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순제는 기씨녀를 보며 과거 수년간 살았단 고려를 추억하곤 했다. 그는 기씨녀에게 고려의 산천과 문물 그리고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곤했다. 그러면서 순제는 정무에서 돌아오면 기씨녀와 함께하였다. 그는 기씨녀에게서 사랑을 받곤 하였다. 한편으로 기씨녀도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순제의 사랑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점차 육체만이 아닌 정신적으로 교감을 나누려던 순제에게 점차 사랑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날....
"네 이년 네가 바로 고려의 공녀 기씨년이더냐 따라오녀라..." 늙은 상궁의 명에 의해 그녀는 궁녀들에게 끌려갔다. 그 때 기씨녀의 담당 환관이 되었던 박불화도 그녀를 따라갔다.
타나실리에게 끌여간 기씨녀는 황후에게 옷이 벗겨진 후 온갖 저주의 말을 들으며 철로 만든 채찍으로 맞아야만 했다. 박불화가 몸을 날려 웅크린채 대신 맞지 않았다면 그녀는 죽은 목숨이었다. 지칠 때 까지 때린 타나실리는 기절한 기씨녀와 박불화를 던지라고 명령한 후 자리를 떴다.
이 사실을 안 원 순제는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지만 옌티무르가 버티고 있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이후 밤에 몰래 다가가 기씨녀를 치료해 준 순제는 상황을 바꿔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후 순제는 타나실리에게 다가가 함께 어울렸다. 타나실리에게 미소를 띄며 밤을 보내는 일이 잦아졌다. 이에 옌티무르도 크게 만족하며 궁녀들을 희롱했다. 여기에 그의 아들이 당기세 역시 아버지의 권력을 믿고 오만해져 민간의 유부녀나 처녀 심지어 궁녀를 마음껏 희롱하고 다녔다. 그는 항상 술에 취해 있는 경우가 많았으며 특히 친위부대장인 바얀과 대립하는 일이 잦았다.
순제와 기씨녀는 때를 기다렸다. 마침내 1334년 옌티무르가 숨을 거두었다. 순제는 그를 왕의예로 장사지내는 등 극진하게 대우했다. 그러나 이는 때를 기다리기 위한 술책이었다.
마침내 1335년 당기세가와 그 일족이 황위를 찬탈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자 그는 바얀을 불러 진압을 명령했다. 바얀은 조카인 토크토의 계략을 이용해 궁궐문을 봉쇄한 후 당기세의 군대를 몰아붙여 마침내 당기세와 그의 일족들을 모두 다 죽였다. 타나실리는 순제의 발목을 붙들며 살려달라 애원하였으나 마침내 끌려간 후 맞아죽었다.
순제는 옌티무를 제거한 후 기씨녀를 황후에 앉히고 싶어했다. 기씨녀도 내심 이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황후에 오른다면 과거 비참하게 끌려갔던 과거를 보상받는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새롭게 권력의 수장에 오른 태사 바얀은 몽골지상주의자였다. 그는 훗날 한족이 너무 많으니 한족의 오대성씨(이,조,진,왕,장)씨를 골라 모두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는 기씨녀가 옹길라드씨가 아니란 이유로 후궁에 자리를 조금 올려줬을 뿐이었다.
기씨녀와 원순제는 이제 바얀이 큰 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바얀은 옌티무르 못지않은 강자였다.
그러던 중... 1339년 기씨녀는 마침내 아들인 아유실리달라를 낳았다. 순제의 맏아들을 낳은 그녀의 권력은 점차 커졌고 그녀가 황후에 오를 것이라는 것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그러나 바얀은 아들이야 다른 후궁이 또 낳을 수도 있다는 입장이었기에 끝내 이를 거부했다.
원순제는 자신의 맏아들을 낳아준 기씨녀가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몰라했다. 그래서 그는 당시 한족의 처리문제에서 바얀과 갈등을 일으킨 토크토와 손을 잡았다. 그리고 마침내 1340년 바얀을 몰아냈고 토크토는 숙부를 죽이고 그 군대를 장악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씨녀는 원나라의 제 2황후가 되었다. 그러나 옹길라트씨의 여자를 제 1황후로 앉힌 토크토는 이쯤에서 만족하라고 요구하였다.
