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행정부와 새누리당, 더 정확하게는 서남수 교육부장관과 박승춘 보훈처장, 그리고 뉴라이트교과서포럼에 의해 조직된 한국현대사학회가 찬양·칭송·미화하기 위해 왜곡·날조·은폐시키려 하는 18년 장기집권 박정희 독재권력의 어두운 진실을 적나라하게 ‘까발린’ 김재홍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교수의 최신 저서《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 저자의 직접적 경험과 치밀한 취재를 통해 친일파의 후예, 군사정변 세력이 조작한 잘못된 신화와 삐뚤어진 우상을 깨고 우리 스스로 바른 길을 찾아 나서기 위해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는다!
● 김대중 납치, 김영삼 초산테러, 법관과 언론인 겁박
⑴ 박정희에서 새누리당으로 이어진 수구정치세력
1961년에 일어난 5·16군사쿠데타는 한국의 역사와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심대한 해악을 끼쳤다. 쿠데타의 주모자 박정희(朴正熙) 소장(少將) 자신은 18년 동안 철권을 휘두르다가 비명횡사했다. 그리고 1979년 10·26궁정동총격사건 이후 ‘박정희 없는 박정희 독재시대’라 불릴 만큼 5·16쿠데타에 뿌리를 둔 그 후계 체제인 또 다른 군부 통치가 14년 동안이나 더 이어졌다. 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은 박정희 정권의 사생아인 셈이다.
따라서 박정희 장기집권시대와 전두환·노태우 군부 시대는 역사 시기 구분 외에는 사회과학적으로 따로 떼어 볼 수 없는 연속성을 지녔다. 그 연속성은 박정희의 공화당을 시작으로 민정당,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을 거쳐 간판만 바꾼 채 현재의 새누리당으로 이어지고 있다.
5·16쿠데타는 군부가 직접 정치를 장악하는 불행한 선례를 남겼다는 점에서 역사적 책임이 크다. 더구나 군부 정치집단과 그 후예는 필연적으로 역사의 발전을 거스르는 수구세력이라는 점에서도 5·16쿠데타의 죄과는 결코 가볍지 않다.
군사독재정권의 가장 큰 죄과는 공통적으로 고문·테러 등의 체제폭력을 구사하는 공포통치라고 할 수 있다. 군부란 정치사회과학적으로 ‘무력(武力)의 합법적 관리권’을 부여받은 집단이다. 따라서 군인들은 무기 사용과 체력 증진, 그리고 집단행동 능력을 지속적으로 훈련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힘, 곧 무력은 국가와 국민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 합법적 무력을 국가와 국민이 아니라 특정집단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서 남용하면 그것은 불법적 조직폭력이 되고 만다.
박정희 군사정권 아래서 중앙정보부와 군부가 자행한 고문과 테러를 보면 그것은 불법적 범죄조직집단의 폭력행위였다. 조직폭력배들의 잔혹행위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이유로 정보수사기관에 끌려갔다가 비명에 사라진 수많은 의문사와 야만적 구타……. 이것이 어떻게 국가행정기관에서 행해질 수 있는가?
체제폭력을 어디서 배워온 것일까? 박정희는 만주국군관학교와 일본 군대에서 훈련받은 장교 출신이고 자유당 시절 악명 높았던 특무부대장 김창룡은 일본 관동군 사령부 헌병보 출신이다. 일제는 우리 민족에게 길게도 악질적 유산을 남겨주었다.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일본군 헌병대 출신이라는 설이 있었으나 사실무근인 것으로 밝혀졌다.
체제폭력의 유형으로 공공시설 안에 가둬놓고 폭행하는 것은 고문이고 야외나 민간 건물에서 폭행하면 테러다. 둘 다 공포통치의 수단이다. 독재권력이 자행하는 ‘더러운 전쟁’의 구체적 모습이다. 시사용어사전을 보면 ‘더러운 전쟁’이란 아르헨티나의 비델라 군사정권이 1976년부터 시작한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테러와 고문악행을 말한다. 그런데 그것을 박정희 정권이 먼저 시작했으니, 고문과 테러에 관한 한 세계 최초의 선구자인 셈이다.
⑵ 군사독재정권 처벌, 김영삼은 하고 김대중은 못한 이유
박정희 정권 아래서 체제폭력의 최대 희생자는 누구보다도 김대중이었다. 그는 1973년 8월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도쿄에서 납치되어 목숨을 잃을 뻔했다. 미국 정보기관의 기민한 구출작전으로 동해상에 수몰되기 직전에 살아날 수 있었다.
