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금요일. 재욱은 부모님의 권유에 따라 학교를 쉬고 제법 멀리 있는 정신 병원에 갔다. 오늘은 부모님도 일을 나가지 않았다. 재욱은 넉넉하게 시간을 잡고 세밀하게 종합검진을 받았다. 모든 검진을 받고나서 재욱과 부모님은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 정신과 전문의에게서 검진 결과를 듣게 되었다.
“시간을 두고 더 자세히 지켜봐야 알겠지만, 현재로써는 지금 학생이 가지고 있는 병은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동반한 정신분열증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네요. 그러니 일단 이 추측을 바탕으로 설명해드릴게요. 해리성 정체감 장애란 쉽게 말해 다중인격 장애인데, 여기에 정신분열증 증세까지 가미해서 환각을 보거나 환청을 들을 수 있는 거죠. 해리성 정체감 장애에 걸린 사람들은 대부분 기억 상실 증세를 보여요. 한 사람의 몸 안에서 여러 개의 자아가 왔다갔다 거리기 때문이죠.”
의사는 재욱의 뒤에서 나란히 서있는 재욱의 부모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자 재욱의 어머니가 소리 없이 울고 있는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학생의 어머니 분께서 이곳에서 심리검사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 학생이 가진 병을 어머니 분도 가지고 계셨거든요. 일반적으로 정신병 또한 유전이 되기도 합니다. 아마도 학생 분도 그 병을 유전 받았기 때문에 이런 지경에 놓이게 된 걸지도 몰라요.”
재욱의 어머니는 계속 소리를 죽여 눈물을 흘렸다. 재욱과 그의 아버지는 잠시 그녀에게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의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의사는 검진 결과가 적힌 종이를 보며 말을 이었다.
“검사 결과를 말씀드릴게요. 현재 알 수 있는 바로는, 이재욱 학생의 몸 안엔 세 개의 자아가 있는 것 같네요. 첫 번째 자아는 평소 때의 본인이고, 두 번째 자아는 학생이 잠들었을 때 학생 몸을 사용해 공부하는 자아, 그리고 세 번째는 학생을 죽이려는 자아……. 두 번째 자아는 학생이 수험생이니 공부를 잘해서 대학에 합격해야 한다는 스트레스 때문에 생겨난 것 같아요. 이 자아 때문에 학생은 매일 아침마다 책이 펼쳐져 있는 걸 보고 위화감을 느꼈던 거고, 수면 시간이 줄어들어서 많이 피곤했던 거죠.”
그랬구나, 하고 재욱은 이해했다. 곧이어 다음 설명을 하려던 의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 심각한 표정으로 재욱을 바라보았다.
“문제는…… 세 번째 자아예요. 이 자아는 스스로 학생에게 환각으로서, 환청으로서 작용합니다. 그리고 명확한 모습으로 나타나 학생을 죽이려고 해요. 이 자아는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건 정말로 위험한 겁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지 학생이 죽을 위험이 있어요. 게다가 그건 남들이 보기에 자살하려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구요.”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인식하고 있는 또 다른 자아.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는 자아. 재욱은 섬뜩해했다.
“지금 학생이 가지고 병은 아무리 유전병이라고 해도 분명히 어떤 충격이 원인이 되어 발발한 걸 거예요. 그리고 그 충격을 받았을 때 세 번째 자아가 탄생했을 겁니다.” “…….”
어제 봤던 그 학생의 모습은 재욱의 눈앞에 진한 잔상으로 남아 있었다. 자신을 죽이려는 존재가 있다. 그러나 그 존재는 외부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경찰에 신고해도 잡을 수 없다. 자신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 언제든, 어떤 장소에서든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언젠간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 무서웠다. 온몸에 소름이 확 돋는 게 느껴졌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의 원인은 매우 다양해요. 어릴 적에 심한 폭행을 당했다든지, 어떤 사건으로 인해 큰 충격을 받았다면 그게 이 병의 원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현재로써는 학생이 이런 걸 경험해본 적이 없다고 해서 원인을 파악하기는 힘듭니다. 그래도 일단 세 번째 자아가 학생이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가질 때 처음 생겨난 자아였을 거란 건 추측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가장 분명한 모습으로 학생 앞에 나타났으니까요. 그 자아가 최근 들어 학생 앞에 나타났다는 건 학생이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가졌던 원인이 최근에 또다시 강하게 발현돼서 그런 것일 가능성이 높아요.”
어떤 사건을 계기로 재욱은 ‘해리성 정체감 장애’란 병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재욱을 죽이려는 자아가 생겨났다. 그리고 최근에 재욱이 해리성 정체감 장애란 병을 얻게 된 원인이 다시 발현되어 그 자아가 재욱에게 나타났다. 그럼 그 원인이란 뭐지?
“학생은 스스로의 기억 속에서 그 충격을 찾는 게 중요해요. 아마 그 충격은 학생에게 우울증이나 스트레스 같은 걸 전해줬을 겁니다. 최근에 수능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터인데, 그걸 잘 파고들어서 고민해보셨으면 합니다. 학생은 왜 자신이 해리성 정체감 장애에 걸렸는지 그 원인을 기억하고, 정신을 개선하기 위해서 힘쓰시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절대로 우울해하지 마세요. 세 번째 자아는 학생이 우울해할 때 나타나는 것 같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재욱이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머니와 재욱은 정신 병원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아 아무 말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늘 날씨는 제법 맑다고 재욱은 생각했다. 곧 아버지가 캔 음료수 세 개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재욱의 옆에 앉으며 재욱에게 음료수 하나를 건네주었다. 재욱은 멍하니 캔 음료수를 바라보기만 했다. 부모님도 재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머니, 아버지.” “응, 왜 부르니?” 어머니가 물었다. “미안해. 이런 병이나 걸려서.” “…….”
재욱이 캔 음료수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무표정으로 사과했다.
“아니야, 재욱아…….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잘못 했어…….”
어머니는 현재 재욱이 가지고 있는 병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그때의 섬뜩함과 위화감. 그러나 지금 재욱의 상태는 더욱 심각하다. 재욱에게는 스스로를 죽이려고 하는 자아가 있다. 그걸 생각하니 어머니는 참을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조용히 재욱을 감싸 안았다. 아버지도 어머니와 함께 재욱을 꼬옥 안아주었다.
재욱은 육교에서 난간에 두 팔을 얹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검게 물들여진 하늘은 언제나처럼 재욱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
재욱은 정신 병원 입원을 권고 받았다. 하지만 극구 사양했다. 처방도 받았지만 약을 먹지 않았다. 재욱은 그저 스스로 지금 자신이 걸린 정신병의 원인을 찾고, 해결하고 싶다고 했다. 절대로 우울해하지 않겠다는 말에 부모님은 그의 의사를 존중해주었다. 그래서 어제 다쳤던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따끔거리는 고통을 참고 도착한 곳이 바로 이 곳, 육교였다. 왜냐하면 재욱을 죽이려던 자아가 있던 곳이 바로 이곳, 이 자리였기 때문에.
“우울해하지 않으면 나타날 수 없나…….”
재욱은 독백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직접 물어보고 싶다고. 그 자아한테 ‘내가 어쩌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에 걸린 거야?’라고 물어본다면 대답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그의 마음속에 있었다.
“…….”
그러나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재욱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그렇게 그는 계속 가만히 서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밤하늘이 주는 편안함 때문인가. 어째선지 그는 계속 이렇게만 있고 싶어 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하늘을 올려다본 탓일까.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지난 세월을 돌아보게 되었다. 순수했던 지난 날, 그는 공부도 안 하고 놀기만 했던 불성실한 아이였다.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 때 예쁜 여자 선생님 덕분에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고등학교 3학년인 지금까지도 공부에 힘쓰고 있었다. 정말로 평범한 인생이었다. 뭐 하나 특별하게 내세울 거 없는 한 학생의 평범한 인생. 두근거릴 것도 없는 그저 그런 인생. 재욱은 이런 걸 싫어했다. 그래서 그는 평범한 현실과는 동떨어져서 스릴이나 신비감을 주는 미스터리나 추리 같은 걸 좋아했다. 그는 UFO를 좋아했고, 불가사의한 것을 좋아했고, 추리를 하고 범인을 잡아내는 탐정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런 것들에 빠져 살아도 현실이 허무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작은 점 하나에서 벌어지는 일들. 그 아무런 형태도 없는 일들. 이 모든 허무한 것들은 그저 공허함만 안겨줄 뿐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랬지. 인생은 허무해.’
재욱은 하늘에 박힌 별 하나를 바라보았다. 별은 계속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그 별을 보다가 다시 재욱의 머릿속에 초등학생 때 봤던 사진 한 장이 떠올랐다. 60억킬로미터 너머에서 지구를 찍은 사진. 그 사진은 지금까지도 재욱의 마음속에 선명히 박혀 있었다. 마치 저 별처럼.
‘너무 허무해. 겨우 점 하나인데.’
그 허무한 것들을 위해 사람들은 싸운다. 실력을 길러 경쟁자들을 짓밟는다. 얻어봤자 허무할 뿐이고, 얻지 못하면 슬픔과 좌절이 닥쳐온다. 그렇다. 겨우 이럴 뿐이다. 뭘 하든, 어떻게 살든 이런 식일 뿐이다.
“…….”
갑자기 어떤 묘한 기분이 재욱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다시 떠오른 허무한 느낌. 자신에 대한 한심스러움.
“아, 그랬지. 그랬어.”
그랬어. 그랬던 거야. 어째서일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발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는 아무 생각 없이 한쪽 발을 난간 위에 올렸다. 그리고 두 손으로 난간을 잡고, 팔에 힘을 줘서 몸을 난간 위로 올라가게 했다. 곧이어 그는 상체를 일으키면서 반대쪽 발도 난간 위로 올려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
난간에 닿은 발바닥이 따끔거렸으나 그 고통은 재욱의 마음에 그 어떤 영향도 주지 못했다. 이 허무한 감정. 이 허무한 노력. 이 허무한 고통. 재욱은 난간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서 도로를 내려다보았다. 어째선지 아래에 있는 도로가 무섭지 않았다.
‘모든 건 허무해.’
