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무소불위의 제왕적 대통령:박정희 친일군부 유신독재체제에서 권력은 대통령 한 사람에게 집중됐다. 삼권분립(三權分立)의 또 다른 주체인 입법부와 사법부는 대통령 권력의 시녀였을 뿐이다.
② 1% 대 99%의 양극화 경제 모델:중소기업과 노동자, 농민들은 피해를 보고 소수 대기업만 부유해지는 불평등한 경제구조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설계했다.
③ 민간인 사찰, 언론통제, 검열 등 조작정치:인권운동단체 프리덤 하우스는 박정희 행정부가 언론자유 5등급 국가라고 평가했다. 헝가리·유고슬라비아·케냐·수단과 같은 수준이었다. 술집에서 정부를 비판하기만 해도 잡혀간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국민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④ 굴욕적 친일외교: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장교였던 박정희는 일본군벌 출신 정치인·기업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일본군부의 실력자인 세지마 류조[瀬島龍三] 이토추상사 회장은 한일회담 당시 박정희의 멘토가 되었으며, 이후 전두환·노태우도 그에게서 조언을 구했다.
⑤ 지역주의와 색깔론:박정희 독재정권은 산업 투자와 인사 채용에서 영남 지역만을 특별 대우하면서 다른 지역의 극심한 소외감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정권 비판 세력을 모두 ‘빨갱이’로 몰았다.
˝……젊은 세대가 많이 읽는 인터넷 매체《오마이뉴스》와《프레시안》에 박정희 정권 시절의 비화를 연재할 때면 언제나 “아니 어떻게 그렇게 살았단 말인가”라는 댓글이 많았다. 요즘의 신세대는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반민주적이고 반인륜적인 행위들을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동화쯤으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런가 하면 뉴라이트 계열이 집필한 중·고교 역사교과서에는 유신독재체제마저 “국가적 과제 달성을 위한 자원동원과 집행능력을 크게 제고하는 체제”라고 미화돼 있다. 유신쿠데타를 감행한 박정희 정권의 정당화 논리가 4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대로 통용되다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일본 보수우익 계열의 역사교과서가 ‘일본의 식민통치는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왜곡하는 것과 똑같은 궤변이다.
……5·16쿠데타는 사회혼란과 당시 민주당 행정부의 무능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음모자들의 권력욕과 장래 불안이 원인이었다. 정치군인 박정희는 5·16쿠데타 10년 전인 1952년에 이미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이종찬 장군에게 ‘군사혁명’을 해야 한다고 종용했다. 오래전부터 쿠데타를 꿈꾸어오다가 4·19민중혁명 후의 소용돌이 속에서 드디어 기회를 잡은 것이다.
쿠데타의 최고 지휘자 박정희는 군정복귀를 약속했지만 그것은 기만술이었고 처음부터 목표가 1인중심 장기독재였다. 1963년 군정복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자신이 군복만 벗고 공화당을 창당해 참여한 허구적 민정이양과 1969년 삼선개헌, 그리고1972년 유신쿠데타를 함께 연결지어 분석해야 한다. 그것은 단계적으로 자신의 권력의지를 실천해가는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한 뒤 1인독재 헌법을 만들어 비상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대통령이 헌법상 아무런 근거 없이 국회를 강제 해산했기 때문에 헌정파괴였고 사실상 내란이었다. 또 대통령이 자기의 권력강화 방안을 자기가 임명한 장관들로 구성된 비상국무회의에 부쳐 의결했으니 이런 희대의 정치적 코미디가 어느 나라에 또 있겠는가? 유신헌법(維新憲法)은 당시의 기존헌법이 규정한 개헌절차를 완전히 무시한 위헌 행위의 산물이다. 좀 강하게 말하면 집권자가 자의로 만든 ‘사문서’나 다름없으며 법적으로 ‘원천 무효’라고 할 수밖에 없다.
