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盧武鉉) 평전(評傳)』3. 부림사건과 ‘거리의 변호사’ 노무현 ⑴

참의부2013.10.23
조회827

 

 

● 법복을 벗어던진 ‘변호사’ 노무현

 

“단조로운” 판사생활은 자유분방한 노무현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판사 업무는 매우 단조로웠다. 아침마다 서기가 책상 왼쪽 모서리에 기록을 올려 두면 나는 그것을 검토하고 메모해 오른쪽 모서리로 옮겨 놓곤 했다. 언제나 그렇게 똑같은 하루가 흘렀다.” 

 

노무현은 어머니와 형님의 간절한 소망에 따라 판사가 되었으나, 그것이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판사 초임 시절에는 그도 다른 판사들처럼 주어진 ‘판사의 길’을 걸었다. “선배 판사들을 따라다니면서 변호사들한테 밥 대접 술 대접을 받았다. 선배들이 접대를 잘 하지 않는 변호사를 두고 짠돌이라고 욕하는 것을 듣고 그런 변호사들을 골탕먹일 못된 궁리를 하기도 했다.”

 

이는 우리나라 법조계의 오래된 ‘관행’으로, 다 알면서도 아무도 말하지 않는 사실일 뿐이었다. 노무현도 초임 판사 시절에는 이 오래된 ‘관행’을 따랐다. “판결을 내릴 때 법원 직원의 청탁 때문에 영향을 받은 적도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노무현은 ‘생계형 범죄’에는 비교적 관대한 판사였다. “닭서리를 하다 잡혀 온 젊은이나 소액의 ‘촌지’를 받았다가 기소된 하급 공무원들에게는 무죄나 집행유예를 주려고 애썼다. 사연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도무지 남의 일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 판사로서 본 세상, 변호사로서 본 세상

 

노무현은 결국 일년도 채우지 못하고 판사직을 그만두었다. 대단한 결단이었다.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에 눈 딱 감고 그대로 눌러 앉아 있었으면 ‘영감님’으로 대접받으며 잘 먹고 잘 살았을 것이다.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헌법 제103조)”고 헌법에서 명시하고 있지만, 법관들에게 헌법이나 법률의 해석 그리고 양심은 ‘녹피왈자(鹿皮曰字)’로 사건이나 상황에 따라 수시로 ‘날 일(日)’자도 되고 ‘가로 왈(曰)’자도 되었다.

 

노무현이 판사로 재임하던 1977년은 유신헌법(維新憲法) 말기로 사법부는 유신체제의 ‘보조기관’ 역할에 충실하고 있었다. 탈법적 체제에 순응하여 양심을 속이면서 출세하고 호의호식하는 ‘유신법관’이 대다수였다. 노무현의 고민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판사직에 회의하는 날이 많았다. “당시에는 특별한 자각도 없었고, 변호사들이 밥이나 술을 사주면 얻어 먹으면서 어영부영 지낸 판사라는 생각이 든 데다 무엇보다 스스로 뭔가를 찾아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노무현은 “찾아서 할 수 있는 일을 해보자는 생각으로 변호사 개업을 했다.”

 

노무현은 결단을 하면서 다시 한 번 어머니로부터 ‘훈계’를 들어야 했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부터 남달리 저항의식이 남달랐던 막내아들에게 “모난 돌이 정 맞는다”며 적당히 살라고 타일러왔다. 그는 어머니의 “갈대처럼 살라”고 하신 말씀이 지독히도 싫었다고 했다. “갈대는 바람이 동쪽에서 불면 서쪽으로 눕는다. 서쪽에서 불면 동쪽으로 눕는다. 이승만 대통령에 관한 작문을 거부해 소동이 벌어졌을 때도 들었던 이 말이 지독히도 싫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출세는 하겠다는 강한 욕망을 품었다. 지긋지긋한 가난과 설움을 벗어나고 싶었다.”

 

한국처럼 수백년 동안 수구세력이 권력을 장악해온 사회에서 비판과 저항은 곧 이단으로 치부되고 퇴출당하거나 고난을 받게 된다. 특히 기득권세력에 대한 비판과 저항은 용납되지 않았다. 왕조시대에는 반역자로, 일제강점기에는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해방 이후에는 용공좌경분자로 몰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너도 나도 ‘계란으로 바위치기’식의 행위는 사라지고, ‘정 맞는 모난 돌’이 아닌 둥글둥글한 몽돌이가 되고자 하고,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흔들리는 갈대로 살아가는 것이 현명한 처세훈이 되었다.