그저 그의 몸이 아무 반항 없이 마음만을 따랐음을 그는 알았다. 그때, 그의 옆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재욱.” “……?”
재욱은 소리가 들린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재욱은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바로 그의 옆에서 재욱을 죽이려고 했던 학생이 재욱처럼 난간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있기 때문이었다. 그 학생의 얼굴은 어째선지 어둡지 않았고, 눈도 정상적으로 붙어 있었다. 그는 평소 때처럼 세연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고, 안경을 벗은 재욱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었다.
“왔구나.”
그런데 어째서일까. 재욱은 이를 당연하게 여겼다. 마음에서부터 재욱은 그를 반기고 있었다.
“눈이 붙어 있네? 재욱이 물었다. “이제 넌 내가 누군지 알게 됐잖아. 넌 날 모르기에 내 얼굴이 그토록 어둡고, 눈이 안 보였던 거야. 그래도 난 네가 더 빨리 나를 인지하길 바랐어. 그래서 네가 입는 교복을 입고 나타났던 거야.”
그래서 이름표를 보고 판단할 수 있었던 건가. 재욱은 그 자아의 대답을 듣자 기분이 오묘해지는 걸 느꼈다.
“이제 좀 알게 됐어?” 자아가 물었다. “응. 네가 왜 날 죽이려고 했는지도 알 것 같아.” “그거 다행이네. 날 이해해줬다니.”
자아가 기분이 좋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곧이어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재욱도 그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칫하면 단번에 아래로 떨어질 수 있는 상황 속에서도 재욱은 태연했다. 무언가 허무한 감정이 그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왜 겁이 안 나지?” 재욱이 하늘을 보며 물었다. “겁이 나는 게 이상한 거야. 넌 알았으니까.” “알았다고 해서 몸이 바로 그걸 따를 수 있는 건가?” “알았다는 건 꼭 이성만으로 의미가 한정되지 않아. 경험으로나 감성으로도 알았다는 표현을 쓸 수 있어. 넌 후자에 속하는 거야.” “……그렇구나.”
내 마음은 그걸 안 거구나. 재욱은 자신의 자아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시 도로를 내려다보았다. 몇몇 차량들이 지나다니는 도로. 이곳에서 떨어져 머리부터 바닥에 닿는다면 분명히 즉사하리라. 재욱은 다시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보았다. 지금도 밤하늘은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어느새 그의 머릿속에 중학교 3학년 때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공부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시기, 공부방에서 공부한 뒤 늦은 시간에 귀가할 때 그는 밤하늘을 보았다. 그때 보았던 밤하늘만큼 아름다운 것이 없었다. 밤하늘은 한두 번 본 것이 아니었는데, 왜 그땐 그렇게 밤하늘이 아름다웠을까. 어째선지 지금 보고 있는 밤하늘도 그때의 밤하늘처럼 아름답다고 재욱은 생각했다.
“야.” 재욱이 자아를 불렀다. “왜?” “알려줘서 고맙다.” “고맙긴……. 아무튼 잘 가라.” “응.”
곧 그의 몸이 서서히 앞으로 기울어졌다. 재욱은 균형을 잡을 수 있는 마지막 타이밍도 지나쳤다. 이제 끝이다. 이 허무한 세상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된다. 자신의 한심스러움 때문에 자책할 필요도 없게 되고, 허무한 것을 쟁탈하기 위해 남들과 경쟁할 필요도 없게 된다. 재욱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난간에서 발이 떨어지기 전에 자신의 자아의 모습을 보았다.
“……!”
재욱의 그 모습을, 재욱의 자아는 섬뜩한 미소로 바라보고 있었다.
‘안 돼……!’
왜일까. 재욱은 지금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 뭔가가 잘못됐다고, 이래선 안 된다고 속으로 울부짖었다. 하지만 이미 균형을 잡을 수 없게 됐다. 이제 죽는다.
‘날 속였구나!’
재욱은 원망과 공포에 찬 눈빛으로 자신의 자아를 노려보았다. 지금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건 두려움과 공포감. 안 돼, 안 돼! 살려줘! 순식간에 그런 외침이 재욱의 속에서 쾅쾅 울려댔다.
“……!”
그때였으리라. 난간에서 발이 떨어지려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재욱의 왼쪽 팔을 빠르게 낚아챘다. 그 누군가는 두 손으로 재욱의 왼쪽 팔목을 꽉 잡고 육교 쪽으로 힘껏 끌어당겼다. 깜짝 놀란 재욱은 그로 인해 도로가 아닌 육교 안쪽으로 몸이 기울어졌다. 그리고 난간 위에서부터 쾅 넘어져버렸다. 몸의 왼쪽 부분이 바닥에 닿은 채 누워 있던 그는 “으윽…….”하고 잠시 고통에 신음하다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을 끌어당긴 사람을 보았다.
“끄아아아…….”
노소하, 교복 차림의 그녀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는지 앉아서 엉덩이를 만지며 고통스러워했다. 그 모습을 본 재욱은 당황스러워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야, 이 바보야!! 뭐하는 거야!!”
소하가 재욱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
“네가 어떻게……?” “야자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아…….” “여기서 왜 떨어지려 했어? 왜 떨어지려 했냐고!” “…….”
재욱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갑자기 그의 마음이 이상하게 꿈틀거렸다. 방금 전 자신이 하려던 짓을 마음이 인식한 탓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죽으려할 때 두려움을 느낀다. 그게 정상이다. 그리고 지금, 재욱은 다시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
재욱은 고개를 들어 난간 위를 쳐다보았다. 어느새 재욱의 자아는 사라지고 없었다.
“야, 이재욱!!” “…….”
대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재욱도 방금 전 인생을 포기하려 했던 자신의 마음을 확실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휴우.”
소하가 가슴에 손을 얹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흥분된 마음을 추스르는 것 같았다. 곧이어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치마를 털고 재욱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일어나. 같이 갈 데가 있어.” “아……, 고마워.”
재욱은 소하의 오른손을 잡고 천천히 일어났다. 그러자 발바닥에서 따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왼쪽 팔뚝도 까졌는지 따가웠다. 하지만 재욱은 내색하지 않았다. 곧 소하는 재욱에게서 손을 떼고 갑자기 뒤쪽으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재욱은 어리둥절해하다가 그녀의 압력을 이기지 못해 결국 그녀를 뒤따라갔다. 걸을 때마다 따끔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제법 참을 만 했다.
소하가 안내한 곳은 어느 아파트 단지 소유의 넓은 공원이었다. 아파트 단지와 공원이 입지한 곳이 산을 깎아서 만들어졌는지 공원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소하와 재욱은 그 계단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더 넓은 공간이 재욱의 눈앞에 펼쳐졌다. 아래에 있는 공원처럼 정자나 벤치, 운동기구 등이 설비된 두 번째 공원. 소하와 재욱은 여러 꽃이 핀 뜰 옆을 지나며 언덕 형태의 돌바닥을 걸어 위로 걸어갔다. 제일 위쪽에는 가로등 하나가 빛을 비추는 벤치가 하나 놓여 있었다. 소하는 옆에 가방을 두고 벤치에 앉았고, 재욱은 소하를 보며 잠시 망설였다.
“뭐해? 앉아.”
소하가 재욱을 보며 말했다. 그 말에 재욱은 “아, 응.”하고 소심하게 대답하고는 가방을 옆에 두고 소하의 옆자리에 살며시 앉았다. 평소에 숫기가 없는 재욱한테 여자와 둘만 있는 시간은 매우 부담스러웠다. 재욱은 그저 앞만 보면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곧 그는 눈에 놀라움이 가득 찼다. 그의 앞에 공원을 넘어서 더 넓은 동네의 경치가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우리 동네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와…….”하고 재욱은 경탄했다.
“경치 좋지? 난 뭔가 생각하고 싶은 게 있을 때면 자주 여기에 와. 여긴 우리 학교에서 나만 이용하는 곳인데, 어쩌다보니 너한테도 알려주게 됐네.”
소하가 재욱을 보면서 피식거리며 말했다.
“우리 동네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은 몰랐어.” “여길 알게 돼서 고마우면 나중에 갚든지.” “뭘로 갚을까?” “음……, 카페모카 한 잔?” “그럴게.” “히, 고마워.”
제법 괜찮은 요구인 것 같다고 재욱은 생각했다.
“근데 오늘 왜 학교에 안 나왔어?” “그냥 좀 열이 나서…….” “아하, 그랬구나. 열은 좀 나아졌어?” “응.” “다행이다.”
간단한 얘기를 마치고 난 뒤, 그 둘은 서로 앞에 펼쳐진 경치를 보면서 고요한 바람에 몸을 맡겼다. 잠시 가만히 있던 소하가 입을 열었다.
“재욱아.” “응.” “왜 아까 떨어지려 했어?” “…….”
본래 묻고 싶었던 걸 묻는 건가. 재욱은 눈동자를 돌려 소하를 보았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재욱은 고심하면서 다시 눈을 앞으로 돌렸다. 그렇게 몇 초 간 정적이 흐르자 소하는 고개를 돌려 다시 재욱을 보았다.
“혜민이한테 차여서?”
혜민이라면 재욱이 세연고등학교에 들어온 뒤로 1학년 때부터 쭉 짝사랑해왔던 여학생의 이름이었다. 재욱은 그녀에게 고백을 했으나 차였고, 그녀는 현재 다른 남자친구를 사귀고 있었다.
“아니면 대학 때문에?”
자신의 실력을 한탄하던 재욱한테 대학이란 스트레스 그 자체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 두 가지는 재욱은 우울하게 만들기는 하였으나, 재욱이 떨어지려 했던 이유가 아니었다. 어째서인지 재욱은 그 이유를 아는 것 같았다. 스스로도 의아해할 정도로.
“대답하기 어려운 거야?” “잘…… 모르겠어.”
소하의 물음에 재욱은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확실하지 않은 대답. 듣는 이에겐 답답할 수도 있는 대답. 재욱은 이런 대답을 해서 속으로 소하에게 미안해했다. 하지만 소하는 별로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그리고 두 손으로 허벅지 아래에 있는 벤치 모서리를 잡고 허리를 바짝 세워 잠시 경치를 바라보다가 말을 꺼냈다.
