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 민족주의사학(韓國近代民族主義史學)의 시조(始祖)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 12. 민족해방이념으로 아나키즘 수용 ⑵

참의부2013.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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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족통치·특권계급 없는 평등사회

 

단재가 일제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벗어나서 건설하고자 했던 이상적 사회는 어떠한 사회였을까? 이에 대해 이호룡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원은 다음과 같은 ‘해답’을 제시한다.

 

˝그는 최근세의 계급전쟁은 노동·자본 양 계급의 전쟁이고,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노동자와 소자본가는 망할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빈부 평균적인 이상세계를 건설할 것을 주장했다. 즉 무산계급의 혈액을 착취하는 강도에 불과한 자본가계급을 타도하고 착취가 없는 평등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신채호는 이족통치·특권계급·경제약탈제도·사회적 불평균·노예적 문화사상 등을 파괴하고자 했다. 그것은 이족 전제 하에 있는 한 고유한 조선을 건설할 수 없으며, 특권계급이 존재하는 한 한국 민중은 자유로울 수 없고, 경제약탈제도가 존재하는 한 민중의 생활은 보장될 수 없으며, 사회적 불평균이 존속하는 한 민중 전체의 행복은 증진될 수 없고, 유래(遺來)하던 문화사상의 종교·윤리·문학·미술·풍속·습관 등은 모두 강자를 옹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신채호가 앞으로 건설하고자 한 사회의 모습은 아나키즘에 입각하고 있었다.˝ - 이호룡,「신채호의 아나키즘」,『역사학보』제177집, 92쪽.

 

단재를 비롯하여 재중국 한국인 아나티스트들은 “민족해방과 식민지 권력과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면서 새로운 지배 권력을 꿈꾸는 자본가 계급과의 연합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하고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가 연합하여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한 것에 대해 반대하였다.” 단재가 관계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의 기관지『탈환(奪還)』제9호는 “신간회를 타도할 것”이라는 표어까지 내걸었다.(단재는 지기였던 홍명희가 신간회 참가를 간곡하게 부탁하자 그와의 우의를 저버릴 수 없어 자신을 신간회의 발기인에 포함시키는 것을 결국 허락하였다.)

 

단재가 구상하는 아나키즘사회는 공산주의사회와는 확연히 구분되었다. 그는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폐단과 함께 여러가지 모순을 지적하면서 비판하였다. 아나키즘적 입장에서 강권으로 등장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시하고 있는 러시아의 새로운 세력에 반대한 것이다.

 

『천고(天鼓)』1권 제2호에 쓴「크로포트킨의 죽음에 대한 감상」에서는 “레닌의 사상과 크로포트킨의 사상, 즉 볼세비즘과 아나키즘을 서로 다른 것으로 인식하면서 볼세비키당의 정치를 전제수단적 정치로 표현하여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표명하였다.”

 

˝신채호가 건설하고자 한 사회는 아나키스트사회엿다. 그는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삭(剝削)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조선 사회는 “민중이 열망하는 자유·평등의 생존을 얻어 무산계급의 진정한 해방을 이루는” 사회였다. 즉 종교, 도덕, 정치, 법률, 학교, 교과서, 교당, 정부, 관청, 공청, 은행, 회사 등과 같이 지배계급이 민중들을 억압하거나 민중들을 속여 자신들의 지배에 복종시키고 혁명을 소멸시키기 위하여 이용하는 지배계급의 일체의 지배기관이나 수단은 파괴되고, 지배계급이 제정한 일체의 사회제도도 철폐되어 존재하지 않으며, 사유재산제도 부정되고 모든 재화의 공유제가 실시되어 일체의 착취가 없는 사회였다. 결국 신채호가 건설하고자 한 사회는 일체의 지배계급과 지배도구가 없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 그리고 민중의 풍요로운 생활이 보장되는 사회였다. 즉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아나코뮤니스트사회였다.˝ - 이호룡,「신채호의 아나키즘」,『역사학보』제177집, 95쪽.

 

● 아나키스트와 민족주의의 한계

 

단재가 민족주의자인가 아나키스트인가, 아니키스트라면 민족주의를 포기한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있다. 또 그가 언제부터 아나키즘에 심취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신용하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단재가 아나키스트가 된 시기는 빨리 잡아도 1925년부터라고 본다. 독립운동가 이정규(李丁奎)는 단재가 아나키스트로 자임하기는, 1923년부터라고 한다. 하기락 경북대학 석좌교수는「조선혁명선언」의 집필과 함께 아나키스트로 전환하였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김성국 부산대 교수는 단재가 아나키스트가 된 시기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신채호는 이미 1918년에 중국의 아나티스트 이석증 교수를 만났으며, 1920년 초부터 중국에서 아나키즘운동이 가열되기 시작하였으며, 1922년 말부터 아나키스트로의 변신을 시작한 이회영과 이미 교류하고 있었던 점을 고려할 때, 신채호의 아나키즘에로의 방향 전환은 1923년 이전에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었던 것으로 평가함이 타당할 것이다. 특히 신채호와 같은 독보적인 존재가 무정부주의에 대한 확신도 없이 유자명의 도움 아래 혹은 유자명과의 공동으로「조선혁명선언」을 집필했을 것이라는 추측(김영범 대구대학 교수)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우리의 견해로는 신채호는 이미 1920년 초부터 무정부주의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으며,「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기 전에 거의 무정부주의자로 변신하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 김성국,「아나키스트 신채호의 시론적 재인식」,『아나키즘 연구』창간호, 51쪽, 자유사회운동연구회, 1995년.

