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행정부와 새누리당, 더 정확하게는 서남수 교육부장관과 박승춘 보훈처장, 그리고 뉴라이트교과서포럼에 의해 조직된 한국현대사학회가 찬양·칭송·미화하기 위해 왜곡·날조·은폐시키려 하는 18년 장기집권 박정희 독재권력의 어두운 진실을 적나라하게 ‘까발린’ 김재홍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교수의 최신 저서《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 저자의 직접적 경험과 치밀한 취재를 통해 친일파의 후예, 군사정변 세력이 조작한 잘못된 신화와 삐뚤어진 우상을 깨고 우리 스스로 바른 길을 찾아 나서기 위해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는다!
◆ 박정희 정권의 연이은 국민 사유재산 강탈 사건
⑴ 박정희가 강탈한 재단, 박근혜의 돈주머니로 전락
최근 발생한《부산일보》사태는 전 한나라당 대표 박근혜 국회의원이 자신의 아버지인 박정희가 저지른 과오에 대해서 어떤 입장인가를 확연히 보여주는 예이다. 박정희는 역사 속의 인물로 객관화해야 하지만 박근혜는 현역 정치인이다.《부산일보》편집국 기자들은 그 소유주이며 경영기관인 정수재단을 사회에 환원할 것을 요구하는 특집기사를 게재하려 햇다. 그러자 정수재단이 임명한 사장(이명관 한국해양산업협회 이사장)이 그 기사를 실은 신문의 인쇄를 막았다. 신문이 정규 발행을 하지 못하고 하루 중단됐다.
《부산일보》노동조합은 “정수재단은 독재시절의 장물이기 때문에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노조가 정수재단을 ‘장물’이라고 규정하는 이유는 5·16쿠데타 세력이 남의 재산을 강탈해 그 재단을 설립했기 때문이다. 국가정보원 산하 과거사진실화해위원회는 “1962년 3월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에 지시해 부일장학회의 재산을 강제기부 받았다”고 이미 밝혔다. 진실위는 “부일장학회가 공적으로 운영돼야 하나 5·16장학회를 거쳐 정수장학회로 이어져왔으며 그 과정에서 사유재산처럼 관리해왔다”고 지적하고 “합당한 시정조치가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새누리당 제18대 대통령 선거 후보 박근혜는 1995년부터 2005년까지 그 정수재단의 이사장을 지냈다. 김지태의 차남 김영우가 2007년 6월 한나라당에 제출한 대통령 선거 후보 검증요청서에 따르면 박근혜가 재단의 이사장으로 받은 연봉은 엄청난 액수다. 1995년부터 2005년까지는 상근적으로 연간 2억 5천 350만원씩을 받아갔다.
현역 국회의원으로서 억대의 세비를 받으면서, 더구나 매일 출근해 일할 수도 없는 겸직인데도 상근직으로 전환해 거액의 연봉을 수령했다. 이것이 법적으로 죄가 되는지는 따져보아야 하겠지만 우선 여당의 대통령 선거 후보까지 된 정치인으로서 기본적인 양식과 사회윤리가 의심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사회봉사를 위해 설립된 장학재단의 이사장이 대기업의 CEO 연봉에 해당하는 거액을 받아온 것은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부산일보》사태는 또 언론개혁의 측면에서 보면 사주체제 신문사에서 편집권의 독립이 얼마나 허구가 될 수 있는지를 경험적으로 입증했다. 기자들이 아무리 중요한 기사를 쓰고 편집 간부가 그것을 지면 제작에 넣어도 경영진이 인쇄하고 배포하지 않으면 신문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래서 언론사에서 소유와 경영과 편집의 분리를 실천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부산일보》는 정수재단이 소유하고 거기서 임명한 사장이 경영하며 기자들이 편집을 각각 나눠서 맡고 있다. 그러나 그 나눠진 역할과 책임 중 어느 하나라도 비토권을 행사하면 신문은 궁극적으로 독자 손에 전달되지 못한다.
⑵ 군사 쿠데타 자금 요청 거부에 앙심 품고 부일장학회 보복 강탈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지 채 일 년도 안 된 1962년 4월 초 어느 날 새벽 5시경, 서울 청운동 김지태의 자택.
건장한 남자 둘이서 이른 새벽 시간인데도 거침없이 대문의 벨을 눌렀다. 김지태의 부인 송혜영은 남편이 돌아온다는 연락도 없었는데 새벽부터 누군가 알아보라고 일하는 아이에게 일렀다. 두 남자는 중앙정보부 부산지부 요원들이었다. 이들은 송혜영에게 함께 갈 것을 요구했다.