“있잖아, 난 어렸을 적에 친구가 한 명도 없었어. 친구 사귀는 게 싫었고, 시끄러운 것도 싫었고, 그냥 조용히 혼자 있는 걸 좋아했어. 근데 언제부터인가, 정말로 나 혼자만 남게 된 거야. 주변에 아무도 없었고, 시끄러웠던 것들도 모두 사라졌어. 그게 정말 좋았어. 어딜 가든 조용했고, 언제나 부담감 없이 혼자 편하게 지낼 수 있었거든. 근데 그곳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겪고 나니까 되게 가슴이 아프고 저려왔거든. 왜 그랬는지 알아?” “……?”
재욱은 소하를 보았다. 소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어갔다.
“외로워서. 혼자 있는 게 좋았는데, 계속 혼자 있다 보니까 알게 된 거야. 난 무지 외로웠구나…….”
소하는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돌려 재욱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을 본 순간 재욱은 그 어떤 슬픈 감정을 느꼈다. 소하는 분명히 웃고 있는 데도 슬퍼하고 있었다. 그때의 기억이 그녀의 가슴을 언제나 옥죄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걸 알고 나서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왔어. 주변에 사람들이나 시끄러웠던 것들이 다시 나타난 거야. 그래서 얼른 애들한테 다가갔어. 그렇게 친구를 사귀게 되고, 같이 놀게 되고……. 같이 공기를 하는 건 너무 재밌었어. 게다가 언제든 마음 편하게 얘기할 수 있고, 재밌게 장난칠 수 있고……. 그러니까 재욱아, 너도 혼자 끙끙 앓지만 말고 나한테 속 편히 얘기해봐. 외롭지 않게. 넌 내 친구잖아.” “…….”
어째서일까. 재욱은 소하의 맑은 눈동자를 보면서 이 아이한테는 속마음을 편하게 얘기해도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는 고개를 앞으로 돌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나……. 어떤 책을 읽다가 사진 한 장을 보게 됐어. 1990년, 보이저 1호가 저 하늘로 60억 킬로미터를 가서 지구를 찍은 사진이었는데, 지구가 점 하나로밖에 보이지 않는 거야. 그걸 보니까 갑자기 막 기분이 묘해지면서 허무감이 느껴졌어. 지구에는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또 수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그 모든 게 겨우 점 하나에서 눈에 보이지 않게 이루어져 왔던 거야. 아, 모든 건 이렇게 작고도 초라한 거였구나. 이런 걸 느끼니까 갑자기 삶의 의욕이 사라졌어. 그래도 계속 삶을 살다 보니까 그걸 잊게 됐는데, 첫 현실을 마주하게 되니까 다시 그게 떠올랐어. 여러 사람들과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해 경쟁해야 하는데, 꼭 그런 허무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살아야 하나? 애초에 난 특별해 보이지도 않고, 그런 것들이 모두 허무하게 느껴지는데, 굳이 압박을 견디며 경쟁해야 하나? 왜 그런 경쟁을 위해서 질타를 받고, 좌절하고, 다시 일어서야 하지? 그리고 왜 평가 받아야 해? 그냥 이 모든 게 싫었어.”
재욱은 저 멀리 빛을 내고 있는 별을 응시하고 있었다.
“결국엔 모두 허무하게 끝날 텐데…….”
마음속이 공허했다. 공부도, 오락도, 게임도, 노는 것도 모두 지겨웠다. 너무 허무했다. 이렇게 얘기를 나누는 시간도 결국 과거로 묻히게 되겠지. 재욱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의 옆모습을 보며 소하는 알게 되었다. 왜 재욱이 그토록 특이한 걸 좋아했었는지를. 분명히 재욱은 이런 지겹고 허무한 현실이 싫었으리라. 그는 언제나 가슴이 뛸 만큼 특이하고 신기한 것을 찾아내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소하 또한 미소를 짓고 밤하늘에서 작게 빛을 비추는 별을 응시했다.
“그거 알아? 이렇게 별을 지나치게 집중해서 똑바로 보면 나중에 별이 안 보인다. 그저 올바로 보려 했을 뿐인데 오히려 안 보이게 된다니, 신기하지?”
소하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 소리를 들은 재욱은 소하를 보았다.
“지나치게 통찰하려 하면 오히려 네가 봐야할 것을 못 보게 돼.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게 허무해져도 그걸 지나치게 똑바로 보려 해선 되려 살아가는 법을 잊게 될 거야.”
소하는 말을 이어갔다.
“재욱아, 60억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지구는 점 하나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6센티미터 떨어진 곳에서 우리는 지구를 더 크게 보면서 살 수 있고, 이렇게 서로를 볼 수 있어. 게다가 앞에 보이는 멋진 경치도 지구의 극히 일부일 뿐이잖아. 크게 볼 수 있는 게 아주 많아. 그리고 생각할 게 있으면 여기 앉아서 편하게 생각할 수 있고, 카페에 가면 용돈으로 카페모카를 사먹을 수 있고, 또 자기가 재밌어 하는 일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알고, 많은 것을 느끼면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위치에서 그저 짜릿하게, 재밌게 살면 되는 거야.” “…….”
그 단순한 말을 듣는 순간, 재욱은 소하로부터 감성이 자극받는 걸 느꼈다. 그녀가 진심을 다해 말하고 있기 때문일까? 매우 묘한 감정이 들었다. 그것은 어쩌면 60억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6 센티미터 앞으로 다가온, 삶에 대한 의욕이었는지도 몰랐다.
“아.”
소하는 수능용 손목시계를 보았다. 시간은 오후 11시 24분이었다. 시간이 좀 늦은 것 같다고 그녀는 느꼈다. 그녀는 두 다리를 앞으로 뻗었다가 다시 내려놓으며 읏차,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재욱의 앞에 서서 재욱을 바라보았다. 재욱은 의아해하며 소하를 올려다보았다.
“야, 마지막. 약속해.”
소하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주먹에서 엄지와 새끼손가락만 펼친 형태.
“절대 자기 목숨 버리지 않고 재밌게 살겠다고.” “…….”
재욱은 소하가 내민 손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고맙다고.
“그래, 약속.”
재욱이 웃으면서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서로의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를 마주 대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서로는 피식거렸다. 그렇게 재욱을 바라보고 있던 소하는 어째서인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서 손을 떼었다. 기분 탓일까. 가로등에 비춰진 그녀의 얼굴이 붉어진 것 같았다.
“그……, 시간 늦었어. 가자. 부모님이 걱정하셔.” “응.”
재욱은 대답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은 서로 자기 가방을 어깨에 메고 언덕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둑한 밤하늘 아래 가로등이 비추는 길.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재욱은 입을 열었다.
걸어가면서 재욱과 소하는 여러 얘기를 나눴다. 학생으로서 주고받는 그런저런 평범한 얘기들. 재욱은 거리낌 없이, 어색한 기운도 없애기 위해 자신한테 얘기를 건네는 소하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정말 좋은 친구를 뒀다고, 재욱은 생각했다.
알람소리가 시끄럽게 울려댔다. 귀를 파고드는 그 소리가 재욱을 단번에 꿈속에서 빠져나오게 했다. 재욱은 천천히 눈을 뜨며 익숙한 연파랑 천장을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책상 쪽으로 돌려보았다. 시끄럽게 울려대는 알람과 함께 펼쳐진 영단어 책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히 정신과 의사가 말했던 두 번째 자아가 저런 거겠지. 재욱은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침대에서 내려와 책상 위에서 소리를 지르는 알람을 껐다. 다시 조용해진 분위기. 재욱은 책상 위에 펼쳐진 영단어 책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번뜩 ‘학교 가야지’란 생각에 그는 방을 나서서 샤워실로 향했다.
교복 차림의 재욱은 아침공기를 마시며 길을 걸었다. 아침하늘이 맑았다. 어째선지 오늘은 아침하늘이 재욱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아침공기도 너무 시원하게 느껴졌다. 기분이 좋아진 재욱은 심호흡을 하며 계단을 올랐다.
“…….”
그 학생, 아니, 재욱의 자아가 두 다리를 육교 안쪽으로 향하도록 두고 난간 위에 엉덩이를 올려두고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안경을 벗은 재욱의 모습. 어째선지 그의 표정엔 예전과 같은 섬뜩함이 아니라 허무감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재욱은 무언가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그 자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 자아의 옆에서 난간 위에 두 손을 얹고 앞에 펼쳐진 도로의 경관을 보았다.
“뭐 하냐?” 재욱이 물었다. “하늘 구경.”
재욱의 자아는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넌 원래 아침하늘 안 보잖아.” “맞아. 난 밤하늘만 좋아했어. 그런데 오늘은 왠지 아침하늘도 좋네.”
재욱은 자신의 자아를 올려다보았다. 그제야 왜 이 자아가 밤에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는지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넌 왜 밤하늘을 좋아하냐?” 재욱이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리며 물었다. “난 너니까.” “아, 그렇지.” “넌 왜 밤하늘을 좋아하냐?” “몰라?” “응. 난 너지만, 나와 넌 다른 정신을 가지고 있잖아.” “그래?”
재욱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공부를 시작했거든. 어떤 예쁜 선생님 때문에. 그래서 어느 날 공부방에서 공부하고 밤늦게 나왔는데, 그때 밤하늘이 되게 아름답더라. 그래서일 걸.” “참 더럽게 감성적인 이유네. 더 의미심장한 이유였으면 만족스러웠을 것 같은데.” “싫냐?” “싫은 정도는 아니야. 그냥 덜 만족스럽다고.”
자아가 재욱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화 안 내네.” “내가 왜?” 재욱이 의아해하며 자아를 쳐다보았다. “눈치 챘잖아. 어제 내가 너 떨어뜨리려고 했던 거. 얼마 전에도 내가 널 죽이려고 했고.” “와, 그걸 대놓고 말해?”
재욱이 웃었다.
“웃기까지 하네.” 자아가 말했다. “지금 기분이 좋아서 그런가봐.” “말도 안 돼.” 자아가 웃었다. “야, 좀 묻자. 넌 왜 날 죽이려 하냐? 넌 나잖아.” “모르겠냐?” “응.”
