성구들은 요동성에서 날아오는 돌에 맞아 파괴되었고, 충차(衝車)와 화차(火車)를 몰고 진격하던 수군 병사들은 마름쇠에 발이 찔려 상처를 입었다. 양군의 치열한 공방전은 한 달이 넘게 계속되었다. 수군은 월등한 전력을 가졌음에도 요동성을 포위만 한 채 답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수군의 평양성 공략 작전
전쟁은 빨리 끝내는 것이 상책이다. 전쟁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큰 소비행위’라는 말이 있을 만큼 한 나라의 인적·물적 자원을 모두 투입하는 일이기 때문에 오래 끌면 끌수록 그 손실이 막대해지기 마련이다.
요동성 함락이 점점 어려워지자 수(隨) 양제(煬帝)는 다른 작전을 구상했다. 흔히 수 양제는 포악한 군주의 모습만 부각되어 있지만 사실은 강남 토벌과 중원 통일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던 뛰어난 전략가이기도 했다. 이때 양제는 단문진(段文振)의 유언을 기억해냈다. 좌군 제6군 사령관으로 종군했던 단문진은 요하에 도착하기 직전 진중에서 병사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던 것이다.
“고구려인들은 그 술책이 변화무쌍하니 항복을 제의해올 경우 쉽사리 이를 받아들이지 마옵소서. 그리고 공격할 때에는 한 곳만 공격하지 마시고 주야로 나아감을 거듭하여 오직 평양성을 목표로 삼아 수륙으로 진공을 단행하옵소서. 평양성이 무너지면 나머지 성들은 절로 허물어질 것이옵니다. 한 곳에서 시일을 오래 끌다가 우기가 다가오면 양도(糧道)가 끊길 것이옵니다.”
수 양제는 단문진의 간언을 받아들여 여름 장마철이 시작되기 전에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해 고구려 국왕의 항복을 받아낸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24군 중 정예병인 부병(府兵)으로 구성된 제9군 30만 5천명을 별동대로 선발해 중간에 있는 성들은 놓아두고 평양성을 향해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부병 군단은 대릉하(大凌河) 하류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전투를 치르지 않아 전투력이 가장 양호한 상태였다.
양제는 이들에게 보급선 유지에 따르는 부담을 최소화하려고 각각 1백일치의 식량에 해당하는 쌀 3천석을 운반하게 하고, 갑옷이나 천막과 같은 장비도 모두 가져가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병사들에게 너무 과중한 일이었고, 급기야는 병사들이 진군 중에 식량을 모두 버리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고구려군의 총사령관 격인 막리지(莫離支) 겸 병마원수(兵馬元帥) 을지문덕(乙支文德)은 이러한 적군의 상황을 잘 알고, 청야전술(靑野戰術), 즉 적군의 식량이 될 수 있는 것은 모두 치워버리는 작전을 구사하여 이들을 더욱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수군 별동대는 진군 중반부터 식량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나 수군 별동대는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요동반도를 가로지르는 천산산맥을 넘어 마침내 압록강 근처에 도착했다.
● 고구려군의 게릴라 작전
《손자병법(孫子兵法)》에 뛰어난 양장(良將)은 ‘미리 이겨놓고 싸운다’는 말이 있다. 이 말처럼 살수대첩은 평양까지 진군하던 수군 별동대를 상대로 벌인 전투에서 이미 판가름 나 있었다. 이때 을지문덕은 별동대의 목표가 평양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모달(大模達) 고이중(高利重)·대형(大兄) 해승유(解昇裕)·이갑정(李岬丁) 등 부장(副將)들의 부대를 보내 여러 번의 기습작전을 통해 이들의 공성구를 없애도록 하는 데 주력했고, 설사 별동대의 진격을 막지 못하더라도 평양성(平壤城)에 대한 공격만큼은 저지하게끔 했다.