유신독재체제는 성립 자체도 위헌이고 불법행위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 체제 아래서 자행된 국민사찰·고문·암살·린치·언론탄압과 갖가지 체제폭력으로 우리 나라의 헌정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박정희 친일군부 유신독재체제는 그의 최측근 부하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에 의해 종말을 고하는 듯했다. 그러나 유신독재체제는 박정희 피살로 청산되기는커녕 그 후 전두환·노태우·황영시·이학봉·허삼수 등의 내란으로 더 잔혹한 복고반동의 회오리를 몰아왔다. 12·12반란과 5·17쿠데타이다. 그 후 친위대 정치장교집단인 하나회가 ‘박정희 없는 박정희 독재정권’을 이어갔다. 마치 정치군인 박정희의 권력 유전자가 그 후예들에게 전염되기라도 한 것처럼 냉혹한 반민주적 헌정이 계속됐다…….˝
Ⅰ. 대한민국 헌법을 유린한 최초의 반역 5·16쿠데타
9. 5·16쿠데타 세력의 부패상
1963년 7월 5일 오전, 육군방첩대 조사실
군 수사관이 김식 대위(육사11기, 후에 민정당 국회의원)를 상대로 ‘7·6내란음모설’에 대해 참고인 조사를 벌였다.
“육군본부 주변에서도 그랬고 정규육사 장교들이 모인 자리에서 혁명주체 중 부패자들을 체포해버리자는 얘기들을 주고 받았다는데?”
김식은 육본 군수참모부에 근무했다. 7·6내란음모에 대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부터 조사지시를 받은 방첩대는 먼저 육군본부 소속 김식을 불렀다. 김식은 육사 총동창회인 북극성회 서울지회 연락책이었다. 핵심 주모자들은 모두 최고회의와 중앙정보부에 소속돼 있어 처음부터 이들을 건드리기엔 부담스러웠다. 또 방첩대로서는 이 사건에 대한 정보도 입수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중앙정보부가 박정희에게 정보보고를 한 것과 공화당 간부들이 수사를 요구한 것이 전부였다.
당시 방첩대장은 정승화 준장. 정승화는 5·16쿠데타 당시 박정희가 부사령관으로 있던 2군의 작전참모였다가 쿠데타 후 육군 방첩대장에 임명되면서 전두환·노태우와 처음으로 얽히는 인연을 갖게 된다. 방첩대는 중정으로부터 정보보고 자료를 넘겨받아 수사에 나섰다.
방첩대 수사관 앞에서 김식은 동기생들 간에 오간 얘기들을 대충 털어놓았다.
“젊은 장교로서 시국을 걱정하는 얘기를 했지요. 부정부패 척결을 부르짖고 군사혁명에 나선 사람들이 국민으로부터 의혹을 받는 일을 저질러서야 되겠습니까?”
이른바 5·16쿠데타 주체세력의 권력갈등과 부패상은 심각했고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국민여론도 들끓었다. 특히 김종필과 중앙정보부 간부들을 중심으로 공화당 사전조직에 나선 정치참여파는 정치자금 조달 때문에 더욱 의혹에 휩싸였다. 사전조직이란 다른 정치인들은 모두 정치활동금지법으로 묶어놓은 채 쿠데타 세력만 비밀리에 자신들의 정치도구가 될 공화당을 조직한 것을 말한다. 완전한 꼼수로 정치적 경쟁에서 불공정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① 구국혁명은커녕 부정축재와 내부 권력탐욕으로 이전투구
거기다 공화당 창당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 갖가지 비도덕적 이권개입도 서슴지 않았다. 권력형 부패의 효시가 된 4대 의혹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들이 주가조작으로 단기차익을 챙긴 결과 금방 증권파동이 일었고 유아기에 불과한 증권시장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관광호텔 사업자들에게 일본으로부터 도박기계인 파칭코를 수입하게 허가해주고 거기서 거액의 커미션을 챙겼다. 또 일본의 새나라 자동차를 수입하게 허가해주고 그 대가도 받았다. 아차산 산등성이에 워커힐 호텔 건설을 허가해주고 이권을 먹은 것도 그들이었다.
쿠데타 세력은 검은 돈을 공화당 창당자금으로만 쓴 것도 아니고 각기 개인적 부정축재도 했다. 누가 5·16 군사반란을 구국의 혁명이라 했던가? 대학가에서 4대 의혹 사건을 규탄하는 학생 성토대회가 전국으로 번졌다. 허울 좋은 군사혁명의 가면이 벗겨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5·16쿠데타 세력은 민주당 행정부가 무능하고 사회혼란상이 국가안보를 위협한다는 것을 거사의 명분으로 삼았다. 그러나 4·19민중혁명이 일어난 지 불과 1년 만에 혼란상을 말하는 것은 억지 트집에 불과했다. 진정한 혁명이란 17세기~18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시민혁명에서 보듯이 수십년에서 2백년까지 진행되기도 했다. 자신들의 5·16쿠데타만 해도 수차례의 이른바 ‘반혁명 사건’으로 내부 권력투쟁의 혼란상이 펼쳐졌다.