이 사건의 전말은 거의 다 밝혀졌으나 최종 명령계통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 당시 대통령 박정희로부터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그 아래 부하들에 이르기까지 이름이 거명됐지만 명확히 조사되지 않았다. 김대중은 대통령에 올랐으면서도 그 납치사건의 명령자를 가려내지 못한 셈이다.
그에 대한 체제폭력은 다시 전두환의 사법살해 기도로 이어졌다. 전두환 정권은 1980년 내란음모죄를 씌워 김대중을 체포하고 사형선고까지 내렸으나 미국 정부의 압력으로 석방하여 출국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김대중은 대통령이 된 뒤 전두환의 5공 세력과 화해를 추구했다. 그는 박정희기념관 추진위원회 명예위원장까지 맡으면서 2백여억원의 예산지원을 하도록 했다. 좋게 말하면 ‘대인배의 통 큰 정치’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비판도 많았다.
그것이 김영삼과 김대중의 다른 점이었다. 김영삼은 대통령이 된 뒤 자신에게 가한 군부의 테러에 대해 엄정하게 조사하게 하고 단죄했다. 하나회를 숙정했으며, 전두환·노태우를 구속시켰다. 제정신 가진 사람 중에 그것을 정치보복이라고 하는 이는 없다. 그것은 정당한 처벌이었고, 역사의 징벌이었다.
정권을 잡았다 해서 개혁을 소신껏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교훈을 우리는 두 차례의 민주화 행정부 때 똑똑히 보았다. 사회권력이 뒷받침되지 못한 정치권력은 개혁의 뒷심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사회권력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언론과 학벌과 지역주의 세력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언론은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다. 그리고 언론과 함께 언론의 사주도 그 성역 속에 함께 존재한다. 정치권력과 달리 선출되지 않고 교체되지도 않는 언론 사주야말로 변하지 않는 ‘세습권력’이다. 사회권력의 지속적인 힘과 무서움이 여기에 있다.
김영삼은 언론으로부터 매우 우호적인 지원을 받았으며 영남 PK라는 막강한 지역주의 세력이 정치적 기반이었다. 그가 대통령이 되는 순간 이같은 사회권력을 갖춘 정권이 출범한 셈이다. 그래서 박정희·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 아래서 오랫동안 권력집단으로 할거한 정치장교 비밀결사단체 하나회를 숙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두환·노태우를 구속시키고 단죄할 수 있었다. 김영삼이 1990년 박정희 정권의 후예들과 손잡고 3당 야합을 한 것으로 자신의 족적에 큰 오점을 남겼지만 집권 후 몇 가지 뚝심 있는 개혁조치를 단행한 것은 사실이다.
이에 비해 김대중은 언론이 너무도 적대적이었다. 지역주의 세력도 영남 PK에 비해 왜소했다. 어렵게 정권은 잡았지만 사회권력의 뒷받침은커녕 항상 대립적이고 취약했다. 그가 박정희·전두환 추종자들과의 화해를 내세운 이유는 개혁의지가 약해서도 아니고 현실적 여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국민통합과 화해 그리고 암적인 지역주의의 단절이라는 ‘김대중 정신’으로 승화됐다. 그의 노벨평화상 수상의 이유는 남북정상회담과 함께 파란만장한 정치역정의 극복이었다. 박정희·전두환 독재권력의 후예들에게 내민 화해의 손길, 그것이 바로 그의 정치역정의 최종적 승리를 상징했고 노벨평화상 수상의 한 바탕이 됐을 것이다.
⑶ 강초산 테러 당한 김영삼 “박정희 씨는 독재자요!”
1969년 6월 19일 밤 10시 5분경, 김영삼 신민당 원내총무의 승용차가 상도동의 자택 근처 골목길에 이르렀다. 정국이 3선개헌 문제로 소란해서 여느 때와 같이 밤늦게 귀가하던 참이었다.
길옆에 앉아 있던 작업복 차림의 청년 3명 중 2명이 갑자기 차량 앞으로 뛰어나오더니 싸우기 시작했다. 앞이 가로막힌 승용차는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나머지 한 명의 괴한이 승용차 뒤로 돌아오더니 김영삼이 앉은 쪽 차량 문을 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 왠지 모르게 김영삼은 차에 타면 으레 문을 안에서 잠그는 것이 습관화돼 있었다. 야당 국회의원을 오래 하다 보니 박정희 정권의 폭력에 대해 방어하는 잠재의식의 발로였을 것이다.
