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昭顯世子)는 어째서 부왕(父王) 인조(仁祖)에 의해 독살되었는가?

참의부2013.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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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현세자의 죽음이 독살(毒殺)이라고 보는 근거는 무엇인가?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을 거론하라면 소현세자(昭顯世子) 이조(李溰)를 첫째로 손꼽는다.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의한 ‘삼전도(三田渡)의 치욕’으로 청나라에 끌려가 9년간 만주의 심양에서 불모로 억류된 것도 모자라 꿈에 그리던 고국에 돌아온 지 두 달만에 아버지의 음모로 독살되었으니 그의 짧은 33년 생애는 한(恨)과 비운(悲運)으로 점철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현세자가 만약 인조(仁祖)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면 이후 조선의 운명은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당시 조선은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는데, 소현세자는 이런 국제 정세에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소현세자의 좌절은 곧 조선의 좌절이었다.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독살한 혐의자가 부왕(父王)인 인조(仁祖)라는 점은 그의 신산(辛酸)한 일생을 한마디로 축약해 보여준다.『인조실록(仁祖實錄)』을 따라 그의 죽음의 현장에 가 보면, 9년여의 불모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세자가 병에 걸린 것은 귀국한 두 달 후인 1645년 4월 23일이었다. 어의(御醫) 박군(朴群)이 진단한 세자의 증세는 학질이었다. 그런데 장년의 세자에게 그다지 중병이라고 볼 수 없는 학질을 치료한 인물이 문제의 의관(醫官) 이형익(李馨益)이다.

 

약방에서는 다음 날 새벽 인조에게 이형익을 시켜 침을 놓아 학질의 열을 내리게 해야 한다고 주청했고, 인조는 그 말에 따랐다. 그날『인조실록』은 화성이 적시성(積屍星)를 범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형익은 인조의 어명(御命)에 따라 세자가 발병한 다음 날인 24일부터 침을 놓았다. 25일에도 세자는 침을 맞았는데, 다음 날인 26일에 그만 덜컥 숨을 거두고 말았다.

 

세자의 갑작스럽고 허무한 죽음은 당연히 수많은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풍토가 다른 이역(異域)에서도 9년을 너끈히 버틴 세자가 학질 따위에 쓰러질 리는 없다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 생각이었다. 더구나 학질에 침을 맞다 죽은 것은 전례가 드문 일이었으므로 당연히 세자가 독살되었을지 모른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런데 소현세자가 독살됐을수도 있다는 증거는 정사문헌인『인조실록』재위 23년 6월 27일자에도 나온다. 소현세자의 졸곡제(卒哭祭) 기사 중 세자의 시신 상태를 설명해 놓은 부분이 있는데, 그에 따르면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 나오므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는 것이다.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 파문이 실록을 편찬하기 위한 기본 자료인 사초(史草)에서 비롯된 데서 알 수 있듯이, 실록은 함부로 적을 수 있는 기록이 아니다. 게다가 종실 진원군(珍原君) 이세완(李世完)의 아내라고 목격담의 출처까지 적어 놓았으니, 실록의 이 내용은 사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소현세자는 정말 독살된 것일까? 또한 그렇다면 왜 불모 생활 중의 심양에서가 아니라 불모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고국 땅에서 독살당해야 했을까? 그 의문을 추적해보자.

 

◆ 숭명대의(崇明大義)를 기치로 내건 인조반정(仁祖反正)

 

광해군(光海君)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은 선조(宣祖)의 둘째 아들로 공빈(恭嬪) 김씨(金氏) 소생의 왕자였다. 왜군의 침략으로 나라가 언제 망할지 모르는 위기의 상황에서 왕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은 전란 기간에 7개월 동안 강원도·함경도 등지에서 분조(分朝) 활동을 하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민병대를 조직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명나라의 조정에서는 선조의 장자인 임해군(臨海君)이 있다는 이유로 광해군을 조선의 왕세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이 끝난 후인 1600년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朴氏)가 세상을 떠나자, 선조는 그 2년 뒤 51세 되던 해에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딸인 당시 19세의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金氏)를 새로운 왕비로 맞아들였다. 그런데 국혼(國婚) 4년 후에 인목왕후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으면서 선조가 바라 마지않던 정비(正妃) 소생의 왕자가 탄생하게 된 것이었다. 이에 소북(小北)의 영수 유영경(柳永慶)은 적통론(嫡統論)에 입각하여 광해군을 폐위하고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선조 역시 명나라에서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거부한다는 핑계를 들어 영창대군을 후사(後嗣)로 삼을 생각을 갖고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大北)의 정인홍(鄭仁弘)을 축출하는 등 남이 예측할 수 없는 괴팍성을 드러냈으나, 1608년 병세가 악화된 선조가 마침내 사망하면서 소북은 중앙 정계에서 완전히 실각하고 말았다.

 

선조의 뒤를 이어 조선의 열다섯번째 국왕으로 즉위한 광해군은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존재인 형 임해군을 교동(喬洞)에 유배하고 자신의 즉위를 반대한 유영경을 사사(賜死)하였다. 훗날 임해군 역시 광해군의 지시를 받은 이정표(李廷彪)에게 교살당하는 최후를 맞는다. 1613년에는 박응서(朴應犀)가 영창대군의 외조부인 연흥부원군과 공모하여 광해군을 몰아내고 영창대군을 추대하려는 계획을 세우다가 발각되는 사건이 벌어져 연흥부원군은 사사되고 영창대군은 8세의 어린 나이에 강화도로 유배됐다가 증살(蒸殺)되었다. 1618년에는 대북(大北)의 영수 이이첨(李爾瞻)이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여 인목대비(仁穆大妃)가 폐위되고 서궁(西宮)으로 유폐되었다. 이 사건으로 광해군은 인륜을 저버린 패륜아라는 여론의 지탄을 받았으며, 이귀(李貴)·심기원(沈器遠)·김류(金瑬) 등 서인(西人) 세력이 1623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능양군(綾陽君)을 새로운 임금으로 추대하게 하는 명분을 주었다.

 

광해군의 현실적인 대청외교(對淸外交)는 국가나 백성들의 자리에서 볼 때는 탁월한 것이었다. 인목대비를 지지하고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킨 서인의 처지에서는 광해군의 정사(政事)가 패륜적이었을지 몰라도, 일반 백성들에게는 대궐에서 늘상 벌어지는 일 중 하나에 불과했다. 따라서 서궁에 유폐된 인목대비에게는 인조반정이 희소식이었겠지만, 광해군의 치세에 만족하고 있던 일반 백성들에게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참화(慘禍) 극복에 전력을 바쳐야 할 시기에 벌어진 지배층 내부의 불필요한 정치적 소요에 지나지 않았다. 인조반정 직후 1등 공신의 한 사람인 이서(李曙)의 회고를 보자.

 

“갑자기 광해군을 폐출하고 새 임금을 세웠다는 소식을 들은 나라 사람들은 새 임금이 성덕(聖德)이 있는 줄 알지 못했으므로 상하가 놀라 어쩔 줄 몰라 했다. 성패(成覇)가 확실히 정해지지 않은 터에 위세로써 진압할 수도 없어서 말하기 지극히 어려운 사정이 있었다.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이 전 왕조 때의 원로로서 영상(領相)에 제수되어 여주로부터 입조하자 백성들의 마음이 비로소 안정되었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으로서는 인심을 수습할 명분과 사람이 없어, 남인(南人) 정승 이원익의 명망을 빌려야만 했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서인 정권이 겨우 위기를 수습한 반정 다음 해인 1624년에는 내부 분열인 이괄(李适)의 반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괄은 인조반정의 주역이면서도 평안병사(平安兵使) 겸 부원수로 밀려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무장봉기(武裝蜂起)는 만주에서 여진족(女眞族)의 통일 기운이 높아져 국경 수비에 치중해야 할 시점에 발생해 북방 국경을 크게 약화시켰고, 더욱이 정묘호란(丁卯胡亂)·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조선군이 무기력하게 참패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

 

반정 후 서인 정책의 핵심 방향은 광해군과 대북 정권의 모든 것에 대한 부정이었다. 그 중 중요한 것이 외교 정책의 변화였다. 광해군의 명(明)·청(淸) 중립외교(中立外交)에 대한 반정 정권의 인식은 인조의 즉위를 허락하는 인목대비의 즉위 교서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 나라가 대명(大明)의 조정을 섬겨 온 것이 2백년으로, 의리로는 곧 군신(君臣)이며 은혜로는 부자(父子)와 같다. 임진년(壬辰年)에 재조(再造)해 준 은혜는 만세(晩歲)토록 잊을 수 없어 선왕(先王)께서는 40년 동안 재위하시면서 지성으로 섬기어 평생 서쪽을 등지고 앉지도 않았다. 광해군은 배은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청)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 황제가 자주 칙서를 내리는데도 구원병을 파견할 생각을 하지 않아 예의의 나라인 삼한(三韓)으로 하여금 오랑캐와 금수가 됨을 면치 못하게 하였으니 그 통분함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런 반정 정권이 급격하게 반청정책(反淸政策)으로 전환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반정 당시 중국 대륙은 후금(後金), 즉 청나라와 명나라가 일촉즉발의 긴장감 속에 대치하고 있었다. 이런 긴장 상태에서 명나라의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평북 철산의 가도에 주둔하면서 요동 정벌을 계획한 것이 청의 심기를 건드렸다. 후금은 조선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중원을 정복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고, 그 결과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1624년 1월 14일에 후금의 통치자 홍타이지[皇太極]는 버일러[貝勒] 아민(阿敏)이 총지휘하는 군사 3만명을 파견해 조선을 침공하도록 하였다.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점령한 후금군의 주력 부대는 용천·선천을 거쳐 안주성 방면으로 남하하고, 일부 병력은 가도에 주둔한 모문룡의 명 수군을 공격하였다. 조선 관군은 곽산의 능한산성(凌漢山城)을 중심으로 후금군의 진격을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가도의 모문룡도 신미도(身彌島)로 패주하였다.

 

후금군의 침입이 조정에 알려지자 인조는 장만(張晩)을 도원수로 삼아 전쟁을 총지휘하게 하고, 여러 신하를 각지에 파견해 근군(勤軍)을 모집하게 하였다. 그 동안 후금군은 남진을 계속, 안주성을 점령하고 다시 평양을 거쳐 황주까지 진출하였다. 그리고 평산에 포진했던 장만의 군대는 개성으로 후퇴하였다. 전세가 극도로 불리해지자 김상용(金尙容)이 유도대장으로 임명되어 한양을 수비하고, 인조는 전란을 피해 강화도로 피난갔다. 후방에서는 정봉수(鄭鳳壽)·이립(李立) 등이 거느린 의병들이 후금군의 군량 조달을 저지하고 포로로 붙잡혔던 백성들을 구출하는 등 분전하였다.

