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盧武鉉) 평전(評傳)』5. 아름다운 패배가 키운 ‘차세대 지도자’ ⑹

참의부2013.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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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관 노무현 그리고 대권수업

 

어지간한 패배와 시련에도 좌절하지 않았던 노무현에게 2000년 총선 패배에 따른 충격은 컸다. 그때 ‘노사모’가 출현하여 노무현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노무현은 “패배의 고통이 나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을 때 사람들은 ‘당선보다 아름다운 낙선’·‘바보 노무현을 위한 변명’ 등의 수식어로 나를 위로해주었다”고 했다.

 

노무현은 총선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날 즈음 김대중 행정부의 해양수산부 장관에 발탁되었다. 변방 정치인에서 국무위원으로 입신하면서 비로소 정부기관의 수장으로서 국정운영 전반을 보고 배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말할 수 없이 큰 축복”이었다고 했다.

 

˝2000년 8월 7일 해양수산부 장관 발령을 받았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나는, 적잖이 거북하지만 또한 무척 안쓰러운 동지였을 것이다. 당이 달랐을 때 심하게 비판한 적이 있었다. 총재로 모시고 당을 함께 하면서도 거칠게 치받은 경우가 왕왕 있었다. 그러나 당의 이름을 걸고 부산에서 출마해 거듭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김대중 대통령은 나를 기특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장관을 시킨 것 아닌가 싶다. 2001년 3월 26일 퇴임했으니, 8개월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늘 혼자 정치를 한 것이나 다름없던 내게는 말할 수 없이 큰 축복이었다. 해양수산부라는 정부조직의 수장으로서, 대한민국 국무위원으로서, 나는 국정운영 전반을 보고 배울 기회를 얻었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167쪽.

 

노무현은 장관에 취임하면서 권위주의의 탈을 벗어던졌다. 상하간의 격의 없는 수평적 토론문화를 확산시키고 다면평가 등 공정한 인사평가 시스템을 만들어 나가는 등 국정운영의 일익을 담당하면서 폭넓은 경험을 쌓는 한편 낮은 자세의 리더십으로 공직사회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취임할 무렵 해양수산부는 침울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고 직원들은 허탈감에 빠져 있었다. 한일어업협정을 둘러싼 국민적 비판과 두 차례에 걸친 조직 축소 때문이었다. 노무현은 취임사에서 직원들에게 “여러분에게 쏟아지는 매는 제가 대신 맞을 테니 자신 있게 일해 달라”고 당부했다.

 

˝꿈이 있는 자, 준비된 자, 도전하는 자만이 바다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공직자는 업무에 정통해야 하고, 공정해야 하며, 무엇보다 사랑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저는 해양수산부가 겪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부처에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데 장관으로서 앞장서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도와주리라 믿습니다.
여기 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해양수산부에 우리 민족의 장래가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곳에서 저는 항상 그래 왔듯이 좌고우면하지 않고 앞만 보고 일해 가려 합니다. 많은 일을 하고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여러분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매는 제가 맞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쏟아지는 매는 제가 맞겠습니다. 일하십시오. 자신있게 일하십시오. 일단 추진하다 생긴 실수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러나 일하지 않은 책임은 여러분이 져야합니다. 제게 진실을 얘기해 주십시오. 이제 여러분과 저는 한 팀입니다.˝ - 박광열,「노무현의 리더십 만들기」, 행복한 책읽기, 2002년, 14쪽~15쪽.

 

해양수산부 직원들은 노무현이 장관으로 오자 ‘힘센 장관’이 온다며 기대를 걸었는데, 역시 기대 이상으로 일을 해내는지라 그가 떠날 때 “박수가 오랫동안 끊이지 않았다.” 직원들은 떠나는 그를 ‘우리 장관’이라고 불러 아쉬운 마음을 나타냈다.

