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역사로 보는 군주&부인의 사랑이야기 -악바르 대제와 조다 바이 공주

콜로라도2013.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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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나이 열 네살 이제 막 철이 들까말까 하던 그 시기 그의 머리 위에는 화려한 무굴제국의 왕관이 올려졌다.(이 어린 황제의 아버지는 숙적에게 패배해 15년 동안 정처없이 떠돌아 다닌 뒤 다시 자신의 자리를 되찿았지만 불과 반년 후 자신이 기른 긴 수염을 밟고 넘어져 그대로 사망해 버렸다.)

 1555년에 즉위한 악바르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확실한 권력을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즉위했지만 뛰어난 판단력과 통찰력으로 점차 황제의 위용을 갖추게 된다. 또한 악바르는 무척이나 다재다능했다. 황제이면서도 예술가, 전사, 장인, 목수, 발명가, 동물 사육사, 신학자로서의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제분기와 운송 마차 기능을 겸하는 제분 마차를 직접 발명하는가 하면, 형광물질을 바른 공을 고안해 내 밤에도 공놀이를 할 수 있도록 했다

 

그의 나이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아버지의 친구이자 후견인인 바이람 칸이 통치를 대신했다. 그의 보호막 뒤에 숨은 어린황제는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키우는 시간을 가진다. 바이람 칸은 분명 유능한 인물이었다. 한 예로 1555년 어린황제가 즉위하자 마자 아버지의 숙적이었던 수르족이 처들어왔지만 바이람 칸이 여지없이 박살내버린 것이다. 그 외에도 그는 황제에게 방해가 되는 인물들을 숙청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도리어 자신의 권력이 강화로 이어진다는 점을 깨닫지 못했다. 점차 성숙해진 악바르는 바이람 칸이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1560년 그는 자신의 유모인 마함 앙가와 결탁한 뒤 바이람 칸을 급습 채포했다 그 후 은퇴를 권유하고 메카로 순례여행을 보내버렸다( 그가 떠난 뒤 곧 자객을 보내 살해했다.) 악바르는 바이람 칸의 세력을 모두 숙청하고 나서야 황권을 되찿았다.

 악바르에게 채포되는 바이람칸을 그린 삽화

 

그 무렵 무굴제국 인근에 있는 라지푸트족은 힌두교를 믿는 용맹한 민족으로서 이슬람교인 무굴제국에 맞서고 있었다. 이 때 그들의 거점인 암베르성에서는 한 미모의 공주가 신랑감을 찿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조다 바이였다.

 

 조다바이가 태어나고 자랐던 암베르성 라지푸트족의 근거지이자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그녀는 본래 같은 힌두교를 믿는 왕국의 한 왕자와 결혼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랜세월 무굴제국과 싸운 라자푸트족은 큰 타격을 받고 있었기에 평화를 원하고 있었다. 오랜 고심끝에 그녀의 아버지는 악바르에게 혼담을 넣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는 악바르의 네번째 부인으로서 아그라에 들어왔다(이슬람교는 공식적으로 네명의 본처를 둘 수 있다.)

 

악바르 또한 점차 넓어지는 영토에 비례한 여러민족과 종교를 포용해야 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해결책은 여러 문화의 결합을 위해 정적의 가문과 혼인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을 가진 악바르는 시집온 조다바이 공주가 계속 힌두교를 신

봉하면서 자신의 궁전에 있는 힌두교 사당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했다

 조다바이 궁전의 입구와 내부장식(악바르 대제는 조다 바이 공주가 낮선환경에서 적응을 잘 할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해주었다고 한다. 그녀에게 하사한 이 궁전도 그러한 모습이 잘 드러나 있는데 이슬람 양식과 힌두양식을 혼합한 독특한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조다 바이는 여기서 힌두의식을 치르면서 살았다.

 

이러한 악바르의 관용정책은 제대로 들어맞아 다른 라지푸트족의 왕들도 악바르를 믿고 자신들의 딸들을 황제의 첩으로로 내놓는 대신 ,자신들을 제국의 지배층에 편입시켜줄 것을 요구했다.이에 따라 악바르는 죽을 때까지 300여명의 처첩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포르투갈 태생의 기독교도 여성도 두 명이나 있었다.

  강력한 원군을 확보한 악바르는 자신감을 얻어 말와,치토르,카슈미르 등 인도 북부와 중부지방을 차레대로 정복해 나갔다.(무굴제국 군사력의 강점은 포병의 화력과 기병의 기동력에 있었다.) 그러면서도 시간이 날 때 마다 그는 조다 바이의 궁전을 찿았다. 그곳에서 그는 그녀와 사랑을 나누면서도 자신과는 다른 힌두문화도 접할 수 있었다. 그는 독실한 이슬람교도였지만 이곳에서 그녀와 보낸 시간들은 그가 다른문화에 좀 더 관대하게 다가갈 수 있는 촉매재가 되었다.   조다 바이도 처음에는 악바르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예상과는 다른 그의 모습에 점차 끌렸다고 한다. 조다의 궁전은 문화의 교류장이자 두 남녀의 사랑이 싹트는 공간이기도 했다.   악바르에게는 앞선 세명의 황후가 있었으나 그는 조다 바이를 유독 좋아했다. 그러자 그녀들은 조다가 힌두의 사악한 의식을 통해 악바르를 홀리고 있다고 생각해 당시 막후에서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던 마함 앙가와 손을 잡고 조다를 없에려고 하였다.   그러나 때 마침 조다에게 태기가 있었다. 황제로 있던 십여년 동안 악바르는 자식을 두지 못해 고심하고 있었는데  한 수피 성자가 악바르에게 곧 아들을 얻을 것이며 이후 총 세명의 아들을 두게 된다고 예언한 바 있었는데 그 때 조다가 아기를 가진 것이다. 악바르는 뛸 듯이 기뻐했으며 조다에게 더욱 더 다가갔다.(악바르는 수피 성자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수도를 파테푸르 시크리로 옮기기까지 했다. 약 15년간 수도로 삼은 이 도시는 결국 식수가 부족하다는 치명적 약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다시 옛 수도로 돌아갔다.)   마함 앙가는 분명 사태를 잘 못 예측하고 있었다. 그녀는 악바르에게 거짓종교를 믿는 조다를 내쫓거나 이슬람교로 강제개종시켜야 한다고 강요했다. 점차 그녀의 모함에 질린 악바르는 그녀의 아들이 대신을 죽인일을 이용해 그를 높은 곳에서 떨어뜨려 죽여버렸다. 충격을 받은 마함은 이 후 다시는 그에게 맞서지 못했다.  

