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명소리가 나기 전의 시각, 진수는 고은의 청바지를 끌어 내리고 있었다. 흰 속살의 고은의 다리는 매혹적이었다. 고은은 진수가 깔아놓은 재킷 위에 누워 있었다. 그곳은 산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평지로 잔디가 자라 있는 곳이었다.
“너 마음에 들어."
진수가 먼저 호감을 드러냈었다.
“어떤 면이요?”
성격이 좋은 고은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소탈하고 붙임성 있는 성격, 그리고 멋진 몸매.”
“나한테 원하는 것이 뭐에요?”
진수는 좀 머뭇거렸다. 그러나 이내 용기를 냈다.
“널 갖고 싶어.”
고은이 비시시 웃었다.
“우리 오늘 처음 만난 거 알아요?”
“알아. 하지만 널 아주 오랫동안 만나온 것 같아.”
“날 책임질 거예요?”
고은은 성경험이 전무한 여자가 아니었다. 일 년 전에 사귀던 남자와 섹스한 경험이 있었다. 그 남자와는 인연이 닿지 않았는지 섹스를 가진 후 곧장 헤어지고 말았었다. 하지만 고은은 그 상처로 오랫동안 힘겨워하진 않았었다. 매사에 긍정적인 고은은 자신에게 해가 되고 유익하지 않은 기억은 쉽사리 지워버리는 외향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책임질게. 하늘을 두고 약속해.”
진수가 정색을 하고 대꾸했다.
고은은 마른 체구에 뿔대안경을 착용한 진수의 외모에 끌렸고, 부드럽고 자상한 어투와 드러나지 않게 배려하는 마음 씀씀이가 계속 눈길을 사로잡았다.
고은은 손을 잡는 진수를 배척하지 않았다. 이어서 진수의 손이 볼을 쓰다듬었고 입술을 어루만졌다. 고은은 몸 안에서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가 조심스럽게 키스를 해 왔고, 고은은 그의 입술이 포개지는 감촉에 흠칫 놀라며 입술을 벌였다. 길고 긴 입맞춤이 이어졌다. 키스는 열정적이었고 격렬했다. 그가 옷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가슴을 애무했다. 정구공만큼 탄력 있는 가슴은 진수를 흥분시켰다. 진수는 고은을 재킷 위에 눕혔다.
“아름다워, 너의 두 다리.”
청바지를 끌어내린 진수는 뽀얀 살결의 고은의 다리를 보고 감탄했다. 그녀의 다리에 입술을 가져가 음미하듯 천천히 핥았다. 진수는 다리 사이가 부풀어 올랐다.
“사랑해, 고은아.”
진수는 성급히 바지의 혁대를 풀었다. 한꺼번에 팬티까지 벗어버린 진수는 고은의 팬티를 끌어내렸다. 황홀한 순간이었다. 그녀의 여성이 수줍은 듯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수는 조바심 태우며 그녀 위로 올라갔다.
그때였다. 멀리서 남자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아아악! 으아아아악!”
두 사람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절규에 가까운 비명소리였다.
“이게 무슨 소리죠?”
고은이 경악스런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순식간에 몸이 식어버린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고통스런 목소리야. 분명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여자의 목소리는 아니고.”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왠지 불길하고 무서워.”
고은이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달빛이 구름 뒤로 모습을 감추었다.
“누구 목소리일까요?”
재킷을 집어 진수에게 건네며 고은이 불안한 음성으로 물었다.
“병무나 상혁의 목소리가 아니길 빌어야지. 인상이 사나운 두 남자가 은근히 신경 쓰이는데. 그들이 우리 일행을 어떻게 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리나에게 관심을 가졌었어요. 서로 리나를 어떻게 하겠다고 싸우는 걸까요?”
“설마. 어서 돌아가자고. 서울에 돌아가서도 날 만나 줄 거지?”
“내 행동 보면 모르겠어요.”
“고마워. 내 마음 변치 않을게.”
진수는 고은의 손을 잡고 빠른 걸음으로 평지를 벗어났다. 평지를 벗어나자 옆으로 수풀들이 우거진 길이 나왔다. 두 사람은 그 길을 따라 가면 산장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몇 분쯤 걸었을까. 어디선가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내가 신경질적으로 잔나무 가지를 낫으로 치며 산장을 향해 가고 있는 소리였다.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오자 진수는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들려?”
“무슨 소리요?”
고은은 걸음을 멈추고 귀를 쫑긋 세웠다. 탁 탁 하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서 들렸다.
“들리지?”
“예, 들려요. 누군가 나뭇가지를 부러뜨리고 있어요.”
“숨자. 누군지 봐야지.”
“그들일까요. 험악하게 생긴?”
“그럴지도 몰라.”
진수는 등산객들이 돌을 쌓아올린 돌탑 뒤에 몸을 숨겼다. 소원을 빌면서 돌 하나씩을 주워 만든 돌탑 주변으로는 밤나무들이 높게 가지를 뻗치고 있었다.
잠시 후, 시꺼먼 형체의 사람이 나타났다. 진수와 고은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는 낫을 휘두르며 화가 난 사람처럼 수풀을 내리쳤다. 구름 뒤로 숨었던 달빛이 내리비추자 사람의 정체가 드러났다. 더벅머리를 한 사내는 이십대 후반으로 보였는데, 큰 코와 찢어진 눈을 하고 있었고, 얇은 입술의 소유자였다. 진수와 고은은 처음 보는 사내의 흉측한 외모에 흠칫 놀랐다. 그러는 와중에 고은이 돌탑을 건들었다. 작은 돌멩이 하나가 데르륵 굴렀다. 사내가 돌탑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두 사람은 숨이 턱 막혔다.
“거기 누구야!”
사내가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두 사람은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좋은 말 할 때 이리로 나와!”
“.........”
사내가 돌탑을 조사하겠다는 듯이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새 한 마리가 파드득 하고 날아올랐다. 신이 두 사람을 도운 것일까. 사내가 날아가는 새를 노려보다가 이내 걸음을 옮겼다.
“누구죠?”
사내가 멀어지자 고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글쎄. 아까 그 비명소리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그럴지도 몰라, 오빠. 어서 가요.”
두 사람은 일어나 수풀 안쪽으로 들어갔다. 사내가 간 길을 따라 갈 수는 없는 것이었다. 알 수 없는 공포감이 두 사람을 휘감았다. 비명소리에 이어 낫을 든 사내가 나타났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친구들은 안전할까. 두 사람은 두려움을 느끼며 빠른 걸음을 내딛었다.
사내는 산장이 보이자 밤나무 위로 올라갔다. 산장은 몇 군데 방에 불이 켜져 있었고, 현관으로 보이는 일층 중간쯤에서 불빛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마당 가장자리의 숲 속에서 두 사람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그들은 넓은 마당을 가로질러 불빛이 흘러나오는 일층 현관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왠지 모르게 겁을 집어먹은 것 같은 모습들이었다.
“저 작자들이었군. 아까 돌탑.”
사내는 예민해졌다. 낫으로 나뭇가지를 내리찍었다. 경솔했어, 제기랄. 사내는 해치우지 못한 것을 자책했다. 보이는 대로 모두 처참하게 죽여 버리겠어. 사내는 어금니를 우두둑 씹었다. 일이 순조롭게 풀리지 않은 울화가 닥치는 대로의 살인을 충동질하고 있었다.
진수와 고은이 산장 안으로 들어왔다. 홀에는 병무와 리나가 서성이고 있었다. 주인아저씨는 얼굴이 창백한 진수와 고은을 보자 찬물을 가져와 건네주었다.
“두 사람도 이정규 씨와 강철호 씨를 보고 도망쳐 온 거야?”
주인아저씨가 걱정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그들이 누구예요?”
진수가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숙박계에 이름이 씌어 있어. 험상궂은 남자들 말이야.”
“아니에요, 우린. 낫을 든 남자를 보았어요. 흉측하게 생겼더라고요. 더벅머리에 일상복 차림새였어요. 우리가 놀라서 돌탑 뒤에 숨었거든요. 하마터면 그 자에게 잡힐 뻔 했어요. 마침 새가 날아올랐고, 그 새가 우릴 구한 것 같아요. 혹시 이 숲에 수상한 사람이 살고 있는 거 아니에요.”
고은이 예감이 좋지 않은 생각을 입으로 끄집어냈다.
“그런 사람 본 적이 없어. 이 밤 중에 낫을 들었다고? 그 작자인가?”
“그 작자라니요?”
고은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우리가 사람 시체를 발견했어.”
리나가 말했다.
“그 남자들에게서 도망치다가 덤플 사이에 숨겨져 있는 시체를 발견했어. 누군가 사람을 죽인 거야. 그 정신이 이상하다는 그 여자일지 모른다고. 그 자가 뭐라고 말을 하든?”
“응. 우리더러 숨어 있지 말고 나오라고 하더라고. 꼭 우릴 죽일 것 같았어. 이상한 점이 또 하나 있는데, 어디선가 비명소리가 들렸어. 그 소리에 놀라 산장으로 오게 되었거든. 그러다가 그 남자를 보게 된 거야.”
진수가 말했다.
“우리도 비명소리 들었어. 숲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 몰라.”
병무가 말했다.
“상혁이하고 윤진이가 돌아오지 않고 있어. 숲의 어딘가에 살인자가 있고. 어떡하지? 경찰에 신고하려고 해도 불통 지역이야.”
