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을 이끌고 요령성민중자위군(遼寧省民衆自衛軍)과 합세하여 반만항일전(反滿抗日戰)에 앞장선 양세봉(梁世奉) 장군은 1896년 6월 5일 평안북도 철산군 세리면 연산동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명은 서봉(瑞鳳)이며 호는 벽해(碧海)이다.
그는 어려서 가정이 매우 어려워 처산군 어느 서당에서 소사로 일하면서 천자문(千字文), 동몽선습(童蒙先習), 명심보감(明心寶鑑) 등을 어깨넘어로 배웠다. 일제(日帝)의 침략 행위가 이 지역에도 미치어 선량한 주민들을 약탈하고 온갖 만행을 자행하는 것을 보고 그의 어린 가슴에도 반일의식이 싹트고 있었다. 1909년 10월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하얼빈 역두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을 처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안중근 의사의 기개에 경탄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다.
1912년에 부친이 사망하자 장군은 일찍부터 집안 살림을 맡게 되었으며 1916년에 임재순(林載純)과 결혼하여 가계를 이끌어 갔다. 그러나 가세가 기울어 더 이상 국내에서 생활하기가 곤란하여 1917년 엄동설한에 가족과 같이 압록강을 건너 중국 관전(關典), 환인(桓仁)을 거쳐 영릉(永陵)에 도착하여 중국인 지주의 소작농으로 가족의 생계를 연명해 갔다. 1919년 봄에 신빈현(新賓縣)의 홍묘자로 이사하여 살던 중 국내에서 거족적인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이 일어나자 흥동학교(興東學敎) 교장 이세일(李世日)과 함께 주민들을 규합하여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1922년에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민병대장인 김명봉(金明鳳), 정창하(鄭昌夏) 등과 연계하여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을 지원하였으며 또한 대한독립단 소속 지방공작원이 되어 식량을 공급하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동년 겨울에 의주, 삭주, 귀성군의 경계에서 항일투쟁(抗日鬪爭)을 전개하고 있던 천마산유격대에 입대하여 창성군 대유동의 경찰서, 금광사무소와 영림창을 습격, 군수물자와 금괴 등을 노획하여 군자금으로 충당하였다.
천마산유격대(天摩山遊擊隊)는 1920년 12월 최시흥(崔時興), 최지풍(崔志豊), 박응백(朴應伯) 등이 중심이 되어 청장년 500여 명으로 조직한 무장 단체로서 재래식 무기인 화승총을 비롯해 일본 경찰을 공격하여 빼앗은 총기(銃器)로 무장하고 도내 각지에서 유격전(遊擊戰)을 전개하여 일본 헌병대 주재소, 경찰서, 면사무소를 기습 공격하면서 일제(日帝)의 밀정들을 살해하는 등 맹활약을 하였다.
1923년 초 일제(日帝)가 천마산유격대에 대한 토벌작전(討伐作戰) 계획을 세우고 병력을 파견해 독립군의 근거지는 물론 그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들을 습격하고 방화하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지르게 되자 국내에서는 더 이상 활동이 불가능하여 최시형은 천마산유격대를 이끌고 만주 유하현으로 이동하였다. 그 후 천마산유격대는 그곳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 합류하여 광복군철마별영(光復軍鐵馬別營)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이때 장군은 별영의 검사관으로 임명되어 불량한 병사들을 선도하는 등 군기확립에 진력하는 한편 훈련을 강화하여 의용군을 정규군 수준으로 끌어올리어 오동진(吳東振) 총영장으로부터 크게 신임을 받았다. 광복군총영은 1920년 9월 중국 관전현 안자구에서 발족한 무장 단체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직할군대였으며 지금의 북한 일대를 관할하였다.
1922년 8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대한독립군결사대(大韓獨立軍決死隊)를 비롯하여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 평북독판부(平北督辦部) 등 8개 단체 9명의 대표들이 중국 환인현 마권자에서 남만한족통일회의(南滿韓族統一會議)를 개최하여 남만주의 각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결성하였다. 통의부는 총장[金東三], 부총장[蔡相悳]아래 민사, 교섭, 군사, 법무, 재무, 학무, 실업, 권업, 교통, 참모의 10부를 두었으며 부(府) 아래에 국(局)을 두고 비서과와 사판소를 설치하여 남만주 지역에서의 민정(民政), 군정(軍政)을 통합한 독립정권의 형태를 갖추었다. 이때 양세봉 장군은 통의부 의용군 제3중대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5월경에는 평북 창성군, 초산군 판면, 의주군 고령 영산 일대의 일본 경찰서,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여 수십명의 적병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923년 8월 독립운동 방략의 대립으로 대한통의부가 의군부(義軍府)로 분할되자 통의부 소속 의용군 제 1, 2, 3, 5 중대를 주축으로 하여 환인현 마권자에서 참의부(參議府)가 조직되었다.