『수서(隨書)』「우문술열전(宇文述列傳)」에는 오골성(烏骨城) 근처를 지나고 있던 수군이 고구려군 기병부대로부터 공격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우중문(于仲文)이 이끈 수군(隨軍)의 제1군은 기병 4천명, 보병 8천명, 치중병 8천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해승유가 지휘하는 고구려군 기병부대의 주된 목표물은 전투병이 아닌 치중대(輜重隊)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일단 화살을 날려 적군을 혼란에 빠뜨린 다음 상대적으로 수비력이 약한 치중부대와 공성구를 집중공격하였다. 이 싸움에서 우문술(宇文述)은 고구려군 기병부대를 격퇴시켰으나 대부분의 공성구를 잃어버리는 큰 손실을 입게 되었다.
이윽고 수군이 압록강 근처에 다다르자 을지문덕은 그들의 속사정을 알아보기 위하여 항복의사를 밝히며 수군의 진영으로 들어갔다. 당시 수군 지휘관들은 식량 부족을 이유로 요동성으로 회군할 것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 양제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우중문은 황제의 질책을 어떻게 감당하겠느냐고 하면서 진격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우중문은 이미 요동성에서 장수들이 패배하는 것을 지켜본 양제로부터 “내가 진정 그대들을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노골적인 협박을 들은 적도 있었다.
을지문덕은 적의 사정을 알아내고, 지쳐 있는 수군을 효과적으로 유인하기 위한 작전을 펼쳤다. 그가 구사한 작전은 바로 소규모 부대를 운용하여 전투를 벌인 다음 일부러 패배하고 달아나는 일종의 게릴라 작전이었다.
고이중·해승유·이갑정 등이 지휘하는 고구려군은 지형을 이용하여 우선 중간의 협로마다 목책(木柵)을 세우고 수군의 진군을 가로막았다. 이들은 목책에 의지해 싸웠으나 야전에서는 도끼와 창검(槍劒)을 휘두르며 수군과 불꽃 튀는 백병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사상자가 발생하기 시작하면 기병들의 엄중한 보호를 받으며 즉각 퇴각하거나, 군영을 불태워버리고 후퇴한 뒤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병부대로 하여금 화살공격을 하게 하는 방식으로 전투를 벌였다. 고구려군은 이러한 게릴라 전투를 하루에 일곱 번이나 반복하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식량부족으로 지쳐 있던 수군은 이러한 전투를 하면서 더욱 지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수군 지휘관들은 자신들이 육박전에서 차례로 승리를 거두고 있으며, 고구려군의 목책 군영을 빼앗는 데도 성공하고 있다고 여기고 진군에 진군을 거듭했다. 이들은 고구려군이 수도인 평양성을 미끼로 삼을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하고 점점 더 함정에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 들판에는 시체가 가득하고 강가는 핏물로 넘설거리니…….
마침내 수군은 평양성에서 불과 30리 떨어진 지역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진군 과정에서 공성구를 모두 잃어버린 수군 별동대는 목표물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공격하지 못하고, 지원군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시간이 지나도 평양성에서 합류하기로 한 우익위대장군(右翊衛大將軍) 내호아(來護兒)의 군대가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수군은 오랜 진군과 식량부족으로 지친 상태에서 막연히 시간을 소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고, 이들에게는 평양성 공략을 포기하고 요동성으로 돌아갈 명분도 없었다.
이에 희망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을지문덕이 재차 항복의사를 밝히며, 항복문서를 보냈던 것이었다. 항복문서에는 수군이 철수하면 을지문덕 자신이 직접 영양왕(嬰陽王)을 모시고 양제를 만나러 갈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수군(隨軍) 사령관 우중문은 을지문덕의 항복의사에 이미 한 번 속은 적이 있었지만, 30만 대군에게 포위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고구려군도 어쩔 수 없을 것이라 여기고 철군을 결심했다.
그러나 이것은 수군이 항복의사를 받아들이고 긴장이 풀어진 채 후퇴하는 순간을 노린 을지문덕의 심리전이었다. 마침내 수군이 방어에 유리한 밀집대형을 이루며 평양성에서 물러나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고구려의 경기병들이 나타나 수군의 대형 주위를 돌면서 화살을 날렸다. 갑작스러운 기습공격에 동료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하자 수군은 대열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우중문과 우문술은 병사들에 대한 공격을 막기 위하여 기병부대를 동원해 활을 쏘는 고구려군 경기병들을 쫓아다녔지만, 고구려군은 쫓아냈다 싶으면 다시 나타나 끈질기게 공격하는 것을 수차례 반복했다. 알렉산더 대왕도 인도로 진군하던 도중 샤카(Saka)족 기마궁사들의 기습공격을 받았으나 기창(旗槍)을 든 경기병들을 활용하여 궁기병들을 물리친 적이 있다.
