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무소불위의 제왕적 대통령:박정희 친일군부 유신독재체제에서 권력은 대통령 한 사람에게 집중됐다. 삼권분립(三權分立)의 또 다른 주체인 입법부와 사법부는 대통령 권력의 시녀였을 뿐이다.
② 1% 대 99%의 양극화 경제 모델:중소기업과 노동자, 농민들은 피해를 보고 소수 대기업만 부유해지는 불평등한 경제구조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설계했다.
③ 민간인 사찰, 언론통제, 검열 등 조작정치:인권운동단체 프리덤 하우스는 박정희 행정부가 언론자유 5등급 국가라고 평가했다. 헝가리·유고슬라비아·케냐·수단과 같은 수준이었다. 술집에서 정부를 비판하기만 해도 잡혀간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국민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④ 굴욕적 친일외교: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장교였던 박정희는 일본군벌 출신 정치인·기업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일본군부의 실력자인 세지마 류조[瀬島龍三] 이토추상사 회장은 한일회담 당시 박정희의 멘토가 되었으며, 이후 전두환·노태우도 그에게서 조언을 구했다.
⑤ 지역주의와 색깔론:박정희 독재정권은 산업 투자와 인사 채용에서 영남 지역만을 특별 대우하면서 다른 지역의 극심한 소외감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정권 비판 세력을 모두 ‘빨갱이’로 몰았다.
˝……젊은 세대가 많이 읽는 인터넷 매체《오마이뉴스》와《프레시안》에 박정희 정권 시절의 비화를 연재할 때면 언제나 “아니 어떻게 그렇게 살았단 말인가”라는 댓글이 많았다. 요즘의 신세대는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반민주적이고 반인륜적인 행위들을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동화쯤으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런가 하면 뉴라이트 계열이 집필한 중·고교 역사교과서에는 유신독재체제마저 “국가적 과제 달성을 위한 자원동원과 집행능력을 크게 제고하는 체제”라고 미화돼 있다. 유신쿠데타를 감행한 박정희 정권의 정당화 논리가 4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대로 통용되다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일본 보수우익 계열의 역사교과서가 ‘일본의 식민통치는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왜곡하는 것과 똑같은 궤변이다.
……5·16쿠데타는 사회혼란과 당시 민주당 행정부의 무능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음모자들의 권력욕과 장래 불안이 원인이었다. 정치군인 박정희는 5·16쿠데타 10년 전인 1952년에 이미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이종찬 장군에게 ‘군사혁명’을 해야 한다고 종용했다. 오래전부터 쿠데타를 꿈꾸어오다가 4·19민중혁명 후의 소용돌이 속에서 드디어 기회를 잡은 것이다.
쿠데타의 최고 지휘자 박정희는 군정복귀를 약속했지만 그것은 기만술이었고 처음부터 목표가 1인중심 장기독재였다. 1963년 군정복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자신이 군복만 벗고 공화당을 창당해 참여한 허구적 민정이양과 1969년 삼선개헌, 그리고1972년 유신쿠데타를 함께 연결지어 분석해야 한다. 그것은 단계적으로 자신의 권력의지를 실천해가는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한 뒤 1인독재 헌법을 만들어 비상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대통령이 헌법상 아무런 근거 없이 국회를 강제 해산했기 때문에 헌정파괴였고 사실상 내란이었다. 또 대통령이 자기의 권력강화 방안을 자기가 임명한 장관들로 구성된 비상국무회의에 부쳐 의결했으니 이런 희대의 정치적 코미디가 어느 나라에 또 있겠는가? 유신헌법(維新憲法)은 당시의 기존헌법이 규정한 개헌절차를 완전히 무시한 위헌 행위의 산물이다. 좀 강하게 말하면 집권자가 자의로 만든 ‘사문서’나 다름없으며 법적으로 ‘원천 무효’라고 할 수밖에 없다.
