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60억 킬로미터 上

작두2013.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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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야간자율학습 시간이었다. 재욱은 오늘도 세연고등학교에 있는 야간자율학습실, 줄임말로 야자실에 남아 책을 펴고 공부를 했다. 검은 뿔테 안경 속에 비춰진 그의 두 눈은 어느새 힘없이 꿈벅꿈벅 깜박이기를 반복했다. 고개는 서서히 숙여졌다. 눈꺼풀에 힘이 풀려 그만 눈은 감겨버렸다.

“…….”

그는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느낌이 어찌나 달콤한지 그는 어둠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곧 학교 종이 울렸다. 재욱은 깜짝 놀라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펼쳐진 영단어 책 위엔 침이 흥건히 묻어 있었다. 그는 스읍, 하고 손으로 입가에 묻은 침을 닦았다. 그리고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책에 묻은 침도 닦아냈다.
시계를 보았다. 시침이 9를 가리키고 있었다. 단숨에 30분 동안 존 것 같았다.

“이런…….”

그는 한탄했다. 얼른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에 있는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재욱은 세면대로 가서 수돗물로 세수를 한 뒤 거울을 보았다. 거울에는 단 한 명의 수험생의 모습이 비쳐지고 있었다. 미스터리나 추리 같은 걸 좋아하는 이재욱의 모습이 아닌, 평범한 수험생으로서의 이재욱의 모습.

‘수능 잘 봐야 하는데……, 맨날 졸면 어떡해.’

재욱은 수능 날짜가 다가올수록 마음을 졸였다.
그는 1차 수시 원서를 하나도 집어넣지 않았다. 아예 수시를 넣지 않겠다는 발언도 했다. 자신이 갈 수 있는 대학이 이토록이나 없나, 하는 울분 때문이었다. 그는 접수 마감이 된 대학들을 보면서 왜 그때 기분에 따라 행동했었는지를 요즘에 후회하고 있었다. 수능 성적 위주로 점수를 반영하는 정시로는 가망성이 안보이기 때문이었다.

“아휴.”

이제 곧 대학 입시란 첫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는 사실이 계속해서 그를 압박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서 휴지로 얼굴을 닦았다. 그리고 화장실을 나서서 다시 야자실로 들어갔다.
야자실은 1학년, 2학년, 3학년 공간이 각각 따로따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 안에는 양옆으로 칸막이가 쳐져 있는 책상들이 있었다.
재욱은 3학년 공간에 들어갔다. 쉬는 시간에도 책을 읽고 있는 학생들과 엎드려 자고 있는 학생들. 재욱은 그들을 번갈아 보다가 눈에 불을 켜고 공부 중이던 노소하란 이름의 여학생을 보았다. 그녀는 검은 긴 머리를 뒤로 묶은 채 열심히 책을 읽고 필기를 하고 있었다. 저 아이는 이번에 안암에 있는 명문대인 K대를 노리고 있다고 했나……. 재욱은 놀 땐 놀고 공부할 땐 공부할 줄 아는 소하를 부러워했다.
그는 다시 자기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에휴.”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고서 그는 침이 묻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영단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오후 10시. 학교 종이 울리고 학생들은 모두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재욱은 영단어 책을 넣은 검정색 가방을 양 어깨에 메고 야자실을 나섰다.
학교 중앙현관에 도착한 그는 실내화를 검정색 운동화로 갈아 신었다. 그리고 실내화 가방을 책가방에 넣은 뒤 학교를 나섰다.

“스읍, 하아.”

재욱은 크게 심호흡을 한 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운 밤하늘은 언제나 재욱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야간자율학습을 끝낸 뒤 마시는 밤공기 또한 그는 좋아했다.
그는 가로등이 비추는 학교 대문 앞을 지나서 집으로 걸어갔다.



재욱은 등하굣길이면 항상 어떤 육교를 건너야만 했다. 집이 반대편 길에 있는데 횡단보도를 건너려면 더 먼 거리를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육교는 제법 높았는데, 양옆 가장자리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데 별로 힘이 들지 않아서인지 재욱은 되도록이면 엘리베이터보다는 계단을 이용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그는 계단을 올라 육교를 건넜다.

“……?”

세연고등학교의 교복을 입은 한 남학생이 육교 난간에 두 팔을 올린 채 하늘을 올려보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그의 얼굴엔 깊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밤하늘이 어두워서? 아니, 그렇다고 하기보다는 뭔가가 심히 어두웠다. 그래서일까. 재욱은 그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또 있어.’

재욱은 속으로 말했다.
얼굴에 어둠이 깔려 있는 저 학생은 언제부턴가 항상 저 자리에 있었다. 어느 때부터였지? 확실치 않지만, 대략 일주일 전부터였으리라. 아침에 등교할 때도, 이렇게 밤에 하교할 때도 재욱은 늘 저 학생을 보았다. 도대체 저 학생의 정체는 뭘까? 관심이 갔지만 평소에 낯가림이 심한 재욱은 무시하고 얼른 집으로 향했다.