 

평산까지 진출한 후금군은 계속 남하하는 데 따르는 후방의 위협을 염려하게 되었고, 조선은 전쟁을 계속할 여력을 잃고 있었다. 이에 후금군은 평산 이남으로 더 이상 진출하지 않고 곧 철병하기로 하였다. 그 조건으로 양국은 형제의 나라로 일컬으며, 조선은 후금과 강화(講和)를 맺되 명나라에 적대하지 않는다는 등의 조건으로 3월 3일 두 나라 사이에 화의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화약(和約)은 미봉책에 불과했다. 당시 후금은 명과 조선 모두를 상대로 전면전을 벌일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시적인 수습책으로 화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정묘호란 9년 후인 1636년에 청이 형제 관계를 군신 관계로 바꾸자고 나선 것은 조선과의 전면전도 불사하겠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인조와 서인 정권이 이를 거부하려면 정묘호란 이후 9년 동안 그만한 국력을 길렀어야 했다. 하지만 서인 정권은 국방력 대신 명분만 쌓았고, 그 명분에 의하면 청을 군국(君國)으로 모실 수 없었다. 조선이 청(淸)의 신국(臣國)이 되는 것은 인조반정의 명분 자체를 부인하는 자기모순이었다. 인조는 8도에 선전 교서를 내렸다. ‘명(明)을 향한 큰 의리’를 지키기 위해 후금(後金)과 화(和)를 끊는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목청뿐인 허세에 대한 청의 대답은 군사공격이었고, 그 결과는 ‘삼전도의 치욕’이었다.

 

◆ 병자호란(丙子胡亂) 패전(敗戰)과 ‘삼전도(三田渡)의 치욕’

 

1636년 4월 청(淸) 태종(太宗) 홍타이지[皇太極]는 조선이 청나라와 군신관계를 맺지 않는다면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침공하겠다고 협박했다. 11월에는 심양(瀋陽)에 간 조선 사신단에게 조선의 왕자들을 불모로 보낼 것과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는 대신들을 압송하라는 최후통첩을 하였다. 그러나 조선이 청나라의 요구를 묵살하자 마침내 12월 1일에 여진족(女眞族) 7만명, 몽고족(蒙古族) 3만명, 한족(漢族) 2만명 등 도합 12만 대군을 심양에 집결시켜 예친왕(禮親王) 대선(代善), 예친왕(睿親王) 다이곤(多爾袞), 예친왕(豫親王) 다탁(多鐸)과 패륵(貝勒) 악탁(岳託)·호격(豪格)·두도(杜度) 등을 거느리고 친히 조선 침공에 나섰다.

 

청군의 전봉장(前鋒將) 마부대(馬夫大)는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이 방어하는 백마산성(白馬山城)을 우회하여 심양을 출발한 지 10여일만에 한양에 육박했다. 조선 조정에서는 뒤늦게 대책을 의논하여 평소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했던 이조판서 최명길(崔鳴吉)을 황급히 적진에 보내 시간을 벌게 하는 한편, 봉림대군(鳳林大君)과 인평대군(麟坪大君) 두 왕자를 비롯한 비빈종실(妃嬪宗室)과 남녀 귀족을 우선 강화도로 피난가게 하고 국왕인 인조(仁祖) 자신은 세자와 문무백관을 대동하여 뒤를 따르려 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청군의 포위로 길이 막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강화도가 아닌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남한산성을 수비하는 병사는 1만 3천여명이었고, 성안에는 겨우 50여일을 버틸 수 있는 식량이 저장돼 있었다. 인조는 도원수·부원수와 각 도의 관찰사와 병마사에게는 근왕병(勤王兵)을 모으도록 하는 한편, 명나라에 위급함을 알려 응원군을 청했다. 

 

청군의 선봉 부대는 12월 16일에 이미 남한산성에 이르고 대신(大臣) 담태(潭泰)가 거느린 군사들도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한양에 입성해 그 길로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태종의 본군도 다음해 1월 1일에 남한산성 밑 탄천(炭川)에 이르러 10만의 군사를 포진하고 40여일동안 포위전(包圍戰)을 전개하여 남한산성 안의 조선 관민(官民)에 대해 고사작전(枯死作戰)에 들어갔다. 이런 가운데 남한산성을 구원하기 위해 올라오던 충청도관찰사 정세규(鄭世規)의 군대가 험천전투(險川戰鬪)에서 대패하고, 경상좌병사 허완(許完)과 경상우병사 민영(閔泳)이 이끄는 조선 관군도 광주(廣州)의 쌍령전투(雙領戰鬪)에서 궤멸되어 두 장수가 전사했다.

 

전라도병마사 김준용(金俊龍)의 부대는 경기도 용인의 광교산전투(光敎山戰鬪)에서 4백명의 청군을 사살하고 태종의 부마(駙馬)인 액부양고리(額駙揚古利)를 죽이는 전과를 올렸으나, 역시 공경(孔耿)이 이끄는 청군의 역습을 받고 패퇴하였다. 또 평안도관찰사 홍명구(洪命耉)는 금화전투(金化戰鬪)에서 전사하였고, 부원수 신경원(申景瑗)은 맹산전투(孟山戰鬪)에서 청군의 포로가 되었으며,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군대는 토산전투(兎山戰鬪)에서 패주하였다. 그리고 강원도관찰사 조정호(趙廷虎)와 함경남도관찰사 민성휘(閔聖徽)도 청군과의 교전에서 패배해 중도에서 좌절되니 남한산성은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절망적인 상태가 되었다.

 

청군에 포위된 지 45일만에 식량 결핍과 추위로 말미암아 성내의 병졸들은 거의 기력을 잃었고 믿었던 명나라의 구원병도 오지 않았으며, 강화협상도 사신으로 보냈던 박난영(朴蘭英)이 살해되면서 실패하였다. 이에 남한산성에서는 화전양론(和戰兩論)의 대립이 거듭되었다. 한편 청군이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 강화도를 공격하자, 강도검찰사 김경징(金慶徵)은 도주하고 빈궁과 원손을 수행하던 김상용(金尙容)은 자결했으며 봉림대군과 인평대군 두 왕자가 생포되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과 이조판서 정온(鄭蘊) 등 결사항전을 외치는 척화파의 주장이 꺾이고 좌의정 홍서봉(洪瑞鳳)과 이조판서 최명길 등 화의(和議)를 내세우는 주화파의 주장이 채택되어 마침내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로 하였다. 이에 태종은 조선의 국왕이 친히 성문 밖에 나와 항복하고, 양국의 관계를 악화시킨 주모자 2~3명을 인도하면 화의에 응하겠다고 요구하였다. 결국 패전국(敗戰國)으로서 선택권이 없는 조선 측이 이 요구에 응함으로써 역사적인 ‘삼전도(三田渡)의 치욕’이 결행되었던 것이다. 

 

1637년 1월 30일 50여명의 조선인이 통곡을 하면서 남한산성을 나왔다. 의장도 없는 신하들의 행렬 속에, 신하를 뜻하는 푸른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에 올라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는 인물은 조선왕조 제16대 국왕인 인조(仁祖)였다. 그 초라하고 굴욕적인 행렬 속에는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昭顯世子)도 있었다.

 

산성을 내려온 인조는 죄인임을 나타내기 위해 가시 박힌 자리를 펴고 앉아 대죄했다. 인조와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장수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의 인도에 따라 삼전도(지금의 송파구)로 나아갔다. 그곳에는 청(淸) 태종(太宗)이 황제를 나타내는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었고, 주위에는 활과 칼로 무장한 갑옷 차림의 장수들이 진을 치고 좌우에 옹립한 가운데 장엄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인조가 손수 걸어 진 앞에 이르자 용골대가 나와 진문 동쪽에 머물러 기다리게 하였다. 용골대가 진 안에 들어갔다가 나와 태종의 말을 대신 전했다.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

 

인조가 답했다.

 

“천은이 망극합니다.”

 

용골대가 단 아래 북면하는 쪽에 자리를 마련했다. 북쪽을 바라보는 곳은 신하의 자리고, 남쪽을 바라보는 곳은 임금의 자리다. 인조는 그 자리에서 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이른바 삼배구고두례(三拜九敲頭禮)를 행했다. 삼배구고두례가 끝나자 인조를 단 위에 오르게 하였는데, 태종은 남면(南面)하고 인조는 동북 모퉁이에서 서쪽을 향해 앉았다. 또 청나라의 황자 3인이 차례로 서쪽을 향해 나란히 앉고 소현세자는 그 아래 앉았으며, 청나라의 황자 4인이 서북 모퉁이에서 동쪽을 향해 앉고 조선의 두 왕자,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은 그 아래에 앉았다.

 

태종이 입을 열었다.

 

“이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었다. 활 쏘는 솜씨를 보고 싶으니 각기 재주를 다하도록 하라.”

 

무술(武術)로 기선을 제압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조선에는 이에 맞서 청의 콧대를 꺾을 무사가 한 명도 없었기에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온 자들은 모두 문관(文官)이기 때문에 잘 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용골대가 억지로 쏘게 하자 위솔(衛率) 정이중(鄭以重)이 나서서 5번을 쏘았는데, 활과 화살이 조선과 다르므로 모두 맞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망신을 당하고 나니 완전히 기가 꺾이고 말았다. 이에 만족한 청에서는 떠들썩한 술판을 벌였다. 잠시 후 인조가 완전한 항복의 표시로 도승지를 통해 국보를 받들어 올렸다. 당사자인 인조는 물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모두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으니, 이것이 바로 삼전도의 치욕이다.

 

그러나 삼전도의 치욕은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후 조선은 군사력을 가질 수 없으며, 소현세자 부부를 비롯해 봉림대군 등 왕자들을 불모로 끌고 가겠다는 구체적인 애용이 화의 조건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삼전도의 항복 5일 후 불모가 된 소현세자는 청나라로 끌려가기 전 하직 인사를 하러 대궐로 돌아왔다. 이때 배웅하던 신하들이 모두 길가에 엎드려 통곡하였는데, 한 신하가 말의 재갈을 당기며 울부짖자 세자는 말을 멈추고 한참 동안 그대로 있기도 하였다.