유신독재체제는 성립 자체도 위헌이고 불법행위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 체제 아래서 자행된 국민사찰·고문·암살·린치·언론탄압과 갖가지 체제폭력으로 우리 나라의 헌정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박정희 친일군부 유신독재체제는 그의 최측근 부하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에 의해 종말을 고하는 듯했다. 그러나 유신독재체제는 박정희 피살로 청산되기는커녕 그 후 전두환·노태우·황영시·이학봉·허삼수 등의 내란으로 더 잔혹한 복고반동의 회오리를 몰아왔다. 12·12반란과 5·17쿠데타이다. 그 후 친위대 정치장교집단인 하나회가 ‘박정희 없는 박정희 독재정권’을 이어갔다. 마치 정치군인 박정희의 권력 유전자가 그 후예들에게 전염되기라도 한 것처럼 냉혹한 반민주적 헌정이 계속됐다…….˝
Ⅰ. 대한민국 헌법을 유린한 최초의 반역 5·16쿠데타
6. 박정희의 ‘취중 쿠데타’
5·16군사반란은 박정희가 술을 상당량 마시고 지휘한 ‘취중 쿠데타’였다. 거사 시점으로 잡은 5월 16일 0시가 되기 2시간 전 준비상황에 차질이 생기자 그는 청진동 술집에서 막걸리를 서너 대접이나 마셨다. 이로 인해 박정희는 취한 상태였으며 당시 전화 통화한 장도영이 그의 발음에서 취기를 느낄 정도였다. 장도영은 박정희에게 “박 장군, 지금 취한 것 같은데 그만 들어가고 내일 얘기하세”라고 말했다. 쿠데타라고 해도 주모자가 좀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거사에 나선 것이 아니라 초조감과 스트레스를 술로 달래는 행태였다. 그것은 ‘구국의 결단’이나 ‘역사적 혁명’을 감행하고자 하는 혁명지도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었다. 이른바 ‘구국의 혁명’이라는 주장과는 턱없이 거리가 멀었다.
① 1961년 5월 말 예편 예정 알고 술타령 깊어져
1961년 1월부터 육군본부는 군 장성 인사작업에 착수한다. 장성급에 대한 인사자력표를 놓고 평가작업이 벌어졌다. 인사자력표 중에서도 군 정보수사기관이 제공하는 보안심사자료가 가장 중요했다. 과거 사상이 의심스러운 전력이 있거나 근무 평가가 나쁜 장성 수십 명이 예편 대상자로 정해졌으며 여기에 박정희도 포함됐다. 이들은 그해 5월 말 예편하게 돼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파악한 박정희는 화풀이로 술을 더 자주 마시면서 반란 의지를 다졌다.
오랫동안 쿠데타를 꿈꾸었으나 그것이 뜻대로 잘 될 리 없었다. 자연 불만이 쌓여가니 음주량도 늘어만 갔다. 불평분자의 알콜중독 같은 것이었다.
그가 처음 쿠데타를 생각한 것은 1952년 5월 부산 정치파동 때였다. 대통령 이승만이 자신의 연임을 위해 무리하게 개헌을 추진하자 야당 측이 저항하면서 정치적 혼란상이 벌어진다. 6·25동란 중에 임시수도 부산에서 벌어진 일이니, 권력욕에 사로잡힌 독재자는 참으로 국민의 고난과 다른 세계에 살아가는 법인 모양이다.
이승만은 야당 인사들을 제압하기 위해서 당시 육군참모총장 이종찬에게 계엄령과 함께 군대 동원을 명령한다. 그러나 이종찬은 군의 정치개입을 확고하게 반대하면서 이승만의 명령을 거부했다. 이 일로 이종찬은 군복을 벗어야 했다. 그는 군 내에서 신망이 높았고 일본군 계열이 아니라도 따르는 후배들이 많았다. 이에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대령 신분인 박정희가 이종찬을 찾아간다.
“장군님, 군이 나서서 정치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대로 가만 있으면 안 됩니다. 군사혁명으로 나라를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승만의 권력욕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 정의로운 행동으로 평가받을 수도 있으나 그것보다는 박정희의 정치군인으로서의 첫 행보였다. 그러나 당시 이종찬은 5·16쿠데타 직전의 장도영과 달리 태도가 분명했다.
“자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군이 정치에 개입하면 일본 군국주의처럼 나라를 망치는 거 몰라서 그래? 대통령의 군 동원 명령에도 내 직을 걸고 반대한 건 그래서야.”
이종찬은 박정희의 쿠데타 주장이 그저 독재자의 전횡에 대해서 불만을 제기하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박정희의 마음속 깊이 군사반란과 정권찬탈에 대한 망상이 뿌리박혀 있다는 것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박정희가 그런 흉계를 남몰래 키우고 있는 암적 정치군인이라는 사실을 이종찬이 간파했더라면 그냥 물리치는 것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이후에도 박정희의 입에서는 군사혁명 얘기가 수시로 흘러나왔다. 만주국군관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인 이한림이나 장도영에게 이전부터 군사혁명을 하자고 졸랐다. 그러나 모두가 핀잔을 놓으면서 그냥 흘려 넘기곤 했다. 가까운 장성들 사이에서 소외되자 박정희는 술과 벗을 삼으며 이런 저런 궁리에 빠졌다.