일렬로 늘어선 5층짜리 낡은 아파트 단지의 311호. 재욱은 도어락에 걸린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방으로 걸어갔다. 큰방에서 “재욱이니?”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자 재욱은 간단하게 “어.”하고 대답하고서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가방을 책상 옆에 내려두고 편안하게 검정 티셔츠, 츄리닝 바지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샤워실에서 세수 정도만 한 뒤, 방으로 돌아와 습관적으로 문을 잠그고 얼른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아까 야간자율학습 시간 동안 공부했던 영단어 책이었다. 그는 책상에 앉아 영단어 책을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읽기만으로는 안 될 것 같아 연습장을 꺼내 영단어를 쓰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새벽 2시가 되었다. 재욱은 힘없이 눈꺼풀을 깜박였다. 너무 졸렸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공부가 안 될 것 같았다. 결국 그는 영단어 책을 덮어놓고 책상에서 일어나 전등을 끄고 파란색 이불이 있는 침대에 가서 누웠다. 그리고 안경을 벗어서 침대 옆에 있는 작은 서랍장 위에 올려두었다.
베개에 머리를 베고 눈을 감자 졸음이 스멀스멀 몰려왔다. 재욱은 금방 꿈속에 빠져들었다.



화요일. 아침 7시가 되자 알람이 시끄럽게 울렸다. 재욱은 몸을 뒤척이면서 잠시 동안 그 거슬리는 소리를 듣다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침대에서 내려와 책상 위에 놓인 알람을 툭 껐다.
굉장히 피곤했다. 잠을 제대로 못 잔 것 같았다. 재욱은 가만히 서서 눈을 감고 있다가 다시 살며시 눈을 뜨고는 퀭한 얼굴로 책상을 내려다보았다.

“……?”

영단어 책이 펼쳐져 있었다. 그걸 보자 재욱은 어떤 위화감을 느꼈다. 분명히 책을 덮어두고 잤던 것 같은데……. 재욱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그냥 책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펼쳐져 있다면 펼쳐놓고 잔거겠지, 하고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아침 7시 44분. 재욱은 여느 때처럼 학교에 가기 위해 육교를 건넜다. 이번에도 그 학생이 있었다. 그 학생은 난간 위에 올린 팔짱에 얼굴을 파묻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도대체 왜 저러고 있는 거지? 재욱은 의아해했지만 무시하고 학교로 걸어갔다.


밤 10시 16분. 야간자율학습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재욱은 또다시 그 학생을 보게 되었다. 그 학생은 어제처럼 다리 난간에 두 팔을 얹혀 놓은 채 어둠이 깔린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늘은 말을 걸어볼까? 재욱의 속에서 그런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왠지 무서웠다. 말을 걸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재욱의 마음속에서 자꾸만 일었다. 결국 재욱은 오늘도 그 학생을 무시하고 집으로 향했다.


재욱은 하얀 티셔츠, 츄리닝 바지 차림으로 책상에 앉아 공부를 했다. 그는 언어 문제를 풀기 위해 머리를 싸맸다. 비문학에 나오는 과학 지문은 언제나 헷갈렸다. 그는 지문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아 답답해하다가 결국엔 책을 덮고 책상에서 일어나 침대에 누워버렸다. 그리고 단번에 이불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방을 밝히는 불을 끄자 잠이 스멀스멀 몰려왔다. 침대의 유혹은 언제나 달콤하고 치명적이라고 그는 매번 느꼈다.


수요일. 아침 7시가 되자 알람이 시끄럽게 울렸다. 재욱은 오늘도 몸을 뒤척이다가 침대에서 내려와 눈을 반쯤 뜬 채 책상 위에 놓인 알람을 껐다. 곧 그는 침대에 앉아 잠시 가만히 멍을 때렸다.
몸이 너무 무거웠다. 더 자고 싶었다. 재욱은 힘없는 목소리로 “아, 졸려…….”하고 독백하더니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달콤한 느낌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공부하기 싫었다. 학교에 가는 것도 싫었다. 그저 하루 종일 잠만 자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그는 다시 눈을 뜨고 두 손으로 자신의 양쪽 뺨을 두 번 짝짝 때렸다. 그리고 힘을 내서 침대에서 일어나 두 팔을 위로 올려 기지개를 폈다. 그때, 또다시 그는 위화감을 느꼈다. 그는 위화감이 느껴진 책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언어 문제집이 펼쳐져 있었다. 어제 풀다가 그냥 잠들어버렸나?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다.
재욱은 오늘도 등굣길에 올라 육교에서 그 학생을 보았다. 그 학생은 어제처럼 난간 위에 올린 팔짱에 얼굴을 파묻은 채 서 있었다. 아침에도 밤 때처럼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면 얼굴이 보일 지도 모르는데……. 재욱은 아쉬워했다.


