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역사로 보는 군주&부인의 사랑이야기 -샤 자한과 뭄타즈마할

콜로라도2014.01.02
조회14,030

1618년 무굴의 수도 아그라의 황궁에서는 오늘도 여김없이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무굴제국의 황제 자항기르는 나라가 안정되자마자 술판에 빠져 살았고 하루라도 술이 없으면 잠들지 못했다. 이러한 황제와 함께 술잔을 나누는 한 여인은 그런 와중에서도 공문서들을 일일이 자신이 검토하며 결제를 내린 후 오빠인 아시프 칸에게 주었다. 마치 여인천하를 방불케 하며 무굴제국의 전권을 쥔 철의 여인은 황제에게 술을 따랐다. 황제는 모든권한을 그녀에게 위임하고 술에 빠져 산 것이다. 그 여인의 이름은 바로 누르자한 자항기르의 20번째 아내였다.

세상의 빛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을 가진 누르자한 페르시아의 몰락한 귀족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황태자 자항기르와 어린시절부터 함께 어울렸다. 자항기르는 그녀와 결혼하려

했으나 악바르는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그녀는 다른장군과 결혼했다. 그 장군 또한 자항기르

의 친구로 그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그러나 자항기르는 그녀와 불륜을 즐겼고 그녀 또한 남편을

독살한뒤 4년간 수절했다가  딸과 함께 입궁해 시녀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후  자항기르의 간곡한 설득을 받아들여 그의 품에 안겼다. 그녀는 매우 총명하여 환관들을 통해 하램을 장악했고 이후 자항기르를 술에 빠지게 만든 후 정치,외교,군사,분야등 거의 모든부분을 장악했다. 오빠 아시프 칸을 중심으로 그녀의 친척들이 대거 권력에 진출했다. 그녀는  훗날 샤자한에게 사로잡혀 연금되었으나 사랑하는 여인의 고모라는 이유로 배려받아 자신의 커다란 무덤을 짓는등 호화롭게 살다가 죽었다.

 누르자한은 화려하게 건축된 이 영묘에서 자항가르와 함께 묻혔다.

 

그녀의 뒤에 있는 한 왕자는 그녀의 이러한 태도에 역겨움을 느끼고 있었고 언젠가 그녀와 그 일족들을 모두 죽이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쿠람왕자 훗날 무굴제국의 5대황제인 샤 자한이었다.

   무굴제국 4대 황제 자항기르의 셋째 아들로 라호르에서 태어난 샤 자한(쿠람 시하브 웃 딘 무함마드)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가장 큰 총애를 받았다. 쿠람이라는 이름은 할아버지 악바르 대제가 직접 지어 준 것으로, 페르시아어로 ‘기쁘게 한다’는 뜻이다.

 

누르자한은 뒤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기운에 고개를 돌려 쿠람왕자를 바라보았다. 무굴제국에서 가장 총명하다는 이 왕자가 자신에게 살기어린 눈빛을 보내는 것을 눈치빠른 그녀는 감지해내고 있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이 왕자가 현명하다는 것을 먼저 알았다. 그래서 그녀 자신이 오빠인 아사프 칸의 사랑하는 딸을 그에게 주라고 명령했지 않은가.... 또한 1년 전 데칸고원을 평정한 공으로 그는 샤 자한(세계의 용맹한 왕)이라는 이름까지 하사받은 터였다.

 

13년전인 1605년 페르시아의 장군이었던 아사프 칸의 14살 난 딸인 아르주만드 바누 베굼은 자신의 배우자를 만나다는 사실에 설레여하고 있었다. 고모가 점찍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나이라는 말에 그녀는 기대감에 부풀어 오른 것이다. 이후 한 환관과 함께 온 잘 생긴 미남왕자를 만나자 그녀는 가숨이 두근두근 했다. 아사프 칸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연신 수염을 쓰다듬고 있었다. 쿠람왕자 또한 그녀를 보자 가슴이 두근두근 했다. 이미 두세번의 결혼을 한 터였고 이번에도 단순한 정략결혼이라고 생각하고 대충왔었던 자신을 반성했다. 인도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물을 남긴 두 사람의 사랑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후 예물을 신부집에 보낸 사 쟈한은 다시 전장터로 나갔고 7년 후 바누 베굼은 궁궐로 들어왔다. 