 

˝노무현 장관의 취임소식을 들었을 때 많은 직원들은 ‘힘센 장관이 오는구나’라고 했다. 그는 여당의 부총재를 지낸 사람이고 대중적 인지도가 높았으며 무엇보다 논리정연한 언변을 소유하고 있었기에 해양수산부가 끌어안고 있던 많은 현안들을 해결해 주리라 직원들은 기대했고 실제로 그는 기대 이상으로 그 일을 감당해냈다. 그가 떠나던 날 직원들은 개각발표를 보며 “어, ‘우리 장관’이 바뀌네”라고 했다. 그리고 이임사가 끝난 후에도 그를 향한 박수는 오랫동안 끊이지 않았다.˝ - 박광열,「노무현의 리더십 만들기」, 행복한 책읽기, 2002년, 288쪽.

 

노무현은 해양수산부 장관을 마친 뒤에 펴낸《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에서 장관을 지낸 경험을 술회했다.

 

˝8개월이 채 안 되는 재임기간이었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해양수산부를 이끌었고, 해양 수산 항만의 당면한 여러 문제를 풀기 위해 전국을 뛰어다녔다. 이 과정에서 참으로 많은 경험을 했다. 어촌의 주름진 할아버지를 비롯해 수많은 민원인을 만나기도 하고, 해양수산부와 관련 부처의 각급 공무원을 만나 협조를 구하기도 했다. 장관직을 수행하면서 보람된 일도 많았지만, 정책 결정의 한계와 어려움 때문에 고뇌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 - 노무현,『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 행복한 책읽기, 2002년, 서문.

 

노무현은 장관에 취임하면서 인사의 공정성을 위해 낙하산 인사의 배제를 강조하고, 스스로도 이 원칙을 지켰다. 노무현의 “획기적인” 인사정책은 당시 해양수산부 직원의 증언에서도 확인된다. 보수언론조차 그의 인사정책에는 이례적으로 후한 점수를 줄 정도였다.

 

˝인사운용에 관한 한 노 장관의 시도는 가히 획기적이었다. 그는 국장급 인사까지는 관여했지만, 나머지 인사권은 모두 조직에게 넘겨주었다. 국장단은 부이사관 승진이며 과장 전보에 이르기까지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다. 서기관이나 사무관 승진에는 상관, 동료, 부하직원이 참여하는 다면평가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조직의 주인은 직원이라고 했던 그의 말이 빛깔 좋은 미사(美辭) 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조직이 스스로 인사하는 시스템이 되자 직원들의 모습에는 긴장감이 흘렀지만 한편으로는 이전보다 훨씬 적극성이 엿보였다. 이제 장관 한 명이 아니라 수백 명의 눈과 귀가 그를 평가하기 때문이었다. 이러다 보니 인사청탁은 줄어들고 역량과 성실성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잡았다. 행사나 교육의 출석율이 훨씬 높아졌고, 정책토론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을 PR하는 일도 부쩍 늘었다.˝ - 박광열,「노무현의 리더십 만들기」, 행복한 책읽기, 2002년, 298쪽.

 

그는 장관에 취임한 그해 연말에 해양수산부 정기인사에서 ‘파격적인’ 인사 스타일을 선보였다. 인사를 앞두고, 실·국장급 간부들에게는 “데려다 쓰고 싶은 과장을 1, 2, 3순위로 세 명씩 적어내라” 하고 과장들에게는 “희망하는 부서를 1, 2, 3순위로 써내라”고 했다. 이렇게 쌍방향 짜맞추기를 해서 오갈 데가 없어진 과장급 2명은 지방으로 발령을 냈다. 어느 조직이든 ‘탐나는 부하직원’과 ‘무능력한 부하직원’으로, ‘모시고 싶은 상사’와 ‘멀리하고 싶은 상사’로 나뉘게 마련이고 그런 호불호는 결국 업무능력이나 리더십과 직결돼 있다는게 그의 논리였다. 그는 한 발 더 나아가 과장은 1년에 한 명씩, 국장은 3년에 한 명씩 퇴출시키는 파격인사를 단행하려 했지만 8개월 단명 장관에 그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의 인사 원칙은 ‘자체검증’과 ‘시장경제 원리’를 철저히 반영했다는 점에서 지금도 해양수산부 내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장관이 행정가는 아니지만 그는 최선을 다해 행정업무를 익히고 현안을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굵직한 현안이 제법 많았다. 부산신항만 민자개발 사업이 표류하고 있었다. 사업자에게 적정 수익률을 보장하는 데 필요한 정부 지원금 규모를 합의하지 못한 탓이었다. 사업이 지연되면 엄청난 국가적 손실이 발생할 것이 자명한 데도, 공무원들은 조족지혈에 불과한 잠재적 정부 부담 때문에 감사원의 지적을 받을까 두려워 줄다리기만 하고 있었다. 중국산 납꽃게 사건으로 수입농수산물 안전성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하늘을 찌른 사건도 있었다. 검사시스템 개선과 인원 장비 보강 없이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수협부문에서 1조원 가까운 규모의 부실이 터져 나와 고객들이 대규모로 예금을 빼내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재정경제부와 해양수산부는 신용사업 분리 여부를 둘러싼 다툼을 벌이느라 고객의 신용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공적자금을 투입하지 못하고 있었다.(……)나는 공무원들의 협력을 받아 이 문제들을 해결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장관이 모든 책임을 지기로 하고 공무원들이 제안한 대책들 가운데 합리적인 것을 채택하고 관철했다.”