자아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냥 그게 내 본성이야. 난 그걸 위해 태어난 거고.” “무슨 소리야?” “넌 사람들이 가끔씩 힘들 때 왜 자살하고 싶어 하는지 알아?” “우울해서.” “맞아. 누구나 슬퍼하고, 우울해서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가끔 있어. 그때마다 나 같은 놈들이 나타나. 다 그 사람들한테서 파생된 거지. 난 단순히 너에게서 파생됐는데, 그게 자아로서 확실해졌을 뿐이야. 다른 사람들의 속에선 나 같은 게 그저 스스로가 뭔지도 모르는 채 존재해.” “그럼 넌 내가 자살하고 싶을 때 태어났냐?” “글쎄…….”
자아는 고개를 숙였다. 그는 스스로도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 몰랐다. 그저 스스로가 누구인지만을 알 뿐이었다.
“나도 잘 몰라. 내가 이렇게 스스로를 자각하고 있는 걸 보니까, 넌 그냥 안 좋은 쪽으로 특별했을 뿐이야.” “넌 뭐 이리 복잡해?”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넌 뭐 이딴 병이나 걸려서 내가 태어나게 했냐?”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둘은 웃었다. 잘 모르겠지만, 즐거웠다. 재욱은 의아해했다. 왜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놈한테 이리도 즐거워하는 걸까? 왜 마음이 이리도 왔다갔다 거리는 걸까?
“이상해. 넌 분명히 날 죽이려고 하는 놈이잖아. 왜 이렇게 친해진 것 같지?” “네 마음이 안 걸 거야.” “뭘 알아?” “어제도 말했지? 알았다는 건 꼭 이성만으로 의미가 한정되지 않아. 경험으로나 감성으로도 알았다는 표현을 쓸 수 있어. 이번에도 넌 후자에 속하는 거야.”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잘 이해가 안 돼. 그러니까 내 마음이 널 친구처럼 여기게 된 거라고?” “아니, 이제 내가 널 죽일 일이 없을 거라는 걸 네 마음이 안 거야.” “……?”
재욱은 놀라며 자아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자아는 그저 하늘만 올려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물어볼게. 넌 이제 어떻게 살 거야?” “…….”
그 질문은 재욱의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어제 소하와의 얘기를 떠올리며 재욱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대답했다.
“짜릿하게 살아야지.”
60억킬로미터 너머에서 6 센티미터 앞으로 다가온 삶에 대한 의욕. 그것이 지금 재욱의 마음을 에워싸고 있었다.
“좋네.”
자아가 웃으면서 재욱을 보며 말했다.
“내가 하는 말, 잘 새겨들었으면 좋겠다.” “뭔데?” 재욱이 자아의 눈을 보았다. “네 인생은 한 번이다. 현실적으로 널 볼 줄 아는 건 중요하지만, 현실적으로 널 규정할 틈은 없어. 그러니 짜릿하게 살고 싶으면 뭐가 됐든지 간에 제대로 덤벼봐.” “당연한 거 아냐?”
둘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럼 마지막으로 말할게.”
자아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러자 그의 몸이 서서히 뒤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도전하는 네가 옳다.”
그 말을 하고나서, 그의 몸이 난간 위에서 도로 쪽으로 떨어졌다. 그는 떨어지면서 재욱에게 웃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안녕, 나야.’
그의 웃는 얼굴은 왠지 안심한 듯한 표정이었다. 이제 됐다는 듯이, 그의 몸은 계속해서 떨어졌다. 그렇게 재욱의 자아는 사라졌다. 재욱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
적막함. 그 어떤 소리도 없이, 재욱은 도로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잘 가라.”
그는 난간에서 팔을 떼고 다시 학교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헉!”
7시 56분. 지각이다! 재욱은 깜짝 놀라더니 얼른 학교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달리다가 중간에 한 번 넘어질 뻔했지만 얼른 중심을 잡고 계속 달려갔다.
일요일, 새벽 4시. 재욱은 눈에 불을 켜고 언어 문제집을 풀고 있었다. 졸리긴 했지만, 두 번 정도 졸음을 참고 나니 어느 정도 견딜 만 한 수준이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왼쪽 팔뚝에 툭툭, 누군가가 건드리는 느낌이 났다. 재욱은 깜짝 놀라면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안경을 쓰고 있고, 검은 후드티, 츄리닝 바지 복장의 재욱의 모습을 가진 누군가가 서 있었다. 이 남자는 분명히 정신과 의사가 말했던 두 번째 자아이리라, 하고 재욱은 생각했다.
“넌 누구야?” 자아가 물었다. “난 너야.” “나라고?” “응.” “무슨 헛소리야?” “내가 날 한심스러워하면서 공부 때문에 압박을 느낄 때 네가 태어났어. 공부하느라 많이 힘들었지? 이제 쉬어. 이제 그 압박에 지배받지 않을게.” “…….”
자아는 자신의 오른손을 펼쳐서 그 손바닥을 보았다. 그러더니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무슨 생각을 저리 하는 걸까? 재욱은 궁금해 했다.
“그랬구나……. 그랬던 거였어.”
자아는 눈물을 흘렸다.
“난 나 자체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었구나…….”
자아는 울면서 웃었다. 기쁨 때문일까, 아니면 허탈감 때문일까? 재욱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아니, 또 다른 자아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슬퍼지는 걸 느꼈다.
“미안해.” “아니야. 괜찮아. 정말로.” “…….” “갑자기 느낌이 확 오네. 내가 누군지 확실히 알 것 같아.”
자아는 웃으면서 팔로 눈물을 닦고 재욱을 보았다.
“행복해야 돼, 꼭! 네가 사는 인생이 행복해야 돼!” “알았어, 꼭 그럴게.” “그래, 그럼 됐어. 된 거지…….”
자아는 살며시 오른손을 들어 흔들었다.
“안녕. 난 갈게.” “어디로?” “내가 태어났던 곳에.”
재욱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안녕.”
그 말을 하고나서 눈을 깜박인 찰나였을까, 재욱의 자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재욱이 잠들었을 때 재욱의 몸을 사용하던 그 자아가 어떻게 재욱의 눈앞에 나타난 걸까? 재욱은 그 이유를 추측했다.
‘내 마음이 많이 달라졌구나…….’
그는 미소를 짓고는 다시 책상 쪽으로 고개를 돌려 책을 읽었다. ‘이 문제만 풀고 자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시간이 흘러, 수능 날이 되었다. 재욱은 처음 보는 고등학교에 가서 수능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그는 학교의 어수선한 교문에서 찹쌀떡을 받아먹었다. 오늘은 컨디션이 최고라고 재욱은 생각했다. 그렇게 시험을 치렀다. 언어, 수학, 영어, 사회탐구. 재욱은 최대한 열심히 머리를 굴려 문제를 풀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 대학에 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한 여학생한테 마음이 팔리고, 공부도 등한시했던 자신에게 이런 결과가 초래된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여겼다. 결과는 노력에 비례한다. 그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마음속에 새겨놓고 이번 수능 성적 때문에 낙심하는 일이 없도록 했다. 오히려 이 기회에 제대로 덤벼볼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재욱의 친구들은 각자 원서를 넣고 합격한 대학교에 입학했다. 소하는 이번에 목표로 하던 K대에 합격했다. 그들이 대학에 합격했다고 기뻐할 때 재욱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걸 느꼈다.
친구들은 올해 대학에 떨어진 재욱을 걱정스러워했다. 소하와의 약속대로 그녀에게 카페모카를 사준 날, 카페에서 얘기를 나눌 때 소하는 진심으로 재욱을 걱정했다. 하지만 재욱은 열심히 해서 내년에 꼭 대학에 합격하겠다는 다짐을 그들에게 보였다.
재수 생활. 그는 학원에 다니지 않았다. 스스로 노력해서 공부하는 법을 터득하기 위함이었다. 재욱이 겪었던 정신병 때문일까. 부모님은 재욱에게 그 어떤 화나 꾸중도 내지 않았고, 그저 재욱의 재수 생활을 격려해주었다. 그들은 재욱이 좌절해하지 않는 것에 고마워했다.
재욱은 재수 생활 동안 전철을 타고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어째선지 많은 것을 보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었다. 그렇게 돌아다니던 재욱의 손에는 항상 영단어가 적혀진 쪽지가 들려 있었다.
그는 가끔씩 소하에게 문자를 보내 같이 카페에 가서 공부하자는 부탁을 했다. 재수 생활 동안 혼자서 외로이 공부만 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어째선지 소하는 항상 이런 재욱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렇게 약속을 한 재욱은 소하가 있는 안암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안암에 있는 카페에서 소하와 함께 커피를 마시며 짧은 잡담을 나누고 공부를 했다.
그렇게 재수 생활을 하면서 재욱은 스스로 공부하는 법을 터득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더욱 열심히 공부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공부가 더 재밌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것은 알아가는 재미, 문제를 풀어가는 재미였다.
그리고 1년이 흘렀다.
“……후우.”
가슴이 이토록이나 콩닥콩닥 설레였던 적이 있었던가. 그는 신촌의 땅을 밟은 채 명문대 중 하나인 Y대의 교문 앞에 서서 넓은 캠퍼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속에서 짜릿함이 느껴졌다. 그래, 이거였지. 이거였어. 대학 합격 통지서가 날아왔을 때 소리를 지르며 온 동네를 미친놈처럼 달렸었다. 힘들었지만, 재미도 있었던 지난 재수 생활. 그 기쁨의 결실이 지금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재욱은 고개를 들고, 두 팔을 양옆으로 벌려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 상쾌한 공기. 그리고 맑은 하늘.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힘껏 외쳤다.
“덤벼라!!!”
교문을 들어서던 학생들의 시선이 온통 재욱을 향했다. 그런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재욱은 얼른 교문을 들어섰다. 60억킬로미터 너머에서가 아닌, 지금 이 자리에서 보며 그는 짜릿함을 안고 앞으로 달려갔다.
(펌) 60억킬로미터下
다음 날, 금요일. 재욱은 부모님의 권유에 따라 학교를 쉬고 제법 멀리 있는 정신 병원에 갔다. 오늘은 부모님도 일을 나가지 않았다.