국민들이 처음에 쿠데타 주모자인 줄 알았던 5·16정변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최고회의 의장을 맡았던 장도영 중장도 박정희 중심의 육사8기 세력에 의해 숙청당했다. 또 최고회의 의원으로 건설부장관이던 박임항 소장(만주국군1기·8기특임), 최고회의 재정경제위원장이던 김동하 해군 소장(만주국군1기), 최고의원 김윤근 해병대 준장(만주국군6기·해사), 최고의원 송찬호 준장(육사5기·고사포여단장), 최고의원 박치옥 대령(육사5기·1공수여단장), 최고의원 문재준 대령(육사5기·6군단포병사령관) 등이 차례로 반혁명사건이라는 올가미가 씌워져 투옥됐다.
이처럼 5·16쿠데타는 처음부터 권력을 둘러싼 내부 알력과 음모가 격심했다. 구국의 혁명은커녕 사리사욕과 주도권 싸움이 갈수록 이전투구일 뿐이었다. 언론과 대학생들은 쿠데타 세력의 비리부패상을 고발하고, 내부에선 연이은 권력투쟁이 터져 나오는 등 그야말로 혼란상이었다. 이에 주로 정규육사 출신 젊은 장교들이 의분을 토로하고 쿠데타 세력에 대한 혁신작업을 꾸미기에 이르렀다.
5·16쿠데타 이후 일단의 젊은 장교들은 정치장교 집단인 ‘하나회’를 조직했다. 당시 젊은 영남 출신 장교들은 쿠데타 주모자 박정희 소장이 동향이었으나 그 아래서 수족 노릇을 하는 8기생들 중에 영남출신이 없는 것을 권력 접근의 장애로 여겼고, 그래서 군사반란에서 일정 역할을 하기 위하여 서클을 조직하기로 했다. 1963년 2월, 전두환 소령의 집에 모인 10명의 장교가 일심회를 형성하고 이 일심회가 한마음회로 바뀌었다가 하나회라는 명칭으로 된 것이다. 전두환·노태우·정호용·손영길·최성택 등 육사11기가 중심이었다. 이들은 주로 국가재건최고회의나 중앙정보부에 근무하면서 군정에 대한 토론회를 수시로 가졌다. 보스인 전두환은 이미 5·16정변 당시 육사생도의 지지행진을 이끌어낸 공로로 박정희의 비서실 요원으로 들어가는 등 군대 내의 박정희 친위대로서 육성되고 있었다.
② 박정희의 ‘하나회’ 보호
수사관은 됐다 싶어 김식에게 음모의 내용을 물었다.
“7월 2일 밤 노태우 집에서 정호용·노정기 등과 함께 거세 대상자 명단을 짰다는데 대개 어떤 인물들이었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때 우리는 술 마시면서 개탄이나 했지 누구를 제거한다는 그런 얘기를 한 일이 없습니다.”
수사관은 김식에게 정보보고서를 내보였다. 우선 주모자들의 이름이 소속과 함께 적혀 있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최성택·노정기, 중앙정보부의 전두환·권익현·김복동·박갑룡, 방첩대의 노태우 등이었다. 그리고 ‘7·6거사설’이라는 제목 아래 이 소문이 전파돼 중앙정보부와 공화당간부에게 입수된 경로를 도표로 그렸다.
정보내용을 들여다본 김식은 크게 놀랐다. 공화당 간부인 육사 8기 출신 김동환·신윤창·오학진·김우경 등이 정보입수자로 적혀 있었다. 이들이 군 장교들로부터 들은 소문은 “육사 출신 장교 일부가 의혹사건에 관련됐거나 정치적 분열을 일삼는 최고위원 및 공화당 간부 40여 명을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는 내용이었다.
김식은 이 소문을 완강히 부인했다. 그러자 수사관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이 사건 별 것도 아닌데 그 친구들이 난리법석을 떠는 것 아닙니까?”
김종필계 공화당 간부들이 젊은 장교들의 어설픈 음모를 빌미로 중정부장 김재춘에게 역공을 가하는 상황이었다. 하나회의 설익은 야심이 그들과 가까운 김재춘에게 올가미가 될 수 있었다. 김재춘은 육사 5기로 동기생인 정승화 방첩대장을 찾아간다.
