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盧武鉉) 평전(評傳)』5. 아름다운 패배가 키운 ‘차세대 지도자’ ⑶

참의부2013.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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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제15대 대선, 강고해보이던 ‘이회창 대세론’을 누르고 김대중이 당선됨으로써 헌정사상 처음으로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길게 보면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창업한 이해 6백년 만이다. 오래 된 노무현의 꿈이기도 한 민주적 정권교체는 그에게 역사의 진보에 대한 확신, 진보의 가치에 대한 믿음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도 ‘새 날’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구조적으로 김대중 행정부는 약체 정권이었다. 거대야당 한나라당이 국회를 장악하여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30여년을 줄곧 집권해온 영남지역 기득세력은 정권을 잃은 상실감에서 거세게 반발했다. 여기에 그들과 유착하면서 언론권력으로 성장한 족벌신문들이 연일 비방적인 기사와 논평을 쏟아냈다.

 

더욱 큰 문제는 심각한 경제위기였다. 1997년 가을께부터 밀려들기 시작한 외환부족사태는 국가부도 위기로 치달았다. 그해 9월, 급기야 ‘제2의 국치’로 불리는 IMF구제금융체제가 시작됨으로써 경제주권을 외국자본에 내주고 말았다. 이처럼 국가경제를 팔아먹은 수구정치세력은 무거운 책임감으로 자성하고 위기를 극복하는 데 협력하기보다는 정권을 ‘상실’한 데 대해서만 앙앙불락이었다.

 

노무현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김대중 행정부가 출범한 1998년 7월 21일 종로구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있게 되었다. 이종찬·노무현을 물리치고 당선된 이명박의 핵심 측근이 총선 당시 이명박 캠프의 금품 살포 부정선거를 폭로함으로써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당선 무효 확정 판결을 눈앞에 둔 이명박이 국회의원직을 사퇴한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선거법 위반으로 공직에서 물러나면 다시는 공직선거에 나오기 어렵게 되어 있지만, 우리 나라는 그렇지 않아서 무슨 짓을 해서든 일단 되고 보자는 풍조가 만연해 있다.

 

노무현은 당초 서울시장 출마를 검토하고 있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1위를 차지하여 해볼 만한 싸움이었다. 이 뜻을 김대중 대통령에게 전했으나, 고건을 후보로 생각하고 있으니 종로지구당을 맡아달라고 했다. 종로지구당은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로 있던 이종찬이 위원장으로 있었는데, 그가 국가안전기획부장으로 임명되면서 공석이 된 상태였다. 노무현은 15대 총선 당시 이곳에서 함께 출마한 이종찬 후보를 민정당 사무총장의 전력을 들어 거세게 비판했던 터였다.

 

˝매몰차게 공격했던 과거사 때문에 무척 민망했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조직을 인수받았다. 장차 종로에 복귀할 생각이 있어서 조직을 잘 넘겨주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이종찬 부총재는 옛날 일을 하나도 따지지 않고 성의껏 조직을 인계하고 당원들을 설득해주었다. 덕분에 별다른 애로사항 없이 보궐선거를 잘 치러낼 수 있었다. 이광재ㆍ안희정ㆍ백원우 등 젊은 참모들이 모두 종로에 와서 조직을 인수하고 선거운동 준비를 했다. 1998년 7월 21일 다시 국회의원이 되었다. 국회의원 선거 두 번, 부산시장 선거 한 번, 모두 세 번 낙선한 끝에 맛본 10년 만의 승리였다. 이 선거를 치르면서, 그동안 너무 내 논리만 가지고 까다롭게 정치를 해 온 것을 반성했다. 이종찬 씨에 대해 늘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왔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148쪽.

 

노무현은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10년 만에 국회에 입성했다. 함께 정치에 입문했던 이들이 3, 4선 중진의원으로 성장하고 있는 동안 노무현은 낙선을 거듭하는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10년 만의 등원이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정치 1번지’라는 종로에서 당선된 명예로운 국회의원이면서도 내심으로는 많이 불편했다. 부산에서 도망쳐 나와 안락한 곳에 피신하고 있는 것 아닌가, 자책감이 들었다. 논리로 따지기 어려운 심리적 부담이었다.” 