 

청과의 화의 조약 중 가장 논란이 된 것이 세자의 불모 문제였다. 척화파는 모두 전사하는 일이 있더라도 세자를 청나라에 내줄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주화파라 해도 세자가 불모로 가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므로, 이 문제의 해결은 실로 난감했다. 이때 이 난제를 해결한 인물은 다름 아닌 소현세자 자신이었다.

 

“일이 너무도 급박해졌다. 나에게는 일단 동생이 있고 또 아들도 하나 있으니, 역시 종사를 받들 수 있다. 내가 적군에게 죽는다 하더라도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내가 성에서 나가겠다는 뜻을 전하라.”

 

불모 문제는 소현세자가 이처럼 스스로 청군 진영에 나아가기를 자청함으로써 해결되었다. 나라를 위해 자신의 운명을 내던진 이 결정은 쉽지 않은 것이었다. 당시 조선의 지배층 대다수는 국가의 안전보다 일신의 안전을 더 중시했다. 청나라가 세자와 대군 이외에도 판서의 아들을 인질로 원하자, 평소에는 아귀처럼 관직에 달려들던 관료들이 서로 판서를 맡지 않으려고 다투었다. 실제로 호조판서 김신국(金藎國)이 내외의 비판을 모른 체하면서 병을 핑계 대고 사직을 청해 이경직(李景稷)이 대신 임명되기도 했다. 세자가 끌려가는 판국인데도 고위 관료들은 나라보다 집안을 더 생각했던 것이다.

 

드디어 2월 8일,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 그리고 봉림대군과 대군부인 장씨는 청(淸) 태조(太祖)의 14번째 아들인 구왕(九王)과 함께 멀고 먼 북방 길을 떠났다. 인조가 지금의 경기도 고양의 창릉(昌陵) 서쪽까지 거둥해 전송하자 구왕이 말했다.

 

“멀리 오셔서 전송하니 실로 감사합니다.”

 

“가르치지 못한 자식이 따라가니 대왕께서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세자의 연세가 저보다 많고, 일에 대처하는 것을 보면 제가 감히 가르칠 입장이 못 됩니다. 더구나 황제께서 후하게 대우하시니 염려 마시기 바랍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절을 하자 인조는 눈물을 흘리며 당부했다.

 

“힘쓰도록 하라. 지나치게 화를 내지도 말고 가볍게 보이지도 말라.”

 

엎드려 분부를 받은 세자는 신하들이 옷자락을 당기며 통곡하자 만류하며 말했다.

 

“주상(主上)이 여기에 계신데 어찌 감히 이렇게들 하오? 각자 진중하도록 하시오.”

 

마침내 소현세자는 언제 돌아올지는 물론 살아 돌아올 기약도 할 수 없는 길을 떠났다. 그의 나이 스물여섯, 봉림대군의 나이 열아홉 때였다.

 

◆ 명(明)·청(淸)이 교체되는 대륙의 한복판에서

 

소현세자에게 북방 길은 분명 위기였으나 조선으로서는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중국에서조차 이미 끝나 가는 성리학을 금지옥엽처럼 모시는 우물 안 개구리 식의 사고방식을 깨뜨리고, 또한 국제 정세는 명분이 아니라 힘에 의해 좌우된다는 현실을 깨닫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판서 남이웅(南以雄)·좌부빈객(左副賓客) 박황(朴湟)·우부빈객(右副賓客) 박로(朴魯)·보덕(輔德) 이명웅(李命雄)·필선(弼善) 민응협(閔應協) 등의 수행원들과 더불어 북방 길에 오른 세자는 당시 청나라의 수도였던 만주의 심양에 자리를 잡았다. 세자 일행은 심양에 새로운 숙소를 지어 활동의 근거지로 삼았는데, 이를 심양관이라 했다. 소현세자는 이 심양관을 중심으로 청과 조선 사이의 모든 일을 처리했다. 즉 소현세자는 사실상 주청조선대사(駐靑朝鮮大使)였고, 심양관은 주청조선대사관이었던 셈이다. 청은 심양관을 통해 조선에 관한 일들을 처리하려 하였고, 인조 또한 청과 직접 상대하는 것이 껄끄러워 심양관의 소현세자에게 청에 관한 일들을 미루었다.

 

소현세자가 처리해야 할 일 중 가장 중요하면서도 곤혹스러운 일은 청의 파병 요구에 응하는 것이었다. 청은 당시 명과 최후의 일전을 앞두고 있었으므로 명과의 전쟁에 투입할 조정군(助征軍) 파견을 요구했다. 이는 숭명대의(崇明大義)를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인조와 서인 정권에게 심각한 자기 부정이었으나, 전쟁에서 패배한 이상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인조는 청의 요구에 쫓겨 재위 18년 4월에 임경업(林慶業)과 이완(李浣)이 이끄는 6천여명의 조선 수군을 파병했다. 하지만 임경업은 병자호란 때에 청군이 한양을 점령한 틈을 타서 역으로 청의 수도 심양을 점령하겠다는 작전을 제안할 정도의 반청(反淸) 인사였으니, 그가 이끄는 조선 수군이 제대로 싸울 리 없었다. 임경업의 수군은 전진하라고 해도 전진하지 않고 명나라의 군선을 만나도 발포하지 않았다. 발포하더라도 엉뚱한 곳을 향해 쏘고 전함을 일부러 부수는가 하면 일부 군사를 투항시키는 등 노골적인 사보타주를 일으켜 청나라의 분노를 샀다.

 

분노한 청나라는 이를 조선의 배신 행위로 규정짓고 용골대 등을 조사단으로 삼아 의주에 파견했다. 조선은 병자호란 때 용골대(龍骨大)에게 호되게 당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형편이었다. 이때 세자는 용골대의 동향을 미리 조선 조정에 알려 주고, 용골대에게는 조선의 처지를 설득하는 등 양자의 충돌을 막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런데 한 번은 용골대가 “청과 다른 의논을 하는 자가 누구냐?”며 세자를 협박한 적이 있었다. 이때 세자는 벌컥 화를 내며, “내가 비록 이역에 와 있지만 한 나라의 세자다. 네가 어찌 감히 이토록 협박하는가?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려 있으니 그따위로 나를 협박하지 말라”고 호통을 쳤다. 이에 용골대가 웃으면서 사과했을 정도로 소현세자는 담력도 있는 인물이었다.

 

인조 재위 20년에는 부사 이계(李桂)가 감사 정태화(鄭太和)의 명령을 받아 조선 해안에 출몰한 명나라의 군선에 몰래 쌀과 음식을 제공해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때 용골대가 이계 등을 만주의 봉황성으로 불러 세자와 함께 심문했는데, 세자는 시종일관 조선 관리들을 옹호했다. 이에 용골대가 세자를 힐난했다.

 

“세자가 감사를 이처럼 비호해 주니 그와 한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자가 웃으면서 답했다.

 

“이렇게까지 의심하니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세자는 청과 조선 사이에 분쟁이 생길 때마다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중요한 것은 성리학이 제공하는 명분이 아니라 국가를 위한 현실 인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자는 심양에 오기 전부터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았다. 이미 병자호란 5년 전인 인조(仁祖) 재위 9년(서기 1631년)에 견명사(遣明使) 정두원(鄭斗源)이 가져온 서양의 화포와 망원경, 자명종 등을 보고 서양 문물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세자는 심양에 와서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더 이상 성리학이 아니라 변화하는 문물과 그것을 만들어 내는 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소현세자가 보기에 중원의 대세는 이미 청나라로 기울고 있었다. 만주에서 흥기한 청이 아니더라도 명나라는 이미 종말로 치닫고 있었다.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 즉위 후 가뭄과 흉년이 계속되자 굶주림을 견디다 못한 각지의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들 중 비교적 큰 세력은 도적이 되어 떠돌아다니면서 명을 위협했다. 사실상 명을 망하게 한 것은 청이라기보다는 이들 농민 반란군 중 가장 세력이 컸던 역졸 출신의 이자성(李自成)이었다.

 

출신에 상관없이 세력만 있으면 황제를 자칭하는 것이 중국 역사의 한 특징인데, 이자성 또한 세력이 커지자 스스로를 대순황제(大順皇帝)라 칭하고 명의 수도 북경을 공략해 함락시켰다. 북경이 함락되던 날 황제의 외척과 귀족·재상들은 땅바닥에 꿇어앉아 유적(流賊)의 흙발에 차이면서도, 농민 출신 이자성을 성천자(聖天子)로 받들고, 자결한 의종 황제를 저주하면서 목숨을 구걸했다. 이렇듯 조선의 사대부들이 받들어 모시던 명나라는 이미 명나라의 황손들도 버린 나라였다.

 

북경이 함락되었을 때 명의 유일한 정예군은 오삼계(吳三桂)가 이끄는 부대였다. 청군을 치기 위해 요동으로 진격하여 산해관을 돌파하던 오삼계는 북경이 이자성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군사를 돌리기로 결심하고 청군 진영에 편지를 보냈다.

 

“우리의 황제는 유적 이자성에게 돌아가셨다. 지금부터 나는 황제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급히 북경으로 향하는 바, 차제에 귀국의 병력을 빌렸으면 좋겠다.”

 

청나라와 연합전선을 결성해 북경으로 가자는 제안이었으나, 적군에게 군사를 빌려 달라는 이 말은 사실상 항복 선언이었다. 소현세자를 불모로 데려왔던 청의 구왕(九王) 다이곤(多爾袞)은 즉각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다이곤은 당시 태종의 뒤를 이은 어린 청(淸) 세조(世祖) 복림(福臨)을 대신해 섭정하고 있었다.

 

“인의(仁義)의 군대를 동원하여 유적 이자성을 멸하고, 중국 백성을 구원한다.”

 

명목은 명(明)·청(淸) 연합군이었으나 사실상 청군이 명군을 흡수한 것이었다. 소현세자가 심양에 잡혀온 지 7년째 되던 해인 인조 재위 22년(서기 1644년) 4월의 일이었다. 이때 구왕 다이곤은 자국의 친왕과 장수뿐만 아니라 소현세자를 대동하고 남정(南征) 길에 올랐다. 소현세자를 대동한 것은 구왕의 의도적인 행위였다.