“이 친구들이 나한테 와서 그런 얘기를 할 때 내가 경고했지. 그러나 젊은 장교들이 나라를 걱정하다가 혈기로 할 수 있는 얘기 아닌가? 혁명주체 중에 깨끗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게 문제야. 그것을 척결하려는 청년장교들의 의기는 옳다고 보네. 아까운 장교들이고 하니 경고 정도에서 관용하는 것이 좋겠어.”
정승화도 그의 말에 동감이었다. 그러나 그는 수사 책임자로서 적당한 마무리가 필요했다. 정승화는 박정희의 측근 두 사람을 불렀다. 경호대장 박종규 소령과 전속부관 손영길 소령이다. 박종규에게는 경호실 소속 노정기 대위가 이 음모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가혹한 처벌은 피해야 할 것 같다는 의견을 붙였다. 박종규가 명단을 보니 연루자들이 모두 육사11기 중 군정기구 참여파가 아닌가? 그는 정승화에게 ‘기합’ 선에서 끝내자고 제안했다. 최고회의 경호실로 돌아온 박종규는 즉각 노정기를 호출했다.
“자네 요즘 무슨 음모를 꾸미고 돌아다니나? 그러잖아도 군사정부가 시끄러운데 주제 넘는 짓으로 더 복잡한 문제를 일으키면 어떻게 될 줄 알지?”
그는 눈을 부라리며 노정기의 복부를 툭 쳤다. 노정기는 잡아뗐다.
“저희끼리 나라 걱정하는 얘기를 한 일은 있으나 그런 음모란 금시초문입니다.”
정승화는 박정희의 부관 손영길에게도 귀띔해주었다.
“자네는 이 음모자 명단에 들어 있지 않지만 모두가 가까운 동기들 아닌가? 이 일이 외부로 확대되면 또 한 번 시끄러워질 텐데….”
손영길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고 느꼈다. 그는 즉각 박정희 의장에게 직소했다. 바로 하나회가 기대했던 전속부관의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지금 방첩대에서 조사하는 것을 들으니 지나치게 과장됐습니다. 관련자들이 모두 제 동기생이고 처음부터 혁명을 지지한 장교들입니다. 혁명주체 내부가 너무 혼란스러워 각하께서 일하시기가 어렵다는 얘기들을 한 것입니다. 저희가 각하께 어떤 힘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견교환을 해왔는데 이런 분위기는 보호돼야 할 것 같습니다.”
손영길은 박정희에게 친위대로서 역할을 보호해달라고 요청한 셈이다. 박정희는 이때 쿠데타 세력 내부의 알력으로 골치를 앓고 있었다. 그는 손영길에게 일렀다.
“알았다. 아직 젊은 사람들이 다른 생각 말고 위에서 주어지는 일이나 잘하라고 해.”
이것으로 더 이상의 수사나 처벌은 없었다. 하나회계가 주도한 어설픈 야심과 14기 행동파의 직설적 발언으로 사전에 노출된 7·6음모는 이렇게 해프닝에 그쳤다.
③ 영남 세력을 구축하려는 하나회
기묘한 인연으로 12·12 군사반란에서 합수부장 전두환과 육참총장 정승화는 16년 전의 입장이 뒤바뀐다. 그것은 또한 전두환의 배은의 기록이기도 하다. 1963년 7월 전두환·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은 친위 쿠데타를 시도했다. 그것은 그들이 소령과 대위 때 하극상 반란 습성이 이미 노랗게 싹트고 있었다는 표시였다.
이들은 5·16쿠데타 세력의 내부 권력암투와 부패비리 사건에 대한 국민여론의 비난을 명분으로 삼았다. 당시는 하나회가 완전히 조직화하기 전으로 정규육사 출신 동창회인 북극성회를 이용하려 시도했다. 이들은 증권시장 조작과 파칭코 수입 등 4대 의혹 사건이 터지자 정치에 나서기 위해 공화당 창당을 주도하던 김종필 등 8기 그룹을 연금하는 일종의 궁정 쿠데타를 논의했다.
5·16쿠데타에 가담한 8기 그룹의 면면을 보면 하나회 못지않게 권력의지가 강했다. 6·25남북전쟁이 터지기 직전 임관한 8기는 1263명이었으며 특과까지 합하면 1345명에 달했다. 장교임관 그룹 중에서 전무후무하게 많은 수였다. 그래선지 8기는 군부와 정계, 그리고 권력기관에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했다.