병무가 염려되는 지 심각한 얼굴이었다.
“그 험악한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진수가 말했다.
“그들 걱정은 하지 마. 우리가 걱정할 사람은 상혁이와 윤진이라고. 누군가 놈에게 당한 것이 틀림없어. 그래서 비명소리가 난 거라고. 어떡하지?”
병무가 말했다.
“내일 아침까지 기다릴 순 없어. 일단 기다려 보고 상혁이와 윤진이가 돌아오지 않으면 우리가 찾아 나서자고.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놈 하나 못 당해내겠어.”
“맞아. 숲에 내버려 둘 순 없어. 제발 무사해야 할 텐데.”
병무의 말에 진수가 대꾸했다.
“두 사람만 가는 것 보다 모두 힘을 합치자고. 내가 이층에 올라가서 사람들 불러내려올게.”
주인아저씨가 나무 계단을 밟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병무와 리나, 진수와 고은이 사이에 친구들을 걱정하는 마음이 한 데 엉켰다.
“상혁이와 윤진이도 분명히 비명소리를 들었을 텐데. 그렇다면 지금쯤은 돌아와야 할 거야. 그렇지?”
진수가 병무에게 물었다.
“그렇지! 멀리 갔을지도 몰라. 조금만 기다려보자고.”
병무가 말했다.
잠시 후에 이층에서 두 쌍의 커플이 내려왔다. 삼십대 초반 커플과 삼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커플이었는데, 주인아저씨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긴장한 얼굴들이었다.
“우리도 돕겠소. 여자들은 뺍시다.”
삼십대 초반의 남자가 호기 있게 말했다.
“나도 동감이요. 여자들은 각자의 방에 가서 쉬도록 하자고요.”
삼십대 후반의 남자가 호응했다.
“나도 가고 싶어, 오빠. 윤진이가 너무 걱정돼.”
리나가 답답하게 방을 지키고 있는 것보다 같이 동행하는 것이 훨씬 감정적으로 편안해 질 것 같은지 말했다.
“안 돼, 리나야. 사람의 목숨이 달린 문제야. 너도 봤지, 사람이 죽은 거. 상혁이와 윤진이는 무사할 거야. 어쩌면 그 남자들이 당했는지 몰라. 그렇게 생각하자고. 알았지?”
병무는 불안해서 안절부절 못하는 리나를 어떻게든 진정시키려고 말했다.
“어떻게 찾아? 어디서 찾아? 나도 갈래.”
리나는 윤진에게 무슨 변이 생기게 되면 책임감을 느껴 고통을 받게 될 것은 자명했다. 이렇게 한가하게 산장에 남아 무사하기만을 기도할 수는 없는 것이다.
“리나야, 그냥 있어. 네 마음 알겠는데, 따라 나서는 건 무리야. 방해만 될 거야.”
진수가 만류했다.
“그래, 리나야. 우린 여기 있자. 신속하게 행동해야 하는데, 우리가 가면 그렇게 되지 못할 거야. 우린 안전한 곳에 있자, 리나야.”
고은이 말했다.
“그래, 리나야. 그렇게 해. 알았지?”
병무의 염려하는 말투에 리나는 조급한 마음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아, 알았어. 모두들 무사해야 해.”
“걱정 마. 아무 일 없을 거야.”
병무는 상혁을 생각하면서 상혁이나 윤진에게 아무 일 없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
“자, 이것들 한 자루씩 가져요.”
주인아저씨가 식칼을 가져와서 한 자루씩 나누어 주었다. 남자 네 명에게 나누어 주고 주인아저씨 자신도 한 자루를 챙겼다.
“살인자가 있다니까 나누어 준 거예요. 방어용이에요. 무사할 겁니다. 난 인상이 고약한 그들도 살아 있으면 해요. 주인으로서 투숙객들이 안전하기를 바라야죠.”
주인아저씨는 손전등도 가져와 나누어 주었다. 이제 상혁이와 윤진이를 찾으러 갈 채비가 모두 끝났다. 모두에게 신경이 팽팽하게 당기는 것 같았다.
“혹시 우리가 돌아오지 않으면 날이 밝을 때까지 여기에서 꼼짝 마. 날이 밝으면 네 명이서 떨어지지 말고 산을 내려가. 그리고 신고를 해. 알았지, 리나야?”
“그런 일 없을 거야. 그렇지 오빠?”
리나는 병무의 말을 돌이켜보며 끔찍한 장면들을 떠올렸다. 잔혹하게 난자당한 여자의 시체처럼 구조대들이 당할 것 같았고, 구조대들 모두가 그 여자처럼 잔인하게 살해될 것만 같은 거였다. 아찔한 생각에 현기증이 일순 일었다.
“우리는 단체로 행동할거야. 그러니 걱정 마. 난 만약을 말한 거야. 어디까지나 만약이야.”
“아, 알았어. 정말 무사해야 해.”
“그래, 염려 마.”
병무는 리나를 가슴에 꼭 안았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리나와 마지막 작별을 고 하는 것 같은 아픈 생각에 병무는 쉽게 리나를 놓지 않았다.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지도 몰라. 꼭 찾아서 데려 와야 해, 병무오빠.”
“알았어. 꼭 찾아서 안전하게 데려올게.”
병무는 리나를 가슴에서 떼내며 말했다.
“서울에서 우리 만나기로 한 거 기억해요, 진수오빠?”
고은은 우회적으로 진수의 무사를 기원하는 마음을 전했다.
“잊을 게 따로 있지. 아무 걱정 말고 쉬고 있어. 알았지, 고은아.”
“알았어요. 조심해요.”
“그래, 조심할게.”
진수와 고은은 남들 눈을 의식해 포옹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삼십 분여를 홀에서 서성였다. 그 시각까지 아무도 돌아오지 않자 주인아저씨가 말했다.
“안 되겠어요. 이러다가 밤이 깊어질지 모르겠어요. 갑시다!”
주인아저씨의 말이 떨어지자 남자들은 홀을 나갔다. 달빛이 비추긴 했지만 그들은 손전등을 켜고 마당으로 나왔다. 그들이 나가자 리나와 고은이도 밖으로 따라 나왔다.
그들이 숲으로 사라지자 리나와 고은이는 마당을 서성거렸다. 그 광경을 밤나무 위의 사내가 한참 동안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나무에서 내려왔다. 내 여자! 사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널 품고 싶다. 사내는 잔나무 뒤에 몸을 감추고 리나를 쳐다보았다. 공격할 시점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상혁아! 윤진 씨!”
병무와 진수는 두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앞장 선 주인아저씨의 뒤를 따랐다. 바람이 좀 거세게 불기 시작했고, 하늘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비가 올지 모르겠는데.”
주인아저씨는 날씨에 민감한 듯 하늘을 올려보며 말했다.
“꼭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염려들 마세요.”
삼십대 후반의 키가 큰 남자가 말했다.
“우리 목소리는 메아리처럼 울릴 거예요. 살인자에게 쫓기고 있으면 대답할 수 없겠지만.”
삼십대 초반의 좀 뚱뚱한 남자가 말했다.
“상혁아! 윤진 씨!”
병무는 상혁이와 윤진이 살인자에게 쫓기는 상상을 하며 애타게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우리 좀 떨어져서 앞으로 나가자고.”
아저씨가 제안했다. 아저씨는 누군가 죽었을 것을 대비하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살인사건의 증거품을 찾듯 횡렬로 쭉 늘어서서 숲 속을 전진해 갔다. 손전등을 비추며 나무와 나무 사이를 지나가면서 발에 뭐가 밟히는 지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십 여분이 지나도록 사람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달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 버렸다.
숲이 우거진 장소에 도달하자 잡초들이 무릎 높이까지 올라와 걷기가 불편했다.
“상혁아! 윤진 씨! 어디 있니?”
병무는 조급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숲 속에 험상궂은 남자 둘까지 포함하면 네 사람이 있는 것이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대답이 없었다.
사내는 리나와 그녀의 친구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데도 산장의 마당을 배회하는 것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그들이 산장 안으로 들어가 버리면 리나를 납치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울 것 같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겠지만.
사내는 리나가 친구에게 뭐라고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우산 가지고 나올게.”
리나가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향했다. 여자는 사내에게 등을 보이고 선 채 구조대 일행이 사라진 숲을 향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기회였다.
“휘리리릭! 휘리리릭!”
사내가 휘파람을 불자 여자가 돌아보았다.
“상혁 씨인가.”
고은은 휘파람 소리가 난 쪽을 향해 돌아섰다.
“상혁 씨야!”
고은은 반색하는 기분으로 휘파람 소리가 난 곳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뭔가 숲 속에서 손짓하는 시커먼 그림자가 보였다. 상혁이 장난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생각한 고은은 서둘러 걸음을 옮겨 놓았다. 상혁이면 윤진이도 함께 있을 것이 틀림없다.
고은은 잔나무 너머의 그림자가 갑자기 사라진 것을 보았다. 어두침침해서 분간이 잘 안 갔지만 사람의 그림자는 분명했다. 상혁이 숨는 짓을 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윤진이도 모습을 감추고 있을 것이다.
“이 판국에 장난하고 난리야. 빨리 나오지 못해요.”
