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호, '식상함'을 '신선함'으로

최소연2013.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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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물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시도때도 없이 등장해서 사람들의 혼을 쏙 빼놓는 한 많은 처녀귀신, 혹은 귀신보다도 무서운 잔혹한 연쇄살인마 등이 그렇다. 그리고 이 카테고리에 속하면서도 최근 들어서는 다른 장르에 걸쳐진 캐릭터들이 있다. 예로부터 무서운 이야기에 꾸준히 등장해왔던 구미호와 뱀파이어 캐릭터이다. 본인이 상당히 관심이 큰 분야인지라, 이들에 대해서 조사한 것들을 풀어보고자 한다.


민담에서 현대까지 전승되어온 구미호와 뱀파이어는 설정의 측면에서 상당한 공통점을 지닌다. 이들은 ‘인간’과는 거리가 먼 종족이며 인간의 신체(뱀파이어는 피를, 구미호는 간을 취한다)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보통의 인간보다 미모가 빼어나며 타고난 매력으로 사냥감을 유혹하고는 한다. 때문에 구미호와 뱀파이어는 성적인 이미지와 자주 결부되어왔다. 구미호나 뱀파이어 관련 창작물에서 성적코드가 심심치 않게 나타나는 것은 이러한 까닭에서다. 


그런데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소설이나 영화는 흔하지만 구미호가 나오는 소설과 영화는 손에 꼽을 만큼 드물다. 어떤 차이가 이런 결과를 만들었을까?


민담에서 영화까지, 뱀파이어의 진화

사람들에게 뱀파이어에 대해 말해보라고 하면 쉽게 대답해낸다. 그만큼 대중적인 캐릭터라는 의미이다. 최근에는 작품에 따라 그 설정이 상이하게 드러나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흡혈을 하고, 흡혈을 당한 사람은 그 역시 뱀파이어가 된다.

● 햇빛을 받으면 재가 되어 죽는다.

● 보통 인간의 것을 초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 피부가 창백하다.

● 행동과 기품이 귀족처럼 우아하다.


이 같은 설정은 18세기에 <카르밀라>와 <드라큘라>같은 소설로 인해 정립되었다. 햇빛을 받으면 재가 되어버린다는 것은 영화 <노스페라투(1922)>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전에 민담으로 전해져오던 뱀파이어들은 그 특성이 각양각색이었으나 소설이 히트를 치면서 이미지가 고정된 것이다. 현대에는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 연대기>에서 뱀파이어가 흡혈을 이용해 세대와 세대를 이어간다는 설정이 나타났다. 혼자가 아니면 가족단위로 움직이던 뱀파이어가 <뱀파이어 연대기>를 통해 하나의 사회를 구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중 한 장면.

 

뱀파이어 캐릭터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영화로도 이어졌다. <뱀파이어 연대기>의 1권을 동명으로 영화화한 <뱀파이어와의 인터뷰(1994)>는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작이다. 최근에는 <트와일라잇> 시리즈가 유명하다. 가장 최신으로 나온 후속작 <브레이킹 던>은 혹평을 들으며 참패했지만 그럼에도 <트와일라잇>이 젊은층에 인기를 끌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이처럼 뱀파이어는 하나의 아이콘으로 사람들에게 꾸준히 사랑받아 왔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미호는 어떨까?

