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盧武鉉) 평전(評傳)』2. 출생과 가족 그리고 청년시절 ⑷
참의부2013.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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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애와 고시공부 사이에서
1968년 3월, 노무현은 고시공부 중에 소집영장을 받고 육군에 입대(군번 50153545)했다. 창원 예비사단에서 신병훈련을 받고 제1군사령부를 거쳐 전방부대에 배치되었다. 입대할 때는 틈을 내어 공부를 할 작정이었으나 당시 군대생활 환경에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결국 34개월여의 군 복무기간 동안 영어 단어 하나 암기하지 못한 채 1971년 1월 21일 강원도 인제 제12사단에서 육군 상병으로 만기 제대했다. 당시 베트남에 파병되었다가 복귀한 병사들이 죄 병장을 달고 온 바람에 부대 내에 병장 티오가 다 차서 병장 진급을 못하고 상병으로 제대한 것이다.
그동안 가정 형편은 사뭇 나아졌다. 두 형이 세무공무원으로 취직해서 월급을 탄 덕분이었다. 고시공부 하기에 그런대로 괜찮은 환경이 된 것이다. 노무현은 제대한 그해 4월부터 새로운 각오로 고시 준비에 들어갔다. 예전에 지은 ‘마옥당’을 수리하여 들어앉아 법전과 씨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책을 펴놓고 있으면 한 마을처녀의 얼굴이 아른거려 도무지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노무현이 제대하고 귀향해 있는 동안 마음을 빼앗긴 그 처녀는 권양숙으로, 노무현보다 한 살 어렸다. 그녀는 마산에서 살다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봉하마을로 이사를 왔다. 홀어머니 슬하 딸 셋과 막내아들 가운데 권양숙은 둘째 딸이었다.
권양숙은 부산에서 혜화여중과 계성여상을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다가 할아버지의 병간호를 위해 봉하마을로 왔다. 노무현은 입대하기 전부터 이 처녀와 잘 아는 사이였지만 “워낙 콧대가 높아 말도 제대로 한 번 붙여보지 못했다.”
매사에 집념이 강한 노무현은 쉬 포기하지 않고 제대 후부터는 열정적으로 권양숙에게 접근했다. 책을 빌려주고 돌려받는 것을 구실 삼아 자주 만난 것이다. 관심분야는 서로 달라 노무현은 법률 책, 권양숙은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주로 읽었다. 이처럼 자연스럽게 거리를 좁힌 노무현은 마침내 프러포즈를 했고 그녀가 받아들여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다. 노무현은 “맨입으로 연애를 한 이때가 인생에서 가장 순수하게 행복한 시기였다”고 했다.
“2년 동안 커피 한잔 값 들이는 일 없이 맨입으로 연애를 했다. 밤이 이슥하도록 화포천 둑길을 함께 걸었다. 밤하늘이 쏟아질듯 은하수가 흐르는 여름날, 벼 이삭에 매달린 이슬에 달빛이 떨어지면 들판 가득 은구슬을 뿌린 것 같았다. 우리는 그 사이 논길을 따라 걷곤 했다. 아내는 그때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에 푹 빠져 있었다.〈안나 카레리나〉,〈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같은 두꺼운 소설을 끼고 살았다. 동네에 둘이 사귄다는 소문이 났다. 우리 둘 말고는 처녀 총각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소문이 나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돌아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순수하게 행복한 시간이 아니었던가 싶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59쪽.
노무현은 이 시기에 마냥 행복했던 것만도 아니었다. 어렵사리 정인의 마음을 얻기는 했지만 고시공부에 대한 압박감으로 연애의 달콤함은 때론 고통이기도 했다. “제대 후 공부도 시작하기 전부터 마을 처녀에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하여 상대방의 단호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열을 올리게 되고 8개월에 걸쳐 집요하게 추근거려 1차 시험 직전에야 겨우 처녀의 마음을 함락시키고는 안도했는데, 이제 그녀가 결혼 적령을 넘었다는 사실과 고시와 연애는 양립할 수 없다는 중론 사이에서 그녀와 나는 고민의 연쇄반응을 일으켰고, 또 이틀이 멀다 하고 만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애정의 열도에 비례하여 공부를 위한 시간에의 집착이 강하여 심리적 갈등이 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9월에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장유암이라는 절에 들어갔다. 국사의 추가로 부담이 늘었지만 시험이 연기된 것을 다행으로 여겨 ‘수석합격’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열심히 공부했다.”
