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괴출신의 탈북이야기(4)

엑윽2014.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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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봄의 북방의 밤은 무척이나 차갑더라.

 

몸도 무척 추운데 마음도 무척 추워서 나중에 도착한후 거울을 보니 10년은 늙어버린것 같더라.

 

오토바이 뒤에서 덜덜 떨면서도 내 마음은 왜이리 아팠을까.

 

그 지옥을 탈출하면서, 이젠 곧 진정한 자유가 기다리는 곳으로 갈수 있는 희망에도 불구하나고 왜 나는 그리 슬펐을까?

 

나는 끝까지 내가 태어나고 살아온곳을 포기 못했던거지.

 

뭐 내가 포기못한들 달라지는건 없지만  너희들도 가질수없는것에 대한 집착이 한가지 쯤은 있지 않을까?

 

태어난 고향과  아버지, 다녔던 학교와 일터, 그리고 친구들.

 

20여년을 살아오면서 미우나 고우나 정들었던 곳인데 쉬울순 없겠지.

 

정말로 비장한 마음으로 내 조국을 돌아보았지.

 

강줄기를 따라 오토바이를 따라  내 고향을 다시한번 바라보았다.

 

나무란 나무는 다 베어서 연료로 쓰고 민둥산이 된 북한의 산들과  그 기어서 올라갈수있는  가파로운 산에 강냉이를 심는

 

영악스러운 아낙네들...

 

 

그게 내 눈에 마지막으로 보이는 소위 조국이였다.

 

참고로 북한의 산골은 겨울 난방용 연료로 나무를 사용해.

 

결국 몇십년동안 주변의 모든산들을 벌거숭이로 만들었지.

 

그 민둥산에 소토지라고 불리우는 화전을 일구어.

 

이 소토지는 정부가 알면서도 눈감아 주는거다.

 

그정도까지 통제하면 모두 정말로 다죽을텐데 방법이 없는거야.

 

추위에 떨면서 도로를 따라 40분이 훨씬 넘게 달렸어.

 

그런데  조선족이 갑자기 오토바이를 세우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라고.

 

그 조선족이  다녀오더니 다시 출발하자고 하더라고.

 

알고보니  조중국경도로를 따라 화룡으로 들어오다 보면 중국 국경을 수비하는 공안국 초소가 있었던거야.

 

근데 그들이 유일하게 30분정도 시간을 비우면서 교대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이 브로커는 그시간을 노린거지.

 

사실 브로커들은 마치 자기들이 공안을 다 끼고  브로커일을 하는것처럼 거짓말을 하지.

 

안그러면 가족의 목숨을 안심할 탈북자들이 어디있겠노.

 

내 브로커는 자기 삼촌이 화룡시 공안국장이라고 흰소리를 쳤던 놈이었지.

 

잠깐  탈북 브로커에 대하여 설명을 좀 하고 넘어갈께.

 

많은 탈북자들이 생기면서 생계형 탈북이 아닌 기획형 탈북이 늘어나는 시기가 됬어.

 

고향의 부모와 자식들 또는 형제들을 데려오기 위해서 이들은 보다 안전한 방법과 루트를 강구하게 되는데

 

이런 이유로 브로커가 생겨나지.

 

대부분의 탈북 브로커는 탈북자 들이야.

 

자기들이 넘어왔던 그길로 딴 사람들을 인도하면서  여러 비용을 가족들로 부터 받아내지.

 

지금 이용되는 모든 루트는  그 누군가가 아무런 도움도 없이 처음으로 넘어갔던 길이었고 결국 나중에 루트로 바뀌는거야.

 

많은 루트가 있지만 내가 올때는 중몽 국경을 넘는 루트가 기본이었지.

 

그외에 캄보디아나 라오스를 거쳐 태국으로 가는길도 있었고  간혹 러시아로 들어가서 한국대사관에 망명신청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이루트들은 모두가 아는 기본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그어떤 피해를 입을수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으니 안심하길..

 

결국 아슬하슬 간발의 차이로 나는 그 지역을 통과해서 화룡시내로 들어가게돼.

 

탈북자들중 많은 사람들은 이 국경지역을 벗어나지못하고 다시 체포되어 압송되는 경우가 많아.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들인거야.

 

국경지역의 공안들은 조중북경쪽에서 오는 택시들을 불시 검문하곤 했는데 그이유가 바로 탈북자 색출이었거든.

 

뭐 어쨋거나 난  내몸같지 않은 내몸을 이끌고 브로커의 집에 도착을 해.