당시 수군 기병부대는 중기병이었기 때문에 날렵하게 움직이는 고구려군 경기병들을 쫓아낼 수는 있었으나 따라가서 무찌를 수는 없었다.『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수군이 진군하면서 고구려군과 싸웠다는 말은 있지만 이들이 고구려군을 무찔렀다는 표현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계속되는 고구려군의 기습공격 때문에 수군은 살수(薩水)에 도착할 때까지 엄청난 병력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막상 그들이 살수에 다다르자 그동안 끈질기게 따라오면서 그들을 괴롭히던 고구려군 경기병들이 사라진 것이었다.
수군은 고구려군의 기습공격이 멈춘 시점을 이용해 재빨리 강을 건너려고 했다. 다행히 수심이 깊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강을 중간쯤 건넜을 때 갑자기 강물이 불어나면서 물살이 빨라졌다. 고구려군의 수공(水攻)은 해일 같은 급류가 적군을 휩쓰는 형태가 아니라 흐르는 물의 수위롸 속도를 높임으로써 적군의 선봉과 후위를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수군은 일제히 흐트러져 선봉부대와 후속부대가 완전히 분리되었고, 바로 이때 사라진 줄 알았던 고구려 경기병들이 나타나 후방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화살은 비오듯 날아왔고, 수군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화살공격이 멎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고구려의 중갑기병들이 달려나와 수군 보병들을 살상하기 시작했다.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진 수군은 대형을 이탈하여 달아나기 바빴고, 아비규환 속에 빠진 병사들은 동료들에게 짓밟혀 죽었다. 결국 살수대첩에서 수군 별동대는 모두 궤멸되었고, 30만 5천명의 군사 중 살아남아 탈출한 수군 병사는 2천 7백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을지문덕이 지휘하는 고구려군은 살수에서 대승을 거둔 후에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살수를 빠져나간 수군을 빠르게 추격해 나갔다. 살아남은 수군은 양제가 주둔하고 있던 요동성으로 달아났지만, 백석산에 이르러 다시 고구려군의 맹공으로 치명타를 받았다.
수 양제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병사들에게 별동대가 전멸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별동대는 정예병들로 편성된 주력 부대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호아가 이끌던 부대는 행방이 묘연했고, 요동성은 그때까지도 함락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예비 전력도 이미 바닥이 난 상태에서 양제는 전쟁의 참패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별동대가 전멸했음에도 불구하고 염치 좋게 살아서 돌아온 우중문을 포박한 채 철군을 시작했다.
● 살수대첩(薩水大捷)이 남긴 의문점들
수(隨)와 고구려(高句麗) 사이에 일어났던 전쟁은 한국의 전쟁사(戰爭史)에서 가장 위대한 군사적 승리로 꼽힌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과정은 치밀하게 분석되기보다는 고구려군이 강물을 파도처럼 불어나게 해서 수군을 휩쓸어버렸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로 더욱 부각되었다.
하지만 전쟁은 전설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고, 그 승리에는 분명한 원인이 있게 마련이다. 고구려군의 승리는 단순히 강둑을 무너뜨려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병사들이 직접 활을 쏘고 창과 칼을 휘둘러서 쟁취한 것이었다. 이 전쟁은 수성전(守城戰), 강상상륙전(江上上陸戰), 유인전(誘引戰), 기습전(奇襲戰), 대규모 야전(野戰) 등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으며, 그 결전인 살수대첩은 이러한 치밀한 작전능력의 결정판이었다.