 

신용하 교수는 단재가 아나키즘에 경도하게 된 것을 ‘해석’해 한다.

 

˝신채호는 구한말부터 3·1운동 직후까지 한국의 대표적 민족주의자의 하나로서 학문과 사상과 운동에 모두 실로 거대한 업적을 내었는데, 3·1운동 이후에는 만년에 애석하게도 뜻밖에 무정부주의로 전환하여 가장 미약한 흐름인 무정부주의 독립운동 노선을 선택하였다. 사상사적으로 민족주의와 무정부주의는 전혀 다른 것이라… 그가 만년에 그의 민족주의를 더욱 심화 발전시키지 않고 무정부주의에로 전환한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 신용하,「신채호의 무정부주의 독립사상」,『단재 신채호 연구』145쪽, 고려대학교 출판부.

 

아나키즘에 ‘비판적 견해’를 가진 신용하 교수는 단재의 아나키즘 독립사상에 의문을 제기한다.

 

˝신채호가 그처럼 사랑했던 한국의 민족과 민중은 일본 제국주의를 구축한 후 당연히 자주부강한 독립 ‘국가’를 세우고 민주적인 ‘정부’를 수립하여 자유·평등·평화로운 사회를 희구하였다. 신채호는 한국의 민족과 민중이 간절히 소망하던 이러한 ‘국가’와 ‘정부’ 없이 어떻게 해방 후의 자기의 민족사회를 건설하려고 했을까? 신채호가 생존했엇다면 해방 후에도 과연 무정부주의를 주장했을 것인가?

 

필자의 사견으로는 신채호가 8·15해방 후까지 생존했더라면 해방 후에도 무정부주의를 주장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신채호의 무정부주의 독립사상은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하에서 한국 민족이 신음하던 시대의 사상이며, 해방 후의 한국에는 적용되지 않는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 신용하,「신채호의 무정부주의 독립사상」,『단재 신채호 연구』146쪽, 고려대학교 출판부.

 

이에 대해 장을병 전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은 단재가 “무정부주의를 신봉한 것은 민족주의 사상과 실질적인 독립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채용한 일시적인 방편이었지, 궁극적으로 민족을 포기하고 국제주의를 지향하는 일반 무정부주의자들의 교조적인 입장이나 주장과는 판이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단재는 결코 “대안 없는 무질서를 조성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의 수립을 명백히 제시”하고 있으며, 그의 중심사상은 어디까지나 민중을 실체로 한 민족주의사상이었고 무정부주의는 올바른 민족주의를 실현하는 반제·반봉건투쟁의 한낱 방편”에 불과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신일철 고려대 교수는 단재가 아나키즘적 투쟁방법을 채택하게 된 것은 “투쟁 대상이 날로 강대해지는 현실에서 약자가 강자에게 대항하는 길은 테러리즘 등 비합법적인 폭력수단의 행사 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게 된 때문”이라고 그 불가피성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신일철 교수는 “아나키즘적 민족주의로 전환된 신채호의 반강권적인 사회평균주의적인 자유국가관은 1900년대 자강주의적인 강권국가의 자기극복의 산물”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1900년대에 국가를 발견한 신채호의 민족주의사상은 1920년대에는 사회를 재발견하게 된 것”으로 해석한다.

 

진덕규 이화여대 이화학술원장의 견해에 따르면, 단재는 무정부주의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탈제국주의적 이념”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새로운 “제3의 가능성”으로서 단재의 무정부주의는 “국가소멸론에 대한 확신적인 의미보다도 민족본위의 민중주의적 속성을 바탕으로 하는 독립운동의 의미”와 “미래에 추구되어야 할 민족국가의 형태에 대한 가치설정으로서의 의미”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해석하려 한다. 그리하여 진덕규 원장은 단재가 설정한 가치는 사회주의가 내세우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나 자본주의가 정당화하고 있는 부르주아 계급지배가 아닌 민중 중심의 사회를 지향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단재는 왜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 사회주의를 거부하였을까?

 

신용하 교수의 ‘아나키즘 비판론’에 대해 이호룡 박사는 “일제강점기에 민족해방을 주장하였다고 해서 그 사람을 민족주의자로 규정해서는 곤란”하다는 주장을 다음과 같이 전개한다.