임시정부의 군무부에서는 참의부를 정규적인 군사단체로 인정하여 압록강 연변과 중국의 집안현(集安縣)을 중심으로 무송(撫松), 장백(張伯), 안도(安道), 통화(通化), 유화(柳花) 등의 조선인 사회의 민정과 군정을 관할하도록 하였다. 참의부는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을 통해 활발한 무장투쟁(武裝鬪爭)을 전개하였는데 이때 장군은 참의부의 소대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참의부 소속 독립군 제3중대 소대장으로 임명된 장군은 1924년 5월 16일 평북 초산군 성남동, 강계군 고산하에서 일본 경찰과 교전하여 수명의 적병을 사살하였으며, 특히 한국 식민통치의 원흉인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국경지역인 압록강을 순시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자 동월 19일 한웅권(韓雄權) 참위(參衛)가 이끄는 참의부 제2중대 제1소대와 합세하여 일제의 경비가 미치지 못한 만주 쪽 강변인 마시탄 절벽에 정예병을 배치하고 사이토 총독이 국경 순시차 압록강 경비선을 타고 지나갈 때 사격을 개시하였으나, 의외로 사거리가 너무 멀고 또 사이토가 탄 선박이 전속력으로 도망치게 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이토 자신이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 이후 소위 문화정치(文化政治)라는 미명으로 한국 식민통치에 대하여 거짓 자랑만 하고 있었으니 그에게 폭탄적 경고가 되었음은 물론 대내외에 한국 독립운동의 활성화를 더욱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제는 1925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三矢宮松]와 만주의 봉천성(奉天省) 경찰청장간에 소위 삼시협약(三矢協約)이라는 재만한인취체법(在滿韓人取締法)을 체결하게 되었고 중국 당국은 독립운동을 탄압할 의무를 갖게 되어 만주에서의 무력독립운동(武力獨立運動)에 적지않은 타격을 받게 되었다.
1924년 6월에는 참의부 소대원을 이끌고 평북 강계, 위원에 진입하여 일제의 경찰대와 교전하였으며 동년 말에는 참의부 제3중대장으로 승진하여 남만주 화전현일대에서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과 부일배(附日輩) 숙청 등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동년 7월 통의부 사령장 겸 군사위원장 신팔균(申八均) 장군이 왕청문(旺淸門) 이도구(二道溝) 밀림에서 무관학교 관병들을 훈련시키던 중 일제의 사주를 받은 마적 떼들의 기습으로 위기에 몰리자 양세봉 장군은 대원들과 함께 신속히 구출작전을 펼쳐 엄호 사격을 가하였으나 신팔균 장군 등 수십명의 독립군이 전사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일제의 간계에 의해 중국 마적단의 습격으로 신팔균 장군이 전사하는 등 큰 타격을 입게 되자 통의부는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1924년 7월 길림에서 전만통일의회주비회(全滿統一議會籌備會)를 개최하여 대동단결에 합의를 보고 동년 11월 25일 통의부를 비롯하여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 의성단(義成團)등 10여개 단체의 대표인 김동삼(金東三), 고할신(高豁信), 이진산(李震山), 이천민(李天民), 김호(金浩) 이장녕(李章寧) 등 25명이 회집하여 김동삼 선생을 의장으로 선출한 후 협의를 거듭한 끈에 정의부(正義府)를 결성하였다. 정의부는 지역의 군사 재정, 행정, 교육, 사법 등 모든 부문을 국가체제에 준하여 조직하였다.
그러나 정의부가 성립된지 1년이 못되는 1925년 9월,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에 선임된 이상룡(李相龍)은 재만(在滿) 독립운동 지도자인 오동진(吳東振), 김동삼, 윤세용(尹世茸), 이유필, 김좌진(金佐鎭), 현천묵(玄天默) 등 정의부(正義府), 참의부(參議府), 신민부(新民府)의 3부 대표 간부를 고루 임정각료로 입각시키게 됨에 따라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해야 한다는 독립운동상의 실리론이 대두되어 정의부의 내분이 표출되었다. 이에 1926년 1월 중앙회의 상임위원장 이해룡(李海龍)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비상의회격인 군민대표회를 개최하여 새로운 헌장을 제정하고 이에 따라 새로운 중앙의회와 행정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로써 정의부는 남만지방에 있어서 공화정체를 뚜렷이 한 한국인 행정부로써 기반을 굳혔다. 동년 11월 장군은 정의부 1중대장에 임명되어 일본 군인, 경찰 등을 제거하는데 앞장서서 활약하였다. 당시 중국의 국민당(國民黨)은 국공합작(國共合作)에 의하여 통일전선이 형성되고 국내에서 좌우익의 통합체인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하는 등 연합전선(聯合戰線)을 추진하는 통합운동이 일어나자 만주 지역에서도 정의부를 주축으로 하여 1928년 5월 12일부터 26일까지 15일간 중국 화전과 반석 등지에서 18개 단체의 대표 39명이 참석하여 전민족유일당조직회(全民族唯一黨組織會)를 개최하였다.
이때 화전현에서 정의부의 의용군 중대장으로 활약하고 있던 장군은 정의부 대표로 유일당 조직회의에 참석하여 민족유일당 조직동맹을 새로 결성하였으나 청년동맹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민족유일당 촉성조직동맹(당시 공산주의자들과 연계되어 있었음)의 비협조로 유일당 조직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그 후 1928년 9월 길림 근방 신안둔에서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대표가 모여 3부 통합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이듬해인 1929년 4월 정의부를 주축으로 신민부 민정위원회 측(대표 李敎源)과 참의부 측(沈龍俊)이 모여 새로운 군정부인 국민부(國民府)를 조직하였다. 이때 장군은 제1중대장으로 임명되어 활약하였으며, 국민부 산하 선민부토벌지휘부(鮮民府討伐指揮府)를 조직하여 동 지휘부의 부사령관으로서 총사령관 이웅(李雄)과 함께 일제(日帝)의 주구 기관인 선민부(鮮民府)를 토벌하는 것을 주요 임무로 하여 일제의 행정기관을 습격하고 일제의 밀정 등을 처단하는데 앞장섰다.