고은은 잔나무가 빽빽한 곳에 도달했다. 때마침 현관에서는 리나가 우산을 두 개를 들고 나오고 있었다. 하나를 펼치고 하나를 든 채 친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리나는 두리번거리는 시야 사이로 검은 형체가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그것은 고은의 입을 틀어막으며 주저앉히는 사내의 짓이었다.
사내는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뜬 여자의 목에 낫을 처박았다. 그리고 주저 없이 그어버렸다. 고은은 바동거리며 목숨이 끊어져 갔다. 사내는 축 처지는 고은을 내팽개치듯 놓아버렸다. 고목나무 쓰려지듯 고은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리나는 고은이 숲 속으로 들어간 줄 알고 검은 형체가 얼핏 보였던 곳으로 걸어갔다.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었다. 우산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우두둑우두둑 거렸다.
비가 내리자 병무는 상혁이와 윤진이가 더욱 걱정됐다. 어쩌면 산장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병무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고 흔적마저 찾을 수 없는 수색의 길이 험난하게만 느껴졌다. 제발 산장에 돌아갔기를, 병무는 불안감만 가중되는 수색의 길에서 그들의 안부를 진심으로 걱정했다. 그때였다. 진수의 목소리가 적막을 갈랐다.
“병무야! 이리로 와 봐!”
병무는 무슨 일인가 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래, 진수야?”
“상혁이야. 상혁이가 여기 있어. 죽은 것 같아!”
병무는 놀라서 진수가 멈춰 선 곳으로 달려갔다. 거센 빗줄기를 맞으며 상혁이가 미동도 없이 엎드려 있었다. 병무는 급히 무릎을 꿇으며 상혁의 머리를 들었다.
“상혁아! 상혁아!”
상혁은 상체를 잡고 흔들어도 꼼짝을 하지 않았다. 주인아저씨가 상혁의 몸을 돌렸다. 가슴에 칼이 깊숙이 박혀 있고 주변에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
“상혁아!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병무는 울음이 차올랐다. 절친한 친구가 누군가에 의해 죽은 것이다. 형언할 수 없는 슬픔 속에서 병무는 윤진을 떠올렸다. 그녀도 죽었을까.
“주변을 찾아보자고. 윤진 씨가 걱정돼!”
일행은 사방으로 흩어져 윤진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는 가운데 병무는 자신의 재킷을 벗어 상혁의 얼굴을 덮어 주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무 죄도 없다. 아무 죄도 없이 무참히 살해된 것이다. 살인자를 향한 적개심이 병무를 지배했다. 분명히 낫을 든 그 작자의 짓일 것이다. 칼을 소지하고 다니는지 몰랐다.
그렇다면 아까 산장에서 들었던 비명소리의 주인공이 상혁이란 말인가. 그럴 공산이 컸다. 그렇다면 험상궂은 두 남자는 산장에 돌아가 있을지 모른다. 리나가 위험하다. 리나는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있겠지. 그들이 돌아왔다면 위험 신호를 느끼고 방에 몸을 숨겼을 것이다. 제발 그랬기를 바라며 병무는 윤진을 찾는데 합류했다. 윤진은 살아 있을 거야. 병무는 절박한 사정 속에서도 윤진의 생사를 염려했다.
사내는 제 발로 걸어오는 리나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실루엣만으로도 가슴을 뛰게 했다. 내 여자! 마침내 내게로 오고 있어! 사내는 심장이 고동치고 온 몸의 근육이 단단해 지고 머릿속이 행복한 상상들로 가득 차는 것을 느꼈다.
“고은아! 거기서 뭐 하니?”
리나가 서너 걸음 앞까지 다가왔다.
사내는 불쑥 그녀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리나가 기겁하며 우산을 떨어뜨렸다.
“당신 누구야?”
“네 남자! 흐허허허! 흐허허허!”
사내가 낫을 든 채 입을 벌리고 웃었다. 리나는 소름이 쫙 끼쳤다. 살인자다! 리나는 돌아섰다. 그리고 전속력으로 산장을 향해 뛰었다. 열 걸음 열 한 걸음, 리나는 발이 엉켜 넘어졌다. 사내가 금세 쫒아와 발목을 잡았다. 리나는 온 힘을 다해 기었다. 사내가 쥔 발목이 조여드는 것처럼 아팠다.
“얌전히 굴어!”
사내가 바동거리는 리나의 목덜미께의 옷깃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죽음의 공포가 리나를 휘어 감았다.
“사, 살려 주세요!”
“얌전히 굴면 넌 살아!”
“아, 알았어요.”
“앞장 서!”
사내가 숲 속을 향해 돌려 세우더니 등을 밀었다. 리나는 그 순간을 이용해 앞으로 뛰어 나갔다. 온 몸의 세포가 살아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살아야 해! 리나는 잔나무가 우거진 숲을 지나쳤다. 돌아보면 안 돼. 무조건 뛰어야 해. 병무오빠를 만날 때까지.
리나는 살인자가 산장에 나타났다는 신호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숨을 헐떡이며 뛰면서도 소리를 질렀다.
“병무오빠! 그 자가 나타났어! 병무오빠! 그 자가 나타났어!”
어디로 가야하는지는 몰랐다. 놈에게 잡히지만 않으면 된다. 빗줄기가 머리를 적시고 빗물이 얼굴로 흘러내렸다.
돌멩이에 걸려 넘어졌다. 리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뒤돌아보았다. 사내가 서너 걸음 뒤에서 쫓아오고 있었다. 공포가 엄습했다. 이대로 가다간 붙잡히고 말아. 리나는 더 힘을 내야한다고 생각했다. 소나무 숲에 접어들었다. 솔방울들이 떨어져 뒹굴었다. 리나는 솔방울을 받고 다시 넘어졌다.
“고분고분 굴라니까, 도망쳐!”
사내가 금세 쫓아와 격분한 감정을 드러냈다. 사내는 리나를 일으켜 세워 뺨을 후려갈겼다. 리나는 뺨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아팠다. 다시 뺨을 후려갈겼다. 리나는 그 충격으로 옆으로 픽 쓰려졌다. 사내가 리나 위에 올라타더니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뺨을 내리쳤다. 눈앞에 별이 번쩍이는 것 같았다.
“내가 네 주인이다, 알았어?”
리나는 내 여자가 무엇이고 네 주인이 무엇인지 얼른 깨닫지 못했다.
“일어 서!”
사내가 폭행을 멈추고 지시했다. 리나는 자신이 죽음의 문턱에 와 있다고 생각했다. 얼얼한 뺨을 어루만질 새도 없이 숨막히는 공포가 밀려들었다.
“무슨 소리 들렸지?”
병무는 수색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들었어. 병무오빠, 그 자가 나타났다였어.”
진수가 놀란 눈을 하고 물었다.
“돌아가자! 아저씨들 우린 산장으로 가 봐야겠어요.”
병무는 말을 마치자마자 전속력으로 산장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리나에게 무슨 일이 닥친 것 같았다. 그녀가 죽으면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을 것이다. 숨이 턱턱 막혀왔다.
리나의 목에 낫이 걸렸다. 여차하면 처치해 버릴 듯한 조치였다. 리나는 두려움에 떨었다.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었고, 사방은 어두웠다.
“내 말에 순종하면 넌 살아. 알았어?”
사내의 쇳소리 같은 목소리가 귓전에서 울렸다. 나를 어떻게 할 심산일까. 리나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자신의 운명 앞에서 절망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병무오빠가 보고 싶었다. 그는 내 목소리를 들었을까. 날 구하려 와 줄까. 믿을 수 있는 건 오로지 병무오빠뿐이었다.
“아, 알았어요. 제발 죽이진 말아 주세요.”
리나는 사내를 안심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병무오빠가 구하러 와 줄 것이고, 그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 집 처마에는 백열전구가 켜져 있었다. 쓰레이트 지붕을 인 단층짜리 건물이었는데, 허름하고 무척이나 오래되어 보이는 집이었다. 산 중간쯤이었는데, 그리 크지 않은 마당에 평상이 놓여 있었고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미동도 없이 비를 맞고 엎드려 있었다. 리나는 고양이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비를 맞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사내가 낫을 거두었다. 리나는 그가 무슨 짓을 하려고 납치해 왔는지 추정할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뛰었다.
“들어 가!”
사내가 나무문을 가리켰다. 리나는 떨리는 손으로 문구멍에 달린 줄을 잡아 당겼다. 문이 삐꺼덕 소리를 내며 조용히 열렸다. 순간 심한 악취가 확 풍겼다. 역겨워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리나가 겁을 집어먹은 채 안으로 들어가자 사내가 불을 켰다.
백열전구 두 개가 실내를 밝혔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벽에 못이 박혀 있고 그곳에 온갖 날카로운 농기구들이 걸려 있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나무로 만든 침대였는데, 때로 얼룩진 이불이 펼쳐져 있었다. 그 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고양이의 털과 가죽들이었는데, 아무렇게나 내던져 있었다. 고양이를 잡아먹었는지도 몰랐다. 악취의 진원지가 분명할 것이다.
어쩌면 이곳이 창고였는지 모른다고 리나는 생각했다. 창고를 개조해 주거용으로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납치해 왔단 말인가. 병무오빠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그가 이곳을 찾아낼 수 있을까. 리나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옷을 벗어! 그리고 이것으로 갈아입어!”