오늘 학교에서 9월 모의고사 성적표가 나왔다. 그 성적표를 본 순간 재욱의 마음이 우울해졌다. 이 성적으로 명문대에 진학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대학 입시를 앞둔 시점에서 겨우 이 정도의 점수나 받다니, 재욱은 스스로를 매우 한심하게 여겼다.
오늘도 재욱은 어김없이 야간자율학습을 했다. 오늘따라 우울해진 기분이 공부하는 걸 더욱 강하게 방해했다. 9월 모의고사 성적 때문이었다.

‘나 정말 더럽게 공부 못한다……. 한심한 놈, 한심한 놈…….’

수학 문제를 푸는 내내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야간자율학습 시간 동안 본래 수학 30문제를 풀기로 계획한 상태에서 7문제밖에 풀지 못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오후 10시 20분. 재욱은 고개를 아래로 숙인 채 힘없는 발걸음으로 천천히 하교하고 있었다. 이런 기분 상태로 집에 가서 수학 문제나 마저 풀 수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재욱은 여러 번 한숨을 내뱉었다.
어느덧 육교에 도착했다. 오늘도 그 학생은 여기서 하늘이나 쳐다보고 있겠지, 하고 생각한 재욱은 여느 때처럼 계단을 올라 육교를 건너고자 했다.

“……!”

그 학생이 재욱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어두운 빛이 깔려 있어서 누군지는 잘 분간이 안 갔지만, 표정만은 분명히 보였다. 그는 마치 깊게 구멍이 뚫린 양 어두운 눈동자로 재욱을 바라보며 섬뜩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심장이 놀라 멎을 뻔했다. 재욱은 후우, 하고 심호흡을 한 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리를 건넜다. 그런데 그 학생의 시선이 계속 재욱을 따라갔다.

‘기분 나쁜 놈……. 왜 계속 날 쳐다보는 거야?’

재욱은 속으로 물었다. 그러나 그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 학생의 모습에서 공포감 같은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학생의 시선을 무시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집에 도착한 재욱은 문을 열기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하려고 했다. 그러나 곧 그는 행동을 멈추고 문 열기를 망설였다. 집안에서 온갖 욕설과 고함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그 목소리들은 매우 익숙한 부모님의 것이었다.
곧 문이 열리며 편한 사복을 입은 아버지가 나왔다.

“아오, 정말……. 니 엄마랑 도저히 못 살겠다! 아빤 사우나 갈 거니까 그렇게 알아.”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 아버지는 얼른 계단을 내려갔고, 재욱은 조용히 집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니가 거실에 앉아 엉엉 울고 있었다. 빨갛게 물든 얼굴을 보아하니 술에 취한 것 같았다. 그 모습이 정말로 보기 싫었다. 재욱은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울고 있는 어머니 앞에 앉아 지그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또 싸웠어?”

어릴 적 인성 교육을 받은 후로 재욱은 부모님을 엄마, 아빠가 아니라 어머니,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존댓말까지 하면 거리감이 크게 느껴질 것 같아 재욱은 친근감 있게 반말로 말하기로 했었다. 그것이 현재의 말투였다.

“나, 니 아빠랑 살기 싫어!”

어머니는 계속 울었다. 재욱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곧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을 것이다. 예전에 싸운 뒤 늘어놓고, 그 예전에도 싸운 뒤 늘어놓았던 거의 공통된 불만을.

“에휴.”

재욱은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매일 똑같이, 여러 번.



어머니는 울다가 지쳐서 큰방에 들어가 잠자리에 들었다. 거의 1시간 동안 어머니의 말벗이 되어주었던 재욱은 씻고 나서 검은 후드티, 츄리닝 바지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집을 나와서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아파트를 나서자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밤공기가 재욱을 반겼다. 그는 심호흡을 하면서 시원한 밤공기를 들이마시고는 앞에 있는 울타리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울타리 위에 두 팔을 올리고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만큼은 여느 때나 재욱에게 편안함을 안겨주었다.

“에휴.”

재욱은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까 전 문밖에서 들었던 욕설과 고함 소리를 기억했다.
부모님이 다투시는 건 흔히 있는 일이었다. 과거의 일 때문에 술 마시고, 술에 취해 얻은 용기로 싸우고, 싸운 뒤에 슬퍼서 또 술 마시고……. 재욱은 이 악순환을 끊을 줄 몰랐다.

“…….”

곧 재욱을 괴롭히려는 듯 머릿속에서 수능을 보고 대학에 합격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 사실은 언제나 수험생인 재욱을 밟고, 짓눌렀다. 이어서 오늘 받았던 9월 모의고사 성적이 떠올랐다. 그러자 그의 마음이 또다시 우울해졌다. 그는 전국에 있는 실력자들과 경쟁해서 이길 자신이 없었다. 명문대에 진학하여 사회에서 인정받고, 더 나은 미래를 개척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그의 실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이게 뭐냐, 진짜…….’

