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盧武鉉) 평전(評傳)』4. 3당 야합을 거부한 청문회 스타 ⑷

참의부2013.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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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로운 길’보다 ‘옳은 길’을 택한 바보

 

후진국에서는 종종 정치의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쿠데타나 민중봉기가 아닌 제도권 정치의 지형변화를 말한다. 1990년 1월 22일, 한국에서는 때 아닌 정치적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노무현의 정치 생애에 또 한 차례 심각한 선택의 갈림길이 되었다.

 

민정당 총재인 노태우 대통령,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총재, 공화당의 김종필 총재는 청와대에서 회동하여 3당 합당과 민자당 창당을 선언했다. 여소야대 국회가 구성된 지 2년도 채 안 되는 시점이었다. 이날 노태우는 청와대에서 양쪽에 김영삼과 김종필을 세워놓고 3당 통합을 선언한 데 이어〈새로운 역사 창조를 위한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여소야대 국회로 손발이 묶인 노태우, 1987년 대선 패배에 이어 13대 총선에서 제2야당으로 전락한 김영삼, 군소정당의 형편을 면치 못하게 된 김종필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이 같은 야합이 성립된 것이다. 이들은 당초 3당 합당을 추진하면서 내각제 개헌에 합의하여 ‘합의각서’까지 만들어 서명했던 것으로 나중에 폭로되어 큰 파문을 일으켰다.

 

3당 합당은 한국정치사에 몇 가지 대단히 심각한 문제를 파생시켰다. 여대야소로 정국구도가 바뀌어 5공 청산과 민주화의 추진이 거부되고, 영남권과 충청권의 정치연합으로 호남권 고립화를 심화시켰으며, 유신쿠데타 이래 부산·경남을 지지 기반으로 정통 야당의 한 축을 지켜온 상도동계가 군사쿠데타 세력에 투항함으로써 부산·경남이 수구세력의 영향권에 편입되어 정치 지형이 수구세력 쪽으로 급격히 기울고 구도가 심화된 것이다.

 

5공 청산을 주도해온 평민당은 거대여당의 출범과 함께 졸지에 고립무원의 소수야당으로 전락하자 국회해산 결의, 천만인 서명운동 등 강경투쟁에 나섰지만 상황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정국은 다시 한 번 거센 소용돌이에 휩싸이고 5공의 악령이 되살아났다. 다시 학생·노동자들의 반정부투쟁이 전개되면서 무자비한 공권력에 저항하는 분신·투신 자살이 속출했다. 이른바 ‘분신정국’이 조성되었다.

 

통일민주당 소속이던 노무현은 3당 합당 참여를 단호히 거부했다. 탄탄대로를 외면하고 가시밭길을 자초하는, 외롭고도 힘든 선택이었다. 그는 이번에도 예외 없이 ‘내게 무엇이 이로운 일인가’보다는 ‘무엇이 옳은 일인가’를 먼저 생각함으로써 기꺼이 고난의 길을 선택했다. 결과론이지만, 나중에 대선가도에서 이 ‘모험’이 그의 가장 큰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생명의 해방을 노래한 ‘방랑자’ 앙드레 지드는 “나에게 다가오려는 것들, 나를 기다리고 있는 희한한 것들” 속으로 가시덤불 무성한 길을 헤쳐 즐거이 ‘모험’을 떠나며 “우리가 바라는 것은 일상적인 길을 벗어나 사람들이 쉽게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콩고 여행 중에 프랑스의 가혹한 식민지 지배에 희생되고 있는 토착민의 비참한 상태를 목격하고 나서 허위와 부정에 대한 증오, 피압박자에 대한 사랑, 진실 추구에 대한 들끓는 욕구를 갖게 되고 그것들을 노래함으로써 ‘현대의 양심’으로 불렸다.

 

『후한서(後漢書)』「반초열전(班超列傳)」에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하지 않으면 큰일을 이루기 어렵다[不入虎穴不得虎子]”는 말이 있지만, 노무현이 3당 야합에 반대하고 민자당 참여를 거부한 것은 정치적 모험심만은 아니었다. ‘이익이 되는 길’보다는 ‘옳은 길’을 따르고자 하는 그의 신념의 표출이었다. 이는 지성인의 길이 되겠지만, 현실 정치인에게는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다.

 

1950년~60년대《사상계(思想界)》를 발행하면서 청년·지식인에게 민주주의와 인권사상을 일깨운 장준하(張俊河)가 제8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으나 원칙주의를 추구하다가 좌절되고, 정치보복으로 약사봉 계곡에서 암살당하고 말았다. 한국 정계에서는 원칙주의 정치인이 설 자리가 없었다.

