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군사정권…추악한 탐욕과 반인륜적 만행:주색잡기로 찌든 독재자의 밤 ②

참의부2013.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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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행정부와 새누리당, 더 정확하게는 서남수 교육부장관과 박승춘 보훈처장, 그리고 뉴라이트교과서포럼에 의해 조직된 한국현대사학회가 찬양·칭송·미화하기 위해 왜곡·날조·은폐시키려 하는 18년 장기집권 박정희 독재권력의 어두운 진실을 적나라하게 ‘까발린’ 김재홍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교수의 최신 저서《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 저자의 직접적 경험과 치밀한 취재를 통해 친일파의 후예, 군사정변 세력이 조작한 잘못된 신화와 삐뚤어진 우상을 깨고 우리 스스로 바른 길을 찾아 나서기 위해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는다!

◆ “밤낮으로 풍악이 질펀 떡치는 소리 쿵떡” 박정희와 그들만의 향연

 

⑴ 육영수의 얼굴에 재떨이를 날린 박정희 그리고〈오적〉

 

국회에서 신민당의 조윤형 의원이 정인숙 피살사건 풍자 가요를 낭송했을 때는 청와대 안방에서도 이미 그 문제로 ‘육박전(陸朴戰)’이 한 차례 크게 벌어진 뒤였다. 육박전이란 육영수와 박정희의 부부싸움을 시중에서 그 성(姓)인 ‘육(陸)’과 ‘박(朴)’으로 표현한 조어였다.

 

정인숙이 관계한 권력자 26명의 이름이 언론에 보도되고 아들의 아버지에 관한 풍자 노래가 널리 알려지자 육영수는 참지 못하고 박정희에게 대들었다. 사실 여부를 따지면서 부부싸움은 험악한 양상으로 치달았다. 박정희는 화가 나서 재떨이를 던졌으며 이것이 육영수의 얼굴에 맞았다. 육영수의 눈자위에 푸른 멍이 든 것을 외부에서 온 여성계 방문객과 청와대 출입기자 일부가 목격했다. 이것이 바깥에 알려지면서 ‘육박전’으로 희화된 유행어가 생긴 것이다.

 

경찰이 정인숙의 집을 뒤져 발견한 수첩과 장부에는 그녀가 관계해온 것으로 믿어지는 유력인사들의 명단이 적혀 있었다. 거기엔 일시와 장소까지 함께 기록돼 있어서 빠져 나갈 수 없는 증거였다. 대통령 박정희, 국무총리 정일권,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경호실장 박종규, 그리고 장차 관과 군 고위 장성, 5대 재벌그룹 회장과 거물급 국회의원 등 주요인사 26명을 비롯해서 당시 힘깨나 쓴다는 실력자 수십 명의 이름과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바로 그 명단이 김지하의 시상을 자극했다.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군)장성, 장차관이 당시 특권층 ‘오적’이었다. 정인숙 사건은 풍자 노래뿐 아니라 사회비판을 내용으로 하는 담시와 신문 연재소설의 소재가 돼서 꼬리를 물고 파장이 퍼졌다. 그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김지하의 담시〈오적〉이다.

 

오적은 당시 권력층의 부패상을 전통적인 해학과 풍자로 날카롭게 비판한 꽤 긴 시다. 이로 인해 담시라는 독창적인 시 장르가 생긴 것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아래서 썩어 문드러져가는 사회 타락상을 적나라하게 비판한 담시〈오적〉에 바로 정인숙의 이름이 등장한다.

 

또 한 놈이 나온다.

국회의원 나온다.

곱사같이 굽은 허리, 조조같이 가는 실눈,

가래 끓는 목소리로 웅승거리며 나온다

털투성이 몸뚱이에 혁명 공약 휘휘 감고

혁명 공약 모자 쓰고 혁명 공약 배지 차고

가래를 퉤퉤, 골프채 번쩍, 깃발같이 높이 들고 대갈일성, 쭉 째진 배암 혓바닥에 구호가 와그르르

혁명이닷, 구악은 신악으로! 개조닷, 부정축재는 축재부정으로!

근대화닷, 부정선거는 선거부정으로! 중농이닷, 빈농은 이농으로!

건설이닷, 모든 집은 와우식으로! 사회 정화닷, 정인숙을, 정인숙을 철두철미 본받아랏!

궐기하랏, 궐기하랏! 한국은행권아, 막걸리야, 주먹들아, 빈대표야, 곰보표야, 째보표야

 

〈오적〉은 국회의원을 5·16쿠데타 집단과 동일시한 것과 같다. 사회정화를 정인숙 사건처럼 하라는 것은 눈엣가시같이 굴면 없애버린다는 얘기다.〈오적〉은 특히 개발독재 아래서 권력집단과 특권층을 5개 그룹으로 정하고 그들의 행태를 풍자했다.

