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 민족주의사학(韓國近代民族主義史學)의 시조(始祖)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 12. 민족해방이념으로 아나키즘 수용 ⑴

참의부2013.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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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해방이념으로 아나키즘 수용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지배하는 질서는 옳은 질서가 아니다.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지배하는 질서, 그것도 잘못된 질서다. 잘못된 질서를 강제로 유지하는 패도정치는 바른 정치가 아니다. 바르지 못한 정치를 권력으로 집행하는 정부는 옳은 정부가 아니다. 아나키즘은 그런 정치를 반대하고 그런 정부를 배격한다. 우리나라의 아나키스트들이 일제의 식민통치에 반항하여 극렬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점에서 말한다면,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라고 불러도 무방하다.”(하기락)

 

자유를 갈망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의 가운데 하나다. 인간은 들판의 꽃이나 하늘을 나는 새처럼 거침없이 자유롭게 살아가기를 원한다. 아나키즘은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 욕망이나 이상을 근거로 하여 그것을 위해 싸우는 신념체계다. 이것은 냉정한 합리주의만이 아니라 낭만적 감상이나 동경까지 포함하고 있는 사상이다.

 

인류사회의 궁극적인 이상 형태를 말하자면 의심할 나위없이 그것은 아나키즘의 사회일 것이다. 제계적 석학들이 인류의 미래상을 두고 간디이즘·생태공동체운동의 에코이즘(Ecoism)과 함께 아나키즘을 들고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아나키즘의 어원은 그리스 어의 ‘anarchos’인데, 그것은 ‘지배자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원래 ‘무강권주의(無强權主義)’로 번역하는 것은 바른 번역이 아니다.

 

아나키즘은 1900년 이후 일본에서 수용된 급진적 사회개혁사상의 하나였다. 사회주의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일본에 전파되어 진보적인 청년·지식인들에게 매혹의 대상이 되었다. 아나키즘을 일본에 전파한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는 1903년 평민주의·사회주의·평화주의를 내걸고 언론활동과 조직운동을 전개하다가 결국 일본 국왕 암살음모라는 ‘대역사건’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그는 사형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동료를 먼저 걱정하면서 죽었다.

 

고토쿠가 일본에 아나키즘을 전파한 원조라면 5·4운동을 주도한 유사복(劉師復)은 중국 아나키즘의 대부라고 할 수 있다. 종족주의적 혁명가로 출발하여 아나키스트로 변신한 유사복은 폐결핵에 걸려 치료가 시급했을 때에도 육식이 인간의 폭력성을 부추긴다고 믿어 채식을 고집하다가 요절하였다.

 

단재는 북경에서 유사복의 아나키즘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국내에서 활동할 때에 이미 고토쿠를 비롯하여 일본 아나키스트인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이사와 사쿠타로[岩佐作太] 등의 저작에 접했던 터였다.

 

동아시아 아나키즘의 ‘족보’를 따진자면 일본에서 고토쿠를 원조로 출발하여 중국에서는 유사복의 영향을 받고, 단재는 다시 이들로부터 이념적인 세례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전반기를 풍미했던 세 사람의 동아시아 아나키스트가 등장한다. 일본의 고토쿠 슈스이, 중국의 유사복, 한국의 신채호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이 주인공인 이유는 우선 동아시아 세 나라, 즉 일본·중국·한국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라는 점 때문이다.”

 

일본에는 오스기 사카에, 이시카와 산시로[石川三四郞], 이사와 사쿠타로와 같은 저명한 아나키스트가 있고, 중국에는 이석증·유사복·구성백(區聲白)·황능상(黃凌霜)·파금(巴金)과 같은 걸출한 아나키스트가 있으며, 또한 한국에도 유자명·이정규·정화암·박열 등과 같은 인물이 있다. 조세현은 “그럼에도 앞의 세 인물은 …그들의 행적이 나름대로 동아시아 아나키즘의 독특한 성격을 적절히 보여준다”라고 하면서, “재미있게도 고토쿠 슈스이는 1900년대에, 유사복은 1910년대에, 신채호는 1920년대에 주로 활동한 인물”이라고 분석하였다.

 

단재가 아나키즘을 수용하게 된 것은 북경에서 중국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면서부터이다. 북경대학에서 이석증·채원배 등과 접촉하면서 크로포트킨·고토쿠 슈스이·유사복의 저작물을 두루 섭렵하였다. 특히 크로포트킨의「청년에게 고함」이나 고토쿠의「기독말살론」, 중국인의『신세기』나『민성』에 실린 논설들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 크로포트킨과 고토쿠, 유사복의 영향받아

 

단재를 비롯하여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이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은 크로포트킨의 저서다. 단재는 석가, 공자, 예수, 마르크스와 함께 크로포트킨을 인류의 5대 사상가의 반열에 올리면서, 조선의 청년들에게 “아 아 크로포트킨의「청년에게 고하노라」라는 논문의 세례를 받자!”고 절규한(「낭객의 신년만필」)데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유자명은 크로포트킨의 저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왜 그의 저서에 심취하게 되엇는가를 알 수 있다.