 

〃신채호는 계몽사상가에서 민족주의자로서 거기에서 다시 아나키스트로 사상적 변신을 거듭하였다.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을 억누르고 있었던 것은 일제의 식민지 권력이었고, 모든 사회변혁운동은 바로 일제 식민지 권력의 억압에서 비롯되었다. 사회변혁을 추구하던 사람은 모두 민족해방운동가로서 출발하였으며, 일제가 붕괴되지 않는 한 민족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그것은 공산주의자나 아나키스트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일제강점기에 민족해방을 주장하였다고 해서 그 사람을 민족주의자로 규정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신채호를 더 이상 민족주의의 틀 내에 가두어서는 안될 것이다. 신채호를 아나키스트로 규정할 때 우리나라 근대 사상계에서 신채호가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커질 것이다.〃- 이호룡,「신채호의 아나키즘」,『역사학보』제177집, 100쪽.

 

김성국 교수는 아나키즘에 대한 부정적 고정관념과 편협한 이해로 인하여 단재의 아나키즘이 왜곡되거나 과소평가되었던 점을 다음과 같이 시정하고자 하였다.

 

〃첫째, 신채호의 무정부주의는 사회진화론의 내적 모순을 해결하는 이념으로서 수용되엇다기보다는, 시대적 조건의 변화와 독립 이후의 새로운 사회건설에 대처할 수 있도록 저항적 민족주의의 내용과 방법 그리고 목표를 심화하는 발전적 계기로서 수용되었다.

 

둘째, 신채호의 무정부주의는 그의 민족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양자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신채호에게 있어서 무정부주의가 민족주의의 방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무정부주의는 민족주의의 발전된(혹은 민족주의가 자양되는)단계로서 간주함이 타당하다.

 

셋째, 신채호의 무정부주의는 좌우 양쪽을 모두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과정에서 수용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종합하여 지양하는 제3의 가능성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같은 신채호의 아나키즘에 대한 좀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재인식을 통하여 우리는 먼저 실천적으로는 한국에서 아나키즘운동을 확산시킬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이론적으로는 신채호가 그토록 갈구했던 자유로운, 즉 주체적-고유적 조선에 적합한 한국형 아나키즘을 창조해야 할 과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파괴해야 할 대상은 무엇인가? 혹시 그것들은 신채호가 예전에 이미 규정해 놓았던 파괴 대상과 거의 동일한 것은 아닐는지? 앞으로 우리는 창조적 파괴를 시도함에 있어서 틀림없이 신채호를 과거로서가 아니라 여전히 우리의 현재이며 미래로서 만나게 될 것이다.〃- 김성국,「아나키스트 신채호의 시론적 재인식」,『아나키즘 연구』창간호, 53쪽, 자유사회운동연구회, 1995년.

 

단재의 아나키즘에 비판적 시각을 보인 신용하 교수는, 전기의 민족주의로부터 후기의 아나키즘에 이르기까지 크게 변화 속에서 변하지 않은 몇 가지 공통적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적시하였다.

 

〃첫째, 강고한 ‘독립사상’이다. 신채호는 그의 민족주의에서나 무정부주의에서나 강렬한 독립사상을 굳게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독립은 조금도 타협이 없는 ‘완전독립’·‘절대독립’이었다.

 

둘째, 강렬한 ‘자유사상’이다. 신채호는 민족주의자였을 때에도 집요하고 열렬하게 자유를 추구하였고, 무정부주의자였을 때에는 나아가 ‘절대자유’를 추구하였다.

 

셋째, 강렬한 ‘주체성’이다. 신채호는 그의 민족주의에서는 물론이요, 무정부주의에서도 정치적 주체성뿐 아니라 ‘문화적·사상적 주체성’을 가장 귀중한 것으로 강조하고 추구하였다.

 

넷째, 집요한 ‘진보사상’이다. 신채호는 민족주의자였을 때에도 집요하게 ‘진보’와 ‘혁신’을 추구하였으며, 무정부주의자였을 때에도 집요하게 ‘진보’·‘혁신’을 추구하였다.

 

다섯째, 열렬한 ‘전투성’이다. 신채호는 민족주의자였을 때에도 과격하리만큼 ‘전투적’ 민족주의자였고, 무정부주의자였을 때에도 과격한 ‘전투적’ 무정부주의자였다.

 

여섯째, 뜨거운 ‘민족애’이다. 신채호는 그의 민족주의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민중’을 강조한 무정부주의에서도 변함없는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사고하고 행동하였다.

 

신채호의 사회사상은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변하였으나 신채호의 ‘민족에 대한 사랑’은 시간도 사상도 이를 변화시킬 수 없었다. 신채호의 무정부주의 독립사상은 한국사회의 사상사에서 일제강점기(1910년~1945년)의 민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한국인이 만든 사회사상 중의 주요한 한 흐름을 나타내는 것이며 한국 사회 사상사의 중요한 유산의 하나를 만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용하,『증보 신채호의 사회 사상 연구』, 446쪽~447쪽, 나남.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저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