노무현은 연애와 고시준비를 동시에 진행하였다. 둘 다 포기할 수 없는 일생일대의 ‘과업’이었다. 연애 때문에 고시공부에 지장이 없지 않았지만 처음으로 마음에 담은 사람을 놓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울산에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 잠시 간호사를 짝사랑한 적이 있었으나 그저 그것으로 끝나고, 권양숙이 첫사랑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은 양가의 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노무현의 가족은 고시에 합격하면 문벌 좋은 집안 규수한테 장가들 수 있는데 굳이 시골처녀와 서둘러 결혼할 이유가 없다고 반대하였다. 특히 어머니는 처녀 아버지의 전력 때문에 아들이 고시에 합격해도 판사가 되지 못할까봐 걱정이었다. 어머니의 소망은 막내 아들이 고등고시에 판사가 되는 일이었다. 반면에 권양숙의 어머니는 상고밖에 나오지 못한 시골뜨기가 고시 공부를 한다고 책을 붙들고 있으니 가당찮은 일로 보였다. 비록 남편의 전력으로 인해 파란을 겪었지만 자신들은 시골의 농투성이와는 다르다는 생각이었다. 양가의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결혼할 수 있게 된 것은 둘째형 노건평의 설득 때문이었다. 노건평은 동생의 고집을 도저히 꺾을 수 없다는 걸 알고 그 대신 “어머님과 형님을 설득하는 일에 매달렸다.”
“동생이 결혼할 때 돌아가신 큰형님과 어머니가 크게 반대했습니다. 사돈어른이 좌익활동 혐의로 옥고를 치른 일 때문이었지요. 1970년대 초반은 엄혹한 시절이었어요. 반공이라는 가치가 어떤 가치보다 우선했고 연좌제가 시퍼렇게 살아있었습니다. 동생은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었고 처가쪽의 문제로 과연 시험에 합격해서 임용될 수 있느냐의 문제가 불거진 거죠. 나는 어머니와 형님을 설득해 끝내 두 사람의 결혼을 성사시켰습니다. 동네에서 아주 구식으로 결혼식을 치렀죠. 내가 그렇게 마음먹은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어요. 첫째, 동생 장모되실 분이 어렵게 인생을 산 분이지만 기품이 있고 엄격했기 때문입니다. 그 집안 사람들 인물들이 모두 반듯반듯했습니다. 그런 집안의 딸이라면 아무 걱정없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가족들이 끝까지 반대할 경우 무슨 일이 생길지 저도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그 점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어느 날인가, 내가 동생을 조용히 불러 물었습니다. 처가 문제 때문에 시험에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이렇게 물었던 거죠. 판ㆍ검사, 변호사 못해도 내가 노력해서 다른 일 하면 된다고 하더군요. 동생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그 때 확신했지요. 동생을 설득하기보다 어머님과 형님을 설득하는 일에 매달렸습니다.”
● 어렵게 한 결혼 그리고 고시 합격
노무현의 정치활동에 두고두고 무거운 족쇄가 된 장인의 ‘전력’이란 무엇인가. 실제로 노무현은 평의원일 때는 덜 했지만, 대통령 후보가 되어 선거를 치를 때, 심지어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수구정치세력은 그에게 붉은 색깔을 칠하는 데 이성을 잃었다.
노무현은 권양숙과 결혼하기 전까지 장인자리의 전력을 자세히 몰랐다. 누구도 그런 일을 얘기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혼담이 무르익으면서 이 문제가 드러나게 되었다. 노무현은 “(장인이)예전에 면사무소 서기를 했다는 것과 친구 분들이 많았다는 것, 해방 이후에 좌익운동에 가담했다는 것 정도로 알고 있었다. 좌익운동을 조금 하다가 돌아가신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선거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세세히 가르쳐주어서 6·25동란 당시 인민군이 내려올 때 면 책임자였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하지만《월간 중앙(2002년 5월호)》의 취재(〈노무현 장인의 부역활동의 진실〉)에 따르면 “당시 정황 베일 속 마을주민 일부 ‘억울함’ 증언”이라는 기사 제목에서 보듯 사실관계가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거의 없었다.
〃노무현의 장인 권오석은 1922년 경남 창원군 진전면 출신으로 진전초등학교에 이어 밀양농업학교 3년을 중퇴하고 1943년 지방공무원 시험에 합격, 마산시 진동면사무소 서기로 근무했다.
1944년부터는 고향 진전면 사무소에 근무하게 됐는데 일종의 좌천이라 할 수 있다. 진전면에서 만난 주민 K씨는 권씨가 “불법 공출에 맞서 주민 편을 들다 좌천됐다고 들었다”고 증언했다. 권씨는 1945년 12월경 불의의 사고로 시력을 잃어 1946년 봄에는 완전 실명, 그해 6월경 면사무소 서기직을 그만 둔다. 권씨가 무슨 혐의를 받고 복역했는지, 몇 년 형을 살았는지 가족들도 모르고 있었다.