초등학생 때부터 미래를 위해 영어를 공부하고, 수학을 공부해왔던 아이들이 부러웠다. 진작 현실이란 것을 깨닫고 그 현실에 대응하기 위해 실력을 길러왔던, 그런 성숙한 아이들이 부러웠다. 재욱은 그들에 비해 자신이 매우 한심스러운 놈이라고 생각했다.
올해는 우울한 날들 투성이였다. 세연고등학교에 와서 짝사랑해왔던 애한테 고백해서 차이고, 다투는 빈도가 늘어난 부모님은 이혼 얘기까지 진지하게 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모의고사 성적은 재욱에게 불투명하고 불안한 미래만을 보여주었다.
수험생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실력과 위치를 깨달은 재욱은 언제나 좌절감만을 가지고 살았다. 자기 자신이 “난 특별한 애야”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왔다면, 현실은 “넌 특별한 놈이 아니야”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동안 순진했던 자신의 모습이 이토록이나 한심스러울 수 없었다.

“…….”

잠시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재욱의 머릿속에 초등학생 때 봤던 사진 한 장을 떠올랐다. 검은 배경에 색이 있는 줄이 몇 가닥, 그리고 가운데에 있는 점 하나. 그 단순한 형태가 사진의 전부였다. 그것은 1990년, 보이저 1호가 태양계를 벗어나 60억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지구를 찍은 사진이었다. 그 사진을 본 순간, 재욱은 어떤 강렬한 느낌을 받았었다.

‘60억킬로미터 너머에서 보면 난 한없이 작고 작은 존재인데……. 대학에 가고, 사회에 나가서 성공해봤자 그 모든 건 겨우 점 하나에서 벌어지는,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일들일 뿐인데……. 난 왜 그런 허무한 것들을 위해 이렇게 힘을 쓰고 있지? 왜 사회에서 인정받고 싶어 할까?’

모든 건 허무하고 허무하다. 기쁜 일이 있든, 슬픈 일이 있든지 간에, 이렇게 감정이 상하든지 간에 모든 건 허무하고 아무런 알맹이도 가지지 못한다. 시간은 흐른다. 사람은 언젠간 죽는다. 그리고 죽기까지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겨우 아주 작은 점 하나에서 눈에 보이지 않게 진행된다. 그저 허울뿐인 인생. 뭘 이루든 허울뿐이다.
왜 아무것도 아닌 일들로 우울해해야 하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그저 슬프고 공허했다. 아프고 허무했다.

“에휴.”

재욱은 고개를 숙이며 또다시 깊은 숨을 내뱉었다.
그때, 울타리 너머로 한 학생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

아까 다리에서 봤던 그 학생이 울타리 너머에서 재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학생은 아까처럼 섬뜩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얼굴엔 어둠이 깔려 있었으나 그 표정만은 눈에 선했다.
이번에도 그의 심장이 멎을 뻔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저기에 있었던 걸까? 모르겠다. 그저 무서웠다. 도대체 저 놈은 누구지? 마치 사이코, 아니, 귀신같았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어둠이 깔린 얼굴, 그리고 구멍이 뚫린 것 같이 어두운 두 눈. 아무리 밤이라지만, 그는 너무 심할 정도로 무섭게 보였다.
도저히 말 걸 용기가 나지 않아 재욱은 그를 못 본 척 하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고는 얼른 자기가 사는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계단을 오르며 생각했다.

‘왜 쟤가 저기 있는 거야? 설마 날 따라온 거야? 도대체 누군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항상 육교에 있던 그 학생이 왜? 도대체 누구길래? 물어봤어야 했는데, 왜 물어보는 게 이토록이나 겁이 날까? 세연고등학교의 교복을 입은 학생이다. 같은 학교의 학생이다. 도대체 왜? 왜 마음속에서 이성을 따르지 말라고, 네가 느낀 공포를 따르라고 하는 것일까? 알 수 없었다.
어느새 311호의 문 앞에 도착한 재욱은 얼른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집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그리고 아파트 앞쪽을 볼 수 있는 부엌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 학생을 몰래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

재욱은 창문을 조금 열어 왼쪽 눈동자로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울타리 너머에 있던 학생은 온데간데없었다. 돌아간 건가?
그때, 똑똑, 하고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

현관문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들은 순간 재욱은 깜짝 놀라면서 바로 현관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똑똑.
한 번 더 들려왔다. 왜 벨을 누르지 않는 거지? 왜 노크를 하는 걸까?
똑똑.
재욱은 극도의 긴장을 했다. 그는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현관문 쪽으로 걸어갔다.
똑똑.
재욱은 현관문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잠시 동안 현관문을 지켜보았다.

“…….”

…….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간 건가?
재욱은 확인하기 위해 현관문에 있는 외시경에 왼쪽 눈을 들이댔다. 그러자 바깥에 세연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한 남학생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학생은 천천히 내려가려고 하는 것 같았다. 재욱은 계속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데 갑자기 그 학생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몸을 돌려 현관문을 향해 달려왔다!