괴한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이 수류탄이라고 여긴 김영삼은 “빨리 속력을 내서 달려라”고 소리쳤다. 운전사가 클랙슨을 누르면서 가속 페달을 힘껏 밟자 싸우던 2명은 엉겁결에 옆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자 차량 옆에 있던 괴한이 손에 든 물건을 차창에다 내던졌다. 그것은 나중에 자동차의 페인트칠이 다 벗겨질 정도의 강초산으로 밝혀졌다. 만일 자동차 문이 열려서 얼굴에라도 투척됐다면 아찔한 일이었다. 공적 활동은 고사하고 생명이 위험할 정도의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 뻔했다. 김영삼은 당연히 분노했다.
다음날 국회 본회의장, 김영삼 의원이 신상발언이 있다며 단상에 올랐다. 그는 박정희와 김형욱을 싸잡아 맹렬히 비난했다. 김영삼의 박정희에 대한 정면 대립이 본격화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김형욱은 제2의 최인규(4·19민중혁명 때에 내무장관으로 있다가 사형 당함)와 같고 민족반역자다. 이러한 무리가 이 땅위에 있는 동안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살 길이 없다’는 얘기를 한 사람입니다. 나에 대한 테러는 여기에 대한 보복이라 생각합니다. …나 김영삼을 죽이기 위해서 정보부에서 음모한 것입니다. …박정희 씨는 독재자요. 아무리 권력을 가졌다 해도 권력을 휘두르는 자, 칼로 세운 자는 반드시 칼로 망한다고 하는 성경 말씀이 있어요. 힘을 가졌다 해서 힘을 행사하는 자 반드시 그 힘에 의해서 망할 것입니다.”
그 후 전두환의 5공 행정부 아래 1985년 10월 10일,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이던 김영삼의 상도동 자택에 몇 명의 괴한들이 침입했다. 이들은 돈을 가져간 것이 아니라 탁상일기와 카세트 녹음테이프, 명함 등을 절취해 갔다. 단순 절도가 아닌 정치적 사건이었으나 당시에는 규명되지 못했다.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1993년 7월 15일, 국방부는 그 사건이 정보사령부 간부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김영삼은 군부 숙정을 진행하면서 자신이 겪었던 사건에 대해 엄정하게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사건은 당시 정보사 3처장 한진구 대령이 전 부대원들을 매수해 김영삼의 활동상에 대한 정보자료를 입수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한진구는 그 정보자료를 보안사 정보처장 박동준 준장에게 건넸다고 군 검찰에서 진술했다. 보안사가 야권 정치인의 활동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정보사 간부를 행동대로 투입한 체제폭력이었다.
⑷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조차 짓밟은 박정희의 독선 또는 무지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한 테러는 비단 야당 정치인뿐 아니라 모든 비판자들에게 가해진다. 법관과 비판적 언론인도 군인이나 괴한으로부터 폭행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체제폭력의 출발은 역시 그 체제의 최고권력자로부터 비롯된다. 권력자의 인식과 의지가 마치 마피아 두목의 그것처럼 지령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정치의 기본인 권력분립과 법관에 대한 박정희의 부정적 인식은 정권 초기에 드러났다.
1963년 4월 어느 날, 국가재건최고회의장 박정희는 당시 검찰총장 정창운을 불러들였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요? 정부에 반대하는 놈들을 기껏 구속해놓으면 법원은 풀어주니 이따위 짓이 뭐요? 검찰이 뭐하고 있기에…….”
“판사들이 구속적부심사를 해서 불구속 수사하라고 하니 도리가 없습니다.”
박정희는 그 자리에서 검찰총장에게 서울지방법원장을 불러오라고 호통을 쳤다. 민주주의 국가에거 대통령이 법관을 부른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짓이다. 언론과 국민 여론이 가만있지 않을 일이다. 그러나 총구에서 나온 권력을 휘두르는 쿠데타 주도자의 초법적 명령이니 어쩔 수 없었다.
홍남표 법원장(대법원 판사 역임)이 불려왔다. 박정희는 홍남표에게 야단치듯 큰 소리를 냈다.
“아니, 법원은 이래도 되는 거요? 툭하면 경찰과 검찰이 힘들여 잡아들인 범법자들을 풀어주고 말이지, 왜 정부가 하는 일에 지장을 주는 거요?”
홍남표는 박정희가 아무리 쿠데타 주동자이지만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인 삼권분립과 법관의 독립성을 전혀 모르는 말투에 난감했으나 차분히 법관으로서 할 얘기를 했다.