 

 샤자한이 가장 사랑했던 황궁의 보석 뭄타즈마할

 

샤자한은 그녀가 입궁하면서 부터 하루라도 그녀와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세상에서는 샤자한이 아시드 칸에게 아부하기 위해 그녀에게 접근한다고 수근되었지만 샤자한은 진심으로 그녀의 사랑의 포로가 된 것이었다. 바누 베굼 또한 밝은 미소로 그를 맞아주었고 서로 열심히 사랑을 나누었다.  그러자 다른 세명의 부인은 홀로 밤을 지세우는 일이 많아졌다.

 

이후 자항기르가 알코올 중독에 의해 쇠약해 질 수록 누르자힌의 권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거기다가 후계자 다툼까지 발생했다 자항기르의 장자 쿠스라우 미르자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눈을 멀게 하는 벌을 받았고, 둘째 아들 바르비즈는 병약한데다 알코올 중독자였다. 그리고 셋째 아들이 샤 자한, 넷째 아들은 샤야르였다. 누르 자한은 처음에는 샤 자한을 지지했지만 샤 자한보다 만만한 샤야르를 지지하기 시작했다.(누르 자한은 첫 번째 혼인에서 나은 딸을 샤야르와 혼인시켜 권력을 더욱 확고히 하려 했다.)

 

바누 베굼은 샤자한의 사랑을 받으며 여러자식을 낳고 있었다. 그러한 그녀에게 있어 고모와 아버지와 대립하는 남편의 모습은 그녀를 더욱 안타깝게 했다. 그러나 샤자한은 정치적 문제와는 별개로 바누 베굼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샤자한은 측근들은 그녀가 자신들의 정보를 아사프 칸에게 보내주는 첩자라고 말하며 배척할 것을 주장했지만 샤자한은 끝까지 그들의 말을 거부했고 바누 베굼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던 중 세력을 모은 샤자한은 누르자한의 세력을 타도할 군대를 일으켰다. 1622년 샤 자한은 반란을 일으켰지만 누르자힌에게 들통이 났다. 자항기르는 마하바트 칸을 보내 이듬해 아들의 군대를 물리쳤다. 샤 자한은 데칸 지역에서 도망 다니다가 1625년에 겨우 아버지와 화해할 수 있었다.(샤 자한은 아들 아우랑제브를 자항기르에게 인질로 보내고 자신은 사실상 은퇴했다.) 신하들은 바누 베굼이 배신했다고 수근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당시 아기를 막 낳은 상태였기에 몸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샤자한의 사랑을 받아 총 열네명의 아이를 낳았고 그 중 여덞명을 잃었다.) 샤 자한도 바누 베굼을 믿었다. 얼마 후 측근 가운데 한명이 누르자한에게 매수되었음이 밝혀졌다.

 

반란을 진압한 마하바트 칸의 위세는 대단해졌다. 그는 누르자한의 세력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점차 압박을 가해왔다. 그러나 이미 권력을 선점하고 있던 그녀의 세력은 더욱 강력했다. 이에 누르 자한 세력의 견제가 시작되었고, 여기에서 위기감을 느낀 마하바트 칸은 1626년 반란을 일으켜 자항기르 황제를 사로잡았고 결국 누르 자한도 투항해왔다.

그러나 누르 자한은 마하바트 칸을 안심시키는 한편 다른 귀족들과 마하바트 칸 사이를 이간질하는 데 성공했다. 마하바트 칸은 반란에 성공한 지 100일 만에 도망쳐 예전의 적이었던 샤 자한에게 의탁했다. 그는 마하바트를 크게 우대하고 누르자한의 추적으로 부터 숨겨준 후 군대훈련을 맡겼다. 마하바트도 고마움을 느껴 샤자한의 군대를 강력한 군대로 훈련시켰다.

 

1년 후인 1627년 자항기르가 술독에 빠진 인생을 마침내 마감하였다. 그 순간 샤 자한은 정예군을 이끌고 아그라를 공격했다. 그 행렬에는 바누 베굼의 가마도 뒤따랐다. 그녀는 전장터에서도 샤자한과 함께였기 때문이다.(그녀는 샤 자한이 출전하자 따라가 내조하였으며 때로는 원거리를 이동하면서 출산하였다.)  이때 아그라성 수비대장과 결탁한 아그랑제브가 마침내 성문을 열자 샤자한의 군대가 진격해 들어왔다. 이미 누르자힌의 오빠이자 샤자한의 장인인 아사프 칸도 사위를 지지하고 나서 거의 무혈입성을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샤자한은 무굴제국의 왕관을 자신의 머리위에 썼으니 그가 바로 무굴제국의 5대 술탄 샤 자한이었다.(마하바트 칸은 아지메르와 데칸 지역의 지방장관으로 일했다.)