“으악!”

학생은 두 손으로 쾅! 현관문을 쳤다. 그 모습에 놀란 재욱은 짧게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자빠졌다. 그의 뒤에 있던 신발장에 등을 부딪혔다. 그는 신발장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은 채 공포에 떨며 현관문 외시경을 쳐다보았다.
쾅, 쾅, 쾅! 그 학생이 계속 현관문을 쳐댔다. 재욱은 그만 다리에 힘이 빠져 가만히 그 소리를 듣기만 했다.

“뭐, 뭐야…….”

곧 학생이 현관문 두드리는 걸 멈추었다. 정적이 흘렀다. 부자연스럽게 잠잠해졌다. 방금 전 갑작스럽게 달려오고는 현관문을 친 학생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매우 가까운 거리였기에 그의 얼굴을 본 건 한순간이었지만, 재욱은 분명히 보았다. 그는 눈동자와 눈꺼풀이 없었다. 정확히 말해서 두 눈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완전히 어두웠다.
재욱은 가슴을 부여잡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바닥을 짚고 천천히 일어나 다시 외시경을 확인했다.
학생은 이미 가버린 듯 온데간데없었다.

“…….”

뭐야, 정말로 뭐야? 저 미친놈은 도대체 누구야? 도대체 무슨 분장을 했길래 눈이 저런 거지? 왜 이런 장난을 치는 거야? 설마 귀신 아냐? 아니, 무슨 귀신이 살아서 문을 두드리겠냐…….
얼굴을 좀 더 분명히 봤어야 했다고 재욱은 후회했다. 무섭더라도 그가 노크하고 있을 때 얼른 와서 외시경으로 확인했어야 했다.
재욱은 공포에 벌벌 떨었다. 경찰에 신고할까? 아니, 그 학생은 이미 가버렸다. 지금 신고해봤자 소용이 없으리라.

“아, 이게 뭐냐고…….”

갑자기 화가 치솟았다. 기분도 울적한데, 저런 미친놈한테 걸리다니……. 그런 울분 때문일까, 공포 때문일까. 재욱은 눈이 촉촉해지는 걸 느꼈다. 눈물이 흐르려는 것 같았다. 그는 겁먹은 자신이 창피해서 얼른 손가락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그는 다시 부엌에 가서 살짝 열려진 창문 틈으로 아파트 앞 울타리 쪽을 내려다보았다. 학생이 가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이미 간 건가? 아니, 다 내려갔다면 지금쯤 보일 텐데.

“…….”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재욱은 얼른 때리는 용도의 무기가 될 만한 걸 찾았다. 신발장 옆에 남색의 1단 우산이 놓여 있었다. 재욱은 그 우산을 가지고 현관문을 나섰다. 그리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그 학생을 찾아다녔다. 영문 모를 용기가 생겨난 덕분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 학생은 보이지 않았다. 아래에도, 위에도 심지어는 옥상에도 그 학생은 사라지고 없었다. 결국 재욱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다시 자기가 사는 311호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느 틈에 도망간 거지? 달리기 속도가 빠른 건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여기서 떠난 건 분명한 것 같았다.
재욱은 방으로 들어가 습관대로 문을 잠갔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오늘 공부하는 건 어려울 것 같았다. 그는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저 놈, 내일도 육교에 있을까?’

확실하게 추궁해야 했다. 왜 방금 전과 같은 무서운 짓을 했는지. 이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재욱은 생각했다. 그는 방금 전 현관문을 치고 간 그 학생이 내일도 똑같이 육교에 있기를 바랐다.




목요일. 시침이 7을 가리키자 알람이 시끄럽게 울려댔다. 재욱은 몸을 뒤척이다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침대에서 내려와 책상에 있는 알람을 끄고 하품을 했다. 오늘은 어제보다 몸이 더 무거운 것 같았다. 어젯밤에 그 사이코 같은 학생 때문에 잠을 잘 못 이룬 탓이리라. 오늘 육교에서 보면 꼭 추궁할 것이라고 재욱은 다짐했다.
그런데 곧 어떤 위화감이 그를 덮쳤다.

“……?”

책상 위에 책 하나가 펼쳐져 있었다. 이틀 전에 공부했던 언어 문제집이었다. 책상에 두고 있긴 했는데, 이걸 이렇게 책상 위에 펼쳐두고 있었나? 어째선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아무튼 어젯밤에 공부하지 않았단 건 확실히 기억했다. 재욱은 의아해하면서 방문을 보았다. 그는 방에 들어오면 문을 잠그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제도 그러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역시나 문손잡이는 그대로 잠겨있었다.
그럼 뭐지? 이 위화감은 거짓된 건가? 이 위화감이 사실이라면 부모님 중에 누군가가 집안에 있는 방문들을 열 수 있는 열쇠뭉치를 이용해 들어왔고, 어떤 이유로 책을 펼치고 그대로 방문을 잠근 채 나갔다는 것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데……, 그럴 이유가 있나? 재욱은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 위화감은 거짓인 것 같았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재욱은 부모님께 여쭤보기로 했다.