“법관의 지위와 직무행위는 헌법과 법률에 규정돼 있습니다. 법관은 오로지 헌법과 법률에 근거하여 자신의 양심에 따라 심판합니다. 아무도 그 독립성을 훼손할 수 없습니다. 행정부 관료들처럼 상명하복 관계가 아니고 한 사람 한 사람이 헌법상 보장된 독립관청입니다. 제가 법원장이지만 판사 개개인의 판결에 간섭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꼭 중학교 사회교과서에 쓰여 있는 정도의 상식을 읽듯이 법원장은 쿠데타 권력자 앞에서 기죽지 않고 피력했다. 박정희는 처음부터 민주주의 정치나 권력분립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에피소드다.
그런 통치자 아래서 껄끄러운 법관을 비롯한 비판세력에게 군 특수부대원들의 테러가 수시로 자행되었다. 박정희에게는 야당정치인뿐 아니라 비판적 언론인과 학생운동권이 눈엣가시였다. 이들을 다스리는 수단으로 군부와 중앙정보부 등을 동원하여 수시로 테러를 자행한 것이다.
박정희가 법관들에게 불만을 토로한 지 일 년쯤 지난 1964년 5월 21일 새벽 4시 30분경.
서울 서소문의 법원 청사 정문 앞에 군용 구급차 한 대가 들이닥쳤다. 여명이 채 트기 전 어둠이 깔린 법원 건물은 조용했다.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한창이었지만 아직 6·3계엄령공포 이전이어서 군용차량의 출동은 긴장감을 주었다.
차량 안에서 얼룩무늬 군복에 권총과 카빈 소총으로 무장한 군인 12명이 뛰어내렸다. 이들은 수위를 불러 법원 숙직 판사실로 안내하라고 요구했다. 1층 숙직실로 가보니 판사는 이미 퇴청한 뒤였다. 이들은 다시 차량을 몰아 이날 밤 당직 판사인 서울지방법원의 양헌 판사 자택으로 찾아갔다.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 4가 돈암초등학교 옆의 양헌 판사 자택. 새벽 시간에 문을 두드리고 들이닥친 얼룩무늬의 군인들은 양 판사에게 다그쳤다.
“데모 학생들의 구속영장을 기각한 이유가 무엇이냐? 영장에 서명할 것을 약속해!”
“나는 이렇게 집에 있을 때는 한 개인이지만 영장에 서명할 때는 엄연한 헌법기관이오. 그렇게는 안 되오.”
그러자 군인들은 수류탄을 꺼내 보이며 협박했다.
“그냥 돌아가도 우리는 죽는데, 여기서 자폭할 테니 알아서 하라.”
“나도 이북에서 월남해 고생하며 독학으로 고등고시를 합격하고 군 법무관도 한 사람이오. 이것이 무슨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일이라고 죽는단 말이오?”
양헌 판사는 조서를 검토하던 생각이 났다. 공안당국은 시위를 구경하는 사람까지 잡아다가 구속하려 했다. 돌을 던지지 않았다고 부인하는 대학생에게 “돌을 안 던졌다는 증거를 대보라”고 묻는 웃지 못할 조서도 있었다. 양헌 판사 겁박사건은《동아일보》에 크게 보도됐다. 당시만 해도《동아일보》는 양심이 살아있는 정론지였다.
6월 6일 새벽 1시 30분, 공수단 복장의 장교 8명이 광화문 동아일보사 편집국에 난입했다. 그렇잖아도 이때는 6·3계엄령이 선포된 직후여서 언론이 잔뜩 위축된 상황이었다. 군 장교들은 험악한 기세로 난폭한 언사를 써가며 기자들을 겁박했다. 사건은 사전 검열로 보도되지 못했지만 소문으로 퍼져나갔다. 시중 여론이 악화되자 계엄사가 자체조사를 벌였다.
난입 장교들은 제1공수특전단 최아무개 대령 등 행동대 8명이었다. 민기식 계엄사령관이 사과문을 발표하고 난입 장교들은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민심수습 차원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안 할 수가 없었으나 최 대령만 유죄이고 나머지는 모두 무죄였다. 배후조종 책임자는 가려지지 않았다.
▶ 김재홍 著,『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동굴’ 속의 권력 ‘더러운 전쟁’」, (株)책으로보는세상 編, 2012년 版.