② 반란군 차질 빚자 청진동 술집에서 막걸리 세 사발 들이켜
운명의 날로 잡은 5월 16일 0시를 기다리던 15일 밤에도 박정희는 반란군의 행동계획이 초기에 제대로 이행되지 않자 초조해하면서 술을 마셨다.
15일 밤 9시반경, 서울 신당동 박정희의 자택.
그는 운명의 거사를 하러 나가기 위해 채비하기 시작했다.
“임자, 거기 내 가방에 권총 좀 꺼내 줘.”
부인 육영수도 그날 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다. 육영수는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권총 벨트를 조심스럽게 꺼내 남편에게 건네준다. 육영수는 한마디했다.
“여보, 애들은 지금 학교 숙제를 하고 있어요.”
“그래?”
박정희는 집을 나가면 그 후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아이들 방으로 갔다. 당시 국민학생인 박근혜와 박근영이 책상 앞에 엎드려 공부하고 아직 유치원생인 박지만은 누워서 잠 잘 준비다. 그는 말없이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막 나가려는 데 전화벨이 울린다. 거사 본부로 정해놓은 제6관구사령부 참모장인 김재춘 대령이었다. 밤 10시까지 6관구에 가기로 돼 있었다.
“그래, 김 대령. 내 지금 6관구로 갈 참인데….”
“사령관님, 30사단에서 우리와 함께 일을 도모해온 부사단장과 참모장이 사단장에게 밀고했습니다. 일이 탄로나서 큰일입니다. 33사단도 장도영 총장의 단속으로 병력 출동이 어려울 것 같다는 보고입니다. 여기 6관구사령부엔 지금 장도영 총장이 보낸 헌병대가 와 있습니다.”
박정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제는 더 미룰 수도 없고 계획이 누설됐다면 진압군보다 먼저 방첩대와 헌병대가 반란군 주모자를 체포하러 나설 것이다. 그가 집을 나서려는데 육본 작전참모부 차장 장경순 준장(후에 공화당 국회의원, 국회 부의장 지냄)과 정보학교장 한웅진 준장(제3관구사령관 지냄)이 들어선다. 장경순은 4·19혁명 직후 박정희가 작전참모부장일 때 차장이었고 한웅진은 육사 2기 동기생이다. 두 사람도 상황이 긴박함을 알고 급히 박정희의 집으로 온 것이다.
“지금 신변이 위험하니 우선 피신해야 하겠습니다. 집에서 빨리 나가시지요.”
박정희의 집 앞에는 이미 방첩대 지프차가 와 감시하고 있었다. 장도영의 명령만 떨어지면 체포할 태세다. 박정희는 한웅진과 같은 차량을 타고 장경순이 다른 차로 방첩대 차를 교란하기로 했다. 한웅진은 박정희를 자신이 유숙하고 잇는 청진동의 여관으로 데려갔다. 여관방에 쭈그리고 앉은 박정희는 애가 탔고 또 장도영에 대한 원망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방첩대 차량을 따돌리고 뒤늦게 나타난 장경순은 박정희에게 반란군 지휘본부인 제6관구사령부로 가자고 재촉했다. 그러자 박정희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이미 탄로가 났는데 내가 가본들 어떡하겠소?”
“그래도 동지들이 눈이 빠지게 사령관님이 오시기를 기다릴 텐데요.”
박정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두 가지 차질을 그대로 놔두고 밀여붙여도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다른 핵심 부대들은 예정대로 움직일 수 있을까? 거사의 제1선봉 부대인 박치옥의 공수단도 육본이 지시한 훈련에 참가중인데 제대로 출동할 수 있을 것인지……. 불안과 초조가 밀려오고 가슴은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박정희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었다.
“대포나 한 잔 하면서 생각해봅시다.”
박정희가 앞서고 장경순과 한웅진이 뒤따라서 세 장성은 청진동 골목의 한 대폿집으로 들어섰다. 막걸리 술상이 나오자 박정희는 다른 두 사람을 상관하지 않고 자작으로 연거푸 세 대접이나 들이켰다. 술이 아니라 마치 냉수를 마시는 것 같았다.
여기서 술에 취한 박정희가 5·16군사반란을 지휘하는 모습은 여러 대표적 다큐멘터리 작가들이 묘사해놓고 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져온 권위주의 군사정권이 1990년대 초 종말에 다다르자 어두웠던 시절 제대로 쓰지 못했던 비화들이 봇물 터지듯 신문·방송과 출판가를 휩쓸었다. 독재정권의 힘이 빠질 조짐을 보이니 온갖 증언과 기록문헌들에 바탕한 정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다.