“조사할 것이 있으니 부산으로 같이 가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이른 새벽 시간에 갑자기 부산까지 가자니 무슨 일입니까?”
“가보시면 압니다.”
송혜영은 아무 잘못한 일도 없다는 생각에 당당하게 따라나섰다. 그들은 송혜영을 지프차량에 태우고는 여의도비행장에 가서 부산으로 연행했다. 중앙정보부 부산지부 수사관들은 송혜영에게 2년 전 남편과 함께 유럽 여행을 갔을 때 산 다이아몬드 반지와 카메라 한 대가 세금을 내지 않고 들여왔기 때문에 밀수라고 윽박질렀다. 그러나 당시 해외여행에서 돌아올 때 몸에 걸치는 장신구 하나씩은 관세 없이 휴대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송혜영을 첫날 7시간에 걸쳐 주로 해외 쇼핑에 대해 조사한 뒤 교도소로 보내 수감했다. 남편 김지태는 사업차 독일을 방문한 뒤 돌아오는 길에 도쿄에서 간경화 증세 때문에 입원해 검사를 받는 중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 아내가 중앙정보부에 잡혀갔다니 급히 귀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중도에 병원에서 퇴원하여 급거 귀국했다.
김지태는 조선견직을 창업하고 당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실크 생산업체 ‘한국생사’로 키워낸 부산 출신의 대표적 기업인이었다. 기계와 방직으로 큰돈을 번 그는 부일장학회를 설립해 부산지역의 후진 양성을 위한 육영사업에 투자했다. 부일장학회는 김지태의 투자 확대에 따라 차츰 자산을 늘려갔다. 부산MBC에 이어 한국MBC를 설립해 국영 KBS 이후 첫 민간방송을 개국했다.《부산일보》도 인수해 장학회에 기부했다.
김지태는 또 제2~3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기도 했다. 더구나 제3대 국회 때인 1954년 11월 이승만의 중임제한 철폐를 위한 사사오입 개헌 때 반대하다가 자유당에서 제명당하기도 했다. 건실한 기업인이며 소신 강한 정치인이었다. 그래서 더욱 박정희의 비위에 거슬렸는지도 모른다.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에 재산 강탈 대상자로 김지태를 지목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자세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박정희가 1950년대 말 부산에서 군수기지사령관을 지내면서 모종의 악연이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왔다. 박정희는 5·16쿠데타를 모의하면서 김지태에게 자금지원을 부탁했다. 당시《부산일보》주필이던 황용주가 박정희의 대구사범 동기생이어서 그가 추천한 데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김지태는 단호하게 거절했고 이것으로 그는 쿠데타 세력의 괘씸죄를 샀다.
아니나 다를까, 5·16쿠데타가 성공한 뒤 그들은 김지태를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했다. 속이 보이는 정치보복이었다. 김지태는 당시 거액인 5억 4천 5백여만환을 부정축재 환수금으로 내고 겨우 석방됐다. 그리고는 가능한 한 사업과 신병치료를 이유로 해외에 체류했다. 박정희 정권은 그런 김지태를 잡아들이기 위해 별 죄도 없는 부인을 인질로 구금한 것이다. 그들이 부인 송혜영을 다이아몬드 반지와 카메라 밀수 혐의로 구금했지만 나중에 물건을 돌려준 것만 보아도 부인은 김지태의 인질인 셈이었다.
김지태는 4월 중순 귀국하자마자 역시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에 구금되었다. 그들이 내건 죄목은 ‘국내재산 해외도피’였다. 구금과 공포분위기 속에서 취조는 두 달 이상이나 지속됐다. 그들은 제멋대로 부일장학회 기부동의서를 만들어와 그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
“어차피 사회적으로 육영사업을 하기 위해서 만든 공익법인인데, 운영권을 내놓으면 혁명주체들이 맡아서 잘 할 거요.”