재욱은 넉넉하게 시간을 잡고 세밀하게 종합검진을 받았다. 모든 검진을 받고나서 재욱과 부모님은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 정신과 전문의에게서 검진 결과를 듣게 되었다.
“시간을 두고 더 자세히 지켜봐야 알겠지만, 현재로써는 지금 학생이 가지고 있는 병은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동반한 정신분열증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네요. 그러니 일단 이 추측을 바탕으로 설명해드릴게요. 해리성 정체감 장애란 쉽게 말해 다중인격 장애인데, 여기에 정신분열증 증세까지 가미해서 환각을 보거나 환청을 들을 수 있는 거죠. 해리성 정체감 장애에 걸린 사람들은 대부분 기억 상실 증세를 보여요. 한 사람의 몸 안에서 여러 개의 자아가 왔다갔다 거리기 때문이죠.”
의사는 재욱의 뒤에서 나란히 서있는 재욱의 부모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자 재욱의 어머니가 소리 없이 울고 있는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학생의 어머니 분께서 이곳에서 심리검사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 학생이 가진 병을 어머니 분도 가지고 계셨거든요. 일반적으로 정신병 또한 유전이 되기도 합니다. 아마도 학생 분도 그 병을 유전 받았기 때문에 이런 지경에 놓이게 된 걸지도 몰라요.”
재욱의 어머니는 계속 소리를 죽여 눈물을 흘렸다. 재욱과 그의 아버지는 잠시 그녀에게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의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의사는 검진 결과가 적힌 종이를 보며 말을 이었다.
“검사 결과를 말씀드릴게요. 현재 알 수 있는 바로는, 이재욱 학생의 몸 안엔 세 개의 자아가 있는 것 같네요. 첫 번째 자아는 평소 때의 본인이고, 두 번째 자아는 학생이 잠들었을 때 학생 몸을 사용해 공부하는 자아, 그리고 세 번째는 학생을 죽이려는 자아……. 두 번째 자아는 학생이 수험생이니 공부를 잘해서 대학에 합격해야 한다는 스트레스 때문에 생겨난 것 같아요. 이 자아 때문에 학생은 매일 아침마다 책이 펼쳐져 있는 걸 보고 위화감을 느꼈던 거고, 수면 시간이 줄어들어서 많이 피곤했던 거죠.”
그랬구나, 하고 재욱은 이해했다. 곧이어 다음 설명을 하려던 의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 심각한 표정으로 재욱을 바라보았다.
“문제는…… 세 번째 자아예요. 이 자아는 스스로 학생에게 환각으로서, 환청으로서 작용합니다. 그리고 명확한 모습으로 나타나 학생을 죽이려고 해요. 이 자아는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건 정말로 위험한 겁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지 학생이 죽을 위험이 있어요. 게다가 그건 남들이 보기에 자살하려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구요.”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인식하고 있는 또 다른 자아.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는 자아.
재욱은 섬뜩해했다.
“지금 학생이 가지고 병은 아무리 유전병이라고 해도 분명히 어떤 충격이 원인이 되어 발발한 걸 거예요. 그리고 그 충격을 받았을 때 세 번째 자아가 탄생했을 겁니다.”
“…….”
어제 봤던 그 학생의 모습은 재욱의 눈앞에 진한 잔상으로 남아 있었다.
자신을 죽이려는 존재가 있다. 그러나 그 존재는 외부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경찰에 신고해도 잡을 수 없다.
자신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 언제든, 어떤 장소에서든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언젠간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 무서웠다. 온몸에 소름이 확 돋는 게 느껴졌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의 원인은 매우 다양해요. 어릴 적에 심한 폭행을 당했다든지, 어떤 사건으로 인해 큰 충격을 받았다면 그게 이 병의 원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현재로써는 학생이 이런 걸 경험해본 적이 없다고 해서 원인을 파악하기는 힘듭니다. 그래도 일단 세 번째 자아가 학생이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가질 때 처음 생겨난 자아였을 거란 건 추측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가장 분명한 모습으로 학생 앞에 나타났으니까요. 그 자아가 최근 들어 학생 앞에 나타났다는 건 학생이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가졌던 원인이 최근에 또다시 강하게 발현돼서 그런 것일 가능성이 높아요.”
어떤 사건을 계기로 재욱은 ‘해리성 정체감 장애’란 병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재욱을 죽이려는 자아가 생겨났다. 그리고 최근에 재욱이 해리성 정체감 장애란 병을 얻게 된 원인이 다시 발현되어 그 자아가 재욱에게 나타났다. 그럼 그 원인이란 뭐지?
“학생은 스스로의 기억 속에서 그 충격을 찾는 게 중요해요. 아마 그 충격은 학생에게 우울증이나 스트레스 같은 걸 전해줬을 겁니다. 최근에 수능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터인데, 그걸 잘 파고들어서 고민해보셨으면 합니다. 학생은 왜 자신이 해리성 정체감 장애에 걸렸는지 그 원인을 기억하고, 정신을 개선하기 위해서 힘쓰시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절대로 우울해하지 마세요. 세 번째 자아는 학생이 우울해할 때 나타나는 것 같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재욱이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머니와 재욱은 정신 병원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아 아무 말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늘 날씨는 제법 맑다고 재욱은 생각했다. 곧 아버지가 캔 음료수 세 개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재욱의 옆에 앉으며 재욱에게 음료수 하나를 건네주었다.
재욱은 멍하니 캔 음료수를 바라보기만 했다. 부모님도 재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머니, 아버지.”
“응, 왜 부르니?” 어머니가 물었다.
“미안해. 이런 병이나 걸려서.”
“…….”
재욱이 캔 음료수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무표정으로 사과했다.
“아니야, 재욱아…….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잘못 했어…….”
어머니는 현재 재욱이 가지고 있는 병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그때의 섬뜩함과 위화감. 그러나 지금 재욱의 상태는 더욱 심각하다. 재욱에게는 스스로를 죽이려고 하는 자아가 있다. 그걸 생각하니 어머니는 참을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조용히 재욱을 감싸 안았다.
아버지도 어머니와 함께 재욱을 꼬옥 안아주었다.
재욱은 육교에서 난간에 두 팔을 얹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검게 물들여진 하늘은 언제나처럼 재욱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
재욱은 정신 병원 입원을 권고 받았다. 하지만 극구 사양했다. 처방도 받았지만 약을 먹지 않았다. 재욱은 그저 스스로 지금 자신이 걸린 정신병의 원인을 찾고, 해결하고 싶다고 했다. 절대로 우울해하지 않겠다는 말에 부모님은 그의 의사를 존중해주었다.
그래서 어제 다쳤던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따끔거리는 고통을 참고 도착한 곳이 바로 이 곳, 육교였다. 왜냐하면 재욱을 죽이려던 자아가 있던 곳이 바로 이곳, 이 자리였기 때문에.
“우울해하지 않으면 나타날 수 없나…….”
재욱은 독백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직접 물어보고 싶다고.
그 자아한테 ‘내가 어쩌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에 걸린 거야?’라고 물어본다면 대답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그의 마음속에 있었다.
“…….”
그러나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재욱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그렇게 그는 계속 가만히 서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밤하늘이 주는 편안함 때문인가. 어째선지 그는 계속 이렇게만 있고 싶어 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하늘을 올려다본 탓일까.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지난 세월을 돌아보게 되었다.
순수했던 지난 날, 그는 공부도 안 하고 놀기만 했던 불성실한 아이였다.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 때 예쁜 여자 선생님 덕분에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고등학교 3학년인 지금까지도 공부에 힘쓰고 있었다. 정말로 평범한 인생이었다. 뭐 하나 특별하게 내세울 거 없는 한 학생의 평범한 인생. 두근거릴 것도 없는 그저 그런 인생. 재욱은 이런 걸 싫어했다. 그래서 그는 평범한 현실과는 동떨어져서 스릴이나 신비감을 주는 미스터리나 추리 같은 걸 좋아했다. 그는 UFO를 좋아했고, 불가사의한 것을 좋아했고, 추리를 하고 범인을 잡아내는 탐정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런 것들에 빠져 살아도 현실이 허무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작은 점 하나에서 벌어지는 일들. 그 아무런 형태도 없는 일들. 이 모든 허무한 것들은 그저 공허함만 안겨줄 뿐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랬지. 인생은 허무해.’
재욱은 하늘에 박힌 별 하나를 바라보았다. 별은 계속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그 별을 보다가 다시 재욱의 머릿속에 초등학생 때 봤던 사진 한 장이 떠올랐다. 60억킬로미터 너머에서 지구를 찍은 사진. 그 사진은 지금까지도 재욱의 마음속에 선명히 박혀 있었다. 마치 저 별처럼.
‘너무 허무해. 겨우 점 하나인데.’
그 허무한 것들을 위해 사람들은 싸운다. 실력을 길러 경쟁자들을 짓밟는다. 얻어봤자 허무할 뿐이고, 얻지 못하면 슬픔과 좌절이 닥쳐온다.
그렇다. 겨우 이럴 뿐이다. 뭘 하든, 어떻게 살든 이런 식일 뿐이다.
“…….”
갑자기 어떤 묘한 기분이 재욱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다시 떠오른 허무한 느낌. 자신에 대한 한심스러움.
“아, 그랬지. 그랬어.”
그랬어. 그랬던 거야.
어째서일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발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는 아무 생각 없이 한쪽 발을 난간 위에 올렸다. 그리고 두 손으로 난간을 잡고, 팔에 힘을 줘서 몸을 난간 위로 올라가게 했다. 곧이어 그는 상체를 일으키면서 반대쪽 발도 난간 위로 올려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
난간에 닿은 발바닥이 따끔거렸으나 그 고통은 재욱의 마음에 그 어떤 영향도 주지 못했다. 이 허무한 감정. 이 허무한 노력. 이 허무한 고통. 재욱은 난간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서 도로를 내려다보았다. 어째선지 아래에 있는 도로가 무섭지 않았다.
‘모든 건 허무해.’
그저 그의 몸이 아무 반항 없이 마음만을 따랐음을 그는 알았다.
그때, 그의 옆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재욱.”
“……?”