 

노무현은 너무 솔직해서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리고 결백에 가까운 도덕적 양심으로 인해 때로 여린 심성을 내보이기도 한다. ‘대한민국 정치 1번지’에서 당선되었으면 자신을 세 번이나 떨어뜨린 부산시민들 보란 듯이 우쭐할 만도 한데 오히려 불편해한 것이다. 대통령이 되어서도 종종 이런 여린 심성의 표출로 구설에 오르고 족벌신문들로부터 융단폭격을 받아야 했다.

 

2002년 대통령선거 때였다. 대선후보 토론회가 열렸는데, 이회창 후보가 먼저하고 그 다음날 노무현 후보가 하게 되었다. 첫날 진행자가 옥탑방에 대해서 묻자 이회창 후보가 “옥탑방이 뭐죠?” 하고 되묻는 바람에 서민의 생활을 모르는 귀족 정치인이라고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다음날 진행자는 노무현 후보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노무현 후보는 자기도 모른다고 대답해버렸다. 깜짝 놀란 선거 캠프의 참모 안희정이 “아니, 서민후보라면서 그걸 모른다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말했다. 그러자 노무현은 “내가 어제 몰랐다는 사실을 건호(노무현의 아들)가 알고 있어서, 그런데 다음날 내가 아는 척을 하면 그거 거짓말 아니냐? 그래서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다”고 털어놓았다. 이런 도덕적 결백성, 인간적 진정성이 노무현의 가치이기는 하지만 이처럼 지나친 면도 있었다.

 

● 고생을 사서 하는, 못 말리는 바보

 

국회의원 노무현이 맞닥뜨린 김대중 정권 1년차의 정국은 운신하기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엇다. 외환부족사태로 기업이 줄도산을 하면서 각종 노동문제가 발생하여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다. 정부는 노사정위원회를 만들어 운영했다. 노동자와 기업주, 정부가 머리를 맞대고 국난상태의 경제위기를 풀어보자는 뜻이었다. 하지만 갈 길은 멀고 험했다. IMF는 정리해고제 도입을 강요하고, 재계는 정리해고가 인정되지 않으면 대외신인도가 악화돼 외자가 급속히 빠져나가게 된다고 압박했다.

 

김대중이나 노무현은 노동자의 권익을 누구보다 앞서 이해하고 배려하는 정치인이었다. “잘못은 지도층이 저질러 놓고 고통은 죄 없는 국민이 당하는 것을 생각할 때 한없는 울분을 금할 수 없다. 이러한 파탄의 책임은 국민 앞에 마땅히 밝혀져야 할 것”이라고 한 김대중의 대통령 취임사는 그대로 노무현이 느끼는 울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IMF는 구제금융을 제공한 대가로 노동자들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어서 운신의 폭이 매우 좁았다. 따라서 노사 갈등은 쉽게 풀릴 문제가 아니었다. 우호적인 민주노총이 노사정위원회에서 탈퇴했다. ‘노동문제 전문가’ 노무현은 노동자와 기업주를 차례로 만나 설득하는 한편 전국 각지의 노동현장을 누비면서 인식의 전환을 촉구하고 노사 간 합의를 종용했지만 노사 쌍방의 사활이 걸린 첨예한 문제여서 조정이 쉽지 않았다. 어느 노동현장에서는 계란세례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삼성차 사례를 발표해 달라고 해서 현장에 갔다. 노동조합원들이 정문을 막았다. 사례 발표 후 면담을 하자고 했다. 행사를 마친 다음 조합에 가서 간부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어떤 조합원이 계란을 던졌다. 망신을 당한 셈이었지만 서운하지는 않았다. 기자들이 소감을 묻기에 이런 취지로 대답했다. “얼마나 절박하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그 사람들 심정을 이해합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내가 노조 편만 든다고 불편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그 장면을 보고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들으니 서글펐다. 꼭 그렇게 갈라야 할까? 노동자에게 계란 맞았다고 나를 좋게 보기보다는 던진 사람의 절박한 심정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줄 수는 없는 것일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158쪽~159쪽.

 

노무현의 노동자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위상이 바뀌어도 변함이 없었다. 일관된 신념이기도 하고, 고등학교 졸업 이후 한때 막노동판에서 일하면서 체화된 동질성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노동자 출신이면서도 출세하여 처한 자리가 달라지면 가진 자들 편에서 올챙이 적 생각을 하지 못하는 자들과는 격이 달랐다.