동년 12월 국민부 중앙회의에서 민족 유일당 조직동맹을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으로 개편하고, 동시에 그에 소속되어 있던 의용군을 독립시켜 국민부 예하조직으로서 무장 단체인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을 조직하여 종전의 정의부에 소속되어 있던 부대를 개편하고 참의부와 신민부에 있던 일부 병력을 흡수하여 통합시켰다. 양세봉 장군은 부사령관이라는 중책을 맡아 일제의 기관 습격 및 일제의 밀정 처단 등 무장투쟁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30년 8월 조선혁명당 대표자 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조선혁명당은 국민부를 지지하는 민족주의와 이를 부정하는 사회주의 계열로 분열되고 있었다. 장군을 비롯하여 현익철(玄益哲), 고이허(高而虛), 김문학(金文學), 양하산(梁河山) 등 민족주의 인사들은 국민부를 적극 지지하고 당의 위원회에서 결정한 사항의 실행을 주장한 반면, 고할신(高豁信), 김석하, 이웅(李雄), 현정경(玄正卿), 이성근 등은 이에 반대하여 국민부 및 조선혁명당을 해체하고 군대를 적위군에 편성하고 농민은 농민협회를 조직하여 유력한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31년 9월 18일 일제(日帝)가 중국의 동북지방을 침략한 만주사변(滿洲事變)이 일어나자 한국인과 중국인의 연대투쟁의 필요성이 절실해져 장군은 동년 11월 신빈현 왕청문에서 중국인 왕동헌(王動憲)이 이끄는 요녕농민자위단(遼寧農民自衛團)과 협의하여 연합군을 편성하였다. 그리고 장군은 조선혁명당 집행위원에 선출되어 국민부와 조선혁명당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1932년 1월 조선혁명당과 군의 주요 간부들은 중국 신빈현 하북에 있는 서세명(徐世鳴)의 집에서 중앙간부회의를 소집하여 만주사변 이후 당면한 현안 문제를 논의하던 중 친일 주구단체인 보민회(保民會)의 밀고를 받고 출동한 통화 일본영사 분관 경찰의 습격을 받아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 이호원(李浩源), 조선혁명군 사령관 김보안(金輔安), 부사령관 장세용(張世勇), 부관장 박치화(朴致化) 조선혁명군 경위대장 이규성, 국민부 공안부 집행위원장 이종건 등 10여 명이 피체되었고, 이후 3월 초까지 계속된 일경(日警)의 검거로 9개 현에서 간부 83명이 피체되는 등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장군을 비롯하여 양기하(梁基瑕), 고이허 등 조선혁명당의 중견 간부들은 조선혁명군 각지부대 수뇌회의를 소집하고 위기에 처한 조선혁명군과 조선혁명당의 자구책을 토의한 후 조직을 재정비하였다. 장군은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에 선임되고 조선혁명당 주석에 고이허(高而虛), 국민부 집행위원장에 김동산, 조선혁명군 참모장에 김학규(金學奎), 재정부장에 이상관, 외교부 및 임시정부 특파원에 홍심원(洪沈遠)이 각각 임명되었다.
총사령관에 임명된 양세봉 장군은 일제(日帝)와의 결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조선혁명군의 조직을 5개 사단으로 개편하여 제1사단장에 박대호(朴大豪), 제2사단장에 한검추(韓劍秋), 제3사단장에 조화선(趙化善), 제4사단장에 최윤구(崔尹構), 제5사단장에 정광배(鄭光輩)를 임명하였다. 그리고 사령부를 홍경현 왕청문에 이동하여 설치하고 정의부에서 세운 화흥중학을 속성사관학교로 개편하여 조선혁명군 관할하에 귀속시키는 동시에 강전자로 옮겼다.
속성사관학교의 교장에 양하산(梁河山), 생도대장에 윤일파, 교관에 한국신(韓國申) 등을 임명하고 장군은 명예교장으로 독립군을 양성하여 항일역량을 높히는데 진력하였다.
동시에 밖으로는 중국 의용군 총사령관인 이춘윤(李春潤)과 협의하여 한중연합군(韓中聯合軍)인 요령성민중자위군(遼寧省民衆自衛軍)을 결성하는 협정을 체결한 후 조선혁명군은 특무대와 선전대대로 편성되어 양세봉 장군이 요녕민중자위군의 특무대 사령관으로, 김광옥은 선전대대장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조선혁명군이 특무대와 선전대대로 중국 의용군과 연합작전을 펼치게 된 것은 중국 의용군에 비해 부대 규모가 작지만 뛰어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중연합군(韓中聯合軍) 결성은 각처에서 발호하고 있는 중국인 무장 단체인 대도회(大刀會)와 홍창회(紅昌會) 등의 무질서한 행동을 자제시키고 동시에 중국인의 한국인에 대한 좋지 못한 감정도 호전되었다. 또한 중국 군벌인 당취오(唐聚五), 왕육문(王育文), 손수암(孫洙巖), 장종주, 왕봉각, 서대산 등도 이에 호응하여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협정을 맺은 후 동년 10월까지 요녕민중자위군(遼寧省民衆自衛軍)과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의 연합군은 일본군 및 만주국군을 상대로 거의 2백여회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뤘다.
1932년 3월 양세봉 장군은 참모 김학규와 더불어 중대장 조화선, 최운구, 정봉길 등의 3개 중대를 인솔하고 중국 의용군 지휘관인 왕동헌, 양석봉 등의 부대와 합세하여 신빈현의 왕청문에서 무순 천금채로 진군하는 도중 신빈 남쪽에 숙영하게 되었다. 이 정보에 접한 신빈현 주둔 일본 관동군은 박격포, 기관총 등 중화기(重火器)로 무장하여 한중연합군을 총공격하였다.