재욱은 소리가 들린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재욱은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바로 그의 옆에서 재욱을 죽이려고 했던 학생이 재욱처럼 난간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있기 때문이었다. 그 학생의 얼굴은 어째선지 어둡지 않았고, 눈도 정상적으로 붙어 있었다. 그는 평소 때처럼 세연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고, 안경을 벗은 재욱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었다.
“왔구나.”
그런데 어째서일까. 재욱은 이를 당연하게 여겼다. 마음에서부터 재욱은 그를 반기고 있었다.
“눈이 붙어 있네? 재욱이 물었다.
“이제 넌 내가 누군지 알게 됐잖아. 넌 날 모르기에 내 얼굴이 그토록 어둡고, 눈이 안 보였던 거야. 그래도 난 네가 더 빨리 나를 인지하길 바랐어. 그래서 네가 입는 교복을 입고 나타났던 거야.”
그래서 이름표를 보고 판단할 수 있었던 건가.
재욱은 그 자아의 대답을 듣자 기분이 오묘해지는 걸 느꼈다.
“이제 좀 알게 됐어?” 자아가 물었다.
“응. 네가 왜 날 죽이려고 했는지도 알 것 같아.”
“그거 다행이네. 날 이해해줬다니.”
자아가 기분이 좋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곧이어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재욱도 그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칫하면 단번에 아래로 떨어질 수 있는 상황 속에서도 재욱은 태연했다. 무언가 허무한 감정이 그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왜 겁이 안 나지?” 재욱이 하늘을 보며 물었다.
“겁이 나는 게 이상한 거야. 넌 알았으니까.”
“알았다고 해서 몸이 바로 그걸 따를 수 있는 건가?”
“알았다는 건 꼭 이성만으로 의미가 한정되지 않아. 경험으로나 감성으로도 알았다는 표현을 쓸 수 있어. 넌 후자에 속하는 거야.”
“……그렇구나.”
내 마음은 그걸 안 거구나.
재욱은 자신의 자아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시 도로를 내려다보았다. 몇몇 차량들이 지나다니는 도로. 이곳에서 떨어져 머리부터 바닥에 닿는다면 분명히 즉사하리라.
재욱은 다시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보았다. 지금도 밤하늘은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어느새 그의 머릿속에 중학교 3학년 때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공부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시기, 공부방에서 공부한 뒤 늦은 시간에 귀가할 때 그는 밤하늘을 보았다. 그때 보았던 밤하늘만큼 아름다운 것이 없었다. 밤하늘은 한두 번 본 것이 아니었는데, 왜 그땐 그렇게 밤하늘이 아름다웠을까. 어째선지 지금 보고 있는 밤하늘도 그때의 밤하늘처럼 아름답다고 재욱은 생각했다.
“야.” 재욱이 자아를 불렀다.
“왜?”
“알려줘서 고맙다.”
“고맙긴……. 아무튼 잘 가라.”
“응.”
곧 그의 몸이 서서히 앞으로 기울어졌다. 재욱은 균형을 잡을 수 있는 마지막 타이밍도 지나쳤다. 이제 끝이다. 이 허무한 세상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된다. 자신의 한심스러움 때문에 자책할 필요도 없게 되고, 허무한 것을 쟁탈하기 위해 남들과 경쟁할 필요도 없게 된다.
재욱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난간에서 발이 떨어지기 전에 자신의 자아의 모습을 보았다.
“……!”
재욱의 그 모습을, 재욱의 자아는 섬뜩한 미소로 바라보고 있었다.
‘안 돼……!’
왜일까. 재욱은 지금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 뭔가가 잘못됐다고, 이래선 안 된다고 속으로 울부짖었다. 하지만 이미 균형을 잡을 수 없게 됐다. 이제 죽는다.
‘날 속였구나!’
재욱은 원망과 공포에 찬 눈빛으로 자신의 자아를 노려보았다.
지금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건 두려움과 공포감. 안 돼, 안 돼! 살려줘! 순식간에 그런 외침이 재욱의 속에서 쾅쾅 울려댔다.
“……!”
그때였으리라. 난간에서 발이 떨어지려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재욱의 왼쪽 팔을 빠르게 낚아챘다. 그 누군가는 두 손으로 재욱의 왼쪽 팔목을 꽉 잡고 육교 쪽으로 힘껏 끌어당겼다. 깜짝 놀란 재욱은 그로 인해 도로가 아닌 육교 안쪽으로 몸이 기울어졌다. 그리고 난간 위에서부터 쾅 넘어져버렸다. 몸의 왼쪽 부분이 바닥에 닿은 채 누워 있던 그는 “으윽…….”하고 잠시 고통에 신음하다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을 끌어당긴 사람을 보았다.
“끄아아아…….”
노소하, 교복 차림의 그녀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는지 앉아서 엉덩이를 만지며 고통스러워했다. 그 모습을 본 재욱은 당황스러워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야, 이 바보야!! 뭐하는 거야!!”
소하가 재욱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
“네가 어떻게……?”
“야자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아…….”
“여기서 왜 떨어지려 했어? 왜 떨어지려 했냐고!”
“…….”
재욱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갑자기 그의 마음이 이상하게 꿈틀거렸다. 방금 전 자신이 하려던 짓을 마음이 인식한 탓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죽으려할 때 두려움을 느낀다. 그게 정상이다. 그리고 지금, 재욱은 다시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
재욱은 고개를 들어 난간 위를 쳐다보았다. 어느새 재욱의 자아는 사라지고 없었다.
“야, 이재욱!!”
“…….”
대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재욱도 방금 전 인생을 포기하려 했던 자신의 마음을 확실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휴우.”
소하가 가슴에 손을 얹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흥분된 마음을 추스르는 것 같았다. 곧이어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치마를 털고 재욱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일어나. 같이 갈 데가 있어.”
“아……, 고마워.”
재욱은 소하의 오른손을 잡고 천천히 일어났다. 그러자 발바닥에서 따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왼쪽 팔뚝도 까졌는지 따가웠다. 하지만 재욱은 내색하지 않았다. 곧 소하는 재욱에게서 손을 떼고 갑자기 뒤쪽으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재욱은 어리둥절해하다가 그녀의 압력을 이기지 못해 결국 그녀를 뒤따라갔다. 걸을 때마다 따끔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제법 참을 만 했다.
소하가 안내한 곳은 어느 아파트 단지 소유의 넓은 공원이었다. 아파트 단지와 공원이 입지한 곳이 산을 깎아서 만들어졌는지 공원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소하와 재욱은 그 계단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더 넓은 공간이 재욱의 눈앞에 펼쳐졌다. 아래에 있는 공원처럼 정자나 벤치, 운동기구 등이 설비된 두 번째 공원. 소하와 재욱은 여러 꽃이 핀 뜰 옆을 지나며 언덕 형태의 돌바닥을 걸어 위로 걸어갔다. 제일 위쪽에는 가로등 하나가 빛을 비추는 벤치가 하나 놓여 있었다. 소하는 옆에 가방을 두고 벤치에 앉았고, 재욱은 소하를 보며 잠시 망설였다.
“뭐해? 앉아.”
소하가 재욱을 보며 말했다. 그 말에 재욱은 “아, 응.”하고 소심하게 대답하고는 가방을 옆에 두고 소하의 옆자리에 살며시 앉았다.
평소에 숫기가 없는 재욱한테 여자와 둘만 있는 시간은 매우 부담스러웠다. 재욱은 그저 앞만 보면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곧 그는 눈에 놀라움이 가득 찼다. 그의 앞에 공원을 넘어서 더 넓은 동네의 경치가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우리 동네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와…….”하고 재욱은 경탄했다.
“경치 좋지? 난 뭔가 생각하고 싶은 게 있을 때면 자주 여기에 와. 여긴 우리 학교에서 나만 이용하는 곳인데, 어쩌다보니 너한테도 알려주게 됐네.”
소하가 재욱을 보면서 피식거리며 말했다.
“우리 동네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은 몰랐어.”
“여길 알게 돼서 고마우면 나중에 갚든지.”
“뭘로 갚을까?”
“음……, 카페모카 한 잔?”
“그럴게.”
“히, 고마워.”
제법 괜찮은 요구인 것 같다고 재욱은 생각했다.
“근데 오늘 왜 학교에 안 나왔어?”
“그냥 좀 열이 나서…….”
“아하, 그랬구나. 열은 좀 나아졌어?”
“응.”
“다행이다.”
간단한 얘기를 마치고 난 뒤, 그 둘은 서로 앞에 펼쳐진 경치를 보면서 고요한 바람에 몸을 맡겼다. 잠시 가만히 있던 소하가 입을 열었다.
“재욱아.”
“응.”
“왜 아까 떨어지려 했어?”
“…….”
본래 묻고 싶었던 걸 묻는 건가. 재욱은 눈동자를 돌려 소하를 보았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재욱은 고심하면서 다시 눈을 앞으로 돌렸다. 그렇게 몇 초 간 정적이 흐르자 소하는 고개를 돌려 다시 재욱을 보았다.
“혜민이한테 차여서?”
혜민이라면 재욱이 세연고등학교에 들어온 뒤로 1학년 때부터 쭉 짝사랑해왔던 여학생의 이름이었다. 재욱은 그녀에게 고백을 했으나 차였고, 그녀는 현재 다른 남자친구를 사귀고 있었다.
“아니면 대학 때문에?”
자신의 실력을 한탄하던 재욱한테 대학이란 스트레스 그 자체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 두 가지는 재욱은 우울하게 만들기는 하였으나, 재욱이 떨어지려 했던 이유가 아니었다. 어째서인지 재욱은 그 이유를 아는 것 같았다. 스스로도 의아해할 정도로.
“대답하기 어려운 거야?”
“잘…… 모르겠어.”
소하의 물음에 재욱은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확실하지 않은 대답. 듣는 이에겐 답답할 수도 있는 대답. 재욱은 이런 대답을 해서 속으로 소하에게 미안해했다. 하지만 소하는 별로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그리고 두 손으로 허벅지 아래에 있는 벤치 모서리를 잡고 허리를 바짝 세워 잠시 경치를 바라보다가 말을 꺼냈다.