 

남정군을 따라간 소현세자는 명나라의 마지막 정예군인 오삼계 군단이 청나라에 항복하는 장면을 똑똑히 목격했다. 명은 도처에서 무너지고 있었던 반면 청은 욱일승천하는 기세였다. 이미 중원의 정세가 청나라로 기울었음을 알고 있었던 소현세자는 오삼계의 항복 장면을 목격한 후, 조선이 취할 외교 정책이 숭명대의가 아니라 청나라 중심의 현실 외교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청군은 남진을 시작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북경에 입성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점령해 간 것이다. 청나라의 대군이 밀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이자성은 항전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도망갔고, 이로써 청은 명의 수도였던 북경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이자성은 청에 갖다 바치기 위해 애써 북경을 함락한 셈이 되었다. 이 때문에 당시 북경에서는 이런 노래가 유행했다.

 

“주씨네 떡가루로 이씨가 쩌 낸 빵을, 이웃 조서방에게 고스란히 바쳤다.”

 

이는 주씨의 명 왕조를 멸망시킨 이자성이, 결국 조씨를 국성으로 쓰는 만주의 청에게 나라를 고스란히 빼앗긴 것을 풍자한 노래였다.

 

이를 지켜본 소현세자의 심정은 담담했다. 소현세자는 이미 7년간의 불모 생활을 통해 이런 사태를 예견할 수 있었다. 1640년 임경업이 명군과 싸우지 않고 사실상 투항했을 때, 세자가 놀랐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세자가 보았을 때 이런 행위는 오히려 조선을 위험에 빠뜨리는 불필요한 짓이었다. 이처럼 세자는 불모 생활을 통해 현실적인 국제 정세 인식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세자의 이런 현실 인식은 조선의 인조와 서인 정권에게는 위험한 이데올로기로 비쳐졌다.

 

◆ 부정(父情) 아닌 부정(否定)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불모로 잡혀온 지 3년째 되던 해인 인조(仁祖) 재위 18년, 부사 이경헌(李景憲)과 서장관(書狀官) 신익전(申翊全)이 인조의 병환이 심각하니 세자를 일시 귀국시켜 달라고 요청한 일이 있었다. 이때 조선에서는 인조의 3남 인평대군(麟坪大君)과 세자를 바꾸자고 요청했는데, 청은 이 제의에 대해 세자의 장남인 원손(元孫) 석철(石鐵)도 인평대군과 함께 보내라고 요구했다. 원손 석철을 심양으로 부른 후에야 소현세자를 일시 귀국시킬 수 있었을 정도로, 청은 세자의 귀국을 두려워했다. 청은 구체적으로 인평대군과 원손을 만주의 봉황성에서 세자와 맞바꾸자고 제안했는데, 조선은 이를 거부할 처지가 아니었다.

 

청나라의 구왕(九王) 다이곤(多爾袞)과 질가왕(質可王)은 소현세자를 위로하기 위한 송별연을 열어 주었고, 인조 재위 18년 2월 12일에는 청황(淸皇) 태종(太宗)도 직접 송별연을 열어 주었다. 이 자리에는 봉림대군도 함께 하였다. 그런데 태종을 만나기 전 뜰 안에서 용골대가 세자에게 안장을 한 말과 대홍망룡의(大紅蟒龍衣)를 주면서 입으라고 했다. 그러자 세자는 깜짝 놀라 하며 사양했다.

 

“이것은 국왕이 입는 장복(章服)입니다.”

 

용골대가 세자의 사양하는 뜻을 전하자 태종이 이를 받아들여 대홍망룡의는 입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의 파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조선으로 연결되었다. 세자빈객(世子賓客) 신득연(申得淵)이 이 상황을 자세히 적어 인조에게 보고했던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인조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선조(宣祖)가 명(明)이 자신을 폐하고 광해군(光海君)을 세우지 않을까 의심했던 것처럼, 청(淸)이 자신을 폐하고 소현세자를 세우지 않을까 의심하게 되었다. 세자는 태종의 송별연 다음 날 심양을 떠나 드디어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세자는 부왕 인조를 만날 생각에 가슴이 뛰었으나, 인조의 마음은 싸늘히 식어 있었다.

 

인조는 노정(路程) 밖에서 세자를 마중하겠다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관원들의 간청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어의를 보내자는 내의원의 주청도 거부하였다. 인조는 세자를 맞이하는 모든 의식을 폐지시켜 버렸다. 심지어 “4년만에 돌아오는 세자의 행차가 어떤 일인데 이렇게 간략하게 한단 말입니까?”라고 호소하는 대간들의 청마저 거부하였다.

 

다만 인조 재위 18년 3월 7일 한양에 도착한 세자가 부복하며 눈물을 흘리자, 인조도 눈물을 흘리며 맞은 것이 유일한 환영이었다. 세자의 눈물이 기폭제가 되어 인조는 물론이고 대신들도 눈물을 흘려 조정이 눈물바다가 되었다. 세자를 감시하러 따라온 청의 오목도(梧木道)가 이를 저지하자 인조가 설명했다.

 

“다시 볼 줄은 생각도 못했으므로 저절로 슬퍼서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들의 눈물을 직접 대하는 순간만큼은 모든 의심이 부정(父情)에 녹은 것일까?

 

세자는 그해 4월 2일 다시 청나라로 떠나게 되었다. 심양에는 꿈에도 그리워했던 원손 석철이 있다는 사실이 한 가닥 위안이 되었다. 심양에 도착한 세자에게 청의 범문정(范文程)이 그해 6월 말 봉림대군이 귀국할 때 원손도 같이 가야 한다고 말하자, 세자가 “날씨가 몹시 덥고 아이가 병이 있으니 서늘한 가을까지 기다렸다가 출발시키려고 합니다”며 말린 것은 부정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범문정은 황제께서 이미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으니 시기는 알아서 하라고 했다. 그러나 비운의 세자와 원손은 이국의 수도인 심양에서 부자간의 정을 나눌 사이도 없었다. 청에서 조선에 군사 징발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또한 다음 해 1월에는 전 판서 김상헌(金尙憲)과 전 지평 조한영(曺漢英) 등이 목에 철쇄를 매고 두 손이 결박된 채 심양에 끌려와 심문을 받게 되어 세자는 쉴 틈이 없었다. 그뿐 아니라 인조 재위 21년(1643년)에는 전 정승 이경여(李敬輿)와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 그리고 전 판서 이명한(李明漢) 등이 심양에 끌려와 목에 칼을 차고 두 손이 결박된 채 구금되기도 하였다.

 

세자는 이런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조선 편에 서서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불모 신분인 세자의 역할은 한계가 있어서 조선인이 죽어 갈 때마다 세자 또한 한탄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세자의 이런 노력에도 부왕 인조는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인조 재위 21년 10월 역관 정명수(鄭命壽)가 청이 세자를 귀국시키려 한다고 전하자, 인조는 청과 세자가 결탁하지 않았는가 의심한다. 인조가 세자 귀국 문제를 비변사(備邊司) 당상에게 논의하자, 정태화(鄭太和)는 “청나라에서 먼저 말을 꺼냈는데 우리가 (세자의 귀국을) 청하지 않으면 저들이 우리를 의심할 것”이라면서 받아들일 것을 주청한다. 이처럼 세자의 귀국을 두고 근심하는 데서 이미 세자를 보는 인조와 조신들의 마음이 달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주청에 대한 인조의 대답은 이렇다.

 

“청인(淸人)이 내게 입조(入朝)를 요구한 것은 전한(前汗:淸太宗) 때부터였으나 내가 병이 있다고 이해시켰기 때문에 저들이 강요하지 못하였다. 이제 듣건대 구왕(九王)은 나이가 젊고 강퍅하다고 하니 그 뜻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전일에는 세자를 지나치게 박하게 대하다가 이제는 오히려 지나치게 후하게 대하니 나는 의심이 없을 수 없다.”

 

그랬다. 인조(仁祖)는 구왕(九王) 다이곤(多爾袞)과 세자가 결탁해 자신을 볼모로 불러들이고 세자를 조선의 국왕으로 봉할 것을 우려했는지도 모른다. 인조의 이런 의심을 알아차리지 못할 신하들이 아니었다. 심열(沈悅)이 “성상(聖上)의 분부가 이러하시니 신하가 어찌 감히 우러러 (세자의 귀국을) 청하겠습니까?”라고 대답한 것이 이를 말해 준다. 그리고 다음 날 심양에서 온 중관(中官)을 만난 뒤 인조의 의혹은 더욱 커진다.

 

“세자가 아무리 빨리 돌아오고 싶어도 우리의 인마(人馬)가 들어간 후에야 나올 수 있을 것인데, 역관 정명수의 말을 전해 들으니 세자가 돌아올 시기가 가까운 듯하다. 명수의 말이 이처럼 쉽게 나오는 것은 내 추측이 허망한 소리가 아니라면 반드시 예측하지 못할 내막이 있을 것이다.”

 

인조가 염려하는 “예측하지 못할 내막”이란 자신을 폐위시키고 세자가 즉위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런 뜻을 알아차린 김자점(金自點)이 답했다.

 

“성상은 항상 이를 염려하시는데 소신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세자께서 나온 뒤에 만약 뜻밖의 변(變)이 있다면 군신 상하가 어찌 손을 묶어두고 그들이 하는 대로 놓아둘 수 있겠습니까?”

 

청나라에서 인조를 폐위하고 세자를 세우고자 한다면 군신 상하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란 말이었으니, 인조의 불안감을 정확히 읽은 것이었다. 그러나 청이 인조를 폐하고 세자를 세우려 한다는 생각은 쿠데타로 집권한 인조의 의심일 뿐이었다.

 

청나라는 원손을 비롯해 세자의 여러 아들을 청나라로 부른 후 만주의 봉황성에서 세자와 맞바꾸자고 제안했다. 이번의 귀국은 세자빈(世子嬪) 강씨(姜氏)의 부친인 영중추부사 강석기(姜碩期)가 1643년 6월에 사망했는데도 세자빈이 아직 곡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요청한 것이었으므로 세자 부부가 동행했다. 세자와 세자빈은 1644년 1월 초하루 자신들 대신 불모로 들어온 원손과 아들들을 봉황성에서 만났다. 아들들을 불모로 잡고 곡을 하러 떠나는 상황이니 눈물의 상봉이 아닐 수 없었다. 이들의 만남을 감시하던 청나라 사람드도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볼모 생활 중에 부친이 사망하여 곡도 하지 못한 세자빈의 한은 컸다. 그러나 원손과 다른 아들들을 볼모로 잡히고 귀국한 세자빈은 부친의 빈소에 곡을 할 수가 없었다. 인조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조는 곡을 하기 위해 수천 리 길을 달려온 며느리의 빈소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부왕의 이 가혹한 조치에 삼공이 모두 “세자빈이 돌아갈 기일은 임박했는데 어버이를 살펴보았다는 말은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며 세자빈 강씨의 빈소행을 허락해 달라고 청했으나 인조는 거부했다. 삼공은 거듭 청했다.