최근 공개된 유일한 자료는 1973년 대검찰청이 발간한 <좌익사건실록>에 나타난 권씨의 혐의 내용이다. 이 자료는 1949년 6월 남로당에 가입, 1950년 1월 창원군당 선전부장의 중책을 맡은 것으로 돼 있다. 문체로 봐서 검찰의 공소장에 의존해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권씨의 활동 사실은 인민군이 마을을 점령했던 1950년 8월~9월에 집중돼 있다. 그해 8월 20일 창원군 진전면에 ‘반동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부위원장을 맡은 것으로 돼 있다. 9월 5일에는 고성군 회화면에서 “양민 변〇〇 외 9인을 학살하는 현장 부근에서 학살을 용이하게 감시했다”고 기록했다.
권씨는 국가보안법 위반혐의 등으로 부산지검 마산지청에 기소됐으나 검찰의 구형량, 재판부의 판결 내용은 자료의 멸실로 알 수 없는 상태다.
노무현의 처남 권기문(48) 씨는 “아버지가 6ㆍ25 당시 어떤 일을 했는지는 어머니를 포함한 가족 모두 일절 아는 바 없다”고 말했다. 노무현의 장모 박모 씨는 “남편이 앞을 못 보는 맹인인 점을 이용, 다른 사람들이 죄를 모두 뒤집어씌운 것 아니냐”는 ‘심정적 의문’을 제기하고 있을 뿐 남편의 활동과 관련한 당시의 정황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마을 주민 K씨가 부친으로부터 들은 얘기는 다소 다르다. 면서기를 알려준 것이 ‘혐의를 받을만한 사실의 전부’라는 것이 K씨의 증언이다. ‘별 것 아닌’ 사건이 확대된 데는 6ㆍ25 전란 당시 동네 유력한 가문 사이에 형성됐던 원한관계가 작용했다는 것이 K씨 시각이다. 물론 이같은 증언의 진위를 확인할 방법은 아직 없다.〃-《월간 중앙》, 2002년 5월호, 81쪽.
권오석은 1971년 49세로 옥중에서 사망했다. 그는 긴 세월 옥고를 치르고 감옥에서 사망했지만, 검찰의 구형량도 재판부의 판결문도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그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진실’은 미궁 상태로 있다. 주민들의 증언대로 마을의 원한관계로 엉뚱한 죄를 뒤집어썼을지도 모른다. 또 그가 앞을 못 보는 맹인이어서 눈 뜬 사람들이 죄를 뒤집어 씌웠을지도 모른다. 인민군이 왜 하필이면 맹인을 골라 ‘반동조사위원회’의 부위원장을 맡겼을까? 의문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문제는 이를 두고 노무현의 정치활동 기간 내내 저들의 붉은 딱지 붙이기가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버지의 얼굴도 못보고 자란 권양숙은 결혼 과정에서부터 이후 남편의 정치행로 내내 이념 공세로 인해 마음고생을 겪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남편 노무현이 2002년 대선 과정에서 상대 후보 측으로부터 아내의 집안에 대한 색깔 공세를 받고 “그렇다면 내가 아내를 버리라는 말이냐”고 울부짖었을까?
노무현은 1973년 초 권양숙과 결혼하고 다시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5월에는 아들 건호가 태어났다. ‘속도위반’을 한 셈이다. 이 무렵 큰형님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불행이 닥쳤다. 노무현에게는 정신적 지주였고 아버지 같은 형님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당한 노무현은 고시공부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나를 아껴주시며 자신의 못다한 소망을 나에게 걸어 꿈을 키워주시던 큰형님이 5월 14일 교통사고로 저 세상으로 떠나 버리셨다. 한줌 재로 화해버린 형님의 유해를 고향에 묻고 절로 올라올 때는 길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이제부터 전혀 공부도 되지 않았다. 단지 타성에 의하여 책장을 넘기고 있는 동안에도 마음은 삶과 죽음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생각들과 고시와 출세에 대한 회의로 가득차 있을 뿐이었다.”
노무현은 야생초와 같은 끈질긴 생명력과 야생마와 같은 꺾이지 않은 도전정신을 갖고 있었다. 형님의 못다 이룬 꿈과 자신의 미래의 꿈을 향해 고시공부를 접을 수가 없었다.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끙끙거렸지만 정신은 갈수록 혼란스럽기만 하고 몸은 야위어 갔다. 온갖 번뇌에 시달리는 정신으로 공부에 능률이 오를 리 만무했다.
15회 시험까지 남은 기간은 40여일 뿐, 차츰 초조해지기 시작하고 마침내 책을 읽기만 하면 가슴이 울렁거리며 답답해지는 알지 못할 병에 걸리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시험을 한 달 앞두고 보따리를 싸 들고 집으로 내려왔다.