고려의 공녀에서 원나라의 황후에 까지 오른 기황후
어느정도 입장이 맞은 세 사람의 연합은 원나라를 나름 안정시키는데 기여했다. 당시 한문학에 조예가 깊고 상식이 풍부한 학자풍이었던 토크토는 점차 강남의 한족을 제어하기 어렵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고 탄압을 일부 완화하려고 하였다.(당시 강남에서 한족 가구 다섯이 몽골군사 한명을 먹여살려야 했고 심지어 결혼식 전날 신부를 라마교의 풍습에 따라 몽골병사에게 잠자리 시중을 들게하였다.당시 라마교 풍습은 처녀는 신랑을 죽일 주이기에 순결을 라마교 승려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식칼도 몽골병사 집에서 빌려 공동으로 사용해야 할 정도로 탄압이 극심했다. 후일 주원장은 점령한 땅의 몽골군사와 함께 라마승들을 찿아내 모두 성기를 잘라 죽였다. 여기에다 성병에 걸린 매춘녀들을 라마교 사원에 보내 조직적으로 라마교를 탄압했다. 이에 라마교 내에서도 15세기 부터 의 기운이 나타나 달라이 라마의 개혁이 일어났다.)
토크토는 순제와 기황후의 지지를 받아 개혁을 실시했다 먼저 쿠빌라이 때 편찬하려다 중단한 요,금,송나라의 역사서를 공식 편찬했다.(당시 그는 한족들이 송나라를 정통으로 한 역사서를 편찬하자는 요구를 거부하고 세 나라 모두 동등한 위치에서 저술했다.) 그리고 다시금 과거제도를 실시해 한족들의 불만을 일부 무마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끝내 보수층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기황후는 당시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로 앉히려고 토크토에게 손을 내밀었으나 토크토는 고민한 끝에 이 요구를 거부했다. 당시 기황후는 자정원을 만들어 박불화를 통해 입지를 강화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몽골귀족들을 포함해 원나라의 앞잡이들 까지 있었다. 특히 이무려 고려에서 그녀의 오라비인 기철, 기훤등이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를 방치했다. 마치 고려에게 복수라도 하려는 듯이....(아이러니 하게도 이 당시의 원나라로의 공녀차출은 더욱 극심해지게 된다 여기에 친원파 앞잡이들이 자신의 딸을 바치기에 앞장섰고 원나라 귀족들도 기황후와 연을 맺기 위해 고려여자를 손에 넣기를 원했다. 이때 자정원은 이를 더욱 부채질하였고 나아가 몽고의 풍습과 고려의 풍속이 서로 전파되어 섞이는 상황에 이른다)
1353년 마침내 기 황후는 순제의 허락을 얻어내 아유실리달라를 황태자로 앉혔다. 이에 토크토는 찬성도 반대도 하지않는 애매한 입장을 보여 끝내 기황후와 대립했다. 그러나 이 대립이 원을 멸망시킬 것이라는 것은 그때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다.
1354년 당시 유복통, 한산동 등이 일으킨 홍건적의 난은 원나라 전역을 휩쓸고 있었다. 특히 운하동부를 장악한 장사성은 원나라로서는 반드시 진압해야 하는 적이었다.
운주와 태주,고우 등 운하가 지나가는 지방을 장악했던 소금장수 출신 장사성
이때 토크토(탈탈)은 50만 대군을 이끌고 장사성의 난을 진압하러 떠났다. 당시 토크토는 군대 장악력도 뛰어나 순식간에 장사성의 거점인 운주를 포위해버렸다. 이에 장사성은 자결 혹은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기황후의 생각은 달랐다. 강자로 여겼던 장사성이 토크토에 손에 쉽게 진압되면 토크토를 누가 말릴 것인가 그렇담 내 아들의 자리도 위험하다...
그녀는 간신 합미를 이용해 토크토가 군대를 몰고와 연경을 장악할 것이라고 순제를 선동했다.
마침내 순제는 조사할 것이 있다고 토크토를 불러낸 후 그를 채포한다. 그리고 귀양지에서 토크토는 끝내 독살되었고 사기가 떨어진 진압군은 와해되고 만다. 그리고 목숨만 구걸하려던 장사성도 형식상 원에 항복해버리고 그대로 그 일대를 장악하게 된다. 원나라로서는 통한의 정벌이었고 마지막으로 가진 주도권이었다.