 

정치의 기본은 타협에 있다. 하지만 한국의 정치 풍토는 타협을 촉구하는 자는 항상 약자이고, 강자는 결코 타협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굴종을 요구하거나 야합을 택한다. 연례행사가 된 국회의 날치기는 반타협주의적 힘의 논리다. 3당 합당은, 정책과 노선이 다른 3개 정파가 순전히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느닷없이 합친, 타협이 배제된 야합이었다. 파시즘과 민주주의 투쟁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다. 유신독재시대 야당 대표 이철승이 ‘안보’와 ‘민주주의’를 묶어 ‘중도통합론’을 제시했지만, 그것은 민주주의 일반 원칙을 배반한 투항주의로 배격되었다.

 

노무현은 비록 김영삼에게 정계 입문의 신세를 졌지만 민주주의의 대의를 배신한 김영삼과 함께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분노하면서 합당 철회를 요구했지만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 그렇다고 정치를 하지 않으면 몰라도 부산에 선거구를 두고 있는 이상 김영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노무현은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김영삼과 결별을 선언하고 자신의 길을 걸었다.

 

1990년 1월, 국회 개헌의석을 넘어서는 거대여당 민정당이 출범했다. 당대 민주주의는 실종되고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노무현은 통일민주당의 합당결의 대회장에서 주먹을 쥐고 외쳤다. “이견 있습니다. 반대토론을 합시다.”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정당 내부에 민주적 절차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보스가 결정하면 무엇이든 모두 우르르 따라갔다. 노무현은 “영남이 보수정치세력의 손아귀에 완전히 들어가고 말았다”며 한탄하고 절망했다.

 

˝3당 합당은 두 가지 충격을 주었다. 첫째, 호남이 정치적으로 고립되었고 영남은 보수 정치세력의 손아귀에 완전히 들어가고 말았다. 이것은 우리 정치사에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지역구도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고착되었다. 둘째, 우리 나라 정치를 통째로 기회주의 문화에 빠뜨렸다. 철새 정치의 수준이 달라진 것이다. 정치적 야심을 가진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려고 당을 옮겨다니는 일은 그 전에도 있었다. 그렇지만 정권을 놓고 자웅을 겨루던 정치지도자가 그런 일을 한 적은 없었다. 3당 합당으로 인해 한국 정치는 적나라한 기회주의 문화에 휩쓸려 들어갔다. 소신도 원칙도 없이 국회의원 당선이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떼를 지어 보따리를 싸들고 이 당 저 당 돌아다니는 것이 별로 부끄러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115쪽~116쪽.

 

3당 합당 전 노무현은 평민당의 이해찬·이상수, 민주당의 김정길·이철 의원과 함께 마포에 ‘정치발전연구소’를 설립하고 각자 소속 정당 안에서 야권 통합운동을 벌였다. 분열된 민주화진영을 통합하자는 모임이었다. 민주당의 중진을 포함하여 적지 않은 국회의원들이 이에 동조했다. 그러던 중 실로 벼락처럼 3당 합당이 이루어지고, 며칠 전까지 선명 야당을 다짐했던 중진 의원들까지 대부분 돌아섰다.

 

노무현은 특히 믿었던 사람들까지 떠나버린 것을 가슴아파했다. “함께 야권 통합을 외치던 소장 의원들도, “공화당과의 통합만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던 중진 의원들도 하나둘씩 내 곁에서 떠나갔다. 그리고 그 모두가 떠나고 없는 빈들에는 나와 또 한 사람, 김정길 의원만이 남아있었다. 그 사람만은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또 한 사람마저 마침내 떠나버린 날, 내 사무실을 찾아온 김정길 의원은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내다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날따라 창밖에는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황량한 벌판에 들판에 외롭게 버려져 있는 느낌이었다. 내가 얼마나 무섭고 냉혹한 세계에 몸담고 있는가를 뼈저리게 느꼈던 순간이었다.”

