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명치에는 작은 분홍색 돌이 있는 것 같다.
가끔씩 그 돌은 목구멍까지 흔들고 올라와 연애하는 상상을 하는 나를 쓸쓸하고 슬프게 만든다.
연애할 준비가 다 되어있는데 내 님은 언제 오실까... 내가 외모를 많이 따져서 그런가.
내 눈이 너무 높은가. 그게 문제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나는 남자가 먼저 다가오기를 바라는데 다가오는 남자도 없다는 것이다.
연애를 하는 상상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결혼을 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내 결혼식은 고등학교 3학년 때 이미 다 정해놓았다. 결혼 전에 친한 친구들과 모여서
처녀여행을 다녀올 것이다. 결혼사진은 화보처럼 멋지게 찍어야지. 최대한 많이 멋지게.
결혼은 가족과 친한 친구들만 모여서 조그마하게 올린다. 축가는 내가 직접 커피소년의
“그대 내게 올 때”를 신랑에게 불러주고 싶다. 신혼여행은 동남아로 가서 공주처럼 놀다올 것이다
.
신혼집은 하얀색과 초록색, 갈색이 어우러진 자연친화적인 분위기.
아기자기한 느낌으로 꾸미고 베란다에는 텃밭을 가꿀 것이다. 집이 크지 않아도 좋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함께 살기만 한다면 집 크기가 무슨 상관이랴.
아이는 3명 정도 낳고 싶다.
‘아들-딸-아들’이어도 좋고, ‘아들-아들-딸’이어도 좋고, ‘딸-아들-딸’이어도 좋다.
아니 사실은 아들딸이 무슨 상관이랴. 사랑하는 사람과 내 아이인데.
우리는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 테니깐 아이의 태명은 알콩이, 달콩이다.
나머지 한 명의 태명은 나중에 할 행복한 고민으로 남겨둬야지.
창문으로 햇살이 쏟아지는 휴일 아침, 남편과 내가 껴안고 늦잠을 자고 있으면
우리 아이가 방에 들어와 우리를 깨운다. 우리는 아이를 우리 사이에 눕히고 조금
더 잠을 청하는 것이다. 아 너무나 행복한 상상이다.
연애는 못해도 결혼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위로를 하곤 한다.
고등학교 때 신기가 있던 친구가 지나가는 말로 “너는 결혼을 잘 할 거야”라고 말하였다.
신랑이 잘 생겼냐고 물어보는 내 말에 그 친구는 그저 웃기만 하였다.
연애상대를 고를 때 얼굴을 보지 않아야겠다.
이런 생각을 계속 하다보면 결국엔 내 생애 제일 달달했던 때를 추억하게 된다.
중1 때부터 고3까지,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 나는 짝사랑을 하고 있다.
중학교 입학식 때 우연히 보고 첫눈에 반한 뒤 몰래 몰래 엿보며 중학교 1학년을 보냈다.
신의 도움인지 2학년 때 같은 반이 되었다. 그 아이는 항상 여자 친구가 있었다.
심지어 당시 내 친한 친구와 사귀기도 했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계속 그 아이를 좋아했다.
그 애는 소위 말하는 노는 아이였다.
그때 담임선생님께서는 노는 아이를 차별하지 않고 특별히 신경써주시는 분이셨다.
선생님께서는 반에서 제일 공부를 잘하던 나와 반에서 제일 말썽쟁이였던 그 아이를
짝꿍으로 앉히셨다. 선생님께서는 “네가 잘 좀 돌봐주라”하시며 미안해하셨지만
나는 너무 기뻤다.
그 아이와 함께 했던 순간들이 사진처럼 몇몇 장면 기억난다.
학년 초 다른 남자애와 팔씨름을 하다 져서 변명을 하다 웃고 있는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아침에 등교한 나에게 와서 mp3를 꽂아주던 순간.
함께 자전거 만들기 수행평가를 하던 순간.
처음으로 수행 만점을 받았다고 기뻐하던 순간.
사촌 동생의 이름이 내 이름을 뒤집은 것과 같다며 사촌동생 사진을 보여주던 순간.
우정테스트를 하는 내가 귀엽다며 계속 하자고 재촉하던 순간.
자꾸 장난을 쳐서 삐진 나에게 화를 풀라고 애원하던 순간.
그리고 여자 친구와 청소시간에 커튼 뒤에서 키스를 하던 실루엣...
그 애에게 여자 친구가 있든 없든 나의 2학년은 너무나도 찬란했다.
나만 그 애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장난식 이었지만 내가 예쁘다고 자주 말했었고, 사귀자는 말도 몇 번 했었다.
어느 날은 나에게 가사를 꼭 유심히 들어보라며 노래를 추천해 줬었다.
이승기의 ‘동경’.
잊고 있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 우연히 생각이 나서 들어보게 되었다.
‘우린 서로 너무도 다른 세상에 살아 왔죠.…그대가 난 부럽죠. 나 같은 사람 너무나 흔하겠죠.…혹시나 그대 알고 있나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아껴왔던 내 맘이 흔하게 묻혀 질까봐 단 한 번도 편지조차 못했는데…사랑해도 되나요? 혼자서라도 사랑하면 안돼요?
허튼 생각이라는 거 알지만 한 번은 말하고 싶었죠.
그대를 사랑해요.’
내가 그 때 이 노래를 들었다면 우리는 조금 달라졌을까.
이게 혹시 나에 대한 너의 마음이었을까. 넌지시 마음을 표현 했는데
아무런 반응 없는 내 모습에 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너도 우리가 사는 세계가 다르다고 생각했을까.
가끔씩 그 애는 내가 공부를 잘 하는 것에 대한 삐뚤어진 마음을 보이고는 했다.
‘그래 넌 그렇지, 난 이런데...’ 이런 식의 말들.
내가 범생이고, 너는 날나리라서 우린 가까워지지 못했던 것일까.
그래서 더 확실하게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던 것일까.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를 좋아하긴 하지만 날나리와 나는 어울리지 않아’라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꽤나 오랫동안 짝꿍을 했다.
그 당시 나는 핸드폰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의 만남은 오로지 학교에서만 이루어졌다.
학년말 학급문집을 만들며 돌린 내 롤링페이퍼에 네가 쓴 말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내 이름과 너의 이름 사이 하트. 꼭 다시 같은 반하자.
학년 말, 우리는 꼭 같은 반이 될 것이라고, 그리고 또 다시 짝꿍을 할 것이라고
서로에게 장담을 했었다. 도대체 무얼 믿고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서로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바람이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우리는 그 뒤로 다시는 같은 반이 되지 못했다.
이어지는 판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