 

가장 기억에 남았던것이 성기만하게 조그만한 시내가 가로등까지 다 켜고  휘황하게 불을 밝힌게 아니겠노.ㅋ

 

평양도 김일성 동상밖엔 24시간 불오는곳이 없는데 말이지.ㅋ

 

그런데 그 브로커도  참 가난하더라.

 

난 중국이라면 엄청나게 잘사는 줄 알았었어.

 

근데 아주 가관이더라고.

 

부엌과 연결되있는 방이 달랑이고  거기서 중딩쯤 되보이는 어린딸과 같이 살더라고.

 

마누라는 한국에 돌벌러 갔다고 그러더라.

 

안경돼지인 딸은 무슨 중국아이돌인것같은 애새키 노래를 조카 따라부르면서 날 쳐다도 안보더라

 

 

나이 40이 넘어서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한참 푸념을 하더니   밥먹으로 가자고 해서 거기서 일어났지.

 

3명이서 근처의 식당으로 나가서 밥을 먹었어.

 

그때 중국식 꼬치구이 중국명으로 양로촬이라고 불리우는 양고기 꼬치구이를 먹었지.

 

 

이렇게 생긴거야.

 

맛도 좋지만 특이한 향이 나는 소스가 참 특별하더라고.

 

 

이게 소스일꺼야.

 

엄청맛있게 먹었어.

 

맛이 좋아서 그순간만은 고향이고 아버지고 다 버리고 열심히 먹어댔다.

 

사실 정말로 기억에 남았던 맛이였어.

 

나중에 한국에 온후에 그맛이 그리워서 도봉산에 가서 먹어봤는데  그맛은 안나고 목이 메더라.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후 우리는 잠이 들었지.

 

그날 밤 한숨도 못자고 뜬눈으로 지새웠지.

 

얼마 살진 못했지만 살아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가더라.

 

그리고 내가 지금 중국에 와있다는것도 실감도 안나고 말이야.

 

이상한 향초 냄새가 나는 바닥에 누워서 난 결심하고 또 결심했지.

 

꼭 잘살거야. 꼭 잘살거야 라고 말이야.

 

돈도 많이 벌어서 우리 아버지 데려오고 친구들도 보내주고 하면서 살거라고...

 

지금은 일게이짓이나 하고 앉아있지만 말이야.

 

어느새 아침이 됬고 우리는 대충 아침을 먹고 연변으로 나가기 위해  택시를 잡으로  시청앞으로 갔지.

 

뭐 다그런진 모르겠지만  최소한 화룡은 택시기사들이 시청앞 광장같은데 차 세워놓고 조카게 호객행위하더라고.ㅋ

 

중국말이 못알들었지만 뭐 대충 보면 연변간다고 소리지르는 놈, 도문간다고 소리지르는 놈. 뭐 많더라.

 

이 조선족이 30분을 넘게 여러 택시기사와 흥정을 한후에 겨우 택시를 잡았는데  문제는 택시가 떠날생각을 안하는거야.

 

 

이렇게 후지게 생긴 택시에 앉아서 주위를 두리번 거리고 있는데  중국은 승객합승이 아주 버젓하게 행해지더라고.

 

두어놈이 더타고야 우리는 출발을 할수가 있었지.

 

내옆의 앉은 놈이 삼성 휴대폰을 쓰면서 게임을 하는데 난 그게 뭔지도 모르고 겁나 신기해서 구경만 했지.

 

승차감이 북한의 소달구지 수준인 성기같은 택시를 타고 오래도 달렸지.

 

생전 처음 외국으로 탈출해서 참 궁금한게 많았나봐.

 

여길저길 둘러보면서 무거웠던 마음도 잊혀진채 관광모드로 돌변해 있었지.

 

볼거리래봤자 시골길과 다 깨진 포장도로고 북한과 별로 달라보이지도 않더라고.

 

결국 엉덩이가 아파질무렵  우린 연변에 도착을 해.

 

 

여기가 연길시내야.

 

시내 중심에 들어올수록 내눈은 점점 커졌지.

 

조카게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놓고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들로 부터 길거리의 상점들은 물건이 차고 넘쳤고

 

북한에선 구경하기도 힘든 남방과일들을  이들은  마구마구 팔고있고 말이야.

 

길거리의 청년들은 개성이 넘쳐보였고  혈색들은 좋았으며  무엇을 두려워하거나  조심하는 기색들도 없더라고.