순제는 여전히 기황후를 사랑하고 있었지만 그 외에도 후궁을 많이 둬 여러아들을 낳은 상황이었다. 기황후는 이제 자기 아들이 황제가 되는 것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후 1356년 그녀들의 오라비들인 기씨일족이 마침내 주살되자 그녀는 복수심에 불타 고려를 멸망시키기를 원했다. 그러나 당시 원나라는 쇠퇴 일로를 걸었던 터라 1만정도의 군사를 동원했지만 그녀의 하수인들인 덕흥군과 최유는 여김없어 패배하고 말았다.
엎치락 뒤치락 하던 원과 홍건적의 싸움은 당시 화북에서 만큼은 그 불씨를 잡아나갔다. 장사성도 형식상이지만 원에 항복했고 진압군인 명장 차간 테무르와 한족장군 이사제 등이 반란을 토벌해나갔다. 그러나 차간 테무르가 홍건적의 자객에게 암살되면서 마지막 불꽃이 꺼지게 된다.
그러나 원의 지도층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몽골우월주의에 따른 소모전을 일으켰다. 1365년 반란을 진압하던 볼로드 테무르가 혼혈종자를 죽이고 몽골족을 살리겠다는 명분으로 대도를 점령했다. 아유실리달라는 가까스로 도망갔지만 기황후는 붙잡혔고 박불화는 참살당했다. 볼로드 테무르는 그녀를 죽이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했지만 그때마다 원 순제는 그녀를 지켜주었다. 이후 그 반란은 코코 테무르와 손잡은 아유실리달라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이미 원의 운명의 호흡기를 때는 결정타가 되었다.
원의 마지막 대장군이자 여남왕 코코 테무르(본래 한족이었으며 차간 테무르의 조카였다. 우리에게는 의천도룡기의 왕보보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원이 멸망한 이후에도 충성을 다해 몽골고원에서 명의 장수 서달이 이끄는 20만 대군을 단 3만의 군대로 괴멸시켰다 이 것이 서달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패배로 당시 2만명이 전사했다.
설상 가상으로 당시 기후가 전세계적으로 매운 추운 소빙하기로써 흉작이 계속되어 수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다. 이에 기황후는 자정원의 창고를 열은 후 죽을 쑤어줘 하북일대의 백성들의 아사를 막을 수 있었다. 비록 자신의 실수로 인해 대업을 망쳤지만 그녀의 이러한 결단은 화북의 백성들에게 큰 고마움으로 다가와서 이후 많은 화북의 한인 백성들과 토착호족들이 원을 위해 싸우다가 전사했다.(청나라의 사학자 조익은 "놀라지 말라 당시 화북의 백성들이 명과 싸우다 죽은 숫자는 원나라에 저항했던 송나라의 강남인들 다음으로 많았다." 고 하였다).
그리고 대도(연경)가 함락될 당시 원의 호부상서를 비롯한 한인관료 수천명은 명으로의 투항을 거부하고 "어찌 중에게 무릎을 꿇겠는가. "도적과 사느니 원의 신하로서 죽겠다", "몸은 비록 대도에 있지만 마음은 막북(몽골고원)을 향한다." 라는 라는 말을 남기고 처형당했다. 그리고 감숙, 운남,산서,요동일대의 군벌의 수장들은 원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명과 20여년에 걸쳐 싸웠다.
1365년 형식상 1황후였던 옹기라트녀가 죽자 2년 후 기황후는 마침내 원나라의 제 1황후에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1368년 대도가 명에 의해 함락되자 원순제와 기황후는 응창으로 퇴각하였고 그곳에서 순제는 50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명의 기습으로 응창이 함락된 후 기황후의 기록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단지 그녀의 아들인 아유실리달라는 북원의 황제 소종으로 즉위해 명과 10여년 동안 싸우다가 병사했다. 이후 두명의 황제가 나온 이후 북원은 명에 의해 1392년 멸망한다.
기황후와 원순제의 아들이자 북원의 2대황제가 된 원 소종(아유실리달라: 1339~1378)
그녀는 어디서 죽었는지 어디에 뭍였는지 알 길이 없다 단지 그녀의 소원에 따라 유골일부가 명에의해 고려로 건내져 가묘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원 순제는 끝내 망국의 군주로 남았지만 어린시절 고려땅을 밟아본 후 고려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당시에는 파격적인 고려여자와 결혼했는지도 모른다. 기황후 또한 살아남기 위해 순제를 받아들여야 했지만 함께 고락을 느끼며 서로 부부의 연을 맺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동양역사로 보는 군주&부인의 사랑이야기 -원순제와 기황후 하편-
원순제는 기씨녀를 보며 과거 수년간 살았단 고려를 추억하곤 했다. 그는 기씨녀에게 고려의 산천과 문물 그리고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곤했다. 그러면서 순제는 정무에서 돌아오면 기씨녀와 함께하였다. 그는 기씨녀에게서 사랑을 받곤 하였다. 한편으로 기씨녀도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순제의 사랑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점차 육체만이 아닌 정신적으로 교감을 나누려던 순제에게 점차 사랑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날....