구미호는 한국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설화에도 등장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여우가 인간으로 변신해 인간을 꼬드겨 잡아먹는 설화가 신라시대부터 전해져왔다.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거타지 설화’를 소개했는데, 신궁인 거타지가 매일 제 자손의 간을 빼어먹는 중을 쏘아달라는 서해 신의 부탁에 따라 하늘에서 내려온 중을 활로 쏘아 맞히자 늙은 여우로 돌아와 죽어버렸다는 이야기이다. 즉, 여우가 중으로 변신해 주문을 외우고 간을 빼먹어 온 것이다. 여기서 ‘구미호’라는 호칭은 없지만 여우가 인간으로 변신한 점, 요술을 부리고 간을 빼먹는다는 묘사가 구미호와 유사하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찬찬히 뜯어보면 뭔가 특별한 점을 알아낼 수 있다. 거타지 설화에서의 여우는 우리가 알고 있는 구미호와 달리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사실 민담에서 구미호는 여성 뿐 아니라 남성으로도 변신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구미호라고 하면 아리따운 여자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이것은 구미호가 뱀파이어에 대해 가지게 되는 첫 번째 차이점이다. 뱀파이어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 심지어 어린아이도 뱀파이어가 될 수 있다. 이 점은 뱀파이어를 소재로 창작을 할 때 자유로운 서술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구미호가 간을 빼어먹는 행위는 뱀파이어의 흡혈과 비교했을때 행위에 큰 부담을 안겨준다. 인간에게서 에너지를 얻는다는 점에선 유사하나 간단성의 측면에서 차이가 일어난다. 꽤 비약적인 비유지만 상상해보자. 컵라면을 먹으며 길을 걷는 것과 음료수를 마시며 길을 걷는 것 중 어느 방법이 더 간편하고 자연스러운가? 배를 갈라 간을 꺼내 먹는 일련의 과정은 지나치게 수고롭다. 그리고 훌륭한 창작자가 아닌 이상 묘사를 할 때 제약이 걸리는 건 어쩌면 당연할 일일지 모른다.


그렇다고 구미호만이 가지는 고유한 특성을 도려낸다면 구미호라는 캐릭터의 아이덴티티는 심하게 훼손되고 만다. 옛것에 대해 전통성의 유지를 강조하는 한국에서 민담 속의 구미호를 변형시키는 것은 상당한 부담을 가지게 한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서 구미호에 대해 다룬 유명 작품은 거의 손에 꼽을 지경이다. 문학 쪽은 아예 전멸인데다 겨우 <전설의 고향>과 같은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게 다였다. 2000년대 전까지 대중문화에서 구미호는 늘 민담에 등장하는 대로 하얀 소복을 입고 무덤을 파헤치거나 피칠갑을 하고 간을 빼먹는 짐승 그 자체였다. 영화 <구미호(1994)>는 구미호를 현대로 옮겨왔지만 <전설의 고향>과 이미지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슬슬 사람들은 구미호라는 캐릭터가 지겨워져갔다.


 


그러다 2000년대에 접어들어서 새로운 시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드라마 <구미호외전(2004)>는 구미호의 현대화, 타 장르와의 접목을 꾀한 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성공’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나같이 유치하고 허술하다는 반응이었다. 또 다시 구미호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가는 듯 했다. 그런 구미호를 살려낸 작품이 드라마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2010)>와 <구미호: 여우누이뎐(2010)>이다.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에서의 구미호는 더 이상 인간의 간을 탐하지 않는다. 대신 소고기를 찾는다. 이러한 묘사로 구미호를 순진무구하며 사랑스러운 캐릭터로 띄우는 데 성공했다.


<구미호: 여우누이뎐>은 구미호가 주는 공포 대신 짐승보다 무서운 인간의 단면을 드러냈다. 자식을 살리겠다는 생각으로 구미호 모녀를 벼랑끝까지 끌고가는 윤두수 가족의 태도를 보고 있노라면 누가 인간이고 누가 금수인지 분간할 수도 없을 지경이 된다. 기존과는 다른 구미호에 대한 서술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집중시켰고 시청률의 대폭상승으로 이어졌다. 이후에 드라마 <구가의 서(2013)>에서는 남자 구미호를 등장시켜 구미호라는 캐릭터를 살림과 동시에 또 다시 새로운 시도를 성공시킨 사례로 등극했다.


서양에 비하면 뒤늦지만 우리도 구미호 캐릭터를 이용한 창작이 언제든 가능하다는 것을 위의 작품들이 증명해내었다. 이제는 구미호를 ‘식상한’ 소재가 아닌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닌 '신선한' 소재로 인식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