사내가 비에 흠뻑 젖은 리나에게 남방 하나를 내던졌다. 리나는 가슴팍에 안기는 남방을 받아 쥐었다.
“가, 갈아입으라고요?”
“그래, 당장.”
사내는 웃통을 벗어 던지고 상체가 알몸이 되었다. 그의 찢어진 눈이 매섭게 빛났다. 리나는 오들오들 떨려오는 한기를 느꼈다. 그러나 낯선 사내 앞에서 옷을 갈아입기는 싫었다.
“괘, 괜찮아요.”
“내가 벗겨 줘? 응?”
“........”
“빨리 갈아입어, 내 여자!”
사내가 비열해 보이는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 속에서 강렬한 욕정이 느껴졌다. 저 자가 무슨 짓을 하려고 옷을 갈아입힐까. 리나는 좋은 뜻이 내포된 것 같지 않다는 것을 육감으로 느꼈다. 나를 성폭행하려는 것이 틀림없어. 도망쳐야 되는데.
리나가 머뭇거리자 사내가 다가오더니 윗옷 섶에 낫을 걸치고 이내 아래로 그어 내렸다. 그에 따라 티셔츠가 아가리를 벌리듯 찢어졌다. 리나는 급히 가슴을 가렸다.
“부끄러워 마, 내 여자. 넌 여기서 나와 살 거야.”
사내의 말에 소름이 확 돋았다. 여기서 산다고. 그래서 아끼는 걸까. 공포감이 엄습했다. 사내가 바지 윗부분에 낫을 걸치더니 이내 그어 버렸다. 바지 앞섶이 그대로 찢어졌다. 리나는 황급히 등을 보이고 돌아섰다. 바지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지금은 널 갖고 싶지 않아. 난 뭐 좀 먹을 거야. 갈아입고 침대로 가 쉬고 있어.”
사내가 그녀를 내버려 두고 밖으로 나갔다. 리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깨달았다. 옷을 벗어 엉덩이를 가리는 남방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살금살금 문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사내가 비를 맞으며 평상에 놓여 있던 고양이의 털을 깎아내고 있었다.
리나는 노련한 솜씨로 쉽사리 고양이의 털을 벗겨내고 수돗가로 가져가 배를 가르는 사내를 보고 경악했다. 조금도 주저없이 고양이의 배를 가르더니 뭔가를 꺼내 입으로 가져가는 것이었다. 아마도 창자인 것 같았다. 리나는 엽기적인 식성에 놀라며 농기구가 있는 곳으로 가 삼지창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문가로 가 사내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이게 누구야?”
병무는 고은의 시체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는 목이 벌어져 있었고, 시뻘건 피가 흘러내려 주변에 고여 있었다.
“고은아!”
진수는 싸늘한 시체로 널브러져 있는 고은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가면 어떡해, 고은아!”
“진수야!”
병무는 진수가 벌써 고은에게 정이 들었음을 깨달았다. 가슴이 울컥했다.
상혁이 죽었고 고은이도 죽었다. 윤진은 행방불명이고 리나는 어디에 있을까. 병무는 진수를 내버려 두고 산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산장은 텅 빈 듯 조용했다.
병무는 각 방마다 돌아다니며 리나를 찾았다. 투숙한 두 여자가 각자의 방에서 자고 있을 뿐 리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병무는 자고 있는 여자들을 깨어 리나의 행방에 대해서 물었다. 그들은 모른다고 말하며 고은이 죽었다고 말하자 공포에 질리는 얼굴들이었다.
병무는 산장을 뛰쳐나왔다. 마당의 한 켠에 우산 두 개가 나뒹굴고 있었다. 병무는 미친 듯이 산장 주변을 수색했다. 리나는 발견되지 않았다. 놈이 데려갔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시체가 발견됐을 것이다. 놈이 윤진이도 데려 갔을까. 그런데 왜 고은이는 죽였단 말인가. 반항해서? 그럼 리나는 순순히 놈에게 잡혔단 말인가.
제발 살아만 있어 줘, 리나야.
병무는 진수에게 달려갔다.
“진수야, 괜찮아?”
“난 괜찮아. 리나는 어떻게 됐어?”
“안 보여. 놈이 납치해 갔는지도 몰라. 난 죽었다는 생각은 안 할래. 어딘가에서 살아서 날 기다릴 것만 같아. 함께 찾아 줄래?”
“그래, 난 놈을 증오해. 내 손으로 고은의 원수를 갚고 싶어. 죽여 버리고 말 거야, 강아지!”
진수가 분개한 감정을 들어내며 옷을 벗어 고은의 얼굴을 가려 주었다.
“리나야! 리나야!”
리나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반색했다. 병무오빠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병무오빠의
음성을 듣자 알 수 없는 위로가 느껴지고 용솟음치듯 희망이 생겨났다. 구하러 온 것이 틀림없어. 리나는 삼지창을 쥔 손에 힘을 가했다.
사내는 깜짝 놀랐다. 산장에서 이곳까지는 꽤나 먼 거리였다. 그런데 여자를 부르는 소리가 너무도 가까이서 들려왔다. 사내는 고양이를 뜯어 먹던 짓을 멈추고 급히 집 안으로 달려갔다. 여자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포박해 놓아야 한다. 그런 후 적들을 없애 버릴 것이었다.
리나는 사내가 달려오자 삼지창을 쳐들었다. 그리고 문이 열리고 사내가 들어서자 사내의 얼굴을 향해 삼지창을 내리쳤다. 사내의 얼굴에 삼지창이 박혔다. 리나는 비명을 지르는 사내를 두고 밖으로 뛰었다. 그러나 한 걸음도 채 내딛기 전에 놈의 손에 붙잡혔다. 놈은 얼굴에 피범벅이었다.
“이 씨팔년!”
사내가 삼지창을 빼 던지고 그녀의 목에 양손을 가져왔다.
“병무오빠! 나 여기 있어!”
리나는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죽여 버리겠어, 씨팔년!”
사내가 목을 조여 오기 시작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 같았다. 리나는 무릎을 들어 사내의 사타구니를 찼다. 사내가 비명을 질렀다.
“아악!”
사내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게졌다.
“쌍년! 없애주지!”
사내가 삼지창을 집어 들었다. 그 때 문이 벌컥 열렸다.
“병무오빠! 진수오빠!”
리나는 들어서는 두 사람을 보고 감격에 겨워 콧등이 시큰했다. 두 사람은 리나의 고함소리를 들고 몽둥이를 구해 들고 즉시 이곳으로 달려 온 길이었다.
“너희들은 뭐야! 날 상대해 보겠다고!”
사내가 빈정거리듯 말하며 두 사람을 향해 돌아섰다.
“리나야, 윤진이는 어딨어?”
병무가 사내를 경계하듯 주시하며 물었다.
“내가 죽인 년인가 보군. 너희들도 내가 죽여주지.”
사내가 시뻘개 진 얼굴로 삼지창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사내에게 먼저 달려든 것은 진수였다. 진수는 고은에 이어 윤진마저 죽었다는 말에 분개한 감정을 추스를 수 없는 것 같았다. 진수가 몽둥이를 휘두르며 달려들자 사내가 삼지창을 내리쳤다.
삼지창이 진수의 어깨를 스쳤다. 삼지창이 아래로 내려간 찰나에 병무의 몽둥이가 사내의 머리를 강타했다. 사내의 머리가 흔들렸다. 그러자 사내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이는지 삼지창을 버리고 병무에게 달려들었다. 병무는 친구들을 살해한 사내의 잔혹한 행위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사내가 덮쳐오자 몽둥이를 후려쳤다. 허리에 몽둥이를 맞은 사내는 비틀거릴 법도 한 데 꿈쩍도 하지 않고 병무에게 덮쳐 넘어뜨렸다.
“네가 저 년 애인이야! 내가 널 죽여주마!”
사내가 병무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숨이 막혀왔다.
“미친 새끼!”
진수는 삼지창을 높이 쳐들었다가 그대로 사내의 머리를 내리쳤다. 삼지창이 사내의 머리에 박혀 버렸다. 그래도 사내는 병무의 목을 조였다. 병무의 얼굴이 벌게지면서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병무는 질실할 것 같은 공포 속에서 리나를 보았다. 리나는 부들부들 떨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 때 병무의 손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병무는 그것을 힘겹게 들어 사내의 목에 처박았다. 그것은 낫이었다. 사내의 손아귀 힘이 풀려 나갔다. 진수는 사내의 목에 박힌 낫을 잡아 그대로 옆으로 그었다. 사내가 눈을 크게 뜨더니 힘없이 쓰려졌다. 병무는 사내를 밀치며 일어났다. 리나가 달려와 병무를 끌어안았다.
“오빠, 와 줬구나. 괜찮아?”
“괜찮아, 리나야. 어디 다친 데는 없지?”
“응, 없어. 사랑해 오빠!”
그 광경을 부러운 눈으로 진수가 지켜보았다.
문이 벌컥 열리며 산장 주인아저씨와 두 남자가 들어왔다. 그들은 목숨이 끊어진 사내를 내려다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단편] 지옥의 숲 下
[출처] 웃대 - 디스종결자 님
복구글은 시간에 관계없이 랜덤으로 올립니다.