〈한국 사회 후진화의 원인 박정희 친일군부 유신독재체제의 유전자〉9
▷ 김재홍(金在洪)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 대한민국의 경제·정치·사회·문화·역사적 발전을 저해한 박정희 독재정권의 잔재들
① 무소불위의 제왕적 대통령:박정희 친일군부 유신독재체제에서 권력은 대통령 한 사람에게 집중됐다. 삼권분립(三權分立)의 또 다른 주체인 입법부와 사법부는 대통령 권력의 시녀였을 뿐이다.
② 1% 대 99%의 양극화 경제 모델:중소기업과 노동자, 농민들은 피해를 보고 소수 대기업만 부유해지는 불평등한 경제구조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설계했다.
③ 민간인 사찰, 언론통제, 검열 등 조작정치:인권운동단체 프리덤 하우스는 박정희 행정부가 언론자유 5등급 국가라고 평가했다. 헝가리·유고슬라비아·케냐·수단과 같은 수준이었다. 술집에서 정부를 비판하기만 해도 잡혀간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국민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④ 굴욕적 친일외교: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장교였던 박정희는 일본군벌 출신 정치인·기업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일본군부의 실력자인 세지마 류조[瀬島龍三] 이토추상사 회장은 한일회담 당시 박정희의 멘토가 되었으며, 이후 전두환·노태우도 그에게서 조언을 구했다.
⑤ 지역주의와 색깔론:박정희 독재정권은 산업 투자와 인사 채용에서 영남 지역만을 특별 대우하면서 다른 지역의 극심한 소외감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정권 비판 세력을 모두 ‘빨갱이’로 몰았다.
˝……젊은 세대가 많이 읽는 인터넷 매체《오마이뉴스》와《프레시안》에 박정희 정권 시절의 비화를 연재할 때면 언제나 “아니 어떻게 그렇게 살았단 말인가”라는 댓글이 많았다. 요즘의 신세대는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반민주적이고 반인륜적인 행위들을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동화쯤으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런가 하면 뉴라이트 계열이 집필한 중·고교 역사교과서에는 유신독재체제마저 “국가적 과제 달성을 위한 자원동원과 집행능력을 크게 제고하는 체제”라고 미화돼 있다. 유신쿠데타를 감행한 박정희 정권의 정당화 논리가 4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대로 통용되다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일본 보수우익 계열의 역사교과서가 ‘일본의 식민통치는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왜곡하는 것과 똑같은 궤변이다.
……5·16쿠데타는 사회혼란과 당시 민주당 행정부의 무능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음모자들의 권력욕과 장래 불안이 원인이었다. 정치군인 박정희는 5·16쿠데타 10년 전인 1952년에 이미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이종찬 장군에게 ‘군사혁명’을 해야 한다고 종용했다. 오래전부터 쿠데타를 꿈꾸어오다가 4·19민중혁명 후의 소용돌이 속에서 드디어 기회를 잡은 것이다.
쿠데타의 최고 지휘자 박정희는 군정복귀를 약속했지만 그것은 기만술이었고 처음부터 목표가 1인중심 장기독재였다. 1963년 군정복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자신이 군복만 벗고 공화당을 창당해 참여한 허구적 민정이양과 1969년 삼선개헌, 그리고1972년 유신쿠데타를 함께 연결지어 분석해야 한다. 그것은 단계적으로 자신의 권력의지를 실천해가는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한 뒤 1인독재 헌법을 만들어 비상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대통령이 헌법상 아무런 근거 없이 국회를 강제 해산했기 때문에 헌정파괴였고 사실상 내란이었다. 또 대통령이 자기의 권력강화 방안을 자기가 임명한 장관들로 구성된 비상국무회의에 부쳐 의결했으니 이런 희대의 정치적 코미디가 어느 나라에 또 있겠는가? 유신헌법(維新憲法)은 당시의 기존헌법이 규정한 개헌절차를 완전히 무시한 위헌 행위의 산물이다. 좀 강하게 말하면 집권자가 자의로 만든 ‘사문서’나 다름없으며 법적으로 ‘원천 무효’라고 할 수밖에 없다.
