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역사로 보는 군주&부인의 사랑이야기 -한무제와 위자부(위황후)-

콜로라도2014.01.03
조회28,407

"폐하 언제쯤 이 고모에게 조카를 안겨주실 것이옵니까 "

 

기원전 130여년대 어느날 이날도 어김없이 황궁을 찿은 장공주는 유철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소년에게 닥달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딸이 마음에 들지 않느냐며 넌지시 떠보았다. 유철은 "네 하나도 마음에 안듭니다." 라는 말이 목구멍에 까지 올라왔지만 옆에서 지켜보던 어머니 왕씨의 날카로운 눈빛앞에 할 수 없이 조만간 좋은소식을 들려주겠노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여인들로 가득한 이 궁궐에서 가장 여인에게 잡혀 살고 있는 이 소년이 바로 한무제다.

 중국 고대 명군주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한무제는 즉위 당시만 하더라도

여풍에 휩쓸리고 있는 한낱 소년에 불과했다.

 

중국 제7대 황제, 한무제 유철은 기원전 141년에 16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말로는 이렇게 간단해 보이지만, 실제로 그의 즉위까지는 곡절이 많았다. 그는 부황 경제(景帝)의 열한 번째 아들이었으며 그나마 후궁의 소생이었다. 적장자 승계 제도를 원칙으로 했던 한나라에서 그가 황제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 왕씨(효경황후)는 야심이 크고 모략에 뛰어난 여인이었다.

 

그녀는 먼저 경제와 매우 친하여 권세가 대단했던 경제의 누이 장공주의 딸과 유철을 혼인시킨 뒤, 장공주와 힘을 합쳐 황태자와 그의 모친 율희를 모함해 결국 황태자가 폐위되고 얼마 후 자살하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경제와 사이가 좋았던 경제의 동생 양왕 역시 함정에 빠트려 황위 계승 후보에서 탈락시켰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유철에게 옥좌가 돌아갈 수 있었다.

 

옥좌에 올랐더라도 그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도 정치에 관심이 많아 자주 참견하는 할머니 두태후와 어머니 왕태후, 고모이자 장모인 장공주 그리고 철없고 날카롭기만 한 아내 진씨를 생각하면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왔다. 그래서 그는 자주 밖으로 나갔는데 주로 간 곳은 누님인 평양공주의 사저였다. 한무제는 평양공주의 집에 가기를 좋아했다. 그곳에는 나름의 자유가 있었고 즐거운 구경거리가 많았다. 평양공주 또한 앞선 네 여인과는 달리 한무제의 고민을 들어주고 그에 따른 나름의 해답도 내주고 있었다.

 

평양공주는 아날도 어김없이 찿아온 무제를 위해 잔치를 열어주었다. 많은 미녀들이 무제의 술시중을 들거나 그의 앞에서 춤을 추었다. 그러나 무제는 그다지 흥미가 나지 않았다. 저 멀리 술상을 옮기는 한 여인을 만나기 전에는.....

 

그녀를 본 순간 무제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였다. 청순하면서도 단아한 한 여인만이 그의 눈에 띄었다. 무제는 평양공주에게 저 여자가 누구냐고 묻자 공주는 자신의 밑에서 일하는 여가수라고 했다. 무제는 그 여자를 불러 노래를 들려달라고 했다. 한무제 앞에선 그녀는 떨면서도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했다고 하는데 한무제는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노래를 들었다. 물론 시선은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위자부... 천한 여가수에 불과한 이 여인의 모친인 위온(衛媼)은 한무제의 누나인 평양공주의 집에서 일하던 하녀에 불과했다. 당시 하녀라는 일의 특성상 남성들에게 희롱당하는 일이 많았던 그녀는 정계라는 하급관리와 통정해 아들 청을 낳았고 이름도 모르는 남성들에게 희롱당해 딸 셋을 낳았는데 위자부는 그 중 셋째딸이었다. 어머니가 천하면 자식도 천한지라 위자부 또한 태어날 때 부터 평양공주의 종이라는 신분을 가졌다. 그녀는 자랄수록 아름다워졌고 특히 목소리가 고와 노래를 잘 불렀다. 평양공주 또한 그녀의 노래를 듣고 가수로 삼았다고 한다.

 

눈치빠른 평양공주는 무제가 위자부를 마음에 들어한다는 것을 알고 노래가 끝난 뒤 무제가 화장실에 가려고 하자 그녀에게 시중을 들라고 했다.(고대 왕족과 귀족의 화장실은 볼일을 보는 것만이 아닌 옷을 갈아입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옷에 냄세가 배였다고 하여 매번 갈아입었다>.)