살수대첩이 남긴 의문점 중 가장 먼저 제기되는 것은 살수에서 있었던 ‘수공(水攻)’에 관한 것이다. 수군을 휩쓸 만한 양의 강물을 확보하려면 엄청난 규모의 토목공사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당시의 기술로는 이런 토목공사가 불가능했으며,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통신수단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대에 적절한 때에 제발을 무너뜨리도록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현존하는 사서(史書) 어디에도 고구려군이 수공을 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살수대첩에 관련된 기본 사료인『수서』와『삼국사기』도 마찬가지다. 다만 수공에 얽힌 이야기로는 칠불사(七佛寺)에 내려오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을 뿐이다.
˝살수에 도착한 수나라의 군사들이 물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마침 승려 세 사람이 나타나 바지만 걷어 올린 채 무릎 높이까지 오는 물을 헤치며 건너갔다. 이를 본 수나라의 군사들은 모두 앞다투어 강을 건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고, 수공의 사실 여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두번째는 행방이 묘연해진 내호아의 군대에 관한 것이다. 기존의 사서와 국방전사편찬위원회의《고구려-수·당 전쟁사》를 보면 내호아가 이끈 수군은 병력의 대부분을 잃고 대동강 근처에 있다가 우중문의 별동대가 대패하는 것을 본 후 돌아갔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만약 내호아의 휘하에 남아 있는 병력이 있었더라면 대동강 근처에서 우중문의 부대와 합쳤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최소한 이들과 만나기라도 햇을 것이다. 그러나 사서 어디에도 그러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이로 미루어 보아 내호아의 군대는 대동강 근처에서 평양에 대한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고구려군에 의해 전멸된 것으로 추측되며, 이런 연유로 우중문이 평양 근처에 도착했을 때 내호아의 군대를 대동강 근처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중원의 패자(覇者) 수(隨) 제국을 멸망하게 한 고구려의 위대한 승전(勝戰) 살수대첩(薩水大捷)
우리 민족 역사상 대외항쟁(對外抗爭)에서 가장 통쾌하고 멋진 승리가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십중팔구(十中八九)는 612년 제2차 여수전쟁(麗隨戰爭)을 종결시킨 살수대첩(薩水大捷)을 떠올릴 것이다. 살수대첩은 중국 대륙을 통일한 거대 제국 수(隋)의 군대가 고구려를 집어 삼키려고 덤벼들었다가 전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했던 전투이다. 이후 수는 고구려 정벌에서 입은 크나큰 손실을 만회하지 못하고 결국 멸망에 이르렀다.
고구려(高句麗)와 수(隨) 사이에는 589년에서 614년까지 모두 네 차례의 전쟁이 벌어졌다. 612년에 일어난 살수대첩은 이중에서 두번째 전쟁 중에 벌어졌던 전투이다. 이때 수(隨) 양제(煬帝)는 113만명이라는 전후무후한 대병력을 이끌고 직접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588년 수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기 위해 마지막 남은 왕조였던 진(陳)을 침공할 때 동원했던 병력이 50만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수의 고구려 침략이 얼마나 큰 규모였는지 알 수 있다.
수 양제가 고구려 정벌을 위해 준비했던 것은 대규모 병력만이 아니었다. 그는 고구려 정벌을 시작하기 5년 전인 607년부터 막대한 비용을 들여 신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다. 이때 개발된 무기들은 엘리베이터처럼 움직이며 그 위에서 성 안을 내려다볼 수 있게 고안된 소차(逍車)와 성벽에 접근해서 땅을 파는 전호피차(戰鎬彼車), 돌을 날리는 발석차(發石車), 이동식 사다리차인 운제(雲梯), 성문을 부수기 위한 당차(撞車), 수십명의 군사가 타고 싸울 수 있는 이동식 전투 플랫폼인 팔륜누차(八輪樓車) 등의 공성구(攻城具)들이었다.
수(隨) 양제(煬帝)가 이렇게 공성구들을 개발하는 데 주력했던 까닭은 당시 고구려의 요동성(遼東城)이 난공불락의 요새였기 때문이었다. 수차례의 전쟁을 겪으면서도 굳건히 서 있던 요동성은 수의 두번째 고구려 정벌을 맞아 큰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 정면공격을 감행한 수군의 요동성 함락 작전
수의 군대는 전쟁 초반부터 정면공격을 펼쳤다. 요동 땅으로 들어가는 데 가장 적합한 위치였던 회원진(懷遠鎭)을 선택해 공격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이곳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던 고구려군(高句麗軍)이 수군(隨軍)의 공격을 미리 예상하고 대비하였던 터라 공격이 쉽지만은 않았다.