다음은 김교식이 1993년에 쓴『제3공화국』제2권의 기록이다. 김교식은 동양방송(TBC)의 장기 다큐멘터리 드라마〈광복 20년〉의 대본을 집필해서 명성을 얻은 대표적 사극 작가다.
˝1961년 5월16일 0시.
그 0시를 박정희는 청진동의 어느 술집에서 맞고 있었다.
“사령관 각하,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정보로 봐서 이 여관도 결코 안전한 곳은 못 됩니다. 일단 여기를 나가시죠.”
한웅진의 이같은 권유에 따라 박정희는 청진동 미화여관을 떠나 근처에 있는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박정희는 초조한 듯 꽤 술을 많이 마시고 있었다.
(… …)
자정의 통행금지 사이렌이 울리고 나서부터는 지나가는 차량들의 소리도 거의 끊어진 듯했다. 박정희는 어지간히 마신 술에 취해 있었다.˝
청진동 대폿집에서 거나하게 취한 박정희는 거사 예정시각인 0시가 지나면서 대담해지기 시작했다. 쿠데타를 꿈꾸어오기 10년여, 여기서 주저앉으면 이제 더 이상 기회도 없다. 5월 말이면 옷을 벗어야 한다. 실패하고 체포되는 한이 있더라도 해봐야 한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두 장성도 그를 따라 나섰다.
③ 술에 취해 온갖 실수 연발
박정희 일행은 0시를 넘겨 제6관구사령부에 도착했다. 반란군 핵심들은 김재춘 참모장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 육군본부와 사령관인 서종철의 명령을 기다리며 반란군의 동태를 지켜보던 사령부 참모들은 부사령관실에 모여 있었다. 술에 취한 박정희는 적진에 해당하는 그 부사령관실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반란군 동지들은 안 보이고 낯선 중령·소령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는 것 아닌가? 박정희는 무언가 방을 잘못 들어왔구나 느껴졌지만 내친김에 그 앞에서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 우리는 4·19 학생시위로 정치인들이 각성하고 나라가 바로 잡혀지기를 기대해왔소. 그러나 나라꼴은 보다시피 이게 되겠습니까…. 우리 군이 궐기해야 합니다. 이제 더 이상 좌시하지 말고 군이 나서서 제대로 혁명을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목숨을 걸고 나섰습니다.”
뒤따라 들어온 김재춘·오치성 대령 등 쿠데타 핵심들은 박정희의 양 옆에 서서 분위기를 지켜보았다. 그런데 박정희의 입에서는 옆 사람이 역겨울 정도로 심하게 술 냄새가 풍기는 것 아닌가? 그제야 사태를 알아차린 반란군 핵심참모들은 재빨리 박정희를 에워싸고 나가 지휘부가 차려진 김재춘 참모장실로 데려갔다. 이곳 사령부 지휘부에 육본의 어떤 명령이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냥 체포당하고 말지도 모르는 위기였다.
한편 장도영은 육군참모차장 장창국, 정보참모부장 김용배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다가 육군 방첩대장 이철희와 서울지구 제506방첩대장 이희영에게서 반란군 출동 움직임을 보고받는다. 급히 제506방첩대로 간 장도영은 박정희의 위치부터 파악할 것을 지시했다. 그는 제6관구사령부 참모장실의 반란군 지휘부에 있는 박정희와 전화를 연결하게 했다.
“박 장군, 거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거요?”
“총장 각하, 오늘의 거사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우리 혁명군은 출동했고 서울 요소요소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장도영은 박정희의 전화 목소리에서 진한 술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도대체 저렇게 술을 마신 상태에서 무슨 혁명을 한단 말인가? 장도영은 박정희를 달랬다.
“박 장군, 오늘은 술도 취한 것 같고 계획이 이미 알려져서 부대 출동을 내가 막았소. 그만 집으로 돌아갔다가 내일 나랑 다시 만납시다.”
“각하, 여러 부대에서 병력이 움직였습니다. 일을 반드시 이루어내고야 말겠습니다. 협조해주십시오.”
“글쎄, 쓸데없는 얘기 그만하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시오.”
박정희는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장도영은 빈 전화기에 대고 “이번엔 정부 쪽에 경고 정도만 하고 그만둡시다” 하면서 헛수고를 계속했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1961년 5월 16일 이렇게 청진동 술집에서 시작해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비밀술집에서 막을 내린 셈이다. 10·26궁정동총격사건도 중앙정보부가 관리하는 궁정동 안가의 비밀연회장에서 벌어졌다. 박정희와 그의 최측근 권력자들이 함께 위스키를 마시는 자리였다.