그런 노무현이 사법시험의 고비를 넘기기란 쉽지 않았다. 두 번의 시험에서 잇달아 실패하고 나서야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지었다. 2년의 힘든 시기를 보내고 나서야 겨우 “마음의 안정을 찾고 건강을 되찾은” 것이다. “연속 두번 시험에 실패하고 나서야 겨우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그때부터 잠을 집에서 자고 공부는 마옥당에서 했다. 아내가 들판을 건너 점심을 가져다주었다. 건강도 좋아졌고 시험도 잘 보았다. 이번에는 합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시기 공부 뒷바라지는 작은 형님이 해주었다. 아버님은 뇌출혈이 와서 건강이 좋지 않으셨다. 귀도 어둡고 눈도 어둡고 걸음도 바르지 못하셨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는 것부터 내 책값과 용돈, 건호 우윳값까지 어느 것 하나 빼놓지 않고 모두 다 작은 형님이 보살펴 주었다. 큰 형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달리 기댈 언덕이 없었다.”
이른바 명문 법대 출신들도 추풍낙엽으로 나가떨어지는 사법고시에, 더러 없는 일은 아니지만 상고 출신이 합격하기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무섭도톡 집념이 강한 노무현은 3년간의 씨름 끝에 마침내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도 그때만 못했다”고 할 정도로 그 기쁨과 감격이란 비할 바 없었다고 했다.
“불안하고 힘든 그리고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보낸 끝에 나는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합격의 감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친구가 소식을 전해주자, 아침부터 한바탕 싸우고 토라져 누워 있던 아내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내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는 엉엉 울어댔다. 들뜬 기분은 제법 오래갔다. 길을 가면서도 “저, 고시에 합격했습니다”하고 소리치고 싶었고, 차를 타고 옆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걸고 자랑하고 싶은 정도였다. 아내가 내 무릎에 얼굴을 묻고 눈물범벅이 되어 엉엉 울었다. 내가 사법고시에 합격한 것은 벌레가 사람이 된 것만큼이나 큰 사건이었다. 돼지를 잡고 풍물을 치면서, 일주일이 넘도록 마을 잔치를 벌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기쁨을 다 표현할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진영 읍내 큰 길에 가서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자랑하고 싶었다.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내게 물었다. 어떻게 혼자 공부해 고시에 합격할 수 있었느냐고. 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쨌든 해냈다.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나도 아내도, 그 순간만큼 큰 성취감이나 행복을 느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대통령이 되었을 때도 그 때만은 못했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65쪽.
제17기 연수생으로 들어간 노무현에게 사법연수원은 딴 세상이었다. 다들 출신 고교나 대학을 중심으로 끼리끼리 뭉쳤다. 연수원 동기생 가운데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노무현은 여전히 국외자였다. 그 안에도 ‘신분’이 작용하고 있어서 밥 먹는 것조차 같은 ‘신분’끼리만 어울렸다. 수업 받는 것 말고는 어디에도 ‘상고 출신 촌놈’ 노무현이 낄 자리는 없었다. 이런 처지를 안 동료들 몇이서 그를 불러 함께 밥을 먹었다. 이들과는 사회에 나와서도 오랫동안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노무현은 변호사가 되기를 원했다. 틀에 갇혀 보이는 판사보다 비교적 자유로워 보이는 변호사를 선호한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와 형은 펄쩍 뛰면서 반대하고 나섰다. 판·검사를 가장 높은 벼슬로 여기던 시절이다. 노무현은 결국 고집을 꺾었다. 장인의 전력 때문에 판사 발령을 받지 못할까 초조해하는 어머니와 아내의 설움과 원망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뜻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장인 문제는 판사 발령에 걸림돌이 되지 않아 노무현은 1977년 9월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부임했다.
연수기간에 노무현은 딸을 얻는 경사를 맞았지만 천붕지괴(天崩地壞)의 슬픔을 겪어야 했다. 1976년 장녀 정연이 태어난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막내아들의 고시 합격에 그리도 기뻐하셨던 아버지였다. 노무현은 “시류에 밝지도 않았고 술수를 부릴 줄도 몰랐던 아버지는 해방된 나라의 가난한 백성으로 정직하게 살다 가셨다. 마지막 가시는 길에 자랑과 기쁨을 드린 것 같아서 마음이 조금은 가벼웠다.”고 회상했다.