김지태는 우선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총기·탄환으로 정권을 장악한 쿠데타 집단에게 구금당한 상황에서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거부해보았자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 또 그때만 해도 박정희 정권이 그리 오래 가리라고 여기지 않았다. 사실 김지태의 눈에 그들은 불법 조폭이나 다름없는 무법자들이었다. 정권이 바뀌면 사유재산을 기부해 설립한 공익법인을 되찾을 수 있겠거니 생각했다. 그는 부일장학회 기부동의서에 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62년 6월 20일, 김지태는 장남 영구에게 인감도장을 가져 오도록 했다. 김영구가 아버지를 만나러 간 곳은 경찰서도 검찰도 아닌 부산군수기지사령부의 법무관실.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계엄령 아래도 아니고, 군인도 아닌 민간인인데 그들은 김지태를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에 가뒀다가 아들을 만날 때는 군수기지사령부로 옮긴 것이다. 김지태는 부일장학회 기부동의서에 서명하고 그 닷새 뒤에 석방되었다.
그가 기부동의서에 원래 서명하고 도장을 찍은 날짜는 분명 그가 구금돼 있던 6월 20일이었다. 그런데 국정원 산하 진실화해위가 조사차 자료를 보니 6월 30일로 돼 있었다. 진실위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문서 감정을 의뢰했다. 한자로 타이핑된 ‘六月 二十日’의 二에 한 획을 더 그어서 ‘六月 三十日’로 위조한 것으로 드러났다. 6월 20일이면 김지태가 구금상태여서 자유의사에 의한 기부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석방된 이후에 서명한 것처럼 꾸민 것이다. 이 같은 쿠데타 집단의 사문서 위조로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비열하고 부도덕한지를 여실히 보여준 셈이다.
⑶ ‘더러운 전쟁’의 전리품, 결국 박근혜가 물려받아
박정희 독재권력의 횡포는 모두가 민주주의의 기본규범을 파괴한 것이 핵심 문제다. 야당 인사와 학생운동 지도자 등 정치적 반대자들에게 자행한 고문악행과 테러가 1977년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진 비델라 군사정권의 ‘더러운 전쟁(Guerra Sucia)’보다 훨씬 앞섰다. 체제폭력에서 세계적 원조였다. 일본 군국주의 세력도 식민지 저항세력에게나 악독하게 했지 자기네 나라 국민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박정희가 자국민을 상대로 일삼은 악행은 정복자 일제가 이른바 ‘조센징’을 상대로 자행한 악행에 못지않았다. 아니 그보다 더 심한 경우도 있었다. 아무리 정권을 찬탈했다지만 그 나라의 지도자가 된 것이 아니라 정복자 행세를 한 것이다.
박정희 독재권력의 전횡 중 비델라 정권의 더러운 전쟁에서도 볼 수 없었던 것이 사유재산 강탈이다. 민주주의의 근간은 자연권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근대 시민혁명 이후 확립된 생명권·자유권·재산권의 수호야말로 국가권력을 포함해서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3대 기본권이다. 이 중에서 반민주적 독재권력이 침해하는 것은 대부분 자유권과 생명권이다. 재산권에 대해서는 웬만한 독재권력도 대부분 건드리지 않았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은 눈에 거슬리는 사람들의 사유재산을 거침없이 강탈했다. 몰수해서 국가 헌납을 해도 안 될 일인데 강탈해서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고 그것을 후대가 상속재산처럼 운영했다. 박정희에 의한 ‘더러운 전쟁’의 전리품을 딸인 박근혜가 손에 넣은 모양새가 됐다.
모든 장학재단은 이미 사유재산이 아니며 공익재산으로서 그 운영권이 사실상 소유권에 해당한다. 그런 재단을 사회에 환원하라는 것은 그 운영을 특정 가족이 아니라 공공성을 갖게끔 구성된 이사진에 넘기라는 뜻이다. 박근혜가 재단이사장에서 물러난 뒤 후임을 맡아온 최필립 이사장은 박정희 생전부터 박근혜의 담당 비서였다. 박근혜 국회의원은 정수재단의 사회 환원 문제나 최근《부산일보》사태에 대해 기자들이 물으면 “나는 이사장에서 물러났다. 나와 관계없는 일”이라고 답변하곤 했다. 그러나 겉으로 보면 박근혜가 물러났지만 자신의 최측근에게 이사장을 맡겨 운영권은 내놓지 않은 상태로 있다.
박정희 정권이 감행한 사유재산 강탈의 특징은 단순한 재물이 아니라 언론사를 대상으로 했다는 점이다. 그들이 부산의 기업인이며 2선 국회의원인 김지태의 부일장학회 자산을 빼앗을 때 이 장학회는 한국MBC, 부산MBC,《부산일보》와 토지 10만여평을 소유하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이 중에 3개 언론사를 강제기부 받아 5·16장학회를 설립했다. 이 장학회가 나중에 정수장학회로, 다시 정수재단으로 바뀌었다. ‘정수’라는 이름은 박정희와 육영수의 이름자 하나씩 따서 붙인 것이다.