 

노무현은 또 조직의 수직구조를 수평구조로 혁신하여 전통적인 ‘관료적’ 풍토를 바꾸고자 했다. 그리고 정보시스템을 중앙부처 중에서 가장 먼저 도입했다. 먼저 관심 있는 주제를 함께 학습하는 24척의 지식 보트를 출범시키고, 습득한 지식과 정보를 지식항해시스템을 통해 직원들, 나아가 국민들과 공유하도록 했다. 국회의원 시절에 이미 ‘노하우2000(개인정보관리 프로그램)’ 개발자이기도 한 그는 정보의 창출과 공유가 조직의 역량을 강화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보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노무현에게 장관 재임은 나중에 대통령이 되는 데 큰 경험과 기회가 되었다. 국무위원으로서 국정 전반에 걸쳐 식견을 넓힐 수 있었고 정부 부서의 수장으로서 조직 관리와 개선, 타 부처와의 업무협조 관계 등을 살피게 되었다.

 

도전정신으로 뭉친 노무현은 이처럼 짧은 재임기간에도 다양한 정책실험들을 시도하여 의미 있는 결과를 보았다. 한 부처에서 시도된 정책들이었지만 이는 전반적인 국정운용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터였다. 그 자신도 “나중 대통령이 되었을 때 내세웠던 국정운영의 기본원칙들을 해양수산부에서 다듬었다”고 했다.

 

● 책으로 담아낸 생각과 마음 그리고 꿈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기 전에『사람사는 세상』(노동문학사, 1994년),『여보, 나 좀 도와줘』(새터, 1994년),『노무현이 만난 링컨』(학고재, 2001년),『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행복한책읽기, 2002년)와 같은 몇 권의 책을 냈다. 이 밖에 공저로『내일을 준비하는 오늘』(나남, 1996년),『마음먹었을 때 시작해라』(고시계사, 2000년),『노무현:상식 혹은 희망』(행복한책읽기, 2002년)이 있다.

 

이 가운데『여보, 나 좀 도와줘』·『노무현이 만난 링컨』·『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세 권에는 노무현의 철학과 사상 그리고 인성과 리더십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노무현은 상당한 문장가다. 평소 독서를 많이 한데다가 변호사 활동을 할 때 신문에 생활법률상담을 연재하면서 문장력을 키웠다. 노동판에서 일하다가 다쳐 입원했을 때는 단편소설을 습작하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연설 원고나 대정부 정책질의서를 대개 손수 작성했다. 정치인 치고는 드문 경우다.

 

노무현은 민주당 부산시지부장을 맡고 있던 1993년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개소하여 활동하는 등 바쁜 일정에도 틈틈이 짬을 내서 살아온 날들을 정리한 ‘고백 에세이’『여보, 나 좀 도와줘』를 이듬해 펴냈다. 정치인들이 지역주민을 상대로 각종 책을 펴내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특별한 예외도 없지는 않지만, 대개 선거를 앞두고 ‘자기 자랑’을 일삼는 내용을 대필하여 급조해내기 때문에 정치인들의 책이 가장 안 팔린다고 한다.