재욱은 여느 때처럼 등굣길에 올랐다. 그러면서 어머니께 자기 방에 들어왔었냐고 물었던 기억을 되살렸다. 물론 그의 예상대로 대답은 부정형이었다. 아버지는 사우나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터라 물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대답도 똑같을 것이라고 재욱은 예상했다. 분명히 요즘 스트레스 때문에 예민해져서 이런 걸 거야. 재욱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침 7시 45분. 재욱은 육교에 도착했다. 그 학생이 있을까? 재욱은 얼른 계단을 올랐다.

“…….”

오늘은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어제처럼 그런 무서운 짓을 벌이고도 재욱한테 추궁 당할 거란 걸 예측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곧 재욱의 속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는 정말로 화내면서 따지고 싶었다. 밤에는 꼭 그놈이 육교에 있기를 재욱은 희망했다.



오늘도 수험생으로서 세연고등학교에서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수능을 앞둔 시점에서 수업시간은 대부분 자율학습 시간이었고, 수능 준비 중이던 학생들은 수업시간뿐만 아니라 쉬는 시간에도 열심히 공부를 했다. 재욱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의자에 달라붙은 채 어제 못했던 수학 공부에 힘썼다. 어제 있었던 일들은 공부할 때만큼은 최대한 잊고자 노력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5교시가 되었다. 2분단 맨 앞자리에 앉은 재욱은 꾸벅꾸벅 힘없이 눈을 깜박였다. 점심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지 졸음이 제법 강하게 몰려왔다. 어떻게든 공부해야 한다며 뺨을 찰싹 때려보았지만 헛수고였다. 그러다가 그는 오른쪽에 있는 3분단 맨 앞자리에서 공부 중이던 노소하를 보았다. 곱고 긴 머리카락을 가진 그녀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책을 읽으며 연습장에 필기하고 있었다. 재욱은 공부 잘하고, 머리도 좋고, 노력하는 법을 아는 소하를 부러워했다. 그녀 때문에 자극이 된 건지, 그는 안경을 벗고 나서 두 손바닥으로 눈을 비비고는 다시 안경을 쓰고 공부에 전념했다.



야간자율학습 시간, 세연고등학교의 학생들은 야자실에서 자기자리에 앉아 공부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서 재욱은 답안지를 보고 오늘 푼 수학 문제들을 채점했다. 총 40문제 중에서 22문제를 맞았다. 빨간 작대기가 여러 개 그어진 수학 문제집을 보며 재욱은 가슴이 미어지는 걸 느꼈다. 수능이 얼마 안 남은 시점에서 실력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도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겨우 이런 실력으로 뭘 하겠다고…….

“에휴.”

재욱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울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얼른 틀린 문제들을 다시 풀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10분 뒤, 종이 울리고 쉬는 시간이 되었다. 공부에 집중이 잘 안되었던 터라 재욱은 세수를 하려고 화장실로 향했다. 그러던 중, 재욱은 복도에서 안경을 쓴 30대 중반의 여성인 담임선생님과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아침에 이미 인사를 했지만, 재욱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담임선생님은 멈춰서더니 “재욱아.”하고 재욱을 불렀다. 그 소리에 재욱도 멈춰서 선생님을 보았다.

“네.”
“생각 안 바뀌었니? 수시 2차 쓸 생각 없어?”

어제 9월 모의고사 성적표를 보고 이런 질문을 하는 거겠지.

“잘 모르겠어요.”
“현실적으로 말할게.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정시로만 대학 가는 건 정말 힘들어. 특히나 지금 네 모의고사 등급으로는 그게…… 많이 어려워. 그러니까 수시 2차라도 알아보자.”
“…….”
“재욱아,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넌 내신 등급으로 대학 가는 게 훨씬 유리해. 수시 1차는 지나갔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현실적으로 생각하자. 대학 입시는 드라마가 아니야.”
“……생각해볼게요.”
“그래, 잘 생각해야 돼.”

담임선생님의 진심어린 눈빛은 재욱을 걱정하고 있다는 걸 증명해주는 듯 했다. 처음으로 마주하는 현실인 대학에 합격하지 못하면 꽤나 큰 슬픔이 찾아올 것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재욱은 또다시 가슴이 슬픔으로 미어지는 걸 느꼈다. 능동적으로 대학에 원서를 넣지 못하고 이런 권고를 들어야 하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만약에 이번에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대학에 떨어지면 어떤 슬픔이 찾아올까? 재욱은 두려워했다.

“공부 열심히 하고. 힘내렴.”
“네…….”

그렇게 재욱과 선생은 헤어지고 재욱은 복도에 있는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세면대 앞에 서서 거울을 보았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도 초라해보였다.

“…….”

