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랑을 꿈꾸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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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돌고 돈다. 그렇게 쉬도 때도 없이 바뀌는 사람들 덕에 이런 한결 같은 동네도 항상 가십거리가 있는거겠지. 굳이 정육점 아줌마가 바람이 났다는 둥, 아니면 옆 동의 훈이가 서울대학교에 수석으로 합격했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면 우리 주위에는 흥미진진한 일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이 벌어지고 있다. 물론 나를 제외하고 말이다.
어려서부터 평범한 집안에서 자라왔다. 남들보다 더 윤택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그런 한국인의 전형적인 집안이랄까… 엄마 아빠 두분 다 월급쟁이로 일하시고 우리 삼남매는 차례대로 같은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며 단 한번도 우리 동네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어쩌면 내 인생은 평범함이 문제였을지도 모르겠다. 별 다른 꿈도 없이 그냥 성적에 맞춰 중상위권의 대학에 가고, 대학에서도 별다른 해프닝 없이 졸업을 맞이했다. 아빠 친구의 추천으로 다른 졸업반 동기들이 겪는 취업난에 비해 비교적 쉽게 내 전공을 살려 회사에 들어갈 수 있었고, 상사나 같은 부서 직원들도 다들 모난 데 없이 나를 잘 챙겨준 덕에 회사는 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꽤나 즐겁게 다니고 있는 편이다. 다만, 성격 파탄자 같은 내 직속 부하 직원 한명이 가끔 좀스럽게 굴곤하지만 내 특유의 싫은 소리 못하는 성격 덕분에 큰 소란 없이 잘 넘기고 있다. 남이 뭐라고 하던, 겉으로는 내색 않고 그저 속으로 '개야 짖어라~ 나는 내 길 갈란다~'라며 넘길 수 있는 게 나의 유일한 장점인 듯하다.
2012년의 마지막 날 마저도 여느때와 같이 월요병에 지친 내 몸뚱아리를 끌고 집으로 오는 길이였다. 만날 애인이나 친구는 없어도 집에서 혼자 야식에 맥주 한 캔 할 궁리에 제법 들떠있었다. 아, 여담이지만 나는 이런 소소한 행복을 매우 즐기는 편이다. 말린 오징어 살짝 구워 놓고 쇼파에 앉아서 티비를 본다던가, 아니면 한여름에 에어컨에서 나오는 미풍과 함께 두꺼운 이불을 덮고 서서히 잠에 든다던가…. 특히 요즘 같은 겨울에는 요 앞에 트럭에서 산 차가운 귤 한봉지 사들고 와서 전기장판과 이불 틈에 쏙 들어가 귤 하나씩 까먹는 맛이 정말 일품이라지. 하지만 오늘은 해의 마지막 날이니 만큼 소소함을 살짝 벗어나보기로 결심했다. 그래도 전형적인 A형인지라, 오늘 같이 특별한 날에도 기껏해야 오징어와 귤이 아닌 조금 특별한 야식을 만드는 것 뿐이다. 이래뵈도 자취 짬밥도 벌써 8년이 다되간다. 이제 왠만한 요리는 다 섭렵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나 스스로 외로움을 합리화 시키려는 까닭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가 있는지조차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게 조용히 속삭였다, "거 봐, 혼자서도 충분히 잘 놀 수 있구만 뭘."
도시의 화려한 불빛과 가로등의 어찌보면 초라한 불빛이 골목들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군데 군데 남아있는 형형색색의 크리스마스 조명들이 묘한 설렘과 긴장감을 안겨주었다. 그렇게 간만에 바쁜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익숙하지만, 낯선 우리 동네 풍경을 감상하며 터덜 터덜 걷고 있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분위기 좀 잡아 보겠다던 모태솔로의 감수성을 후벼파는 것이 있었으니…
"여보!!! 사랑해!"
"웅~ 자기~ 나도!"
오랜만의 잉여로움으로부터 나를 속박시켰다는 사실에 갑자기 확 짜증이 나서 뒤돌아 보니 교복을 입은 커플 한쌍이 헤어지기 아쉬워 세상의 온갖 작별인사는 다 하고 있는 것이였다. '여보야', '자기야' 하며 사랑한다는 말부터 우리 평생 함께 하자는 약속까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연애나 하고 있다고 아무리 애써 생각해 보려해도 부러움은 여전히 가시지가 않는다. 내가 저 나이때는 뭣도 모르고 공부만 했었는데 말이야…. 아니, 그나마 공부라도 잘했으면 얼마나 좋아. 그렇게 잘하지도 않으면서 교우관계도 별로 없었고. 에이, 둘중 하나는 확실하게 했어야 되는데; 주위에 친한 사람 하나 없어도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공부를 아예 잘해버리던가, 아니면 공부 말고 인맥을 만들어놓던가. 난 고딩때 엄마 말마따나 남자친구는 대학 가면 당연히 생기겠거니 했지만, 막상 가보니 대학에도 별거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 또 대학 다닐 때는 직장생활 하면 소개팅도 많이 들어올거라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번번히 실패. 그렇게 끝없이 자기 합리화만 하다가 이제 벌써 내일이면 스물아홉이 되어있는 나를 보게 될것이 아닌가. 오늘따라 저 예쁘장하게 생긴 여학생과 지금 내 처지가 비교되면서 내 소중한 야식이 든 비닐봉지가 왜 이리도 초라해 보이는지.
정말로 땅이 꺼질 듯한 한숨과 함께 생각했다. '나 이러다가 평생 연애 한 번 못해보고 죽는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