 

그러나 노무현은 책의 부제를 ‘고백 에세이’라고 붙였을 만큼 이 책에서 지난날의 부끄러운 일이나 덮어둠직한 내용까지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래서인지 정치인의 책으로는 이례적으로 20쇄를 넘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자기 자랑’이 아니라 ‘자기 고백’이어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게 아닌가 싶다.

 

노무현은 ‘발문’에서 “무엇 하나 제대로 생산해 낸 것이 없어 보이는 듯한 지난 정치 활동에 대한 회고는, 항상 체증과도 같은 무언가의 답답함을 내 가슴속에 남기기 일쑤였고 결국 나는 이대로 편안하게 주저 앉아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펜을 들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다. 결코 길다고 할 수는 없는 4년이라는 시간에 ‘청문회 스타’라는 뜻밖의 행운과 ‘낙선’이라는 커다란 좌절까지 모두 경험했던 나의 정치생활을 차분히 정리해보면서 그 과정에서 있었던 나의 잘잘못을 가리고 반성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과정들을 하나도 숨김없이 솔직하게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고 출간의 변을 밝혔다.

 

정직하고 솔직한 노무현의 심성이 책 곳곳에서 묻어난다. 낯간지러운 자기 포장이나 자랑 같은 건 없다. 오히려 아내와의  ‘내밀한’ 사연이나 ‘불만’에서 자식들 문제까지 보통의 남편과 아버지들처럼 스스럼없이 공개한다. 아내와 결혼하면서 ‘모양 나게’ 살자고 약속한 노무현은 사회운동을 하면서 결국 그 약속을 깨뜨려 놓고서는 오히려 아내에게 불만이다.

 

〃요즘 사실 집안에선 나보다 아내의 끗발이 더 세다. 아내에게 쥐여살다 보니 가끔 옛날 생각이 날 때가 있다. 고시합격 전까진 분명 내 맘대로 하고 살았으니까. 그땐 아마도 내가 행여 열등감이라도 가질까 싶어 아내가 많이 봐줬던 모양이다.

이후 내가 고시에 합격하고 사회적으로 잘 풀려 가면서부터 오히려 아내가 봐주질 않는다. 잔소리도 많아지고 양보도 안 해 주고….

그래서 나는 아내에게 불만이 많다. 그런데 아내는 오히려 내게 불만이다. 내가 결혼할 때의 약속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사실 결혼할 당시 우리는 단지 판검사, 변호사가 되면 시골에 별장도 하나 갖고 모양나게 산다는 게 두 사람의 합의된 꿈이었다.(…) 그런데 그 약속을 내가 사회운동을 시작하면서 깨뜨린 것이다.

 

내가 사회운동을 시작하고부터는 돈벌이도 줄어들기 시작했고, 정치를 시작하고부터는 지역구 관리니 강연이니 지구당 창당대회니 하며 나돌아다니기 일쑤이니 그에 대한 불만이 없을 리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자기와 의논도 없이 결혼 때의 약속을 깨뜨려서 그러냐고 물어보면, 아내는 서슴없이 그렇다고 한다. 아니 그렇다면 해약을 하면 될 거 아니냐 하고 큰 소리를 쳐보기도 하지만, 언젠가 어느 인터뷰에서 정치와 아내 중 하나를 택하라면 아내를 선택할 것이라고 선언했으니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아내의 논리도 여러 가지이다. 남편이 정치를 한다고 여자까지 나서는 것은 보기가 좋지 않다거나, 가정을 노출시키는 것은 사생활 침해란다. 또 어떤 때는 한 술 더 떠서 “당신이 정치 안 하면 한 달 수입이 얼만데, 당신을 내놓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애국 충분히 하고도 남았어요.” 매사에 이런 식이다. 그러나 아내는 대체로 내가 하는 일이 옳다는 점은 인정하는 것 같다. 특히 3당 합당을 반대할 때 그랬다〃- 노무현,《여보 나 좀 도와줘》, 새터, 2004년, 117쪽~119쪽.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