박정희 군사정권…추악한 탐욕과 반인륜적 만행:고문과 테러의 ‘더러운 전쟁’ ③
☞ 박근혜 행정부와 새누리당, 더 정확하게는 서남수 교육부장관과 박승춘 보훈처장, 그리고 뉴라이트교과서포럼에 의해 조직된 한국현대사학회가 찬양·칭송·미화하기 위해 왜곡·날조·은폐시키려 하는 18년 장기집권 박정희 독재권력의 어두운 진실을 적나라하게 ‘까발린’ 김재홍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교수의 최신 저서《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 저자의 직접적 경험과 치밀한 취재를 통해 친일파의 후예, 군사정변 세력이 조작한 잘못된 신화와 삐뚤어진 우상을 깨고 우리 스스로 바른 길을 찾아 나서기 위해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는다!
● 김대중 납치, 김영삼 초산테러, 법관과 언론인 겁박
⑴ 박정희에서 새누리당으로 이어진 수구정치세력
1961년에 일어난 5·16군사쿠데타는 한국의 역사와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심대한 해악을 끼쳤다. 쿠데타의 주모자 박정희(朴正熙) 소장(少將) 자신은 18년 동안 철권을 휘두르다가 비명횡사했다. 그리고 1979년 10·26궁정동총격사건 이후 ‘박정희 없는 박정희 독재시대’라 불릴 만큼 5·16쿠데타에 뿌리를 둔 그 후계 체제인 또 다른 군부 통치가 14년 동안이나 더 이어졌다. 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은 박정희 정권의 사생아인 셈이다.
따라서 박정희 장기집권시대와 전두환·노태우 군부 시대는 역사 시기 구분 외에는 사회과학적으로 따로 떼어 볼 수 없는 연속성을 지녔다. 그 연속성은 박정희의 공화당을 시작으로 민정당,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을 거쳐 간판만 바꾼 채 현재의 새누리당으로 이어지고 있다.
5·16쿠데타는 군부가 직접 정치를 장악하는 불행한 선례를 남겼다는 점에서 역사적 책임이 크다. 더구나 군부 정치집단과 그 후예는 필연적으로 역사의 발전을 거스르는 수구세력이라는 점에서도 5·16쿠데타의 죄과는 결코 가볍지 않다.
군사독재정권의 가장 큰 죄과는 공통적으로 고문·테러 등의 체제폭력을 구사하는 공포통치라고 할 수 있다. 군부란 정치사회과학적으로 ‘무력(武力)의 합법적 관리권’을 부여받은 집단이다. 따라서 군인들은 무기 사용과 체력 증진, 그리고 집단행동 능력을 지속적으로 훈련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힘, 곧 무력은 국가와 국민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 합법적 무력을 국가와 국민이 아니라 특정집단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서 남용하면 그것은 불법적 조직폭력이 되고 만다.
박정희 군사정권 아래서 중앙정보부와 군부가 자행한 고문과 테러를 보면 그것은 불법적 범죄조직집단의 폭력행위였다. 조직폭력배들의 잔혹행위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이유로 정보수사기관에 끌려갔다가 비명에 사라진 수많은 의문사와 야만적 구타……. 이것이 어떻게 국가행정기관에서 행해질 수 있는가?
체제폭력을 어디서 배워온 것일까? 박정희는 만주국군관학교와 일본 군대에서 훈련받은 장교 출신이고 자유당 시절 악명 높았던 특무부대장 김창룡은 일본 관동군 사령부 헌병보 출신이다. 일제는 우리 민족에게 길게도 악질적 유산을 남겨주었다.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일본군 헌병대 출신이라는 설이 있었으나 사실무근인 것으로 밝혀졌다.
체제폭력의 유형으로 공공시설 안에 가둬놓고 폭행하는 것은 고문이고 야외나 민간 건물에서 폭행하면 테러다. 둘 다 공포통치의 수단이다. 독재권력이 자행하는 ‘더러운 전쟁’의 구체적 모습이다. 시사용어사전을 보면 ‘더러운 전쟁’이란 아르헨티나의 비델라 군사정권이 1976년부터 시작한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테러와 고문악행을 말한다. 그런데 그것을 박정희 정권이 먼저 시작했으니, 고문과 테러에 관한 한 세계 최초의 선구자인 셈이다.
⑵ 군사독재정권 처벌, 김영삼은 하고 김대중은 못한 이유
박정희 정권 아래서 체제폭력의 최대 희생자는 누구보다도 김대중이었다. 그는 1973년 8월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도쿄에서 납치되어 목숨을 잃을 뻔했다. 미국 정보기관의 기민한 구출작전으로 동해상에 수몰되기 직전에 살아날 수 있었다.