 

사육신(死六臣)과 생육신(生六臣)이 되는 것보다 정인지(鄭麟趾)나 신숙주(申叔舟)가 되고,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나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이 되는 것보다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나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가 되고, 백범(白凡) 김구(金九)나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이 되는 것보다 이승만(李承晩)이나 정일권(丁一權)이 되는 것이 현명한 처세가 되고, 장준하(張俊河)나 김준엽(金俊燁)의 길보다 박정희(朴正熙)나 백선엽(白善燁)의 길이 돋보이고, 계훈제(桂薰梯)나 전태일(全泰壹)의 길보다 김치열(金致烈)이나 이건희(李健熙)의 길이 광영으로 여겨졌다. 이것이 나아가야 할 ‘지표’처럼 인식되었다.

 

노무현도 처음에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시에 합격하고 판사에 임용되어 “살 맛 나는” 법관 생활에 젖어들면서 “출세해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도와주겠다던 꿈은 어느새 슬며시 녹아 없어지고 말았다”고 했다. “지긋지긋한 가난과 설움을 벗어나고 싶었다. 힘이 생기면 나처럼 고생하며 사는 사람을 도와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곤 했다. 하지만 막상 판사가 되고 변호사가 되어 보니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돈 걱정을 크게 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알아보고 굽실거리는 사람도 많았다. 살맛이 났다. 출세해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도와주겠다던 어린 시절의 꿈은 어느새 슬며시 녹아 없어지고 말았다.”

 

● ‘무의식적 소망’과 의식적 목표

 

수많은 청년 엘리트들이 법관, 변호사, 의사, 국회의원을 지망하면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 편이 되겠다는 뜻을 세우지만 권력과 돈의 단맛에 빠지게 되면 얼마 안 가서 초지를 잃고 만다.

 

「승무」의 시인 조지훈(趙芝薰)은〈지조론〉에서 “권력에 영합한 선비가 구정물을 뒤집어쓰지 않은 예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우리는 일찍이 어떤 선비도 변절하여 권력에 영합해서 들어갔다가 더러운 물을 뒤집어쓰지 않고 깨끗이 물러나온 예를 역사상에서 보지 못했다. 연산주(燕山主)의 황음(荒淫)에 어떤 고관의 부인이 궁중에 불리어 갈 때 온 몸을 명주로 동여매고 들어가면서, 만일 욕을 보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고 해놓고 밀실에 들어가서는 그 황홀한 장치와 향기에 취하여 제 손으로 그 명주를 풀고 눕더라는 야담이 있다. 어떤 강간도 나중에는 화간이 된다는 이치와 같지 않은가.”

 

노무현의 심층에는 출세 욕구와 함께 기득권세력의 횡포에 대한 토우인으로서의 저항의식이라는 ‘무의식적 소망’이 갈등하기 시작했다. 심리학자 김태영은 ‘무의식적 소망’은 ‘의식적 목표’와의 관계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낳는다고 분석한다. “개인의 심리적 숙제의 핵을 이루는 ‘무의식적 소망’은 필연적으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창립하게 되는 ‘의식적 목표’와 결합되거나 뒤엉키거나 부딪힌다. 만일 무의식적 소망이 건강하게 승화되어 의식적 목표에 통합되면 개인의 심리적 에너지는 크게 증폭되어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반면에 무의식적 소망이 의식적 목표와 뒤엉켜 버리거나 정면으로 충돌하면 개인의 심리적 에너지는 이리저리 요동치면서 마음을 흔들게 만든다.”