 

“세자께서 귀국을 청할 때 세자빈의 부친은 죽고 모친은 병중에 있다는 것을 아울러 이유로 삼았는데, 이제 찾아가 곡하고 모친을 살펴보는 절차가 없으면 저쪽 나라가 그 말을 들을 때 반드시 의아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자빈 강씨는 끝내 빈소에 곡도 하지 못하고, 병중인 모친을 만나지도 못한 채 심양으로 돌아가야 했다. 인조 재위 22년 2월 초순의 일이었다.

 

◆ 심기원(沈器遠)의 모반(謀反)에 연류된 세자

 

인조의 이런 소견 좁은 처사는 많은 사대부의 불만을 낳았다. 광해군이 법적인 모후 인목대비에게 불효했다는 것을 반정 명분으로 삼은 인조가, 며느리 강빈(姜嬪)의 왕곡을 막은 것은 심각한 자기 부정이었던 것이다.

 

며느리 강빈의 왕곡을 끝내 허락하지 않은 인조의 처사로 인해 급기야 인조를 끌어내리고 소현세자를 추대하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주모자가 인조반정의 일등 공신인 청원부원군(靑原府院君) 심기원(沈器遠)이란 데서 인조에 대한 당시 사대부들의 감정을 알 수 있다.

 

끝내 세자빈의 왕곡을 허락하지 않은 인조는 세자와 세자빈이 심양으로 되돌아갈 때 환관 김언겸(金彦謙)을 딸려 보냈다. 김언겸은 인조가 세자 부부를 감시하기 위해 딸려보낸 간자(間者), 즉 첩보원이었다. 친아버지 인조는 이처럼 세자 부부를 의심해 간자까지 딸려 보냈으나, 세자는 배웅 나온 심기원과 김류(金瑬)·홍서봉(洪瑞鳳)·조창원(趙昌遠) 등 여러 부원군에게 인조의 병을 옆에서 보살피지 못하는 심정과 이역에서 나그네로 머물러 있는 고통을 이야기하여 듣는 이의 눈물을 훔치게 하였다.

 

바로 그 이틀 후인 인조 재위 22년 3월 21일 부사직 황익(黃瀷)과 오국별장(伍局別將) 이원로(李元老) 등이 청원부원군 심기원·전 지사 이일원(李一元)·광주부윤 권억(權億) 등이 모반하려 한다고 고변했다. 고변자 황익이 전하는 심기원의 말은 이렇다.

 

“주상이 반정한 뒤로 잘못하는 일이 많아 주상을 상왕으로 추존하고 세자에게 전위하게 하고 싶어 내 집의 재산을 털어 은 수천냥을 마련하고 역사(力士)를 모집하여 지성으로 대접하였는데, 내 소원은 오로지 강상(綱常)을 부식(富殖)하자는 데 있는 것이다. 지난번 세자가 심양에서 나왔을 때 전위하고 싶은 생각이 없지 않았으나 아무리 세자를 받들어 세우더라도 별다른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실행하지 않고 회은군(懷恩君)을 추대하려 한다.”

 

또 심기원과 함께 정형(正刑)당한 초관 정형(鄭馨)은 심기원의 종질 권두형(權斗亨) 형제의 말을 전했다.

 

“숙주(叔主)께서 명나라 배가 들어오는 것을 기다려 그들과 합세해 심양과 끊으려고 하지만, 세자는 부디 원대한 계획이 없고 주상도 원수를 갚을 길이 없으니 한탄스럽다. 22일 거사한 후에 주상에게 왕자 중에 합당한 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게 하고 상왕으로 높인 다음 정예 포수 5만명을 거느리고 심양을 쓸어 버린다면 어찌 남자의 사업이 아니겠는가?”

 

즉 이들은 세자가 귀국했을 때 거사를 일으켜 인조를 상왕으로 내쫓은 후 북벌을 단행하려 했으나, 소현세자를 추대하는 것이 여의치 않자 회은군 이덕인(李德仁)을 추대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다가 발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한 인조의 처사는 의외였다. 인조는 여러 신하가 모두 심기원을 정형(正刑)하라고 청하는데도 사사(賜死)를 고집하다가 허락하였으며, 그 시신은 팔도에 돌리지 말고 가족에게 내주어 장사지내게 하라고 명했다. 그리고 이덕인은 정형하지 않고 사사하고 재산도 적몰하지 않았다. 역모 사건의 주범에 대한 처사치고는 매우 온건했다. 또한 심기원과 권억·정형·이일원·이지룡(李之龍)·이권(李淃)·김집(金潗)·권두창(權斗昌) 등 관련자들을 정형한 후, 그해 4월 1일 명정전(明政殿)에서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하면서 대대적인 사면 조치를 내린다. 이 또한 이례적인 거조가 아닐 수 없다.

 

인조로서는 반정 일등 공신이 자신을 폐하고 세자나 회은군을 옹립하려 한 사건을 확대해 좋을 것이 없다는 계산을 했을 것이다. 이 경우 그렇지 않아도 인심을 잃은 인조의 위상은 땅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소현세자는 자신을 추대하려는 사건으로 옥사가 벌어지는 동안 조선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국내의 이런 움직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자는 심양에 도착하자마자 청나라의 구왕을 따라 북경에 가야 했다. 그해 4월 이자성의 군대를 산해관에서 격파함으로써 중원 정복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청나라는 중원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보여줄 목적으로 소현세자를 데려간 것이다.

 

세자는 이렇듯 동아시아 정세를 놓고 자웅이 일척을 겨루는 역사적 현장의 한가운데에 있었으므로, 국내의 추대 사건에 관심을 두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추대니 모반이니 하는 소모적 정쟁은 자신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세자는 북경에서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있었다.

 

◆ 아담 샬을 만나 천주교(天主敎)에 눈을 뜨다

 

그해 5월 하루 평균 120~130리 길을 달리는 청군과 함께 북경으로 향한 세자는 구왕이 이끄는 청군이 파죽지세로 북경을 손에 넣는 장면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청나라가 북경을 차지한 것은 대세가 이미 청나라에 기울었음을 의미했다. 북경에 도착한 세자는 문연각(文淵閣)이라 불리던 명(明) 목종(穆宗)의 부마 후씨 집에 거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식량이 극도로 부족해 20여일만에 심양으로 되돌아왔다가, 그해 9월 청나라 황제를 따라 다시 북경에 들어가 약 70일 동안 머물렀다.

 

이때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아주 중요한 한 인물을 만나 새로운 사상과 문물의 세례를 받게 된다. 바로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Adam Schall)이다. 1628년 32번째 예수회 신부(神父)로서 북경 동안문(東安門) 내에 거주한 아담 샬은 해박한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역서(曆書)와 대포를 제작하는 일을 맡아 명(明) 신종(神宗)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청(淸) 세조(世祖)는 북경 점령 후 그의 과학 지식을 이용하기 위해, 지금의 천문대장 격인 흠천감정(欽天監正)으로 삼고《대청시헌력(大淸時憲曆)》을 짓게 하였다.

 

아담 샬은 북경 남문인 선무문(宣武文)내에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세운 남천주당(南天主堂)에 자주 머물렀는데, 소현세자는 아담 샬의 거주지와 남천주당을 자주 찾아 이 벽안의 선교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현세자의 북경 숙소인 문연각이 아담 샬의 숙소와 가까운 동화문(東華門) 안에 있었으므로 두 사람은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오가면서 우정을 쌓았다. 아담 샬에게 소현세자와의 만남은 조선에 천주교를 전교할 수 있는 호기였고, 소현세자에게 아담 샬은 서양 문명과 천주교 사상을 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머나먼 이국 땅으로 자청해서 온 푸른 눈의 선교사와 볼모로 잡혀온 불행한 세자의 남다른 처지가 서로에게 이색적인 감회를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이 만남을 지켜봤던 당시 남천주당의 신부 황비묵(黃斐黙)은《정교봉포(正敎奉褒)》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순치(順治) 원년(1644)에 조선의 국왕 이종(李倧ː仁祖)의 세자는 북경에 볼모로 와서 샬[湯若望] 신부님의 명성을 듣고, 때때로 천주당을 찾아와 천문학 등을 살펴 물었다. 샬 신부도 자주 세자 관사(館舍)를 찾아가서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깊이 사귀었다. 샬 신부는 거듭 천주교가 정도(正道)임을 말하고, 세자도 자못 듣기를 좋아하여 자세히 묻곤 했다. 세자가 귀국할 때에 샬 신부님은 선물로 그가 지은 천문(天文) · 산학(算學) · 성교정도(聖敎正道)의 서적 여러 가지와 여지구(與地球), 그리고 천주상(天主像)을 보냈다.”

 

선물을 받은 소현세자는 곧 아담 샬에게 감사 편지를 보냈다.

 

“귀하가 주신 여지구와 과학에 관한 서적은 정말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그 중 몇 권의 책을 보았는데, 그 속에 덕행을 실천하는데 적합한 최상의 교리를 발견했습니다. 천문학에 관한 책은 귀국하면 곧 간행하여 널리 읽히고자 합니다. 이것들은 조선인들이 서구 과학을 습득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서로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태어난 우리가 이국 땅에서 상봉하여 형제와 같이 서로 사랑해 왔으니 하늘이 우리를 이끌어 준 것 같습니다.”

 

인조가 세자에 대한 증오를 키우고 있을 때, 세자는 이렇듯 왕조가 교체되는 도시 북경에서 ‘하늘이 이끌어 준 만남’에 감사하고 있었다. 세자가 아담 샬과 교류한 때는 서기 1644년, 조선이 일본의 무력(武力)에 의해 개국하기 232년 전으로, 일본이 미국의 페리 제독에 의해 개국한 때보다도 211년 앞섰다. 소현세자의 이 개방적인 사고는 그야말로 조선과 일본 두 나라의 운명을 뒤바꿔 놓을 수도 있는 만남이었던 것이다. 9년간의 불모 생활은 세자의 사고를 이처럼 개방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세자는 아담 샬이 조선에 천주교가 전파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하자, 신부를 대동하고 귀국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해 아담 샬을 놀라게 했을 정도로,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당시 중국도 신부가 부족한 형편이어서 아담 샬은 신부 대신 천주교 신자인 중국인 환관과 궁녀들을 데려가라고 제의했다. 이방조(李邦詔)·장삼외(張三畏)·유중림(劉仲林)·곡풍등(谷豊登)·두문방(竇文芳) 등 중국인 환관들과 궁녀들이 소현세자와 함께 조선에 간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들은 아마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천주교 신자였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조선 땅을 밟은 이래 최초의 천주교 신자들일 것이다.