비명소리가 나기 전의 시각, 진수는 고은의 청바지를 끌어 내리고 있었다. 흰 속살의 고은의 다리는 매혹적이었다. 고은은 진수가 깔아놓은 재킷 위에 누워 있었다. 그곳은 산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평지로 잔디가 자라 있는 곳이었다.
“너 마음에 들어."
진수가 먼저 호감을 드러냈었다.
“어떤 면이요?”
성격이 좋은 고은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소탈하고 붙임성 있는 성격, 그리고 멋진 몸매.”
“나한테 원하는 것이 뭐에요?”
진수는 좀 머뭇거렸다. 그러나 이내 용기를 냈다.
“널 갖고 싶어.”
고은이 비시시 웃었다.
“우리 오늘 처음 만난 거 알아요?”
“알아. 하지만 널 아주 오랫동안 만나온 것 같아.”
“날 책임질 거예요?”
고은은 성경험이 전무한 여자가 아니었다. 일 년 전에 사귀던 남자와 섹스한 경험이 있었다. 그 남자와는 인연이 닿지 않았는지 섹스를 가진 후 곧장 헤어지고 말았었다. 하지만 고은은 그 상처로 오랫동안 힘겨워하진 않았었다. 매사에 긍정적인 고은은 자신에게 해가 되고 유익하지 않은 기억은 쉽사리 지워버리는 외향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책임질게. 하늘을 두고 약속해.”
진수가 정색을 하고 대꾸했다.
고은은 마른 체구에 뿔대안경을 착용한 진수의 외모에 끌렸고, 부드럽고 자상한 어투와 드러나지 않게 배려하는 마음 씀씀이가 계속 눈길을 사로잡았다.
고은은 손을 잡는 진수를 배척하지 않았다. 이어서 진수의 손이 볼을 쓰다듬었고 입술을 어루만졌다. 고은은 몸 안에서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가 조심스럽게 키스를 해 왔고, 고은은 그의 입술이 포개지는 감촉에 흠칫 놀라며 입술을 벌였다. 길고 긴 입맞춤이 이어졌다. 키스는 열정적이었고 격렬했다. 그가 옷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가슴을 애무했다. 정구공만큼 탄력 있는 가슴은 진수를 흥분시켰다. 진수는 고은을 재킷 위에 눕혔다.
“아름다워, 너의 두 다리.”
청바지를 끌어내린 진수는 뽀얀 살결의 고은의 다리를 보고 감탄했다. 그녀의 다리에 입술을 가져가 음미하듯 천천히 핥았다. 진수는 다리 사이가 부풀어 올랐다.
“사랑해, 고은아.”
진수는 성급히 바지의 혁대를 풀었다. 한꺼번에 팬티까지 벗어버린 진수는 고은의 팬티를 끌어내렸다. 황홀한 순간이었다. 그녀의 여성이 수줍은 듯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수는 조바심 태우며 그녀 위로 올라갔다.
그때였다. 멀리서 남자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아아악! 으아아아악!”
두 사람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절규에 가까운 비명소리였다.
“이게 무슨 소리죠?”
고은이 경악스런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순식간에 몸이 식어버린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고통스런 목소리야. 분명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여자의 목소리는 아니고.”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왠지 불길하고 무서워.”
고은이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달빛이 구름 뒤로 모습을 감추었다.
“누구 목소리일까요?”
재킷을 집어 진수에게 건네며 고은이 불안한 음성으로 물었다.
“병무나 상혁의 목소리가 아니길 빌어야지. 인상이 사나운 두 남자가 은근히 신경 쓰이는데. 그들이 우리 일행을 어떻게 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리나에게 관심을 가졌었어요. 서로 리나를 어떻게 하겠다고 싸우는 걸까요?”
“설마. 어서 돌아가자고. 서울에 돌아가서도 날 만나 줄 거지?”
“내 행동 보면 모르겠어요.”
“고마워. 내 마음 변치 않을게.”
진수는 고은의 손을 잡고 빠른 걸음으로 평지를 벗어났다. 평지를 벗어나자 옆으로 수풀들이 우거진 길이 나왔다. 두 사람은 그 길을 따라 가면 산장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몇 분쯤 걸었을까. 어디선가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내가 신경질적으로 잔나무 가지를 낫으로 치며 산장을 향해 가고 있는 소리였다.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오자 진수는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들려?”
“무슨 소리요?”
고은은 걸음을 멈추고 귀를 쫑긋 세웠다. 탁 탁 하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서 들렸다.
“들리지?”
“예, 들려요. 누군가 나뭇가지를 부러뜨리고 있어요.”
“숨자. 누군지 봐야지.”
“그들일까요. 험악하게 생긴?”
“그럴지도 몰라.”
진수는 등산객들이 돌을 쌓아올린 돌탑 뒤에 몸을 숨겼다. 소원을 빌면서 돌 하나씩을 주워 만든 돌탑 주변으로는 밤나무들이 높게 가지를 뻗치고 있었다.
잠시 후, 시꺼먼 형체의 사람이 나타났다. 진수와 고은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는 낫을 휘두르며 화가 난 사람처럼 수풀을 내리쳤다. 구름 뒤로 숨었던 달빛이 내리비추자 사람의 정체가 드러났다. 더벅머리를 한 사내는 이십대 후반으로 보였는데, 큰 코와 찢어진 눈을 하고 있었고, 얇은 입술의 소유자였다. 진수와 고은은 처음 보는 사내의 흉측한 외모에 흠칫 놀랐다. 그러는 와중에 고은이 돌탑을 건들었다. 작은 돌멩이 하나가 데르륵 굴렀다. 사내가 돌탑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두 사람은 숨이 턱 막혔다.
“거기 누구야!”
사내가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두 사람은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좋은 말 할 때 이리로 나와!”
“.........”
사내가 돌탑을 조사하겠다는 듯이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새 한 마리가 파드득 하고 날아올랐다. 신이 두 사람을 도운 것일까. 사내가 날아가는 새를 노려보다가 이내 걸음을 옮겼다.
“누구죠?”
사내가 멀어지자 고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글쎄. 아까 그 비명소리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그럴지도 몰라, 오빠. 어서 가요.”
두 사람은 일어나 수풀 안쪽으로 들어갔다. 사내가 간 길을 따라 갈 수는 없는 것이었다. 알 수 없는 공포감이 두 사람을 휘감았다. 비명소리에 이어 낫을 든 사내가 나타났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친구들은 안전할까. 두 사람은 두려움을 느끼며 빠른 걸음을 내딛었다.
사내는 산장이 보이자 밤나무 위로 올라갔다. 산장은 몇 군데 방에 불이 켜져 있었고, 현관으로 보이는 일층 중간쯤에서 불빛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마당 가장자리의 숲 속에서 두 사람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그들은 넓은 마당을 가로질러 불빛이 흘러나오는 일층 현관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왠지 모르게 겁을 집어먹은 것 같은 모습들이었다.
“저 작자들이었군. 아까 돌탑.”
사내는 예민해졌다. 낫으로 나뭇가지를 내리찍었다. 경솔했어, 제기랄. 사내는 해치우지 못한 것을 자책했다. 보이는 대로 모두 처참하게 죽여 버리겠어. 사내는 어금니를 우두둑 씹었다. 일이 순조롭게 풀리지 않은 울화가 닥치는 대로의 살인을 충동질하고 있었다.
진수와 고은이 산장 안으로 들어왔다. 홀에는 병무와 리나가 서성이고 있었다. 주인아저씨는 얼굴이 창백한 진수와 고은을 보자 찬물을 가져와 건네주었다.
“두 사람도 이정규 씨와 강철호 씨를 보고 도망쳐 온 거야?”
주인아저씨가 걱정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그들이 누구예요?”
진수가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숙박계에 이름이 씌어 있어. 험상궂은 남자들 말이야.”
“아니에요, 우린. 낫을 든 남자를 보았어요. 흉측하게 생겼더라고요. 더벅머리에 일상복 차림새였어요. 우리가 놀라서 돌탑 뒤에 숨었거든요. 하마터면 그 자에게 잡힐 뻔 했어요. 마침 새가 날아올랐고, 그 새가 우릴 구한 것 같아요. 혹시 이 숲에 수상한 사람이 살고 있는 거 아니에요.”
고은이 예감이 좋지 않은 생각을 입으로 끄집어냈다.
“그런 사람 본 적이 없어. 이 밤 중에 낫을 들었다고? 그 작자인가?”
“그 작자라니요?”
고은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우리가 사람 시체를 발견했어.”
리나가 말했다.
“그 남자들에게서 도망치다가 덤플 사이에 숨겨져 있는 시체를 발견했어. 누군가 사람을 죽인 거야. 그 정신이 이상하다는 그 여자일지 모른다고. 그 자가 뭐라고 말을 하든?”
“응. 우리더러 숨어 있지 말고 나오라고 하더라고. 꼭 우릴 죽일 것 같았어. 이상한 점이 또 하나 있는데, 어디선가 비명소리가 들렸어. 그 소리에 놀라 산장으로 오게 되었거든. 그러다가 그 남자를 보게 된 거야.”
진수가 말했다.
“우리도 비명소리 들었어. 숲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 몰라.”
병무가 말했다.
“상혁이하고 윤진이가 돌아오지 않고 있어. 숲의 어딘가에 살인자가 있고. 어떡하지? 경찰에 신고하려고 해도 불통 지역이야.”