“있잖아, 난 어렸을 적에 친구가 한 명도 없었어. 친구 사귀는 게 싫었고, 시끄러운 것도 싫었고, 그냥 조용히 혼자 있는 걸 좋아했어. 근데 언제부터인가, 정말로 나 혼자만 남게 된 거야. 주변에 아무도 없었고, 시끄러웠던 것들도 모두 사라졌어. 그게 정말 좋았어. 어딜 가든 조용했고, 언제나 부담감 없이 혼자 편하게 지낼 수 있었거든. 근데 그곳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겪고 나니까 되게 가슴이 아프고 저려왔거든. 왜 그랬는지 알아?”
“……?”
재욱은 소하를 보았다. 소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어갔다.
“외로워서. 혼자 있는 게 좋았는데, 계속 혼자 있다 보니까 알게 된 거야. 난 무지 외로웠구나…….”
소하는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돌려 재욱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을 본 순간 재욱은 그 어떤 슬픈 감정을 느꼈다. 소하는 분명히 웃고 있는 데도 슬퍼하고 있었다. 그때의 기억이 그녀의 가슴을 언제나 옥죄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걸 알고 나서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왔어. 주변에 사람들이나 시끄러웠던 것들이 다시 나타난 거야. 그래서 얼른 애들한테 다가갔어. 그렇게 친구를 사귀게 되고, 같이 놀게 되고……. 같이 공기를 하는 건 너무 재밌었어. 게다가 언제든 마음 편하게 얘기할 수 있고, 재밌게 장난칠 수 있고……. 그러니까 재욱아, 너도 혼자 끙끙 앓지만 말고 나한테 속 편히 얘기해봐. 외롭지 않게. 넌 내 친구잖아.”
“…….”
어째서일까. 재욱은 소하의 맑은 눈동자를 보면서 이 아이한테는 속마음을 편하게 얘기해도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는 고개를 앞으로 돌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나……. 어떤 책을 읽다가 사진 한 장을 보게 됐어. 1990년, 보이저 1호가 저 하늘로 60억 킬로미터를 가서 지구를 찍은 사진이었는데, 지구가 점 하나로밖에 보이지 않는 거야. 그걸 보니까 갑자기 막 기분이 묘해지면서 허무감이 느껴졌어. 지구에는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또 수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그 모든 게 겨우 점 하나에서 눈에 보이지 않게 이루어져 왔던 거야. 아, 모든 건 이렇게 작고도 초라한 거였구나. 이런 걸 느끼니까 갑자기 삶의 의욕이 사라졌어. 그래도 계속 삶을 살다 보니까 그걸 잊게 됐는데, 첫 현실을 마주하게 되니까 다시 그게 떠올랐어. 여러 사람들과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해 경쟁해야 하는데, 꼭 그런 허무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살아야 하나? 애초에 난 특별해 보이지도 않고, 그런 것들이 모두 허무하게 느껴지는데, 굳이 압박을 견디며 경쟁해야 하나? 왜 그런 경쟁을 위해서 질타를 받고, 좌절하고, 다시 일어서야 하지? 그리고 왜 평가 받아야 해? 그냥 이 모든 게 싫었어.”
재욱은 저 멀리 빛을 내고 있는 별을 응시하고 있었다.
“결국엔 모두 허무하게 끝날 텐데…….”
마음속이 공허했다. 공부도, 오락도, 게임도, 노는 것도 모두 지겨웠다. 너무 허무했다. 이렇게 얘기를 나누는 시간도 결국 과거로 묻히게 되겠지. 재욱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의 옆모습을 보며 소하는 알게 되었다. 왜 재욱이 그토록 특이한 걸 좋아했었는지를. 분명히 재욱은 이런 지겹고 허무한 현실이 싫었으리라. 그는 언제나 가슴이 뛸 만큼 특이하고 신기한 것을 찾아내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소하 또한 미소를 짓고 밤하늘에서 작게 빛을 비추는 별을 응시했다.
“그거 알아? 이렇게 별을 지나치게 집중해서 똑바로 보면 나중에 별이 안 보인다. 그저 올바로 보려 했을 뿐인데 오히려 안 보이게 된다니, 신기하지?”
소하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 소리를 들은 재욱은 소하를 보았다.
“지나치게 통찰하려 하면 오히려 네가 봐야할 것을 못 보게 돼.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게 허무해져도 그걸 지나치게 똑바로 보려 해선 되려 살아가는 법을 잊게 될 거야.”
소하는 말을 이어갔다.
“재욱아, 60억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지구는 점 하나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6센티미터 떨어진 곳에서 우리는 지구를 더 크게 보면서 살 수 있고, 이렇게 서로를 볼 수 있어. 게다가 앞에 보이는 멋진 경치도 지구의 극히 일부일 뿐이잖아. 크게 볼 수 있는 게 아주 많아. 그리고 생각할 게 있으면 여기 앉아서 편하게 생각할 수 있고, 카페에 가면 용돈으로 카페모카를 사먹을 수 있고, 또 자기가 재밌어 하는 일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알고, 많은 것을 느끼면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위치에서 그저 짜릿하게, 재밌게 살면 되는 거야.”
“…….”
그 단순한 말을 듣는 순간, 재욱은 소하로부터 감성이 자극받는 걸 느꼈다. 그녀가 진심을 다해 말하고 있기 때문일까? 매우 묘한 감정이 들었다. 그것은 어쩌면 60억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6 센티미터 앞으로 다가온, 삶에 대한 의욕이었는지도 몰랐다.
“아.”
소하는 수능용 손목시계를 보았다. 시간은 오후 11시 24분이었다. 시간이 좀 늦은 것 같다고 그녀는 느꼈다. 그녀는 두 다리를 앞으로 뻗었다가 다시 내려놓으며 읏차,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재욱의 앞에 서서 재욱을 바라보았다. 재욱은 의아해하며 소하를 올려다보았다.
“야, 마지막. 약속해.”
소하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주먹에서 엄지와 새끼손가락만 펼친 형태.
“절대 자기 목숨 버리지 않고 재밌게 살겠다고.”
“…….”
재욱은 소하가 내민 손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고맙다고.
“그래, 약속.”
재욱이 웃으면서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서로의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를 마주 대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서로는 피식거렸다. 그렇게 재욱을 바라보고 있던 소하는 어째서인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서 손을 떼었다. 기분 탓일까. 가로등에 비춰진 그녀의 얼굴이 붉어진 것 같았다.
“그……, 시간 늦었어. 가자. 부모님이 걱정하셔.”
“응.”
재욱은 대답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은 서로 자기 가방을 어깨에 메고 언덕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둑한 밤하늘 아래 가로등이 비추는 길.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재욱은 입을 열었다.
“노소하.”
“응?”
“고마워.”
“고마우면 카페모카 두 잔으로 갚든지.”
“그럴게.”
“어, 정말? 진짜? 그럼 나도 고마워!”
걸어가면서 재욱과 소하는 여러 얘기를 나눴다. 학생으로서 주고받는 그런저런 평범한 얘기들. 재욱은 거리낌 없이, 어색한 기운도 없애기 위해 자신한테 얘기를 건네는 소하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정말 좋은 친구를 뒀다고, 재욱은 생각했다.
알람소리가 시끄럽게 울려댔다. 귀를 파고드는 그 소리가 재욱을 단번에 꿈속에서 빠져나오게 했다. 재욱은 천천히 눈을 뜨며 익숙한 연파랑 천장을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책상 쪽으로 돌려보았다. 시끄럽게 울려대는 알람과 함께 펼쳐진 영단어 책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히 정신과 의사가 말했던 두 번째 자아가 저런 거겠지.
재욱은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침대에서 내려와 책상 위에서 소리를 지르는 알람을 껐다. 다시 조용해진 분위기. 재욱은 책상 위에 펼쳐진 영단어 책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번뜩 ‘학교 가야지’란 생각에 그는 방을 나서서 샤워실로 향했다.
교복 차림의 재욱은 아침공기를 마시며 길을 걸었다. 아침하늘이 맑았다. 어째선지 오늘은 아침하늘이 재욱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아침공기도 너무 시원하게 느껴졌다. 기분이 좋아진 재욱은 심호흡을 하며 계단을 올랐다.
“…….”
그 학생, 아니, 재욱의 자아가 두 다리를 육교 안쪽으로 향하도록 두고 난간 위에 엉덩이를 올려두고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안경을 벗은 재욱의 모습. 어째선지 그의 표정엔 예전과 같은 섬뜩함이 아니라 허무감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재욱은 무언가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그 자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 자아의 옆에서 난간 위에 두 손을 얹고 앞에 펼쳐진 도로의 경관을 보았다.
“뭐 하냐?” 재욱이 물었다.
“하늘 구경.”
재욱의 자아는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넌 원래 아침하늘 안 보잖아.”
“맞아. 난 밤하늘만 좋아했어. 그런데 오늘은 왠지 아침하늘도 좋네.”
재욱은 자신의 자아를 올려다보았다. 그제야 왜 이 자아가 밤에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는지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넌 왜 밤하늘을 좋아하냐?” 재욱이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리며 물었다.
“난 너니까.”
“아, 그렇지.”
“넌 왜 밤하늘을 좋아하냐?”
“몰라?”
“응. 난 너지만, 나와 넌 다른 정신을 가지고 있잖아.”
“그래?”
재욱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공부를 시작했거든. 어떤 예쁜 선생님 때문에. 그래서 어느 날 공부방에서 공부하고 밤늦게 나왔는데, 그때 밤하늘이 되게 아름답더라. 그래서일 걸.”
“참 더럽게 감성적인 이유네. 더 의미심장한 이유였으면 만족스러웠을 것 같은데.”
“싫냐?”
“싫은 정도는 아니야. 그냥 덜 만족스럽다고.”
자아가 재욱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화 안 내네.”
“내가 왜?” 재욱이 의아해하며 자아를 쳐다보았다.
“눈치 챘잖아. 어제 내가 너 떨어뜨리려고 했던 거. 얼마 전에도 내가 널 죽이려고 했고.”
“와, 그걸 대놓고 말해?”
재욱이 웃었다.
“웃기까지 하네.” 자아가 말했다.
“지금 기분이 좋아서 그런가봐.”
“말도 안 돼.” 자아가 웃었다.