전쟁사(戰爭史)에서 정면공격을 감행해 승리를 거둔 예는 그리 많지 않다. 전투에 있어서 대부분의 승리는 기습공격이나 측면공격을 통해 얻어내는 경우가 많았고, 설혹 정면공격을 통해 승리를 거둔 예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막대한 병력의 손실을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회원진 앞에 도달한 수군은 과감하게 도하작전(渡河作戰)을 펼쳤으나 강을 건너는 데 필요한 부교(浮橋)가 없었다. 이에 수군은 부교를 만드느라 사흘의 시간을 소모했는데, 서둘러서 만든 부교는 막상 강에 걸쳐보니 길이가 너무 짧았다. 도하를 시도하던 수군은 부교 근처에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우왕좌왕 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대사자(大使者) 온준(溫俊)과 대형(大兄) 해승유(解昇裕)·대모달(大模達) 재증협무(再曾協武) 등이 이끄는 고구려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무려 1만에 이르는 수군(隨軍) 병사들이 무방비 상태로 빗발치는 화살을 맞고 강으로 떨어지거나 죽음을 당했고, 무분랑장(茂賁郎將) 전사웅(錢士雄)과 호분랑장(虎賁郎將) 맹차(孟叉)도 다량의 화살에 격중되어 전사했으며, 우둔위대장군(右屯衛大將軍) 맥철장(麥鐵杖) 역시 고구려군 장수 해승유의 칼날에 베여 목이 달아나는 등의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1차 도하작전에서 큰 피해를 입은 수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후속부대를 기다렸다가 그로부터 20여일 후 엄청난 대군을 동원해 또 다시 정면공격을 감행했다. 고구려군은 최선을 다해 이들을 막기 위해 분전했으나, 병력의 압도적인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요하방어선을 내주고 요동성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수 양제는 여세를 몰아 연이어 요동성으로 돌진했다. 고구려군은 요동성주(遼東城主)인 대형(大兄) 고연탁(高連卓)의 통솔 아래 수군의 접근을 막기 위해 성 주변에 마름쇠를 뿌린 다음 수군의 공성구를 파괴하는 데 역점을 두고 전투에 임했다. 공성구들은 요동성에서 날아오는 돌에 맞아 파괴되었고, 충차(衝車)와 화차(火車)를 몰고 진격하던 수군 병사들은 마름쇠에 발이 찔려 상처를 입었다. 양군의 치열한 공방전은 한 달이 넘게 계속되었다. 수군은 월등한 전력을 가졌음에도 요동성을 포위만 한 채 답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수군의 평양성 공략 작전
전쟁은 빨리 끝내는 것이 상책이다. 전쟁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큰 소비행위’라는 말이 있을 만큼 한 나라의 인적·물적 자원을 모두 투입하는 일이기 때문에 오래 끌면 끌수록 그 손실이 막대해지기 마련이다.
요동성 함락이 점점 어려워지자 수(隨) 양제(煬帝)는 다른 작전을 구상했다. 흔히 수 양제는 포악한 군주의 모습만 부각되어 있지만 사실은 강남 토벌과 중원 통일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던 뛰어난 전략가이기도 했다. 이때 양제는 단문진(段文振)의 유언을 기억해냈다. 좌군 제6군 사령관으로 종군했던 단문진은 요하에 도착하기 직전 진중에서 병사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던 것이다.
“고구려인들은 그 술책이 변화무쌍하니 항복을 제의해올 경우 쉽사리 이를 받아들이지 마옵소서. 그리고 공격할 때에는 한 곳만 공격하지 마시고 주야로 나아감을 거듭하여 오직 평양성을 목표로 삼아 수륙으로 진공을 단행하옵소서. 평양성이 무너지면 나머지 성들은 절로 허물어질 것이옵니다. 한 곳에서 시일을 오래 끌다가 우기가 다가오면 양도(糧道)가 끊길 것이옵니다.”