그런데 부일장학회가 소유했던 3개 언론사 외에 땅 10만여평은 국방부에 넘겨 국유재산으로 삼았다. 그러니까 그들의 사유재산 강탈은 언론사 장악이 주목적이었다. 박정희는 부일장학회의 신문과 방송 말고도 서울에서《경향신문》을 강제매각하게 하고 이것을 MBC가 사들여 결국 5·16장학회 재산으로 귀속시켰다. 정치권력이 자신을 감시해야 할 언론을 강탈해 소유해버린 것도 독재에 대한 견제력을 없애버린 중요한 원인이 됐다.
⑷ 눈엣가시 경향신문사도 강제매각시켜 5·16장학회로
박정희 군사정권이 강제매각시켜 나중에 결국 5·16장학재단으로 흡수시킨《경향신문》은 그 전까지만 해도 권력에 대해 비판 논조를 견지한 정론지였다. 4·19민중혁명 때도 가장 매서운 논조를 폈다.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따라서 발행부수가 최고 수준이었고 경영상태도 다른 일간지에 비해 양호했다.《경향신문》이 박정희에게 눈엣가시처럼 비쳐진 것은 한일국교정상화협정을 추진할 때 친일굴욕외교협상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했기 때문이다. 또 사회 저변 서민층의 피폐상을 다룬 특집 시리즈「허기진 군상」이 정권을 불편하게 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4년 6·3계엄령을 선포한 다음날 경향신문사의 이준구 사장을 구속했다. 계엄포고로 구속된 언론인 1호였다. 이어 1965년 4월엔 이 신문의 편집간부를 간첩 연루혐의로 구속하고 도쿄지사장 윤우현이 일본에서 월북한 사건을 발표했다. 5월 8일 중앙정보부는 이준구를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 혐의로 다시 구속하고 그의 처남인 편집국 간부를 다시 구속했다.
7월 3일 주거래 은행인 서울은행 등 3개 은행이 경향신문사에 사전 협의도 없이 채무액의 일시상환을 통보했다. 채무액은 당시 돈으로 4천 727만환으로 그다기 갚지 못할 정도의 거액도 아니었으나 며칠 내 일시상환이라는 요구가 함정이었다. 은행들은 채무상환을 요구한 지 불과 6일 만인 7월 9일 서울민사지법에 경향신문사의 사옥 및 부지와 윤전기에 대해 경매를 신청했다.
이준구 사장의 부인 홍연수가 경매에서 낙찰 받으려고 돈을 준비했으나 중정은 부인 등 10여명을 연행했다. 김형욱이 이끈 중정은 이들이 구금돼 있는 상태에서 단독 후보인 기아산업이 단독으로 응찰하여 낙찰을 받도록 공작했다. 이때 기아산업은 산업은행의 법정관리를 받고 있어서 신문사를 인수할 여력도 의지도 없었다.
경향신문사가 부도상황에 이른 것은 예정해 놓은 순서였고 박정희 정권은 이미 손에 넣은 MBC로 하여금《경향신문》을 사들이게 했다. 결국 이 신문사도 5·16장학재단으로 흡수됐다. 그 후《경향신문》에서 비판적 논조가 사라진 것은 물론이다. 독재권력이 사유재산을 강탈하고 또 언론을 어떻게 순치시키는지 보여준 사건이었다.
독재권력자가 아버지든 아니든 그가 벌인 ‘더러운 전쟁’의 전리품에서 이득을 취한 정치인이 집권 여당의 대통령선거 후보가 되는 나라에서(게다가 5·60대 이상 유권자 대부분이 그런 사람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신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나라에서……옮긴이 註)사는 국민들이 가련하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무엇보다 먼저 박근혜는 그 불법 ‘장물’부터 깔끔하게 처리한 후에 차후 정치적 행보를 도모할 일이다. 그러지 않고서 무슨 낯으로(아버지의 죄가 저리 큰 마당에……글쓴이 註)자신을 대통령으로 뽑아달라고 유권자들에게 호소할 것인가?
▶ 김재홍 著,『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동굴’ 속의 권력 ‘더러운 전쟁’」, (株)책으로보는세상 編, 2012년 版.