“야, 좀 묻자. 넌 왜 날 죽이려 하냐? 넌 나잖아.”
“모르겠냐?”
“응.”
자아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냥 그게 내 본성이야. 난 그걸 위해 태어난 거고.”
“무슨 소리야?”
“넌 사람들이 가끔씩 힘들 때 왜 자살하고 싶어 하는지 알아?”
“우울해서.”
“맞아. 누구나 슬퍼하고, 우울해서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가끔 있어. 그때마다 나 같은 놈들이 나타나. 다 그 사람들한테서 파생된 거지. 난 단순히 너에게서 파생됐는데, 그게 자아로서 확실해졌을 뿐이야. 다른 사람들의 속에선 나 같은 게 그저 스스로가 뭔지도 모르는 채 존재해.”
“그럼 넌 내가 자살하고 싶을 때 태어났냐?”
“글쎄…….”
자아는 고개를 숙였다. 그는 스스로도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 몰랐다. 그저 스스로가 누구인지만을 알 뿐이었다.
“나도 잘 몰라. 내가 이렇게 스스로를 자각하고 있는 걸 보니까, 넌 그냥 안 좋은 쪽으로 특별했을 뿐이야.”
“넌 뭐 이리 복잡해?”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넌 뭐 이딴 병이나 걸려서 내가 태어나게 했냐?”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둘은 웃었다. 잘 모르겠지만, 즐거웠다. 재욱은 의아해했다. 왜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놈한테 이리도 즐거워하는 걸까? 왜 마음이 이리도 왔다갔다 거리는 걸까?
“이상해. 넌 분명히 날 죽이려고 하는 놈이잖아. 왜 이렇게 친해진 것 같지?”
“네 마음이 안 걸 거야.”
“뭘 알아?”
“어제도 말했지? 알았다는 건 꼭 이성만으로 의미가 한정되지 않아. 경험으로나 감성으로도 알았다는 표현을 쓸 수 있어. 이번에도 넌 후자에 속하는 거야.”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잘 이해가 안 돼. 그러니까 내 마음이 널 친구처럼 여기게 된 거라고?”
“아니, 이제 내가 널 죽일 일이 없을 거라는 걸 네 마음이 안 거야.”
“……?”
재욱은 놀라며 자아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자아는 그저 하늘만 올려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물어볼게. 넌 이제 어떻게 살 거야?”
“…….”
그 질문은 재욱의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어제 소하와의 얘기를 떠올리며 재욱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대답했다.
“짜릿하게 살아야지.”
60억킬로미터 너머에서 6 센티미터 앞으로 다가온 삶에 대한 의욕. 그것이 지금 재욱의 마음을 에워싸고 있었다.
“좋네.”
자아가 웃으면서 재욱을 보며 말했다.
“내가 하는 말, 잘 새겨들었으면 좋겠다.”
“뭔데?” 재욱이 자아의 눈을 보았다.
“네 인생은 한 번이다. 현실적으로 널 볼 줄 아는 건 중요하지만, 현실적으로 널 규정할 틈은 없어. 그러니 짜릿하게 살고 싶으면 뭐가 됐든지 간에 제대로 덤벼봐.”
“당연한 거 아냐?”
둘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럼 마지막으로 말할게.”
자아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러자 그의 몸이 서서히 뒤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도전하는 네가 옳다.”
그 말을 하고나서, 그의 몸이 난간 위에서 도로 쪽으로 떨어졌다. 그는 떨어지면서 재욱에게 웃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안녕, 나야.’
그의 웃는 얼굴은 왠지 안심한 듯한 표정이었다. 이제 됐다는 듯이, 그의 몸은 계속해서 떨어졌다.
그렇게 재욱의 자아는 사라졌다. 재욱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
적막함. 그 어떤 소리도 없이, 재욱은 도로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잘 가라.”
그는 난간에서 팔을 떼고 다시 학교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헉!”
7시 56분. 지각이다!
재욱은 깜짝 놀라더니 얼른 학교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달리다가 중간에 한 번 넘어질 뻔했지만 얼른 중심을 잡고 계속 달려갔다.
일요일, 새벽 4시. 재욱은 눈에 불을 켜고 언어 문제집을 풀고 있었다. 졸리긴 했지만, 두 번 정도 졸음을 참고 나니 어느 정도 견딜 만 한 수준이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왼쪽 팔뚝에 툭툭, 누군가가 건드리는 느낌이 났다. 재욱은 깜짝 놀라면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안경을 쓰고 있고, 검은 후드티, 츄리닝 바지 복장의 재욱의 모습을 가진 누군가가 서 있었다. 이 남자는 분명히 정신과 의사가 말했던 두 번째 자아이리라, 하고 재욱은 생각했다.
“넌 누구야?” 자아가 물었다.
“난 너야.”
“나라고?”
“응.”
“무슨 헛소리야?”
“내가 날 한심스러워하면서 공부 때문에 압박을 느낄 때 네가 태어났어. 공부하느라 많이 힘들었지? 이제 쉬어. 이제 그 압박에 지배받지 않을게.”
“…….”
자아는 자신의 오른손을 펼쳐서 그 손바닥을 보았다. 그러더니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무슨 생각을 저리 하는 걸까? 재욱은 궁금해 했다.
“그랬구나……. 그랬던 거였어.”
자아는 눈물을 흘렸다.
“난 나 자체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었구나…….”
자아는 울면서 웃었다. 기쁨 때문일까, 아니면 허탈감 때문일까? 재욱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아니, 또 다른 자아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슬퍼지는 걸 느꼈다.
“미안해.”
“아니야. 괜찮아. 정말로.”
“…….”
“갑자기 느낌이 확 오네. 내가 누군지 확실히 알 것 같아.”
자아는 웃으면서 팔로 눈물을 닦고 재욱을 보았다.
“행복해야 돼, 꼭! 네가 사는 인생이 행복해야 돼!”
“알았어, 꼭 그럴게.”
“그래, 그럼 됐어. 된 거지…….”
자아는 살며시 오른손을 들어 흔들었다.
“안녕. 난 갈게.”
“어디로?”
“내가 태어났던 곳에.”
재욱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안녕.”
그 말을 하고나서 눈을 깜박인 찰나였을까, 재욱의 자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재욱이 잠들었을 때 재욱의 몸을 사용하던 그 자아가 어떻게 재욱의 눈앞에 나타난 걸까? 재욱은 그 이유를 추측했다.
‘내 마음이 많이 달라졌구나…….’
그는 미소를 짓고는 다시 책상 쪽으로 고개를 돌려 책을 읽었다. ‘이 문제만 풀고 자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시간이 흘러, 수능 날이 되었다. 재욱은 처음 보는 고등학교에 가서 수능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그는 학교의 어수선한 교문에서 찹쌀떡을 받아먹었다. 오늘은 컨디션이 최고라고 재욱은 생각했다.
그렇게 시험을 치렀다. 언어, 수학, 영어, 사회탐구. 재욱은 최대한 열심히 머리를 굴려 문제를 풀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 대학에 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한 여학생한테 마음이 팔리고, 공부도 등한시했던 자신에게 이런 결과가 초래된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여겼다.
결과는 노력에 비례한다. 그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마음속에 새겨놓고 이번 수능 성적 때문에 낙심하는 일이 없도록 했다. 오히려 이 기회에 제대로 덤벼볼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재욱의 친구들은 각자 원서를 넣고 합격한 대학교에 입학했다. 소하는 이번에 목표로 하던 K대에 합격했다. 그들이 대학에 합격했다고 기뻐할 때 재욱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걸 느꼈다.
친구들은 올해 대학에 떨어진 재욱을 걱정스러워했다. 소하와의 약속대로 그녀에게 카페모카를 사준 날, 카페에서 얘기를 나눌 때 소하는 진심으로 재욱을 걱정했다. 하지만 재욱은 열심히 해서 내년에 꼭 대학에 합격하겠다는 다짐을 그들에게 보였다.
재수 생활. 그는 학원에 다니지 않았다. 스스로 노력해서 공부하는 법을 터득하기 위함이었다. 재욱이 겪었던 정신병 때문일까. 부모님은 재욱에게 그 어떤 화나 꾸중도 내지 않았고, 그저 재욱의 재수 생활을 격려해주었다. 그들은 재욱이 좌절해하지 않는 것에 고마워했다.
재욱은 재수 생활 동안 전철을 타고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어째선지 많은 것을 보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었다. 그렇게 돌아다니던 재욱의 손에는 항상 영단어가 적혀진 쪽지가 들려 있었다.
그는 가끔씩 소하에게 문자를 보내 같이 카페에 가서 공부하자는 부탁을 했다. 재수 생활 동안 혼자서 외로이 공부만 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어째선지 소하는 항상 이런 재욱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렇게 약속을 한 재욱은 소하가 있는 안암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안암에 있는 카페에서 소하와 함께 커피를 마시며 짧은 잡담을 나누고 공부를 했다.
그렇게 재수 생활을 하면서 재욱은 스스로 공부하는 법을 터득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더욱 열심히 공부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공부가 더 재밌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것은 알아가는 재미, 문제를 풀어가는 재미였다.
그리고 1년이 흘렀다.
“……후우.”
가슴이 이토록이나 콩닥콩닥 설레였던 적이 있었던가. 그는 신촌의 땅을 밟은 채 명문대 중 하나인 Y대의 교문 앞에 서서 넓은 캠퍼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속에서 짜릿함이 느껴졌다. 그래, 이거였지. 이거였어. 대학 합격 통지서가 날아왔을 때 소리를 지르며 온 동네를 미친놈처럼 달렸었다. 힘들었지만, 재미도 있었던 지난 재수 생활. 그 기쁨의 결실이 지금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재욱은 고개를 들고, 두 팔을 양옆으로 벌려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 상쾌한 공기. 그리고 맑은 하늘.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힘껏 외쳤다.
“덤벼라!!!”
교문을 들어서던 학생들의 시선이 온통 재욱을 향했다. 그런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재욱은 얼른 교문을 들어섰다.
60억킬로미터 너머에서가 아닌, 지금 이 자리에서 보며 그는 짜릿함을 안고 앞으로 달려갔다.
출처-웃대 노소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