그러나 지리에 익숙한 조선혁명군의 전술에 말려들어 고전을 면치 못하던 일본군은 교전 1시간만에 고지를 빼앗기고 퇴각했으며, 연합군은 적군을 30여리까지 추격하여 이날 신빈 동쪽에 있는 영릉가성(永陵街城)에 이어 상협하(尙協河)까지 점령하였다. 이 전투에서 연합군은 수많은 전리품을 노획하는 한편, 한국인과 중국인 양민족간의 갈등을 융화시키고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32년 3월 영릉가성전투(永陵街城戰鬪)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폭격기까지 동원한 맹공으로 흥경성(興京城)을 점령하였다. 양세봉 장군은 이 지역의 전략적 가치를 고려하여 이춘윤이 거느린 중국 의용군 1만여명의 병사와 연합작전을 펼쳐 조선혁명군은 동문으로 진입하고 중국 의용군은 북문으로 총공격을 개시하였는데, 기진맥진한 적군은 서남문으로 패주하고 말았다. 마침내 흥경성에서도 태극기(太極旗)와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가 펄럭이면서 전승축제(戰勝祝祭)가 무르익어 병사들의 사기가 충천하였다.
장군은 동년 5월 초에 이춘윤, 왕동헌이 이끄는 요녕민중자위군(遼寧省民衆自衛軍) 부대와 함께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타격하기 위하여 신빈현 영릉가로 진격,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후퇴하였다. 이후 10월까지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은 여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었지만 공군력의 부족으로 열세를 면하지 못했다.
1933년 1월에는 중국 군벌 당취오(唐聚五)의 군대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와해됨에 따라, 왕청문 남쪽의 수둔에서 조선혁명군 수뇌부 소집회의를 개최하여 장군을 총사령관에 재임용하고 부사령관에 박대호를 임명하는 동시에 부대를 3개 방면군으로 개편하고 조선혁명당 총령에 고이허, 국민부 부위원장은 김동산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병력 충원과 재정조달방법을 모색하고 군규를 제정하여 민족단결을 꾀하고 중국 의용군과 합세하여 유격전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동년 4월 조선혁명군의 활동 무대를 집안현(吉安縣), 임강현(臨江縣) 일대의 한.중 국경지대로 옮겨 유격전(遊擊戰)과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을 전개하였으며, 5월에는 서원준(徐元俊)을 국내유격대장의 직책으로 황해도에 밀파하여 사리원 경찰서 등을 습격하도록 하였다.
1934년 3월 홍경현 쌍립자에서 조선혁명군은 간부회의를 소집하여 조선혁명군의 항일연합범위의 확대, 항일투쟁 근거지 건립, 일본 침략자 타격 등에 대한 방침을 정하여 다른 무장투쟁세력과 연계하여 추진하기로 하였다.
동년 6월 참모장 김학규를 북경에 밀파하여 중국 관내로 철수한 당취오와 연락하고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에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홍경현 진주령에서 일본군 기차를 습격하여 수십명의 적병을 사살하는 등 동년 월까지 계속 항일전(抗日戰)을 전개하였다.
동년 7월 7일 일본군이 영릉가 석인구의 조선혁명군 사령부를 습격하였으나 조화선 부대의 지원으로 조선혁명군은 과감한 반격을 하여 일본군 40여명을 사살하고 경기관총 3정과 중포 1문, 소총 80여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7월 중순에 양세봉 부대는 중국 의용군 이춘윤 부대의 잔류 병사 5백명과 합세하여 무순현 노구대를 점령하고 1개 연대 규모의 일본군과 만 2일간의 격전을 벌였다. 그 뒤 일본군은 다시 1개 대대의 병력으로 통화현 쾌대무자에 주둔하고 있는 제1방면군 최윤용 부대를 습격하였으나 조화선 부대의 지원으로 일본군은 패퇴하고 말았다. 이때 퇴각하는 일본군을 다시 최주봉 부대가 추격하여 80여명을 사살하였다.
이무렵 일제의 밀정 박창해가 조선혁명군을 직, 간접적으로 후원하던 중국인 왕명번을 매수하여 환인현에 머물고 있던 양세봉 장군을 찾아가 중국 항일의용군과의 연합작전을 논의하자는 구실로 장군을 환인현 소황구의 골짜기로 유인하였다.
1934년 음력 8월 12일 장군은 부관인 김광욱, 김성해, 김추상과 함께 왕명번을 따라 나섰다. 일행이 대랍자구(大拉子溝)로 가던 도중 돌연 무장 괴한들의 총격을 받아 장군은 치명상을 입고 숨을 거두었다. 장군이 순국하자 동지들은 일제 측에서 모르게 산 중턱에 평장을 하였는데, 통화의 일본 영사관 경찰이 이를 탐지하고 묘를 파헤치고 시신을 꺼내 목을 잘라 가져가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하니 인륜도 도덕도 없는 천하에 둘도 없는 야만이요 그 잔악상을 어찌 말로 형용할 수 있을 것인가!
양세봉(梁世奉) 장군이 순국한 후에도 김호석(金浩錫)이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항일전(抗日戰)을 지속하였으나 조선혁명군은 급격히 세력이 위축되어 소규모 유격전으로 겨우 독립군의 명맥을 유지하였다.
무력독립운동사(武力獨立運動史)에 있어서 일찍이 명성을 떨쳤던 홍범도(洪範圖), 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실력과 명망을 가지고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웠던 양세봉(梁世奉) 장군의 구국헌신(求國獻身)과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정신은 우리 민족의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 숨쉴 것이리라.