 

사실상 황후가 된 베누 베굼은 샤자한으로 부터 뭄타즈마할(황궁의 보석) 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그녀는 자신의 고모와는 달리 정치로 부터 스스로 멀어졌으며 아버지에게도 욕심을 버릴 것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그러자 아사프 칸은 스스로 권력을 상당부분을 샤자한에게 반환했고 샤자한도 아사프칸을 원로로서 대접했다. 그녀의 이러한 현명한 태도는 샤자한을 기쁘게 했고 자신의 가문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샤자한이 등극할 당시 제국의 국력은 악바르와 자항기르의 치세를 거치며 가히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선대들에 비해 샤 자한은 정복보다 예술을 애호하는 문화 군주로서의 측면이 강했고 또한 종교적으로도 대단히 관용적이었다. 그의 치세 중에 제국은 번영과 안정을 누렸고, 반란은 속속 진압되었으며 시민들은 평화를 영위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항기르 때 부터 반항적이었던 시크교의 초대교주를 처형한 후 시크교도들의 반란을 자주겪었다.

 

샤자한은 또한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사치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는 비용을 아끼지 않고 제국 전역에 웅장한 성채와 궁전,그리고 이슬람 사원을 건축했다.그는 자신이 앉을 유명한 공작 옥좌의 제작을 의뢰했다고 한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부러울 것이 없는 황제였다. 사랑하는 아내, 든든한 아들들(그의 장남인 다라는 과학에 관심이 많았고 종교에 있어서도 관용적인 사람이었다. 또한 차남은 예술에 큰 재능을 보인 인물이었으며 삼남인 아우랑제브는 용감한 전사이자 독실한 이슬람 신앙인으로 이슬람계층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부유한 제국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샤자한은 스스로도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1631년 뭄타즈마할은 열네번째 아이를 낳고 있었다. 샤자한 또한 초조한 마음으로 밖에서 순산하기를 기원하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전장터에서도 자주 아이를 낳아 산후조리를 제대로 받지 못했고 여기에 임신까지 자주해서 몸이 만신창이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내색하지 않고 샤자한을 항상 다정하게 대했다.  "응애" 아이의 힘찬울음소리와 함께 시녀들의 통곡이 들려왔다. 샤자한은 자신도 모르게 산모의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곳곳에서 비통한 통곡이 들려왔다. 그리고 침상에는 사랑하는 아내인 뭄타즈마할이 마지막 숨을 헐떡이며 샤자한을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샤자한은 떨리는 다리를 이끌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마지막 힘을 짜내 샤자한이 새로운 황후를 들이지  말라는 유언을 한 후 숨을 거두었다. 샤자한은 정신이 멍해지며 쓰러졌다고 한다.

 

혼절했다가 깨어난 샤자한은 뭄타즈마할을 애타게 찿았다. 한동안 목놓아 부르던 아내가 죽은것을 인정한 샤자한 그녀를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것을 바치기로 신 앞에 맹세했다. 그리고 곧 바로 그녀의 무덤을 만들라고 신하들에게 지시했다. 곧 대리석, 벽옥, 수정, 진주, 에메랄드, 터키옥, 청금석, 사파이어 등 값비싼 자재와 장식재들을 아시아 각지에서 들여와 전대미문의 크고 화려한 묘역을 조성하기 시작했다.(중앙의 능을 완공한 것이 1648년, 묘역 전체는 착공 22년 만인 1653년에 완공되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의 반열에 드는 타지마할이다. 

 

 2만 명의 일꾼들이 20년 넘게 공을 들여 지은 이 하얀 대리석 건물은 페르샤와 인도의 건축구조,그리고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특징들을 종합하고 있다.