박정희 군사정권…추악한 탐욕과 반인륜적 만행:주색잡기로 찌든 독재자의 밤 ③
☞ 박근혜 행정부와 새누리당, 더 정확하게는 서남수 교육부장관과 박승춘 보훈처장, 그리고 뉴라이트교과서포럼에 의해 조직된 한국현대사학회가 찬양·칭송·미화하기 위해 왜곡·날조·은폐시키려 하는 18년 장기집권 박정희 독재권력의 어두운 진실을 적나라하게 ‘까발린’ 김재홍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교수의 최신 저서《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 저자의 직접적 경험과 치밀한 취재를 통해 친일파의 후예, 군사정변 세력이 조작한 잘못된 신화와 삐뚤어진 우상을 깨고 우리 스스로 바른 길을 찾아 나서기 위해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는다!
◆ 박정희 정권의 연이은 국민 사유재산 강탈 사건
⑴ 박정희가 강탈한 재단, 박근혜의 돈주머니로 전락
최근 발생한《부산일보》사태는 전 한나라당 대표 박근혜 국회의원이 자신의 아버지인 박정희가 저지른 과오에 대해서 어떤 입장인가를 확연히 보여주는 예이다. 박정희는 역사 속의 인물로 객관화해야 하지만 박근혜는 현역 정치인이다.《부산일보》편집국 기자들은 그 소유주이며 경영기관인 정수재단을 사회에 환원할 것을 요구하는 특집기사를 게재하려 햇다. 그러자 정수재단이 임명한 사장(이명관 한국해양산업협회 이사장)이 그 기사를 실은 신문의 인쇄를 막았다. 신문이 정규 발행을 하지 못하고 하루 중단됐다.
《부산일보》노동조합은 “정수재단은 독재시절의 장물이기 때문에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노조가 정수재단을 ‘장물’이라고 규정하는 이유는 5·16쿠데타 세력이 남의 재산을 강탈해 그 재단을 설립했기 때문이다. 국가정보원 산하 과거사진실화해위원회는 “1962년 3월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에 지시해 부일장학회의 재산을 강제기부 받았다”고 이미 밝혔다. 진실위는 “부일장학회가 공적으로 운영돼야 하나 5·16장학회를 거쳐 정수장학회로 이어져왔으며 그 과정에서 사유재산처럼 관리해왔다”고 지적하고 “합당한 시정조치가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새누리당 제18대 대통령 선거 후보 박근혜는 1995년부터 2005년까지 그 정수재단의 이사장을 지냈다. 김지태의 차남 김영우가 2007년 6월 한나라당에 제출한 대통령 선거 후보 검증요청서에 따르면 박근혜가 재단의 이사장으로 받은 연봉은 엄청난 액수다. 1995년부터 2005년까지는 상근적으로 연간 2억 5천 350만원씩을 받아갔다.
현역 국회의원으로서 억대의 세비를 받으면서, 더구나 매일 출근해 일할 수도 없는 겸직인데도 상근직으로 전환해 거액의 연봉을 수령했다. 이것이 법적으로 죄가 되는지는 따져보아야 하겠지만 우선 여당의 대통령 선거 후보까지 된 정치인으로서 기본적인 양식과 사회윤리가 의심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사회봉사를 위해 설립된 장학재단의 이사장이 대기업의 CEO 연봉에 해당하는 거액을 받아온 것은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부산일보》사태는 또 언론개혁의 측면에서 보면 사주체제 신문사에서 편집권의 독립이 얼마나 허구가 될 수 있는지를 경험적으로 입증했다. 기자들이 아무리 중요한 기사를 쓰고 편집 간부가 그것을 지면 제작에 넣어도 경영진이 인쇄하고 배포하지 않으면 신문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래서 언론사에서 소유와 경영과 편집의 분리를 실천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부산일보》는 정수재단이 소유하고 거기서 임명한 사장이 경영하며 기자들이 편집을 각각 나눠서 맡고 있다. 그러나 그 나눠진 역할과 책임 중 어느 하나라도 비토권을 행사하면 신문은 궁극적으로 독자 손에 전달되지 못한다.
⑵ 군사 쿠데타 자금 요청 거부에 앙심 품고 부일장학회 보복 강탈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지 채 일 년도 안 된 1962년 4월 초 어느 날 새벽 5시경, 서울 청운동 김지태의 자택.