1930년대 한중연합대일항전(韓中聯合對日抗戰)의 주역 양세봉(梁世奉)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을 이끌고 요령성민중자위군(遼寧省民衆自衛軍)과 합세하여 반만항일전(反滿抗日戰)에 앞장선 양세봉(梁世奉) 장군은 1896년 6월 5일 평안북도 철산군 세리면 연산동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명은 서봉(瑞鳳)이며 호는 벽해(碧海)이다.
그는 어려서 가정이 매우 어려워 처산군 어느 서당에서 소사로 일하면서 천자문(千字文), 동몽선습(童蒙先習), 명심보감(明心寶鑑) 등을 어깨넘어로 배웠다. 일제(日帝)의 침략 행위가 이 지역에도 미치어 선량한 주민들을 약탈하고 온갖 만행을 자행하는 것을 보고 그의 어린 가슴에도 반일의식이 싹트고 있었다. 1909년 10월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하얼빈 역두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을 처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안중근 의사의 기개에 경탄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다.
1912년에 부친이 사망하자 장군은 일찍부터 집안 살림을 맡게 되었으며 1916년에 임재순(林載純)과 결혼하여 가계를 이끌어 갔다. 그러나 가세가 기울어 더 이상 국내에서 생활하기가 곤란하여 1917년 엄동설한에 가족과 같이 압록강을 건너 중국 관전(關典), 환인(桓仁)을 거쳐 영릉(永陵)에 도착하여 중국인 지주의 소작농으로 가족의 생계를 연명해 갔다. 1919년 봄에 신빈현(新賓縣)의 홍묘자로 이사하여 살던 중 국내에서 거족적인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이 일어나자 흥동학교(興東學敎) 교장 이세일(李世日)과 함께 주민들을 규합하여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1922년에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민병대장인 김명봉(金明鳳), 정창하(鄭昌夏) 등과 연계하여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을 지원하였으며 또한 대한독립단 소속 지방공작원이 되어 식량을 공급하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동년 겨울에 의주, 삭주, 귀성군의 경계에서 항일투쟁(抗日鬪爭)을 전개하고 있던 천마산유격대에 입대하여 창성군 대유동의 경찰서, 금광사무소와 영림창을 습격, 군수물자와 금괴 등을 노획하여 군자금으로 충당하였다.
천마산유격대(天摩山遊擊隊)는 1920년 12월 최시흥(崔時興), 최지풍(崔志豊), 박응백(朴應伯) 등이 중심이 되어 청장년 500여 명으로 조직한 무장 단체로서 재래식 무기인 화승총을 비롯해 일본 경찰을 공격하여 빼앗은 총기(銃器)로 무장하고 도내 각지에서 유격전(遊擊戰)을 전개하여 일본 헌병대 주재소, 경찰서, 면사무소를 기습 공격하면서 일제(日帝)의 밀정들을 살해하는 등 맹활약을 하였다.
1923년 초 일제(日帝)가 천마산유격대에 대한 토벌작전(討伐作戰) 계획을 세우고 병력을 파견해 독립군의 근거지는 물론 그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들을 습격하고 방화하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지르게 되자 국내에서는 더 이상 활동이 불가능하여 최시형은 천마산유격대를 이끌고 만주 유하현으로 이동하였다. 그 후 천마산유격대는 그곳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 합류하여 광복군철마별영(光復軍鐵馬別營)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이때 장군은 별영의 검사관으로 임명되어 불량한 병사들을 선도하는 등 군기확립에 진력하는 한편 훈련을 강화하여 의용군을 정규군 수준으로 끌어올리어 오동진(吳東振) 총영장으로부터 크게 신임을 받았다. 광복군총영은 1920년 9월 중국 관전현 안자구에서 발족한 무장 단체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직할군대였으며 지금의 북한 일대를 관할하였다.
1922년 8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대한독립군결사대(大韓獨立軍決死隊)를 비롯하여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 평북독판부(平北督辦部) 등 8개 단체 9명의 대표들이 중국 환인현 마권자에서 남만한족통일회의(南滿韓族統一會議)를 개최하여 남만주의 각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결성하였다. 통의부는 총장[金東三], 부총장[蔡相悳]아래 민사, 교섭, 군사, 법무, 재무, 학무, 실업, 권업, 교통, 참모의 10부를 두었으며 부(府) 아래에 국(局)을 두고 비서과와 사판소를 설치하여 남만주 지역에서의 민정(民政), 군정(軍政)을 통합한 독립정권의 형태를 갖추었다. 이때 양세봉 장군은 통의부 의용군 제3중대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5월경에는 평북 창성군, 초산군 판면, 의주군 고령 영산 일대의 일본 경찰서,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여 수십명의 적병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923년 8월 독립운동 방략의 대립으로 대한통의부가 의군부(義軍府)로 분할되자 통의부 소속 의용군 제 1, 2, 3, 5 중대를 주축으로 하여 환인현 마권자에서 참의부(參議府)가 조직되었다.