  샤 자한은 이슬람 신앙에 충실한 편이었지만 어머니가 힌두계였고, 정치에서 대체로 이슬람과 힌두교의 절충주의 노선을 취했다. 샤 자한의 그러한 노선은 많은 힌두 토착 세력들에게 환영 받았다. 이는 많은 힌두사원을 파괴하고 무슬림만을 고위 관료로 등용한 아들 아우랑제브의 노선과는 크게 달랐다. 또한 다른 황제들처럼 노골적으로 정복욕을 과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런 샤자한도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앞에서는 나약한 인간이었다. 그도 닮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던 아버지 처럼 술독에 빠져 살았고 화려한 연회를 자주열어 재정을 축냈다. 여기에다 타지마할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은 제국경제를 점차 기울게 했다. 그러나 할아버지와 아버지대에 이룬 막대한 부 덕분에 당대에는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여기에다 힌두계 관료들은 장남인 다라를 이슬람 관료들은 삼남인 아우랑제브를 지지하며 세력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운명이 그날이 다가왔다.

 

1657년 샤 자한이 병고에 시달리는 사이 아들들이 피 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에 나선 것이다. 장남 다라 시코는 병든 샤 자한을 대신해 사실상 대리 통치를 하고 있었지만, 차남 샤 슈자, 삼남 아우랑제브, 막내 무라드 바크시 등 형제들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1658년 삼남인 아우랑제브 앞으로 수많은 이슬람계 관료,귀족, 종교인들이 모여들어 결단을 촉구하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무기가 들려져 있었고 밖에서는 병사들의 고함소리와 말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들은 100여년 동안 자신들이 보기에 말도 안되는 이교도들과 함께 정치를 해왔다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그들에게 희망은 이슬람교도가 모든 이교도들을 무릎 꿇리며 그들을 모두 알라신에게로 개종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아우랑제브는 독실한 이슬람 신도로서 그 뜻을 이뤄 줄 인물이었던 것이다.

 

 노년의 아우랑제브  그는 퇴폐적이었던 선대의 왕들과는 달리 검소한 생활을 했고,손수 예배용 모자를 짰으며 ,코란을 몇 번이고 베껴써서 거의 암송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더욱이 포도주와 아편을 금지하고 이슬람교 의식이 아닌 모든 의식을 금지했다. 그리고 이전에 시행되던 종교적인 관용정책을 뒤집고 제국 전역에 이슬람 법률인 샤리아를 강요했다. 또한 마투라 대사원을 비롯해서 수천 개의 힌두교 사원과 사당을 파괴했다. 또한 이슬람교가 아닌 다른신도들에게 인두세를 강요하고 타종교의 재산을 압류해 결국 잦은 반란에 휩싸였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재정의 파탄을 매꾸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합집산의 전쟁 끝에 최후의 승리는 아우랑제브의 몫으로 돌아갔다. 아우랑제브는 형 다라 시코를 공개 참수형에 처하고 아버지 샤 자한을 아그라 요새의 탑에 감금했다. 아우랑제브는 이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 번도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다.(샤 자한은 아우랑제브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가 현재도 남아있다. 편지 내용은 음식은 짜고 물도 부족하고 춥고 옷도 없다고 하소연한 것으로 이걸 봐도 아버지를 엄청 박대했음을 알 수 있다.) 

탑에 갇힌 샤 자한에 대한 아우랑제브의 배려는 사랑했던 아내가 묻힌 타지마할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 뿐이었다. 실의에 빠진 샤 자한을 곁에서 돌본 것은 첫째 딸 자하나라 베굼 사히브였다. 샤 자한은 1666년 1월 22일 코란의 구절을 암송하면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자하나라는 성대한 국장을 준비하려 했으나 아우랑제브는 허락하지 않았다. 샤 자한의 시신은 백단향 관에 안치되어 강을 통해 타지마할까지 운구 된 뒤, 아내 곁에 묻혔다.

 

 샤자한과 뭄타즈마할 황후 그들의 사랑은 인도를 관광대국으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했다.

 

출처: http://mirror.enha.kr/wiki/%ED%83%80%EC%A7%80%EB%A7%88%ED%95%A0 네이버 케스트: 샤자한 편 네이버 블로그: 제국의 미래

댓글 4

오래 전

잘봤습니다!!

오래 전

재밌게봤습니다!!

오래 전

이것도 재밌네..댓글이 없넹..잘보고있어요~^^

설블리오래 전

수능때 세계사를 선택했던지라 세계사때 배웠던 인물들이 나오니까 기억이 새록새록나네요ㅎㅎㅎ항상 감사합니다 잘보고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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