 

그리고 이 조직화 되지않고 자유화된 모습은 날 당황스럽게 했지.

 

아무도 엄숙하고나  근엄한 표정을 짓지않았고 누구도 말조심하기위해 단어를 고르는 모습도 없었으며 군사훈련을 위해

 

군복을 입은 사람도 없었고  지도자의 초상휘장을 가슴에 단사람도 없었지.

 

장발 단속과  청바지를 단속하는 사람도 안보였고  심지어 이들의 경찰은 굉장히 친절해 보이기 까지 했어.

 

그러나 이런 생각도 잠깐이고  내앞으로 두명의 공안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가오고있는게 아니겠노.

 

브로커는 귓속말로 태연히 걸어가자고 말을 했지만 이미 난 제정신이 아니였어.

 

정말로 오줌을 지릴 만큼 무서웠고 떨렸지.

 

얼굴은 상기되있었고 눈은 불안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지.

 

사실 그자리에서서  공안들이 지나갈때까지 한발자국도 못움직였어.

 

다행히 인파가 많은 지역이라  공안은 날 별로 신경안쓰고 지나갔지.

 

아마 지금껏 사람이 무서웠던 적은 그날이 처음일거야.

 

그리고 난 지금도 경찰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

 

솔직히 대한민국 경찰들 얼마나 좋으냐.

 

신고하면 빨리오고 진상부려도 참아주고 말이야.

 

그래도 난 본의 아니게 그 두려움으로 경찰들에게 다가가기가 매우 힘들어.

 

지금도 마찬가지고 앞으로 나아질지는 잘 모르겠다.

 

나중에 한국에 온후 광화문광장에서 죽창들고 시위하는 폭도들을 보면서 생각했지.

 

북한에서 죽창으로 안전원을 찔렀다면  바로 총살당했을거라고 말이야.

 

그어떤 재판이나 변명도 통하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어도 하소연 할곳도 없는거지.

 

죽창으로 경찰을 찌르면서도 처벌받지 않는 자유세상에서 저들은  북한을 찬양하고 있지.

 

저들이 북한에서 저런식으로 시위를 했다면 어찌됬을까?

 

아마도 가장 비참한 인생을 맞이했을거라는데 내 모든걸 걸수있어.

 

생략하고

 

나는 그날 연변시내에 위치한 외딴 차집에서  새로운 브러커의 손에 넘겨지지.

 

이 브로커는 북한 사람이였어.

 

결국 이사람이 나를 최종적으로 대한민국으로 인도할 인도자인거야.

 

같은 탈북자인지라 금방 친해졌고 가까와졌지.

 

그날 저녁은 어떤 아파트에 보내졌는데 거기서 감격적으로 동생과 상봉하게 되지.

 

오빠를 만났다고 토끼처럼 팔짝거리는 동생을 만나니 나도 좋더라.

 

이래서 가족인거겠지.

 

동생도 대충 나랑 비슷한 상황으로 연길까지 온거였어.

 

아파트가 맨 윗층이었는데 연변시내의 야경은  내가 첨보는 자본주의의 밤이었지.

 

흐르는 네온사인에 술취해서 비틀거리며 걸어다니는 사람들.

 

소란한 음악과  그런 그들을 그대로 방치하는 공안들.

 

당시로써는 이해하기 힘든  참 가슴이 벅찬 세상이였어.

 

(아 ! 내가 새세상에 왔다. 내가 이젠 새세상 사람이다,)

 

뭔가  새로운 힘이 막 솓구치더라고.

 

결국 내인생은 다시 시작된거였지.

 

공산주의 사상을 주입하는 왕조국가에서 살아오고 성장한  한청년은 이제부터 자본주의 세상의 일원이 될거고

 

저들처럼 개성있게 자유롭게 살아갈거라고 다짐했지.

 

하루이틀 지나자 여기저기서 탈북자들이 속속 모이기 시작했어.

 

이들모두가 대한민국으로 떠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찿아온 사람들이지.

 

살아온곳도 태어난곳도 모두 다르고 심지어 사투리나 출신성분도 모두 다른 각양각색의 사람들이었어.

 

중국 시골의 늙은 총각에게 팔려갔다가 도망쳐온 아줌마로 부터 나 처럼 금방 넘어온  어리버리한 시골처녀,

 

세련된 옷차림과 능숙한 중국어를 구사하는  과거를 모를  아가씨며  양변기를 쓸줄 몰라서 수세식 변기위에 앉듯이 올라앉아 볼일을 보는 아저씨 까지

 

각양각색이였지.