〈한국 사회 후진화의 원인 박정희 친일군부 유신독재체제의 유전자〉6
▷ 김재홍(金在洪)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 대한민국의 경제·정치·사회·문화·역사적 발전을 저해한 박정희 독재정권의 잔재들
① 무소불위의 제왕적 대통령:박정희 친일군부 유신독재체제에서 권력은 대통령 한 사람에게 집중됐다. 삼권분립(三權分立)의 또 다른 주체인 입법부와 사법부는 대통령 권력의 시녀였을 뿐이다.
② 1% 대 99%의 양극화 경제 모델:중소기업과 노동자, 농민들은 피해를 보고 소수 대기업만 부유해지는 불평등한 경제구조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설계했다.
③ 민간인 사찰, 언론통제, 검열 등 조작정치:인권운동단체 프리덤 하우스는 박정희 행정부가 언론자유 5등급 국가라고 평가했다. 헝가리·유고슬라비아·케냐·수단과 같은 수준이었다. 술집에서 정부를 비판하기만 해도 잡혀간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국민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④ 굴욕적 친일외교: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장교였던 박정희는 일본군벌 출신 정치인·기업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일본군부의 실력자인 세지마 류조[瀬島龍三] 이토추상사 회장은 한일회담 당시 박정희의 멘토가 되었으며, 이후 전두환·노태우도 그에게서 조언을 구했다.
⑤ 지역주의와 색깔론:박정희 독재정권은 산업 투자와 인사 채용에서 영남 지역만을 특별 대우하면서 다른 지역의 극심한 소외감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정권 비판 세력을 모두 ‘빨갱이’로 몰았다.
˝……젊은 세대가 많이 읽는 인터넷 매체《오마이뉴스》와《프레시안》에 박정희 정권 시절의 비화를 연재할 때면 언제나 “아니 어떻게 그렇게 살았단 말인가”라는 댓글이 많았다. 요즘의 신세대는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반민주적이고 반인륜적인 행위들을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동화쯤으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런가 하면 뉴라이트 계열이 집필한 중·고교 역사교과서에는 유신독재체제마저 “국가적 과제 달성을 위한 자원동원과 집행능력을 크게 제고하는 체제”라고 미화돼 있다. 유신쿠데타를 감행한 박정희 정권의 정당화 논리가 4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대로 통용되다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일본 보수우익 계열의 역사교과서가 ‘일본의 식민통치는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왜곡하는 것과 똑같은 궤변이다.
……5·16쿠데타는 사회혼란과 당시 민주당 행정부의 무능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음모자들의 권력욕과 장래 불안이 원인이었다. 정치군인 박정희는 5·16쿠데타 10년 전인 1952년에 이미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이종찬 장군에게 ‘군사혁명’을 해야 한다고 종용했다. 오래전부터 쿠데타를 꿈꾸어오다가 4·19민중혁명 후의 소용돌이 속에서 드디어 기회를 잡은 것이다.
쿠데타의 최고 지휘자 박정희는 군정복귀를 약속했지만 그것은 기만술이었고 처음부터 목표가 1인중심 장기독재였다. 1963년 군정복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자신이 군복만 벗고 공화당을 창당해 참여한 허구적 민정이양과 1969년 삼선개헌, 그리고1972년 유신쿠데타를 함께 연결지어 분석해야 한다. 그것은 단계적으로 자신의 권력의지를 실천해가는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한 뒤 1인독재 헌법을 만들어 비상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대통령이 헌법상 아무런 근거 없이 국회를 강제 해산했기 때문에 헌정파괴였고 사실상 내란이었다. 또 대통령이 자기의 권력강화 방안을 자기가 임명한 장관들로 구성된 비상국무회의에 부쳐 의결했으니 이런 희대의 정치적 코미디가 어느 나라에 또 있겠는가? 유신헌법(維新憲法)은 당시의 기존헌법이 규정한 개헌절차를 완전히 무시한 위헌 행위의 산물이다. 좀 강하게 말하면 집권자가 자의로 만든 ‘사문서’나 다름없으며 법적으로 ‘원천 무효’라고 할 수밖에 없다.