 

1644년 11월 1일 청나라 황제인 세조는 북경의 천단에 제사하고 등극을 선포했다. 자신이 천하의 주인임을 선포한 것이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도 이 행사에 따라가 참예했다. 그리고 그달 11일 구왕은 용골대를 시켜 세자가 꿈에도 그리던 말을 전했다.

 

“북경을 얻기 이전에는 우리 두 나라가 서로 의심하여 꺼리는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지금은 대사(大事)가 이미 정해졌으니 피차가 서로를 신의로써 믿어야 할 것이다. 또 세자는 동국의 세자로서 여기에 오래 머물 수 없으니 지금 의당 본국으로 영원히 보낼 것이다.”

 

“귀하가 주신 여지구와 과학에 관한 서적은 정말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그 중 몇 권의 책을 보았는데, 그 속에 덕행을 실천하는데 적합한 최상의 교리를 발견했습니다. 천문학에 관한 책은 귀국하면 곧 간행하여 널리 읽히고자 합니다. 이것들은 조선인들이 서구 과학을 습득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서로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태어난 우리가 이국 땅에서 상봉하여 형제와 같이 서로 사랑해 왔으니 하늘이 우리를 이끌어 준 것 같습니다.”

 

인조가 세자에 대한 증오를 키우고 있을 때, 세자는 이렇듯 왕조가 교체되는 도시 북경에서 ‘하늘이 이끌어 준 만남’에 감사하고 있었다. 세자가 아담 샬과 교류한 때는 서기 1644년, 조선이 일본의 무력(武力)에 의해 개국하기 232년 전으로, 일본이 미국의 페리 제독에 의해 개국한 때보다도 211년 앞섰다. 소현세자의 이 개방적인 사고는 그야말로 조선과 일본 두 나라의 운명을 뒤바꿔 놓을 수도 있는 만남이었던 것이다. 9년간의 불모 생활은 세자의 사고를 이처럼 개방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세자는 아담 샬이 조선에 천주교가 전파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하자, 신부를 대동하고 귀국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해 아담 샬을 놀라게 했을 정도로,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당시 중국도 신부가 부족한 형편이어서 아담 샬은 신부 대신 천주교 신자인 중국인 환관과 궁녀들을 데려가라고 제의했다. 이방조(李邦詔)·장삼외(張三畏)·유중림(劉仲林)·곡풍등(谷豊登)·두문방(竇文芳) 등 중국인 환관들과 궁녀들이 소현세자와 함께 조선에 간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들은 아마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천주교 신자였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조선 땅을 밟은 이래 최초의 천주교 신자들일 것이다.

 

1644년 11월 1일 청나라 황제인 세조는 북경의 천단에 제사하고 등극을 선포했다. 자신이 천하의 주인임을 선포한 것이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도 이 행사에 따라가 참예했다. 그리고 그달 11일 구왕은 용골대를 시켜 세자가 꿈에도 그리던 말을 전했다.

 

“북경을 얻기 이전에는 우리 두 나라가 서로 의심하여 꺼리는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지금은 대사(大事)가 이미 정해졌으니 피차가 서로를 신의로써 믿어야 할 것이다. 또 세자는 동국의 세자로서 여기에 오래 머물 수 없으니 지금 의당 본국으로 영원히 보낼 것이다.”

 

◆ 인조에게 쏠린 몇 가지 의혹

 

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은 당연히 수많은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풍토가 다른 이역에서 9년을 살다가 귀국한 세자가 학질에 쓰러질 리가 없다는 것이 식자들의 생각이었다. 당연히 세자가 독살되었을지 모른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의혹은 세자에게 침을 놓은 의관 이형익에게 집중되었다. 이형익이 어의로 특채된 배경에도 의혹의 눈길이 모아졌다. 이형익은 원래 인조의 후궁 소용 조씨의 사가에 출입하던 의원이었는데, 소용 조씨의 추천으로 어의가 되었다. 그가 어의로 특채된 것은 불과 3개월 전이었다. 그의 특채 시점이 세자의 귀국 시점과 일치하고, 그의 특채에 결정적 역할을 한 소용 조씨가 세자 및 세자빈과 알력 관계에 있다는 점을 모르는 궁중 사람은 없었다. 특히 소용 조씨와 세자빈 강씨와의 알력관계는 외부에 알려질 정도로 심각했다. 당연히 이형익과 소용 조씨가 세자를 독살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런데 인조는 시종일관 이형익을 옹호하고 나섰다. 그러자 사람들은 인조가 세자 독살에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품게 됐다. 국왕이나 세자가 승하하면 시의(侍醫)들은 잘못의 유무를 떠나 국문하는 것이 관례였다. 소현세자같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의혹이 있는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므로 양사에서 이형익을 탄핵하고 나선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세자의 증후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악화되어 끝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뭇사람이 모두 의원들의 진찰이 밝지 못했고 침놓고 약 쓴 것이 적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여깁니다. 의원 이형익은 사람됨이 망령되어 허탄한 의술을 스스로 믿어서 세자의 증세도 판단하지 못하고 날마다 침만 놓았으니 그를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도록 하소서.”

 

양사의 이런 당연한 주청에 인조는 “의원들은 신중하지 않은 일이 별로 없으니 국문할 것 없다”고 답했다. 양사에서 재차 국문을 청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으며, 이후에도 시종일관 이형익을 옹호했다. 소현세자의 죽음에 인조가 관련되었다는 유력한 증거 중 하나가 바로 이점이다. 양사는 물론 산림(山林)의 송준길(宋浚吉)까지 나서서 이형익을 처형하라고 주청했으나 인조는 요지부동 이형익 편만 들었다.

 

『인조실록(仁祖實錄)』재위 23년 6월 27일자의 기사에 세자가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고 적혀 있을 정도로 소현세자가 독살되었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인조실록』에 적힌 세자의 시신 상태, 즉 시신이 까맣게 변하거나 눈, 코, 귀 등에서 피가 나오는 것은 독약을 먹고 죽은 사람의 시신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현상이었다. 이 목격담은 소현세자의 생모인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서제(庶弟)인 진원군(珍原君) 이세완(李世完)의 아내가 내척의 자격으로 세자의 염습에 참여했다가 세자의 시신 상태에 의혹을 품고 한 말이었다.

 

심지어 인조는 이형익을 옹호하기 위해 승정원에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은 상소를 받아들이면 처벌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당시 이형익의 처형을 가장 강도 높게 주장했던 김광현(金光鉉)은 척화파인 김상용(金尙容)의 아들이자 “가노라 삼각산아/다시 보자 한강수야”라는 시를 읊으며 청에 끌려갔던 김상헌의 조카였다. 그러니 그의 집안에서는 당연히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았고 인조도 이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김광현이 이형익을 처형하라고 극력 논박하자, 인조는 세자빈 강씨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판단하고 이런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세자빈 강씨, 즉 강빈의 오라비 강문명(姜文明)의 장인이기도 했던 김광현은 훗날 강빈의 옥사가 발생하자 아무 죄도 없이 이조참판에서 순천부사로 좌천되기도 했다.

 

인조가 세자의 죽음에 관련되어 있다는 의혹은 장례 절차에서도 나타난다. 인조는 세자의 시신을 담은 관의 명칭에 임금의 관을 뜻하는 ‘재궁(梓宮)’이란 호칭을 쓰지 못하게 하고, 대신 대부나 일반 사서들이 쓰던 ‘널 구(柩)’자를 쓰도록 했다. 세자시강원의 보덕 서상리와 필선 안시현 등이 반발하고 나선 것처럼 세자는 살아서는 동궁, 죽어서는 빈궁(殯宮)이 되므로 재궁이라 쓰는 것이 예법에 맞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인조는 무덤의 이름에도 ‘원(園)’자 대신에 ‘묘(墓)’자를 쓰도록 했다. ‘원’자는 태자묘를 일컫는 것이기 때문에 중국의 태자만 쓸 수 있다는 논리였으나, 황제의 무덤을 일컫는 ‘능(陵)’자를 역대 임금의 무덤에 써 왔다는 점에서 이 또한 명분 없는 억지였다.

 

상복 착용 기간도 마찬가지였다. 고례에 따르면 장자의 상에는 부모가 참최복(斬衰服), 즉 3년복을 입는 것이 예법에 맞았다. 그러나 영의정 김류나 좌의정 홍서봉 등 서인 중신들은 인조와 왕비의 복제를 기년복(朞年服), 즉 1년복으로 의정해 올렸다. 그 자체로도 문제가 있었는데, 인조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한 달을 하루로 계산하는 역월법(易月法)을 적용해 12일만에 복제를 마치려고 하다가 한 등급 더 감해 7일만에 마쳤다. 1년을 입어야 할 복제를 1주일만에 벗어 버린 것이다.

 

또한 인조는 재최(齋最) 1년복을 입어야 할 백관의 복제를 3개월 단상(短喪)으로 결정했다. 옥당에서 부당하다는 차자를 올렸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지평 송준길이 병을 이유로 벼슬을 사양하는 상소를 올리며 이를 조목조목 비판하고 나섰다. 송준길은 인조와 강빈, 그리고 원손은 참최 2년복을 입고, 중전은 재최 3년복을 입어야 하며, 신하들은 기년복으로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인조는 유신이 사직하면 만류하는 관례를 무시하고, 송준길의 상소에 아무런 답도 없이 그를 체직하라고 명하였다. 인조는 이처럼 소현세자의 장례 절차마저 야박하게 대우했다. 인조는 이미 소현세자를 세자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결정적인 문제는 소현세자의 후사 문제였다.

 

◆ 원손이 아닌 대군을 후사로 삼겠다.