임시정부의 군무부에서는 참의부를 정규적인 군사단체로 인정하여 압록강 연변과 중국의 집안현(集安縣)을 중심으로 무송(撫松), 장백(張伯), 안도(安道), 통화(通化), 유화(柳花) 등의 조선인 사회의 민정과 군정을 관할하도록 하였다. 참의부는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을 통해 활발한 무장투쟁(武裝鬪爭)을 전개하였는데 이때 장군은 참의부의 소대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참의부 소속 독립군 제3중대 소대장으로 임명된 장군은 1924년 5월 16일 평북 초산군 성남동, 강계군 고산하에서 일본 경찰과 교전하여 수명의 적병을 사살하였으며, 특히 한국 식민통치의 원흉인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국경지역인 압록강을 순시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자 동월 19일 한웅권(韓雄權) 참위(參衛)가 이끄는 참의부 제2중대 제1소대와 합세하여 일제의 경비가 미치지 못한 만주 쪽 강변인 마시탄 절벽에 정예병을 배치하고 사이토 총독이 국경 순시차 압록강 경비선을 타고 지나갈 때 사격을 개시하였으나, 의외로 사거리가 너무 멀고 또 사이토가 탄 선박이 전속력으로 도망치게 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이토 자신이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 이후 소위 문화정치(文化政治)라는 미명으로 한국 식민통치에 대하여 거짓 자랑만 하고 있었으니 그에게 폭탄적 경고가 되었음은 물론 대내외에 한국 독립운동의 활성화를 더욱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제는 1925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三矢宮松]와 만주의 봉천성(奉天省) 경찰청장간에 소위 삼시협약(三矢協約)이라는 재만한인취체법(在滿韓人取締法)을 체결하게 되었고 중국 당국은 독립운동을 탄압할 의무를 갖게 되어 만주에서의 무력독립운동(武力獨立運動)에 적지않은 타격을 받게 되었다.
1924년 6월에는 참의부 소대원을 이끌고 평북 강계, 위원에 진입하여 일제의 경찰대와 교전하였으며 동년 말에는 참의부 제3중대장으로 승진하여 남만주 화전현일대에서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과 부일배(附日輩) 숙청 등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동년 7월 통의부 사령장 겸 군사위원장 신팔균(申八均) 장군이 왕청문(旺淸門) 이도구(二道溝) 밀림에서 무관학교 관병들을 훈련시키던 중 일제의 사주를 받은 마적 떼들의 기습으로 위기에 몰리자 양세봉 장군은 대원들과 함께 신속히 구출작전을 펼쳐 엄호 사격을 가하였으나 신팔균 장군 등 수십명의 독립군이 전사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일제의 간계에 의해 중국 마적단의 습격으로 신팔균 장군이 전사하는 등 큰 타격을 입게 되자 통의부는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1924년 7월 길림에서 전만통일의회주비회(全滿統一議會籌備會)를 개최하여 대동단결에 합의를 보고 동년 11월 25일 통의부를 비롯하여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 의성단(義成團)등 10여개 단체의 대표인 김동삼(金東三), 고할신(高豁信), 이진산(李震山), 이천민(李天民), 김호(金浩) 이장녕(李章寧) 등 25명이 회집하여 김동삼 선생을 의장으로 선출한 후 협의를 거듭한 끈에 정의부(正義府)를 결성하였다. 정의부는 지역의 군사 재정, 행정, 교육, 사법 등 모든 부문을 국가체제에 준하여 조직하였다.
그러나 정의부가 성립된지 1년이 못되는 1925년 9월,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에 선임된 이상룡(李相龍)은 재만(在滿) 독립운동 지도자인 오동진(吳東振), 김동삼, 윤세용(尹世茸), 이유필, 김좌진(金佐鎭), 현천묵(玄天默) 등 정의부(正義府), 참의부(參議府), 신민부(新民府)의 3부 대표 간부를 고루 임정각료로 입각시키게 됨에 따라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해야 한다는 독립운동상의 실리론이 대두되어 정의부의 내분이 표출되었다. 이에 1926년 1월 중앙회의 상임위원장 이해룡(李海龍)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비상의회격인 군민대표회를 개최하여 새로운 헌장을 제정하고 이에 따라 새로운 중앙의회와 행정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로써 정의부는 남만지방에 있어서 공화정체를 뚜렷이 한 한국인 행정부로써 기반을 굳혔다. 동년 11월 장군은 정의부 1중대장에 임명되어 일본 군인, 경찰 등을 제거하는데 앞장서서 활약하였다. 당시 중국의 국민당(國民黨)은 국공합작(國共合作)에 의하여 통일전선이 형성되고 국내에서 좌우익의 통합체인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하는 등 연합전선(聯合戰線)을 추진하는 통합운동이 일어나자 만주 지역에서도 정의부를 주축으로 하여 1928년 5월 12일부터 26일까지 15일간 중국 화전과 반석 등지에서 18개 단체의 대표 39명이 참석하여 전민족유일당조직회(全民族唯一黨組織會)를 개최하였다.
이때 화전현에서 정의부의 의용군 중대장으로 활약하고 있던 장군은 정의부 대표로 유일당 조직회의에 참석하여 민족유일당 조직동맹을 새로 결성하였으나 청년동맹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민족유일당 촉성조직동맹(당시 공산주의자들과 연계되어 있었음)의 비협조로 유일당 조직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그 후 1928년 9월 길림 근방 신안둔에서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대표가 모여 3부 통합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이듬해인 1929년 4월 정의부를 주축으로 신민부 민정위원회 측(대표 李敎源)과 참의부 측(沈龍俊)이 모여 새로운 군정부인 국민부(國民府)를 조직하였다. 이때 장군은 제1중대장으로 임명되어 활약하였으며, 국민부 산하 선민부토벌지휘부(鮮民府討伐指揮府)를 조직하여 동 지휘부의 부사령관으로서 총사령관 이웅(李雄)과 함께 일제(日帝)의 주구 기관인 선민부(鮮民府)를 토벌하는 것을 주요 임무로 하여 일제의 행정기관을 습격하고 일제의 밀정 등을 처단하는데 앞장섰다.