 

노무현은 종로구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지 6개월여만에 ‘폭탄선언’을 했다. 다음 선거에서는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겠다고 한 것이다. 이미 당선된 선거구의 기득권을 버리고, 필생의 과업인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다시 ‘사지’로 내려가겠다는 선언이었다. 더구나 이회창 총재를 비롯하여 한나라당 인사들이 영남에서 정치집회를 열고 지역주의를 부채질하여(여당에 대한)부산지역 민심이 크게 악화되고 있는 터였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영남의 공장을 뜯어 호남으로 옮겼다”는 따위의 허무맹랑한 유언을 조직적으로 퍼뜨렸다. 지역주의를 이용하여 손쉽게 국회의원이 되고 정권을 잡았던 사람들의 몹쓸 짓이었다. 노무현은 종로지역구민들 앞에서 차기 총선 부산 출마를 선언하면서 용서를 구했다. 그의 집념과 용기에 박수가 쏟아지고 그는 “펑펑 울었다.”

 

˝종로구청 강당에 지구당 당직자와 지역 유지들이 모였다. 참으로 미안한 자리였다. 종로에 국회의원다운 국회의원이 왔다고 좋아한 당원이 많았다. 그런데 6개월도 지나지 않아서 부산으로 간다고 선언을 했으니 얼마나 큰 배신감을 느꼈을까? 나도 슬펐다. 종로는 너무나 좋은 곳이었다.(…) 마지막 당직 인선을 발표한 다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말 미안하다고,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일이라 하는 것이지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라고 간곡하게 용서를 청했다. 반쪽 정권을 극복하려면 여당이 꼭 전국 정당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분위기가 숙연해지더니 마지막에 가서는 사람들이 전부 박수를 쳤다. 왈칵 눈물이 났다. 찔끔이 아니고 펑펑 쏟아졌다. 왜 그리 울었는지 모르겠다.˝ - 노무현,《여보 나 좀 도와줘》, 새터, 2004년, 152쪽.

 

조선왕조 숙종(肅宗) 때의 선비 김창흡(金昌翕)은 권문세가의 자손으로 태어난 데다 재능도 뛰어나 출세가 보장되었으나 환계(宦界)에 나가지 않고 평생 학문과 후진 양성에만 힘을 쏟았다. 김창흡은 사람의 인품(人品)을 여섯 가지로 분류하여 제일 위에 성인(聖人)으로부터 차례로 대현(大賢), 군자(君子), 선인(善人), 속인(俗人), 소인(小人)으로 나누고 “미워할 자는 소인이요, 고민스러운 자는 속인이요, 사랑스러운 자는 선인이요, 미칠 수 없는 자는 성인”이라고 등급을 매겼다. 또 선비들은 가슴에 다섯 가지 종자를 키우고 있다고 했다. 첫째, 이익을 탐하는 마음[利心], 둘째, 명예를 탐하는 마음[名心], 셋째, 남을 이기려는 마음[勝心], 넷째, 잔꾀를 부리는 마음[伶俐], 다섯째, 고요함을 좋아하는 마음[恬雅]으로 욕심없이 학문이나 즐기는 사람이다.

 

노무현은 속인과 소인이 들끓고 이심과 명심 그리고 승심이 판치는 정치판에서 참으로 보기 드문 정치인이었다. 소인배들은 그가 모난 돌이라고 비웃는 것으로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신을 애써 변호하지만 내심으로는 그가 두려웠을 것이다. 김창흡의 분류에 따르면, 노무현은 가히 두려운 자 즉 대현의 풍모가 있어 잔꾀나 부리는 정상배들과는 격이 달랐다.

 

역사는 흙탕물일 것 같지만 소중한 가치를 결코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민중은 때로 우매한 듯 보이지만 결국 사필귀정(事必歸正)의 결말을 짓는다. 민중이라는 물결은 권력이라는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엎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민본(民本)이 나오고 민주(民主)가 나오는 것이다.

 

1997년 7월《한겨레 21》은 제264호의 표지인물로 노무현을 선정하고, ‘대중이 선호하는 차세대 리더십 제1호’로 뽑았다. 족벌신문은 물론 일반 언론에서도 별로 주목하지 않고 비우호적인 기사가 더 많았음에도 대중은 그를 ‘차세대 지도자’로 꼽은 것이다. 노무현이 걸어온 그 길의 가치와 진정성을 정치판이나 언론보다 민중이 먼저 헤아리고 인정한 셈이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