 

당시 원손(元孫)으로 불리고 있던 석철(石鐵)이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뒤를 이을 것인가가 관심의 초점이었다. 소현세자를 모셨던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관료인 필선 안시현은 “원손을 세손(世孫)으로 세우자”는 상소를 올리면서, 세자의 상에 사부를 비롯해 어느 누구도 강빈(姜嬪)에게 조문하여 위로하지 않은 사실을 비판했다. 세자의 사부, 즉 영의정과 좌의정은 인조(仁祖)의 마음이 강빈에게서 떠난 것을 알고 위문을 생략한 것이다. 이런 위태로운 정황 때문에 세자궁의 관원들이 세자가 독살당했다는 의혹을 갖고 서둘러 원손을 세손으로 책봉하자고 주청하게 되었다. 하지만 인조는 안시현의 당연한 상소를 즉각 물리치면서 “이러한 소인의 행태는 내가 차마 똑바로 볼 수 없다”며 파직시켜 버렸다. 그러나 위기감을 느낀 안시현은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다시 상소를 올려 원손을 세손으로 정하자고 거듭 주장했다.

 

이조참의 조석윤(趙錫胤)도 안시현과 송준길의 상소는 나라를 걱정하는 강직한 언론인데도 모두 배척하였으니 뭇사람의 마음에 어찌 의심이 없겠냐고 비판할 정도로 소현세자와 강빈, 그리고 원손에 대한 인조의 대접은 법도에 어긋난 것이었다.

 

원손에게 뒤를 잇게 하지 않으려는 인조의 속셈은 소현세자가 급서하고 석 달 후인 재위 23년 윤6월 2일에 드러난다. 인조는 대신 및 정부의 당상 육경, 판윤과 양사의 장관 16명을 인접한 자리에서 폭탄선언을 한다.

 

“내게 오래 묵은 병이 있는데 원손이 저렇게 미약하니 성장하기를 기다릴 수 없다.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는 원손이 아닌 다른 인물, 즉 대군(大君)을 후사로 삼겠다는 충격적인 발언이자 훗날 조정을 뒤흔들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이럴 때 가장 좋은 처신은 법과 원칙에 따르는 것이었다. 법과 원칙에 따르면 원손이 세손이 되어야 했으므로 당연히 반대가 잇따랐다. 좌의정 홍서봉이 나섰다.

 

“옛 역사를 상고해 보면 태자가 없으면 태손(太孫)이 뒤를 이었으니, 이것이 바꿀 수 없는 떳떳한 법입니다. 상도(常道)를 어기고 권도(權道)를 행하는 것은 국가의 복이 아닐 듯합니다.”

 

영중추부사 심열·판중추부사 이경여 등도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자 인조는 영의정 김류를 끌어들였다.

 

“이 일은 오로지 영상에게 달려 있으니, 경이 결단하라.”

 

후사를 정하는 일은 영의정의 권한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는 인조와 반정 주역 김류 사이에 밀약이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김류는 미리 계획한 대로 세조(世祖)의 둘째 아들로서 보위를 이은 예종(睿宗)과 의경세자(懿敬世子)의 둘째 아들 성종(成宗)이 왕위를 이은 예를 들었다. 둘째 아들이 보위를 이은 예를 듦으로써 원손을 폐하고 대군을 세우려는 인조의 의중을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우찬성 이덕형·공조판서 이시백(李時白)·이조판서 이경석(李景奭) 등 양심적 관료들은 반대 의사를 굽히지 않았고, 부제학 이목(李牧)과 대사간 여이징(呂爾徵)도 “상도를 지켜야 한다”며 가세했다.

 

김류를 끌어들였음에도 대다수 신하가 반대의 뜻을 굽히지 않자 인조가 화를 벌컥 냈다.

 

“이 일은 반드시 대신이 결단해야겠다. 경들이 이렇게 평범한 말만 하고 있으니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죽는다면 경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때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 김자점(金自點)이 입을 열었다.

 

“이 일은 성상의 깊고 원대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니 의당 속히 결정해야 할 일인데, 어찌 우물쭈물 미룰 필요가 있겠습니까?”

 

인조가 기뻐하며 말했다.

 

“그 말이 옳다.”

 

이어 김류가 김자점과 한편임을 실토했다.

 

“지금 신민들의 기대가 모두 원손에게 있는데도 전하께서 이러시는 것은 반드시 바깥 사람이 알 수 없는 궁중의 일입니다. 그러니 성상의 뜻이 이미 정해졌다면 신이 어찌 감히 다른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경의 뜻이 나와 부합된다.”

 

그러나 실학의 시조인 원손의 사부 김육(金堉)이 반대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원손이 아직 어려서 덕망을 잃은 것이 없습니다.”

 

잘못이 없는 원손을 어떻게 폐할 수 있느냐는 당연한 항변이었다. 그러자 김류가 나섰다.

 

“상께서 만일 분명한 전교를 내리신다면 당장 결단할 수 있습니다.”

 

빨리 결심하라는 재촉에 인조가 화답했다.

 

“원손의 자질이 밝지 못하여 결코 나라를 감당할 만한 재목이 아니다.”

 

원손의 사부 이식(李植)이 반대했다.

 

“진강(進講)할 때 보니 원손의 재기가 뛰어났습니다.”

 

사부가 원손의 자질이 뛰어나다고 반박하자 인조는 엉뚱한 이야기를 꺼낸다.

 

“한갓 재질의 현명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이를 가지고 말한 것이다.”

 

좌의정 홍서봉이 공을 인조에게 떠넘겼다.

 

“신이 계달하는 것은 상도입니다. 권도를 쓰는 것은 성상께 달려 있습니다.”

 

종법이나 예법에 어긋나는 권도, 즉 원손을 폐하고 대군을 후사로 삼으려면 자신들을 끌어들이지 말고 인조 스스로 결정하라는 말이었다. 이 말을 들은 인조는 매우 분노해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경여가 다시 나섰다.

 

“지금 성상의 하교는 원손의 현명함은 언급하지 않고 나이만을 언급하셨습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어 덕을 성취하고 나라를 보전한 사람 또한 한둘이 아닌데, 어찌 나이 어린 것 때문에 원손을 함부로 폐립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상도를 뒤엎고 권도를 행해야 종사가 보존된다면 신 또한 상도만을 고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심열이 아뢰었다.

 

“세자가 이미 졸(卒)하였으면 뒤를 이을 사람은 원손인데, 국본을 바꾸는 일을 어찌 말 한마디에 당장 결단할 수 있겠습니까?”

 

우찬성 이덕형이 강력하게 반대하지 못하는 여러 신하를 비판하고 나섰다.

 

“오늘 성상께서는 비록 종사를 위해서라고 말씀하시지만 하루아침에 갑자기 이미 바로잡힌 원손의 명호를 바꾸려고 하시는데, 뭇 신하가 모두 바람에 쏠리듯이 따라 버린다면 장차 저런 신하들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인조가 한참 동안 묵묵히 있다가 물었다.

 

“대신들의 뜻이 모두 일치하였는가?”

 

김류가 대답했다.

 

“이의가 없는 듯합니다.”

 

원손을 폐하고 대군을 세우자는 말이었다. 인조가 물었다.

 

“자식이 둘이 남아 있으니 대신이 그 중 나은 사람을 결정하라.”

 

봉림대군(鳳林大君)과 인평대군(麟坪大君) 중에서 고르라는 말이었다. 신하들 보고 다음 왕이 될 사람을 고르라는 하교에 홍서봉이 아뢰었다.

 

“대군은 조신들과 접한 일이 없는데, 어떻게 그 우열을 가릴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상의 간택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두 사람은 다 용렬하니 취하고 버릴 것도 없다. 나는 그 중 장자를 세우고자 하는데 어떤가?”

 

김류가 맞장구쳤다.

 

“장자로 적통을 세우는 것이 사리에 합당합니다.”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노라.”

 

이에 원손 석철이 폐위되고 봉림대군이 세자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원손의 자리를 대군으로 바꾸는 데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나라 사람들이 후사로 믿고 있던 원손을 폐한다면, 그 다음으로 원손의 목숨까지 빼앗을 것이 분명했다.

 

효종(孝宗)과 현종(顯宗) 연간에 벌어졌던 예송(禮訟) 논쟁이 단순히 상복 착용 기간을 둘러싼 이론 논쟁이 아니라 정권의 정통성을 묻는 예각의 정치 논쟁이었던 이유도, 바로 이 종법을 무시한 인조의 후사 책봉에 있었다. 소현세자의 뒤를 이을 적통은 봉림대군이 아니라 원손 석철이었다. 소현세자처럼 성인이 된 후 죽었을 경우에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인조가 무리해 가며 봉림대군을 후사로 결정했기 때문에, 두 차례에 걸친 예송 논쟁은 효종의 승통이 정당한 것이었느냐는 극도로 민감한 정치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 강빈과 석철의 비극적인 죽음

 

원손의 지위를 빼앗은 것으로도 세자 일가에 대한 인조의 분노는 끝나지 않았다. 인조의 화살은 이제 남편을 잃고 상심해 있는 며느리 강빈에게 향해졌다.

 

인조는 강빈이 청나라와 결탁해 자신을 몰아내고 세자를 즉위시키려 했다고 의심했다. 뿐만 아니라 세자가 죽은 후에도 강빈이 청나라와 결탁해 자신을 내몰고 원손을 즉위시킬 수 있다고 의심했다.

 

인조는 저주 사건을 이용해 강빈을 제거하려 했다. 원손이 폐립된 지 약 두 달 후인 인조 재위 23년 8월말, 궁중에서 저주 사건이 발각되어 두 명의 궁녀가 하옥되었다. 그 중 한 사람은 원손의 보모 최상궁이었다.

 

인형과 조수(鳥獸) 따위를 마당이나 배갯속 등에 묻어 두고 상대방에게 화가 내릴 것을 비는 저주 사건은, 그 성격상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했다. 고문에 의한 자백을 인정하는 관례를 이용해 강빈을 얽어 넣으려고 두 궁녀를 심하게 고문했으나, 두 궁녀는 조작된 혐의를 시인하는 대신 죽음을 택함으로써 강빈을 보호했다.

 

그러자 인조는 강빈의 오라비를 귀양 보내는 등 강빈의 친정을 치죄하여 손발을 묶은 후 다시 저주 사건을 일으켰다. 이번에도 강빈의 궁녀 두 명이 연루되었으나 이들 역시 조작된 자백을 거부하고 죽어 갔다.