 

한무제는 사람들을 물린 후 그녀가 관계를 가졌다. 그리고 기쁜마음으로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이후부터 한무제는 하루가 멀다하고 평양공주의 집을 찿아 위자부와 함께 밤을 보내거나 연회를 즐겼다. 황제는 그녀에게 푹빠져 있었다. 청순하면서도 두렵다는 듯 몸을 떠는 그녀를 안아주면 무제는 무엇보다 자신이 황제이기 이전에 사랑하는 여자를 지킬 수 있는 남자라는 점을 기뻐했다. 그녀는 주위의 다른여인들과 달랐다. 특히 아내인 진아교 처럼 날카롭고 매사 불만투성이가 아닌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다정한 존재였던 것이다. 한무제는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이 여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이후 무제는 그녀를 황궁으로 데려오기로 결심했다. 때 마침 위자부에게 태기가 있자 황제는 지체없이 그녀를 황궁에 데려갔는데 이 소식을 들은 진황후는 분노에 치를 떨며 고함을 질렀다고 전해진다.

 

위자부를 황궁에 데려온 후 한 무제는 더욱 더 그녀를 총애해 매일 그녀의 처소를 방문했다. 사가들은 일반부부와 다를바가 없었다고 하듯 매일 함께 한 것이다. 한무제는 그녀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그녀의 남동생인 위청을 불러  건장궁(建章宮)에서 일하게 했다.

 

그러자 진황후는 위자부를 없에기 위해 먼저 위청에게 해치려 했다. 당장 황제의 총애를 받는 위자부를 어찌해볼 수는 없으니, 그 대신 건장궁에서 일하고 있는 위청을 잡아 들여 죽여버리려고 사람들을 풀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놓인 위청이지만, 마침 친구였던 기랑(騎郞) 공손오(公孫敖)가 소식을 듣고 급히 장사들을 이끌고 구하러 와서 간신히 죽음만은 면하게 되었다.

이 소식은 한무제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한무제는 위청을 불러들이고 건장궁의 궁감(宮監) 겸 시중(侍中)으로 삼아 힘을 더해주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위씨 집안을 우대하기 시작하는데, 위청의 누이이자 위자부의 첫째 언니인 위유(衛孺)는 태복 공손하(公孫賀)에 시집을 보내주었고, 둘째 언니인 위소아(衛少兒)가 진평의 후손인 진장(陳掌)이라는 남자와 살고 있자 진장도 불러들여서 귀하게 대접했다.  

 

위자부의 둘쩨언니 위소아가 낳은 한의 명장 곽거병 그가 진장과 성이 다른 이유는 그녀가 하녀로 있을 때 곽중유라는 관리가 그녀를 범하고 가버린 뒤 생긴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후일 곽거병은 장군이 된 후 전장터를 지날 때 아버지를 만났고 자신의 배 다른 동생 곽광을 데려와 키워줬다. 자신감이 지나치게 넘치는 오만방자한 성격으로 병사들의 고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단 6년간의 짧은기간 동안 엄청난 공적을 세운 후 24세의 젊은나이로 죽자 한무제는 파격적으로 자신의 능묘 옆에 그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마침내 위자부가 아들 여거를 낳자 한 무제는 뛸뜻이 기뻐했다. 그리고 여기에 처남인 위청이 흉노족을 격파하자 그에게 큰 벼슬을 내리고 막대한 재물을 하사했다.  이후 위청은 이종조카인 곽거병이 등장하기 전까지 대 흉노킬러 병기로써 수많은 승리를 이끌게 된다.  

 

