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웃대 - 나무의숲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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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온몸이 몽둥이로 두둘겨 맞은 것 처럼 쑤신다.
희미한 빛 한점 안 보이는 완벽한 어둠에 내가 눈을 뜨고 있는 것인지
감고 있는 것인지 조차 모르겠다.
마치 거대한 코끼리에 깔려 짓눌려있는 것처럼 무겁고 답답하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다. 고통에 소리치고 싶지만 목소리도 안나온다.
축축한 시멘트 냄새가 난다. 숨쉬기도 갑갑하다. 지금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어지럽다... 정신이 몽롱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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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냄새지? 숨을 들이쉴 때마다 공기보단 먼지가 더 들어오는
느낌 사이로 느껴지는 건...
화장품 냄새? 아직도 꿈인가?
아니다... 점차 정신이 들면서 온몸으로 스멀스멀 생생하게 느껴지는 아픔과
그 아픔만큼 생생해지는 기억이 차라리 이 상황이 꿈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게 한다.
그래. 기억난다. 난 퇴근 후 지수에게 줄 선물을 고르느라 백화점에 있었다.
갑자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느껴진 진동과 울럼거림.
무슨 일인가 둘러볼 겨를도 없이 천장이 무너져 내리고 바닥이 꺼져버렸다.
그나마 다행이다. 죽진 않았으니.
몸이 뭔가에 눌려있다. 그리고 조금씩 느껴지는 가느다란 숨소리... 사람이다.
사람이 내 몸 위에 있다.
숨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내 얼굴 바로 앞에서 숨결이 느껴진다.
땀냄새 섞인 화장품 냄새가 나는걸 보니 여자인 것 같다.
"이... 이 봐요..."
목소리가 갈라진다.
"이 봐요! 괜찮아요?"
"......"
대답이 없다. 하지만 이 사람도 살아있다.
일단 몸을 내 옆으로 눕히려 팔을 들어올리려 하자 양쪽 팔꿈치에 격렬한 통증이 왔다.
떨어지면서 다쳤나보다. 손끝에도 감각이 없다는 걸 알자 더욱 절망스럽다.
빨리 나가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 구조대... 구조대가 빨리 와야한다.
젠장...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난거지?
멀리서 희미한 신음소리와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더 있나보다.
그래. 정신차리자.
생일 선물 대신에 남편 사고 소식을 받게 될 지수는 많이 걱정하겠지?
그리고 우리 딸 지유...
두돌 지나 이제 막 말을 하기 시작해서
종알종알 대는 모습을 보면 하루 피로가 확 풀렸었는데.
반드시 나갈거다. 꼭...
"콜록! 콜록!"
왼쪽귀로 갑자기 들려온 기침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괘... 괜찮으세요?"
"으... 음... 아..."
"정신이 드세요? 괜찮아요?"
내 목소리가 들리기나 할까?
"백화점이 무너졌어요. 우린 그 밑에 깔렸구요... 기억 나세요?"
"아... 흑... 다리가... 다리가 너무 아...파요..."
갈라지고 쉰 목소리지만 귀 바로 옆에서 속삭이니 뚜렷하게 들린다.
다리를 다쳤나보다.
그러고 보니 내 바지 왼쪽 다리 밑 부분이 흥건히 젖어있는 느낌이 있다.
"일단... 돌아서 누워 보실 수 있겠어요? 출혈이 있는거 같은데..."
"......"
"움직일 수가 없어요. 양옆으로 돌만 만져져요. 등도..."
이럴수가. 완전히 밀폐된 공간에 둘이 끼여있구나.
아내 생일에 왠 다른 여자와 온몸을 맞대고 있어야 하는 꼴이라니...
이런 상황에서도 헛웃음이 나온다.
"흑... 흐흑... 엄마..."
"너무 걱정마세요. 구조될 수 있을 거예요."
서로 얼굴도 못 보는 상황에서 심장 고동과 내쉬는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밀착한 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눠보긴 처음이다.
알고보니 그녀는 내가 지수에게 줄 옷을 고르는데 옆에서 도와주던 점원이었다.
온통 쑤시는 몸 위에 있어서 그 무게는 몇십 배로 느껴지지만
그래도 이런 상황에 누군가 같이 있는 것이 더 낫겠지...
이름은 최서희.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이제 첫 취직에 첫 출근인데 이 일을 겪었단다.
그 외의 대화는 우는 걸 달래주는 것 뿐이었다.
그녀는 울다 지쳐 잠들었는지 아까부터 대답이 없다. 나도 피곤하다.
좀 자야겠다. 구조대는 언제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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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 흐흑... 흑..."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울음 소리에 잠에서 깼다. 여전히 처절하게 깜깜하다.
목이 마르다. 온몸이 쥐가 난 것처럼 욱신거린다.
"흑... 흑..."
"서희씨, 그만 우세요. 자꾸 우는 만큼 수분이 빠져나가요. 버텨야죠.
버텨서 어머니 곁으로 빨리 가야죠."
"네..."
"지금쯤 구조대가 우릴 찾고 있을 거에요. 조금만 더 참으면 구조될 거에요..."
안심 시키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생각할수록 불안하다. 우리가 있던게 2층.
이 백화점이 몇층 짜리 건물이었더라? 5층 아니면 6층이었던 것 같은데.
꽤 깊은 곳에 매몰된 것 같다. 아직 구조작업을 하는 소리도 안들린다.