울 것 같았다. 재욱은 안경을 벗고 얼른 수도꼭지를 틀어 흐르는 물에 세수했다.
여러 번 세수했다. 계속 눈물을 닦았다. 그러는 동안 그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괜히 사회에서 인정받고 싶어서, 눈이 높아서 명문대나 꿈꾸고, 자신은 할 수 있다는 순진한 생각만 했다. 그렇게 쌓여진 그의 마음은 스스로의 높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재욱은 그런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수도꼭지를 잠갔다. 그리고 두 손으로 한 번 얼굴에 있는 물기를 쓸어내리고는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았다.
그때, 재욱의 오른쪽에 서서 거울을 보고 있던 한 학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뻥 뚫린 것처럼 어두운 구멍이 난 두 눈. 그리고 섬뜩한 미소. 깜짝 놀란 재욱은 얼른 고개를 그 학생이 서있는 오른쪽으로 돌렸다. 그런데 그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

잘못 본 걸까? 너무 예민해진 걸까?
재욱은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겨우 몇 개의 별들이 어두운 밤하늘에 촘촘히 박혀 있었다. 그 별들은 마치 자신을 보라는 듯 작게 반짝이고 있었지만 재욱은 그들을 외면한 채 고개를 숙이고 힘없는 발걸음만 재촉했다.
어느덧 그는 육교에 도착했다. 계단에 오르기 전에 재욱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

예상대로 그 학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재욱은 그 학생이 있던 자리로 갔다.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냥 갔다. 그리고 그 학생처럼 난간에 두 팔을 올린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구름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별들이 제법 잘 보였다. 재욱은 작게 빛을 내는 별 하나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난 뭘까. 왜 이러고 있을까.’

또다시 60억킬로미터 너머에서 지구를 찍은 사진이 떠올랐다. 그 창백하고 작은 점 하나에서 허무하게, 그 어떤 특별함도 없이 현실에 맞춰 살아가는 학생 한 명. 마음이 너무 공허했다. 너무 허무했다. 이 텅 빈 느낌이 너무나도 싫었다. 그러나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삶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그는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모든 건 결국에 다 아무것도 아닌데.’

모든 건 그랬다. 그렇게 똑같았다. 60억킬로미터에서 본 그것들은 모두 아무것도 아니었다. 특별한 건 없다. 인생은 마치 양파와도 같다. 껍질을 까면 깔수록 눈물이 나고, 껍질을 다 깐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 어떤 작은 알맹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허무맹랑하다. 사람의 인생이란.

‘난 왜 살까.’

이 허무맹랑한 인생을, 마지막에 눈물뿐일 인생을, 알맹이도 없을 인생을 왜 사는 걸까? 그런 의문을 던지던 재욱은 고개를 숙여 차량들이 지나다니는 도로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무표정으로 생각했다.

‘여기서 떨어지면 죽을까?’

머리부터 떨어진다면, 머리가 깨지면서 죽을 지도 모른다. 혹은 떨어지다가 타이밍에 맞춰 지나가는 차량에 부딪혀 죽을 지도 모른다.

“…….”

재욱은 멍하니 도로 위를 지나다니는 차량들을 지켜보다가 다시 집으로 걸어갔다.



힘없는 발걸음으로 재욱은 자신의 집에 도착했다. 그는 집안 꼴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컵들과 깨진 그릇들, TV, 화분…….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재욱은 얼른 큰방으로 갔다. 불이 꺼져 어두운 그곳에서 어머니는 장롱에 등을 기대고 앉아 두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채 훌쩍거리고 있었다.
재욱은 조용히 어머니 앞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소리죽여 울고 있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손에 피가 흐르고 있는 게 보였다. 유리에 베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든 사람은 어머니인 것 같았다.

“어머니.”
“…….”
“어머니?”

어머니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훌쩍거리는 걸 멈추는 것으로 재욱의 말을 듣고 있다는 표현만 했다.

“어머니?”
“좀 조용히 해!”

어머니가 고개를 들어 소리를 질렀다. 그 큰 소리에 놀란 재욱은 살짝 상체를 뒤로 뺐다. 그러자 열려진 방문을 통해 거실에서부터 들어오는 빛 덕분에 재욱은 어머니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어머니의 콧구멍 아래로 피가 흘렀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왼쪽 눈가는 붉게 부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재욱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저리 좀 가. 제발 나 좀 내버려둬…….”
“…….”

재욱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계속 어머니를 바라봤다.

“저리 가라고!!”

어머니가 또 한 번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귀가 아플 정도로 큰 소리였다. 그러더니 어머니는 다시 고개를 두 무릎에 파묻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재욱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그리고 큰방 문을 닫았다.

“…….”