병무가 염려되는 지 심각한 얼굴이었다.
“그 험악한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진수가 말했다.
“그들 걱정은 하지 마. 우리가 걱정할 사람은 상혁이와 윤진이라고. 누군가 놈에게 당한 것이 틀림없어. 그래서 비명소리가 난 거라고. 어떡하지?”
병무가 말했다.
“내일 아침까지 기다릴 순 없어. 일단 기다려 보고 상혁이와 윤진이가 돌아오지 않으면 우리가 찾아 나서자고.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놈 하나 못 당해내겠어.”
“맞아. 숲에 내버려 둘 순 없어. 제발 무사해야 할 텐데.”
병무의 말에 진수가 대꾸했다.
“두 사람만 가는 것 보다 모두 힘을 합치자고. 내가 이층에 올라가서 사람들 불러내려올게.”
주인아저씨가 나무 계단을 밟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병무와 리나, 진수와 고은이 사이에 친구들을 걱정하는 마음이 한 데 엉켰다.
“상혁이와 윤진이도 분명히 비명소리를 들었을 텐데. 그렇다면 지금쯤은 돌아와야 할 거야. 그렇지?”
진수가 병무에게 물었다.
“그렇지! 멀리 갔을지도 몰라. 조금만 기다려보자고.”
병무가 말했다.
잠시 후에 이층에서 두 쌍의 커플이 내려왔다. 삼십대 초반 커플과 삼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커플이었는데, 주인아저씨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긴장한 얼굴들이었다.
“우리도 돕겠소. 여자들은 뺍시다.”
삼십대 초반의 남자가 호기 있게 말했다.
“나도 동감이요. 여자들은 각자의 방에 가서 쉬도록 하자고요.”
삼십대 후반의 남자가 호응했다.
“나도 가고 싶어, 오빠. 윤진이가 너무 걱정돼.”
리나가 답답하게 방을 지키고 있는 것보다 같이 동행하는 것이 훨씬 감정적으로 편안해 질 것 같은지 말했다.
“안 돼, 리나야. 사람의 목숨이 달린 문제야. 너도 봤지, 사람이 죽은 거. 상혁이와 윤진이는 무사할 거야. 어쩌면 그 남자들이 당했는지 몰라. 그렇게 생각하자고. 알았지?”
병무는 불안해서 안절부절 못하는 리나를 어떻게든 진정시키려고 말했다.
“어떻게 찾아? 어디서 찾아? 나도 갈래.”
리나는 윤진에게 무슨 변이 생기게 되면 책임감을 느껴 고통을 받게 될 것은 자명했다. 이렇게 한가하게 산장에 남아 무사하기만을 기도할 수는 없는 것이다.
“리나야, 그냥 있어. 네 마음 알겠는데, 따라 나서는 건 무리야. 방해만 될 거야.”
진수가 만류했다.
“그래, 리나야. 우린 여기 있자. 신속하게 행동해야 하는데, 우리가 가면 그렇게 되지 못할 거야. 우린 안전한 곳에 있자, 리나야.”
고은이 말했다.
“그래, 리나야. 그렇게 해. 알았지?”
병무의 염려하는 말투에 리나는 조급한 마음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아, 알았어. 모두들 무사해야 해.”
“걱정 마. 아무 일 없을 거야.”
병무는 상혁을 생각하면서 상혁이나 윤진에게 아무 일 없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
“자, 이것들 한 자루씩 가져요.”
주인아저씨가 식칼을 가져와서 한 자루씩 나누어 주었다. 남자 네 명에게 나누어 주고 주인아저씨 자신도 한 자루를 챙겼다.
“살인자가 있다니까 나누어 준 거예요. 방어용이에요. 무사할 겁니다. 난 인상이 고약한 그들도 살아 있으면 해요. 주인으로서 투숙객들이 안전하기를 바라야죠.”
주인아저씨는 손전등도 가져와 나누어 주었다. 이제 상혁이와 윤진이를 찾으러 갈 채비가 모두 끝났다. 모두에게 신경이 팽팽하게 당기는 것 같았다.
“혹시 우리가 돌아오지 않으면 날이 밝을 때까지 여기에서 꼼짝 마. 날이 밝으면 네 명이서 떨어지지 말고 산을 내려가. 그리고 신고를 해. 알았지, 리나야?”
“그런 일 없을 거야. 그렇지 오빠?”
리나는 병무의 말을 돌이켜보며 끔찍한 장면들을 떠올렸다. 잔혹하게 난자당한 여자의 시체처럼 구조대들이 당할 것 같았고, 구조대들 모두가 그 여자처럼 잔인하게 살해될 것만 같은 거였다. 아찔한 생각에 현기증이 일순 일었다.
“우리는 단체로 행동할거야. 그러니 걱정 마. 난 만약을 말한 거야. 어디까지나 만약이야.”
“아, 알았어. 정말 무사해야 해.”
“그래, 염려 마.”
병무는 리나를 가슴에 꼭 안았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리나와 마지막 작별을 고 하는 것 같은 아픈 생각에 병무는 쉽게 리나를 놓지 않았다.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지도 몰라. 꼭 찾아서 데려 와야 해, 병무오빠.”
“알았어. 꼭 찾아서 안전하게 데려올게.”
병무는 리나를 가슴에서 떼내며 말했다.
“서울에서 우리 만나기로 한 거 기억해요, 진수오빠?”
고은은 우회적으로 진수의 무사를 기원하는 마음을 전했다.
“잊을 게 따로 있지. 아무 걱정 말고 쉬고 있어. 알았지, 고은아.”
“알았어요. 조심해요.”
“그래, 조심할게.”
진수와 고은은 남들 눈을 의식해 포옹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삼십 분여를 홀에서 서성였다. 그 시각까지 아무도 돌아오지 않자 주인아저씨가 말했다.
“안 되겠어요. 이러다가 밤이 깊어질지 모르겠어요. 갑시다!”
주인아저씨의 말이 떨어지자 남자들은 홀을 나갔다. 달빛이 비추긴 했지만 그들은 손전등을 켜고 마당으로 나왔다. 그들이 나가자 리나와 고은이도 밖으로 따라 나왔다.
“어느 쪽으로 갔어요?”
주인아저씨가 병무에게 물었다. 병무는 상혁이와 윤진이가 숲으로 들어가던 방향을 손가락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간 것을 봤어요.”
“그럼 이쪽으로 갑시다.”
그들이 숲으로 사라지자 리나와 고은이는 마당을 서성거렸다. 그 광경을 밤나무 위의 사내가 한참 동안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나무에서 내려왔다. 내 여자! 사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널 품고 싶다. 사내는 잔나무 뒤에 몸을 감추고 리나를 쳐다보았다. 공격할 시점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상혁아! 윤진 씨!”
병무와 진수는 두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앞장 선 주인아저씨의 뒤를 따랐다. 바람이 좀 거세게 불기 시작했고, 하늘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비가 올지 모르겠는데.”
주인아저씨는 날씨에 민감한 듯 하늘을 올려보며 말했다.
“꼭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염려들 마세요.”
삼십대 후반의 키가 큰 남자가 말했다.
“우리 목소리는 메아리처럼 울릴 거예요. 살인자에게 쫓기고 있으면 대답할 수 없겠지만.”
삼십대 초반의 좀 뚱뚱한 남자가 말했다.
“상혁아! 윤진 씨!”
병무는 상혁이와 윤진이 살인자에게 쫓기는 상상을 하며 애타게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우리 좀 떨어져서 앞으로 나가자고.”
아저씨가 제안했다. 아저씨는 누군가 죽었을 것을 대비하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살인사건의 증거품을 찾듯 횡렬로 쭉 늘어서서 숲 속을 전진해 갔다. 손전등을 비추며 나무와 나무 사이를 지나가면서 발에 뭐가 밟히는 지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십 여분이 지나도록 사람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달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 버렸다.
숲이 우거진 장소에 도달하자 잡초들이 무릎 높이까지 올라와 걷기가 불편했다.
“상혁아! 윤진 씨! 어디 있니?”
병무는 조급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숲 속에 험상궂은 남자 둘까지 포함하면 네 사람이 있는 것이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대답이 없었다.
사내는 리나와 그녀의 친구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데도 산장의 마당을 배회하는 것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그들이 산장 안으로 들어가 버리면 리나를 납치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울 것 같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겠지만.
사내는 리나가 친구에게 뭐라고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우산 가지고 나올게.”
리나가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향했다. 여자는 사내에게 등을 보이고 선 채 구조대 일행이 사라진 숲을 향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기회였다.
“휘리리릭! 휘리리릭!”
사내가 휘파람을 불자 여자가 돌아보았다.
“상혁 씨인가.”
고은은 휘파람 소리가 난 쪽을 향해 돌아섰다.
“상혁 씨야!”
고은은 반색하는 기분으로 휘파람 소리가 난 곳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뭔가 숲 속에서 손짓하는 시커먼 그림자가 보였다. 상혁이 장난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생각한 고은은 서둘러 걸음을 옮겨 놓았다. 상혁이면 윤진이도 함께 있을 것이 틀림없다.
고은은 잔나무 너머의 그림자가 갑자기 사라진 것을 보았다. 어두침침해서 분간이 잘 안 갔지만 사람의 그림자는 분명했다. 상혁이 숨는 짓을 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윤진이도 모습을 감추고 있을 것이다.