 

그러나 며느리에 대한 인조의 분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인조 재위 24년(1646년) 정월에는 인조의 수라상에 독이 든 전복구이가 오른 사건이 발생했다. 인조는 이번에도 강빈에게 혐의를 돌려 궁인들을 하옥해 국문하고, 강빈은 후원 별당에 감금했다.

 

인조의 수하들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상황에서 강빈이 독을 넣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인조가 이미 “감히 강씨와 말하는 자는 죄를 주겠다”는 엄명을 내려 강빈의 수족을 완전히 묶어 놓은 상태였다는 점에서, 이 사건도 인조의 자작극임에 분명하다.

 

이번에도 강빈의 궁녀인 정렬과 유덕이 하옥되어 압슬(壓膝)에 낙형(烙刑) 같은 심한 고문을 받았으나, 이들도 조작된 시나리오를 승인하지 않고 고문 속에 죽어 갔다. 이렇듯 연일 무고한 궁녀들이 죽어 감에도 인조는 며느리의 목숨을 끊으려는 집요한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전복구이에 독을 넣은 사건도 오리무중에 빠진 후 인조는 비망기를 내린다. 그런데 그 비망기의 내용은 인조 자신이 소현세자를 죽인 범인이며, 저주 사건과 독약 사건을 자작했음을 자백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강빈이 심양에 있을 때 은밀히 왕위를 바꾸려고 도모하면서 미리 홍금적의(紅錦翟衣)를 마련해 놓고 참람하게 내전(內殿)의 칭호를 외람되이 사용하였다. 지난해 가을에 매우 가까운 곳에 와서 분한 마음 때문에 시끄럽게 성내는가 하면 사람을 보내 문안하는 예까지 폐한 지가 이미 여러 날이 되었다. 이런 짓도 하는데 어떤 짓인들 못하겠는가? 이것으로 미루어 헤아려 본다면 흉한 물건을 파 놓아 저주하고 음식에 독을 넣은 것은 모두 다른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다. 예부터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어느 시대나 없었겠는가만 그 흉악함이 이 역적처럼 극심한 자는 없었다. 군부를 해치고자 하는 자는 천지에서 하루도 목숨을 부지하게 할 수 없으니 해당 부서로 하여금 품의해 처리하게 하라.”

 

강빈이 역적이라는 이 비망기는 인조 자신이 모든 비극의 주범임을 실토하는 자백서나 마찬가지였다. 인조는 자신의 죄가 비망기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도 잊은 것이다.

 

강빈이 역적이라는 이 비망기는 인조 자신이 모든 비극의 주범임을 실토하는 자백서나 마찬가지였다. 인조는 자신의 죄가 비망기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도 잊은 것이다.

 

신하들은 물론 강빈이 무죄라고 생각했으므로, 역적죄로 품의해 올리라는 인조의 명을 거부했다. 그러자 인조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위기의식을 조장했다. 병조판서 구인후(具仁垕)를 궁중에 머무르게 하고, 김자점을 호위청에 입직시켰으며, 포도대장과 금부도사에게 궁궐을 엄중히 경비하라고 명했다. 인조는 이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후 강빈을 처형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많은 신하가 반대하고 나섰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대사헌 홍무적(洪茂積)이 강경히 반대했다.

 

“민회빈(愍懷嬪)을 폐위시킬 수는 있으나 결코 죽일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세자빈을 죽이고자 하신다면 먼저 소신을 죽인 다음에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어 강빈의 목숨을 살려 달라고 요구하는 상소가 끊임없이 이어졌으나 인조는 요지부동이었다. 드디어 재위 24년 2월에 인조는 강빈을 폐출하고 사사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 명을 거두어 달라는 상소가 빗발쳤으나 인조는 끝내 자신에 의해 과부가 된 며느리에 대한 분노를 거두지 않았다.

 

강빈을 결국 사저로 쫓겨난 후 사약을 마셨고, 교명(敎命)·죽책(竹冊) 등은 거두어 불태워졌다. 인조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강빈의 형제들에게도 죄를 씌워 장살(杖殺)했다.

 

소현세자에 이어 강빈마저 세상을 떠났으나 세자 일가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강빈을 죽인 후 인조는 이전의 저주 사건을 재심했다. 모진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강빈을 지켰던 궁녀들은 이제 희망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강빈의 죽음으로 희망을 잃은 궁녀들은 결국 고문자의 의도에 굴복하고 강빈의 이름을 댔다.

 

인조는 이를 명분으로 이 사건을 강빈의 친정어머니와 강빈의 세 아들, 즉 소현세자의 아들이자 자신의 친손자이기도 한 경선군(慶善君) 석철(石鐵)·경완군(慶完君) 석린(石磷)·경안군(慶安君) 석견(石堅) 세 어린아이에게 확대시켰다. 인조는 안사돈이었던 강빈의 어머니를 처형하고, 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유배보냈다.

 

이들의 유배지를 정하라는 인조의 명을 받은 의금부는 맏아들 석철을 제주현에, 둘째 석린은 정의현에, 그리고 석견은 대정현에 각각 유배하자고 정했다. 그러나 인조는 이를 거부했다.

 

“한 곳에 정배(定配)하여 서로 의지해서 살도록 하되, 내관과 별장 등을 교대로 지정해 보내 외부인들이 접촉하지 못하게 하고, 세 고을에 정배된 사대부는 모두 다른 섬으로 옮겨 정배하라.”

 

당시 제주에는 ‘강빈을 죽이려면 먼저 나를 죽이라’고 격렬하게 반발했던 전 대사헌 홍무적이 유배되어 있었으므로 이런 명을 내린 것이다. 홍무적은 이에 남해현으로 옮겨졌으며,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을 반대해 귀양 갔던 이경여도 북쪽 변경으로 옮겨졌다.

 

소현세자의 뒤를 이어 조선의 임금이 되어야 했던 석철은 1647년 7월 12세의 어린 나이에 죄수의 몸으로 제주도에 도착했다. 이날 사관은 인조의 이런 처사를 개탄하는 글을『인조실록』에 덧붙였다.

 

“지금 석철 등이 국법으로 따지면 연좌되어야 하나 조그만 어린아이가 무엇을 알겠는가? 그를 독한 안개와 풍토병이 있는 큰 바다 외로운 섬 가운데 버려두었다가 하루아침에 병에 걸려 죽기라도 하면 소현세자의 영혼이 깜깜한 지하에서 원통함을 품지 않겠는가?”

 

석철은 과연 다음 해 9월 제주도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인조는 그 소식을 듣고 “석철의 일은 내가 놀랍고 슬프게 여기고 있다. 중관을 내려 보내 그의 시신을 호송해 아비 곁에 장사 지내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날의 사관은 인조를 직접 비난하고 있다.

 

“석철이 역강(逆姜)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성상의 손자가 아닌가?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의 지친으로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풍토병이 있는 제주도에 귀양 보내 결국 죽게 하였으니, 그 유골을 아버지의 묘 곁에 장사 지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슬플 뿐이다.”

 

『인조실록』은 석철의 죽음을 풍토병 때문이라고 기록했으나 당시 지각 있는 사람들은 인조가 석철을 반드시 죽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소현세자가 죽은 후 청나라의 장수 용골대가 석철을 데려다 기르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인조가 청에서 석철을 키운 후 자신을 폐위시키고 석철에게 왕위를 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청나라의 사신들이 돌아갈 때 꼭 소현세자의 묘에 들러 참배하는 등 소현세자의 죽음을 슬퍼했으므로 인조는 석철을 더욱 두려워했다.

 

비록 석철이 독살이 아닌 풍토병으로 죽었다 해도, 이는 어린 손자를 사지로 몰아넣은 인조에 의한 타살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소현세자의 둘째 아들 석린도 석 달 후 형을 따라 세상을 버렸다.

 

친손자를 줄줄이 죽인다는 세상의 비난이 두려워진 인조는 그 책임을 나인 옥진(玉眞)에게 돌려 여러 차례 고문해 죽여 버렸다. 석철과 석린을 잘 모시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옥진은 두 아이가 죽은 것은 토질 탓이지 자신이 보양을 잘못한 탓이 아니라고 반박했으나 인조에게 필요한 것은 두 손자의 죽음에 쏠린 내외의 의혹을 돌릴 희생양이었지 진실이 아니었다.

 

한편 강빈은 억울하게 죽은 지 8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인 1718년에 이르러서야 복위 선시(宣諡)되었다.

 

◆ 소현세자가 요절하지 않았다면 천주교 박해는 없었을 것…

 

청나라에서 접한 서구 문물과 천주교 사상을 조선에 들여와 낡은 성리학 이론을 탈피하여 사회체제를 개혁하려는 꿈을 안고 귀국했던 소현세자가 이렇게 친아버지인 인조에 의해 독살됨으로써 그의 꿈은 허망하게 좌절되었다.

 

소현세자가 순조롭게 즉위하여 청나라에서 익힌 세계 정세에 대한 식견을 바탕으로 정사를 펼쳤다면, 인조의 쿠데타로 야기된 그 모든 국난은 긍정되고 오히려 옥동자를 낳기 위한 산고로 평가되었을 것이다. 또 소현세자가 만약 인조의 뒤를 이어 조선의 국왕이 되었다면 비록 사대부들의 반발이 심했을지는 몰라도 성리학 대신 천주교 사상을 국가운영의 이념으로 삼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며, 그랬다면 신유사옥(辛酉邪獄ː1801년)·기해사옥(己亥邪獄ː1839년)·경신사옥(庚申邪獄ː1859년)·병인사옥(丙寅邪獄ː1866년) 등으로 수많은 천주교 신자가 희생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조와 반정의 주역들이 소현세자를 제거하고 원손마저 제거함으로써 소현세자의 꿈은 지상에서 사라졌다. 조선을 개혁의 나라, 개방의 나라로 만들려던 선진적인 꿈은 소현세자와 강빈, 그리고 석철의 시신과 함께 차디찬 지하에 묻히고 만 것이다.

 

소현세자가 데려온 천주교 신자인 청나라의 환관들은 청나라의 사신과 함께 돌아갔다. 그리고 천주교라는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인 이 청나라의 환관들이 돌아감으로써 조선은 세계에서 유일한 성리학 유일 사상의 나라로 남게 되었다. 그 밀폐된 공간과 정지된 시간을 채운 것은 인조반정의 후예들인 소중화주의자들의 사대주의와 예학이었다.

 

 

☞출처ː천고(遷固) 이덕일(李德溢) 저술『조선 국왕 독살사건』다산북스版(2005년編)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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