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만의 시대와 ‘거리의 변호사’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주역의 한 사람인 김은숙은 뒷날〈감옥 독방, 먼지와 두꺼비와 사람〉이란 글에서 당시 그 사건 변호인단의 수난은 “돌팔매질을 당하는” 지경이었다고 술회했다. “법정에서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그리고 훗날까지 우리와 함께 고투를 해주신 변호인단의 변호사님들의 수고와 노고는 또 어찌 말을 다 하겠는가? 대구의 고등법원 앞에서는 재판 끝나고 법정을 나서시던 변호사님들께서 돌팔매질을 당하셨다는 말을 전해듣고, 참으로 가슴이 아팠다. 최기식 신부님 역시 우리를 보호해주신 대가로 감방에서 수인으로 지내셨고, 함세웅 신부님을 비롯한 여러분께서도 많이 애를 태우셨다.”
이처럼 노무현은 돌팔매를 맞으면서, 수구언론으로부터 심한 모욕을 당하면서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피의자들을 끝까지 변론했다. 그는 정법회에 이어 민변에 참여하면서 독재정권시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양심적인 법조인들과 만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종교계와 민주화진영의 인사들과도 연대하게 되었다. 새로운 ‘재야인사 노무현’이 탄생한 것이다.
불의한 집단과 싸우기 위해서는 저들에게 흠 잡히는 일이 없어야 한다. 수구세력은 남의 황소를 잡아먹어도 그냥 묻히지만, 민주화인사들은 계란 한 개를 얻어먹어도 저들의 도마 위에 오른다. 노무현은 우선 신변정리부터 해나갔다. “무료 변론은 돈 좀 덜 벌면 그만이었지만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언제 어디로 끌려가 무슨 죄목을 뒤집어쓰고 쇠고랑을 찰지 모르는 위험한 일이었다. 조그만 농장이나 별장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자식의 외국 유학이라도 보내서, 공부를 다 못한 우리 부부의 한을 풀어보자고 했던 꿈을 접어야 했다. 이렇게 양심과 욕망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나는 차근차근 주변을 정리했다. 요정과 룸살롱 같은 고급 술집에는 발길을 끊었다. 일본까지 가서 교육을 받을 정도로 열성이었던 요트 타기는 그만 두었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80쪽.
‘요트’ 문제는 노무현이 반독재전선의 열혈 변호사가 되어 정치운동에 나서자 조선일보사가 발행하는《주간조선》이 공격의 타깃으로 삼은 메뉴다. 노무현은《주간조선》의 허위보도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여 결국 승소했지만 이를 기화로《주간조선》의 본격적인 ‘노무현 죽이기’가 시작되었다.
˝내가 한동안 빠져 있었던 2인승 요트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크게 돈이 드는 스포츠가 아니었다. 집이 광안리 해수욕장 근처여서 부대비용도 별로 들지 않았다. 돈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운동인 것도 아니었다. 거센 파도와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모래알 씹히는 불어터진 라면을 먹어가면서 하는, 거친 남자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드는 것은 곧 돈이 많이 드는 것이나 한가지여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승용차를 두고 버스로 출근하면서 고급 일식집 대신 시장통 국밥을 먹었다. 돈을 아끼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민중의 고통에 동참하는 삶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 사무실 사람들과 부산의 동지들은 다들 그렇게 살았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80쪽~82쪽.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기득권을 포기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희생뿐 아니라 가족과 주변의 희생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무현은 그 모든 것을 감내하기로 결심하고 마침내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하게 되었다.
억울하게 당하는 이들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연민은 노무현의 무의식에 깊이 자리잡고 있던 핵심적인 욕구였다. 바르고 정직했기에 평생을 당하며 살았던 아버지와 큰형에 대한 동정심과 그들을 돕고 싶다는 노무현의 강렬한 욕구는 진보운동을 접하면서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민중에 대한 연대의식과 그들을 위해 신명을 바치겠다는 사명감으로 승화되었다. 노무현은 진보사상을 학습했고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을 변호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했다. 비록 부림사건이 하나의 계기가 되기는 했지만 노무현은 태생적으로 진보운동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세상을 뜨겁게 사랑하는 그가 어찌 민중의 고통을 외면할 수 있었겠는가?
● 독재정권의 철벽을 깨뜨리기 위해 던진 달걀 ‘노변’
전두환 정권의 폭정이 갈수록 도를 더해가는 상황에서 노무현은 법정의 변론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재야인사·학생·노동자들이 처절하게 몸을 던져 싸우고 있는 터에 안전지대에서 ‘언변’이나 하고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행동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대였다. “시민 단체에 참여하고 재정적으로 돕고 사건이 터지면 변론해주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실제 행동을 하고 싶었다. 나중에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이 되어 직접 행동에 나섰다. 경찰이 집회를 원천봉쇄하면 몸으로 부딪히면서 항의했고 길바닥에 드러누운 적도 있다. 그런 와중에도 변론할 사건이 엄청나게 밀려들었고, 나는 어느 것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처럼 노무현이 ‘거리의 변호사’가 되면서부터 은행과 기업의 고문변호사 일은 대부분 끊어졌다. 심지어 계약 기간이 남아 있는 일도 권력 기관의 눈치를 보는 이들이 일방적으로 해약을 알려왔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예상하지 못한 바도 아니었다. 이처럼 ‘돈 되는 일’이 죄 끊어진 대신 억울한 시민들의 민·형사 사건 의뢰는 더욱 밀려들엇다. ‘조세 전문 변호사’란 소문이 퍼지면서 조세 관련 송사와 노동자들의 산업재해 사건도 많이 맡게 되었다. 이렇게 번 돈은 민주화운동에 쓰였다. 돈 잘 버는 변호사 시절에는 느끼지 못했던 희열과 보람을 느꼈다.