“이 판국에 장난하고 난리야. 빨리 나오지 못해요.”
고은은 잔나무가 빽빽한 곳에 도달했다. 때마침 현관에서는 리나가 우산을 두 개를 들고 나오고 있었다. 하나를 펼치고 하나를 든 채 친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리나는 두리번거리는 시야 사이로 검은 형체가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그것은 고은의 입을 틀어막으며 주저앉히는 사내의 짓이었다.
사내는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뜬 여자의 목에 낫을 처박았다. 그리고 주저 없이 그어버렸다. 고은은 바동거리며 목숨이 끊어져 갔다. 사내는 축 처지는 고은을 내팽개치듯 놓아버렸다. 고목나무 쓰려지듯 고은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리나는 고은이 숲 속으로 들어간 줄 알고 검은 형체가 얼핏 보였던 곳으로 걸어갔다.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었다. 우산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우두둑우두둑 거렸다.
비가 내리자 병무는 상혁이와 윤진이가 더욱 걱정됐다. 어쩌면 산장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병무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고 흔적마저 찾을 수 없는 수색의 길이 험난하게만 느껴졌다. 제발 산장에 돌아갔기를, 병무는 불안감만 가중되는 수색의 길에서 그들의 안부를 진심으로 걱정했다. 그때였다. 진수의 목소리가 적막을 갈랐다.
“병무야! 이리로 와 봐!”
병무는 무슨 일인가 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래, 진수야?”
“상혁이야. 상혁이가 여기 있어. 죽은 것 같아!”
병무는 놀라서 진수가 멈춰 선 곳으로 달려갔다. 거센 빗줄기를 맞으며 상혁이가 미동도 없이 엎드려 있었다. 병무는 급히 무릎을 꿇으며 상혁의 머리를 들었다.
“상혁아! 상혁아!”
상혁은 상체를 잡고 흔들어도 꼼짝을 하지 않았다. 주인아저씨가 상혁의 몸을 돌렸다. 가슴에 칼이 깊숙이 박혀 있고 주변에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
“상혁아!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병무는 울음이 차올랐다. 절친한 친구가 누군가에 의해 죽은 것이다. 형언할 수 없는 슬픔 속에서 병무는 윤진을 떠올렸다. 그녀도 죽었을까.
“주변을 찾아보자고. 윤진 씨가 걱정돼!”
일행은 사방으로 흩어져 윤진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는 가운데 병무는 자신의 재킷을 벗어 상혁의 얼굴을 덮어 주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무 죄도 없다. 아무 죄도 없이 무참히 살해된 것이다. 살인자를 향한 적개심이 병무를 지배했다. 분명히 낫을 든 그 작자의 짓일 것이다. 칼을 소지하고 다니는지 몰랐다.
그렇다면 아까 산장에서 들었던 비명소리의 주인공이 상혁이란 말인가. 그럴 공산이 컸다. 그렇다면 험상궂은 두 남자는 산장에 돌아가 있을지 모른다. 리나가 위험하다. 리나는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있겠지. 그들이 돌아왔다면 위험 신호를 느끼고 방에 몸을 숨겼을 것이다. 제발 그랬기를 바라며 병무는 윤진을 찾는데 합류했다. 윤진은 살아 있을 거야. 병무는 절박한 사정 속에서도 윤진의 생사를 염려했다.
사내는 제 발로 걸어오는 리나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실루엣만으로도 가슴을 뛰게 했다. 내 여자! 마침내 내게로 오고 있어! 사내는 심장이 고동치고 온 몸의 근육이 단단해 지고 머릿속이 행복한 상상들로 가득 차는 것을 느꼈다.
“고은아! 거기서 뭐 하니?”
리나가 서너 걸음 앞까지 다가왔다.
사내는 불쑥 그녀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리나가 기겁하며 우산을 떨어뜨렸다.
“당신 누구야?”
“네 남자! 흐허허허! 흐허허허!”
사내가 낫을 든 채 입을 벌리고 웃었다. 리나는 소름이 쫙 끼쳤다. 살인자다! 리나는 돌아섰다. 그리고 전속력으로 산장을 향해 뛰었다. 열 걸음 열 한 걸음, 리나는 발이 엉켜 넘어졌다. 사내가 금세 쫒아와 발목을 잡았다. 리나는 온 힘을 다해 기었다. 사내가 쥔 발목이 조여드는 것처럼 아팠다.
“얌전히 굴어!”
사내가 바동거리는 리나의 목덜미께의 옷깃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죽음의 공포가 리나를 휘어 감았다.
“사, 살려 주세요!”
“얌전히 굴면 넌 살아!”
“아, 알았어요.”
“앞장 서!”
사내가 숲 속을 향해 돌려 세우더니 등을 밀었다. 리나는 그 순간을 이용해 앞으로 뛰어 나갔다. 온 몸의 세포가 살아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살아야 해! 리나는 잔나무가 우거진 숲을 지나쳤다. 돌아보면 안 돼. 무조건 뛰어야 해. 병무오빠를 만날 때까지.
리나는 살인자가 산장에 나타났다는 신호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숨을 헐떡이며 뛰면서도 소리를 질렀다.
“병무오빠! 그 자가 나타났어! 병무오빠! 그 자가 나타났어!”
어디로 가야하는지는 몰랐다. 놈에게 잡히지만 않으면 된다. 빗줄기가 머리를 적시고 빗물이 얼굴로 흘러내렸다.
돌멩이에 걸려 넘어졌다. 리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뒤돌아보았다. 사내가 서너 걸음 뒤에서 쫓아오고 있었다. 공포가 엄습했다. 이대로 가다간 붙잡히고 말아. 리나는 더 힘을 내야한다고 생각했다. 소나무 숲에 접어들었다. 솔방울들이 떨어져 뒹굴었다. 리나는 솔방울을 받고 다시 넘어졌다.
“고분고분 굴라니까, 도망쳐!”
사내가 금세 쫓아와 격분한 감정을 드러냈다. 사내는 리나를 일으켜 세워 뺨을 후려갈겼다. 리나는 뺨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아팠다. 다시 뺨을 후려갈겼다. 리나는 그 충격으로 옆으로 픽 쓰려졌다. 사내가 리나 위에 올라타더니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뺨을 내리쳤다. 눈앞에 별이 번쩍이는 것 같았다.
“내가 네 주인이다, 알았어?”
리나는 내 여자가 무엇이고 네 주인이 무엇인지 얼른 깨닫지 못했다.
“일어 서!”
사내가 폭행을 멈추고 지시했다. 리나는 자신이 죽음의 문턱에 와 있다고 생각했다. 얼얼한 뺨을 어루만질 새도 없이 숨막히는 공포가 밀려들었다.
“무슨 소리 들렸지?”
병무는 수색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들었어. 병무오빠, 그 자가 나타났다였어.”
진수가 놀란 눈을 하고 물었다.
“돌아가자! 아저씨들 우린 산장으로 가 봐야겠어요.”
병무는 말을 마치자마자 전속력으로 산장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리나에게 무슨 일이 닥친 것 같았다. 그녀가 죽으면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을 것이다. 숨이 턱턱 막혀왔다.
리나의 목에 낫이 걸렸다. 여차하면 처치해 버릴 듯한 조치였다. 리나는 두려움에 떨었다.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었고, 사방은 어두웠다.
“내 말에 순종하면 넌 살아. 알았어?”
사내의 쇳소리 같은 목소리가 귓전에서 울렸다. 나를 어떻게 할 심산일까. 리나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자신의 운명 앞에서 절망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병무오빠가 보고 싶었다. 그는 내 목소리를 들었을까. 날 구하려 와 줄까. 믿을 수 있는 건 오로지 병무오빠뿐이었다.
“아, 알았어요. 제발 죽이진 말아 주세요.”
리나는 사내를 안심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병무오빠가 구하러 와 줄 것이고, 그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 집 처마에는 백열전구가 켜져 있었다. 쓰레이트 지붕을 인 단층짜리 건물이었는데, 허름하고 무척이나 오래되어 보이는 집이었다. 산 중간쯤이었는데, 그리 크지 않은 마당에 평상이 놓여 있었고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미동도 없이 비를 맞고 엎드려 있었다. 리나는 고양이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비를 맞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사내가 낫을 거두었다. 리나는 그가 무슨 짓을 하려고 납치해 왔는지 추정할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뛰었다.
“들어 가!”
사내가 나무문을 가리켰다. 리나는 떨리는 손으로 문구멍에 달린 줄을 잡아 당겼다. 문이 삐꺼덕 소리를 내며 조용히 열렸다. 순간 심한 악취가 확 풍겼다. 역겨워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리나가 겁을 집어먹은 채 안으로 들어가자 사내가 불을 켰다.
백열전구 두 개가 실내를 밝혔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벽에 못이 박혀 있고 그곳에 온갖 날카로운 농기구들이 걸려 있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나무로 만든 침대였는데, 때로 얼룩진 이불이 펼쳐져 있었다. 그 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고양이의 털과 가죽들이었는데, 아무렇게나 내던져 있었다. 고양이를 잡아먹었는지도 몰랐다. 악취의 진원지가 분명할 것이다.
어쩌면 이곳이 창고였는지 모른다고 리나는 생각했다. 창고를 개조해 주거용으로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납치해 왔단 말인가. 병무오빠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그가 이곳을 찾아낼 수 있을까. 리나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옷을 벗어! 그리고 이것으로 갈아입어!”