왕조시대의 과거 급제나 대한민국 사회의 고등고시 합격은 ‘평민’ 출신이 출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었다. 그래서 그 숱한 젊은이들이 ‘청운의 꿈’을 성기아 과거시험에, 고시에 목을 맸다. 고시 합격은 노무현이 내내 짓눌려온 불안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었다. 또 반항심이나 열등감과 같은 발목을 잡아온 부정적인 감정들을 일소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세상살이에 대한 노무현의 자신감 부족, 곧 사회에 대한 불안감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청년기까지 그를 지배해온, 그야말로 가문의 저주와도 같은 집요한 심리적 상처였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盧武鉉) 평전(評傳)』2. 출생과 가족 그리고 청년시절 ⑷
● 연애와 고시공부 사이에서
1968년 3월, 노무현은 고시공부 중에 소집영장을 받고 육군에 입대(군번 50153545)했다. 창원 예비사단에서 신병훈련을 받고 제1군사령부를 거쳐 전방부대에 배치되었다. 입대할 때는 틈을 내어 공부를 할 작정이었으나 당시 군대생활 환경에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결국 34개월여의 군 복무기간 동안 영어 단어 하나 암기하지 못한 채 1971년 1월 21일 강원도 인제 제12사단에서 육군 상병으로 만기 제대했다. 당시 베트남에 파병되었다가 복귀한 병사들이 죄 병장을 달고 온 바람에 부대 내에 병장 티오가 다 차서 병장 진급을 못하고 상병으로 제대한 것이다.
그동안 가정 형편은 사뭇 나아졌다. 두 형이 세무공무원으로 취직해서 월급을 탄 덕분이었다. 고시공부 하기에 그런대로 괜찮은 환경이 된 것이다. 노무현은 제대한 그해 4월부터 새로운 각오로 고시 준비에 들어갔다. 예전에 지은 ‘마옥당’을 수리하여 들어앉아 법전과 씨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책을 펴놓고 있으면 한 마을처녀의 얼굴이 아른거려 도무지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노무현이 제대하고 귀향해 있는 동안 마음을 빼앗긴 그 처녀는 권양숙으로, 노무현보다 한 살 어렸다. 그녀는 마산에서 살다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봉하마을로 이사를 왔다. 홀어머니 슬하 딸 셋과 막내아들 가운데 권양숙은 둘째 딸이었다.
권양숙은 부산에서 혜화여중과 계성여상을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다가 할아버지의 병간호를 위해 봉하마을로 왔다. 노무현은 입대하기 전부터 이 처녀와 잘 아는 사이였지만 “워낙 콧대가 높아 말도 제대로 한 번 붙여보지 못했다.”
매사에 집념이 강한 노무현은 쉬 포기하지 않고 제대 후부터는 열정적으로 권양숙에게 접근했다. 책을 빌려주고 돌려받는 것을 구실 삼아 자주 만난 것이다. 관심분야는 서로 달라 노무현은 법률 책, 권양숙은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주로 읽었다. 이처럼 자연스럽게 거리를 좁힌 노무현은 마침내 프러포즈를 했고 그녀가 받아들여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다. 노무현은 “맨입으로 연애를 한 이때가 인생에서 가장 순수하게 행복한 시기였다”고 했다.
“2년 동안 커피 한잔 값 들이는 일 없이 맨입으로 연애를 했다. 밤이 이슥하도록 화포천 둑길을 함께 걸었다. 밤하늘이 쏟아질듯 은하수가 흐르는 여름날, 벼 이삭에 매달린 이슬에 달빛이 떨어지면 들판 가득 은구슬을 뿌린 것 같았다. 우리는 그 사이 논길을 따라 걷곤 했다. 아내는 그때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에 푹 빠져 있었다.〈안나 카레리나〉,〈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같은 두꺼운 소설을 끼고 살았다. 동네에 둘이 사귄다는 소문이 났다. 우리 둘 말고는 처녀 총각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소문이 나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돌아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순수하게 행복한 시간이 아니었던가 싶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59쪽.
노무현은 이 시기에 마냥 행복했던 것만도 아니었다. 어렵사리 정인의 마음을 얻기는 했지만 고시공부에 대한 압박감으로 연애의 달콤함은 때론 고통이기도 했다. “제대 후 공부도 시작하기 전부터 마을 처녀에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하여 상대방의 단호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열을 올리게 되고 8개월에 걸쳐 집요하게 추근거려 1차 시험 직전에야 겨우 처녀의 마음을 함락시키고는 안도했는데, 이제 그녀가 결혼 적령을 넘었다는 사실과 고시와 연애는 양립할 수 없다는 중론 사이에서 그녀와 나는 고민의 연쇄반응을 일으켰고, 또 이틀이 멀다 하고 만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애정의 열도에 비례하여 공부를 위한 시간에의 집착이 강하여 심리적 갈등이 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9월에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장유암이라는 절에 들어갔다. 국사의 추가로 부담이 늘었지만 시험이 연기된 것을 다행으로 여겨 ‘수석합격’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열심히 공부했다.”