유신독재체제는 성립 자체도 위헌이고 불법행위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 체제 아래서 자행된 국민사찰·고문·암살·린치·언론탄압과 갖가지 체제폭력으로 우리 나라의 헌정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박정희 친일군부 유신독재체제는 그의 최측근 부하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에 의해 종말을 고하는 듯했다. 그러나 유신독재체제는 박정희 피살로 청산되기는커녕 그 후 전두환·노태우·황영시·이학봉·허삼수 등의 내란으로 더 잔혹한 복고반동의 회오리를 몰아왔다. 12·12반란과 5·17쿠데타이다. 그 후 친위대 정치장교집단인 하나회가 ‘박정희 없는 박정희 독재정권’을 이어갔다. 마치 정치군인 박정희의 권력 유전자가 그 후예들에게 전염되기라도 한 것처럼 냉혹한 반민주적 헌정이 계속됐다…….˝
Ⅰ. 대한민국 헌법을 유린한 최초의 반역 5·16쿠데타
9. 5·16쿠데타 세력의 부패상
1963년 7월 5일 오전, 육군방첩대 조사실
군 수사관이 김식 대위(육사11기, 후에 민정당 국회의원)를 상대로 ‘7·6내란음모설’에 대해 참고인 조사를 벌였다.
“육군본부 주변에서도 그랬고 정규육사 장교들이 모인 자리에서 혁명주체 중 부패자들을 체포해버리자는 얘기들을 주고 받았다는데?”
김식은 육본 군수참모부에 근무했다. 7·6내란음모에 대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부터 조사지시를 받은 방첩대는 먼저 육군본부 소속 김식을 불렀다. 김식은 육사 총동창회인 북극성회 서울지회 연락책이었다. 핵심 주모자들은 모두 최고회의와 중앙정보부에 소속돼 있어 처음부터 이들을 건드리기엔 부담스러웠다. 또 방첩대로서는 이 사건에 대한 정보도 입수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중앙정보부가 박정희에게 정보보고를 한 것과 공화당 간부들이 수사를 요구한 것이 전부였다.
당시 방첩대장은 정승화 준장. 정승화는 5·16쿠데타 당시 박정희가 부사령관으로 있던 2군의 작전참모였다가 쿠데타 후 육군 방첩대장에 임명되면서 전두환·노태우와 처음으로 얽히는 인연을 갖게 된다. 방첩대는 중정으로부터 정보보고 자료를 넘겨받아 수사에 나섰다.
방첩대 수사관 앞에서 김식은 동기생들 간에 오간 얘기들을 대충 털어놓았다.
“젊은 장교로서 시국을 걱정하는 얘기를 했지요. 부정부패 척결을 부르짖고 군사혁명에 나선 사람들이 국민으로부터 의혹을 받는 일을 저질러서야 되겠습니까?”
이른바 5·16쿠데타 주체세력의 권력갈등과 부패상은 심각했고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국민여론도 들끓었다. 특히 김종필과 중앙정보부 간부들을 중심으로 공화당 사전조직에 나선 정치참여파는 정치자금 조달 때문에 더욱 의혹에 휩싸였다. 사전조직이란 다른 정치인들은 모두 정치활동금지법으로 묶어놓은 채 쿠데타 세력만 비밀리에 자신들의 정치도구가 될 공화당을 조직한 것을 말한다. 완전한 꼼수로 정치적 경쟁에서 불공정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① 구국혁명은커녕 부정축재와 내부 권력탐욕으로 이전투구
거기다 공화당 창당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 갖가지 비도덕적 이권개입도 서슴지 않았다. 권력형 부패의 효시가 된 4대 의혹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들이 주가조작으로 단기차익을 챙긴 결과 금방 증권파동이 일었고 유아기에 불과한 증권시장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관광호텔 사업자들에게 일본으로부터 도박기계인 파칭코를 수입하게 허가해주고 거기서 거액의 커미션을 챙겼다. 또 일본의 새나라 자동차를 수입하게 허가해주고 그 대가도 받았다. 아차산 산등성이에 워커힐 호텔 건설을 허가해주고 이권을 먹은 것도 그들이었다.
쿠데타 세력은 검은 돈을 공화당 창당자금으로만 쓴 것도 아니고 각기 개인적 부정축재도 했다. 누가 5·16 군사반란을 구국의 혁명이라 했던가? 대학가에서 4대 의혹 사건을 규탄하는 학생 성토대회가 전국으로 번졌다. 허울 좋은 군사혁명의 가면이 벗겨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5·16쿠데타 세력은 민주당 행정부가 무능하고 사회혼란상이 국가안보를 위협한다는 것을 거사의 명분으로 삼았다. 그러나 4·19민중혁명이 일어난 지 불과 1년 만에 혼란상을 말하는 것은 억지 트집에 불과했다. 진정한 혁명이란 17세기~18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시민혁명에서 보듯이 수십년에서 2백년까지 진행되기도 했다. 자신들의 5·16쿠데타만 해도 수차례의 이른바 ‘반혁명 사건’으로 내부 권력투쟁의 혼란상이 펼쳐졌다.