동년 12월 국민부 중앙회의에서 민족 유일당 조직동맹을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으로 개편하고, 동시에 그에 소속되어 있던 의용군을 독립시켜 국민부 예하조직으로서 무장 단체인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을 조직하여 종전의 정의부에 소속되어 있던 부대를 개편하고 참의부와 신민부에 있던 일부 병력을 흡수하여 통합시켰다. 양세봉 장군은 부사령관이라는 중책을 맡아 일제의 기관 습격 및 일제의 밀정 처단 등 무장투쟁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30년 8월 조선혁명당 대표자 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조선혁명당은 국민부를 지지하는 민족주의와 이를 부정하는 사회주의 계열로 분열되고 있었다. 장군을 비롯하여 현익철(玄益哲), 고이허(高而虛), 김문학(金文學), 양하산(梁河山) 등 민족주의 인사들은 국민부를 적극 지지하고 당의 위원회에서 결정한 사항의 실행을 주장한 반면, 고할신(高豁信), 김석하, 이웅(李雄), 현정경(玄正卿), 이성근 등은 이에 반대하여 국민부 및 조선혁명당을 해체하고 군대를 적위군에 편성하고 농민은 농민협회를 조직하여 유력한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31년 9월 18일 일제(日帝)가 중국의 동북지방을 침략한 만주사변(滿洲事變)이 일어나자 한국인과 중국인의 연대투쟁의 필요성이 절실해져 장군은 동년 11월 신빈현 왕청문에서 중국인 왕동헌(王動憲)이 이끄는 요녕농민자위단(遼寧農民自衛團)과 협의하여 연합군을 편성하였다. 그리고 장군은 조선혁명당 집행위원에 선출되어 국민부와 조선혁명당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1932년 1월 조선혁명당과 군의 주요 간부들은 중국 신빈현 하북에 있는 서세명(徐世鳴)의 집에서 중앙간부회의를 소집하여 만주사변 이후 당면한 현안 문제를 논의하던 중 친일 주구단체인 보민회(保民會)의 밀고를 받고 출동한 통화 일본영사 분관 경찰의 습격을 받아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 이호원(李浩源), 조선혁명군 사령관 김보안(金輔安), 부사령관 장세용(張世勇), 부관장 박치화(朴致化) 조선혁명군 경위대장 이규성, 국민부 공안부 집행위원장 이종건 등 10여 명이 피체되었고, 이후 3월 초까지 계속된 일경(日警)의 검거로 9개 현에서 간부 83명이 피체되는 등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장군을 비롯하여 양기하(梁基瑕), 고이허 등 조선혁명당의 중견 간부들은 조선혁명군 각지부대 수뇌회의를 소집하고 위기에 처한 조선혁명군과 조선혁명당의 자구책을 토의한 후 조직을 재정비하였다. 장군은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에 선임되고 조선혁명당 주석에 고이허(高而虛), 국민부 집행위원장에 김동산, 조선혁명군 참모장에 김학규(金學奎), 재정부장에 이상관, 외교부 및 임시정부 특파원에 홍심원(洪沈遠)이 각각 임명되었다.
총사령관에 임명된 양세봉 장군은 일제(日帝)와의 결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조선혁명군의 조직을 5개 사단으로 개편하여 제1사단장에 박대호(朴大豪), 제2사단장에 한검추(韓劍秋), 제3사단장에 조화선(趙化善), 제4사단장에 최윤구(崔尹構), 제5사단장에 정광배(鄭光輩)를 임명하였다. 그리고 사령부를 홍경현 왕청문에 이동하여 설치하고 정의부에서 세운 화흥중학을 속성사관학교로 개편하여 조선혁명군 관할하에 귀속시키는 동시에 강전자로 옮겼다.
속성사관학교의 교장에 양하산(梁河山), 생도대장에 윤일파, 교관에 한국신(韓國申) 등을 임명하고 장군은 명예교장으로 독립군을 양성하여 항일역량을 높히는데 진력하였다.
동시에 밖으로는 중국 의용군 총사령관인 이춘윤(李春潤)과 협의하여 한중연합군(韓中聯合軍)인 요령성민중자위군(遼寧省民衆自衛軍)을 결성하는 협정을 체결한 후 조선혁명군은 특무대와 선전대대로 편성되어 양세봉 장군이 요녕민중자위군의 특무대 사령관으로, 김광옥은 선전대대장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조선혁명군이 특무대와 선전대대로 중국 의용군과 연합작전을 펼치게 된 것은 중국 의용군에 비해 부대 규모가 작지만 뛰어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중연합군(韓中聯合軍) 결성은 각처에서 발호하고 있는 중국인 무장 단체인 대도회(大刀會)와 홍창회(紅昌會) 등의 무질서한 행동을 자제시키고 동시에 중국인의 한국인에 대한 좋지 못한 감정도 호전되었다. 또한 중국 군벌인 당취오(唐聚五), 왕육문(王育文), 손수암(孫洙巖), 장종주, 왕봉각, 서대산 등도 이에 호응하여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협정을 맺은 후 동년 10월까지 요녕민중자위군(遼寧省民衆自衛軍)과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의 연합군은 일본군 및 만주국군을 상대로 거의 2백여회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뤘다.
1932년 3월 양세봉 장군은 참모 김학규와 더불어 중대장 조화선, 최운구, 정봉길 등의 3개 중대를 인솔하고 중국 의용군 지휘관인 왕동헌, 양석봉 등의 부대와 합세하여 신빈현의 왕청문에서 무순 천금채로 진군하는 도중 신빈 남쪽에 숙영하게 되었다. 이 정보에 접한 신빈현 주둔 일본 관동군은 박격포, 기관총 등 중화기(重火器)로 무장하여 한중연합군을 총공격하였다.