가슴이 아팠다. 그 어떤 말도 할 줄 모르는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았다.
그는 큰방 문 앞에서 어머니가 엉엉 우는 소리를 들었다. 가만히 서서 그저 그 소리를 듣기만 했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았다. 특별한 것 없는, 그저 평범할 뿐인 아들로서의 자신. 공부 잘해서 효도할 줄도 모르는 자신. 재욱은 부모님께 속으로 몇 번이고 사죄했다. 자신의 한심스러운 모습을 용서해달라고, 이렇게 멍청해서 미안하다고.
그는 힘없이 부엌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벽걸이에 걸린 쓰레받기와 작은 빗자루를 꺼내 바닥에 깨진 유리조각들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아……!”

오른쪽 발바닥에서 무언가에 베이는 느낌이 났다. 재욱은 바닥에 앉아 자신의 오른쪽 발바닥을 확인했다. 그러자 작은 유리조각이 박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재욱은 얼른 그것을 빼내서 여러 유리조각들이 담긴 쓰레받기에 담았다. 그러자 발바닥에 난 조그만 상처에서 피가 새어나왔다. 조금 따끔거리는 정도라서 재욱은 무시하기로 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남은 유리조각들을 쓸어 담으려고 했다. 그때, 재욱은 뒤쪽에서 뭔가가 쏘아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등골이 오싹했다. 재욱은 어머니인가? 하고 고개를 뒤로 돌렸다.

“……!!”

씨익.
구멍이 뚫린 것처럼 새까만 두 눈을 가진 세연고등학교 교복 차림의 학생. 그 학생이 씨익 웃고 있는 게 재욱의 눈에 들어왔다. 도대체 왜 이 학생이 여기에 있는 거지? 깜짝 놀란 재욱은 그 학생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학생의 모습을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어떻게 네가 여기에 있…….”

재욱은 그만 말을 잃고 말았다. 그 학생의 오른손에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쥐어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재욱은 그게 뭔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건…… 식칼이었다.

“히히히히히히히히히!”

그 학생이 섬뜩한 웃음소리를 내며 서서히, 한 발자국씩 다가왔다. 재욱은 놀라면서 뒤로 한 발자국씩 물러났다. 그러자 발바닥에 유리조각들이 박히는 게 느껴졌다. 발바닥 구석구석에서 따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히히히히히히히히히!”

도대체 뭐지? 왜 이 미친놈이 여기 있는 거야? 왜 저렇게 웃으면서 날 죽으려고 하는 거야? 재욱은 몇 번이고 속으로 의문을 던졌다. 그러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심장만 자꾸 쿵쾅쿵쾅거렸다. 두려움이 그의 온 신경을 장악했다.

“넌 뭐야……? 넌 누군데……? 누구냐고……!”

재욱이 두려움에 벌벌 떠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그 학생은 기분 나쁜 웃음소리만 냈다. 곧 재욱은 자신의 허리가 세면대에 닿은 걸 느꼈다. 이제 뒤로 도망칠 수 없었다.
학생이 다가왔다. 계속, 천천히. 그는 발바닥에 유리조각들이 밟혀도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재욱을 죽일 수 있다는 생각에 온갖 광기에 젖어든 것처럼, 그는 검고 어두운 두 눈으로 재욱을 바라보며 차근차근 다가왔다.
재욱과 가까워진 학생은 식칼을 치켜들었다.

“……아악!”

그리고 내려찍었다.
그러자 재욱은 얼른 두 손으로 그의 오른쪽 팔목을 잡았다. 날카로운 식칼의 끝자락이 바로 재욱의 인중 앞에 있었다.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곧 학생은 왼쪽 손으로 오른쪽 손을 잡았다. 그리고 왼쪽 팔의 힘을 가중시켜 식칼의 날을 들이밀었다.

“아아아악!!”

재욱은 비명을 질렀다. 계속 그의 상체는 뒤쪽으로 숙여졌다. 등에 수도꼭지가 닿는 게 느껴졌다. 계속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식칼이 점점 그의 얼굴 쪽으로 다가왔다.

“하지 마, 하지 마!!”

재욱은 소리를 질렀다. 어느새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학생은 그 모습이 좋다는 듯이 계속 웃고 있었다.

“히히히히히히히히!”

그 섬뜩한 웃음소리가 너무 싫었다. 재욱은 눈을 감고 죽을힘을 다했다.

“하지 마!!”

소리를 질렀다. 계속, 계속.
그때였다.

“재욱아, 뭐하는 거야?”
“……?”

갑자기 자신을 죽이려던 학생의 힘이 사라진 게 느껴졌다. 재욱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을 떴다. 그리고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려졌지만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방금 말소리를 낸 건 어머니였다.

“재욱아!”
“……?”

3초도 채 지나지 않아 재욱은 지금 자신이 어떤 동작을 취하고 있는 지를 알아차렸다.
그는 두 손으로 식칼을 든 채 날카로운 날의 끝자락을 자신의 얼굴 앞에 갖다 대고 있었다.

“아아…….”

그는 오른손으로 식칼을 든 채 두 팔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방금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학생의 모습을 떠올렸다. 분명히 그는 보았다. 교복에 ‘이재욱’이라 적혀진 이름표를.

출처- 웃대 노소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