가장 큰 문제는 물이다. 인간이 물없이 버틸수 있는 시간이 어느 정도였더라?
길어야 일주일?
누군가가 재난 상황에서 물이나 음식도 없이 열흘 이상을 버텨냈다는 얘기를 읽은 것도 같다.
열흘 안에 구조대가 우릴 찾을 수 있을까? 아니 내가 열흘이나 버틸 수 있을까?
"죄송해요. 저... 무겁죠?"
"괜찮아요. 그 보다 다리는 좀 어때요?"
"아직 아픈데, 참을 수 있어요."
아직 감각이 남아있는 다리를 살짝 움직여보니
젖어있던 바지 부분이 찐득하게 바닥과 붙어있다.
피가 굳어있는 걸로 봐선 다행이 출혈은 멈췄나 보다.
"우리 꼭... 살아서 나가요. 우릴 기다리는 사람들을 생각하세요."
많이 아프고 무서울 서희씨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다.
나 자신에게 다짐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누구라도 같이 있다는게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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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일이나 지났을까... 타들어 가는 갈증이 팔꿈치의 통증보다 이젠 훨씬 더 고통스럽다.
주위에서 가냘프게 들려오던 신음소리도 언제부턴가 현저하게 희미해졌다.
서희씨도 나도 그저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아무말도 없이 구조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말할 기운도 움직일 기력도 없거니와 사방이 꽉 막혀있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밀려오는 패쇄감에 텅 비어있는 속이 메스껍다.
칠흙같은 어둠을 반쯤 풀린 눈으로 바라본다.
어짜피 아무것도 안보이니 어딘가에 초점을 맞출 필요도 없다.
저 멀리서 지유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출근하기 전 곤히 자고있던 지유를 굳이 깨우지 않으려고
이마에 살짝 입맞춤만 하고 나왔는데...
그 모습이 마지막 모습이 될까 두렵다.
내가 돌아가지 못한다면 이제 두살인 지유는 나중에 나를 기억이나 할까?
갑자기 아버지 없이 지내왔다는 서희씨가 한없이 측은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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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 흑..."
몇일이 지났는지 감도 안잡힌다. 몇번을 잠들었다 깨어났는지도...
일어날 때마다 서희씨는 울고있다. 울지말라는 말도 이젠 하기 힘들다.
심한 갈증과 먼지 섞인 호흡에 목구멍이 바짝 타서 붙어버린 기분이다.
깨어있어도 반은 꿈꾸고 있는 듯 하다.
아직 남아있는 후각으로 피비린내와 생선 썩는 냄새가 희미하게 느껴진다.
주위의 신음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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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찢어지는 갈증에 잠에서 깨어났다. 물 한 모금까진 바라지 않는다.
그저 한번 삼킬 침이라도 나왔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서희씨가 너무 조용하다. 아니... 심장 고동도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스... 서... 서희씨! 서희씨!"
쉰소리로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다.
울었다. 이 힘들고 외로운 절망을 이제 혼자 버텨가야 한다는 생각에,
이렇게 처참히 어둠 밑바닥에 혼자 내팽겨쳐진 내 처지가 억울해서
눈물도 안나오는데 꺼억꺼억 울었다.
서희씨의 죽음은 생각보다 나에게 치명적이었다.
이젠 더 이상 버텨낼 자신이 없다.
처음엔 그나마 의지할 존재가 사라진 것에 대한 상실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나의 마음을 더욱 잔인하게 꺾어버린 것은
거의 한계에 다다른 탈수와 공복,
그리고 앞으론 시체와 얼굴을 맞댄 체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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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 흐흑... 흑..."
들린다... 계속 들린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내 몸위의 짓이김에서 나올 리 없는 소리...
아무것도 안보이는 어둠 속에서 내 왼쪽 귀로 뚜렷히 들리는 울음소리.
난 미쳐가고 있다. 온몸이 마비된 듯 감각이 없고,
후각도 시각도 없는데 서희씨의 울음 소리는 계속해서 들린다.
마치 세상에 나의 왼쪽 귀만 존재하는 것 같다.
차라리 잠들어 버렸으면 좋겠다. 다시 깨어날 자신은 없지만...
내 정신과 몸은 이미 한계를 넘어섯다. 그래, 이젠 받아 들이자. 포기하자.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번만, 딱 한번만 지유가 "아빠"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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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그후로 5일을 더 버텼다.
그리고 구조되었다.
지금 나의 곁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를 보는 눈빛을 한 지수와
앙증맞은 재롱을 부리는 지유가 있다.
구조된 후 한동안은 지독한 후유증에 고생했다.
으스러진 팔꿈치, 탈수증, 영양결핍, 피부습진, 페쇠공포증, 그리고 지독한 식중독...
사람들은 나의 생환을 기적이라 부른다.
각종 매체의 러브콜, 심지어 책을 내자는 사람들도 줄을 서있다.
이런 관심에 어안이 벙벙하지만 난 무엇보다
지수와 지유 곁에 다시 올 수 있었다는 것에 한없이 감사한다.
그 무엇보다... 서희씨에게 감사한다.
서희씨가 없었다면 난 다시는 지금 이 환하고 따뜻한 자리에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정말 감사한다.
나에게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그리고 무엇보다...
화장품 맛나는 양분과 비릿내 나는 수분이 되어준 서희씨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