유신독재체제는 성립 자체도 위헌이고 불법행위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 체제 아래서 자행된 국민사찰·고문·암살·린치·언론탄압과 갖가지 체제폭력으로 우리 나라의 헌정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박정희 친일군부 유신독재체제는 그의 최측근 부하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에 의해 종말을 고하는 듯했다. 그러나 유신독재체제는 박정희 피살로 청산되기는커녕 그 후 전두환·노태우·황영시·이학봉·허삼수 등의 내란으로 더 잔혹한 복고반동의 회오리를 몰아왔다. 12·12반란과 5·17쿠데타이다. 그 후 친위대 정치장교집단인 하나회가 ‘박정희 없는 박정희 독재정권’을 이어갔다. 마치 정치군인 박정희의 권력 유전자가 그 후예들에게 전염되기라도 한 것처럼 냉혹한 반민주적 헌정이 계속됐다…….˝
Ⅰ. 대한민국 헌법을 유린한 최초의 반역 5·16쿠데타
6. 박정희의 ‘취중 쿠데타’
5·16군사반란은 박정희가 술을 상당량 마시고 지휘한 ‘취중 쿠데타’였다. 거사 시점으로 잡은 5월 16일 0시가 되기 2시간 전 준비상황에 차질이 생기자 그는 청진동 술집에서 막걸리를 서너 대접이나 마셨다. 이로 인해 박정희는 취한 상태였으며 당시 전화 통화한 장도영이 그의 발음에서 취기를 느낄 정도였다. 장도영은 박정희에게 “박 장군, 지금 취한 것 같은데 그만 들어가고 내일 얘기하세”라고 말했다. 쿠데타라고 해도 주모자가 좀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거사에 나선 것이 아니라 초조감과 스트레스를 술로 달래는 행태였다. 그것은 ‘구국의 결단’이나 ‘역사적 혁명’을 감행하고자 하는 혁명지도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었다. 이른바 ‘구국의 혁명’이라는 주장과는 턱없이 거리가 멀었다.
① 1961년 5월 말 예편 예정 알고 술타령 깊어져
1961년 1월부터 육군본부는 군 장성 인사작업에 착수한다. 장성급에 대한 인사자력표를 놓고 평가작업이 벌어졌다. 인사자력표 중에서도 군 정보수사기관이 제공하는 보안심사자료가 가장 중요했다. 과거 사상이 의심스러운 전력이 있거나 근무 평가가 나쁜 장성 수십 명이 예편 대상자로 정해졌으며 여기에 박정희도 포함됐다. 이들은 그해 5월 말 예편하게 돼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파악한 박정희는 화풀이로 술을 더 자주 마시면서 반란 의지를 다졌다.
오랫동안 쿠데타를 꿈꾸었으나 그것이 뜻대로 잘 될 리 없었다. 자연 불만이 쌓여가니 음주량도 늘어만 갔다. 불평분자의 알콜중독 같은 것이었다.
그가 처음 쿠데타를 생각한 것은 1952년 5월 부산 정치파동 때였다. 대통령 이승만이 자신의 연임을 위해 무리하게 개헌을 추진하자 야당 측이 저항하면서 정치적 혼란상이 벌어진다. 6·25동란 중에 임시수도 부산에서 벌어진 일이니, 권력욕에 사로잡힌 독재자는 참으로 국민의 고난과 다른 세계에 살아가는 법인 모양이다.
이승만은 야당 인사들을 제압하기 위해서 당시 육군참모총장 이종찬에게 계엄령과 함께 군대 동원을 명령한다. 그러나 이종찬은 군의 정치개입을 확고하게 반대하면서 이승만의 명령을 거부했다. 이 일로 이종찬은 군복을 벗어야 했다. 그는 군 내에서 신망이 높았고 일본군 계열이 아니라도 따르는 후배들이 많았다. 이에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대령 신분인 박정희가 이종찬을 찾아간다.
“장군님, 군이 나서서 정치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대로 가만 있으면 안 됩니다. 군사혁명으로 나라를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승만의 권력욕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 정의로운 행동으로 평가받을 수도 있으나 그것보다는 박정희의 정치군인으로서의 첫 행보였다. 그러나 당시 이종찬은 5·16쿠데타 직전의 장도영과 달리 태도가 분명했다.
“자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군이 정치에 개입하면 일본 군국주의처럼 나라를 망치는 거 몰라서 그래? 대통령의 군 동원 명령에도 내 직을 걸고 반대한 건 그래서야.”
이종찬은 박정희의 쿠데타 주장이 그저 독재자의 전횡에 대해서 불만을 제기하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박정희의 마음속 깊이 군사반란과 정권찬탈에 대한 망상이 뿌리박혀 있다는 것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박정희가 그런 흉계를 남몰래 키우고 있는 암적 정치군인이라는 사실을 이종찬이 간파했더라면 그냥 물리치는 것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이후에도 박정희의 입에서는 군사혁명 얘기가 수시로 흘러나왔다. 만주국군관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인 이한림이나 장도영에게 이전부터 군사혁명을 하자고 졸랐다. 그러나 모두가 핀잔을 놓으면서 그냥 흘려 넘기곤 했다. 가까운 장성들 사이에서 소외되자 박정희는 술과 벗을 삼으며 이런 저런 궁리에 빠졌다.