 

이 아저씨는 나중에 물도 내가 내려줘야 했다.

 

평생 첨보는 양변기이니 쓸줄도 당연히 모를수 밖에.

 

이렇게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2주일이 안지나서  한국행을 원하는 사람들은 20여명이 넘게 되었지.

 

출발 날자가 잡히고 떠나기전  여러가지 주의 점을 알려주는데 모두 표정들이 비장하더라.

 

그리고  1조로 떠날 사람들이 선발됬지.

 

참고로 사람이 많아져서 조를 두개로 나눈거였는데  나와 내동생은 탈락하고 다른사람들이 들어간거지.

 

많이 열받아서 따졌지.

 

나와 내동생을 왜 남겨두냐고.

 

브로커가 상황 설명을 하면서 두번째는 꼭 보내준다는거야.

 

그 새키가 칼자루 쥔놈이라 어쩔수 없이 부러운 눈으로 그들을 배웅했지.

 

서로 한명한명 안아주면서 행운을 빌어줬다.

 

사실 그길은 너무 위험하기 짝이 없는 길이었어.

 

만약에 이들이 체포되어 북송되면  이들은 중국서 살다 잡힌 생계형 범죄자가 아니라  한국 망명을 기도한 정치범이 되는거거든.

 

정치범이 되면 어찌되는지 너희들도 잘알지 않노.

 

잡히면 죽을수 밖에 없지만  중국에서  신분도 없이 여기저기 도망다니면서,팔려다니면서 짐승처럼 살수도 없는 노릇아니겠노.

 

참 다들 기구한 운명으로 여기까지 모였지만 그래도 눈에는 희망들이 보였다.

 

이렇게 생긴 장거리 여행 버스를 타고 그들은 모두 떠났지.

 

참고로 침대버스들이다.

 

이렇게 이들은 떠났고 난  그들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았지.

 

그들이 떠난후 이틀쯤후 전화가 오더라.

 

1조가 넘어야할 국경근처의 도시에 다달았다고.

 

정말  떠나지도 않은 내가 긴장되고 또 긴장되는 시간들었다.

 

저녁이 되자 그들은 국경을 향해 떠났고  자정이 넘었을 쯤 그들이 탈출에 성공한것같다는 전화를 받게 되지.

 

정말 부러웠다. 진짜로 부러웠어.

 

우리도 떠났으면 지금쯤 만세를 부르고 있을텐데.

 

그런데 그이후에 통화하기로 되어있던 시간이 훨씬 지나도 연락이 안되는거야.

 

아무리 여러가지 변수가 있었지만 이들은 대부분 브로커가 준비해준 싸구려 후대폰을 가지고 있었거든.

 

참으로 안타까운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지.

 

국경을 넘었다고 하니 괜찮을거라는 생각과 동시에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남아있는 사람 모두를 엄습해 왔지.

 

결국 이틀후 우리는 그들 전부가  중국해방군의 국경수비대에 체포됬다는 청천 벽력같은 소리를 듣게돼.

 

하늘이 노오랗게 보이는 시간들었다.

 

별빛도 안보이는 흐린 밤에 그 광야에서 방향감각을 잃어버리면 그들은 그곳이 어딘지도 알수가 없어.

 

제발로 다시 중국땅으로  돌아온 상황이라고 들었다.

 

이제 그들은 어찌될까?

 

크나큰 슬픔과 불안에 모두가 떨었지.

 

한편으론 얼마나 안도하게 되는지 사람이란 인간은 참으로 이기적인거 같아.

 

사실 우리가 1조에 속했으면 난 이글을 쓰지도 못했을거고  휠체어 끄는 일베이가 되지도 못했겠지.

 

엄청난 두려움을 뒤로하고 우리는 안전하우스를 벗어나지.

 

체포된 사람들이 우리가 있는 위치를 알기에 취조과정에서 불게 되면 우리 모두 줄줄히 잡혀나게게 생겼었거든.

 

우리는 다시 중국 안도의 어떤 시골로 도망했고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뿔뿔히 흩어져버렸어.

 

참담한 심정이었지.

 

지금도 그때  체포된 사람들의 생사는 알수가 없지만 희망을 가져볼수도 없지.

 

불쌍한 그사람들..

 

체포 될때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가끔 그들을 생각하면 참 미안해서 마음이 아파.

 


(실화/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