"네 이년 네가 바로 고려의 공녀 기씨년이더냐 따라오녀라..." 늙은 상궁의 명에 의해 그녀는 궁녀들에게 끌려갔다. 그 때 기씨녀의 담당 환관이 되었던 박불화도 그녀를 따라갔다.
타나실리에게 끌여간 기씨녀는 황후에게 옷이 벗겨진 후 온갖 저주의 말을 들으며 철로 만든 채찍으로 맞아야만 했다. 박불화가 몸을 날려 웅크린채 대신 맞지 않았다면 그녀는 죽은 목숨이었다. 지칠 때 까지 때린 타나실리는 기절한 기씨녀와 박불화를 던지라고 명령한 후 자리를 떴다.
이 사실을 안 원 순제는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지만 옌티무르가 버티고 있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이후 밤에 몰래 다가가 기씨녀를 치료해 준 순제는 상황을 바꿔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후 순제는 타나실리에게 다가가 함께 어울렸다. 타나실리에게 미소를 띄며 밤을 보내는 일이 잦아졌다. 이에 옌티무르도 크게 만족하며 궁녀들을 희롱했다. 여기에 그의 아들이 당기세 역시 아버지의 권력을 믿고 오만해져 민간의 유부녀나 처녀 심지어 궁녀를 마음껏 희롱하고 다녔다. 그는 항상 술에 취해 있는 경우가 많았으며 특히 친위부대장인 바얀과 대립하는 일이 잦았다.
순제와 기씨녀는 때를 기다렸다. 마침내 1334년 옌티무르가 숨을 거두었다. 순제는 그를 왕의예로 장사지내는 등 극진하게 대우했다. 그러나 이는 때를 기다리기 위한 술책이었다.
마침내 1335년 당기세가와 그 일족이 황위를 찬탈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자 그는 바얀을 불러 진압을 명령했다. 바얀은 조카인 토크토의 계략을 이용해 궁궐문을 봉쇄한 후 당기세의 군대를 몰아붙여 마침내 당기세와 그의 일족들을 모두 다 죽였다. 타나실리는 순제의 발목을 붙들며 살려달라 애원하였으나 마침내 끌려간 후 맞아죽었다.
순제는 옌티무를 제거한 후 기씨녀를 황후에 앉히고 싶어했다. 기씨녀도 내심 이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황후에 오른다면 과거 비참하게 끌려갔던 과거를 보상받는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새롭게 권력의 수장에 오른 태사 바얀은 몽골지상주의자였다. 그는 훗날 한족이 너무 많으니 한족의 오대성씨(이,조,진,왕,장)씨를 골라 모두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는 기씨녀가 옹길라드씨가 아니란 이유로 후궁에 자리를 조금 올려줬을 뿐이었다.
기씨녀와 원순제는 이제 바얀이 큰 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바얀은 옌티무르 못지않은 강자였다.
그러던 중... 1339년 기씨녀는 마침내 아들인 아유실리달라를 낳았다. 순제의 맏아들을 낳은 그녀의 권력은 점차 커졌고 그녀가 황후에 오를 것이라는 것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그러나 바얀은 아들이야 다른 후궁이 또 낳을 수도 있다는 입장이었기에 끝내 이를 거부했다.
원순제는 자신의 맏아들을 낳아준 기씨녀가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몰라했다. 그래서 그는 당시 한족의 처리문제에서 바얀과 갈등을 일으킨 토크토와 손을 잡았다. 그리고 마침내 1340년 바얀을 몰아냈고 토크토는 숙부를 죽이고 그 군대를 장악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씨녀는 원나라의 제 2황후가 되었다. 그러나 옹길라트씨의 여자를 제 1황후로 앉힌 토크토는 이쯤에서 만족하라고 요구하였다.