② 반란군 차질 빚자 청진동 술집에서 막걸리 세 사발 들이켜
운명의 날로 잡은 5월 16일 0시를 기다리던 15일 밤에도 박정희는 반란군의 행동계획이 초기에 제대로 이행되지 않자 초조해하면서 술을 마셨다.
15일 밤 9시반경, 서울 신당동 박정희의 자택.
그는 운명의 거사를 하러 나가기 위해 채비하기 시작했다.
“임자, 거기 내 가방에 권총 좀 꺼내 줘.”
부인 육영수도 그날 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다. 육영수는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권총 벨트를 조심스럽게 꺼내 남편에게 건네준다. 육영수는 한마디했다.
“여보, 애들은 지금 학교 숙제를 하고 있어요.”
“그래?”
박정희는 집을 나가면 그 후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아이들 방으로 갔다. 당시 국민학생인 박근혜와 박근영이 책상 앞에 엎드려 공부하고 아직 유치원생인 박지만은 누워서 잠 잘 준비다. 그는 말없이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막 나가려는 데 전화벨이 울린다. 거사 본부로 정해놓은 제6관구사령부 참모장인 김재춘 대령이었다. 밤 10시까지 6관구에 가기로 돼 있었다.
“그래, 김 대령. 내 지금 6관구로 갈 참인데….”
“사령관님, 30사단에서 우리와 함께 일을 도모해온 부사단장과 참모장이 사단장에게 밀고했습니다. 일이 탄로나서 큰일입니다. 33사단도 장도영 총장의 단속으로 병력 출동이 어려울 것 같다는 보고입니다. 여기 6관구사령부엔 지금 장도영 총장이 보낸 헌병대가 와 있습니다.”
박정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제는 더 미룰 수도 없고 계획이 누설됐다면 진압군보다 먼저 방첩대와 헌병대가 반란군 주모자를 체포하러 나설 것이다. 그가 집을 나서려는데 육본 작전참모부 차장 장경순 준장(후에 공화당 국회의원, 국회 부의장 지냄)과 정보학교장 한웅진 준장(제3관구사령관 지냄)이 들어선다. 장경순은 4·19혁명 직후 박정희가 작전참모부장일 때 차장이었고 한웅진은 육사 2기 동기생이다. 두 사람도 상황이 긴박함을 알고 급히 박정희의 집으로 온 것이다.
“지금 신변이 위험하니 우선 피신해야 하겠습니다. 집에서 빨리 나가시지요.”
박정희의 집 앞에는 이미 방첩대 지프차가 와 감시하고 있었다. 장도영의 명령만 떨어지면 체포할 태세다. 박정희는 한웅진과 같은 차량을 타고 장경순이 다른 차로 방첩대 차를 교란하기로 했다. 한웅진은 박정희를 자신이 유숙하고 잇는 청진동의 여관으로 데려갔다. 여관방에 쭈그리고 앉은 박정희는 애가 탔고 또 장도영에 대한 원망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방첩대 차량을 따돌리고 뒤늦게 나타난 장경순은 박정희에게 반란군 지휘본부인 제6관구사령부로 가자고 재촉했다. 그러자 박정희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이미 탄로가 났는데 내가 가본들 어떡하겠소?”
“그래도 동지들이 눈이 빠지게 사령관님이 오시기를 기다릴 텐데요.”
박정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두 가지 차질을 그대로 놔두고 밀여붙여도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다른 핵심 부대들은 예정대로 움직일 수 있을까? 거사의 제1선봉 부대인 박치옥의 공수단도 육본이 지시한 훈련에 참가중인데 제대로 출동할 수 있을 것인지……. 불안과 초조가 밀려오고 가슴은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박정희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었다.
“대포나 한 잔 하면서 생각해봅시다.”
박정희가 앞서고 장경순과 한웅진이 뒤따라서 세 장성은 청진동 골목의 한 대폿집으로 들어섰다. 막걸리 술상이 나오자 박정희는 다른 두 사람을 상관하지 않고 자작으로 연거푸 세 대접이나 들이켰다. 술이 아니라 마치 냉수를 마시는 것 같았다.
여기서 술에 취한 박정희가 5·16군사반란을 지휘하는 모습은 여러 대표적 다큐멘터리 작가들이 묘사해놓고 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져온 권위주의 군사정권이 1990년대 초 종말에 다다르자 어두웠던 시절 제대로 쓰지 못했던 비화들이 봇물 터지듯 신문·방송과 출판가를 휩쓸었다. 독재정권의 힘이 빠질 조짐을 보이니 온갖 증언과 기록문헌들에 바탕한 정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다.