 

3당 야합이 극비리에 추진되고 있을 때 통일민주당 중진급 몇 명은 사전에 이 사실을 알고 대책을 숙의했다. 이기택·김현규·신상우·최형우·황낙주·황명수·김상현이 그들이다. 이들은 김영삼의 3당 통합에 함께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이들 중 김현규·신상우·이기택·최형우는 서울 팔레스호텔에서 만나 “차곡차곡 포개고 “절대로 배반하지 않겠다”는 ‘도원결의’를 했다. YS를 따라가지 않고 야당을 사수하기로 맹세한 이들 네 사람은 이때부터 동지규합에 나서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다. 통일민주당을 지키겠다는 ‘전사’들이 속속 몰려들었다. D데이는 정계개편이 발표되는 날로 잡았다. 이에 따라 이기택ㆍ신상우ㆍ김현규 등 세 명은 3당 통합이 선언된 22일 라마다 르네상스호텔 뒤편에 있는 ‘난’이라는 일식집에 모였다. 최형우 의원은 부산에 내려가고 없어 참석하지 못했다. 김현규 부총재가 “오늘 1노 2김이 청와대에 모여 합당을 발표한다. 이제 시간이 됐으니 우리 입장을 밝히자고 말했다. 그러나 신상우 의원이 꼬리를 내렸다.”

 

이렇게 ‘도원결의(桃園結義)’까지 햇던 4인방의 일부를 포함하여 대부분이 민자당에 참여하게 되고 노무현과 김정길 등 몇몇만 남게 되었다. 노무현은 민자당 불참을 선언한 이기택·김정길·이철·홍사덕 의원 등과 함께 새 야당 창당 작업에 들어갔다. 정치적 쓰나미가 휩쓸고 간 폐허에서 창당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6월 15일, 통일민주당 잔류파가 중심이 되어 원내 8석으로 창당한 ‘꼬마 민주당’의 총재에는 이기택이 선출되었다. 그 중심에는 노무현도 있었다.

 

˝영남과 서울에서 옛 통일민주당 세력을 되살리기 위해 사람을 만나고 다니는 것이 전부였다. 청문회에서 얻은 명성이 큰 도움이 되었다. 국회 활동도 뒤로 미루어 버렸다. 민자당이 국회만 열면 날치기를 하니 국회에서는 할 일도 없었다. 전국을 다니면서 지구당을 창당했다. 사람들을 모아 단합대회를 열었다.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든 것이다. 통일민주당에 있다가 3당합당 합류를 거부한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민주당을 창당했다. 당세가 너무 약했다. 사람들은 옛 통일민주당과 구별하려고 이 정당을 ‘꼬마 민주당’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것을 ‘작은 민주당’이라고 했다. 민자당에서는 평민당으로 갈 사람들이라며 ‘꼬마 민주당’을 공격했다. 평민당 사람들은 ‘유일 야당론’을 내세우며 ‘작은 민주당’을 무시했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116쪽~117쪽.

 

● 통합야당 대변인 그리고《조선일보》와의 전쟁

 

초거대여당이 된 노태우 정권은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여소야대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처리되었던 법률안은 민자당 단독으로 처리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7월 14일, 민자당은 광주보상법, 병역법, 방송관계법 등을 날치기로 처리했다. 소수당으로 전락한 야당의 반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각종 악법이 날치기로 속속 처리되었다. 노무현은 이에 항의하여 이해찬ㆍ김정길ㆍ이철 등과 함께 날치기를 규탄하며 의원직 사퇴서를 냈다. 평민당 의원들도 이에 동조했으나 정치적 효과는 별로 없고 오히려 ‘돌출행동’이라는 비난만 들었다.

 

1991년 3월과 6월에 구·시·군(기초) 의회의원 선거와 시·도(광역) 의회의원 선거가 각각 실시되었다. 5·16쿠데타로 중단되었던 지방자치제가 30년만에 부활한 것이지만 이번에 실시한 지자체장은 여전히 정부에서 임명하고 지방의회 의원만 국민이 선출하는 ‘반쪽 지자제’에 불과했다. 

 

선거 결과는 야당의 참패였로, 거대 여당의 위력이 과시되었다. 3월 26일에 실시된 기초의원 선거는 정당 공천이 아니라서 당별로 집계를 낼 수는 없지만 여당 성향 후보들의 당선이 압도적이었다. 6월 20일 실시된 광역의원 선거에서 민자당은 총 866석 가운데 564석을 얻어 압승했다. 호남과 제주를 제외한 11개 광역의회에서 압도적 과반의석을 차지했으며, 부산에서는 1석(민주당)만 빼고 50석, 경남에서는 89석 가운데 73석을 휩쓸어 김영삼의 영향력을 입증했다. 반면에 신민당(평민당에서 개칭)은 165석, 민주당은 21석을 얻는데 그쳤다. 무소속이 115석이었는데, 이들 대다수는 나중에 민자당으로 들어갔다. 정당별 득표율을 보면 민자당 41퍼센트, 민자당 22퍼센트, 민주당 14퍼센트로, 야권의 분열이 민자당의 압승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셈이 되었다.