 

〃크로포트킨의 저작은 철학·경제학·생물학·문학·예술 등 광범한 내용을 포괄하고 있었다. 그가 쓴『윤리학』은 인생철학을 서술한 것이고,『상호부조론』은 생존경쟁이 생물진화의 동력이라고 인정하는 다윈의『진화론』과 반대로 상호부조가 생물진화의 주요 인소라고 주장하였다. 당시 구라파 각국의 제구구주의자들은 다윈의 생존경쟁의 학설을 저들의 식민지침략전쟁을 변호하는 데 이용하였다. 그러나 크로포트킨의『상호부조론』은 침략을 반대하는 근거로 된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유자명,『유자명의 수기 한 학명자의 회억록』, 53쪽, 독립기념관.

 

단재는 크로포트킨의 저서와 함께 고토쿠의 저서를 통해 아나키즘을 수용하는 계기가 되엇다. 중국 신문『진보(震報)』에 기고한 글에서 “일본에 오직 고토쿠 슈스이 한 사람만이 있을 따름”이라고 할 정도로 그를 높게 평가하였으며, 고토쿠의 저서『기독말살론』을 한문으로 번역하여 소개하기도 하였다.

 

또 위체 사건으로 붙잡혀 1929년 10월 3일에 열린 제4회 공판에서 “일본 무정부주의가 고토쿠의 저작한 책을 보고 공명하여 이필현의 소개로 동방연맹에 가입하였던가?”라는 재판관의 질문에 “고토쿠의 저서가 가장 힙리적인 줄을 알았다”라고 답변하였다.

 

단재가 고토쿠의 저작에 접한 시기는 이미『대한매일신보』에 재직할 때이다. 이 신문 1909년 5월 28일자에 쓴「제국주의와 민족주의」라는 논설에서 제국주의를 고토쿠의 표현에 따라 “영토와 국권을 확장하는 주의”로 규정하고, 제국주의를 비판하였다.

 

단재는 정통유학에서 개신유학으로 다시 사회진화론으로, 이어서 민족주의로, 민족주의에서 아나키즘으로 사상적인 전환을 모색하였다. 러시아 혁명을 계기로 사회진화론적 사고를 극복하게 된 것은 생존경쟁이 지배하는 국제사회에서 우리 민족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쟁의 주체로서 민족주의가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반제국주의적 사고체계로서 민족주의를 수용하고 치열하게 일제와 싸운 것이다.

 

그러나 노력만큼 큰 성과를 얻기는 쉽지 않았다. 여기에서 의열단선언의 무장투쟁론 그리고 다물단 활동에 이어 직접혁명론으로 아나키즘이 수용되고, 이의 실천에 나서게 되었다.

 

단재는 아나키즘을 수용하면서 국수주의를 극복해나갔다. 1919년 10월『신대한』에 쓴「국제연맹에 대한 감상」에서 “모든 나라가 자유를 누리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시대의 흐름“임을 강조하고, 민족자결이 실행되면 “대소가 상안(相安)하고 강약이 상부(相扶)하여”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이며, 이것이 바로 세계 인민이 평화회의에 바라는 바라고 하였다. 아나키즘을 수용하면서부터는 민족해방을 강조하였다. ‘국가’에서 ‘민족’으로, 다시 ‘민중’으로 사상적인 변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신대한 창간사」에서 국가의 존재를 무시한 바 있던 단재는「조선혁명선언」에서도 국가라는 용어 자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등 국가의 독립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민족의 생존만을 도모하고 있다.

 

단재는 민중직접혁명의 수단을 취하여 일본제국주의를 구축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것은 한국의 독립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 민족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아가 1928년 4월 천진(天津)에서 개최된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 대회에서 채택된「선언문」에서는 정부를 지배계급이 무산민중으로부터 약탈한 ‘소득을 분배하려는 곧 인육분장소’로 묘사하면서, 정부를 파괴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특히 “자본주의 강도제국은 동방의 각 식민지 무산대중을 뼈까지 착취하여, 동방의 식민지 무산대중은 죽음보다도 더 어둡고 참담한 생존을 하고 있다”고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우리의 세계 무산대중! 더욱 우리 동방 각 식민지 무산민중의 혈(血)·피(皮)·육(肉)·골(骨)을 빨고, 짜고, 씹고, 물고, 깨물어 먹어온 자본주의의 강도제국 야수군(野獸群)들은 지금에 그 창자가 꿰어지려 한다. 배가 터지려 한다. 그래서 피등(彼等)이 그 최후의 발악으로 발끝까지 박박 찢으며 아삭아삭 깨물어, 우리 민중은 사멸(死滅)보다도 더 음참(陰慘)한 불생존(不生存)의 생존을 가지고 있다. 아, 세계 무산민중의 생존! 동방 무산민중의 생존!˝ -「조선혁명선언문」,『개정전집』下, 47쪽. 

 

일제강점기에 국가와 정부를 부정하는 것은 곧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 권력을 부정하는 것이다. 단재는「조선혁명선언」에서 “일본 강도 정치, 곧 이족 통치가 우리 조선 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하고 혁명수단으로 일본을 살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신채호가 일제로부터 해방을 주장한 것은 민중을 일제의 강압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었지 민중을 수탈하는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즉 신채호에 있어서 민족해방운동은 곧 민중해방운동이고 아나키즘 운동이었다. 그가 민족해방을 주장한 것은 그가 민족주의자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민족해방이 곧 민중해방이었기 때문이었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저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