사내가 비에 흠뻑 젖은 리나에게 남방 하나를 내던졌다. 리나는 가슴팍에 안기는 남방을 받아 쥐었다.
“가, 갈아입으라고요?”
“그래, 당장.”
사내는 웃통을 벗어 던지고 상체가 알몸이 되었다. 그의 찢어진 눈이 매섭게 빛났다. 리나는 오들오들 떨려오는 한기를 느꼈다. 그러나 낯선 사내 앞에서 옷을 갈아입기는 싫었다.
“괘, 괜찮아요.”
“내가 벗겨 줘? 응?”
“........”
“빨리 갈아입어, 내 여자!”
사내가 비열해 보이는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 속에서 강렬한 욕정이 느껴졌다. 저 자가 무슨 짓을 하려고 옷을 갈아입힐까. 리나는 좋은 뜻이 내포된 것 같지 않다는 것을 육감으로 느꼈다. 나를 성폭행하려는 것이 틀림없어. 도망쳐야 되는데.
리나가 머뭇거리자 사내가 다가오더니 윗옷 섶에 낫을 걸치고 이내 아래로 그어 내렸다. 그에 따라 티셔츠가 아가리를 벌리듯 찢어졌다. 리나는 급히 가슴을 가렸다.
“부끄러워 마, 내 여자. 넌 여기서 나와 살 거야.”
사내의 말에 소름이 확 돋았다. 여기서 산다고. 그래서 아끼는 걸까. 공포감이 엄습했다. 사내가 바지 윗부분에 낫을 걸치더니 이내 그어 버렸다. 바지 앞섶이 그대로 찢어졌다. 리나는 황급히 등을 보이고 돌아섰다. 바지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지금은 널 갖고 싶지 않아. 난 뭐 좀 먹을 거야. 갈아입고 침대로 가 쉬고 있어.”
사내가 그녀를 내버려 두고 밖으로 나갔다. 리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깨달았다. 옷을 벗어 엉덩이를 가리는 남방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살금살금 문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사내가 비를 맞으며 평상에 놓여 있던 고양이의 털을 깎아내고 있었다.
리나는 노련한 솜씨로 쉽사리 고양이의 털을 벗겨내고 수돗가로 가져가 배를 가르는 사내를 보고 경악했다. 조금도 주저없이 고양이의 배를 가르더니 뭔가를 꺼내 입으로 가져가는 것이었다. 아마도 창자인 것 같았다. 리나는 엽기적인 식성에 놀라며 농기구가 있는 곳으로 가 삼지창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문가로 가 사내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이게 누구야?”
병무는 고은의 시체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는 목이 벌어져 있었고, 시뻘건 피가 흘러내려 주변에 고여 있었다.
“고은아!”
진수는 싸늘한 시체로 널브러져 있는 고은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가면 어떡해, 고은아!”
“진수야!”
병무는 진수가 벌써 고은에게 정이 들었음을 깨달았다. 가슴이 울컥했다.
상혁이 죽었고 고은이도 죽었다. 윤진은 행방불명이고 리나는 어디에 있을까. 병무는 진수를 내버려 두고 산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산장은 텅 빈 듯 조용했다.
병무는 각 방마다 돌아다니며 리나를 찾았다. 투숙한 두 여자가 각자의 방에서 자고 있을 뿐 리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병무는 자고 있는 여자들을 깨어 리나의 행방에 대해서 물었다. 그들은 모른다고 말하며 고은이 죽었다고 말하자 공포에 질리는 얼굴들이었다.
병무는 산장을 뛰쳐나왔다. 마당의 한 켠에 우산 두 개가 나뒹굴고 있었다. 병무는 미친 듯이 산장 주변을 수색했다. 리나는 발견되지 않았다. 놈이 데려갔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시체가 발견됐을 것이다. 놈이 윤진이도 데려 갔을까. 그런데 왜 고은이는 죽였단 말인가. 반항해서? 그럼 리나는 순순히 놈에게 잡혔단 말인가.
제발 살아만 있어 줘, 리나야.
병무는 진수에게 달려갔다.
“진수야, 괜찮아?”
“난 괜찮아. 리나는 어떻게 됐어?”
“안 보여. 놈이 납치해 갔는지도 몰라. 난 죽었다는 생각은 안 할래. 어딘가에서 살아서 날 기다릴 것만 같아. 함께 찾아 줄래?”
“그래, 난 놈을 증오해. 내 손으로 고은의 원수를 갚고 싶어. 죽여 버리고 말 거야, 강아지!”
진수가 분개한 감정을 들어내며 옷을 벗어 고은의 얼굴을 가려 주었다.
“리나야! 리나야!”
리나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반색했다. 병무오빠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병무오빠의
음성을 듣자 알 수 없는 위로가 느껴지고 용솟음치듯 희망이 생겨났다. 구하러 온 것이 틀림없어. 리나는 삼지창을 쥔 손에 힘을 가했다.
사내는 깜짝 놀랐다. 산장에서 이곳까지는 꽤나 먼 거리였다. 그런데 여자를 부르는 소리가 너무도 가까이서 들려왔다. 사내는 고양이를 뜯어 먹던 짓을 멈추고 급히 집 안으로 달려갔다. 여자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포박해 놓아야 한다. 그런 후 적들을 없애 버릴 것이었다.
리나는 사내가 달려오자 삼지창을 쳐들었다. 그리고 문이 열리고 사내가 들어서자 사내의 얼굴을 향해 삼지창을 내리쳤다. 사내의 얼굴에 삼지창이 박혔다. 리나는 비명을 지르는 사내를 두고 밖으로 뛰었다. 그러나 한 걸음도 채 내딛기 전에 놈의 손에 붙잡혔다. 놈은 얼굴에 피범벅이었다.
“이 씨팔년!”
사내가 삼지창을 빼 던지고 그녀의 목에 양손을 가져왔다.
“병무오빠! 나 여기 있어!”
리나는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죽여 버리겠어, 씨팔년!”
사내가 목을 조여 오기 시작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 같았다. 리나는 무릎을 들어 사내의 사타구니를 찼다. 사내가 비명을 질렀다.
“아악!”
사내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게졌다.
“쌍년! 없애주지!”
사내가 삼지창을 집어 들었다. 그 때 문이 벌컥 열렸다.
“병무오빠! 진수오빠!”
리나는 들어서는 두 사람을 보고 감격에 겨워 콧등이 시큰했다. 두 사람은 리나의 고함소리를 들고 몽둥이를 구해 들고 즉시 이곳으로 달려 온 길이었다.
“너희들은 뭐야! 날 상대해 보겠다고!”
사내가 빈정거리듯 말하며 두 사람을 향해 돌아섰다.
“리나야, 윤진이는 어딨어?”
병무가 사내를 경계하듯 주시하며 물었다.
“내가 죽인 년인가 보군. 너희들도 내가 죽여주지.”
사내가 시뻘개 진 얼굴로 삼지창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사내에게 먼저 달려든 것은 진수였다. 진수는 고은에 이어 윤진마저 죽었다는 말에 분개한 감정을 추스를 수 없는 것 같았다. 진수가 몽둥이를 휘두르며 달려들자 사내가 삼지창을 내리쳤다.
삼지창이 진수의 어깨를 스쳤다. 삼지창이 아래로 내려간 찰나에 병무의 몽둥이가 사내의 머리를 강타했다. 사내의 머리가 흔들렸다. 그러자 사내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이는지 삼지창을 버리고 병무에게 달려들었다. 병무는 친구들을 살해한 사내의 잔혹한 행위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사내가 덮쳐오자 몽둥이를 후려쳤다. 허리에 몽둥이를 맞은 사내는 비틀거릴 법도 한 데 꿈쩍도 하지 않고 병무에게 덮쳐 넘어뜨렸다.
“네가 저 년 애인이야! 내가 널 죽여주마!”
사내가 병무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숨이 막혀왔다.
“미친 새끼!”
진수는 삼지창을 높이 쳐들었다가 그대로 사내의 머리를 내리쳤다. 삼지창이 사내의 머리에 박혀 버렸다. 그래도 사내는 병무의 목을 조였다. 병무의 얼굴이 벌게지면서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병무는 질실할 것 같은 공포 속에서 리나를 보았다. 리나는 부들부들 떨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 때 병무의 손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병무는 그것을 힘겹게 들어 사내의 목에 처박았다. 그것은 낫이었다. 사내의 손아귀 힘이 풀려 나갔다. 진수는 사내의 목에 박힌 낫을 잡아 그대로 옆으로 그었다. 사내가 눈을 크게 뜨더니 힘없이 쓰려졌다. 병무는 사내를 밀치며 일어났다. 리나가 달려와 병무를 끌어안았다.
“오빠, 와 줬구나. 괜찮아?”
“괜찮아, 리나야. 어디 다친 데는 없지?”
“응, 없어. 사랑해 오빠!”
그 광경을 부러운 눈으로 진수가 지켜보았다.
문이 벌컥 열리며 산장 주인아저씨와 두 남자가 들어왔다. 그들은 목숨이 끊어진 사내를 내려다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리나가 병무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사내의 집을 나서자 굵은 빗줄기가 사선을 그리며 내리고 있었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