노무현은 연애와 고시준비를 동시에 진행하였다. 둘 다 포기할 수 없는 일생일대의 ‘과업’이었다. 연애 때문에 고시공부에 지장이 없지 않았지만 처음으로 마음에 담은 사람을 놓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울산에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 잠시 간호사를 짝사랑한 적이 있었으나 그저 그것으로 끝나고, 권양숙이 첫사랑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은 양가의 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노무현의 가족은 고시에 합격하면 문벌 좋은 집안 규수한테 장가들 수 있는데 굳이 시골처녀와 서둘러 결혼할 이유가 없다고 반대하였다. 특히 어머니는 처녀 아버지의 전력 때문에 아들이 고시에 합격해도 판사가 되지 못할까봐 걱정이었다. 어머니의 소망은 막내 아들이 고등고시에 판사가 되는 일이었다. 반면에 권양숙의 어머니는 상고밖에 나오지 못한 시골뜨기가 고시 공부를 한다고 책을 붙들고 있으니 가당찮은 일로 보였다. 비록 남편의 전력으로 인해 파란을 겪었지만 자신들은 시골의 농투성이와는 다르다는 생각이었다. 양가의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결혼할 수 있게 된 것은 둘째형 노건평의 설득 때문이었다. 노건평은 동생의 고집을 도저히 꺾을 수 없다는 걸 알고 그 대신 “어머님과 형님을 설득하는 일에 매달렸다.”
“동생이 결혼할 때 돌아가신 큰형님과 어머니가 크게 반대했습니다. 사돈어른이 좌익활동 혐의로 옥고를 치른 일 때문이었지요. 1970년대 초반은 엄혹한 시절이었어요. 반공이라는 가치가 어떤 가치보다 우선했고 연좌제가 시퍼렇게 살아있었습니다. 동생은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었고 처가쪽의 문제로 과연 시험에 합격해서 임용될 수 있느냐의 문제가 불거진 거죠. 나는 어머니와 형님을 설득해 끝내 두 사람의 결혼을 성사시켰습니다. 동네에서 아주 구식으로 결혼식을 치렀죠. 내가 그렇게 마음먹은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어요. 첫째, 동생 장모되실 분이 어렵게 인생을 산 분이지만 기품이 있고 엄격했기 때문입니다. 그 집안 사람들 인물들이 모두 반듯반듯했습니다. 그런 집안의 딸이라면 아무 걱정없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가족들이 끝까지 반대할 경우 무슨 일이 생길지 저도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그 점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어느 날인가, 내가 동생을 조용히 불러 물었습니다. 처가 문제 때문에 시험에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이렇게 물었던 거죠. 판ㆍ검사, 변호사 못해도 내가 노력해서 다른 일 하면 된다고 하더군요. 동생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그 때 확신했지요. 동생을 설득하기보다 어머님과 형님을 설득하는 일에 매달렸습니다.”
● 어렵게 한 결혼 그리고 고시 합격
노무현의 정치활동에 두고두고 무거운 족쇄가 된 장인의 ‘전력’이란 무엇인가. 실제로 노무현은 평의원일 때는 덜 했지만, 대통령 후보가 되어 선거를 치를 때, 심지어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수구정치세력은 그에게 붉은 색깔을 칠하는 데 이성을 잃었다.
노무현은 권양숙과 결혼하기 전까지 장인자리의 전력을 자세히 몰랐다. 누구도 그런 일을 얘기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혼담이 무르익으면서 이 문제가 드러나게 되었다. 노무현은 “(장인이)예전에 면사무소 서기를 했다는 것과 친구 분들이 많았다는 것, 해방 이후에 좌익운동에 가담했다는 것 정도로 알고 있었다. 좌익운동을 조금 하다가 돌아가신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선거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세세히 가르쳐주어서 6·25동란 당시 인민군이 내려올 때 면 책임자였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하지만《월간 중앙(2002년 5월호)》의 취재(〈노무현 장인의 부역활동의 진실〉)에 따르면 “당시 정황 베일 속 마을주민 일부 ‘억울함’ 증언”이라는 기사 제목에서 보듯 사실관계가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거의 없었다.
〃노무현의 장인 권오석은 1922년 경남 창원군 진전면 출신으로 진전초등학교에 이어 밀양농업학교 3년을 중퇴하고 1943년 지방공무원 시험에 합격, 마산시 진동면사무소 서기로 근무했다.
1944년부터는 고향 진전면 사무소에 근무하게 됐는데 일종의 좌천이라 할 수 있다. 진전면에서 만난 주민 K씨는 권씨가 “불법 공출에 맞서 주민 편을 들다 좌천됐다고 들었다”고 증언했다. 권씨는 1945년 12월경 불의의 사고로 시력을 잃어 1946년 봄에는 완전 실명, 그해 6월경 면사무소 서기직을 그만 둔다. 권씨가 무슨 혐의를 받고 복역했는지, 몇 년 형을 살았는지 가족들도 모르고 있었다.