건장한 남자 둘이서 이른 새벽 시간인데도 거침없이 대문의 벨을 눌렀다. 김지태의 부인 송혜영은 남편이 돌아온다는 연락도 없었는데 새벽부터 누군가 알아보라고 일하는 아이에게 일렀다. 두 남자는 중앙정보부 부산지부 요원들이었다. 이들은 송혜영에게 함께 갈 것을 요구했다.
“조사할 것이 있으니 부산으로 같이 가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이른 새벽 시간에 갑자기 부산까지 가자니 무슨 일입니까?”
“가보시면 압니다.”
송혜영은 아무 잘못한 일도 없다는 생각에 당당하게 따라나섰다. 그들은 송혜영을 지프차량에 태우고는 여의도비행장에 가서 부산으로 연행했다. 중앙정보부 부산지부 수사관들은 송혜영에게 2년 전 남편과 함께 유럽 여행을 갔을 때 산 다이아몬드 반지와 카메라 한 대가 세금을 내지 않고 들여왔기 때문에 밀수라고 윽박질렀다. 그러나 당시 해외여행에서 돌아올 때 몸에 걸치는 장신구 하나씩은 관세 없이 휴대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송혜영을 첫날 7시간에 걸쳐 주로 해외 쇼핑에 대해 조사한 뒤 교도소로 보내 수감했다. 남편 김지태는 사업차 독일을 방문한 뒤 돌아오는 길에 도쿄에서 간경화 증세 때문에 입원해 검사를 받는 중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 아내가 중앙정보부에 잡혀갔다니 급히 귀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중도에 병원에서 퇴원하여 급거 귀국했다.
김지태는 조선견직을 창업하고 당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실크 생산업체 ‘한국생사’로 키워낸 부산 출신의 대표적 기업인이었다. 기계와 방직으로 큰돈을 번 그는 부일장학회를 설립해 부산지역의 후진 양성을 위한 육영사업에 투자했다. 부일장학회는 김지태의 투자 확대에 따라 차츰 자산을 늘려갔다. 부산MBC에 이어 한국MBC를 설립해 국영 KBS 이후 첫 민간방송을 개국했다.《부산일보》도 인수해 장학회에 기부했다.
김지태는 또 제2~3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기도 했다. 더구나 제3대 국회 때인 1954년 11월 이승만의 중임제한 철폐를 위한 사사오입 개헌 때 반대하다가 자유당에서 제명당하기도 했다. 건실한 기업인이며 소신 강한 정치인이었다. 그래서 더욱 박정희의 비위에 거슬렸는지도 모른다.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에 재산 강탈 대상자로 김지태를 지목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자세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박정희가 1950년대 말 부산에서 군수기지사령관을 지내면서 모종의 악연이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왔다. 박정희는 5·16쿠데타를 모의하면서 김지태에게 자금지원을 부탁했다. 당시《부산일보》주필이던 황용주가 박정희의 대구사범 동기생이어서 그가 추천한 데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김지태는 단호하게 거절했고 이것으로 그는 쿠데타 세력의 괘씸죄를 샀다.
아니나 다를까, 5·16쿠데타가 성공한 뒤 그들은 김지태를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했다. 속이 보이는 정치보복이었다. 김지태는 당시 거액인 5억 4천 5백여만환을 부정축재 환수금으로 내고 겨우 석방됐다. 그리고는 가능한 한 사업과 신병치료를 이유로 해외에 체류했다. 박정희 정권은 그런 김지태를 잡아들이기 위해 별 죄도 없는 부인을 인질로 구금한 것이다. 그들이 부인 송혜영을 다이아몬드 반지와 카메라 밀수 혐의로 구금했지만 나중에 물건을 돌려준 것만 보아도 부인은 김지태의 인질인 셈이었다.
김지태는 4월 중순 귀국하자마자 역시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에 구금되었다. 그들이 내건 죄목은 ‘국내재산 해외도피’였다. 구금과 공포분위기 속에서 취조는 두 달 이상이나 지속됐다. 그들은 제멋대로 부일장학회 기부동의서를 만들어와 그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
“어차피 사회적으로 육영사업을 하기 위해서 만든 공익법인인데, 운영권을 내놓으면 혁명주체들이 맡아서 잘 할 거요.”