 

노무현은 ‘무의식적 소망’에 따라 판사직을 버리고 변호사의 길로 나섰다. 변호사 역시 하기 나름으로, 판사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서 부와 권력을 누릴 수도 있는 반면에 사회정의의 사도로서 약자의 대변인이 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안병찬(安秉瓚)·허헌(許憲) 같은 조선인 변호사들이 일제의 폭압체제에서 독립운동가와 노동자·소작인들을 대변했다. 해방 후에는 김병로(金炳魯)·이병린(李丙璘) 등 소수의 민주주의 신념이 투철한 변호사들이 독재에 맞섰다. 유신독재시대에는 이돈명(李敦明)·유현석(柳炫錫)·조영래(趙英來)·박원순(朴元淳)·강신옥(姜信玉) 등이 민주화운동 인사들과 학생·노동자들의 변론을 맡아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노무현이 변호사 개업을 하고 나서 곧바로 반독재투쟁 민주화전선에 나선 것은 아니었다. 1978년 5월에 부산에서 개업, 주로 조세사건을 처리하면서 ‘잘나가는’ 세무·회계 전문 변호사가 되었다. 그러다가 1981년 부림사건 변호를 맡게 되면서 인생의 전환을 맞게 되고 1982년(평생의 지우(知友)가 된)문재인(文在寅) 변호사와 한솥밥을 먹게 되면서 판사 접대와 같은 바람직하지 못한 관행과 결별하고 즐겨하던 취미생활마저 끊으면서 도덕적·사상적으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언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운명’이 크게 갈린다.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은 무역업 등으로 국내 굴지의 부호가 되고서도 어느 날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의〈교육진흥론〉강연을 듣고 난 뒤 개인의 영달보다는 민족을 구해야겠다는 굳은 결심 아래 비밀결사단체 신민회(新民會)에 가담하고 민족교육기관 오산학교를 세웠다. 또 안악사건(安岳事件)과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는가 하면 민족대표 33인에 이름을 올리고 3·1운동을 주도하는 등 민족의 교육과 해방투쟁에 신명을 바치는 삶을 살았다.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는 평범한 어부였다.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바 있어 지닌날을 회개하고 참 삶을 살게 되었다. 그날 베드로가 예수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저 평범한 어부로 생을 마쳤을 것이고, 예수가 베드로를 만나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세계적인 종교로 널리 포교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변호사 노무현은 부림사건 변호를 계기로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에 조금씩 눈이 뜨이고 점차 시국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나, 아직은 초임 변호사로서 그 영역에서만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차츰 법조계의 나쁜 관행을 보게 되고 심층의 ‘무의식적 소망’이 꿈틀거리면서 그는 “조금씩 뿔난 변호사가 되어”갔지만 “큰 틀에서 보면(아직)그저 그런 변호사였다”고 했다.

 

˝‘교제’라는 이름으로 판사와 검사들에게 술을 사야 했다. 법정에서는 검사와 판사에게 무조건 슬슬 기어야 했다. 법원과 검찰 직원, 경찰관, 교도관들이 구속된 피의자를 변호사에게 알선해 주고 커미션을 챙겼다. 전문 브로커들은 커미션 액수를 가지고 여러 변호사를 만나 흥정을 하기도 했다. 기업의 고문변호사를 맡을 때도 법무팀 직원에게 리베이트를 주어야 했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했고, 법률가로서 자존심도 크게 상했다. 하지만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하는 선에서 적당히 타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교제’를 그만 두었다. 법정에서 피고인을 윽박지르는 검사와 맞고함을 지르며 싸우기도 했다. 판사가 소송절차를 어기면 곧바로 반박하고 싸웠다. 조금씩 별난 변호사가 되어 간 것이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보면 나는 적당히 돈을 밝히고 인생을 즐기는, 그저 그런 변호사였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60쪽~68쪽.

 

노무현은 초임 변호사 시절에 정신적으로 “수십 년 동안 고통을 준” 한 사건을 겪는다. 마침 사무실에 돈이 떨어진 때여서 수임료 60만원에 사건 하나를 맡았다. 그런데 다음날 의뢰인이 찾아와 당사자끼리 합의했으니 수임계약을 해지하겠다며 수임료를 돌려달라고 했다. 노무현이 계약서를 보여주면서 이미 접견을 했기 때문에 수임료를 돌려줄 수 없다고 하자, 실랑이 끝에 발길을 돌리던 아주머니가 말했다. “변호사는 본래 그렇게 해서 먹고 삽니까?” 화살이 되어 가슴에 꽂힌 이 한마디가 두고두고 귀에 남아 그에게 고통을 주었다. 그는 용서를 구하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 정도는 변호사 사회에서는 흔한 일이고, 어찌 보면 ‘하찮은’ 사건에 속한다. 이런 일에 두고두고 고통을 느껴야 하는 여린 심성의 노무현에게 운명의 여신은 또 다른 방향으로 손짓을 하고 있었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