최근 공개된 유일한 자료는 1973년 대검찰청이 발간한 <좌익사건실록>에 나타난 권씨의 혐의 내용이다. 이 자료는 1949년 6월 남로당에 가입, 1950년 1월 창원군당 선전부장의 중책을 맡은 것으로 돼 있다. 문체로 봐서 검찰의 공소장에 의존해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권씨의 활동 사실은 인민군이 마을을 점령했던 1950년 8월~9월에 집중돼 있다. 그해 8월 20일 창원군 진전면에 ‘반동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부위원장을 맡은 것으로 돼 있다. 9월 5일에는 고성군 회화면에서 “양민 변〇〇 외 9인을 학살하는 현장 부근에서 학살을 용이하게 감시했다”고 기록했다.
권씨는 국가보안법 위반혐의 등으로 부산지검 마산지청에 기소됐으나 검찰의 구형량, 재판부의 판결 내용은 자료의 멸실로 알 수 없는 상태다.
노무현의 처남 권기문(48) 씨는 “아버지가 6ㆍ25 당시 어떤 일을 했는지는 어머니를 포함한 가족 모두 일절 아는 바 없다”고 말했다. 노무현의 장모 박모 씨는 “남편이 앞을 못 보는 맹인인 점을 이용, 다른 사람들이 죄를 모두 뒤집어씌운 것 아니냐”는 ‘심정적 의문’을 제기하고 있을 뿐 남편의 활동과 관련한 당시의 정황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마을 주민 K씨가 부친으로부터 들은 얘기는 다소 다르다. 면서기를 알려준 것이 ‘혐의를 받을만한 사실의 전부’라는 것이 K씨의 증언이다. ‘별 것 아닌’ 사건이 확대된 데는 6ㆍ25 전란 당시 동네 유력한 가문 사이에 형성됐던 원한관계가 작용했다는 것이 K씨 시각이다. 물론 이같은 증언의 진위를 확인할 방법은 아직 없다.〃-《월간 중앙》, 2002년 5월호, 81쪽.
권오석은 1971년 49세로 옥중에서 사망했다. 그는 긴 세월 옥고를 치르고 감옥에서 사망했지만, 검찰의 구형량도 재판부의 판결문도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그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진실’은 미궁 상태로 있다. 주민들의 증언대로 마을의 원한관계로 엉뚱한 죄를 뒤집어썼을지도 모른다. 또 그가 앞을 못 보는 맹인이어서 눈 뜬 사람들이 죄를 뒤집어 씌웠을지도 모른다. 인민군이 왜 하필이면 맹인을 골라 ‘반동조사위원회’의 부위원장을 맡겼을까? 의문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문제는 이를 두고 노무현의 정치활동 기간 내내 저들의 붉은 딱지 붙이기가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버지의 얼굴도 못보고 자란 권양숙은 결혼 과정에서부터 이후 남편의 정치행로 내내 이념 공세로 인해 마음고생을 겪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남편 노무현이 2002년 대선 과정에서 상대 후보 측으로부터 아내의 집안에 대한 색깔 공세를 받고 “그렇다면 내가 아내를 버리라는 말이냐”고 울부짖었을까?
노무현은 1973년 초 권양숙과 결혼하고 다시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5월에는 아들 건호가 태어났다. ‘속도위반’을 한 셈이다. 이 무렵 큰형님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불행이 닥쳤다. 노무현에게는 정신적 지주였고 아버지 같은 형님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당한 노무현은 고시공부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나를 아껴주시며 자신의 못다한 소망을 나에게 걸어 꿈을 키워주시던 큰형님이 5월 14일 교통사고로 저 세상으로 떠나 버리셨다. 한줌 재로 화해버린 형님의 유해를 고향에 묻고 절로 올라올 때는 길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이제부터 전혀 공부도 되지 않았다. 단지 타성에 의하여 책장을 넘기고 있는 동안에도 마음은 삶과 죽음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생각들과 고시와 출세에 대한 회의로 가득차 있을 뿐이었다.”
노무현은 야생초와 같은 끈질긴 생명력과 야생마와 같은 꺾이지 않은 도전정신을 갖고 있었다. 형님의 못다 이룬 꿈과 자신의 미래의 꿈을 향해 고시공부를 접을 수가 없었다.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끙끙거렸지만 정신은 갈수록 혼란스럽기만 하고 몸은 야위어 갔다. 온갖 번뇌에 시달리는 정신으로 공부에 능률이 오를 리 만무했다.
15회 시험까지 남은 기간은 40여일 뿐, 차츰 초조해지기 시작하고 마침내 책을 읽기만 하면 가슴이 울렁거리며 답답해지는 알지 못할 병에 걸리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시험을 한 달 앞두고 보따리를 싸 들고 집으로 내려왔다.