김지태는 우선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총기·탄환으로 정권을 장악한 쿠데타 집단에게 구금당한 상황에서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거부해보았자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 또 그때만 해도 박정희 정권이 그리 오래 가리라고 여기지 않았다. 사실 김지태의 눈에 그들은 불법 조폭이나 다름없는 무법자들이었다. 정권이 바뀌면 사유재산을 기부해 설립한 공익법인을 되찾을 수 있겠거니 생각했다. 그는 부일장학회 기부동의서에 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62년 6월 20일, 김지태는 장남 영구에게 인감도장을 가져 오도록 했다. 김영구가 아버지를 만나러 간 곳은 경찰서도 검찰도 아닌 부산군수기지사령부의 법무관실.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계엄령 아래도 아니고, 군인도 아닌 민간인인데 그들은 김지태를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에 가뒀다가 아들을 만날 때는 군수기지사령부로 옮긴 것이다. 김지태는 부일장학회 기부동의서에 서명하고 그 닷새 뒤에 석방되었다.
그가 기부동의서에 원래 서명하고 도장을 찍은 날짜는 분명 그가 구금돼 있던 6월 20일이었다. 그런데 국정원 산하 진실화해위가 조사차 자료를 보니 6월 30일로 돼 있었다. 진실위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문서 감정을 의뢰했다. 한자로 타이핑된 ‘六月 二十日’의 二에 한 획을 더 그어서 ‘六月 三十日’로 위조한 것으로 드러났다. 6월 20일이면 김지태가 구금상태여서 자유의사에 의한 기부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석방된 이후에 서명한 것처럼 꾸민 것이다. 이 같은 쿠데타 집단의 사문서 위조로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비열하고 부도덕한지를 여실히 보여준 셈이다.
⑶ ‘더러운 전쟁’의 전리품, 결국 박근혜가 물려받아
박정희 독재권력의 횡포는 모두가 민주주의의 기본규범을 파괴한 것이 핵심 문제다. 야당 인사와 학생운동 지도자 등 정치적 반대자들에게 자행한 고문악행과 테러가 1977년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진 비델라 군사정권의 ‘더러운 전쟁(Guerra Sucia)’보다 훨씬 앞섰다. 체제폭력에서 세계적 원조였다. 일본 군국주의 세력도 식민지 저항세력에게나 악독하게 했지 자기네 나라 국민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박정희가 자국민을 상대로 일삼은 악행은 정복자 일제가 이른바 ‘조센징’을 상대로 자행한 악행에 못지않았다. 아니 그보다 더 심한 경우도 있었다. 아무리 정권을 찬탈했다지만 그 나라의 지도자가 된 것이 아니라 정복자 행세를 한 것이다.
박정희 독재권력의 전횡 중 비델라 정권의 더러운 전쟁에서도 볼 수 없었던 것이 사유재산 강탈이다. 민주주의의 근간은 자연권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근대 시민혁명 이후 확립된 생명권·자유권·재산권의 수호야말로 국가권력을 포함해서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3대 기본권이다. 이 중에서 반민주적 독재권력이 침해하는 것은 대부분 자유권과 생명권이다. 재산권에 대해서는 웬만한 독재권력도 대부분 건드리지 않았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은 눈에 거슬리는 사람들의 사유재산을 거침없이 강탈했다. 몰수해서 국가 헌납을 해도 안 될 일인데 강탈해서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고 그것을 후대가 상속재산처럼 운영했다. 박정희에 의한 ‘더러운 전쟁’의 전리품을 딸인 박근혜가 손에 넣은 모양새가 됐다.
모든 장학재단은 이미 사유재산이 아니며 공익재산으로서 그 운영권이 사실상 소유권에 해당한다. 그런 재단을 사회에 환원하라는 것은 그 운영을 특정 가족이 아니라 공공성을 갖게끔 구성된 이사진에 넘기라는 뜻이다. 박근혜가 재단이사장에서 물러난 뒤 후임을 맡아온 최필립 이사장은 박정희 생전부터 박근혜의 담당 비서였다. 박근혜 국회의원은 정수재단의 사회 환원 문제나 최근《부산일보》사태에 대해 기자들이 물으면 “나는 이사장에서 물러났다. 나와 관계없는 일”이라고 답변하곤 했다. 그러나 겉으로 보면 박근혜가 물러났지만 자신의 최측근에게 이사장을 맡겨 운영권은 내놓지 않은 상태로 있다.
박정희 정권이 감행한 사유재산 강탈의 특징은 단순한 재물이 아니라 언론사를 대상으로 했다는 점이다. 그들이 부산의 기업인이며 2선 국회의원인 김지태의 부일장학회 자산을 빼앗을 때 이 장학회는 한국MBC, 부산MBC,《부산일보》와 토지 10만여평을 소유하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이 중에 3개 언론사를 강제기부 받아 5·16장학회를 설립했다. 이 장학회가 나중에 정수장학회로, 다시 정수재단으로 바뀌었다. ‘정수’라는 이름은 박정희와 육영수의 이름자 하나씩 따서 붙인 것이다.