악바르는 중앙아시아의 부족제에 기반을 둔 병력과 힌두교 토착 병력을 합치고, 지배층과 군대를 만사브다르로 불리는 체계로 재조직했다. 지배층은 33단계의 만사브 가운데 하나에 배속되었다. 1600년경 만사브는 1,600명 정도였으며 능력과 공적에 따라 보다 높은 만사브를 단계적으로 차지할 수 있었다.

 

악바르의 통치 시스템은 기능에 따라 분화된 중앙집권체제였다. 궁정 귀족 가운데 가장 능력 있고 신임할 수 있는 사람을 임명한 군사 장관은 정보 수집 역할도 맡았다. 사법 장관은 종교 문제도 담당했다. 악바르는 정복지에 자율권을 폭넓게 부여했던 이전 군주들과 달리 일원화된 중앙집권체제를 관철시켰고, 정복지 수장들에게는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자격과 함께 지배층으로서의 특권을 보장하여 궁정에서 활동할 수 있게 했다. 그는 무슬림이 아닌 이교도에게 징수하던 세금을 폐지하여 비(非)무슬림에 대한 차별을 없앴다. 이러한 정책은 라지푸트 지역의 힌두교도 왕들을 우대하고 군사나 행정 분야 고위직에 중용한 것과 맞물려 있다. 요컨대 광대한 제국의 통합을 일관되게 추구했던 것이다.

 

악바르는 백성들의 여론을 우호적으로 만드는 데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예컨대 그는 일부러 매일 일정 시각에 궁정 창문 앞으로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 백성들은 악바르의 그런 모습을 보며 환호하고 경의를 표했다. 지고의 존재인 황제가 매일 백성들 앞에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그는 백성들과 함께 하는 자애로운 황제의 모습을 연출했던 것이다.

 

이윽고 조다는 한 건강한 아이를 출산했다. 악바르가 그토록 바라던 아들이었다. 그는 아들에게 살렘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귀여워 했다. 악바르는 새로운 생명을 통해 한결 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이 무렵부터 종교에 대한 관용적인 면모를 더 확실하게 드러내게 된다. 이 시기 다른종교를 믿는 백성이라도 그에 따른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었다. 악바르는 이렇게 말했다. "독실한 믿음을 갖지도 않을 사람들을 억지로 개종시킨다 해도 그것이 신의 바램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라고...

 

이후 악바르와 조다는 예전보다 자주 어울리지는 못했지만 서로를 존중해주교 아꼈다고 한다. 이후 조다가 사망하자 악바르는 비통한 마음을 가지고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이후 악바르는 좀 더 정복사업에 매진해 마침내 인도 중부지방의 대부분을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노년의 그는 행복하지 못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만큼 사랑한 살렘과 점차 갈등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는 아들에 대한 실망을 손자인 미르자에 대한 사랑으로 대체하였다. 이윽고 그는 아들을 제치고 손자에게 황위를 물려주려고 까지 하였다.

 

악바르가 원정을 떠난 사이 살렘은 반란을 일으켰다. 긴급하게 돌아와 반란을 진압한 그는 자신에게 무릎을 꿇은 살렘을 바라보았다. 신하들은 연신 그를 죽이라고 외쳤다. 살렘에게 고개를 들게 한 악바르는 그를 처다본 뒤 곧 궁궐에서 자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조다를 많이 닮은 자신과 조다의 사랑의 결실인 살렘을 도저히 자신의 손으로 죽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얼마 후 그는 채념한 듯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의 생전 유언대로 조다의 옆에 묻혔다. 

 

이후 궁궐에서 나온 살렘이 즉위했는데 그가 바로 무굴제국의 4대황제인 자항기르다.

 무굴제국의 4대황제인 자항기르의 초상화(그는 아버지와 달린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미르자를 용서하지 않고 두 눈을 뽑아버렸다. 또한  선교사들을 통해 들어온 기독교에도 깊은 관심이 있었는데 한 예로 성탄절마다 미사에 참석했고 이따금 기독교 교회를 빌려서 연회를 열기도 했다.그는 기독교로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손자 세 명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을 허락했고 아그라에서 그들의 세례를 축하하는 장대한 행진을 벌였다. 그리고 한편으로 조다가 자항기르의 아내였다는 설도 있다.)

 

 비록 종교는 달랐지만 사랑으로 어려움을 극복한 악바르와 조다 바이 황후

 

 그들의 사랑 이야기는 인도에서 영화화 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출처] 제국의 미래.|작성자 maria

출처: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5&contents_id=2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