수 양제는 단문진의 간언을 받아들여 여름 장마철이 시작되기 전에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해 고구려 국왕의 항복을 받아낸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24군 중 정예병인 부병(府兵)으로 구성된 제9군 30만 5천명을 별동대로 선발해 중간에 있는 성들은 놓아두고 평양성을 향해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부병 군단은 대릉하(大凌河) 하류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전투를 치르지 않아 전투력이 가장 양호한 상태였다.
양제는 이들에게 보급선 유지에 따르는 부담을 최소화하려고 각각 1백일치의 식량에 해당하는 쌀 3천석을 운반하게 하고, 갑옷이나 천막과 같은 장비도 모두 가져가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병사들에게 너무 과중한 일이었고, 급기야는 병사들이 진군 중에 식량을 모두 버리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고구려군의 총사령관 격인 막리지(莫離支) 겸 병마원수(兵馬元帥) 을지문덕(乙支文德)은 이러한 적군의 상황을 잘 알고, 청야전술(靑野戰術), 즉 적군의 식량이 될 수 있는 것은 모두 치워버리는 작전을 구사하여 이들을 더욱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수군 별동대는 진군 중반부터 식량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나 수군 별동대는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요동반도를 가로지르는 천산산맥을 넘어 마침내 압록강 근처에 도착했다.
● 고구려군의 게릴라 작전
《손자병법(孫子兵法)》에 뛰어난 양장(良將)은 ‘미리 이겨놓고 싸운다’는 말이 있다. 이 말처럼 살수대첩은 평양까지 진군하던 수군 별동대를 상대로 벌인 전투에서 이미 판가름 나 있었다. 이때 을지문덕은 별동대의 목표가 평양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모달(大模達) 고이중(高利重)·대형(大兄) 해승유(解昇裕)·이갑정(李岬丁) 등 부장(副將)들의 부대를 보내 여러 번의 기습작전을 통해 이들의 공성구를 없애도록 하는 데 주력했고, 설사 별동대의 진격을 막지 못하더라도 평양성(平壤城)에 대한 공격만큼은 저지하게끔 했다.
『수서(隨書)』「우문술열전(宇文述列傳)」에는 오골성(烏骨城) 근처를 지나고 있던 수군이 고구려군 기병부대로부터 공격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우중문(于仲文)이 이끈 수군(隨軍)의 제1군은 기병 4천명, 보병 8천명, 치중병 8천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해승유가 지휘하는 고구려군 기병부대의 주된 목표물은 전투병이 아닌 치중대(輜重隊)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일단 화살을 날려 적군을 혼란에 빠뜨린 다음 상대적으로 수비력이 약한 치중부대와 공성구를 집중공격하였다. 이 싸움에서 우문술(宇文述)은 고구려군 기병부대를 격퇴시켰으나 대부분의 공성구를 잃어버리는 큰 손실을 입게 되었다.
이윽고 수군이 압록강 근처에 다다르자 을지문덕은 그들의 속사정을 알아보기 위하여 항복의사를 밝히며 수군의 진영으로 들어갔다. 당시 수군 지휘관들은 식량 부족을 이유로 요동성으로 회군할 것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 양제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우중문은 황제의 질책을 어떻게 감당하겠느냐고 하면서 진격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우중문은 이미 요동성에서 장수들이 패배하는 것을 지켜본 양제로부터 “내가 진정 그대들을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노골적인 협박을 들은 적도 있었다.
을지문덕은 적의 사정을 알아내고, 지쳐 있는 수군을 효과적으로 유인하기 위한 작전을 펼쳤다. 그가 구사한 작전은 바로 소규모 부대를 운용하여 전투를 벌인 다음 일부러 패배하고 달아나는 일종의 게릴라 작전이었다.