그런데 부일장학회가 소유했던 3개 언론사 외에 땅 10만여평은 국방부에 넘겨 국유재산으로 삼았다. 그러니까 그들의 사유재산 강탈은 언론사 장악이 주목적이었다. 박정희는 부일장학회의 신문과 방송 말고도 서울에서《경향신문》을 강제매각하게 하고 이것을 MBC가 사들여 결국 5·16장학회 재산으로 귀속시켰다. 정치권력이 자신을 감시해야 할 언론을 강탈해 소유해버린 것도 독재에 대한 견제력을 없애버린 중요한 원인이 됐다.
⑷ 눈엣가시 경향신문사도 강제매각시켜 5·16장학회로
박정희 군사정권이 강제매각시켜 나중에 결국 5·16장학재단으로 흡수시킨《경향신문》은 그 전까지만 해도 권력에 대해 비판 논조를 견지한 정론지였다. 4·19민중혁명 때도 가장 매서운 논조를 폈다.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따라서 발행부수가 최고 수준이었고 경영상태도 다른 일간지에 비해 양호했다.《경향신문》이 박정희에게 눈엣가시처럼 비쳐진 것은 한일국교정상화협정을 추진할 때 친일굴욕외교협상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했기 때문이다. 또 사회 저변 서민층의 피폐상을 다룬 특집 시리즈「허기진 군상」이 정권을 불편하게 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4년 6·3계엄령을 선포한 다음날 경향신문사의 이준구 사장을 구속했다. 계엄포고로 구속된 언론인 1호였다. 이어 1965년 4월엔 이 신문의 편집간부를 간첩 연루혐의로 구속하고 도쿄지사장 윤우현이 일본에서 월북한 사건을 발표했다. 5월 8일 중앙정보부는 이준구를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 혐의로 다시 구속하고 그의 처남인 편집국 간부를 다시 구속했다.
7월 3일 주거래 은행인 서울은행 등 3개 은행이 경향신문사에 사전 협의도 없이 채무액의 일시상환을 통보했다. 채무액은 당시 돈으로 4천 727만환으로 그다기 갚지 못할 정도의 거액도 아니었으나 며칠 내 일시상환이라는 요구가 함정이었다. 은행들은 채무상환을 요구한 지 불과 6일 만인 7월 9일 서울민사지법에 경향신문사의 사옥 및 부지와 윤전기에 대해 경매를 신청했다.
이준구 사장의 부인 홍연수가 경매에서 낙찰 받으려고 돈을 준비했으나 중정은 부인 등 10여명을 연행했다. 김형욱이 이끈 중정은 이들이 구금돼 있는 상태에서 단독 후보인 기아산업이 단독으로 응찰하여 낙찰을 받도록 공작했다. 이때 기아산업은 산업은행의 법정관리를 받고 있어서 신문사를 인수할 여력도 의지도 없었다.
경향신문사가 부도상황에 이른 것은 예정해 놓은 순서였고 박정희 정권은 이미 손에 넣은 MBC로 하여금《경향신문》을 사들이게 했다. 결국 이 신문사도 5·16장학재단으로 흡수됐다. 그 후《경향신문》에서 비판적 논조가 사라진 것은 물론이다. 독재권력이 사유재산을 강탈하고 또 언론을 어떻게 순치시키는지 보여준 사건이었다.
독재권력자가 아버지든 아니든 그가 벌인 ‘더러운 전쟁’의 전리품에서 이득을 취한 정치인이 집권 여당의 대통령선거 후보가 되는 나라에서(게다가 5·60대 이상 유권자 대부분이 그런 사람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신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나라에서……옮긴이 註)사는 국민들이 가련하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무엇보다 먼저 박근혜는 그 불법 ‘장물’부터 깔끔하게 처리한 후에 차후 정치적 행보를 도모할 일이다. 그러지 않고서 무슨 낯으로(아버지의 죄가 저리 큰 마당에……글쓴이 註)자신을 대통령으로 뽑아달라고 유권자들에게 호소할 것인가?
▶ 김재홍 著,『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동굴’ 속의 권력 ‘더러운 전쟁’」, (株)책으로보는세상 編, 2012년 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