 

이들의 한자 표기를 모두 ‘개 견(犬)’자가 들어가는 독특한 한자로 써서 인간의 탈을 쓴 짐승으로 등장시켰다. 짐승과도 같은 다섯 도적들이 서울 한복판에서 도둑질대회를 벌이는 것으로 사건을 전개시키면서 고대 의인소설처럼 이들을 차례로 풍자해 나간다. ‘오적(五賊)’이라는 제목은 을사늑약(乙巳勒約) 때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乙巳五賊)에서 따온 것이기도 하다. 첫 대목만 들여다봐도 이 시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장충동 약수동 솟을대문 제멋대로 와장창

저 솟고 싶을 대로 솟구쳐 올라 삐까번쩍

으리으리 꽃궁궐에 밤낮으로 풍악이 질펀 떡치는 소리 쿵떡

예가 바로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라 이름하는,

간뗑이 부어 남산만하고 목 질기기 동탁 배꼽 같은

천하흉포 오적의 소굴이렷다.

 

담시〈오적〉이 처음《사상계(思想界)》(1970년 5월호)에 실렸을 때만 해도 서점에서 이 잡지를 수거하고 시판하지 않는 선에서 사건이 일단락되는 듯 했다. 그런데 신민당의 기관지《민주전선》에 이를 다시 실으면서 문제가 커졌다.《민주전선》압수에 그치지 않고 시인 김지하,《사상계》발행인 부완혁, 편집장 김승균이 6월 2일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사상계》는 그때 휴간했으나 끝내 재발행되지 못하고 폐간되고 말았다.

 

담시〈오적〉에 대해 공안당국뿐 아니라 당시 재판부마저도 “북조선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유죄판결의 이유를 설명했다. 과연 그럴까? 재심청구나 ‘역사 재판’을 해봐야 알 일이다. 당시 수구적인 지식인들조차 이 시가 비뚤어져만 가는 시대상을 문학적으로 풍자한 가치 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표현자유의 영역 내에 있을 뿐 아니라 해외에 번역을 제대로 해서 널리 읽혔더라면 노벨 문학상 감이라는 얘기도 많았다. 김지하는 그 후에도 또 다른 담시〈비어(蜚語)〉등 박정희 정권의 부패상을 풍자하고 비난하는 작품을 계속 발표했다.

 

박정희 정권은 1974년 7월 그의 시가 “북괴의 선전활동에 동조한 것”이라며 반공법 위반 혐의로 사형선고를 내렸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국제적으로 김지하 구명운동이 벌어진 가운데 프랑스의 대문호 사르트르와 보봐르를 비롯한 많은 세계적인 문학인들이 석방호소문에 서명했다. 김지하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지만 박정희 정권이 자행한 가장 심각한 문화탄압이었다.

 

⑵ 정일권 “당신(정성일)은 내가 모시던 분의 아들”

 

정인숙은 이승만 정권 아래서 대구시 부시장까지 지낸 고위공무원의 딸로 어렸을 적만 해도 유복한 집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4·19민중혁명 후 퇴직당하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고 자신도 대학 입시에서 낙방, 진로가 꼬이기 시작했다. 본인의 장래 희망은 배우와 모델. 그 꿈 때문에 서울 충무로 영화관을 맴돌다가 1963년 장모 시나리오 작가를 만나 동거생활을 했다.

 

이들의 동거생활은 순탄하지 못했고 이내 관계가 나빠졌다. 그 무렵 정인숙은 한남동에서 요정을 운영하던 김모 마담을 만나게 되면서 호스티스의 길로 빠져들었다. 그녀는 타고난 미모와 매너로 고급요정의 요화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당시 정계와 재계의 거물들이 드나들던 고급요정 선운각과 김 마담의 한남동 요정이 그녀의 주 무대였다. 거기서 그녀는 재벌과 권력자들의 노리갯감으로 전전했다.

 

그녀는 죽기 전 주변 사람들에게 그래도 가장 그리운 남자는 장모라고 말하곤 했다. 권력자와 재벌의 ‘성 노예’ 노릇을 했지만 어렸을 적 자유롭게 만난 남자가 사랑의 의미에 가까웠다.

 

그러다가 정인숙은 1968년 6월 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아들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일절 입을 열지 않았으나 소문이 퍼져나갔다. 그녀와 자주 접촉하는 고위인사들의 이름이 아이의 아버지라는 얘기가 확산돼 갔다. 정인숙은 아이의 아버지를 밝히지 않은 채 “아이의 아빠가 서교동 집을 사주었다”느니 “내 말 한마디면 안 되는 것이 없다”느니 하면서 주변에 자기 과시를 했다.