고이중·해승유·이갑정 등이 지휘하는 고구려군은 지형을 이용하여 우선 중간의 협로마다 목책(木柵)을 세우고 수군의 진군을 가로막았다. 이들은 목책에 의지해 싸웠으나 야전에서는 도끼와 창검(槍劒)을 휘두르며 수군과 불꽃 튀는 백병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사상자가 발생하기 시작하면 기병들의 엄중한 보호를 받으며 즉각 퇴각하거나, 군영을 불태워버리고 후퇴한 뒤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병부대로 하여금 화살공격을 하게 하는 방식으로 전투를 벌였다. 고구려군은 이러한 게릴라 전투를 하루에 일곱 번이나 반복하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식량부족으로 지쳐 있던 수군은 이러한 전투를 하면서 더욱 지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수군 지휘관들은 자신들이 육박전에서 차례로 승리를 거두고 있으며, 고구려군의 목책 군영을 빼앗는 데도 성공하고 있다고 여기고 진군에 진군을 거듭했다. 이들은 고구려군이 수도인 평양성을 미끼로 삼을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하고 점점 더 함정에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 들판에는 시체가 가득하고 강가는 핏물로 넘설거리니…….
마침내 수군은 평양성에서 불과 30리 떨어진 지역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진군 과정에서 공성구를 모두 잃어버린 수군 별동대는 목표물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공격하지 못하고, 지원군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시간이 지나도 평양성에서 합류하기로 한 우익위대장군(右翊衛大將軍) 내호아(來護兒)의 군대가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수군은 오랜 진군과 식량부족으로 지친 상태에서 막연히 시간을 소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고, 이들에게는 평양성 공략을 포기하고 요동성으로 돌아갈 명분도 없었다.
이에 희망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을지문덕이 재차 항복의사를 밝히며, 항복문서를 보냈던 것이었다. 항복문서에는 수군이 철수하면 을지문덕 자신이 직접 영양왕(嬰陽王)을 모시고 양제를 만나러 갈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수군(隨軍) 사령관 우중문은 을지문덕의 항복의사에 이미 한 번 속은 적이 있었지만, 30만 대군에게 포위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고구려군도 어쩔 수 없을 것이라 여기고 철군을 결심했다.
그러나 이것은 수군이 항복의사를 받아들이고 긴장이 풀어진 채 후퇴하는 순간을 노린 을지문덕의 심리전이었다. 마침내 수군이 방어에 유리한 밀집대형을 이루며 평양성에서 물러나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고구려의 경기병들이 나타나 수군의 대형 주위를 돌면서 화살을 날렸다. 갑작스러운 기습공격에 동료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하자 수군은 대열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우중문과 우문술은 병사들에 대한 공격을 막기 위하여 기병부대를 동원해 활을 쏘는 고구려군 경기병들을 쫓아다녔지만, 고구려군은 쫓아냈다 싶으면 다시 나타나 끈질기게 공격하는 것을 수차례 반복했다. 알렉산더 대왕도 인도로 진군하던 도중 샤카(Saka)족 기마궁사들의 기습공격을 받았으나 기창(旗槍)을 든 경기병들을 활용하여 궁기병들을 물리친 적이 있다.
당시 수군 기병부대는 중기병이었기 때문에 날렵하게 움직이는 고구려군 경기병들을 쫓아낼 수는 있었으나 따라가서 무찌를 수는 없었다.『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수군이 진군하면서 고구려군과 싸웠다는 말은 있지만 이들이 고구려군을 무찔렀다는 표현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계속되는 고구려군의 기습공격 때문에 수군은 살수(薩水)에 도착할 때까지 엄청난 병력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막상 그들이 살수에 다다르자 그동안 끈질기게 따라오면서 그들을 괴롭히던 고구려군 경기병들이 사라진 것이었다.
