량진홍교수에 대한 이야기(1)

애국의사2013.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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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공화국에는 백두산절세위인들의 따뜻한 품속에서 새 생명을 받아안고 조국과 인민앞에 많은 공로를 세운 재능있는 과학자, 기술자, 교육자들이 수없이 많다.

그들중에는 량진홍교수도 있다. 그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인재중시, 인재육성방침을 받들어 해방후, 조국해방전쟁시기와 전후복구건설시기 의학부문의 대학건설사업에 자신의 지식과 열정, 재산을 아낌없이 바치였다.

주체의학발전에 생의 뚜렷한 자욱을 남긴 량진홍교수의 뜨거운 애국충정을 련재로 소개한다.


건국의 첫 기슭에서

 

몇해전에 한 해외동포의학자가 조국을 방문한적이 있었다. 그로 말하면 심장병전문가로서 그 분야에서 권위자의 한사람이였다. 어느날 조국의 의학자들과 학술토론회를 진행하는 장소에서 먼저 량해를 구하자고 일어선 그는 혹시 이 자리에 량진홍박사를 아는분이 없는가고 묻는것이였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 어떻게 되여 해외동포의학자가 공식적인 회합에 앞서 그를 찾으려 하는가?

량진홍, 그는 일제시기 개인병원을 차려놓고 가난한 조선사람들의 병을 무료로 치료해주고 항일유격대에 대한 원호사업에도 참가한 애국심이 강한 의사였다고 한다.

단천의 자그마한 농촌마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여난 량진홍은 신동으로 불리울만큼 총명하였다. 원쑤일제에 대한 적개심과 함께 기어이 일본을 디디고 올라서려는 굳은 결심을 품은 량진홍은 고학으로 전문학교와 대학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자그마한 병원을 차려놓았다. 피눈물을 흘리면서 배운 의술로 가난하고 불쌍한 동포들의 병약한 몸을 쓰다듬어주는것으로나마 자기 민족을 위해 복무하자는 마음에서였다.

주체19(1930)년 고향인 단천에서 농민폭동이 일어났을 때에도 그는 밤을 새우며 부상자들을 치료해주었다고 한다. 이 일로 하여 그는 일제경찰서에 체포되여 문초를 당하고 《배일분자》,《요시찰인물》로 늘 감시속에 사는 몸이 되였다. 하지만 가슴속에서는 일제원쑤놈들에 대한 증오와 자기 겨레에 대한 사랑이 늘 끓고있었다.

주체27(1938)년 겨울, 중국목단강에서 병원을 운영하던 어느날 병원문앞에서 담낭이 파렬되여 생명이 위험한 상태에 이른 사람을 발견한 량진홍은 구급소생대책으로 그의 생명을 구원해주었는데 후날 그 사람이 목재소로동자들속에 파견되여 활동하던 항일유격대공작원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이것이 계기로 되여 량진홍은 유격대에 의료기구와 의약품을 보내주는 의로운 일을 하게 되였다고 한다.

해방이 되자 한 항일혁명투사가 청진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그를 찾아와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전해주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교육사업은 미래의 조국을 떠메고나갈 나라의 대들보를 키워내는 보람차고 영예로운 일이라는것을 명심하고 이 사업이 잘되여나가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량진홍의 가슴에서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다함없는 경모의 감정이 북받쳐올랐다.

더우기 힘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있는 사람은 돈으로 건국사업에 적극 이바지하여야 한다고 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력사적인 조국개선연설은 그의 가슴을 한없이 높뛰게 하였다.

-그렇다. 나도 지식으로, 돈으로 새 조국건설에 이바지할수 있다.

주체35(1946)년 4월 위대한 수령님께서 청진시에 오시여 함경북도사업을 현지지도하시면서 도의 전반사업과 함께 각급 학교들을 세우고 교육사업을 정상화하며 보건부문에서 인민들의 병치료사업을 잘할데 대한 구체적인 과업을 주시였을 때 량진홍은 자신이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적지 않은 자금과 기재를 학교건설에 바치고 병원을 꾸리는데 돌렸다.

량진홍은 먼저 청진의학전문학교(당시)를 세우고 교장으로 사업하였다. 그리고 자기가 가지고있던 병원건물을 학생기숙사로 내놓고 많은 의약품과 의료기구들을 교육용기자재로 또 새로 일떠서는 함경북도중앙병원(당시)에 기증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러한 그를 높이 평가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교시에 의하여 주체37(1948)년 9월 청진의학전문학교는 청진의학대학으로 확대발전되였고 량진홍은 초대학장으로 임명되였다.

그 나날 경성에서 온 한 수험생이 수재형이지만 가정사정으로 대학입학을 할수 없게 되였다는것을 알고 량진홍은 그를 주저없이 대학에 입학시켰다.

결과 피치 못할 사정으로 교문앞에서 떠나갈번 했던 그 학생은 대학에 입학하게 되였다. 그 학생이 바로 세월의 풍파를 헤치며 머리에 백발을 이고 조국을 찾아온 해외동포의학자였다.

이렇게 량진홍이 대학에서 실력본위를 지켜 품을 넣어 키운 의학인재들은 해방조선의 의학발전의 기초, 기둥이 되였으며 조국해방전쟁시기에는 위력한 군의진을 이루고 전쟁승리에 크게 기여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