이 사건의 전말은 거의 다 밝혀졌으나 최종 명령계통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 당시 대통령 박정희로부터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그 아래 부하들에 이르기까지 이름이 거명됐지만 명확히 조사되지 않았다. 김대중은 대통령에 올랐으면서도 그 납치사건의 명령자를 가려내지 못한 셈이다.
그에 대한 체제폭력은 다시 전두환의 사법살해 기도로 이어졌다. 전두환 정권은 1980년 내란음모죄를 씌워 김대중을 체포하고 사형선고까지 내렸으나 미국 정부의 압력으로 석방하여 출국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김대중은 대통령이 된 뒤 전두환의 5공 세력과 화해를 추구했다. 그는 박정희기념관 추진위원회 명예위원장까지 맡으면서 2백여억원의 예산지원을 하도록 했다. 좋게 말하면 ‘대인배의 통 큰 정치’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비판도 많았다.
그것이 김영삼과 김대중의 다른 점이었다. 김영삼은 대통령이 된 뒤 자신에게 가한 군부의 테러에 대해 엄정하게 조사하게 하고 단죄했다. 하나회를 숙정했으며, 전두환·노태우를 구속시켰다. 제정신 가진 사람 중에 그것을 정치보복이라고 하는 이는 없다. 그것은 정당한 처벌이었고, 역사의 징벌이었다.
정권을 잡았다 해서 개혁을 소신껏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교훈을 우리는 두 차례의 민주화 행정부 때 똑똑히 보았다. 사회권력이 뒷받침되지 못한 정치권력은 개혁의 뒷심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사회권력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언론과 학벌과 지역주의 세력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언론은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다. 그리고 언론과 함께 언론의 사주도 그 성역 속에 함께 존재한다. 정치권력과 달리 선출되지 않고 교체되지도 않는 언론 사주야말로 변하지 않는 ‘세습권력’이다. 사회권력의 지속적인 힘과 무서움이 여기에 있다.
김영삼은 언론으로부터 매우 우호적인 지원을 받았으며 영남 PK라는 막강한 지역주의 세력이 정치적 기반이었다. 그가 대통령이 되는 순간 이같은 사회권력을 갖춘 정권이 출범한 셈이다. 그래서 박정희·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 아래서 오랫동안 권력집단으로 할거한 정치장교 비밀결사단체 하나회를 숙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두환·노태우를 구속시키고 단죄할 수 있었다. 김영삼이 1990년 박정희 정권의 후예들과 손잡고 3당 야합을 한 것으로 자신의 족적에 큰 오점을 남겼지만 집권 후 몇 가지 뚝심 있는 개혁조치를 단행한 것은 사실이다.
이에 비해 김대중은 언론이 너무도 적대적이었다. 지역주의 세력도 영남 PK에 비해 왜소했다. 어렵게 정권은 잡았지만 사회권력의 뒷받침은커녕 항상 대립적이고 취약했다. 그가 박정희·전두환 추종자들과의 화해를 내세운 이유는 개혁의지가 약해서도 아니고 현실적 여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국민통합과 화해 그리고 암적인 지역주의의 단절이라는 ‘김대중 정신’으로 승화됐다. 그의 노벨평화상 수상의 이유는 남북정상회담과 함께 파란만장한 정치역정의 극복이었다. 박정희·전두환 독재권력의 후예들에게 내민 화해의 손길, 그것이 바로 그의 정치역정의 최종적 승리를 상징했고 노벨평화상 수상의 한 바탕이 됐을 것이다.
⑶ 강초산 테러 당한 김영삼 “박정희 씨는 독재자요!”
1969년 6월 19일 밤 10시 5분경, 김영삼 신민당 원내총무의 승용차가 상도동의 자택 근처 골목길에 이르렀다. 정국이 3선개헌 문제로 소란해서 여느 때와 같이 밤늦게 귀가하던 참이었다.
길옆에 앉아 있던 작업복 차림의 청년 3명 중 2명이 갑자기 차량 앞으로 뛰어나오더니 싸우기 시작했다. 앞이 가로막힌 승용차는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나머지 한 명의 괴한이 승용차 뒤로 돌아오더니 김영삼이 앉은 쪽 차량 문을 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 왠지 모르게 김영삼은 차에 타면 으레 문을 안에서 잠그는 것이 습관화돼 있었다. 야당 국회의원을 오래 하다 보니 박정희 정권의 폭력에 대해 방어하는 잠재의식의 발로였을 것이다.