국민들이 처음에 쿠데타 주모자인 줄 알았던 5·16정변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최고회의 의장을 맡았던 장도영 중장도 박정희 중심의 육사8기 세력에 의해 숙청당했다. 또 최고회의 의원으로 건설부장관이던 박임항 소장(만주국군1기·8기특임), 최고회의 재정경제위원장이던 김동하 해군 소장(만주국군1기), 최고의원 김윤근 해병대 준장(만주국군6기·해사), 최고의원 송찬호 준장(육사5기·고사포여단장), 최고의원 박치옥 대령(육사5기·1공수여단장), 최고의원 문재준 대령(육사5기·6군단포병사령관) 등이 차례로 반혁명사건이라는 올가미가 씌워져 투옥됐다.
이처럼 5·16쿠데타는 처음부터 권력을 둘러싼 내부 알력과 음모가 격심했다. 구국의 혁명은커녕 사리사욕과 주도권 싸움이 갈수록 이전투구일 뿐이었다. 언론과 대학생들은 쿠데타 세력의 비리부패상을 고발하고, 내부에선 연이은 권력투쟁이 터져 나오는 등 그야말로 혼란상이었다. 이에 주로 정규육사 출신 젊은 장교들이 의분을 토로하고 쿠데타 세력에 대한 혁신작업을 꾸미기에 이르렀다.
5·16쿠데타 이후 일단의 젊은 장교들은 정치장교 집단인 ‘하나회’를 조직했다. 당시 젊은 영남 출신 장교들은 쿠데타 주모자 박정희 소장이 동향이었으나 그 아래서 수족 노릇을 하는 8기생들 중에 영남출신이 없는 것을 권력 접근의 장애로 여겼고, 그래서 군사반란에서 일정 역할을 하기 위하여 서클을 조직하기로 했다. 1963년 2월, 전두환 소령의 집에 모인 10명의 장교가 일심회를 형성하고 이 일심회가 한마음회로 바뀌었다가 하나회라는 명칭으로 된 것이다. 전두환·노태우·정호용·손영길·최성택 등 육사11기가 중심이었다. 이들은 주로 국가재건최고회의나 중앙정보부에 근무하면서 군정에 대한 토론회를 수시로 가졌다. 보스인 전두환은 이미 5·16정변 당시 육사생도의 지지행진을 이끌어낸 공로로 박정희의 비서실 요원으로 들어가는 등 군대 내의 박정희 친위대로서 육성되고 있었다.
② 박정희의 ‘하나회’ 보호
수사관은 됐다 싶어 김식에게 음모의 내용을 물었다.
“7월 2일 밤 노태우 집에서 정호용·노정기 등과 함께 거세 대상자 명단을 짰다는데 대개 어떤 인물들이었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때 우리는 술 마시면서 개탄이나 했지 누구를 제거한다는 그런 얘기를 한 일이 없습니다.”
수사관은 김식에게 정보보고서를 내보였다. 우선 주모자들의 이름이 소속과 함께 적혀 있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최성택·노정기, 중앙정보부의 전두환·권익현·김복동·박갑룡, 방첩대의 노태우 등이었다. 그리고 ‘7·6거사설’이라는 제목 아래 이 소문이 전파돼 중앙정보부와 공화당간부에게 입수된 경로를 도표로 그렸다.
정보내용을 들여다본 김식은 크게 놀랐다. 공화당 간부인 육사 8기 출신 김동환·신윤창·오학진·김우경 등이 정보입수자로 적혀 있었다. 이들이 군 장교들로부터 들은 소문은 “육사 출신 장교 일부가 의혹사건에 관련됐거나 정치적 분열을 일삼는 최고위원 및 공화당 간부 40여 명을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는 내용이었다.
김식은 이 소문을 완강히 부인했다. 그러자 수사관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이 사건 별 것도 아닌데 그 친구들이 난리법석을 떠는 것 아닙니까?”
김종필계 공화당 간부들이 젊은 장교들의 어설픈 음모를 빌미로 중정부장 김재춘에게 역공을 가하는 상황이었다. 하나회의 설익은 야심이 그들과 가까운 김재춘에게 올가미가 될 수 있었다. 김재춘은 육사 5기로 동기생인 정승화 방첩대장을 찾아간다.