 

30년 만에 부활된 지자체 선거에서 참패한 야권은 국민들의 따가운 질책을 받으며 통합을 서둘렀다. 김대중 신민당 총재와 이기택 민주당 총재의 합당 선언을 계기로 두 당은 9월 6일 거대여당에 맞서는 통합전당대회를 갖고 통합정당의 당명은 민주당, 지도체제는 최고위원 동수의 집단지도체제, 두 당의 현 총재를 공동대표로 하는 통합야당을 출범시켰다.

 

민주당은 공동대표최고위원에 김대중·이기택, 최고위원에 이우정·박영록·박영숙·허경만(구 신민당), 조순형·김현규·이부영·목요상(구 민주당)을 선출하고 사무총장이 김원기, 원내총무에 김정길, 정책위의장에 유준상, 대변인에 노무현을 선임했다. 노무현은 이때 “김대중 총재가 엄청난 양보를 해서” 통합이 이뤄졌다고 햇다. “조직강화특위 지분도 5:5, 대표도 이기택ㆍ김대중 공동대표였다. 논리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았지만 통합을 위해 ‘작은 민주당’의 요구를 김대중 총재가 전격 수용함으로써 1991년 9월 야권통합이 이루어졌다. 처음으로 김대중 총재와 함께 정치를 하게 된 것이다. 1995년에 그가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을 때 1년 반 정도 떨어져 있었던 기간을 제외하면, 10년 정도 한솥밥을 먹은 셈이다.”

 

노무현은 김대중과 함께 정치를 하면서도 ‘공손한 부하’ 노릇은 하지 않았다. 제14대 총선을 앞두고 이해찬 의원이 공천에서 탈락하자 이해찬 같은 사람을 공천하지 않으면 자신도 탈당하겠다고 나서 결국 공천을 받아냈다. 야권통합을 위해 마련한 조직강화특위 회의 때는 공천심사위원회 석상에서 김대중 총재에게 당당하게 발언하거나 회의장을 박차고 나오는 등 결코 ‘공손한 부하’가 되지 않았다.

 

노무현이 중앙 정계의 중심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1991년 9월 통합야당의 대변인으로 발탁되면서부터다. 거대여당과 맞서는 통합야당의 대변인은 영광의 자리이기도 하지만 고통스러운 자리이기도 했다. 언론계에 인맥이 전혀 없는 그로서는 황무지와 같은 처지에서 대변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조선일보》가 가장 먼저 딴죽을 놓았다. 대변인 프로필부터가 악의적이었다. “(노무현은)원내진출 이후 노사분규 현장을 자주 찾아다니는 등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의원직 사퇴서 제출 촌극을 빚는 등 지나치게 인기를 의식한다는 지적도, 한때 부산요트클럽 회장으로 개인요트를 소유하는 등 상당한 재산가로 알려져 있다”는 것으로, 민주화운동 경력이나 두드러진 의정활동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쓰지 않았다.

 

더욱 더 악의적인 기사는 며칠 뒤에 나온 자매지《주간조선》의 보도였다. "7개월 만에 판사직을 사퇴한 것은 관료주의 체질에 대한 회의도 있었지만 실은 돈 벌기 위해서였다." "시국사건은 재미도 없고 끝나고 고맙다는 인사가 없다고 불평하면서 맡지 않겠다고 했다." "노사분규에 끼어 노사 쌍방으로부터 돈을 받기도 했다." "노 의원의 재산이 상당하다는 얘기는 1년 전부터 정가에 파다하게 나돌았다." "형 건평 씨의 부동산투기에는 노 의원이 상당액을 지원하기도 했다." "13대 총선 때 YS가 2억원 지원, 남은 돈 6천만원으로 아파트를 계약했다." "양심적인 정치가임을 가장하고 있으나 그의 실상은 돈밖에 모르는 출세주의자이며 양심을 가장하여 자기 잇속을 챙기는 ‘거짓 예언자’이다." 이러한 근거 없는 모함으로, 그야말로 ‘찌라시’ 수준의 보도를 일삼았던 것이다.

 

두 매체의 악의적인 허위보도는 노무현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노무현과 족벌신문 간의 “기나긴 ‘전쟁’의 서막”이 되었다. 노무현은 민주화운동과 노동자인권운동을 해오면서 일부 수구신문의 독재정권 비호와 노동자 적대, 각종 시국사건 왜곡보도에 분노해왔다. 특히 부산 동의대사건과 관련해서는 족벌신문의 문제점을 가슴속 깊이 새기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죽을 때까지 끝날 수 없는 싸움이었고 정치인이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비굴하지 않게, 떳떳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또한 피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그가 싸움을 건 것은 아니다. 다만 피하지 않았을 뿐이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