수군은 고구려군의 기습공격이 멈춘 시점을 이용해 재빨리 강을 건너려고 했다. 다행히 수심이 깊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강을 중간쯤 건넜을 때 갑자기 강물이 불어나면서 물살이 빨라졌다. 고구려군의 수공(水攻)은 해일 같은 급류가 적군을 휩쓰는 형태가 아니라 흐르는 물의 수위롸 속도를 높임으로써 적군의 선봉과 후위를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수군은 일제히 흐트러져 선봉부대와 후속부대가 완전히 분리되었고, 바로 이때 사라진 줄 알았던 고구려 경기병들이 나타나 후방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화살은 비오듯 날아왔고, 수군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화살공격이 멎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고구려의 중갑기병들이 달려나와 수군 보병들을 살상하기 시작했다.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진 수군은 대형을 이탈하여 달아나기 바빴고, 아비규환 속에 빠진 병사들은 동료들에게 짓밟혀 죽었다. 결국 살수대첩에서 수군 별동대는 모두 궤멸되었고, 30만 5천명의 군사 중 살아남아 탈출한 수군 병사는 2천 7백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을지문덕이 지휘하는 고구려군은 살수에서 대승을 거둔 후에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살수를 빠져나간 수군을 빠르게 추격해 나갔다. 살아남은 수군은 양제가 주둔하고 있던 요동성으로 달아났지만, 백석산에 이르러 다시 고구려군의 맹공으로 치명타를 받았다.
수 양제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병사들에게 별동대가 전멸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별동대는 정예병들로 편성된 주력 부대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호아가 이끌던 부대는 행방이 묘연했고, 요동성은 그때까지도 함락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예비 전력도 이미 바닥이 난 상태에서 양제는 전쟁의 참패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별동대가 전멸했음에도 불구하고 염치 좋게 살아서 돌아온 우중문을 포박한 채 철군을 시작했다.
● 살수대첩(薩水大捷)이 남긴 의문점들
수(隨)와 고구려(高句麗) 사이에 일어났던 전쟁은 한국의 전쟁사(戰爭史)에서 가장 위대한 군사적 승리로 꼽힌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과정은 치밀하게 분석되기보다는 고구려군이 강물을 파도처럼 불어나게 해서 수군을 휩쓸어버렸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로 더욱 부각되었다.
하지만 전쟁은 전설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고, 그 승리에는 분명한 원인이 있게 마련이다. 고구려군의 승리는 단순히 강둑을 무너뜨려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병사들이 직접 활을 쏘고 창과 칼을 휘둘러서 쟁취한 것이었다. 이 전쟁은 수성전(守城戰), 강상상륙전(江上上陸戰), 유인전(誘引戰), 기습전(奇襲戰), 대규모 야전(野戰) 등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으며, 그 결전인 살수대첩은 이러한 치밀한 작전능력의 결정판이었다.
살수대첩이 남긴 의문점 중 가장 먼저 제기되는 것은 살수에서 있었던 ‘수공(水攻)’에 관한 것이다. 수군을 휩쓸 만한 양의 강물을 확보하려면 엄청난 규모의 토목공사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당시의 기술로는 이런 토목공사가 불가능했으며,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통신수단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대에 적절한 때에 제발을 무너뜨리도록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현존하는 사서(史書) 어디에도 고구려군이 수공을 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살수대첩에 관련된 기본 사료인『수서』와『삼국사기』도 마찬가지다. 다만 수공에 얽힌 이야기로는 칠불사(七佛寺)에 내려오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을 뿐이다.
˝살수에 도착한 수나라의 군사들이 물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마침 승려 세 사람이 나타나 바지만 걷어 올린 채 무릎 높이까지 오는 물을 헤치며 건너갔다. 이를 본 수나라의 군사들은 모두 앞다투어 강을 건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고, 수공의 사실 여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두번째는 행방이 묘연해진 내호아의 군대에 관한 것이다. 기존의 사서와 국방전사편찬위원회의《고구려-수·당 전쟁사》를 보면 내호아가 이끈 수군은 병력의 대부분을 잃고 대동강 근처에 있다가 우중문의 별동대가 대패하는 것을 본 후 돌아갔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만약 내호아의 휘하에 남아 있는 병력이 있었더라면 대동강 근처에서 우중문의 부대와 합쳤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최소한 이들과 만나기라도 햇을 것이다. 그러나 사서 어디에도 그러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이로 미루어 보아 내호아의 군대는 대동강 근처에서 평양에 대한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고구려군에 의해 전멸된 것으로 추측되며, 이런 연유로 우중문이 평양 근처에 도착했을 때 내호아의 군대를 대동강 근처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