위청의 원래 이름은 정청으로 어머니가 정씨성을 가진 하급관리에게 희롱당해 낳은 자식이었다. 이후 아버지를 따라가 계모와 이복형제에 의해 종처럼 취급받다가 노예생활이 났겠다 싶어 다시 평양공주에게 돌아갔다. 이후 말을 잘 타고 또한 잘 다뤄 공주의 마부로 있다가 누이를 잘 둬 장군으로 승진해 흉노와의 싸움에서 연전연승을 거둬 패배감에 젖어있던 한나라의 영웅이 된다. 후일 대장군까지 지내며 자신의 주인마님이었던 평양공주를 아내로 얻게된다. 겸손한 성격이고 부하를 하나하나 잘챙겨주었으나 노예근성이 있어 쓴소리를 할줄 모르고 듣기 좋은소리만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가운데 마침내 이성을 잃은 진황후는 황제에게 대놓고 고함을 지르거나 역정을 내며 위자부를 내쫓고 여거를 자신이 키우겠다고 선포했다. 그렇게 되자 무제는 더 이상 참지않고 그녀를 폐위시킨 후 가둬버렸다. 그리고 파격적으로 위자부를 효무황후에 봉하고 신하들의 반대를 눌러가며 정식황후로 삼았다. 이때 그녀는 공주 둘을 더 낳아 삼남매의 어머니가 되어 있었다.    무제는 즉위 직후 널리 바른 정치를 하기 위한 대책을 묻고, 여기에 응한 동중서의 대책을 채택함으로써 유교를 중국의 국교로 만드는 길을 열었다.(한나라를 세운 한고조 유방은 본래 서민 기질, 무인 기질이 두드러져 유학자들을 좋게 보지 않았다. 게다가 진나라의 혹독한 정치와 초-한대전의 후유증에 시달려 기진맥진해 있는 백성들을 달래려면 도교의 자유분방함이 좋다고 여겼다. 그래서 한나라는 원래 도교(정확히 말하면 전설상 인물인 황제 신앙과 결부된 황로학(黃老學))를 존중하는 왕조로 출발해서 그때까지 이어져 왔다.)     무제는 유교를 대신 내세우려는 의지가 강했는데, 천하에 두루 황제의 위엄을 과시하고 통치권력을 체계화하려면 유교가 적합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진시황을 본받아 사상 통제를 할 필요성도 느꼈는데, 다만 지나치게 엄격한 법가보다는 더 온건하고, 지나치게 느슨한 황로학보다는 더 질서정연한 유교가 알맞아 보였다. 그는 유교를 누구보다 신봉하고 있었는데 그 결정적인 이유는 신하들이 감히 황제의 명령을 정면으로 치받는다거나, 아무리 태후라도 여자가 정치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하는 일은 유교의 가르침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기원전 135년에 두태후가 세상을 떠나자, 무제는 지체없이 오경박사(五經博士)를 설치하고 최초 유교식 학교인 명당(明堂)과 태학(太學)을 건립하는 등 자신의 뜻을 거침없이 실행에 옮겼다

   무제가 무제(武帝)라 불리는 이유는 그가 외치(外治) 쪽에서 거둔 눈부신 업적 때문이었다. 그는 기원전 129년부터 위청(衛靑)과 곽거병(霍去病)을 비롯한 명장들을 앞세워 흉노를 맹공격했다. 이는 큰 성공을 거두어 흉노는 고비사막 저편으로 쫓겨간다. 그런데 흉노 공략에 앞서 마음을 놓을 수 없던 무제는 고비사막 저편에 있다는 서역(西域) 나라들과 동맹을 맺고자 장건(張騫)을 파견한다. 장건은 기원전 139년에 수도 장안을 출발해 흉노의 포로가 되는 등 우여곡절을 거쳐 13년 만에 귀국한다.

 

장건에게서 대월지, 대완, 대하, 강거, 누란, 오손, 신독 등 무려 60개에 달하는 서쪽 나라의 존재를 전해 들은 무제는 “만 리에 걸쳐 국토를 넓힐 기회다” 하며 먼저 장건에게 서역 나라들을 설득해서 한나라에 조공하게 하도록 임무를 주었다. 이는 실패했으나 다시 오손과 동맹을 맺는 일로 장건을 파견했고, 이는 성공했다. 무제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서역 국가들을 세력권에 포함시키려 했는데, 특히 기원전 104년에는 이광리에게 6만 명의 군사를 주어 대완을 정복하게 했다. 이는 중국의 판도 확대에 그치지 않고, 동서간 교류의 젖줄인 비단길이 본격적으로 열림을 의미했다. 한무제 시대에 한제국은 서역만이 아니라 동서남북으로 두루 뻗어나갔다. 동쪽에서는 민월과 동월을 정복하고, 남쪽에서는 남월을 무너트렸다. 그리고 기원전 108년에는 4년간의 전쟁 끝에 왕검성을 함락시키고조선을 멸망시켰다.