괴한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이 수류탄이라고 여긴 김영삼은 “빨리 속력을 내서 달려라”고 소리쳤다. 운전사가 클랙슨을 누르면서 가속 페달을 힘껏 밟자 싸우던 2명은 엉겁결에 옆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자 차량 옆에 있던 괴한이 손에 든 물건을 차창에다 내던졌다. 그것은 나중에 자동차의 페인트칠이 다 벗겨질 정도의 강초산으로 밝혀졌다. 만일 자동차 문이 열려서 얼굴에라도 투척됐다면 아찔한 일이었다. 공적 활동은 고사하고 생명이 위험할 정도의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 뻔했다. 김영삼은 당연히 분노했다.
다음날 국회 본회의장, 김영삼 의원이 신상발언이 있다며 단상에 올랐다. 그는 박정희와 김형욱을 싸잡아 맹렬히 비난했다. 김영삼의 박정희에 대한 정면 대립이 본격화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김형욱은 제2의 최인규(4·19민중혁명 때에 내무장관으로 있다가 사형 당함)와 같고 민족반역자다. 이러한 무리가 이 땅위에 있는 동안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살 길이 없다’는 얘기를 한 사람입니다. 나에 대한 테러는 여기에 대한 보복이라 생각합니다. …나 김영삼을 죽이기 위해서 정보부에서 음모한 것입니다. …박정희 씨는 독재자요. 아무리 권력을 가졌다 해도 권력을 휘두르는 자, 칼로 세운 자는 반드시 칼로 망한다고 하는 성경 말씀이 있어요. 힘을 가졌다 해서 힘을 행사하는 자 반드시 그 힘에 의해서 망할 것입니다.”
그 후 전두환의 5공 행정부 아래 1985년 10월 10일,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이던 김영삼의 상도동 자택에 몇 명의 괴한들이 침입했다. 이들은 돈을 가져간 것이 아니라 탁상일기와 카세트 녹음테이프, 명함 등을 절취해 갔다. 단순 절도가 아닌 정치적 사건이었으나 당시에는 규명되지 못했다.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1993년 7월 15일, 국방부는 그 사건이 정보사령부 간부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김영삼은 군부 숙정을 진행하면서 자신이 겪었던 사건에 대해 엄정하게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사건은 당시 정보사 3처장 한진구 대령이 전 부대원들을 매수해 김영삼의 활동상에 대한 정보자료를 입수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한진구는 그 정보자료를 보안사 정보처장 박동준 준장에게 건넸다고 군 검찰에서 진술했다. 보안사가 야권 정치인의 활동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정보사 간부를 행동대로 투입한 체제폭력이었다.
⑷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조차 짓밟은 박정희의 독선 또는 무지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한 테러는 비단 야당 정치인뿐 아니라 모든 비판자들에게 가해진다. 법관과 비판적 언론인도 군인이나 괴한으로부터 폭행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체제폭력의 출발은 역시 그 체제의 최고권력자로부터 비롯된다. 권력자의 인식과 의지가 마치 마피아 두목의 그것처럼 지령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정치의 기본인 권력분립과 법관에 대한 박정희의 부정적 인식은 정권 초기에 드러났다.
1963년 4월 어느 날, 국가재건최고회의장 박정희는 당시 검찰총장 정창운을 불러들였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요? 정부에 반대하는 놈들을 기껏 구속해놓으면 법원은 풀어주니 이따위 짓이 뭐요? 검찰이 뭐하고 있기에…….”
“판사들이 구속적부심사를 해서 불구속 수사하라고 하니 도리가 없습니다.”
박정희는 그 자리에서 검찰총장에게 서울지방법원장을 불러오라고 호통을 쳤다. 민주주의 국가에거 대통령이 법관을 부른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짓이다. 언론과 국민 여론이 가만있지 않을 일이다. 그러나 총구에서 나온 권력을 휘두르는 쿠데타 주도자의 초법적 명령이니 어쩔 수 없었다.
홍남표 법원장(대법원 판사 역임)이 불려왔다. 박정희는 홍남표에게 야단치듯 큰 소리를 냈다.
“아니, 법원은 이래도 되는 거요? 툭하면 경찰과 검찰이 힘들여 잡아들인 범법자들을 풀어주고 말이지, 왜 정부가 하는 일에 지장을 주는 거요?”