다음은 김교식이 1993년에 쓴『제3공화국』제2권의 기록이다. 김교식은 동양방송(TBC)의 장기 다큐멘터리 드라마〈광복 20년〉의 대본을 집필해서 명성을 얻은 대표적 사극 작가다.
˝1961년 5월16일 0시.
그 0시를 박정희는 청진동의 어느 술집에서 맞고 있었다.
“사령관 각하,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정보로 봐서 이 여관도 결코 안전한 곳은 못 됩니다. 일단 여기를 나가시죠.”
한웅진의 이같은 권유에 따라 박정희는 청진동 미화여관을 떠나 근처에 있는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박정희는 초조한 듯 꽤 술을 많이 마시고 있었다.
(… …)
자정의 통행금지 사이렌이 울리고 나서부터는 지나가는 차량들의 소리도 거의 끊어진 듯했다. 박정희는 어지간히 마신 술에 취해 있었다.˝
청진동 대폿집에서 거나하게 취한 박정희는 거사 예정시각인 0시가 지나면서 대담해지기 시작했다. 쿠데타를 꿈꾸어오기 10년여, 여기서 주저앉으면 이제 더 이상 기회도 없다. 5월 말이면 옷을 벗어야 한다. 실패하고 체포되는 한이 있더라도 해봐야 한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두 장성도 그를 따라 나섰다.
③ 술에 취해 온갖 실수 연발
박정희 일행은 0시를 넘겨 제6관구사령부에 도착했다. 반란군 핵심들은 김재춘 참모장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 육군본부와 사령관인 서종철의 명령을 기다리며 반란군의 동태를 지켜보던 사령부 참모들은 부사령관실에 모여 있었다. 술에 취한 박정희는 적진에 해당하는 그 부사령관실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반란군 동지들은 안 보이고 낯선 중령·소령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는 것 아닌가? 박정희는 무언가 방을 잘못 들어왔구나 느껴졌지만 내친김에 그 앞에서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 우리는 4·19 학생시위로 정치인들이 각성하고 나라가 바로 잡혀지기를 기대해왔소. 그러나 나라꼴은 보다시피 이게 되겠습니까…. 우리 군이 궐기해야 합니다. 이제 더 이상 좌시하지 말고 군이 나서서 제대로 혁명을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목숨을 걸고 나섰습니다.”
뒤따라 들어온 김재춘·오치성 대령 등 쿠데타 핵심들은 박정희의 양 옆에 서서 분위기를 지켜보았다. 그런데 박정희의 입에서는 옆 사람이 역겨울 정도로 심하게 술 냄새가 풍기는 것 아닌가? 그제야 사태를 알아차린 반란군 핵심참모들은 재빨리 박정희를 에워싸고 나가 지휘부가 차려진 김재춘 참모장실로 데려갔다. 이곳 사령부 지휘부에 육본의 어떤 명령이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냥 체포당하고 말지도 모르는 위기였다.
한편 장도영은 육군참모차장 장창국, 정보참모부장 김용배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다가 육군 방첩대장 이철희와 서울지구 제506방첩대장 이희영에게서 반란군 출동 움직임을 보고받는다. 급히 제506방첩대로 간 장도영은 박정희의 위치부터 파악할 것을 지시했다. 그는 제6관구사령부 참모장실의 반란군 지휘부에 있는 박정희와 전화를 연결하게 했다.
“박 장군, 거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거요?”
“총장 각하, 오늘의 거사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우리 혁명군은 출동했고 서울 요소요소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장도영은 박정희의 전화 목소리에서 진한 술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도대체 저렇게 술을 마신 상태에서 무슨 혁명을 한단 말인가? 장도영은 박정희를 달랬다.
“박 장군, 오늘은 술도 취한 것 같고 계획이 이미 알려져서 부대 출동을 내가 막았소. 그만 집으로 돌아갔다가 내일 나랑 다시 만납시다.”
“각하, 여러 부대에서 병력이 움직였습니다. 일을 반드시 이루어내고야 말겠습니다. 협조해주십시오.”
“글쎄, 쓸데없는 얘기 그만하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시오.”
박정희는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장도영은 빈 전화기에 대고 “이번엔 정부 쪽에 경고 정도만 하고 그만둡시다” 하면서 헛수고를 계속했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1961년 5월 16일 이렇게 청진동 술집에서 시작해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비밀술집에서 막을 내린 셈이다. 10·26궁정동총격사건도 중앙정보부가 관리하는 궁정동 안가의 비밀연회장에서 벌어졌다. 박정희와 그의 최측근 권력자들이 함께 위스키를 마시는 자리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