 

그러나 말년에는 근심과 고민이 끊이지 않았다. 거대해진 제국을 유지하고 계속되는 전쟁 비용을 대기 위해 무제는 새로운 농업생산량 증대 기술을 도입하고, 소금과 철을 전매했으며, 물가 조절을 빌미로 균수법(均輸法)과 평준법(平準法)을 실시해 상인들의 호주머니를 긁었다. 그래도 재정은 지속적으로 모자랐는데, 무제가 대규모 건설에 취미를 붙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열여덟에 불과하던 즉위 2년째부터 자신의 능을 건설하게 했는데, 그 규모는 진시황의 여산릉에 버금갔다. 말년에는 미앙궁과 장락궁을 놔둔 채 새로 크고 화려한 건장궁을 건축하고 또 별궁을 이곳 저곳에 지었으며, 거액의 비용을 들여 태산에서 봉선(封禪) 의식을 거행했는데 천자의 위엄을 보이는 목적 외에도 그것이 불로장생과 연결된다는 속설이 작용했다고 한다.

  효무황후 위자부는 40여년동안 황후에 자리에 있었다. 그동안 여색을 좋아하는 한무제가 다른 어린 여성들과 밤을 보내는 일이 더 많았지만 그래도 위자부를 존중하고 아껴주었다고 한다. 아들인 황태자는 성격이 온화하고 공부를 좋아하였으며 얼마전에는 손주까지 보았다. 그녀는 마침내 증조할머니가 되었고 한무제는 증조할아버지가 되었다. 그들은 이대로 백년해로할 것 같아 보였다.   기원전 117년 조카인 곽거병이 죽었고  기원전 106년에는 남동생인 위청이 죽었다. 이로인해 그녀를 지켜줄 세력이 크게 줄어들어 그 기반이 흔들리고 있었다.  한무제는 여전히 그녀에게 사랑과 존중을 보여주고 있었으나 당시 젊은 여가수였던 이씨에게 푹 빠져 있었던 터라 그 권력이 이씨의 오빠 이광리에게 옮겨지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한무제는 그 스스로가 후궁에서의 음모의 결과 옥좌에 앉았기 때문인지, 옥좌를 둘러싼 음모와 유혈사태가 그치지 않았다. 기원전 122년부터 종실인 회남왕, 형산왕, 강도왕의 반역 음모가 차례로 발각되어 처형이 줄줄이 이어졌는데, 2만 명이 넘는 사람이 한 자리에서 처형되기도 했다. 기원전 91년 태자의 심부름꾼이었던 강충이 태자가 궁궐에 저주의 인형을 묻어 황제가 죽기를 기원했다고 모함했다.(강충은 다른사람들이 자신으로 인해 곤경에 처하는 모습을 보며 기뻐 어쩔 줄 모르고 자신의 힘을 그런식으로 과시하는 인물이었다. 그 때문에 전에 일하던 곳에서도 쫓겨났으나 누이가 대신의 첩이되자 그 힘으로 태자의 아래로 들어갔다.) 태자는 역모를 꾸민다는 모함을 받자, 처벌되기 전에 선수를 치고자 정말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자살했다. 태자의 아들도 죽었고 두 여동생들도 연좌되어 처형되었다. 무제는 아들이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분노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었다. 그는 마침내 태자의 모후인 위황후를 폐위시키고 이후 그녀를 처형했으며 위씨 일족과 태자의 친지들도 숱하게 처형했다. 위자부는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했던 낭군에 의해 그 목이 잘리게 되었다.

 

그러나 강충과 무녀가 모함을 했다는 조사결과가 나오자  무제는 크게 후회하여 이미 태자에게 죽은 강충의 시체를 찢어버리고 그 삼족을 모두 다 죽였다. 그리고 흉노출신의 무녀는 산채로 불에태워 죽여버렸다. 이후 아들을 그리워하는 궁궐을 세우고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2년 후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후 막내아들인 소제가 뒤를 이은 뒤 후사없이 죽자 곽광은 이부인의 아들 창읍왕을 세웠으나 한달만에 폐위시킨 후 선제를 즉위시켰는데 그는 위황후의 증손자로서 감옥에서 여죄수의 젖을 먹고 자라 목숨을 구한 뒤 민가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천한신분으로 황후에까지 오른 위자부는 한무제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여인이었다.

비록 흐르는 세월과 오해로 인해 비극으로 끝나버렸지만 그녀는 오늘날 무제를 대상으로 한

여러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으로 등장하였다.

 

 

출처:네이버 케스트 한무제편, 엔하위키 미러

댓글 6

오래 전

너무재밋어요ㅎㅎ

오래 전

감사합니다. 너무 재밌었어요 ㅎㅎ

고양고양오래 전

역사선생이 이랬으면 한 3시간은 들을듯ㅋ

너구오래 전

너무재밌어요!!!!!

잔액12억오래 전

이 밤에 역사대하소설 한 편 본거같으다. 국사시간이 잼 있었던 1인.

오래 전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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