세상사가 그렇듯이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있게 마련이다. 노무현은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송기인 신부를 비롯하여 부산지역의 명망 높은 종교계 인사들과 교우하게 되고, 이들의 지원과 사랑을 받았다. 노무현 부부는 송 신부의 인도로 성당에 가서 세례를 받았으나 신심이 돈독한 편은 아니었다. 그는 “교리 공부도 게을리 한 데다 성당에 잘 나가지도 않는 엉터리 신자가 되고 말았다. 오랫동안 고민해보았지만 내게는 종교적 심성이 없는 것 같았다”고 토로했다. 이 시기 노무현을 천주교로 이끌고 그와 민주화운동을 함께했으며, 참여정부에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한 송기인 신부는 민주화운동 당시 ‘노변’을 “(독재정권의)철벽을 깨뜨리자 던진 달걀”이라고 했다.
˝12·12 반란이 역사를 거꾸로 돌렸다. 철갑으로 막 눈뜨는 봄기운을 덮어버렸다. 그 철벽을 깨뜨리고자 던진 달걀이 노변이었다. 우리는 노무현 변호사를 늘 ‘노변’이라고 불렀다. 1982년 3월, 나는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변호인단과 함께 노변을 처음 만났다. 월요일마다 재판이 열렸는데 재판이 끝나고 저녁 식사를 함께하며 친해졌다. 1985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부산본부’시절을 거치는 동안 노변은 늘 뜻을 함께했던 동지였다. 당시 부산대, 동아대 교수들은 학생들이 시국사건으로 잡혀가면 가장 먼저 내게 연락을 해왔다. 그때마다 김광일ㆍ이흥록ㆍ문재인ㆍ노무현 등 변호사 가운데 한 명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럴 때마다 노변은 늘 간단히 “알겠습니다”하며 거절 한번 하지 않았다. 6월 항쟁이 한창일 때는 최루탄가스 뿌연 아스팔트 바닥에서 함께 어깨를 걷고 앉는 일도 잦았다. 어느 시점까지 인생을 즐기는, 돈 잘 버는 변호사였던 그는 민주화운동, 인권운동에 뛰어드는 순간 그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노무현이 거리의 변호사로 ‘전신’하는 데는 문재인의 존재가 크게 작용했다. 나이는 다소 아래지만 생각이나 행동거지는 존경할 만한 사람이었다. 노무현과 문재인의 관계는 “벗할 수 없다면 참다운 스승이 아니고 스승으로 삼을 수 없다면 좋은 벗이 될 수 없다”는 중국 명말 청초의 사상가 이탁오(李卓吾)의 말 그대로였다. 노무현은 “(문재인에게)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기 싫어 그간의 나쁜 관행을 정리하게 되었다”고 했다. “문재인 변호사와 손을 잡았다. 원래 모르는 사이였지만 1982년 만나자마자 바로 의기투합했다. 그는 유신반대 시위로 구속되어 경찰서 유치장에서 사법고시 합격소식을 들은 사람이다. 그래서 사법연수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서도 판사 임용이 되지 않았다. 정직하고 유능하고 훌륭한 사람이다. 나는 그 당시 세속적 기준으로 잘나가는 변호사였다. 사건도 많았고 승소율도 높았으며 돈도 꽤 잘 벌었다. 법조계의 나쁜 관행과도 적당하게 타협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재인 변호사와 동업을 시작하면서 그런 것들을 다 정리하기로 약속했다. 그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인권변호사로서 독재정권에 약점을 잡히지 않으려면 나부터 깨끗해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문재인은 당시 “(조세전문 변호사)노무현의 승소율은 90퍼센트 이상이었는데, 소장(訴狀)을 직접 작성하는 성실성과 책임감 때문이었다”고 했다. “1980년대 초반은 변호사 업계에 동업자제도 자체가 거의 없었다. ‘노변’과 나는 실제 변호사 업무가 많아서, 필요에 의해 동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와 나는 전혀 인연이 없었다. 나는 서울에서 학생운동을 한 경희대 출신이다. 판사 임관이 될 줄 알았던 나는 학생운동 전력 때문에 임용이 거부됐고, ‘노변’의 경우 동업하기로 했던 사람이 판사로 임용돼 우연히 동업자 관계로 만난 것이다. 당시 ‘노변’은 부산상고 출신인 때문인지 세무 회계쪽으로 ‘잘 나갔다.’ 실제로 ‘노변’은 <부산일보> 사장을 지낸 김지태 씨가 대표로 있던 (주)삼화나, 조선 견적 등 승률 90퍼센트 이상이었다. 이런 높은 승소율은 당시 사무장이 소송서류의 대부분을 작성하는 관례를 깨고, 자기 이름으로 제출되는 소장은 자신이 직접 작성하는 성실성과 일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