고려의 공녀에서 원나라의 황후에 까지 오른 기황후
어느정도 입장이 맞은 세 사람의 연합은 원나라를 나름 안정시키는데 기여했다. 당시 한문학에 조예가 깊고 상식이 풍부한 학자풍이었던 토크토는 점차 강남의 한족을 제어하기 어렵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고 탄압을 일부 완화하려고 하였다.(당시 강남에서 한족 가구 다섯이 몽골군사 한명을 먹여살려야 했고 심지어 결혼식 전날 신부를 라마교의 풍습에 따라 몽골병사에게 잠자리 시중을 들게하였다.당시 라마교 풍습은 처녀는 신랑을 죽일 주이기에 순결을 라마교 승려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식칼도 몽골병사 집에서 빌려 공동으로 사용해야 할 정도로 탄압이 극심했다. 후일 주원장은 점령한 땅의 몽골군사와 함께 라마승들을 찿아내 모두 성기를 잘라 죽였다. 여기에다 성병에 걸린 매춘녀들을 라마교 사원에 보내 조직적으로 라마교를 탄압했다. 이에 라마교 내에서도 15세기 부터 의 기운이 나타나 달라이 라마의 개혁이 일어났다.)
토크토는 순제와 기황후의 지지를 받아 개혁을 실시했다 먼저 쿠빌라이 때 편찬하려다 중단한 요,금,송나라의 역사서를 공식 편찬했다.(당시 그는 한족들이 송나라를 정통으로 한 역사서를 편찬하자는 요구를 거부하고 세 나라 모두 동등한 위치에서 저술했다.) 그리고 다시금 과거제도를 실시해 한족들의 불만을 일부 무마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끝내 보수층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기황후는 당시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로 앉히려고 토크토에게 손을 내밀었으나 토크토는 고민한 끝에 이 요구를 거부했다. 당시 기황후는 자정원을 만들어 박불화를 통해 입지를 강화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몽골귀족들을 포함해 원나라의 앞잡이들 까지 있었다. 특히 이무려 고려에서 그녀의 오라비인 기철, 기훤등이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를 방치했다. 마치 고려에게 복수라도 하려는 듯이....(아이러니 하게도 이 당시의 원나라로의 공녀차출은 더욱 극심해지게 된다 여기에 친원파 앞잡이들이 자신의 딸을 바치기에 앞장섰고 원나라 귀족들도 기황후와 연을 맺기 위해 고려여자를 손에 넣기를 원했다. 이때 자정원은 이를 더욱 부채질하였고 나아가 몽고의 풍습과 고려의 풍속이 서로 전파되어 섞이는 상황에 이른다)
1353년 마침내 기 황후는 순제의 허락을 얻어내 아유실리달라를 황태자로 앉혔다. 이에 토크토는 찬성도 반대도 하지않는 애매한 입장을 보여 끝내 기황후와 대립했다. 그러나 이 대립이 원을 멸망시킬 것이라는 것은 그때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다.
1354년 당시 유복통, 한산동 등이 일으킨 홍건적의 난은 원나라 전역을 휩쓸고 있었다. 특히 운하동부를 장악한 장사성은 원나라로서는 반드시 진압해야 하는 적이었다.
운주와 태주,고우 등 운하가 지나가는 지방을 장악했던 소금장수 출신 장사성
이때 토크토(탈탈)은 50만 대군을 이끌고 장사성의 난을 진압하러 떠났다. 당시 토크토는 군대 장악력도 뛰어나 순식간에 장사성의 거점인 운주를 포위해버렸다. 이에 장사성은 자결 혹은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기황후의 생각은 달랐다. 강자로 여겼던 장사성이 토크토에 손에 쉽게 진압되면 토크토를 누가 말릴 것인가 그렇담 내 아들의 자리도 위험하다...
그녀는 간신 합미를 이용해 토크토가 군대를 몰고와 연경을 장악할 것이라고 순제를 선동했다.
마침내 순제는 조사할 것이 있다고 토크토를 불러낸 후 그를 채포한다. 그리고 귀양지에서 토크토는 끝내 독살되었고 사기가 떨어진 진압군은 와해되고 만다. 그리고 목숨만 구걸하려던 장사성도 형식상 원에 항복해버리고 그대로 그 일대를 장악하게 된다. 원나라로서는 통한의 정벌이었고 마지막으로 가진 주도권이었다.