“이 친구들이 나한테 와서 그런 얘기를 할 때 내가 경고했지. 그러나 젊은 장교들이 나라를 걱정하다가 혈기로 할 수 있는 얘기 아닌가? 혁명주체 중에 깨끗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게 문제야. 그것을 척결하려는 청년장교들의 의기는 옳다고 보네. 아까운 장교들이고 하니 경고 정도에서 관용하는 것이 좋겠어.”
정승화도 그의 말에 동감이었다. 그러나 그는 수사 책임자로서 적당한 마무리가 필요했다. 정승화는 박정희의 측근 두 사람을 불렀다. 경호대장 박종규 소령과 전속부관 손영길 소령이다. 박종규에게는 경호실 소속 노정기 대위가 이 음모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가혹한 처벌은 피해야 할 것 같다는 의견을 붙였다. 박종규가 명단을 보니 연루자들이 모두 육사11기 중 군정기구 참여파가 아닌가? 그는 정승화에게 ‘기합’ 선에서 끝내자고 제안했다. 최고회의 경호실로 돌아온 박종규는 즉각 노정기를 호출했다.
“자네 요즘 무슨 음모를 꾸미고 돌아다니나? 그러잖아도 군사정부가 시끄러운데 주제 넘는 짓으로 더 복잡한 문제를 일으키면 어떻게 될 줄 알지?”
그는 눈을 부라리며 노정기의 복부를 툭 쳤다. 노정기는 잡아뗐다.
“저희끼리 나라 걱정하는 얘기를 한 일은 있으나 그런 음모란 금시초문입니다.”
정승화는 박정희의 부관 손영길에게도 귀띔해주었다.
“자네는 이 음모자 명단에 들어 있지 않지만 모두가 가까운 동기들 아닌가? 이 일이 외부로 확대되면 또 한 번 시끄러워질 텐데….”
손영길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고 느꼈다. 그는 즉각 박정희 의장에게 직소했다. 바로 하나회가 기대했던 전속부관의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지금 방첩대에서 조사하는 것을 들으니 지나치게 과장됐습니다. 관련자들이 모두 제 동기생이고 처음부터 혁명을 지지한 장교들입니다. 혁명주체 내부가 너무 혼란스러워 각하께서 일하시기가 어렵다는 얘기들을 한 것입니다. 저희가 각하께 어떤 힘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견교환을 해왔는데 이런 분위기는 보호돼야 할 것 같습니다.”
손영길은 박정희에게 친위대로서 역할을 보호해달라고 요청한 셈이다. 박정희는 이때 쿠데타 세력 내부의 알력으로 골치를 앓고 있었다. 그는 손영길에게 일렀다.
“알았다. 아직 젊은 사람들이 다른 생각 말고 위에서 주어지는 일이나 잘하라고 해.”
이것으로 더 이상의 수사나 처벌은 없었다. 하나회계가 주도한 어설픈 야심과 14기 행동파의 직설적 발언으로 사전에 노출된 7·6음모는 이렇게 해프닝에 그쳤다.
③ 영남 세력을 구축하려는 하나회
기묘한 인연으로 12·12 군사반란에서 합수부장 전두환과 육참총장 정승화는 16년 전의 입장이 뒤바뀐다. 그것은 또한 전두환의 배은의 기록이기도 하다. 1963년 7월 전두환·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은 친위 쿠데타를 시도했다. 그것은 그들이 소령과 대위 때 하극상 반란 습성이 이미 노랗게 싹트고 있었다는 표시였다.
이들은 5·16쿠데타 세력의 내부 권력암투와 부패비리 사건에 대한 국민여론의 비난을 명분으로 삼았다. 당시는 하나회가 완전히 조직화하기 전으로 정규육사 출신 동창회인 북극성회를 이용하려 시도했다. 이들은 증권시장 조작과 파칭코 수입 등 4대 의혹 사건이 터지자 정치에 나서기 위해 공화당 창당을 주도하던 김종필 등 8기 그룹을 연금하는 일종의 궁정 쿠데타를 논의했다.
5·16쿠데타에 가담한 8기 그룹의 면면을 보면 하나회 못지않게 권력의지가 강했다. 6·25남북전쟁이 터지기 직전 임관한 8기는 1263명이었으며 특과까지 합하면 1345명에 달했다. 장교임관 그룹 중에서 전무후무하게 많은 수였다. 그래선지 8기는 군부와 정계, 그리고 권력기관에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했다.
{계속}