그러나 지리에 익숙한 조선혁명군의 전술에 말려들어 고전을 면치 못하던 일본군은 교전 1시간만에 고지를 빼앗기고 퇴각했으며, 연합군은 적군을 30여리까지 추격하여 이날 신빈 동쪽에 있는 영릉가성(永陵街城)에 이어 상협하(尙協河)까지 점령하였다. 이 전투에서 연합군은 수많은 전리품을 노획하는 한편, 한국인과 중국인 양민족간의 갈등을 융화시키고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32년 3월 영릉가성전투(永陵街城戰鬪)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폭격기까지 동원한 맹공으로 흥경성(興京城)을 점령하였다. 양세봉 장군은 이 지역의 전략적 가치를 고려하여 이춘윤이 거느린 중국 의용군 1만여명의 병사와 연합작전을 펼쳐 조선혁명군은 동문으로 진입하고 중국 의용군은 북문으로 총공격을 개시하였는데, 기진맥진한 적군은 서남문으로 패주하고 말았다. 마침내 흥경성에서도 태극기(太極旗)와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가 펄럭이면서 전승축제(戰勝祝祭)가 무르익어 병사들의 사기가 충천하였다.
장군은 동년 5월 초에 이춘윤, 왕동헌이 이끄는 요녕민중자위군(遼寧省民衆自衛軍) 부대와 함께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타격하기 위하여 신빈현 영릉가로 진격,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후퇴하였다. 이후 10월까지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은 여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었지만 공군력의 부족으로 열세를 면하지 못했다.
1933년 1월에는 중국 군벌 당취오(唐聚五)의 군대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와해됨에 따라, 왕청문 남쪽의 수둔에서 조선혁명군 수뇌부 소집회의를 개최하여 장군을 총사령관에 재임용하고 부사령관에 박대호를 임명하는 동시에 부대를 3개 방면군으로 개편하고 조선혁명당 총령에 고이허, 국민부 부위원장은 김동산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병력 충원과 재정조달방법을 모색하고 군규를 제정하여 민족단결을 꾀하고 중국 의용군과 합세하여 유격전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동년 4월 조선혁명군의 활동 무대를 집안현(吉安縣), 임강현(臨江縣) 일대의 한.중 국경지대로 옮겨 유격전(遊擊戰)과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을 전개하였으며, 5월에는 서원준(徐元俊)을 국내유격대장의 직책으로 황해도에 밀파하여 사리원 경찰서 등을 습격하도록 하였다.
1934년 3월 홍경현 쌍립자에서 조선혁명군은 간부회의를 소집하여 조선혁명군의 항일연합범위의 확대, 항일투쟁 근거지 건립, 일본 침략자 타격 등에 대한 방침을 정하여 다른 무장투쟁세력과 연계하여 추진하기로 하였다.
동년 6월 참모장 김학규를 북경에 밀파하여 중국 관내로 철수한 당취오와 연락하고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에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홍경현 진주령에서 일본군 기차를 습격하여 수십명의 적병을 사살하는 등 동년 월까지 계속 항일전(抗日戰)을 전개하였다.
동년 7월 7일 일본군이 영릉가 석인구의 조선혁명군 사령부를 습격하였으나 조화선 부대의 지원으로 조선혁명군은 과감한 반격을 하여 일본군 40여명을 사살하고 경기관총 3정과 중포 1문, 소총 80여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7월 중순에 양세봉 부대는 중국 의용군 이춘윤 부대의 잔류 병사 5백명과 합세하여 무순현 노구대를 점령하고 1개 연대 규모의 일본군과 만 2일간의 격전을 벌였다. 그 뒤 일본군은 다시 1개 대대의 병력으로 통화현 쾌대무자에 주둔하고 있는 제1방면군 최윤용 부대를 습격하였으나 조화선 부대의 지원으로 일본군은 패퇴하고 말았다. 이때 퇴각하는 일본군을 다시 최주봉 부대가 추격하여 80여명을 사살하였다.
이무렵 일제의 밀정 박창해가 조선혁명군을 직, 간접적으로 후원하던 중국인 왕명번을 매수하여 환인현에 머물고 있던 양세봉 장군을 찾아가 중국 항일의용군과의 연합작전을 논의하자는 구실로 장군을 환인현 소황구의 골짜기로 유인하였다.
1934년 음력 8월 12일 장군은 부관인 김광욱, 김성해, 김추상과 함께 왕명번을 따라 나섰다. 일행이 대랍자구(大拉子溝)로 가던 도중 돌연 무장 괴한들의 총격을 받아 장군은 치명상을 입고 숨을 거두었다. 장군이 순국하자 동지들은 일제 측에서 모르게 산 중턱에 평장을 하였는데, 통화의 일본 영사관 경찰이 이를 탐지하고 묘를 파헤치고 시신을 꺼내 목을 잘라 가져가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하니 인륜도 도덕도 없는 천하에 둘도 없는 야만이요 그 잔악상을 어찌 말로 형용할 수 있을 것인가!
양세봉(梁世奉) 장군이 순국한 후에도 김호석(金浩錫)이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항일전(抗日戰)을 지속하였으나 조선혁명군은 급격히 세력이 위축되어 소규모 유격전으로 겨우 독립군의 명맥을 유지하였다.
무력독립운동사(武力獨立運動史)에 있어서 일찍이 명성을 떨쳤던 홍범도(洪範圖), 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실력과 명망을 가지고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웠던 양세봉(梁世奉) 장군의 구국헌신(求國獻身)과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정신은 우리 민족의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 숨쉴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