순제는 여전히 기황후를 사랑하고 있었지만 그 외에도 후궁을 많이 둬 여러아들을 낳은 상황이었다. 기황후는 이제 자기 아들이 황제가 되는 것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후 1356년 그녀들의 오라비들인 기씨일족이 마침내 주살되자 그녀는 복수심에 불타 고려를 멸망시키기를 원했다. 그러나 당시 원나라는 쇠퇴 일로를 걸었던 터라 1만정도의 군사를 동원했지만 그녀의 하수인들인 덕흥군과 최유는 여김없어 패배하고 말았다.
엎치락 뒤치락 하던 원과 홍건적의 싸움은 당시 화북에서 만큼은 그 불씨를 잡아나갔다. 장사성도 형식상이지만 원에 항복했고 진압군인 명장 차간 테무르와 한족장군 이사제 등이 반란을 토벌해나갔다. 그러나 차간 테무르가 홍건적의 자객에게 암살되면서 마지막 불꽃이 꺼지게 된다.
그러나 원의 지도층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몽골우월주의에 따른 소모전을 일으켰다. 1365년 반란을 진압하던 볼로드 테무르가 혼혈종자를 죽이고 몽골족을 살리겠다는 명분으로 대도를 점령했다. 아유실리달라는 가까스로 도망갔지만 기황후는 붙잡혔고 박불화는 참살당했다. 볼로드 테무르는 그녀를 죽이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했지만 그때마다 원 순제는 그녀를 지켜주었다. 이후 그 반란은 코코 테무르와 손잡은 아유실리달라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이미 원의 운명의 호흡기를 때는 결정타가 되었다.
원의 마지막 대장군이자 여남왕 코코 테무르(본래 한족이었으며 차간 테무르의 조카였다. 우리에게는 의천도룡기의 왕보보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원이 멸망한 이후에도 충성을 다해 몽골고원에서 명의 장수 서달이 이끄는 20만 대군을 단 3만의 군대로 괴멸시켰다 이 것이 서달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패배로 당시 2만명이 전사했다.
설상 가상으로 당시 기후가 전세계적으로 매운 추운 소빙하기로써 흉작이 계속되어 수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다. 이에 기황후는 자정원의 창고를 열은 후 죽을 쑤어줘 하북일대의 백성들의 아사를 막을 수 있었다. 비록 자신의 실수로 인해 대업을 망쳤지만 그녀의 이러한 결단은 화북의 백성들에게 큰 고마움으로 다가와서 이후 많은 화북의 한인 백성들과 토착호족들이 원을 위해 싸우다가 전사했다.(청나라의 사학자 조익은 "놀라지 말라 당시 화북의 백성들이 명과 싸우다 죽은 숫자는 원나라에 저항했던 송나라의 강남인들 다음으로 많았다." 고 하였다).
그리고 대도(연경)가 함락될 당시 원의 호부상서를 비롯한 한인관료 수천명은 명으로의 투항을 거부하고 "어찌 중에게 무릎을 꿇겠는가. "도적과 사느니 원의 신하로서 죽겠다", "몸은 비록 대도에 있지만 마음은 막북(몽골고원)을 향한다." 라는 라는 말을 남기고 처형당했다. 그리고 감숙, 운남,산서,요동일대의 군벌의 수장들은 원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명과 20여년에 걸쳐 싸웠다.
1365년 형식상 1황후였던 옹기라트녀가 죽자 2년 후 기황후는 마침내 원나라의 제 1황후에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1368년 대도가 명에 의해 함락되자 원순제와 기황후는 응창으로 퇴각하였고 그곳에서 순제는 50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명의 기습으로 응창이 함락된 후 기황후의 기록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단지 그녀의 아들인 아유실리달라는 북원의 황제 소종으로 즉위해 명과 10여년 동안 싸우다가 병사했다. 이후 두명의 황제가 나온 이후 북원은 명에 의해 1392년 멸망한다.
기황후와 원순제의 아들이자 북원의 2대황제가 된 원 소종(아유실리달라: 1339~1378)
그녀는 어디서 죽었는지 어디에 뭍였는지 알 길이 없다 단지 그녀의 소원에 따라 유골일부가 명에의해 고려로 건내져 가묘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원 순제는 끝내 망국의 군주로 남았지만 어린시절 고려땅을 밟아본 후 고려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당시에는 파격적인 고려여자와 결혼했는지도 모른다. 기황후 또한 살아남기 위해 순제를 받아들여야 했지만 함께 고락을 느끼며 서로 부부의 연을 맺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