그런 노무현이 사법시험의 고비를 넘기기란 쉽지 않았다. 두 번의 시험에서 잇달아 실패하고 나서야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지었다. 2년의 힘든 시기를 보내고 나서야 겨우 “마음의 안정을 찾고 건강을 되찾은” 것이다. “연속 두번 시험에 실패하고 나서야 겨우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그때부터 잠을 집에서 자고 공부는 마옥당에서 했다. 아내가 들판을 건너 점심을 가져다주었다. 건강도 좋아졌고 시험도 잘 보았다. 이번에는 합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시기 공부 뒷바라지는 작은 형님이 해주었다. 아버님은 뇌출혈이 와서 건강이 좋지 않으셨다. 귀도 어둡고 눈도 어둡고 걸음도 바르지 못하셨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는 것부터 내 책값과 용돈, 건호 우윳값까지 어느 것 하나 빼놓지 않고 모두 다 작은 형님이 보살펴 주었다. 큰 형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달리 기댈 언덕이 없었다.”
이른바 명문 법대 출신들도 추풍낙엽으로 나가떨어지는 사법고시에, 더러 없는 일은 아니지만 상고 출신이 합격하기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무섭도톡 집념이 강한 노무현은 3년간의 씨름 끝에 마침내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도 그때만 못했다”고 할 정도로 그 기쁨과 감격이란 비할 바 없었다고 했다.
“불안하고 힘든 그리고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보낸 끝에 나는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합격의 감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친구가 소식을 전해주자, 아침부터 한바탕 싸우고 토라져 누워 있던 아내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내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는 엉엉 울어댔다. 들뜬 기분은 제법 오래갔다. 길을 가면서도 “저, 고시에 합격했습니다”하고 소리치고 싶었고, 차를 타고 옆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걸고 자랑하고 싶은 정도였다. 아내가 내 무릎에 얼굴을 묻고 눈물범벅이 되어 엉엉 울었다. 내가 사법고시에 합격한 것은 벌레가 사람이 된 것만큼이나 큰 사건이었다. 돼지를 잡고 풍물을 치면서, 일주일이 넘도록 마을 잔치를 벌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기쁨을 다 표현할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진영 읍내 큰 길에 가서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자랑하고 싶었다.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내게 물었다. 어떻게 혼자 공부해 고시에 합격할 수 있었느냐고. 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쨌든 해냈다.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나도 아내도, 그 순간만큼 큰 성취감이나 행복을 느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대통령이 되었을 때도 그 때만은 못했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65쪽.
제17기 연수생으로 들어간 노무현에게 사법연수원은 딴 세상이었다. 다들 출신 고교나 대학을 중심으로 끼리끼리 뭉쳤다. 연수원 동기생 가운데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노무현은 여전히 국외자였다. 그 안에도 ‘신분’이 작용하고 있어서 밥 먹는 것조차 같은 ‘신분’끼리만 어울렸다. 수업 받는 것 말고는 어디에도 ‘상고 출신 촌놈’ 노무현이 낄 자리는 없었다. 이런 처지를 안 동료들 몇이서 그를 불러 함께 밥을 먹었다. 이들과는 사회에 나와서도 오랫동안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노무현은 변호사가 되기를 원했다. 틀에 갇혀 보이는 판사보다 비교적 자유로워 보이는 변호사를 선호한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와 형은 펄쩍 뛰면서 반대하고 나섰다. 판·검사를 가장 높은 벼슬로 여기던 시절이다. 노무현은 결국 고집을 꺾었다. 장인의 전력 때문에 판사 발령을 받지 못할까 초조해하는 어머니와 아내의 설움과 원망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뜻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장인 문제는 판사 발령에 걸림돌이 되지 않아 노무현은 1977년 9월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부임했다.
연수기간에 노무현은 딸을 얻는 경사를 맞았지만 천붕지괴(天崩地壞)의 슬픔을 겪어야 했다. 1976년 장녀 정연이 태어난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막내아들의 고시 합격에 그리도 기뻐하셨던 아버지였다. 노무현은 “시류에 밝지도 않았고 술수를 부릴 줄도 몰랐던 아버지는 해방된 나라의 가난한 백성으로 정직하게 살다 가셨다. 마지막 가시는 길에 자랑과 기쁨을 드린 것 같아서 마음이 조금은 가벼웠다.”고 회상했다.
왕조시대의 과거 급제나 대한민국 사회의 고등고시 합격은 ‘평민’ 출신이 출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었다. 그래서 그 숱한 젊은이들이 ‘청운의 꿈’을 성기아 과거시험에, 고시에 목을 맸다. 고시 합격은 노무현이 내내 짓눌려온 불안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었다. 또 반항심이나 열등감과 같은 발목을 잡아온 부정적인 감정들을 일소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세상살이에 대한 노무현의 자신감 부족, 곧 사회에 대한 불안감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청년기까지 그를 지배해온, 그야말로 가문의 저주와도 같은 집요한 심리적 상처였기 때문이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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