홍남표는 박정희가 아무리 쿠데타 주동자이지만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인 삼권분립과 법관의 독립성을 전혀 모르는 말투에 난감했으나 차분히 법관으로서 할 얘기를 했다.
“법관의 지위와 직무행위는 헌법과 법률에 규정돼 있습니다. 법관은 오로지 헌법과 법률에 근거하여 자신의 양심에 따라 심판합니다. 아무도 그 독립성을 훼손할 수 없습니다. 행정부 관료들처럼 상명하복 관계가 아니고 한 사람 한 사람이 헌법상 보장된 독립관청입니다. 제가 법원장이지만 판사 개개인의 판결에 간섭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꼭 중학교 사회교과서에 쓰여 있는 정도의 상식을 읽듯이 법원장은 쿠데타 권력자 앞에서 기죽지 않고 피력했다. 박정희는 처음부터 민주주의 정치나 권력분립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에피소드다.
그런 통치자 아래서 껄끄러운 법관을 비롯한 비판세력에게 군 특수부대원들의 테러가 수시로 자행되었다. 박정희에게는 야당정치인뿐 아니라 비판적 언론인과 학생운동권이 눈엣가시였다. 이들을 다스리는 수단으로 군부와 중앙정보부 등을 동원하여 수시로 테러를 자행한 것이다.
박정희가 법관들에게 불만을 토로한 지 일 년쯤 지난 1964년 5월 21일 새벽 4시 30분경.
서울 서소문의 법원 청사 정문 앞에 군용 구급차 한 대가 들이닥쳤다. 여명이 채 트기 전 어둠이 깔린 법원 건물은 조용했다.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한창이었지만 아직 6·3계엄령공포 이전이어서 군용차량의 출동은 긴장감을 주었다.
차량 안에서 얼룩무늬 군복에 권총과 카빈 소총으로 무장한 군인 12명이 뛰어내렸다. 이들은 수위를 불러 법원 숙직 판사실로 안내하라고 요구했다. 1층 숙직실로 가보니 판사는 이미 퇴청한 뒤였다. 이들은 다시 차량을 몰아 이날 밤 당직 판사인 서울지방법원의 양헌 판사 자택으로 찾아갔다.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 4가 돈암초등학교 옆의 양헌 판사 자택. 새벽 시간에 문을 두드리고 들이닥친 얼룩무늬의 군인들은 양 판사에게 다그쳤다.
“데모 학생들의 구속영장을 기각한 이유가 무엇이냐? 영장에 서명할 것을 약속해!”
“나는 이렇게 집에 있을 때는 한 개인이지만 영장에 서명할 때는 엄연한 헌법기관이오. 그렇게는 안 되오.”
그러자 군인들은 수류탄을 꺼내 보이며 협박했다.
“그냥 돌아가도 우리는 죽는데, 여기서 자폭할 테니 알아서 하라.”
“나도 이북에서 월남해 고생하며 독학으로 고등고시를 합격하고 군 법무관도 한 사람이오. 이것이 무슨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일이라고 죽는단 말이오?”
양헌 판사는 조서를 검토하던 생각이 났다. 공안당국은 시위를 구경하는 사람까지 잡아다가 구속하려 했다. 돌을 던지지 않았다고 부인하는 대학생에게 “돌을 안 던졌다는 증거를 대보라”고 묻는 웃지 못할 조서도 있었다. 양헌 판사 겁박사건은《동아일보》에 크게 보도됐다. 당시만 해도《동아일보》는 양심이 살아있는 정론지였다.
6월 6일 새벽 1시 30분, 공수단 복장의 장교 8명이 광화문 동아일보사 편집국에 난입했다. 그렇잖아도 이때는 6·3계엄령이 선포된 직후여서 언론이 잔뜩 위축된 상황이었다. 군 장교들은 험악한 기세로 난폭한 언사를 써가며 기자들을 겁박했다. 사건은 사전 검열로 보도되지 못했지만 소문으로 퍼져나갔다. 시중 여론이 악화되자 계엄사가 자체조사를 벌였다.
난입 장교들은 제1공수특전단 최아무개 대령 등 행동대 8명이었다. 민기식 계엄사령관이 사과문을 발표하고 난입 장교들은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민심수습 차원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안 할 수가 없었으나 최 대령만 유죄이고 나머지는 모두 무죄였다. 배후조종 책임자는 가려지지 않았다.
▶ 김재홍 著,『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동굴’ 속의 권력 ‘더러운 전쟁’」, (株)책으로보는세상 編, 2012년 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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