 

이 때문에 아이의 아버지가 대통령 박정희를 가리키는 ‘고위층’이라는 소문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이 소문이 청와대까지 흘러 들어갔고 ‘육박전’의 이유로 보태지기도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담당자는 박종규로 돼 있었다. 박정희의 내밀한 행보에는 늘 경호실장인 박종규가 함께했기 때문이었다.

 

대통령 선거가 1년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 정인숙에게서 퍼져나가는 소문이 박정희에게 어떤 피해를 끼칠지 헤아리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정인숙은 더 이상 서울에 머물러 살 수 없었고 ‘자의반 타의반’의 해외 여행을 떠나야 했다. 고위인사들만이 가졌던 복수여권을 국무총리 정일권의 비서관 신성재가 주선했고 신원조회는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비서실장 문학림이 맡았다. 이것이 정인숙 문제를 정일권 혼자서 처리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다. 정일권은 김형욱의 비서실장에게 일을 시킬 만한 권한이 없었다. 청와대가 개입하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정인숙은 1969년 3월 도쿄에 다녀왔고, 그해 10월엔 워싱턴으로 가 그곳에서 한인회장 노진환의 안내를 받으며 3개월 정도 체류했다. 그녀의 해외 생활은 모두 박종규가 유력자들에게 연락해서 뒤를 봐주었다.

 

도쿄에서는 박종규와 친한 재일교포 정건영이 정인숙의 후견인 노릇을 했다. 정건영은 도쿄에서 일본식 이름 마치이 히사와라 불리는 유명한 야쿠자 대부로 ‘긴자의 호랑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그는 도쿄 최대의 폭력조직인 야마구치구미 두목 고다마 요시오의 막료이기도 했다. 이들은 우익 폭력집단으로 한국계 프로레슬러 역도산을 살해하는 등 도쿄 암흑가를 지배했다. 그 정건영에게 박종규가 정인숙을 돌봐주도록 부탁한 것이다.

 

정건영은 박종규의 부탁을 들어주는 대가로 외환은행 도쿄지점으로부터 수백억 엔 규모의 거액을 대출받았다가 갚지 못하고 부도를 냈다. 박정희 정권 권력자들의 사생활을 관리하기 위한 비용은 엄청나게 컸다.

 

워싱턴으로 건너간 정인숙은 그곳 한인회장 노진환의 도움을 받으며 지내다가 다시 서울행을 요구한다. 그녀는 박종규의 반대를 무릅쓰고 1970년 1월 21일에 귀국했다. 그녀가 살해된 것은 청와대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아이의 아버지가 실제로 박정희든 아니든 소문은 계속 그렇게 확산되고 있었다. 그녀 자신도 정확히 밝히지 않은 채 모호하게 고위층이라고만 하면서 으스대기까지 했다.

 

1998년 한나라당 부총재 박근혜는 한 여성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는 정성일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때 정 여인(정인숙)과 관련된 당사자를 알고 있었다. 물론 상당한 고위층이었다. 그 사람은 사표를 가지고 아버지에게 찾아와서 “제가 관계했던 여자지만 결코 죽이지는 않았다”고 울면서 사죄했다. 아버지는 그때 그 당사자를 문책하게 되면 그가 살인자로 비쳐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 같다.˝

 

한편 성인이 된 정성일은 1991년 6월 5일 서울 가정법원에 정일권을 상대로 친자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6월 27일 외삼촌의 권유로 소송을 취하하고 다음날 미국으로 출국했다. 이때 정일권 측에서 그에게 80만 달러를 주었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그는 1993년 다시 정일권을 상대로 서울 가정법원에 친자확인 소송을 냈으나 소송이 진행되는 중 정일권이 사망함으로써 친자확인은 영구미제로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정일권은 1993년 SBS-TV「주병진쇼」에 출연해 “최근 정일권 씨가 나와의 직접 통화에서 ‘당신은 나의 아들이 아니며 내가 모시던 분의 아들’이라고 밝혔다”고 주장했다. 유신독재시대에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권력을 행사했던 국무총리가 모시던 분이라면 말 그대로 대통령밖에 없다. 정성일은 자신이 박정희의 아들일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놓은 것이다. 그러나 친자확인 소송을 냈다가 취하한 그의 행태로 미루어 그 주장의 신빙성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문제다.

 

▶ 김재홍 著,『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동굴’ 속의 권력 ‘더러운 전쟁’」, (株)책으로보는세상 編, 2012년 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